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아래로부터의 영성』
2006년 2월호 (제 325호)
나는 이 책을 통해 나 자신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체험했다. 그동안 나는 오로지 위로...

『작은 교회』외
2006년 2월호 (제 325호)
『작은 교회』 서평·심상태오늘날 교회 사목자들은 ‘새로운 열의, 새로운 방법, 새로운 표현’으로 이루...

연중 제5주일~제8주일
2006년 2월호 (제 325호)
2월 5일 ● 연중 제5주일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그리스도교 정체성의 위기
2006년 2월호 (제 325호)
가장 중립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1970년대 이후 서유럽을 제외한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종교의 새로...

신앙의 칭기즈 칸을 꿈꾸는 몽골 교회의 새싹
2006년 2월호 (제 325호)
“너 몇 살이니?” 어린이들과 처음 만나면 곧잘 던지는 질문입니다. ‘너’를 알고자 하는 출발로서 ‘나...

전주교구 군산 지구‘거룩한 독서’모임
2006년 2월호 (제 325호)
전주교구 군산 지구의 신부들이 2003년 1월부터 시작하여 이제 막 세 돌을 넘긴 ‘거룩한 독서’ 모임을 찾...

원주교구 고한 본당 흑빛공부방
2006년 2월호 (제 325호)
공부방은 희망의 이름이다. 학생에게 공부방은 밝은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도약할 수 있게 해 주는 기회와 ...

어설픈 본당 신부
2006년 2월호 (제 325호)
어려운 원고를 부탁받았을 때는 울산 우정 본당 주임이었지만, 올 1월 10일에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 대학...

좀 더 예언자적인 한국 교회를 기대하면서
2006년 2월호 (제 325호)
오늘날 외방 선교의 핵심은 상호 나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곧 옛날처럼 한 교회에서 선교사들을 일방...

유스 소공동체 프로그램
2006년 2월호 (제 325호)
교회에 청소년이 줄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학생 수가 늘어나는 본당이 있다는 반가운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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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복음 해설 2006년 2월호 (제 325호)

연중 제5주일~제8주일

편집부

2월 5일 ● 연중 제5주일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 마르 1,29`-`39

죄의 악취가 회개의 향기로
여러분 침대 머리맡에 예수님께서 서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계속해서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와 계신데도 여러분이 계속해서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기 우리 앞에 와 계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을 잡을 수 없다면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도록 합시다. 우리가 예수님의 머리에 다다를 수 없다면 우리의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어 드립시다. 우리의 회개는 구세주의 향기입니다. 구세주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지 보십시오. 우리의 죄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납니다. 죄는 부패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 주님께서 죄를 향기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복음사가는 “그리고 곧 열이 가셨다.”(마르 1,31 참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손을 잡자 열이 달아난 것입니다.
예로니모, 「마르코 복음 강해」 2

베드로 사도 장모의 병
베드로 사도는 장모가 분명히 집에 아파 누워 열병을 앓고 있는데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시도록 강요하지 않고, 먼저 예수님께서 다 가르치시고 다른 많은 사람을 치유하시는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부터 개인적 관심사를 공동선에 앞세우지 않도록 조심하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에게 은총을 베푸시려고 스스로 베드로 사도의 집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어부들이 어떤 집에서 살고 있었을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좁은 집에 서슴없이 들어가심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자만심을 낮추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 27,1

기도의 습관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되 헛되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기도를 하지 않으셨어도 되는데도 기도로 바라신 것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가운데 누가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마르코 복음사가는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장에서는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신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또한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라고 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기도하신 그분께 언제나 응답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오리게네스, 「기도론」 13,1



2월 12일 ● 연중 제6주일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 - 마르 1,40`-`45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신 이유
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금지하는데도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티토 1,15)라는 것을 보여 주시고자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한 사람 안에 있는 불결이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으며, 외적인 불결이 마음의 정결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셔서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들 몸에 난 상처 때문에 또는 그들이 저지른 어떤 잘못 때문에 그들을 무시하거나 혐오하거나 비참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몸을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시는 그 순간 바로 나병은 사라집니다. 주님의 손은 나병 환자가 아니라 깨끗해진 몸에 닿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영혼 안에 나병 같은 결점이 있거나 또는 마음이 죄에 오염된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하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나병 환자의 치유」

손을 내밀어 대심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단순히 말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우리는 이 행위를 잘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단지 의지와 말씀으로 낫게 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는 일까지 하신 것입니까?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에 종속되시기보다는 율법이 당신 손안에 있음을 나타내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이제부터 그 어떤 것도 불결하지 않습니다(티토 1,15 참조).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종이 아닌 주님의 자격으로 치유하셨음을 보여 주십니다. 나병이 주님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주님의 거룩한 손이 나병이 든 몸을 치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 25,2

율법과 나병 환자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마태 8,2-3). 이렇게 손을 내밀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든지 나병 환자를 가까이하는 자는 불결해진다고 율법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흠을 고치셔서 그 본성이 선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된 나병 환자를 사제에게 보내셔서 사제직을 지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치유된 나병 환자에게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예물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태 8,4; 마르 1,44; 루카 5,14 참조).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확인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나병에 관한 많은 율법 조항이 있었지만, 어떤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께서 오셔서 당신의 말씀으로 치유하시고 나병 때문에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 많은 율법 조항을 폐기하신 것입니다.
시리아의 에프렘, 「타티아누스의 디아테사론(네 복음서 발췌집) 해설」
침묵의 선익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침묵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침묵 속에 오래 감추어져 있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다 보면, 자신들의 소임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섭리가 작용하여 이들의 행동이 그들의 뜻과는 반대로 알려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베다, 「마르코 복음 강해」 1,1,45
2월 19일 ● 연중 제7주일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 마르 2,1`-`12

혼란에 빠진 율법 학자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겼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욱 담대하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선언하시면서 하느님과 당신이 같다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요한 5,16-18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 담대한 선언을 행동으로 확증하셨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율법 학자들 스스로는 이에 관한 정의를 내리고, 계명을 들이대고, 율법을 해석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 자신의 말로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은 바로 너희들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지붕에서 내려진 중풍 병자에 관한 강론」 6

전인적 치유
데모크리투스는 의사의 의술은 육체의 병을 낫게 하고, 지혜는 영혼을 억압에서 자유롭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스승이며 지혜이신,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아버지의 말씀께서는 당신 피조물의 모든 본성을 돌보십니다. 인류의 완전한 의사이신 구세주께서는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치유하십니다. 구세주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중풍 환자는 곧 힘을 얻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교육자」 1,4


치유의 표징
여러분의 들것을 들고 가십시오. 한때 여러분을 나르던 들것을 들고 가십시오. 입장을 바꾸어 보면 여러분의 질병의 증거였던 것이 이제 여러분의 건강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통의 침상은 치유의 표징이 됩니다. 들것이 무거웠던 만큼 여러분은 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베드로 크리솔로고, 「설교」 50,6

행동의 요구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가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고 있을 때, 그에게 건강한 상태에서만 할 수 있는 행동을 요구하셨습니다. …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치유하신 사람에게 일종의 응답이나 의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암브로시오, 「그리스도인 신앙에 관하여」 4,8,54-55


2월 26일 ● 연중 제8주일

단식 논쟁 - 새 것과 헌 것

(…)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마르 2,18`-`22

참다운 단식
단지 육식을 금하려고 단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참다운 단식은 악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당한 계약을 모두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웃을 용서하십시오.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바실리오, 「단식에 관한 강론」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참다운 죽음은 빵에 대한 굶주림이나, 만질 수 있는 물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결과입니다. 참다운 죽음은 듣지 않는 사람의 영혼에 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위 바실리오, 「이사야서 해설」

신랑이 함께 있음
우리 구세주의 강생이 선조들에게 처음 약속된 때부터, 많은 올곧은 영혼들이 눈물과 비탄으로 그분께서 오실 것을 늘 기다려 왔습니다. 부활하신 이후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때부터 성인들의 모든 희망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류와 함께 계실 당시에는 그분의 현존을 축하해야 했습니다. 울고 탄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신부처럼, 영적으로 사랑하는 그분을 육적으로도 가까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랑은 그리스도이시며 신부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신랑의 친구와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모두 신랑의 신앙의 동반자입니다. 혼인의 때는 강생의 신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거룩한 교회와 결합시키는 때입니다(묵시 19,7 참조).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혼인에 통상적인 육적인 방식으로 오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일종의 신비한 의미를 위한 것입니다(요한 2,1-12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인 사랑으로 교회와 혼인하시고자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방은 동정 어머님의 태중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 본성과 결합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결합하시려는 신랑처럼 나오신 것입니다.
베다, 「복음 강해」 1,14

종의 신분에 대한 거부
몇몇 사람의 영혼은 신앙으로 거듭나지 않았기에 헌 옷, 헌 가죽 부대와 같습니다. 아직 성령의 은총으로 거듭나지 않았기에 이들은 약하고 세속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습니다. 이들의 모든 애착은 현세 생활을 향해 있고 세속적 구경거리에만 몰려다니며 덧없는 영화를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곧바로 발에 족쇄가 채워진 노예나 다름없이 된다는 말을 듣게 될 경우 모욕감을 느끼고 공포에 질려 선포된 말씀에서 도망가려 할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우상에 관하여”, 「강론」 16,9

내적 즐거움과 외적 즐거움
포도주는 우리 마음의 힘을 북돋아 주고, 의복은 우리를 외적으로 보호합니다. 이 둘은 모두 영성 생활과 연관이 있지만, 의복은 세상 사람들의 눈앞에서 빛나는 선행을 의미하는 반면, 새 포도주는 믿음, 희망, 사랑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창조주의 눈에는 우리의 영혼이 내적으로 영적인 새로움으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베다, 「마르코 복음 강해」 1,2,22

새로운 은총
예수님께서는 신약의 새 제자들을 위하여 새로운 형식의 기도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고, 새 옷에 새 헝겊을 대는 것이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지난 시절에 성행했던 할례와 같은 관습들이 폐지되기도 했고, 일부 율법들은 보완되었으며, 예언들이 이루어지고 신앙 그 자체가 완성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새로운 은총으로 모든 것이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새로운 은총은 복음이 나타나면서 구시대를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기도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