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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교회의 성화 임무
1999년 3월호 (제 242호)
제 7 장 혼인성사7. 조사 결과의 통보제1070조:혼인을 주례할 본당 사목구 주임 이 외의 다른 이가 조사...

주일의 말씀
1999년 3월호 (제 242호)
예수 부활 대축일/부활 제2주일/부활 제3주일/부활 제4주일4월 4일:예수 부활 대축일친애하는 형제 자매 ...

한국 천주교 사회 복지사
1999년 3월호 (제 242호)
1. 서론1) 문제 제기와 연구 목적교회는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이다. ...

시편 4편을 중심으로
1999년 3월호 (제 242호)
2. 본문의 문학적 이해1) 유형시편을 해석하기 위하여 그 시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

사회 생활과 회개
1999년 3월호 (제 242호)
이번 달에는 회개를 사회 생활과 관계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다. 서로 의지하며...

창조 신앙과 자연 이해
1999년 3월호 (제 242호)
생태학과 신학적 연관성이 가장 잘 연결되는 주제가 창조론이다. 왜냐하면 이 두 주제는 공통적으로 땅과...

교회의 혼인 교육을 위한 서론
1999년 3월호 (제 242호)
오늘날 ‘혼인’이란 그리 명확한 것이 아니다. 화려한 시장의 논리와 급격한 사회 변동에 따른 가치관의 ...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1999년 3월호 (제 242호)
사목자료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http://www.stpaulchong.org) 노희성(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행정실 ...

칼 바르트와 토마스 머튼
1999년 3월호 (제 242호)
사목자료 칼 바르트와 토마스 머튼 토마스 M. 킹(예수회) 칼 바르트와 토마스 머튼의 공통점 1968년 ...

서울의 성지와 사적지
1999년 3월호 (제 242호)
성지1)나 사적지 순례는 전통을 되찾는 일, 곧 ‘고유한 전통의 회복’ 또는 ‘우리 것의 자리 매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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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3월호 (제 242호)

한국 천주교 사회 복지사

심흥보(서울대교구 공항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1. 서론



1) 문제 제기와 연구 목적



교회는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 땅에서 미리 앞당겨 살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억한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그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제물로 삼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살고자 한다. 이 사랑은 바로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구원을 위한 희생이다. 그리고 그 희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써 인류의 주님이 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참으로 인간에게 기쁜 소식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20ㄴ) 하신 말씀에 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곧 ‘신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라고 한계 지어 말할 수는 없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미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단지 ‘전교’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그들을 신자로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이 생활하는 삶의 현장에 구체적인 변혁과 역전이 전개되도록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17-19항). 그러기에 이제는 더 이상 과거처럼 교회의 사목 형태 중에 교리 교육을 ‘직접 선교’로 사회 복지 활동을 ‘간접 선교’로 구분하고, 간접 선교는 직접 선교를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 격하시키거나 덤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사회 복지 활동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구체적인 표징이며, 가난한 이들이 그 표징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고 느껴 고백하게 됨으로써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아직도 2000년대를 향한 교회의 복음화를 깊이 받아들이고 적용하지 못한 채 과거에 머물러 있다. 한 예로, 최근 서울대교구의 어느 한 본당에서 그 관할 지역 사회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기 위해 양로원을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에 대해 교회 안팎에서 들려 온 다양한 반응 중에는 복음화를 잘못 이해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왜, 본당 신부가 본당 일은 안하고 엉뚱한 일만 벌이느냐?”, “교회가 왜 사회 복지를 하나?”, “양로원은 특수 사목이지 본당 사목이 아니지 않느냐?” 등 사회 복지가 선교에 차지하는 내용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였다.

본당 사목과 특수 사목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표징이 사회 복지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오갈 데 없는 할머니를 방문하고 위로하는 것은 본당 사목이고, 그 할머니들을 위한 집을 짓고 모시는 것은 특수 사목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이가 이미 70이 넘은 노인들에게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오던 집과 이웃과 고향 산천을 떠나 노인 요양소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는 것이 진정 인간에게 총체적인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 주는 사목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는가.

만약 본당 사목을 단순히 예비신자 교리와 성사 집전, 신자 방문으로만 국한한다면, 과연 사목의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지 의아해진다. 무엇 때문에 사목하고, 왜 성당에 나오라고 하는지 되새겨야 한다. 개인의 심리적인 안정과 이기적인 행복을 추구해 주기 위해 나오라고 하지는 않는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기쁜 소식을 들은 신자들이 기뻐서 세상에 나아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라는 ─ 사목 수행의 현실적인 한 형태로 드러나는 ─ 사회 복지적인 행위를 교회의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말고, 교회의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서 사목의 직접 선교와 간접 선교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역사가 이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이 논문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또한 한국 교회의 역사 안에서 특별히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 박해를 받아 몸을 피해야 했던 박해 시대에도 사회 복지적인 이웃 사랑이 없지 않았다. 초기 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사회 복지적인 애덕 활동이 교회가 처한 내외적 환경 안에서 어떤 역할과 비중을 차지했고, 교회는 어떤 형태의 사회 복지를 했으며, 그러한 교회의 모습은 당시 사회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또 그러한 사회 복지적인 활동이 어떤 변천 과정을 밟아 왔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 복지에 관한 연구를 한 박석돈(1981년)과 최정복(1952년) 등은 신자들의 자선 사업에 대한 실례와 한국 최초의 아동 복지 시설 영해회와 양로원, 시약소, 성 라자로 요양원, 미국 가톨릭 구제 위원회의 활동 그리고 천주교 사회 복지 전국 조직인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인성회를 다루었고, 최석우(1982년)는 시약소를, 유흥렬(1962년)은 한국 최초의 노인 복지 양로원 설치에 대해, 조화영(1992년)은 영해회에 대해 다루었다. 그리고 전찬범(1994년)과 김용태(1993년)와 이현숙(1997년)은 성서와 성전(聖傳)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이라는 권고에 따라 가난하고 고통받고 억눌려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권리이며, 물질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도 인격적인 차원에서 교회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 복지 활동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주교 사회 복지의 흐름을 살펴본 바 있다.

이상의 선행 연구들에 나타난 천주교 사회 복지 활동을 보면,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교회의 본질적인 형태로 사회 복지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 복지 활동에 대한 역사가 전체적인 면에서 구체적이고도 통합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천주교회 내에서 사회 복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천주교의 사회 복지 정신과 그 적용에서 번번히 개별적으로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풀어 나가야만 했다. 또 어렵게 사회 복지 활동을 시작했어도, 이렇게 사회 복지 정신과 적용이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계승 발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사회 복지 사업가 개인의 당대에 그치거나, 또 그 후임자들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혼란과 사업의 변환이 거듭되었다. 이제는 이런 일을 멈추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이 연구는 각 시대별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교회가 어떠한 사회 복지 활동을 펼쳐 왔는지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사회 복지 활동이 교회 복음 선교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그 시대의 특성과 한국 사회의 관계 안에서 재확인하여, 교회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선교와 복지를 해 나가야 하는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본론



1) 초기 교회 신앙 정립 과정의 활동(1777?886년)



(1) 정치 사회 및 교회 사회 복지적인 배경

①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

1777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당대 비집권파인 남인 선비 권철신, 정약전 등을 중심으로 사회 개혁을 추구하기 위한 강학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 모임에 이벽이 참여하여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학문 서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차츰 천주교라는 종교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연구하던 서적은 당시 중국에 와서 선교하던 마태오 리치(Matte`o Rici) 신부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으로서, 그 내용은 보유론(補儒論`-`유교를 보완하는 천주학)이었다.1) 이 강학회 후에 이벽은 쉬운 한글로 「천주공경가」를 지어 일반 대중이 쉽게 신앙을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이벽은 1783년에 조선 정부로부터 중국에 동지사(冬至使)로 파견되는 부친을 따라 떠나는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서 서학에 대해 배워 오도록 하였다. 이승훈은 6개월 동안 북경에 가서 천주 교리를 받고 1784년 남당의 알렉산데르 데 고베아(Alexander de Govea) 주교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2)

당시만 해도 모든 천주교의 지역 교회는 외국에서 선교사가 들어와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의 선교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학습 연구와 그에 따른 신앙 추구로 이루어졌다는 면에서 유래 없는 창립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과 함께 강학회는 단순히 학습 연구의 모임 성격에서 종교 단체의 성격으로 바뀌게 된다. 이승훈은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권일신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종은 아우구스티노, 정약용과 이벽은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주고 그들을 중심으로 선교를 해 나가 교회 공동체가 확장되어 갔다. 그러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벌어졌다. 형조 판서 김화진은 명동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탐색한 끝에 그 곳이 천주교인들의 집회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되어 김범우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집회의 주범 격인 이승훈, 권철신, 이벽 등은 권문 세도가의 자제이므로 무사히 지나갔지만, 중인인 역관 김범우는 잡혀 종교를 버리도록 강요당한 뒤 단양읍으로 귀양보내졌고 결국 귀양지에서 순교하고 말았다.3)

1786년 박해가 가라앉자 이들은 천주교 복음을 입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의 신앙을 자신의 삶으로, 곧 자신의 피로 서명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나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가 박해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굳은 신앙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것처럼 교계 제도를 만들기 위해 “자기들끼리 신부를 내는 것보다 더 잘하는 일은 없다고 믿었다.”4) 그래서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에서 주교, 신부, 그 밑의 성직자들로 된 가톨릭의 교계 제도를 본떠 조직을 세우고,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존창 곤자가의 루도비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최창현 요한 등으로 지역을 책임질 신부들을 선정하여 가성직 제도를 만들었고 이들은 전국 각지에 파견되어 선교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가성직 제도가 불법이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 깨달아 중국의 주교에게 문의한 2년 후 자발적으로 해체하고 선교 사제를 모시기로 결의하였지만, 그 동안 그들은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를 집전하고 미사를 열심히 봉헌한 것 같다. 세례성사를 제외한 나머지 성사는 무효이지만, “그들의 성직 수행이 도처에 열심을 촉진하고 전국에 신앙을 전파함에 새로운 충동을 주었음은 확실하다.”5) 실제로 이승훈 역시 성사가 중단된 이래 최초의 열성이 식어지고 많은 성과가 유지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고 한다.6)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고해성사에 관한 부분이다. 천주교의 고해성사는 죄를 용서해 주고 그 잠벌을 보속(補贖)으로 없애는데, 그들이 준 보속이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이웃 사랑 실천으로 그리스도교 정신을 매우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사회 복지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달레(Ch. Dallet)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심한 죄는 체벌로 다스린 데 반하여 대부분의 소죄들은 보속을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 베풀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희생하기’ 등의 희사로 주었다.7)

이렇게 함으로써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천주교회를 통해 이땅에서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더욱더 명확해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희생으로 이웃에게 자선을 베풂으로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며, 그래서 그 구체적인 형태로 사회 복지 활동을 고해성사의 보속으로 정하여 의무로 부과하게 된 것이다.

② 사목자들의 사목 서한에서

김대건 신부8)는 서울 한양에서 1845년 3월 27일 외방 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열 번째 서한에서,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곧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 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고 적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이 모든 질병이 물의 비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니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시면 분명하게 일러 주시기 바랍니다.”9)고 적고 있다. 최양업 신부가 도양골에서 1850년 10월 1일 그의 마카오 신학교 시절 스승인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이 일곱 번째 편지에는 최 신부가 고국에서 선교하면서 필요한 두 가지 청을 담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공중 위생을 위한 물의 정화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선교에 필요한 성물’ 등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천주교 사목자인 최 신부가 선교하면서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직접 선교에 필요한 성물이나 상본 등을 청하기에 앞서 일반인들의 공중 위생을 위한 물의 정화 방법을 청하는 내용은 참으로 천주교회와 교회의 선교에 대한 폭 넓은 시각을 보여 주고 있다.

김대건 신부와 그는 당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 사제들의 신학 원칙과 종교 신심에 지나치게 충실하다고 하는 얀세니즘적인 엄격한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들이 고국에 귀국하여 선교하면서 그들에게 신학과 사목을 가르친 스승에게 이러한 청을 한다는 것은 그들이 사회 복지를 교회 선교의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한 방편이라고 교육받았거나 그들이 보아 온 사목의 형태를 선교지에서도 자연스럽게 적용하고자 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앞둔 박해의 선교 현장 속에서도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풀어 주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그들을 도와 주려는 노력을 교회 사목의 일차적인 선교 목표요 방법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편 이들이 받은 교육은 정통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첫째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리 교육과 둘째로 그 교리가 현실로 드러나는 이른바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이웃 사랑으로서의 사회 복지 그리고 셋째로 그러한 사업을 계속할 사도 양성을 지시하셨다(마태 9,35-38 참조).

최 신부의 이러한 사목 정신은 계속 이어진다. 그는 열성적인 교우 최경환 프란치스코에 대해 보고하는 1851년 10월 15일의 여덟 번째 편지에서 프란치스코가 몇 시간 기도하고 몇 시간 신심 독서를 하는지를 말하기에 앞서 이웃 사랑의 형태로서 사회 복지 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흉년이 되면 프란치스코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 주었습니다.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10)

그리고 그는 일반 대중의 문맹을 극복하기 위한 한글 교육을 강조했으며, 교우들을 위해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工課)와 같은 기도서와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등의 천주교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또 서민들에게 맞는 수준에서 교리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쉬운 한글로 된 「천주가사」를 지어 보급했다.11)

또 그는 1859년 10월 11일에 보낸 열일곱 번째 편지에서, 1857년 8월 2일에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제목의 사목 교서에 나타난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세운 아동 복지 시설 ‘영해회’에 대한 한국 내의 활동과 한국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관심 있게 기술하고 있다.12)

그는 또한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사목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의 언어인 한글을 익혀 와야 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아울러 당시 조선의 문화와 사회 제도를 설명하면서 양반 제도에 대해서 신분적인 차별과 무노동 고소득이란 면에서 비판적인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일러 둠으로써, 만민이 평등하고 부지런히 일해서 사는 건전한 사회상을 펼치고자 하였다.13)

그리고 리델(Felix Ridel, 이복명, 1830-1884년) 주교도 옥중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소. 이 나라에 머물게 두시면 이땅에서 죽을 것이오. 그 동안 자선 사업을 하겠소. 예컨대 병원이나 고아원 같은 것을 설치하여 빈궁한 병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며, 무의무탁한 고아들이나 내버린 아이들을 거두어 양육하여 주는 등 갖가지 박애 사업에 노력하겠소.”14)

이상의 사목자들의 서한을 보면 당시 사목자들은 사회 복지에 대한 명확한 시각과 교회 선교와 복지의 통합된 사목 방향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③ 교우촌

달레 신부는 “교우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박해를 피해 이산 저산으로 숨어 다니면서도 굶어 죽는 일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식사 때마다 얼마 안 되는 음식도 나누어 먹었으며, 또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그 끼니에 먹을 쌀의 양에서 한줌의 쌀을 꺼내어 별도로 저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15) 이를 ‘좀도리 쌀’ 또는 ‘줌쌀’이라고도 하고,16) 이는 현재 천주교회의 모든 자선 헌금과 헌미 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행동 정신이다.

이들은 박해 속에서 사람들의 밀고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심한 경우에는 교우촌 전체가 불에 타서, 다른 교우촌으로 도망을 다녀야 했고, 또 전염병에 시달려야 했다. 형편이 좀 나은 교우들은 이들을 한 식구로 받아들여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기도 하였다. 특히 체포된 교우들의 석방을 위해 모금을 하고 사식을 넣어 주었으며, 순교한 이들의 가족 중에 과부, 홀아비, 노인, 고아가 된 이들이 생기면 격려하는 등 박애 정신은 물론 가톨릭 교회의 기본 원리인 사랑을 실천하여 두터운 공동체적 연대를 보여 주었다.17)

④ 신자들의 자선 활동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기 시작함으로써 신자들 중에는 천주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웃 사랑이라는 형태의 사회 복지를 실천하게 되었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스스로 가난하였지만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를 보살폈으며, 감옥에 있는 이를 돌보고 죽은 자를 묻어 주었다. 그들은 자선 행위가 ‘사랑의 의무’인 동시에 ‘정의의 의무’를 실천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18)

홍유한은 “하루는 그가 말을 타고 질퍽한 길을 가다가 무거운 짐을 진 한 노인을 보았다. 동정심이 일어, 말에서 내려 자기 대신 그를 말에 태우고 자기는 걸으면서 그를 인도하였다.” 이 모습은 당시 신분 사회의 엄격한 구분 아래에서 신분의 차이를 넘어 사회의 금기를 깨면서까지 어려운 처지에 놓인 노인을 돌보는 애덕을 실천한 행위이다. 또 “자기가 판 밭이 방금 산사태로 인하여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그 값을 산 사람에게 보내어 그 사람이 사양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받게 하였다.”고 나타나 있다.19)

원 베드로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구해 주었고,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형조의 심문에 “제4계는 부모와 어른과 임금과 관장을 공경하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륜이 아니겠습니까? `…… 얼마 안 되는 제 재산을 헐벗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쓰고 있으니, 그것은 재산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20) 라고 응대함으로써 교회의 사회 복지 정신을 실천했다고 본다.

그뿐 아니라 강완숙 골롬바는 “비상한 정력과 활동력을 타고났고 하늘의 특별한 은총의 도움을 받아 모든 자선 사업을 고무하고 지도하였다.”21)고 기술함으로써 그가 이미 그 형태와 내용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떤 자선 사업을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운영하거나 최소한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시우 알렉스는 오른쪽 몸이 불수였으나 너무 가난하여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신자들의 애긍시사로 연명할 수 있었고22), 김명숙 부자는 애긍시사를 많이 하여 갖가지 자선 행위를 하였다.23)

김종한 안드레아는 경상도 안동 고을 우련밭이라는 산골 깊숙한 속에 숨어 살면서 오로지 애긍시사에만 힘쓰다 1815년에 체포되었다.24) 그는 자선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애덕이 있으면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애덕을 위해 이 세상을 세우셨습니다. 만일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보존되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25) 그는 자선이 애덕의 실천이며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1839년 순교한 조신철 가롤로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온 후, 애긍시사로 신입 교우들을 도움으로써 모범이 되었고, 박사의는 부조를 자기보다 더 가난한 신자들에게 희사하였다.26)

신자들이 자선을 베풀었던 대상은 일차적으로 동료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 데는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을 박해하고 밀고했던 사람들까지 도와 줌으로써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갔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신앙을 버리고 신자들을 밀고했던 배교자 전지수가 잘못을 저질러 자신이 고발했던 신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의 고발로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날마다 그들의 얼마 안 되는 배급을 나누어 주어 그의 목숨을 건져 주었고, 그가 석방되어 거의 알몸으로 나갈 때도 신자들은 그가 입을 옷을 주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증거하였다.27)

1839년에 순교한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자선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결부하여 인식하고 실천했다.28) “하느님이신 스승의 영광을 위한 그분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정다운 애정과 결부되어 있었다.”29)고 기록되었다. 또 “그는 장을 보러 갈 때는 물건 가운데서 나쁜 것을 골라서 사며 그것을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찌꺼기를 사는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하고 대답하셨습니다.”30)

1839년에 순교한 최해성 요한은 “몹시 가난하게 살며, 재산이 보잘것없는데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긍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31) 그의 이러한 모습은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남은 부분을 희사한 것이 아니라, 불우한 이웃을 위해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까지도 희생하고 나누는 것이 자선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들의 나눔은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어 생활비를 모두 바친 과부의 동전’(마르 13,`44)과도 같다.32) 그리고 당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 구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 그들은 자기의 모든 것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 희생하려는 구원을 위한 희생 제사를 자신들의 몸으로 산 것이다.

이문우 요한은 1839년 박해 때 모금 운동을 벌여 갇힌 사람들에게 전달했다.33) 민극기 스테파노는 교우들을 찾아 다니며 가르치고 자선 사업에 힘써 선교사들이 그의 열성과 박애심을 높이 사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기까지 하였다.34)

김옥현은 대야불에 살았는데 그가 기르다 죽은 영애와 걸아들을 달성 넘어 말무덤에 손수 이장한 수가 60여 명이었고 기미년 흉년에는 배고파 쓰러진 노파들을 자택으로 업어다가 수용 구호한 수가 수십 명에 달했다.35)

서상돈은 사람을 대할 때 빈부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아 그의 사랑채에는 식객이 항상 십여 명씩 있었고 주일에는 수십 명씩 있었는데 이들에게 용돈까지 주어 가며 환대했다. 또 매년 춘추로 빈민들에게 양곡 수백 석씩을 희사하여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36)

이상의 모습은 한국 천주교회사 초창기에 간행된 서적들을 통하여 자선을 애덕의 중요한 부분으로 제시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츨기략」이라는 양심 성찰에 관한 책에서는 애덕과 관련하여 자선을 설명하면서 자선을 실천하지 않는 행위를 경계하고 있다.37) 또한 초기 신자들의 가성직 제도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자선 행위는 천주교 사제의 고해성사를 통해 죄의 사함에 이어 잠벌을 없애 주는 보속의 형태로 의무적으로 주어졌다.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 신자 생활의 권장 행위로 사목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박석돈은 자선 행위는 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고 둘째로 고아와 노인들의 영혼을 구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고 말한다.38) 그는 또 이러한 자선 행위들이 1917년 2월 1일에 설립된 인애회에 계승 발전되어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박애 사업을 했다고 주장했다.39) 이에 대해 권정복은 “미사 애긍을 목적으로 고 이기운 회장, 고 백응도 회장, 고 이계제 회장의 발기로 1917년 2월 1일 대구 본당 인애회를 설립하고 회원은 남녀 구별 없이 매년 초에 소정한 회비(당시 연 10전)를 납부하면 1년 간 회원 자격을 가지게 되는 데 매년 이와 같이 갱신하여 회원을 모집하는 제도였다.”40)고 하였고, 박석돈은 이것이 현재의 적십자 회원 자격이라고 쓰고 있다.41)

인애회는 “사망하는 회원에게는 연미사 한 대를 드려 주고, 살아 있는 회원을 위해서는 매년 생미사 한 대를 올리며 수납된 회비로 무의무탁한 노약자들이 거처할 집을 제공하며 사망 시에 초상을 치러주었다.”42) 이 인애회의 성격은 양로원의 운영과 그 후원 사업을 하는 노인 복지에 해당한다.

박석돈은 이러한 인애회의 사업 정신은 1970년대 대구 카리타스와 1980년 인성회로 연결되고 있으며, 노약자를 돌본 그 정신은 칠곡군 동명면에 있는 ‘성가 양로원’에서 잇고 있다고 주장했다.43)

(2) 분야별 천주교 사회 복지 사업

① 아동 복지 - 영해회

1854년에는 ‘영해회’라는 명칭으로 아동 복지 사업을 시작하였다.44) 이 영해회는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홀본 잔송(Holbon Jansong)이 창설하여, 죽음의 위험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살아나면 그리스도교 가정에 맡겨 이를 키우도록 하는 어린이 구호 사업인 성영회(Sancta Infantia)의 한국명이다.45)

우리 나라에서는 ‘명도회’(明道會)라는 평신도 단체가 고아 구제 사업을 시작하였고, 1852년 8월 말에 조선에 입국한 매스트르 신부가 우리 나라 각지를 돌며 전교 활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죽음에 직면한 고아가 많음을 보고, 파리에 있는 성영회 본부에 재정적인 원조를 청하여 1854년경에 고아들에 대한 구제 사업을 펴기 시작하였다. 매스트르 신부는 파리 성영회 본부에 보낸 1984년 10월 22일자 서한에서 그 시작을 설명하였다. 초기에는 3명의 여인들이 고아들에게 세례를 주고 돌보다가 아주 어린아이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독실한 여교우 2명을 더해 총 5명이 자원 봉사의 형식으로 아이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자원 봉사만으로는 늘어나는 고아들을 다 돌볼 수 없어 유모에게 다달이 8프랑씩 지불하며46) 유료 위탁으로 그들을 돌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커 감에 따라 자립할 수 있도록 생업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침으로써 근대 아동 복지 사업의 문을 열었다.

영해회의 자세한 성격은 뵈르뇌(Berneux, 장경일) 주교가 각처 공소(公所`-`신부가 상주하지 못하는 작은 성당)의 회장집에 비치한 1857년 8월 2일자 「장 주교 윤시 제우서」47)의 부록으로 발표된 ‘영해회 규식’에 잘 나타나 있다.48) 영해회 규식이 정한 조건에 따라 아이를 맡길 때도 증인 1명과 연서로 영해회의 모든 조건을 따르고 아이를 다시 찾지 않겠다는 일종의 친권 포기 서약서를 2부 작성하여 1부는 회장이 보관하고 또 1부는 신부가 보관하도록 했다.49)

1859년 11월 7일자 포교성성에 보낸 뵈르뇌 주교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신자로서 대세를 받고 죽은 아이가 701명, 프랑스의 성영회 본부에서 보내 온 경비로 양육하는 고아가 43명에 달한다. 이 사업은 1859년까지 서울에 유모를 둔 고아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1866년 병인박해로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후 중단되었다.50)

그 후 1880년에 블랑(Jean Blanc) 주교가 다시 시작하여 원아들이 계속 증가하자 1885년 3월 15일에는 서울 곤당골(현 을지로 1가)에 있는 기와집을 사서 옮겼고, 그때 26명의 고아가 있었다. 1886년에는 수용된 원아가 80명에 이르러 종현(현 명동 성당)에 두 개층의 집으로 옮겨 위층에는 여아를 아래층에는 남아를 수용하였다. 한편 대구 고아원의 경우, 1885년 670명의 고아들이 있었으며 1886년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부임한 후 1893년까지 계속되었다.51)

② 교육 복지

㉠ 문맹 퇴치와 방인 사제 양성 및 한불자전 발간

1836년에 모방 신부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3명의 소년을 중국 마카오에 유학시켜 신학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1855년 매스트르 신부는 충청도 제천의 배론에 신학당(현 가톨릭 대학교의 효시)을 세워 한국 교회의 복음 선포를 위한 방인(한국인) 성직자를 배출하고자 교육하기 시작하였고, 1866년에는 서울에 일반 학교를 세워 가난한 이들의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 복지를 시작하였다.52)

그리고 1866년에는 다블뤼(Daveluy) 주교가 준비하다가, 박해로 중단되었다가 다시 리델 주교가 준비한 1880년 4·6배판으로 694면에 11만 자의 한글 단어를 프랑스어로 풀이한 「한불주뎐」과 334면의 한글 문법서인 「한어문전」(韓語文典)이 일본에서 인쇄 편찬되었다.53)

㉡ 인현 서당

1882년 9월 조선교구(현 서울대교구) 6대 교구장이던 리델 주교가 종현(현 명동) 성당 관할 인현동에 인현 서당을 세웠다. 이 서당은 지금의 계성 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882년부터 1883년도 조선교구 통계표에 당시 종현 본당을 맡고 있던 블랑 신부는 “1882년 본당 관할에서 운영하던 학교가 하나 있고 11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라고 기록하였다.

한편, 1883년 8월에는 인현 서당을 종현으로 옮겨 종현 성당 한한 학원 또는 종현 학원 등으로 불렀는데, 이 서당은 천주교회의 전액 부담으로 운영되면서 1886년에는 40명 가량의 학생들에게 국어와 한문 읽기, 쓰기 등을 가르쳤다. 그 후 1906년에 본당 신부였던 포와넬(Victor Poisnel, 박도행, 1855-1925년) 신부의 적극적인 재정 후원과 최봉섭의 협조를 얻어 종현 학원은 개편 확장되어 비로소 신식 교육 기관인 계성 지정 보통 학교로 탈바꿈하였다.54)

한편 1883년 원산 읍민들이 설립한 ‘원산 학교’가 있었고, 정부가 일종의 근대적 교육 기관인 ‘동문학’(통변 학교)을 통상아문의 부속 기관으로 설립하였고, 1885년에는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Appenzeller)가 ‘배재 학당’을 시작하였고, 1886년에는 ‘육영 공원’(Royal English School)과 스크랜튼(Scranten) 부인이 여성 교육 기관인 ‘이화 학당’을 설립하였다.

③ 노인 복지 - 양로원

블랑 주교는 1885년 7월 2일에 종로 똥골(현 관철동)에 큰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양로원을 설치하고 노인 복지를 시작하였다.55) 설립 당시 “남녀 노인들의 수는 20여 명에 달하며, 현재 입원 신청자의 수도 상당합니다.`…… 그러나 동냥으로 연명하거나, 외교인 집에 살면서 죽을 위험에 있어도 성사마저 받을 수 없는 불쌍한 노인들의 사정은 얼마나 딱한지요!”56)

1886년 블랑 주교가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양로원은 계속해서 교우들과 외교인들로 꽉 차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이 양로원 사업에 다른 목적을 첨가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곧, 이 양로원은 시약소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젊을지라도 중한 환자이면 이 시약소에 입원시켜 치료해 주고 있는데 …….”57)라고 썼다. 이를 보면 양로원은 오갈 데 없는 환자들을 위한 시약소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92년 블랑 주교의 후임인 뮈텔 주교의 일기 1892년 1월 31일자와 6월 2, 18, 19일자에는 양로원에서 미사를 드리고, 성체 강복과 종부성사를 주었고, 식사를 했다는 내용이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양로원은 꽤 오래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58)

④ 의료 복지 - 시약소

1857년에는 매스트르 신부가 프랑스 성영회의 도움으로 국내에서 영해회를 시작하면서, 그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의 치료를 위한 의료 복지 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로마 교황청에 보낸 11월 7일자 서한을 보면, “한 중요한 도시에 세운 시약소 덕택으로 저희는 더 많은 우상 숭배자 자녀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약소는 1866년 대박해로 중단되었다.59) 베르뇌 주교는 전국의 중요 도시마다 시약소를 두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 복지를 하였다.60)

한편 1885년 2월 15일에는 개신교 선교사인 알렌(Allen)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광혜원(제중원)이란 이름으로 국립 병원을 개설했다.61) 그리고 1908년에는 세브란스 의학 전문 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다.62)

(3) 사회 복지 활동의 시대적 성격과 그 의의

이 시대에 교회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형제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생활로 드러난다고 굳게 믿고 실천하며 살았다.

특히 이러한 사실은 사목자들의 서한에서 나타났듯이 김대건 신부가 죽는 순간에도 천연두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고쳐 주기 위해 그 치료 방법을 청하였고, 최양업 신부가 스승 신부에게 청한 목록 속에도 선교에 필요한 성물을 보내 달라고 하기보다 먼저 백성들이 비위생적인 물 때문에 얻은 잔병에서 헤어 나도록 해 주기 위해 공중 위생을 위한 물의 정화 방법을 알려 달라고 청하였으며, 매스트르 신부도 1855년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양성하기 이전에 우선 1854년에 고아원을 설립한 모습들 속에서 사목자들은 사회 복지 활동을 종교의 교리를 선포하는 것보다 우선시하거나 적어도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동등하게 보았고 평신도들도 자신들의 삶에서 이러한 신앙으로 살았다.

이러한 모습이 고난과 박해의 피난 시절과 형장에까지도 드러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 교회 때부터 사회 복지로 드러나는 이웃 사랑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응답이며 증거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우들은 자신의 몸을 바쳐 순교하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게 된 것이다.

한편 권오구는 「사회 복지 발달사」에서 “근대적 성격의 사회 복지 시설 사업으로는 조선 말엽인 고종 25년(서기 1888년) 3월에 불란서 교회에 의하여 지금의 서울 명동에 처음으로 천주교회 고아원이 창설된 것이 그 시발이다. 갑오경장 이듬해인 고종 32년(서기 1895년) 3월에 인천에 천주당 부속 고아원이 설립되었고, 광무 10년(서기 1906년) 3월에는 이지화가 설립한 경성 고아원이 세 번째이다.”63)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가 언급한 명동의 천주교회 고아원의 설립 주체를 불란서 교회라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정확한 기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선교사가 다른 나라 교회에 가서 선교를 하더라도 그의 선교는 그의 출신지의 선교가 아니라 그가 선교하는 지역의 선교가 된다. 또한 그가 언급한 명동은 당시 한국 교회인 ‘조선교구’의 성당이다. 그러므로 그 설립의 주체는 불란서 교회가 아니라 한국 교회이며 또한 그가 언급한 대로 한국 최초의 고아원을 설립한 주체가 천주교라는 것은 맞지만 그 설립 연도와 고아원의 명칭도 1854년의 한국 천주교회의 불란서 선교사 매스트르 신부의 영해회로 보아야 한다.

그가 언급한 명동 천주교회의 고아원과 인천의 천주당 부속 고아원은 모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운영하던 것이었고, 수녀회의 기록에도 그 시작을 1854년으로 기술하고 있다.64) 수녀회의 기록에는 1854년 매스트르 신부가 불란서 교회의 성영회의 지원으로 세운 영해회 고아원이 1866년 병인박해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885년 3월 15일에 재착수했다고 밝히고 있다.65) 그리고 권오구가 밝힌 1888년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조선교구에게 운영을 위임받은 해이다. “1888년 9월 8일 성모 성탄 축일에 블랑 주교에게서 고아원을 인수받아 수도회의 부속 사업으로 경영하게 되었고 고아원의 원장에 자카리아 수녀가 취임했다.66) 자카리아 수녀는 블랑 주교에 이어 이 고아원의 제2대 원장이 되었다. 인수 당시 고아의 수는 남아가 80명, 여아가 65명이었고, 유모에게 양육되던 유아가 30명이나 되었으며, 고아들을 돌보는 여인들도 18명이나 있었다.67) 그리고 권오구가 밝힌 ‘1895년의 인천의 천주당 부속 고아원’에 대한 수녀회의 기록은, “1894년 8월 18일 제물포에 수녀원이 세워지고,…… 네 살인 교우 여아와 12세 된 여자 어린이를 수녀원에서 양육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제물포 고아원의 시작이었다.”고68) 밝히고 있다.

또한 권오구는 노인 복지 시설에 대해 “노인 복지 시설의 시작에 있어서는 1988년 천주교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 백규삼 주교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본부 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양로원을 신설하고 길가에 버려져 배고픔과 추위로 죽음 외에 가망을 갖지 못한 남녀 노인들을 수용하였으니 현재 양로의 수는 40명에 달하였나이다.’69)라고 하고 이를 위해 샬트로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것이 한국 양로 시설 사업의 시작이라고 한다.”70)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의 재인용 기록에 나타나듯이 1988년에 이미 양로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글에 나오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의 기록에도 “개화기 조선 교회에서 양로원을 설립한 때는 1885년 7월 2일이었다. 양로원은 그 해 3월 15일에 설립된 고아원보다 약 4개월 늦게 시작되었다.”71)고 나타나 있다. 그리고 같은 면에는 1886년의 블랑 주교의 양로원에 대한 보고서도 제시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쪱`이번 호부터 연재될 “한국 천주교 사회 복지사” 내용 중에 보완할 부분이나 잘못된 내용이 있을 경우, 「사목」 편집부로 연락해 주시면 추후 보완하여 더욱 완벽한 “한국 천주교 사회 복지사”를 완성할 계획입니다.`─`편집자 주.

1)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 사상」, 가톨릭 출판사, 1979 참조.

2) Ch. Dallet, 「한국 천주교회사」 상,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 교회사 연구소, 1980, 305면 참조

3) 위의 책, 317면 참조.

4) 위의 책, 323면.

5) 위의 책, 324면.

6) Andreas Choi, L’E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e첿, Suisse, 1961 참조.

7) Ch. Dallet, 앞의 책, 324면 참조.

8) 한국 교회사 연구소 편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 교회사 연구소, 1996, 169면.

9) 최양업,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정진석 옮김, 바오로딸, 1995, 77면.

10) 위의 책, 99면 참조.

11) 위의 책, 31면 참조.

12) 위의 책, 165면 참조.

13) 위의 책, 88면 참조.

14) 박충신 옮김, 「신부들의 편지」, 가톨릭 출판사, 1966.

15) Ch. Dallet, 앞의 책 참조.

16) 서울대교구 사회 사목부 공문, 제97-3, 1997.

17) 노길명, “박해기 개화기의 한국 천주교회와 사회 개발”, 「한국 교회사 논문집」 I, 한국 교회사 연구소, 1984, 172면 참조.

18) 앞의 공문 참조.

19) Ch. Dallet, 앞의 책, 296-297면.

20) 위의 책, 410-411면.

21) 위의 책, 392면.

22) 위의 책, 56면 참조.

23) 위의 책, 60면 참조.

24) 위의 책, 16면 참조.

25) 앞의 공문 참조.

26) Ch. Dallet, 앞의 책, 171면 참조.

27) 앞의 공문 참조.

28) 위의 공문; Ch. Dallet, 앞의 책, 430-431면.

29) 최양업, 앞의 책, 99면.

30) Ch. Dallet, 앞의 책, 430-431면.

31) 위의 책, 474면.

32) 앞의 공문 참조.

33) Ch. Dallet, 앞의 책, 490면 참조.

34) 위의 책, 527면 참조.

35) 권정복, 「대구 천주교회사」, 대구 대건 출판사, 1952, 51면 참조.

36) 위의 책, 58-59면 참조.

37) 앞의 공문 참조.

38) 한국 가톨릭 대사전 편찬 위원회, “가톨릭 복지 사업”, 「한국 가톨릭 대사전」 1권, 한국 교회사 연구소, 1995.

39) 박석돈, 「한국의 천주교 사회 복지 사업에 관한 연구」, 한사 대학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1, 27면.

40) 권정복, 앞의 책, 64면.

41) 박석돈, 앞의 논문, 27면.

42) 권정복, 앞의 책, 64면.

43) 박석돈, 앞의 논문, 28면.

44) 조화영, 「조선 천주교회의 아동 복지에 관한 연구 - 박해 시대 영해회 사업을 중심으로」, 가톨릭 대학원 사회 사업학과 석사학위 논문, 1989; 「나눔 연구」 창간호, 서울 가톨릭 사회 복지회, 1992, 418면 참조.

45) 한국 가톨릭 대사전 편찬 위원회, 「한국 가톨릭 대사전」, 한국 교회사 연구소, 1985, 650면 참조.

46) 박석돈, 앞의 논문, 34면.

47) Ch. Dallet, 앞의 책, 261면 참조.

48) 박석돈, 앞의 논문, 35면 참조.

49) 위의 책, 37면 참조.

50) Ch. Dallet, 앞의 책, 392면 참조.

51)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편찬 위원회, 「한국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분도 인쇄소, 1991, 156면 참조. 이후 「샬트르 100년사」로 표기.

52) 노길명, 앞의 책, 188-213면 참조.

53) 「한국 가톨릭 대사전」(1985), 1271면 참조.

54) 「살트르 100년사」, 793면 참조.

55)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 가톨릭 출판사, 1962, 289면 참조.

56) 서울 교구 연보, 1885.

57) 「살트르 100년사」, 183면.

58) 「뮈텔 주교 일기」1,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한국 교회사 연구소, 34.60.61.62면.

59) 「살트르 100년사」, 158면 참조.

60) 최석우, “한국 가톨릭과 의료 사업의 전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한국 교회사 연구소, 1982 참조.

61) 김원모, 「근대 한국 외교사 연표」, 118면 참조.

62) 민경배, 「한국 기독 교회사」,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2, 215면 참조.

63) 권오구, 「사회 복지 발달사」, 홍익재, 1997, 241-242면.

64) 「살트르 100년사」, 157면 참조.

65) 위의 책, 159면; 서울 교구 연보, 1885 재인용.

66) 유홍렬, 앞의 책, 295면 재인용.

67)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85년사 편찬 위원회, 「바오로 뜰 안의 애환 85년」, 가톨릭 출판사, 1973, 145.567면; 「샬트로 100년사」, 160면 참조.

68) 「샬트르 85년사」, 582-583면 재인용; 「살트르 100년사」, 164면.

69) 권오구, 앞의 책, 242면 재인용.

70) 위의 책, 242면.

71) 「살트르 100년사」, 18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