교황 말씀 1967년 11월호 (제 3호)

사도직을 위한 교황 지시

편집실

신앙의 중요성

교황은 한 해를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한 해로 봉헌하실 것을 결정하고 이에 따라 일련의 담화를 통해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그 중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예수 공현 축일에 교황은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더욱 더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지금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께로 쏠리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그 분을 모르기 때문에, 믿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 인류에게 그 분을 알려 주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고 그 분이 계속 이들 사이에 현존하시도록 주선해야 할 사명을 띤 교회는, 바로 그 분 자신의 현현(顯現)이다. 그 뿐 아니라 교회만이 그 분의 가르침을 유권적으로 믿을 수 있게 해석한다. "하느님의 말씀올 유권적으로 해석할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의 권위를 행사하는 교회의 생활한 교도권에게 위탁되었다”(p. 10)

교리상의 탈선

그런데 몇몇 가톨릭 신학자들까지 한 몫낀 일부 사람들은 "신자 단체를 주교나 교황의 교도직능보다 위에 두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의 내적 안정과 세상의 복음화라는 그의 사명을 위협하는 자들이다” (P.11). 다른 방향의 탈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혹자는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가 신앙에 관해서는 그 결정문 중 단 한 장(章)에서도 따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곡해해서 신학적 정의들은 ‘‘이제 낡은 이야기’’라고 (p.13) 내세우는가 하면 이번 공의회를 가리켜 "구식 도그마와 거기 따른 처벌 규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볼 수 있다”(p.13) 고 말하고, 따라서 신앙은 "이를 규정할 교도권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외적 규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p.13)고 주장한다.



교도권의 역할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교황은 교회의 교도권이 그리스도에게 대한 신앙을 전수하고 이를 유권적으로 해석하며 그의 참뜻을 지켜 나가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자신이 세우신 것임을 상기시키신다. "교회의 위계적 교도권을 존중할 때, 우리는 주님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공경하는 것이다”(p.11)

재일치 운동

교황은 일치 주간을 맞이해서,“그리스도교 신자들 간에 일치를 회복하는 문제는 공의회의 주 목적 중 하나였음” (p.14)을 상기하시면서,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이와 같이 중대하면서도 "미묘하고 까다로운”(p.14)과업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비가톨릭에 대한 어거지 적응 내지 "모방주의”의 기분에 들떠서 "가톨릭 신앙의 순수성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면, 일치는 커녕 타협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였다(p.15)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길은 교회를 거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교회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도 인정하지 않는다”(p.8).

1. 교회를 거쳐서 그리스도를 알기 (1967. 1. 4)

《그리스도를 속 깊이 알라》

우리는 성탄 때와 같이, 예수 공현 축일에도 그리스도를 알 기회를 가진다. 그 분을 안다는 것은 주님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좀 더 깊고 본질적이며 신비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다. 이 앎은 이를 받아 들이는 사람들과, 약간 알면서도 이를 일부러 배척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누룩(酵素)을 넣어 준다. 그리고 이 앎은 그 안에서 쉽지만 복잡한 지식의 전진운동이 진행되어,마침내 신앙의 행위에까지 이르게 하는 신학적 지식이다.

《강생과 온 누리를 비추는 그 광채》

이 문제를 다루자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이므로, 오늘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강생 사실로부터 전 인류의 지성에게 부과된 의무를 반성해 볼 것만을 그대들에게 부탁하겠다.이 사실을 연구하고 반성하며, 온 세상 특히 정신의 세계를 비추는 그 감추었으면서도 놀라운 광채를 바라보기 바란다는 말이다.

《인류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냐고 물어온다》

우리는 만사를 제쳐놓고 먼저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 분이 누구신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 문제야말로 복음 성경이 간직한 중심 테마이다. 사고하고 모색하며 고통에 시달리는 인류는 오늘날까지라기보다,그 어느 때보다도 현대에 와서, 그 의식 속에 이 문제를 뚜렷하게 안고 있다. 현대인은 자기들을 끌려들게 하면서도 어딘지 불안감을 주고 만사를 쉽게 해명해 줄 것 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이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일종의 숨은 비밀을 그리스도에게서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당신 제자들에게 던지셨던 질문을 놓고,오늘도 격렬하면서도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뇨 ? ” (마태오 16,13).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모인 이 기회에 그 분의 엄청나고 진실되며 뚜렷한 대답을 기억해 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이다. 그것은 아직도 본문 그대로 권위 있는 진리를 담고 우리 가슴에 울려 온다. "스승은 그리스도시요 생활하신 천주의 성자시니이다” (마태오 16)



《신앙: 겸손한 사람들에게 내려진 계시》

그 후 세기를 두고 베드로의 특권이 될 이 대답은 계시를 통해서 받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계시 자체는 물론 보편적인 것이지만, 실제로 이를 받는 사람은 겸손한 이들 뿐일 것이다. 즉 이것은 인간의 지식보다 뛰어난 하늘 나라의 지식을 찾아 얻기로 나서서,그 제자가 될 것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만이 얻는 계시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들 사이에 계시면서 어느 날 성부와 담화하시는 장엄한 순간에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성부여 천지의 주여,너 박학하고 지혜로운 자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미천한 자에게는 드러내셨으니 네게 찬미하나이다”(마태오 11, 25).

《예수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학교》

우리는 교회가 오랜 세월에 걸쳐 연구하고 묵상한 결과, 그리스도께 대한 신화적 교리의 충만하고 안전한 정식(Formula)을 동방과 서방의 양교회와 일치해 있는 베드로의 후계자들에게서 찾아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자기가 지금 지역적으로 또 정신적으로까지,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지를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더 없이 좋은 장소인 이곳은 우리의 배경이 가장 정통적임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어떤 뜻에서는 아주 유일한 지역인 것이다. 예수 공현의 중심이 여기 있다. 따라서 신앙과 거기서 흘러 나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려면, 양순하고 겸손하며 인간미가 흐르면서도 우리의 심령에 무한을 불러일으키는 명상에 잠긴 그 엄숙한 모습, 그리하여 끝없이 흠숭과 감사를 드리고 싶어지는 그 분의 얼굴을 뵈오려면, 모든 사람은 모름지기 여기에서 자기들의 첫 학교를 발견하고 훈련장을 찾아 얻으며 모든 것의 원천올 볼 줄 알아야 한다.

《교회를 통하여 알려진 그리스도》

우리는 가톨릭 교회가 보존하고 전파하는 그리스도론에서 제시하는대로 그리스도의 신적 및 인간적 실재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대들은, 그리스도를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길은 교회를 거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누가 교회를 부정하면 그리스도도 인정하지 않는다(Volk)고 말한 어떤 현대인의 말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2. 하느님 말씀의 유권적 해석자인 교도권 (1967. 1. 11)

《교회의 최상 교도권》

여기(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일어나는 문제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이 신앙 문제다. 이곳에서 선포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어떤 태도로 받아 들이느냐는 점을 놓고,여기서는 신앙이 일종의 신문을 당하게 되는 셈이다. 여기 사도 성 베드로의 후계자가 있는데 나는 이를 믿는가? 여기서는 주님의 음성이 사도들을 통해서 되풀이되고 설명되며 응용되고 변호된다. 교회의 최상 교도권이 가장 권위 있는 교좌에서 그의 제일 중대한 기능 중 하나인 교도직능을 행사하고 있다. 교도라 해서 아무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해석하고, 그 참뜻을 지켜가면서 특수한 경우에 필요하다면 일정한 의식하에 무류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교도권의 권위와 사명》

교황을 만나보기 위해서 이곳에 모여 드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생각컨대 그것은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의 교도권을 대할 때에 공통적으로 느끼는 내적 인상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한다. 즉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는 신뢰심이다. 신자들은 주께서 사도들에게 당신 친히 가르쳐 주신 바를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라는 명령과 권위를 주셨음을 알고 있으며, 당신의 말씀을 계속 후세에 전할 것을 그들에게 명하신 사실도 알고 있다. 그들은 또한 이 말씀이 구속계획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말씀을 받아 들이는 행위 즉 신앙이 하느님 나라의 복락에 들기 위해서는 바탕이 되는 조건임을 알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우리와 하느님과의 사이에 놓여 있는 초자연적 관계를 둘러싼 "모든 진리” (요한 16,13)를 사도들과 교회에 가르쳐 주시는, 성신의 신비적이고 효과적인 도움 없이는 신앙을 전하는 일은 이루어질 수 없는 과업임을 잘 알고 있다. 또 이 신앙의 전달이라는 과업이 하느님께서 주신 메시지의 뜻을 명백하고 변치 않게 보장해 주는 굳건한 충실성, 곧 성전을 통해서 수행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이 그 착하신 배려로써,계시를 들을 수 있게 선포하고 간직하며, 인류에게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설정하신, 인간적이고 위계적인 조직체 즉 신비스럽고 놀라운 제도 안에 자기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안다. 누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거저 베푸시는 그 분과의 상통에 있어서도,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거기에 대한 협력자로서, 도구로서,또 그 분의 사랑을 나타내는 신호로서 반드시 인간을 요구하게 마련하신 하느님 계획의 일반적 개념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느님 말씀의 해석자》

객관적으로 확실한 신앙을 찾아 얻기까지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본 사람은 교회의 교도권을 만났을 때,당신의 구원에 관한 메시지를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생활한 기관이며 자격을 갖춘 제도에 위탁하셨음을 보고,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해서 충심으로 감사의 정을 느낀다. 그는 이제 권위 있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실상 그 목소리는 새 진리를 밝히지도 않고 성서보다 우월한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비록 성서가 대변자와 사도의 임무를 수행하는 교도권에서 나왔다고는 해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거기에 종속되어 충실히 이를 반향하고 틀림 없이 해석한다. 이 감사의 정에는 평화와 광명이 따르며, 확실하고 보람찬 이 교리의 바탕을 묵상하여 이를 더욱 잘 알아 보고 싶은 원의가 일어 난다.

《교도권에 대한 불신》

교회 교도권의 최상 교좌에 와서 그대들이 느끼는 것도 이와 똑 같은 내적 체험이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그대들 모두가 정말 그렇게 느끼는가? 섭섭한 일이지만 모두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사람 중의 일부와 교회에 대해서 다소 충실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 또 교회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 주위를 서성대는 사람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교도권을 꺼려하고 불신하는 태도로 바라보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교도권이「신자들 간의 영교 (communion))에 대한 무류성을 띤 믿음」을 인준하는 것으로나 그 주 기능을 삼았으면 좋겠다는 듯한 태도들이다. 교회의 교도권을 반대하는 교설에 현혹된 또 다른 사람들은, 신자들이 자기네들로서는 감도를 받노라고,쉽사리 주장하는 각자의 직관에 따라,성서를 자유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사람마다 자기 멋대로 꾸며가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대단히 쉬울 것 같지만,실상은 그 진정성과 안전성을 잃고 참된 진리를 상실하여,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준다는 문제가 그렇게 초급한 일로 되지도 않는다. 즉 신앙은 그때에 각자의 개인적 견해에 불과한 것이 되고만다.어떤 현대 신학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현대인의 주관주의의 결과,계시로 밝혀져서 성전 안에 전해 내려오는 진리들은, 만일 그 의미를 저마다 그럴듯 하다고 생각 되는대로 끌어다 붙일 수 있는 권한이 각 개인에게 있고, 하느님의 말씀이 그를 향하여 또 그를 통해서 주어진 그 몸(교회)에 있지 않다면,계시 진리의 객관성은 사라지고 말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통해서, 교회에게 주어졌으며,특별히 이 몸 안에 들어 있는 자들 즉 각자가 전교해야 한다는 계명을 받음으로써, 전 인류에게 대한 책임을 지게 된 신자들에게 이 말씀은 주어졌다” (Biuyer).

《공의회의 가르침》

이에 대해서 공의회는 교회와 같이 오랜 가르침을 하나 상기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것이 기록된 것이든 성전으로 전해 오는 것이든 간에, 이틀 유권적으로 해석할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의 권위를 행사하는 교회의 생활한 교도권에만 위탁되었다.

사랑하는 아들이여,이제 그대들은 교회의 교도권이 맡은 책임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알 것이며, 이 책임을 정확히 또 유효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자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기도와 양순한 태도와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며 아울러 조언과 신뢰가 요망되는지를 깨달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대들이 교황을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나도 그대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강복하는 바이다.

3. 위험한 사상적 동향 (1967. 2. 22)

교황의 교도권은,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고 섭리적인 교회 교도권의 가장 권위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그대들이 잘 알고 있듯이,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자칭 가톨릭이라 하면서도,성서의 가르침과 최근 공의회에서 공공연하게 인준한 교리를 무시하고,신앙의 진리를 규범적으로 정식화하는 일에 있어서 신자 단체가 주교나 로마 교황의 교도직능보다 우월한 권한을 갖는다는 위험한 사상적 동향들이 나타났다. 이런 사상적 움직임들은 교회의 정통 개념을 위해서나 그의 내적 안전을 위해서,또 세상의 복음화라고 하는 그의 사명을 위해서 중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받드는 유일한 스승은 당신 스스로 누차에 걸쳐서 그렇게 불리우기를 요구하셨던(마태오 23, 8; 요한 13,14) 그리스도시다. 성부를 계시하는 말씀도(마테오 11,27) 우리를 해방시켜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진리도 (요한8,32) 그 분한테서만 나오고,당신 교회 안에 신앙과 사랑을 길러주시는 성신도 그 분한테서만 오신다. 그 뿐 아니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당신의 생각과 뜻을 권위 있게 또 확실히 전할 명령을 내리심으로써,당신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할 기구를 세우시고자 하신 분 역시 그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의 위계적 교도권을 존중할 때,우리는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것이고,그 분께서 당신 교회를 위해서 설립하신 여러 직능 사이의 놀라운 균형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러 직능 사이의 이와 같은 균형으로 인해서,교회는 계시 진리와 신앙의 단일성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소명이 정통에 속한다는 의식과 자신이 항상 하느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오는 겸손, 또 교회를 하나의 유기적 신비체로 뭉칠 수 있게 하며 복음을 굳세게 증거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 주는 애덕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청컨대,주께서는 우리 시대의 간절한 요구를 굽어 살피사,당신 친히 마련하신 교회 교도권에 대하여 사랑과 신뢰에 차며 자녀다운 존경을 보존케 하시고,이를 더욱 증가시켜 주시기 바라나이다.

4. 공의회와 신앙의 중요성 (1967. 3. 8)

《신앙을 강화하기 위한 교황의 노력》

그대들이 지금 참석하고 있는 이 공식 회견이 각자의 가톨릭적 신앙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실상 이 외에 무슨 더 좋은 선물을 우리가 그대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나는 그대들이 종교,더 정확히 말해서 신앙에 대하여 마치 폭풍을 만난 바다와 같은 현대의 정신구조에 둘러싸여,각자의 마음에 크나 큰 불안을 안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대들이 이곳을 향해서 모여들 때에는,정신의 고요와 종교적 안도감을 맛볼 수 있는 한 순간, 용기를 북돋아 주는 신앙의 위력을 속 깊이 체험하고 그 안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한때를 기대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여기 고요한 대피처가 있다. 굳건한 육지가 있다. 우리의 축복과 기원이 그대들에게 이 복되고 확고한 위안을 얻어 주기 바란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사도직은 우리에게 한가지 의무와 권한을 부여한다. 우리가 앞으로 닥쳐올 베드로와 바오로 양위 사도들의 순교 천 구백년 기념제를 선포한 것도 하느님의 백성 전체에게 이 최상의 혜택을 고루 펴 주려는 뜻에서였다. 그 때까지는, 공의회를 치룬 교회 전체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넘겨받은 교리의 보고(寶庫)를 연구하고 재삼 음미하는, 요즈음의 시기에 대단히 적절한 선물 한 가지를 그대들에게 선사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신앙에 관해서 공의회가 표현한 사상을 고찰해 보자는 것이다.

《신앙에 관한 공의회들의 교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에 관한 교리는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사람은, 이번의 공의회가 과거의 여러 공의회들과는 달리,신앙에 관한 결정문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즉시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아를르의 주교 성 체사리오께서 주관하신 제2차 오랑쥬 주료회의(529, 일명 Voncilium Arausicanum)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그 것은 정식 공의회는 아니었지만,그때에 논의되었던 변증신학과 기타 여러 가지 문제들과 외화 신앙에 필요한 은총 문제를 놓고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설을 따라가면서 가르친 교리들로 보아,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회의였는데,그 때의 가르침들을 보니파시오 2세 교황이 재가했던 것이다 (cf. Mansim VIII, 714,735).



우리는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신앙에

관한 가르침을 잊을 수 없는데, 특히 신앙이 사랑(Denz. Schoen. 1559 (819)과 성사적 은총(同 1561-1566 (821-826))으로써 완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밝힌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후 제 1 차 바티칸 공의회는 유명한 헌장 Dei Filius (1870)에서 신앙에 관해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3장과 4장은 중요하며, 여기에서는 신앙의 행위에 있어서 은총과 함께 작용하는 지성과 의지의 역할을 자세히 설명하고, 아울러 신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를 밝혀 주고 있다(同 3008-3020 (1789-1900)). 이런 가르침들은 신학, 호교학, 또는 영성(靈性)을 위해서 뿐 아니라 교회의 실제적 사목 활동을 연구하기 위해서도, 오늘날까지 끊임 없는 탐구와 토론의 대상이 되어 왔다(cf. R. Aubert, Questioni attuali introno all`atto difede in Problemi e Orientamenti di Teoldomm. Vol. II 655 s)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오해》

지금까지도 신앙 문제는 논쟁의 촛점이 되어 있으며 종교의 생명력을 좌우하는 중심 문제로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2 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 장(章)에서도 특별히 취급한 것을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으니, 이는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이 생략(그들의 주장대로)이 이번 공의회 프로그램의 한 조항, 즉 교리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정식 판정은 피하기로 한 결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교리를 정의하는 일은 가톨릭이 과거에 항용 썼던 교육 방식들로서 지금은 구식이 되어 버린 것이며, 이 점 이번 공의회는 캐캐묵은 도그마와 거기 따른 처벌 규정으로

부터의 한 가지 해방으로 볼 수 있다고 억단(騰斷)하게 되었다. 그들은 신앙이란 언어로 표현된 도그마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도그마는 도저히 말로 나타낼 수 없고 무진장한 내용을 가진 엄청난 진리들을 규정하고 자기 안에 담아보려고 시도하는,고정된 정식들로 짜여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좋다. 성 토마스도 신앙 행위는 그를 설명해 주는 정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이 정식들이 가리키는 그 실재에서 비로소 끝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이 교리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 없이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덧붙인다 (cf. IIa, IIae, 1, 2, ad 2). 그들은 또 신앙은 성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한가지 덕목임을 지적하고, 따라서 어떤 중간자도 이에 대해서 특별한 제재를 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고 말하면서, 이와 같이 신앙을 정의하고 보호하는 교도권의 기능을 정당화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앙은 모든 외적 제약에서 해방되어 내적 도구인 양심만이 이를 해득하도록 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개념과 내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탈선들이 빚어낸 결과》

이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결론에 도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즉 신앙은 이를 정의하고 표현하는「상징들」없이 존속할 것이며, 조금도 애매한 구석이 없다는 듯이 권위있게 단언하는 교리문답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이제

부터는 신앙이 일치의 원천(Una Fides)이 되는 대신에, 분열의 씨가 될 것이며, 신앙을 표현하는 일을 감독하며, 이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을 후원할 뿐 아니라,필요한 경우에는 신앙을 증거하면서까지, 신자들의 생명선이 되어 있는, 그의 순수성을 수호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확실한 교도권의 인도를 받지 않을 것이다.

《공의회를 통해 본 신앙의 중요성》

우리는 오히려, 이번 공의회가 신앙에 관해서 두드러진 방식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하더라도,페이지마다 거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의 생명력과 초자연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것을 완전하고 힘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교리를 신앙의 토대 위에 구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를 증명하려면 이번 공의회가 다음과 같은 점들을 확인하고 있음을 상기하면 족할 것이다. 즉 공의회는 가르치는 교회와 신앙이 둘 다 필요하다는 점 (Lumen Gentium, 14, 48)과 교도권의 인도를 받아서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생명을 지탱해 주는 신앙의 의미를 밝히고(同 12), 반드시 수호해야 할 신앙의 순수성 一이것은 순전히 재일치를 위한 대화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인데 (Unit. Reg. II) ? 을 강조하며,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의 주교들의 활동 (Christus Dominus, 36)과 높은 단계의 연구로써 하나의 진리 안에 만나는 신앙과 이성 (Graviss educ., 10)을 설명하고,지금 그 가능성이 엿보이고 훌륭하게 완성될 것 같은,옛 신앙과 현대 문화간의 새로운 종합(gaudium et Spes, 57) 등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이번 공의회가 교회의 전통적 교리를 따라서, 그리스도를 원천으로 하고 교회의 교도권을 그 물길 (水路)로 하는 참된 신앙을 얼마나 중요시하

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참된 신앙의 보증》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그대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대들에게 신앙을 보

증해 주는 나와 자리를 같이 한 이 모임을 통해서, 또 신앙을 다시 증거하고 여기에 새로운 광휘를 준 공의회를 깊이 묵 상함으로써 신앙을 강화하는 즐거움을 각자가 스스로 찾아 얻어야만 한다.

5. 재일치 운동과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성 (1967,1, 18)

《공의회 주요 목표의 하나인 일치 문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의 교회 안에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재일치시키려는 운동에 영혼들을 준비시키고, 이 일치를 우리의 주께 구하기 위한 특별기도 주간이 오늘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런 기회를 맞이해서 "모든 그리스도 신자 간의 일치를 회복하는 일은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Unitatis redintegration, no. 1)는 사실을 회

상하지 않을 수 없다.

《사태의 동향과 일치 교령》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한 교회에 돌아오도록 특히 요즈음에 기도할 것을 우리가 그대들에게 권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기회에 공의회의 일치 교령을 다시 읽어보면 대단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서로서, 거기에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 간의 화해를 위한 새롭고도 위대한 노력의 교리적 원칙들 뿐 아니라 지혜와 사랑이 넘치는 실제적 규범들도 들어 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일치 운동을 환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를 얼마나 환영하시는지 알아야 한다. 공의회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세대의 주께서는 갈라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자기들의 분열에 대한 후회와 일치를 위한 원의를 더욱 풍성히 내려주시기 시작하셨다’’ (同 no. 1). 그렇다면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이 정신적 동향을 따라가야 하겠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충실성》

이렇게 해서 우리는 교회의 신비를 차츰 깨닫게 되고,재일치 운동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달려들 것을 전제로 하며, 또 그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충실성의 문제이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사랑, 그분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유산에 대한 충실성, 또 그분 친히 시작하시고 조직하신 신자 단체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충실성의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간단히 살펴보기만 해도, 재일치 문제가 제일 중요하면서도,한편으로는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과업임을 알 수 있다. 이 일이 그토록 어렵다는 것은,한동안 학자들에게 맡겨두기로 하는 역사적 문제뿐 아니라, 무엇 보다도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일치 (cf. Eph. 4, 3-6)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근본 문제들 때문에인데,우리는 이 문제들을 대할 때 아우구스띠누스 성인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교회의 일치를 떠나서는 보존될 수 없다” (Contra Iitt. Petiliani II, 77; PL. 43, 312),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재일치 운동과 평화주의>> (Irenism)

일치운동은 지나친 단순화를 뜻하는 건 아니다. 종교적 진리가 내적으로 위태롭게 되어도 상관않는 피상적 평화주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가톨릭 교리의 순수성을 저해하고,그의 확실하고 진정한 뜻을 흐려놓는 거짓 화해주의적 태도보다 일치 운동의 정신에 더 어긋나는 것은 없다’’ (同 no. 11) 우리는 갈라진 형제들이 보유하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가치들에 대해서,큰 존경과 이해를 가지고 대해야 하며, 또한 그들에게서 참되고 선한 것들을 배우려는 원의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이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가를릭 신앙의 순수성을 손상하거나 교회의 규율을 벗어나서는 안되고, 설사 그것이 선하고 존경할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남의 것을 경솔하게 모방하려는 태도로,우리 자신의 것들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된다.

《영적 쇄신》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공의회의 가르침을 따라서,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재일치 운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먼저 안 밖으로 각자의 영신 및 윤리생할을 쇄신하지 않으면, 실효성 있는 일치운등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렇게 실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일치운동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소명에 대한 충실성과 성실성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cf. 同 no. 6)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여 거룩한 가톨릭 교회의 참다운 아들로서의 자각을 일깨우기로 노력하자. 그렇게 함으로 써 우리는 이번의 특별기도주간을 보람있게 지내고, 일치운동을 위해서도 크게 기여함이 될 것이다.

“무릇 나와 한 가지로 아니하는 자는 나를 거스림이요,또 나와 한 가지로 거두지 아니하는 자는 흩어버림이니라’,

(루까 11, 23).



〔주〕

Christ to the World, 1967, Vol. xii, N0.3 에서 발췌함



Sanclifica eos in veritate. Sermo tuus veritas est. Sicut tu me misisti in

Mundum, et misi eos in mundum. Et pro eis ego sanctifico meipsum, ut

Sint et ipsi sanctificati in veritate. (Joann. 17,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