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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와 오늘』
2006년 3월호 (제 326호)
상대가 누구든 형제적 사랑으로 인내롭게 들어 주고 품어 주거나 또 내 생각을 진솔하게 전하지 못하고 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외
2006년 3월호 (제 326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은이 | 이영헌 출판사 | 바오로딸 발행일 | 2004년 4월 15일 면 수 | 52...

사순 제1주일~제4주일
2006년 3월호 (제 326호)
3월 5일 ● 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006년 3월호 (제 326호)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약 전 세계 그리스도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

신학 논쟁의 문제인가?
2006년 3월호 (제 326호)
원문 | Christoph B쉞tigheimer, “Eucharistie als Opfer - Eine kontroverstheologische Frage?”, Stimm...

교육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자 노력하는 중국 교회
2006년 3월호 (제 326호)
너무 큰 중국 손님들이 북경에 오게 되면 주로 만리장성과 고궁 정도는 꼭 보고 싶어 합니다. 만리장성과 ...

대구대교구 3대리구 4지역 복음 나누기 금요 모임
2006년 3월호 (제 326호)
사제 소공동체 - 복음 나누기 금요 모임 대구대교구 3대리구 4지역의 ‘복음 나누기 금요 모임’은 8개 본...

대전교구 문창동 본당 무료 급식소
2006년 3월호 (제 326호)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5). “가장 작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

시골 본당 신부의 단상
2006년 3월호 (제 326호)
신학교에서 다시 본당 신부로 2004년 7월에 다시 교구로 돌아왔다. 지난 5년 반 동안 대구에서 학생들을 가...

빈곤, 발전, 청빈 그리고 선교 본당
2006년 3월호 (제 326호)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살고 가난한 사람 가운데 활동하신 것이 분명하여도, 현재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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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 동향 - 희생제인 성찬례 2006년 3월호 (제 326호)

신학 논쟁의 문제인가?

크리스토프 뵈틱하이머

원문 | Christoph B쉞tigheimer, “Eucharistie als Opfer - Eine kontroverstheologische Frage?”, Stimmen der Zeit, 2005년 10월 호, 651~ 664면, 이종범 옮김.

크리스토프 뵈틱하이머 | 신부. 1960년 독일 슈베비쉬 게뮌트에서 태어났으며, 1991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1993년 뮌헨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독일 아이흐슈태트-잉골슈타트 가톨릭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독일어권 교의·기초신학 연구회 회원이며 루터학회 회원이기도 하다.


독일 천주교 주교회의와 독일 연합루터교회 총회장단이 설립한 공동 연구회는 「의화론에 관한 공동 선언」(1991년)의 발표 이후 교회에 관한 이해 곧 교회론을 차기 신학 논쟁의 주제로 삼았다. 사실 많은 신학자들, 특히 개신교 측에서는 처음에 성찬례(Eucharistia)를 주제로 제안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톨릭 교회 측에서 다음의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교회론을 주제로 삼기를 원하였다.
첫째로, 미래의 교회가 어떠한 구체적 형태와 신학적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인지와 연관하여 현재 교회 일치 운동의 목표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도적 계승 안에 성립된 주교직이 교회다운 교회의 존립에 본질적인 것으로 존중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하여 개신교는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미래의 교회 공동체의 구조와 연관하여, 종교 개혁 이후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서로 대립하고 있어서 교회론적으로 좀 더 상세한 논의가 필요한 교회의 현실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의화론에 관한 공동 선언」(43항)과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일성과 구원적 보편성에 관한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16항 이하)에서 논의된 바가 있다. 그런데 「주님이신 예수님」에 관한 오해가 전혀 없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둘째로, 교회 일치론자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성찬례에 관한 신학 논쟁은 교회론에 관한 것보다는 수월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에게는 성찬례 교리에 관한 구속력 있는 합의가 조만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신학적으로 다른 것 못지않게 중요한 “주님 만찬의 이해에 관한 공동 성명”(gemeinsame Erkl둹ung zum Verst둵dnis des Herrenmahls)1)이 당장이라도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한 문서가 공동으로 발표되고 나면 적어도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성찬 공동체(Eucharstiegemeinschaft)가 당장 현실화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성찬 공동체가 더 이상 논의하기 힘든 것으로 당장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주제이다. 현재로서는 성찬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현재 교회의 개념에 관한 공동 이해를 지속적으로 추구할 긴급한 이유가 없는 것이라면, 교회의 풀뿌리 신자들의 관점에서 교회 일치 운동의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주님 만찬의 공동 예식(gemeinsame Feier des Herrenmahls)이 이미 실시되고 있기 때문에 성찬 공동체라는 목표는 이미 달성된 것일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심사숙고를 거치고, 가톨릭 교회의 주장도 어느 정도 작용하여 5년 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의화론에 관한 공동 선언」이 발표되자마자 시작된 교회 일치를 위한 논의의 제4회기 주제로 교회론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현재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회 간의 교회 일치 대화의 주제가 교회론이기는 하지만, 이 논문에서는 성찬례를 주제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한편으로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오늘날 성찬례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교리적 차이인 제사적 특성에 관한 논의가 더 이상 교회 분열의 근거가 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가톨릭 교회의 성찬례 이해에 끼칠 예상되는 결과가 무엇인지 검토할 필요도 있다. 교회론에 관한 논의가 여전히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음에도 과연 성찬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히 분리되고 적대적으로 남는다 …
종교 개혁 시대에 성찬례에 관하여 교파들 간에 드러난 가장 커다란 차이는 실재적 현존(Realpr둺enz)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성찬례의 제사적 특성에 관한 것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미사성제(제사, Messopfer/sacrificium) 교리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되풀이한다는 주장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화해의 행위가 단 한 번에 완결된 것이라는 진리를 손상시켜, 하느님을 멀리하는 이들이 오직 믿음을 통하여(sola fide) 의화된다는 복음을 왜곡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2)
여기에서 더 나아가 비텐베르크의 종교 개혁3)에서는 미사가 “선행이며 희생”이라는, 곧 사효적(事效的, ex opere operato) 보상 또는 예식이라고 주장하는 미사성제(sacrificium)의 개념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개신교 신학의 핵심인 의화론을 바탕으로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힘으로 자신을 의화하려는 노력, 모든 보상 행위를 부인하고 「슈말칼덴 신조」4)에서 “교황의 미사는 가장 엄청나고 가장 끔찍한 혐오스러운 일”5)이라고 단죄한 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교황이 행하는 다른 많은 우상숭배 행위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조롱하였다. 이러한 판단으로 마르틴 루터는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분리되고 적대적으로 남는다.”6)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서』7)에도 이와 유사한 다음과 같은 단정적 결론이 나와 있다. “그러므로 미사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희생과 수난을 부인하는 것이며 저주스러운 우상숭배인 것이다.”8)
“미사성제”에 대한 이러한 냉혹한 비판은 미사의 희생제적 특성에 관한 이해를 조금도 수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러 교회 일치 대화를 통하여 이 어려운 문제에 관한 의견 접근을 보아 신학적인 기본적 의견 수렴이 이루어졌다.9) 이에 도움이 된 것은 마르틴 루터가 비난한 것이 가톨릭 교회의 성찬례 교리가 아니라 당시 가톨릭 교회의 미사의 현실적 결점과 오용이었음을 이해하게 된 데 있다.
사실 중세 후기에 들어서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찬례의 성사적 의미가 크게 손상되었다. 성사성과 희생제의 의미, 더 나아가 미사성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등의 개념들은 별개의 것이 되었으며, 그 결과로 교회 생활에서 교회의 봉헌은 별개의 것이 되어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되풀이하거나 기억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트리엔트 공의회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인 십자가 구원 행위의 완결성이 진실임을 확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성찬례를 통하여 성사적으로 현존한다고 강조하였다. 그 결과 십자가 희생과 성찬례의 일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성찬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되풀이하거나 지속 또는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Gegenw둹tigsetzung/representatio)10)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찬례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확언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돌아가셔서 화해를 이루신 것과 연관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다운 대속 제물(S웘nopfer)이신데 … 이는 우리가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을’(히브 4,16) 수 있도록 작용한다. … 그리고 유일한 희생 제물로 현재 사제가 봉헌하는 것이며 또한 당시 십자가에서 봉헌된 것이다. 다만 봉헌하는 양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DH 1743).
그러므로 성찬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사적으로 현존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주님께서 단 한 번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구원 사건이 효력을 가지게 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중재하실 수 있으시며, 십자가에서 단 한 번 돌아가신 일에 화해를 이루는 구원의 힘이 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교회 일치를 위한 양자간 그리고 다자간 대화에서 성경적 개념 그리고 다른 모든 성찬례적 측면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현재에 작용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기념 또는 기억”(Ged둩hnis/anamnesis 또는 memoria)을 되짚어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찬례”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할 수 있었다.11) 미사성제의 개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당신을 희생하신 일의 “기념”과 연관이 되며, 모든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래의 [희생의] 행위자이심을 명확히 하여 근본적 견해 차이는 해결될 수 있었다. 이제 성찬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에 완결된 희생이 지속되거나 반복 또는 보완되거나 추가되는 것이 없으며 기념 또는 기억을 통하여 성사적으로 현존하는 것이라는 십자가 희생에 관한 신학이 간략하게나마 공동으로 성립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이고 단 한 번의 자기 봉헌은 하나의 완전한 희생제이다. 그리스도께서 높이 들어 올려지신 주님으로서 기념을 통해 성찬례에 몸소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성사적 기념을 통하여 주님의 속죄 행위에도 또한 참여하게 된다. 성사의 방법을 통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성찬례의 기념(anamnesis) 안에서 단 한 번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히브 10,12)이 신자들을 위해 현재화되고 작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주님의 만찬이나 다른 어떤 교회의 행위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되풀이하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 앞에서도 결코 과거가 될 수 없고 항상 유효한 것인 그리스도의 희생이 성찬례에서 현존하는 것인 한, 주님의 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존(Pr둺enz)이 희생되신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것은 루터교회 신자들의 신앙과도 일치한다(히브 12,24; 묵시 5,6 참조).”12)
루터가 미사는 “가장 엄청나고 가장 끔찍한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비난한 것은 이미 1978년에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회가 공동으로 주님의 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현존하시고, 세상의 죄 때문에 단 한 번 봉헌되신 희생 제물이심”을 고백함으로써 그 효력을 상실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지속되거나 반복될 수 없고 대체되거나 보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희생은 공동체 안에서 늘 새로워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13) 그 결과 1993년 독일 라인란트 주의 개신교 지역 교회회의에서는 「슈말칼덴 신조」에서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비난한 것과 『하이델베르크 교리서』에 나온 “저주스러운 우상숭배”라는 표현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고 선언한 바가 있다.
교회의 봉헌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운명, 파스카 사건에 참여하게 된다(로마 12,1; 15,16 참조). “신자들이 신앙으로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스스로를 봉헌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화해의 제사에 참여하게 된다(로마 12,1 참조). 그리고 이 화해의 제물은 신자들에게 세상에 봉사하기 위한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1베드 2,5) 능력을 갖추어 준다.”14) 성찬례의 희생제적 특성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을 봉헌하신 일, 곧 십자가 사건에 은총으로 함께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
마르틴 루터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봉헌한다.”15)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 베드로 전서 2장 5절의 말씀을 근거로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를 한 모든 사람들이 고난, 선포 그리고 선행의 형식을 통하여 드리는 “감사제” (Dankopfer/sacrificium laudis)를 언급한 바도 있다.16) 더 나아가 비텐베르크의 종교 개혁은 “성사 안에 현존하는 십자가 희생에 관한 주님 만찬의 감사제의 의미”17)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하여 독일 천주교 주교회의와 독일 연합루터교회 총회장단이 설립한 공동 연구회는 다음과 같이 확언하였다. “기도와 미사를 통해 바친 봉헌을 감사제(Dankopfer)라고 하는 것에 관하여 논쟁의 여지가 없다.”18) 확실히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행위와 인간의 응답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공동체의 감사제는 독단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활동으로 가능해진 감사와 찬양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이다. “성사의 실행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결코 독자적 보충의 의미를 가진 ‘대등한’ 사건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세대를 위한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하는 일이다.”19) 그래서 오늘날에는 종교 개혁 시대의 신학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공동체의 찬미감사제는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20)
이러한 성찬례의 희생제적 특성에 관한 교회 일치적 의견 수렴을 넘어서서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신학은 “교회의 봉헌”(Opfer der Kirche)에 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이는 가시적 전례 행위[sacrificium visibile], 곧 빵과 포도주의 바침을 통하여 표현된 교회의 고유한 자기 봉헌을 말하는 것이다.21)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향하여 나아가고 … 그리스도에 사로잡히게 된다.”22) 다시 말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인류에 대한 사랑 안으로 들어가서 그 자신이 하느님과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개인뿐 아니라 교회로서 십자가 사건과 관련되어 있고 주님의 파스카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 (그래서) … 가톨릭 교회의 전례와 신학에서는 성찬례에서 교회의 봉헌도 (언급하는 것이다.) …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그리스도와 대등한 봉헌의 자립적 주체가 아니라 몸의 머리가 되시는 원래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다.”23)
이미 바오로 사도도 - 후에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마찬가지로24) -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사건에 공동체가 함께하는 일에 관하여 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합당한 예배”는 공동체가 자기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 참조)로 바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신자들이 모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감사제와 감사기도를 넘어서 교회 자신이 성찬례를 통하여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25)
개신교가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이러한 식의 교회의 자기 봉헌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인간은 의화될 때 본질적으로 수용자이지 행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화해의 현실이 되시고 그렇게 머물러 계신다는 것이 보장되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solus Christus)라는 진리가 흐려지지만 않는다면 교회를 강조하며 성찬례를 이해하는 것을 굳이 반대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성찬례가 ‘교회의 봉헌’이라는 것은 … 결코 교회가 자체적으로 그리고 마음대로 그리스도의 희생에 무엇인가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을 가리키고 교회의 무기력을 고백하며, 스스로를 완전히 그리스도께 맡기고, 또한 아버지께 보여 드리며 바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26)
그래서 이른바 성찬례의 예수님의 행위와 교회의 행위의 관계는 교파마다 다르게 규정된다. 그럼에도 양측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유일성과 완결성 그리고 … 교회의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기념한다.”는 것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기 때문에 미사의 봉헌에 관한 논의는 오늘날 더 이상 교회를 분열시킬 만한 수준의 것이 되지 못한다.27)
성찬례를 봉헌으로 이해하는 데 이른바 견해차를 인정하는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견해차가 지금까지 밝혀진 주님 만찬의 이해에 관한 근본적 확신을 무효화하여 이를 교회를 분열시키는 근거로 삼는 일이 없도록 하면서, 그 견해차에 대하여 서로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이와 연관하여 다른 기관도 아닌 바로 교황청의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가 1992년에 루터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공동 문서인 「주님 만찬」의 내용에 동의할 뜻을 밝힌 바 있다. 이 문서는 앞에서 언급한 근본적인 견해의 일치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1978년 양측이 공동으로 작성한 것이다.
교회 일치에 관련된 문제
성찬례의 제사적 특성에 관한 의견 수렴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론이 동시에 내려진다. 첫째, 지금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여기에서 이룩한 양 교회의 의견 수렴의 내용을 신자들에게 알리며 교육적으로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둘째, 양 교회가 서로 합의한 교리 내용에 비추어 각자의 전례 규정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수정하는 일이다. 이는 가톨릭 교회에도 해당된다. 사실 중세 시대의 가톨릭 교회의 제사의 의미와 연관된 미사 관행이 여러 가지 오해와 남용을 야기한 바가 있다. 확실히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미사 전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다음의 세 가지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물 준비 기도
가톨릭 교회의 성찬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좁은 의미의 성사적 현존은 공동체의 예물 봉헌과 감사 봉헌, 곧 성찬례를 위한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때 드리는 기도에서 사제는 “땅과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얻은 수확”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 수확은 제물과 더불어 성찬례에 참석한 신자들, 나아가 모든 피조물을 포괄하는 것이다. 예물 준비(offetorium)는 예물 준비 기도(oratio supra oblata)로 이어지는데 독일 미사 통상문 제3양식에 따르면 사제의 선창과 신자들의 응송에 “제사”(Opfer/sacrificium)의 개념이 들어 있다.
“사제: 형제자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제사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도록 기도합시다.(역자 주 - 한국의 미사 통상문: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바치는 이 제사를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기꺼이 받아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신자: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제사를 주님께서 받아들이시어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주님의 모든 거룩한 교회에는 은총이 되게 하소서(역자 주 - 한국의 미사 통상문: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온 교회에는 도움이 되게 하소서.)”(MD II 347).
이러한 예물 준비 기도는 매우 오해받기 쉬운 것이다. 여기에서 “제사”의 개념이 정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형식적인 예물 준비 기도가 “신학적으로 제사의 의미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28)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예물 준비 기도와 연관된 공동체의 찬미감사제 또는 공동체의 자기 봉헌은 십자가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성찬례에 관한 회칙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에서 강조된 것처럼29) 교회는 그리스도를 봉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예물 준비 기도에서 말하는 것이 하느님께 바쳐지는 빵과 포도주의 예물을 의미하지도 않는다.30) 여기에 더해 예물 준비 기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의 연관을 언급하지 않고 [사실상] 필요 없는 “사제의 우위성을 강조”31)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이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봉헌되는 것이 아니라 독단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거나,32) “예물을 바치는 것이 이미 본래의 그리스도의 희생과 교회의 봉헌과 연관된다”33)는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일치 대화에서 거듭 등장하는 주님 만찬의 제사적 특성에 관한 이러한 그리고 이와 유사한 오해를 불식시키려면 이러한 불분명한 예물 준비 기도보다는 독일 미사 통상문의 제1양식이나 제2양식의 예물 준비 기도 중 한 가지를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제사 개념을 교회론적으로 활용할 때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봉헌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보고 이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의 봉헌이 독자적인 것처럼 보이거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이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성찬례를 제사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하느님의 행위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교회의 행위로 묘사한다면 이는 성경의 말씀과 신학적 문제 제기를 축소시키는 일이 된다.”34)
공동체의 찬미감사제와 교회의 봉헌은 결코 그리스도의 사건과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을 기념하는 현재화와 - 대등한 독자적인 행위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연관된 모든 표현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특정한 가톨릭 공동체에서 활발한 여러 속죄 경건주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의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사 개념 사용의 모든 모호함에 대한 종교 개혁주의자들의 공격은 정당하다.35) 이들의 주장은 오늘날의 교회 일치 대화에서도 여전히 존중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사 헌금과 미사 예물
신자들의 미사 봉헌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바로 미사 예물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실행되고 있는 것인데 전례학과 교회 일치의 관점에서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수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헌금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기 1000년까지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이후에도 사제와 수도자들도 예물을 바쳤다.” 이는 성찬제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 또는 능동적 참여(participatio actuosa)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제들은 대부분 빵과 포도주를 바쳤고 나머지 신자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농산물을 바쳤으며 중세에 들어서는 금전을 바치는 경향이 늘어나게 되었다.”36)
중세 초기부터 이미 신자들의 봉헌은 대개 자선의 성격을 가진 것에 제한되었다. 이는 별도로 직접 기부하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 교회 운영 비용, 사제의 급여 등에 사용되는, 제단에 바치지 않은 예물인 것인데 여기에서 헌금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37) 이 헌금은 오늘날까지도 사실상 “봉헌”의 의미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성찬례와 직접 관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이 좁은 의미의 성찬례 때 바쳐져야 하는 것인지, 또는 이러한 의미의 헌금과 성찬례 자체를 위한 봉헌의 차이를 어떻게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가 나타난다. 최소한 이러한 성격의 헌금은 제단이 아니라 제단 근처의 다른 장소에 놓여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38)
교부 시대부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미사 전례에서는 봉헌자의 이름 그리고 봉헌물을 받는 자의 이름을 공개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관련자들이 하느님 앞에 내세워지게 된다면, 호명되는 것이 곧 “점점 더 전구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면서 미사에 직접 참석하지 않은 이들, 곧 교황, 주교, 영주 그리고 성인들과 죽은 이들도 포함한 하느님께 봉헌하는 교회 공동체의 ‘친교’(communio)를 나타내던 의미는 사라지게 되었다.”39) 신자들이 바친 예물과 성찬례를 분리하여 생각하게 되면서 각자가 준비한 다양한 종류의 봉헌물과 헌금을 위한 공동 봉헌 절차가 생겼을 뿐 아니라 봉헌물과 관련된 이들을 호명하는 것을 전구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헌금과 관련된, 오늘날에도 여전한, 이른바 거래가 있다는 인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신자들은 봉헌물을 자신이나 죽은 이들의 영혼의 구원에 관한 희망과 연관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사제를 통하여 미사 봉헌을 하고 그 봉헌이 은총을 받기 위한 것으로 활용되면서 특별한 경우에 일종의 반대 급부가 있기를 기대하게 된 것이다.”40)
사실 봉헌자가 공동 봉헌자로 이해되었으나 신자들은 미사성제를 “더 이상 스스로를 봉헌하여 함께 드리는 공동 감사제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이보다는 오히려 간구를 위한 제사와 속죄를 위한 제사, 그리고 성찬례의 ‘은총’과 ‘효과’를 앞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신자들은 이를 예물을 통하여 확실히 얻고자 한 것이다.”41)
현금 봉헌, 미사 예물 그리고 봉헌물 등은 중세 시대의 미사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잘못이 종교 개혁가들의 비판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이와 유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성찬례의 효과나 사제의 직무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흔히 말하는 “미사를 사다”(eine Messe einkaufen) 또는 “미사의 값을 치르다”(eine Messe bezahlen) 등의 표현은 오늘날에도 미사 헌금에 관한 생각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헌금에 다시 원래의 성찬례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사목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헌금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물, 또는 성찬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이며 “능동적 참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교회가 감사제를 드리는 것과 관계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찬양은 진실된 전구와 간구를 가능하게 하고 그 근거가 되는 미사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42)

대속하여 돌아가심
성찬례가 예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려고 돌아가신 것을 현재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만큼 대속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공립학교 교실에 고상을 걸어두는 일에 관련된 논란과 연관하여 비저(Eugen Biser)는 한마디로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다.”고 말한 바 있다.43) 비저는 “신약을 근거로 하여 고전적인 정답으로 정착된, 하느님의 정의로운 벌을 오직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완전히 보상하실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 반드시 돌아가셔야만 했다.”는 생각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옳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엄한 벌을 내리시는 하느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와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전통적인 하느님의 모습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키는 요소들을 완전히 거두어 가시고 그 대신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대체하셨기 때문에 종교 역사에서 최고의 혁명가가 되신 것이다.”44)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인류의 죄를 완전히 보상해야 한다는 요청과 모순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대속하여 돌아가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합리화하는 것, 곧 “순전한 자기 합리화”로 보일 수 있다. “죽음을 통하여 인간 생명의 의미가 밝혀졌다.”45)는 생각을 바탕으로 비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의 목적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죽음을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해석한다. “골고타의 밤에 - 궁극적이고 거역할 수 없는 - 하느님 사랑의 태양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46)
비저는 이러한 논의로 1970년대 이후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신학계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주제가 되어 온 희생의 의미를 짚어 보고 있는 것이다.47) 마르틴 루터뿐 아니라 칸트와 니체도 교부들이 발전시키고 특히 안셀모가 체계화한 보상(Satisfaktion)이나 대속제(S웘neopfer)의 개념을 문제 삼았던 것처럼, 최근 수십 년 동안 신학자들은 교파를 떠나서 이 개념의 재구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비저가 주장한 것처럼 사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하느님의 사랑의 지평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인류의 죄의 구렁텅이를 메워서 하느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욱 극명하게 증명하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심지어는 인간의 죄의 구렁텅이까지도 포함한 모든 것을 하느님의 궁극적이고 조건 없는 구원 활동과 연관시키셨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역사적 형태를 갖추게 되고 또한 이것이 완성되고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 이다.”48)
예수님의 구원 행위를 성경의 증언과 모순되는 법률적 사고를 통해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구원 행위는 우의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곧 이를 사랑으로 말미암은 온전한 자기 헌신과 자기 포기의 의미로, 그리고 이와 연관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하느님을 대신하여 보편적으로 선포한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구원 행위는 “원래 하느님을 대신한 완전한 자기 헌신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인간은 바랄 뿐이고 하느님께서 가능하게 하시는 생명의 구원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속죄를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속죄를 간구한 것이다.”49) 예수님께서 자기 헌신을 하는 대상은 자비로우실 수밖에 없으신 하느님이 아니라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다.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이러한 인간에게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구원의 기회가 다시 한 번 선포되고 미래의 생명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피의 보상, 나아가 보상 자체가 필요 없으신 분이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온전히 자유로운 은총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실 수도 있는 분이시다.”50)
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인간의 죄 때문에 하느님께 끼치게 된 엄청난 모욕에 대한 반드시 필요하고 무한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하느님을 달래 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죄의 구렁텅이 전체를 드러내 보이고, 죄마저도 감싸고 나아가 그 죄를 사랑으로 변화시켜 이겨 내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무한히 용서하시는 사랑이 최상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보상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이 죄 값을 치르도록 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포기하셔서 화해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2코린 5,19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의 어두움 안에 들어오신 사랑의 선물이다. 이 사랑은 그 어두움을 몰아내고 미래를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51)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성찬례의 희생제적 특성을 옹호하기는 하였다(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 2.7.10.12항 외 참조). 그러나 이를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았고 이 과제를 공의회 이후 신학자들의 연구 과제로 넘긴 것이다. 성찬례가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자유로운 뜻으로 생명을 바치신 것의 실재적이고 상징적인 기념제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본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심(F웦-uns-sein)”52)과 연관하여 성찬례는 생명을 바치셨다는 의미에서 분명히 희생제의 특성을 가진 것이다. 이는 이미 성경에 나타난 성찬례에 관한 내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르 14,24; 마태 26,28 참조).53) 그리스도의 몸과 연관하여 희생의 이중적 특성에 관하여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이루시는 파스카를 통하여, 사랑으로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시고, 몸인 교회는 성사적인 표징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현재화된 파스카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교회의 봉헌은 독자적이거나 새로운 제사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바치신 것이 단 한 번에 완결된 희생인 것이다(히브 9,1-28 참조). 오직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만 인간이 희생 제물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
신학과 교회의 역사가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구원을 위해 돌아가신 사건을 제사나 대속제로 오해하고 예수님께서 올바로 세우신 하느님 모습을 흐리게 하기 쉽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이교도들의 제사 의식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이교도들의 제물 봉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성찬례와 연관된 제사의 개념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독일 미사 전례서의 감사기도문에서는 이러한 것이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못하다. “개정된 미사 전례서에서도 여전히 제사라는 용어가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54) 그러므로 이를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교회 일치의 차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에 관하여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에서도 지난 10년이 넘도록 주의를 환기해 오고 있다.55)
성찬례의 제사가 일종의 이교도적이고 십자가 사건과는 분리된 독자적인 교회의 봉헌과 연관된 것이라는 오해와 그릇된 생각을 피하려면 정확하지 못하게 정의된 “제사” 개념보다는 개정된 전례서와 기도서를 통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바침”(에페 5,2 참조)을 더 많이 언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종교 개혁가들뿐 아니라 현대 신학자들의 제사 개념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성경에도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분이시다(갈라 2,20; 에페 5,2; 로마 4,25와 8,32; 갈라 1,4; 1티모 2,6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제사라는 표현도 교회 일치 대화를 위해서는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는 성찬례와 연관하여 제사라는 용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고 오직 십자가 사건과만 연관시켰기 때문에56) “미사성제”라는 표현은 매우 신중하게 사용하여야 한다.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어 신학적 대화에 짐이 되고 있다. “미사”(Missa) 개념 자체도 그 의미가 매우 부족한 것이어서 감사기도문에서도 이 단어가 나와 있지 않고 성찬례를 내용적으로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저녁 미사, 주중 미사, 주일 미사 등).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성찬례(Eucharistia)처럼 내용적으로 훨씬 뜻 깊은 용어”57)를 사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성찬례는 이미 성경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의도적으로 다시 활용한 개념이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자신을 선사하신 선물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감사(Eucharistia)를 드리는 것이다. 성찬례의 개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의 “미사”의 개혁에 관련된 제2장과 교회 일치를 위한 「리마 문서」의 제2부의 제목에도 사용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 만찬”이라는 개념은 이미 신약에 나와 있고 공의회 문헌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성찬례와 마찬가지로 이 개념도 적절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전망
교회 일치 대화에서 희생제(Opfer)의 특성까지도 포함한 주님 만찬 교리에 관한 기본적인 의견 수렴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물론 이러한 견해차를 인정하는 동의를 가톨릭 교회나 루터교회 모두 아직은 공식적으로 인준하지는 않고 있다. 이는 양 교회 간의 교회 일치를 위한 제4회기의 대화가 교회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성찬 공동체(Eucharistiegemeinschaft)라는 교회 일치를 위한 목표를 도외시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직무와 교회에 관한 문제를 다루어, 설교와 만찬 공동체(Kanzel-Abendmahlgemeinschaft)의 형식으로 교회 공동체의 길을 닦고 있다.
기초교회론(Fundamentalekklesiologie)이 미래의 성찬 공동체를 위한 필수적인 기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이미 이룩한 교회 일치 대화의 결과를 수용하는 일이다. 이는 교회 일치를 위한 접근을 인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면화하여 양 교회의 현실에 비판적 규범으로 삼는 것도 포함한다. 이 논문에서 다룬 문제와 연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찬례의 희생 제사의 개념과 연관된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들은 모든 오해를 불식하고 교회 개혁을 위한 정당한 주장을 더 이상 논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있도록 정리해야 한다. 이는 또한 “성체성사의 해”에 중요한 기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 H. Meyer, “genuinam atque integram substantiam Mysterii eucharistici non servasse …?” Pl둶yer f웦 eine gemeinsame Erkl둹ung des Herrenmahls(“… 성찬 신비의 참되고 온전한 실체를 보존하고 있지 않은가?” 주님 만찬의 공동 선언 변론), in: Kirche in 쉓umenischer Perspektive, P. Walter 외 편, Freiburg, 2003년, 405-416면; Ch. B쉞tigheimer, “Jahr der Eucharistie - Bew둯rungsprobe f웦 die 꿮umene? Ann둯rungen in der Eucharistielehre u. m쉍liche pastorale Konsequenzen” (“성체성사의 해 - 교회 일치를 위한 확인 시도? 성찬례 교리에 대한 접근 방법들과 가능한 사목적 결론들”), in KNA-꿐I 24호, 2005년 6월 14일, Thema der Woche, 1-12면 참조.
2)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WA 6, 512-526면; AS II, 2항, in: BSLK, 416-417면; CA XXIV, in: BSLK, 91-97면.
3)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안의 성교회(Schlosskirche) 정문에 이른바 95개 조 반박문을 게시하여 시작되었다는 종교 개혁(역자 주).
4) 1537년 작성된 것으로 마르틴 루터가 직접 작성한 유일한 신앙 고백(역자 주).
5) AS II, 2항, in: BSLK, 416면.
6) 위의 책, 419면.
7) 1563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Ⅲ)의 명으로 우르시누스(Zacharius Ursinus,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와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궁정 설교가)가 작성한 것(역자 주).
8) 『하이델베르크 교리서』, 질문 80항.
9) Das Herrenmahl(1978)(= H). Bericht der gemeinsamen R쉖isch-katholischen/ Evangelisch- Lutherischen Kommission, 1978, in: Dw? Bd. 1, Paderborn, 1983년, 271-295면; Die Gegenwart Christi in Kirche u. Welt (1977)(이하 GCH), 위의 책, 487-517면; Lima-Erkl둹ung, 1982 (= L), 위의 책, 557-567면; Bilaterale Arbeitsgruppe der Deutschen Bischofskonferenz u. der Kirchenleitung der Vereinigten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Deutschlands (VELKD), Kirchengemeinschaft in Wort u. Sakrament (= WS), Paderborn, 1984년; 꿮umenischer Arbeitskreis evangelischer u. katholischer Theologen, Das Opfer Jesu Christi und seine Gegenwart in der Kirche. Kl둹ungen zum Opfercharakter des Herrenmahles (이하 OJCH), K. Lehmann과 E. Schlink 편(이하 DiKi 3), Freiburg, 1983년; Lehrverurteilungen -kirchentrennend? Bd. 1: Rechtfertigung, Sakramente u. Amt im Zeitalter der Reformation u. heute (이하 LV), K. Lehmann과 W. Pannenberg 편(이하 DiKi 4), Freiburg, 1986년, 77-124면.
10) “가시적...제사를 통하여 저 십자가에서 단 한 번 피 흘리며 돌아가신 사건이 재현된다.”(visibile...sacrificium, quo cruentum illud semel in cruce peragendum repraesentaretur), DH, 1740항.
11) H, 36항.
12) WS, 36항; GCH, 83항.
13) H, 56항.
14) 위의 책, 36항
15) 마르틴 루터, WA, 6, 369면.
16) Apol, 24.25, in: BSLK, 356면.
17) H, 60항; WS, 38항, “우리는 성자께서 당신을 봉헌하신 것에 대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성령을 통하여 감사와 찬미 기도를 드릴 수 있다.”
18) H, 36항. “양 교회의 전통에서는 성찬례가 찬미제임을 공동으로 이해한다.”
19) LV, 92면.
20) LV, 92-93면; Apol, 24.16, in: BSLK, 353-354면.
21) DH, 1743항; LG, 11항; AEM, 55.
22) E. H쉗ig, Die Eucharistie als Opfer nach den neueren 꿮umenischen Erkl둹ung , Paderborn, 1989년, 249면.
23) WS, 37항.
24) 아우구스티노, 『신국론』 1,1-14
25) OJCH, 232, “십자가의 희생이나 성찬례에서 그 희생의 현존과 작용을 말할 때 이는 우선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 주시는 활동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또한 그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이러한 하느님의 활동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요청되고 가능해진다. 이렇게 하느님을 향함으로써 인간은 세상을 향하신 하느님의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26) H. Meyer, Der Ertrag der Er쉞terung u. Kl둹ung kontroverser Aspekte in Verst둵dnis u. Praxis von Abendmahl Eucharistie durch den 쉓umenischen Dialog (“교회 일치 대화를 통한 주님 만찬과 성찬례의 이해와 실천에 관련된 논쟁의 토론과 설명의 성과”), in : Eucharistische Gastfreundschaft, J. Brosseder와 H.-G. Link 편, Neukirchen-Vluyn, 2003년, 61-84.65면.
27) LV, 121면. 92-93면; WS, 38항.
28) M. Stuflesser, Das Opfer in nachvatikanischen Hochgebeten (“공의회 이후의 감사기도의 제사”), in: Das Opfer. Biblischer Anspruch u. liturgische Gestalt, A. Gerhard와 K. Richter 편, Freiburg, 2000년, 257-271.267면.
29) 교황 바오로 6세, 거룩한 성찬례의 교리와 예배에 관한 회칙 「신앙의 신비」, 1965.9.3., in: Dokumente zur Erneuerung der Liturgie, H. Rennings와 H. Kl쉉kener 편, Bd. 1, Dokumente des Apostolischen Stuhls: 1963-1973, Kevelaer, 1983년, 221-242.231면.
30) R. Kaezynski, Das Opfer Christie u. die Darbringung der Kirche. Anmerkungen zur angeblichen Verworrenheit unserer Hochgebetstexte (“그리스도의 희생과 교회의 봉헌. 이른바 감사기도서의 혼란에 관한 견해”), in: Gratias Agamus. Studien zum eucharistischen Hochgebet, FS. B. Fischer, Freiburg, 1992년, 149-166.157면.
31) J. A. Jungmann, Die Gebete der Gabenbereitung (“예물 준비 기도”), in: JL 23, 1973년, 186-203.200면, 그래서 융만은 여기에서 대안으로,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우리의 제사”라고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32) 위의 책, 193면.
33) A. Adam, GrundriB Liturgie, Freiburg,1998년, 148면.
34) LV, 92면.
35) Apol, 24.14-15면, BSLK, 353면.
36) H. B. Meyer, Eucharistie, Geschichte, Theologie, Pastoral. Mit einem Beitrag von I. Pahl (Gottesdienst der Kirche. Handbuch der Liturgiewissenschaft, Bd. 4), Regensburg, 1989년, 244면.
37)『교회법전』, 1983년, 제945-958조.
38) Meyer, A. 33, 344면.
39) 위의 책, 244면.
40) 위의 책, 245면.
41) 위와 같음.
42) 위의 책, 247면.
43) E. Biser, Vom Sinn u. Zweck des Kreuzes (“십자가의 의미와 목적”), in: Die Stimmen der Zeit, 213호, 1995년, 723-729.725면. 해방 신학과 여성 신학에서도 제사에 대한 명백한 비판을 찾아볼 수 있다.
44) 위의 책, 725-726면.
45) 위의 책, 726면.
46) 위의 책, 727면.
47) M. Eckholt, Die theologische Deutung des Todes Jesu am Kreuz als Opfer u. S웘ne. Wiederkehr eines umstrittenen Themas (“희생과 속죄로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신학적 의미. 논쟁 주제의 회귀”), in: Eucharistie. Positionen katholischer Theologie, Th. S쉊ing 편, Regensburg, 2002년, 59-86면; J. Wohlmuth, Opfer - Verdr둵gung u. Wiederkehr eines schwierigen Begriffs (“제사 - 난해한 개념의 배척과 회귀”), in: Das Opfer, A. 25, 100-127면.
48) P. H웢ermann, Jesus Christus - Gottes Wort in der Zeit. Eine systematische Christologie, M웢ster, 1994년, 91면.
49) H. Gese, Die S웘ne (“대속”), in; P. H웢ermann, Zur biblischen Theologie. Alttestamentliche Vortr둮e, M웢chen, 1994년, 85-106.87면.
50) W. Dettloff, Erl쉝ung, dogmengeschichtlich (“교의사에서 바라본 구원”), in: HThG, Bd. 2, M웢chen, 1962년, 308-311.310면.
51) Eckholt, A. 44, 79면.
52) OJCH, 233면.
53) J. Schmid, Priester, Priestertum III. Im NT (“신약에 나타난 사제, 사제직 III”), in: LThK, Bd. 8, 743-744.743면.
54) LV, 92면.
55) Gutachten des p둷stlichen Rates zur F쉜derung der Einheit der Christen zur Studie “Lehrverurteilungen - kirchentrennend?” Studiendokument, Rom, 1992년, 110면, Stufflesser의 글 재인용, A. 25, 270면, A. 31.
56) 위의 책, 222면.
57) Meyer, A. 33, 4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