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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교회의 성화 임무
1999년 3월호 (제 242호)
제 7 장 혼인성사7. 조사 결과의 통보제1070조:혼인을 주례할 본당 사목구 주임 이 외의 다른 이가 조사...

주일의 말씀
1999년 3월호 (제 242호)
예수 부활 대축일/부활 제2주일/부활 제3주일/부활 제4주일4월 4일:예수 부활 대축일친애하는 형제 자매 ...

한국 천주교 사회 복지사
1999년 3월호 (제 242호)
1. 서론1) 문제 제기와 연구 목적교회는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이다. ...

시편 4편을 중심으로
1999년 3월호 (제 242호)
2. 본문의 문학적 이해1) 유형시편을 해석하기 위하여 그 시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

사회 생활과 회개
1999년 3월호 (제 242호)
이번 달에는 회개를 사회 생활과 관계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다. 서로 의지하며...

창조 신앙과 자연 이해
1999년 3월호 (제 242호)
생태학과 신학적 연관성이 가장 잘 연결되는 주제가 창조론이다. 왜냐하면 이 두 주제는 공통적으로 땅과...

교회의 혼인 교육을 위한 서론
1999년 3월호 (제 242호)
오늘날 ‘혼인’이란 그리 명확한 것이 아니다. 화려한 시장의 논리와 급격한 사회 변동에 따른 가치관의 ...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1999년 3월호 (제 242호)
사목자료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http://www.stpaulchong.org) 노희성(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행정실 ...

칼 바르트와 토마스 머튼
1999년 3월호 (제 242호)
사목자료 칼 바르트와 토마스 머튼 토마스 M. 킹(예수회) 칼 바르트와 토마스 머튼의 공통점 1968년 ...

서울의 성지와 사적지
1999년 3월호 (제 242호)
성지1)나 사적지 순례는 전통을 되찾는 일, 곧 ‘고유한 전통의 회복’ 또는 ‘우리 것의 자리 매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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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자료 1999년 3월호 (제 242호)

주일의 말씀

방상만(수원 가톨릭 대학교 교수·신부·성서 신학)

예수 부활 대축일/부활 제2주일/부활 제3주일/부활 제4주일

4월 4일:예수 부활 대축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습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표에 이르시고 아버지께 돌아가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 신앙은 ‘부활하신 분’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후손들이 우리가 고백하고, 우리의 삶으로 증언하는 신앙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잠시 침묵)

쭕`제1독서/사도 10,34.37-43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전도한 베드로)

오늘의 독서는 베드로가 백인 대장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행한 설교의 내용이다. 고르넬리오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고 베드로를 자기 집에 초대하였으며, 그는 유다교 신앙에 아주 가까운 이방인으로 나타난다(10,2). 고르넬리오의 개종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분기점을 이루며, 이로써 베드로의 첫 이방인에 대한 선교를 부각시키고 있다.

베드로의 설교는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설교(3,11절 이하)와 유사하고 같은 내용이 되풀이되는 것은 루가의 문학적 기교에 속하기도 하지만 독자들에게 믿음의 원천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데 있다. 또한 이 같은 반복으로 루가는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이 인류 역사 안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기억하게 한다.

나자렛 예수님에 관한 내용(10,37-39)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내용(2, 22)과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다. 독자들은 이미 루가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 사건을 잘 알고 있다. 그 사건은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비롯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났던 일이다.

나자렛 예수님의 일, 곧 예수님의 공생활에 관한 언급(38절)은 루가 복음 전체에 걸쳐 소개되고, 특히 4장 18절은 예수님의 메시아적이고 예언자적인 모습과 활동을 요약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시어 그리스도로 삼으셨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언급(39-41절)은 사도의 증언에 짧게 요약되어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처형과 하느님께서 그분을 사흘 만에 살리셨다는 하느님의 활동이 대비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대목은 사도행전의 다른 설교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루가는 ‘부활하신 분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표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체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사도들을 이에 대한 목격 증인으로 내세운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뿐 아니라 그분께서 당하신 일의 증인들이다. 그들의 증인 자격은 하느님께서 미리 택하여 부여하신 것이다(41절). 증인들의 임무는 선포와 증언이다. 말하자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발현하신 목적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데 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음을 예언자들도 증언하였으며 죄의 용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43절).

쭕`제2독서/골로 3,1-4

(여러분은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오늘의 본문은 구약의 약속(1,12`?2,23)과 새 생활에 대한 권고인 둘째 부분(3,5`─`4,6)을 연결시켜 주는 전형적인 이행 단락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고,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복음에 따라 생활해야 함을 말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천상의 세계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로써 그 성격이 규정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배를 말하며, 또한 모든 반대 세력을 지배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주님이라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이로써 부활은 분명히 ‘높이 들어올림’으로 해석된다. 때문에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단순한 죽음의 극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계에 속하여 살지 않으며, 이 세계를 더 이상 생활의 목표와 의미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지향해야 한다는 촉구이기도 하다.

골로사이 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죽었다는 것(3절)은 그들이 더 이상 땅에 속하지 않으며, 천상의 세계에 속하여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표현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인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새로운 생명의 보증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느님의 충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등장할 새로운 생명을 지금 보증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장차 나타나실 것이라는 대망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4절). 그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제공해 준다.

쭕`복음/요한 20,1-9

(빈 무덤 이야기)

공관 복음에는 여러 여인이 등장하는 반면 요한 복음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만이 부활 사화에 등장한다. 이 여인은 부활 사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토마스 데 아퀴노는 ‘사도들 중의 여사도’라는 칭호를 아끼지 않는다. ‘주간 첫날’, ‘아직 어두울 때’ 이 여인은 무덤으로 간다. 주간 첫날은 부활의 날이고 오늘날의 주일에 해당되며 ‘아직 어두울 때’는 상징적 의미로 우리 인간이 어둠에 있어 부활 신앙이 아직 깨어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있다.

무덤의 돌이 치워진 것을 발견한 여인은 베드로와 사랑받은 제자에게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두 제자는 달음질쳐 무덤에 이르는데 사랑받은 제자가 먼저 무덤에 다다른다. 이를 놓고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요한의 우위성과 베드로의 위상을 깎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무덤 안에 들어가 본 사람은 베드로였다(6절).

머리를 싸맸던 수건과 수의가 잘 개켜져 있다(7절)는 것은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는 주장을 일축한다. 제아무리 간이 큰 제자들이라 하더라도 급한 상황에서 어찌 수건과 수의를 잘 정돈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9절). 그들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모든 것이 자명하게 된다.

부활! 어떻게 믿을 것인가?(1)

우리 모두는 부활 신앙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으로 알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 장면을 본 사람은 없으며, 복음 사가들 역시 부활 장면을 묘사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에, 그리고 제자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2000년의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부활 신앙은 어느 정도일까?

1) 문제 제기

본당 주임 신부로 있을 때 예비신자 교리가 끝난 후 찰고 중에 꼭 물어 보는 질문 중 하나는 “당신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합니까?”이다. 답변은 다양하였다. “죽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요.” 그래도 교리를 좀 배웠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육신은 땅에 묻혀 썩고 영혼은 천당에 갑니다.” 그러면 “당신은 부활할 수 있습니까?” “아유, 저 같은 사람이 어찌,…….” 예비신자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며 지냈다. 그런데 똑같은 질문을 신학생들에게 강의 시간에 하였다. 자신이 부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50%였다. 같은 질문을 수도자들에게도 하였다. 30%정도였다. 평신도 중 레지오 단원들이 가장 열심인 편에 속한다고 흔히 말한다. 교육 중에 같은 질문을 해보니 20% 미만이었고, 몇 개 본당 특강 때 같은 질문을 하여도 20% 미만이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부활 신앙은 아직 자리잡지 못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그래서 개신교 신자들보다 덜 열정적이고 확신에 찬 삶이 떨어지는가 보다.

왜 그럴까?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이 40여 일이고, 1년 중 가장 성대하게 지내는 전례가 부활 대축일인데도 우리의 부활 신앙이 부족하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대부분 예비신자 교리 외에 재교육 시간이 부족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부활 대축일을 전례적으로 성대하게 거행하지만 부활의 의미에 관한 말씀이 부족한 듯하다. 강론의 많은 경우 교구장 메시지가 대독되고 부활 시기도 길지만 부활이라는 주제와 거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육체의 부활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이다. 많은 경우 지금의 내 몸이 그대로 부활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다음 주에 계속)

4월 11일:부활 제2주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부활 8부 축제를 지냈으며 성령 강림 때까지, 곧 모든 사람이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산 희망”(제2독서)을 지닐 때까지 부활 시기는 계속됩니다. 이 부활 시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우리도 토마스 사도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때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미사를 통하여 진정으로 고백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을 청합시다.(잠시 침묵)

쭕`제1독서/사도 2,42-47

(초기 공동체의 생활)

우리는 부활 시기 내내 제1독서로 사도행전의 말씀을 듣게 된다. 사도행전은 부활을 체험한 공동체의 길을 묘사하고 있으며 부활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원초적 근거가 된다. 부활 체험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집약문 또는 요약문이라 불린다. 초대 교회의 삶을 간추려 보도해 주고 있으며 또한 공동체의 이상형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루가는 오늘의 본문에서 공동체의 이상적 삶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도들의 가르침, 공동체의 친교, 빵 나눔(공동 식사) 그리고 기도 생활을 열거하고 있다(42절).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활하는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삶을 체험한 이들은 “한마음 한 뜻”(4,32)이 될 수 있었다. 저자에게 공동체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표현은 재산의 공동 소유(44절)였다.

공동 소유라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자금이 필요하게 될 때에 재산을 가지고 있는 구성원이 그의 토지나 값나가는 물건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는 의미다(45절).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을 함께 나누며 하느님께 찬양 드림으로써 유다인들에게 호감을 샀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이며 이 축복은 주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날마다 증가시켰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쪵`이상적인 공동체는 실현될 수 있을까? ‘지금은 없다.’라는 것이 결론일 것이다. 오늘 본문의 묘사는 살아 있는 공동체의 경험과 공동체의 이상이 뒤섞여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러한 공동체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지금 부정적인 모습이라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상적 공동체의 모습은 늘 한걸음씩 새롭게 실현시킬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쭕`제2독서/1베드 1,3-9

(산 희망)

우리는 부활 6주일까지 위로와 권면의 성격을 띠는 베드로 1서의 말씀을 듣게 된다. 저자는 이 서신으로 확신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박해의 상황에서도 확고한 태도를 보이도록 격려한다.

오늘의 편지는 송시적이며 전례적 언어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시작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찬양을 받으신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께 창조된 새로운 삶의 현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전제하고 있다.

이처럼 하느님의 활동으로 이해된 ‘다시 태어남’이 인간에게 ‘살아 있는 희망’을 안겨 준다. 이 희망이 산 희망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꿈이나 환상들과는 달리 확고히 보증된 것이기 때문이다. 곧 이 희망은 죽은 이들 가운데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보증되어 있다.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염두에 둔 희망만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희망의 내용은 다시 태어난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상속자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특권이 묘사되어 있다. 과연 이런 의식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되고 이런 의식을 갖게 하는 사목자는 얼마나 될까?

이 종말론적 ‘유산’은 세상의 감시와 공격을 받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실 때에만 약속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믿음이 요청되고 있다. 환난과 고통도 이 신앙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밝히 드러낼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인격 전체를 의미하는 영혼의 구원을 기대한다.

쭕`복음/요한 20,19-31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사랑하는 스승을 잃은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다. ‘닫혀진 문’은 신학적으로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폐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두려움에 쌓인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를 하신다. ‘평화’라는 말은 의례적 인사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용법으로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곧 두려움이 없는 상태로 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을 말한다.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닫혀진 문을 통과하시어 들어오셨단 말인가? 십자가에 달리신 분과 부활하신 분은 다른 분이신가? 물론 동일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여기에는 육적 존재와 영적 존재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비적 권능이 암시되어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두려움을 잊고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20절). 이어서 파견 명령이 뒤따른다. 고대적 양식으로 입김을 내쉬며 성령을 부여하는 것은 신약성서에서 특이한 일이다. 어떻든 루가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부활, 성령 강림, 파견 명령이 동시적으로 함축되어 나타난다. 죄의 용서에 관한 권한은 일차적으로 세례를 통한 구원 공동체로의 수용에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부활! 어떻게 믿을 것인가?(2)

2) 부활 신앙의 걸림돌

지난 주에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은 육체의 부활이다. 요즈음은 화장을 권고하는 시대이니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의 상태를 기준으로 부활을 상상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사는 것도 지겨운데 죽은 후 부활하여 저 원수같은 영감탱이(마누라)를 또 만나?’ 하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이다. ‘지금의 쭈굴쭈굴한 모습으로 부활해?’ 이것도 생각하기가 싫다. ‘교통 사고로 불구가 되었는데 이 세상의 고통이면 족하지 이 몸으로 또 부활해?’ 더 더욱 생각하기가 싫다. 생각하기 싫은 것을 생각하니 부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물론 성서의 증언을 토대로 살펴보겠지만 우리의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현세적 사고의 틀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 이럴 때 부활 신앙은 나의 신앙이 될 것이다.

3) 부활에 관한 우스갯소리 몇 개

공관 복음과는 달리 요한 복음에는 부활 사화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만이 등장한다. 중요한 순간인지라 여성들에게 신나는 소재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마르 16, 9). 그래서 여성 신학의 전거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본당 신부님 왈, “예수님께서 여자인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빨리 전파하기 위해서이다. 왜? 여자는 말이 많으니까.”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에 물 위를 걸어가시는 기적(마르 6, 45 이하 참조)을 행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다시 물 위를 걸어가시는데 이번에는 물에 빠지셨다. 왜 그랬을까? 발에 난 못자국으로 물이 새어 그렇다나!

외국의 어느 신부님이 금화, 은화를 많이 소유하였는데 둘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돈이 많으면 불안한 법. 생각 끝에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된 곳이 감실이다. 금화, 은화를 모두 감실에 두고 그 앞에 ‘이 곳은 주님께서 계신 곳입니다.’라고 써 놓았다. 그런데 며칠 후 감실에 가 보니 문이 열려 있었고 돈은 온데간데없었다. 신부가 발견한 것은 도둑이 적어 놓은 쪽지 한 장, “주님은 부활하시어 이 곳에 안계십니다.”

비록 우스갯 소리기는 하지만 부활을 어떻게든 체험하고 싶은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서는 부활을 어떻게 증언하고 있는가?(다음 주에 계속)

4월 18일:부활 제3주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 대축일은 지났지만 부활 시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을 통해 이 기쁜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분을 믿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신앙의 핵심적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분을 그분의 말씀과 이 미사를 통하여 만나기 전에 잠시 침묵 속에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쭕`제1독서/사도 2, 14.22-33

``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오늘의 독서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속한다. 베드로의 설교는 먼저 말씀의 수신인들을 지칭한 다음, 이어지는 내용을 귀담아 들으라고 주의를 준다. 베드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22절)이라는 말로 구체적으로 묘사되며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이 핵심 문제로 떠오른다.

하느님께서 보증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이나 성서에 계시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때 십자가의 걸림돌이 없어진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가장 오래된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다윗은 이미 무덤에 있기 때문에(29절) 시편 16,8-11에서 가리키는 인물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베드로는 입증하고 있다.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한 복음 선포는 예수님의 ‘들어 높여짐’에 대한 신앙 고백에서 절정에 이른다. 하느님의 오른편에 올려지신 분께서 자신의 교회 공동체에 건네 주시기 위하여 성령을 받으신다. 이로써 예수님의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의 파견이 복음 선포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쭕`제2독서/1베드 1,17-21

`(여러분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권면은 그리스도론적, 구원론적인 초대 그리스도교의 전승들을 수용하고 있으며 저자는 하느님께서 ‘아버지’로 불린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하느님께서는 혈통상의 아버지가 아니라 다시 태어난 이들의 아버지이시다. 그런데 이 아버지께서는 각자의 업적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재판관이시다(17절). 심판의 기준은 두려움과 하느님께 대한 복종이다. ‘두려운 마음’을 가지라는 권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 의식을 갖게 해 준다.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이 주어졌다는 것을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과거에서 해방되었다. 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계시자로 창세 이전에 이미 정해지신 분이시다(20절).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이와 같이 베드로 1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저자의 관심사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기 때문에 믿음이 곧 희망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믿는 이들 역시 죽음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을 안겨 준다. 이 희망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위한 결정적인 추진력이 된다.



쭕`복음/루가 24,13-35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이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다룬 것으로 고유 전승에 기초를 둔 것으로 루가의 문학적 절묘함을 드러내 주고 있다. 한 사람의 이름만 글레오파로 밝혀진 채 두 명의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도중 이즈음에 발생한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때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서 그들과 합류하고 그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그들은 예수라는 예언자가 어떻게 죽임을 당했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그들의 희망이 어떻게 깨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날이 그가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인데 그의 무덤은 그 날 아침에 비어 있었고 그는 온데간데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낯선 사람은 옛날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바, 곧 메시아가 영광을 받기에 앞서 고난을 당해야 하리라는 예언을 믿으라고 그들을 격려한다.

마침내 날이 저물어 낯선 이는 그들과 함께 어느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아 빵을 들기 전 감사를 드리고 나누어 준다. 이것은 그들이 전에 스승과 함께 가졌던 경험과 유사한 것이었다. 그 순간 그들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가 구약성서를 설명하실 때 그들의 마음이 감동되었음을 깨닫고 그 까닭을 알게 된다. 이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거행되는 ‘성찬례’ 안에 현존하신다는 확신을 준다. 신자들이 모여 빵을 나누며 성서를 봉독할 때에 부활하신 분께서는 성서의 의미를 깨닫도록 공동체의 마음을 열고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이다.

부활! 어떻게 믿을 것인가?(3)

4) 성서가 증언하는 부활

네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 사화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근본적인 대전제를 제외하고는 약간씩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이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부활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부활 사화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요한 20,14)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루가 24,16)도, 그리고 제자들도 자신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른 분이신가? 물론 성서는 영적 어두움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동일하신 분이시지만 부활 후에는 다른 상태에 계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부활에 대한 토론(마태 22,23 이하)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주장을 기억하여 보자. “일곱 형제가 차례대로 형수와 결혼하여 다 죽고 나면 부활 후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는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마태 22,29-30)고 대답하셨다. 말하자면 지금의 우리의 사고로 부활을 예단하고 예측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부활 뒤에 어떻게 될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부활에 관한 가장 오래된 증언은 네 복음보다는 55년경에 저술된 고린토 1서이다. 15장 전체에서 부활에 관하여 다루고 있으며 우리가 묻고 싶어하는 질문들을 당시의 고린토인들의 입을 통하여 들을 수가 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가 관심사였다.

바오로는 자연계를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씨앗을 심으면 씨앗은 죽으나 싹, 잎, 줄기, 그리고 열매를 맺어 다른 모습으로 살아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를 바오로는 ‘영적인 몸’으로 표현한다.

5) 우리는 부활을 체험하였다.

우리는 주일마다 성당에서 신앙 고백(사도신경)을 한다. “성령을 믿으며 ……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고 고백한다. 부활은 분명히 믿음의 문제이다. 매주 이렇게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부활 신앙이 없거나 부족하다면 문제가 아니겠는가?

부활 사건은 유일회적 사건에 머물지 않고,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부활 체험을 하였음에도 신앙과 연결시키지 못한 채 일상 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가정 생활을 하다보면 부부가 늘 서로 이해하고 행복하게 살 수만은 없을 것이다. 서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거나 개인의 편안만을 추구할 때 그 가정은 불행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참아 가정이 평화롭고 화목하다면 그것이 곧 행복일 것이다. 여기에 죽음과 부활이 있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실망과 좌절을 겪을 때가 있다. 인생의 좌절 속에서 새로운 하느님 체험이 있다면 그것 역시 부활 체험이다. 이것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경우와 같다. 그녀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하였다. 이 실망을 안고 그녀는 무덤으로 갔다. 빈 무덤을 보고 그녀는 또 실망하였다. 그러나 이번 실망은 다른 것이었다. 어딘가에 살아 계실거라는 신 체험을 하게 된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을 보자. 두려움에 떨던 그들이 부활하신 분을 만나자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두려움에서의 해방을 맛보고 기쁨에 찬 생활을 하는 사람은 부활하신 분을 만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들을 각자 나름의 영역에서 체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일상 생활에 나타나는 일들로 생각할 뿐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좀더 이해하고 우리의 부활 신앙을 확고히 할 때 우리의 삶은 좀더 자신 있고 우리의 생활은 기쁘리라 확신한다.

4월 25일: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면서 착한 목자 주일입니다. 또한 오늘은 성소 주일로서 전세계 교회가 사제·수도 성소를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 곧 성소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성령으로 무장시켜 주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온 세상에 펼쳐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소를 위한 기도의 날은 부활의 기쁨을 계속 전하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많은 젊은이들이 주님의 음성에 응답할 수 있도록 이 미사를 통하여 정성을 다해 기도드립시다.(잠시 침묵)



쭕`제1독서/사도 2,14.36-41

(개종한 첫 사람들)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설명한다. 그러나 청중에게 직접적으로 “너희가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유다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죄책감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였다. 이로써 그들이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표현하지만 그들이 사도들을 “형제들이여”(37절)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이미 내적으로 회심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들의 물음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회개와 세례를 받으라는 촉구였다.

성서적 의미로 회개는 범한 죄를 뉘우치거나 단순히 마음의 상태만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뜻을 지닌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신의 태도를 전적으로 바꾸어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구원의 길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하느님의 품안, 하느님의 세계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이제 옛 삶은 사라지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는 예수님의 권능 아래 들어가게 되고, 그 결과로 그의 죄가 용서받음은 물론 성령을 받게 된다(38절). 베드로는 그 곳에 모인 청중에게 죄의 용서와 성령을 약속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여기에 이방 선교에 대한 암시가 놓여 있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베드로가 행한 그리스도교 최초의 설교로 얻은 성과였다. ‘3,000명’이라는 수는 실제 숫자이기보다는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이 엄청나다는 루가적 표현이라 하겠다.

쭕`제2독서/1베드 2,20-25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성서 시대에 노예가 많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저자는 노예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노예 해방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노예 제도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저자의 의도는 죄의 대가로 내려진 형벌을 참을 수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노예가 자신의 잘못으로 매를 맞거나 학대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 있다(20절).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더라도 이를 참고 선한 일을 행할 때만이 하느님 보시기에 은총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악을 행하기보다 오히려 고난을 받음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에 그 의미와 희망이 있다는 것을 저자는 밝혀 준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그리스도의 운명적인 고난에서 고무적인 원형과 모범을 발견한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속한 이들의 모범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의 뒤를 따르는 길이란 고난의 길이다. 저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운명의 성취로 해석한다. 곧 예수님은 죄를 지으신 일이 없으면서도 묵묵히 침묵을 지키면서 앙갚음도 하지 않으시며 자신의 고난을 견뎌 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수를 포기하시고 당신의 일을 하느님께 맡기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를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이처럼 세례로써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목적은 사람들이 ‘의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다. 이제 목자 없이 파멸의 길에 빠진 ‘길 잃은 어린 양’에 비유된 이 서신의 수신인들은 ‘목자’에게 돌아감으로써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목자의 으뜸이며 보호자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고난에 빠진 이들을 돌보신다.

쭕`복음/요한 10,1-10

(착한 목자)

오늘의 본문은 문학적 형태로 보아 상징주의와 직선적인 진술이 함께 섞인 비유라 할 수 있다. 구약성서와 초기 복음 전승을 기초로 하여 요한은 “나는 착한 목자이다.”(11절)라는 중대한 그리스론적 증언을 한다.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가는 사람을 도둑이며 강도라 하는데 도둑과 강도는 분명 같은 뜻은 아니다. 요한은 여기서 한 개인이 아니라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이들의 무리를 지칭하는 듯하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200주년 성서 번역 참조) 데리고 나간다(3절). 중요한 것은 목자가 번호를 부른다거나 대충 ‘어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목자에게 속한 양과 다른 양들을 구분하여 잘 알고 있다는 표시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고, 그들은 그분께 속하여 있으므로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자 예수님께서는 숨김없이 직접 당신에게 적용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하신다. 요한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는 ……이다.”(Ego eimi)는 자기 계시를 나타내는 신적 언어이다. ‘문’은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들은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리시고 스스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들 스스로는 도저히 발견하여 얻을 수 없었던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분을 통해서’만 인간은 메시아적 공동체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가져다 주는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믿는 이들이 구원을 받음은 물론 그분 안에서 자유를 발견하며, 또한 생명을 유지시키는 수단도 발견하게 된다(9절).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요한 복음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안다는 것, 그것은 바로 넘치는 생명을 얻는 일이다.

쪱`성소 계발은 관심 여하에 달려 있다

오늘은 성소 주일이다. 각 본당에는 성소 주일에 관한 포스터가 붙어 있을 터이고 학생들은 신학교 구경(?) 간다고 들썩거릴 것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에 신학교 수가 늘어나 해마다 젊은 새 사제가 몇 십 명씩 펑펑 쏟아져 나오니 사제 부족 해소는 물론 이제 실업 사제(?)가 생길 거라는 염려 아닌 염려를 하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사제 성소가 급감하여 문을 닫는 신학교가 생길 것이라고 걱정도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현실을 보면 과연 전체 인구의 신자 비율은 몇 %인가? 본당 사목하는 사제에 대한 신자의 비율은 어떠한가?

분명한 것은 한국은 아직도 선교 지역이라는 것이다. 큰 본당의 신자가 만 명 이상이라고 자랑할 것도 못 되고 신부를 파견할 본당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도 배부른 소리이다. 각 지역, 각 분야에 해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구에 성소국이 생겨 예비 신학생들을 관리하다 보니 대부분 신부님들의 성소 계발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듯하다. 게다가 사목상 격무에 시달려 성소 계발에 여유도 없는 편이다. 싹이 좋아야 줄기가 튼튼하고 좋은 열매를 맺듯 성소의 싹도 처음부터 식별되고 키워져야 한다. 사제 양성 기간이 길고 그 기간 동안 어려움과 갈등을 겪으나 이것 역시 다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짧게 양성되거나 돈이면 다 된다는 세상에서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사제직이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본당 신부의 관심이 요청된다. 관심 두는 곳에 성소의 싹은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사제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 물질적이고 다변화된 사회에서 사제의 매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사제직은 분명 멋있다. 이 ‘멋있음’이 어떻게든 드러나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할 때에 하느님께서 거두어 주시리라 믿는다. ‘성소’에 관한 말씀을 들은 많은 이들이 ‘성소’의 꿈을 키우는 오늘이기를 바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