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신부는 신부라서 소중하다
2006년 1월호 (제 324호)
“신부님, 공소에서 퀵 서비스로 뭣이 잔뜩 왔네유.” / “뭘 이래 잔뜩 보냈다냐?” “된장에 고추장에, ...

“여러분과 함께!”
2006년 1월호 (제 324호)
여러분을 위하여 저는 주교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Vobis enim sum episcopus, vobi...

세상 안에 살아가는 사목자의 영성
2006년 1월호 (제 324호)
새해가 밝았다. 새롭게 시작하기를 염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여러 가지로 녹록하지 않은 한국 교회의 현실...

미리내와 고성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
2006년 1월호 (제 324호)
미리내와 고성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 미리내와 고성의 골프장 건설 논란을 보면서 드는 생각들 한순...

골프장은 어떤 점에서 반생태적인가?
2006년 1월호 (제 324호)
골프장 입지 조건 보통 골프장 하나의 단위는 18홀로 구성되며, 각 홀은 티그라운드, 페어웨이, 그린으로 ...

골프장 경제학
2006년 1월호 (제 324호)
1. 한동안 스포츠 사회학이라는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이 ‘스포츠’, 특히 스펙터클이라는 현상이 불...

현장의 소리
2006년 1월호 (제 324호)
미리내 성지 입구 골프장 건설 반대 운동 현황 미리내 성지 입구에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게 된 ...

미리내와 고성, 무엇이 문제인가?
2006년 1월호 (제 324호)
미리내와 고성, 무엇이 문제인가? 두개의 풍경,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대체 사태가 얼마나 급박하기에 단식...

본당 호스피스의 설립과 운영은 이렇게
2006년 1월호 (제 324호)
본당 호스피스의 설립과 운영은 이렇게 화곡본동ㆍ화곡6동ㆍ신월1동 공동 사목 본당 호스피스란 죽음을 앞...

과테말라 교회
2006년 1월호 (제 324호)
흔히 중미를 가리켜 자본의 뒤뜰이란 표현을 씁니다. 자본의 주도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아래에 자리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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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는 지금 - 가난한 자리에 가난한 교회 2006년 1월호 (제 324호)

과테말라 교회

홍승의 (청주교구 신부)

흔히 중미를 가리켜 자본의 뒤뜰이란 표현을 씁니다. 자본의 주도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아래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온갖 자본주의의 쓰레기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테말라는 그러한 중미에 속해 있는 나라입니다. 소외된 역사와 현실을 갖고 있는 인디오 부족민들이 국민의 75%를 차지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진 나라이지요. 중미 안에서도 높은 빈부 격차와 30%가 넘는 문맹률, 도시 집중화로 인한 거대 도시 빈민과 범죄, 관료의 부패, 그리고 비전쟁 국가이면서도 이라크보다 많은 사람이 총기로 죽어 가는 비참함이 얽혀 있는, 자본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씁쓸한 풍경을 당혹스럽게 마주해야 하는 곳입니다.
시골 언덕길을 오르는 매연 가득한 폐차처럼 온갖 문제와 매연을 뿜어내더라도 어쩔 수 없이 생존의 언덕을 올라야 하는 모습이 이 땅과 이 가난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복음을 살아가야 하는 과테말라 교회의 현실 역시도 결코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과테말라 교회가 가지고 있는 현안 중에 가장 시급하고 커다란 문제는 교회의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교회의 사목적 진지함이란 사람의 아픔에 대한 깊은 신앙 성찰과 품어 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이곳 교회가 마주하고 있는 삶의 자리의 가장 큰 아픔이란 역시 가난입니다. 중남미의 가난이 역사적 수탈과 구조적인 현실에서 야기된 것이라면, 이제 이 땅의 가난은 함께 나누어야만 이겨 낼 수 있는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체험 자리가 되어야만 한다는 성찰이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부족함이 많지만 다양한 선교회와 수도회가 복지 시설과 교육 시설 운영을 통해서 이곳에 따뜻한 나눔과 희망을 심어 가고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쓸 만한 복지 시설과 교육 시설들은 외국인 수도회에 의해서 꾸려지고 있습니다. 현지 교회는 가난한 삶의 자리에 가난한 교회들이라서 무슨 거창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현지 교회 역시도 자신의 여력 안에서 작은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조금 여유 있는 본당의 경우에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작은 규모의 복지 시설들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노인이나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나 공장에 다니는 부모들을 위한 무료 탁아소,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보호소나 고아원, 빈민 아이들의 교육 기회를 위한 기숙사, 그리고 양로원 같은 시설들이지요. 방 한두 칸 규모에 십여 명이 있는 정도의 소박한 시설들이 대부분입니다. 작은 시설들을 본당 테두리에서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다고 하찮게 보이거나 옹색해 보이지 않습니다. 작은 사람이 작은 사람을 품어 안는 따뜻한 희망의 자리처럼 느껴집니다.

이들 시설과 본당의 건물 배치 구조도 재미있습니다. 5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종교이면서도 의외로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본당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대부분의 본당들은 좁은 땅을 가지고 시작하였기 때문에 건물이 산재되는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본당을 찾아가면 성전이 있는 곳에서 사제관은 몇 집 건너에 있고 교육관이 다음 골목에 있으며 사회 시설은 또 다른 집에 있습니다. 건물이 한자리에 어울려 있으면 보기도 좋고 편안하겠지만 이리저리 널려 있는 모습도 지역 안에서 교회가 함께 살아 내고 있는 듯해 이제 보기가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역이 바로 본당인 듯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사회 시설들도 본당에 속하면서도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작고 가까이 있기 때문에 이웃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본당 식구들이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언제부터인가 삶의 자리에서 가난한 이들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리들 사이에서 분류하기 시작했고, 장애인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가난한 이들을 만나려면 거대한 시설에 소풍을 가듯 찾아가야만 합니다. 깨끗한 거리와 이웃을 만들고, 역할 분담과 효과적인 돌봄이란 효율적인 복지 체계를 이루어 낸 대신 우리 하나하나 삶의 틈바구니에서 사람에 대한 살아 있는 연민과 하느님 자비를 체험할 수 있는 자리를 잃어버린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여하튼 교회가 중심에서 사람을 모아 가는 구도가 아니라, 가난이란 현안 앞에서 이곳의 교회는 사람들 속에서 사람을 도와 가는 교회의 역할과 모습을 찾아가고 있나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 교회는 위압감이 없고 편안합니다. 가난한 자리에 가난한 교회 같습니다.
과테말라 교회의 두 번째 현안은 개신교의 성장과 더불어, 오랜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테말라의 종교 구성은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마야 신앙과 생시몽 신앙 같은 소수 부족 신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십여 년 사이에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개신교가 이제 국민의 40%에 이르고 있습니다. 분명 500년을 이어오는 신앙적 전통을 가진 가톨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거지요. 이곳 추기경이 올해 초 사제들에게 보낸 담화는 개신교의 성장과 가톨릭 교회의 위기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와 밀접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가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거기에 미국과 한국 개신교의 대대적인 선교 지원이 덧붙여져서 이러한 놀라운 개신교의 성장을 가져오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중미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이곳에서 개신교의 독보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 가톨릭 신자의 모호한 정체성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종교를 하나의 전통으로서만 물려받게 되는 상황에서 신앙에 대한 또렷한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는 없으니까요.

과달루페 성모 신심으로 대표되는 멕시코 교회나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로 상징되는 엘살바도르 교회와 같은 인근 교회와는 사뭇 다르게 이들은 오랜 전통에 비해 전통과 현실을 이어 줄 수 있는 힘으로서의 신앙적 매개체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가톨릭은 다만 전통이란 상징으로 남아 있게 되고 개신교는 현대라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나 봅니다. 이러한 모호한 정체성의 혼란 가운데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신자들에 대한 신앙 교육일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하고 받아들인 길이라는 신앙의 정체성과 확고함을 다시 심으려면 신자 교육과 신앙 체험의 자리들이 더 다양하게 마련되어야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일들을 해 나가야 할 사제와 선교사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구 통계에 따르면 전체 가톨릭 인구는 천만 명 정도인데 교구 사제와 선교 사제가 245명이고 수도 사제가 450명 정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중에 3분의 2에 해당하는 사제들이 수도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기타 지역의 가톨릭 교회는 사람들 가운데서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어찌 보면 개신교의 성장이 가톨릭 교회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위기가 개신교의 성장을 불러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찌 보면 개신교의 성장이 가톨릭 교회의 위축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물론 공격적인 성향과 흑백론이 강한 미국과 한국 개신교가 이곳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개신교의 성장을 통해서 이곳 가톨릭 교회는 더욱 또렷한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겠고, 또 새로운 형제로서 개신교와 건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길을 고민하게 되겠지요. 여하튼 500년 전에 이 땅의 종교이자 문화였던 마야 신앙과 대면했던 가톨릭 교회는 이제 또다시 개신교와 본격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 만남이 서로의 영역 확대가 아닌 존중과 나눔의 만남이었으면 좋겠고, 가난한 자리에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낮은 자들의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홍승의 | 청주교구 신부. 1994년 사제품을 받았고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청주교구 학산 본당 주임을 거쳐 현재 과테말라 믹스코에서 교포 사목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