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전례주년』
2006년 5월호 (제 328호)
『전례주년』 지은이 | I.H.달매 & P.쥬넬 옮긴이 | 김인영 출판사 |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발행일 | 19...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의 마리아』
2006년 5월호 (제 328호)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의 마리아』 지은이 | 돔베스 그룹 옮긴이 | 유봉준 출판...

부활 제4주일~주님 승천 대축일
2006년 5월호 (제 328호)
5월 7일 ● 부활 제4주일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

공관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얼굴들
2006년 5월호 (제 328호)
1. 얼굴 없는 예수님의 교회 교회 안에는 신경, 곧 신앙 고백을 규정하고자 하는 오래된 전승이 있다. 수차...

가톨릭의 나라 이탈리아, 그 가까이에서
2006년 5월호 (제 328호)
이탈리아 본당 사제의 일상을 접하며 프란치스코 성인으로 유명한 아시시 근처의 페루자에서 어학 공부를 ...

청주교구 젊은 사제들의 모임 ‘양업회’
2006년 5월호 (제 328호)
“지혜와 함께 편히 쉬리니 그와 함께 지내는 데에 마음 쓰라릴 일이 없고 그와 같이 사는 데에 괴로울 일...

‘은평의 마을’ 열차 카페
2006년 5월호 (제 328호)
‘카페(cafe)’의 사전적 의미는 “가볍게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수 있는 소규모 음식점”. 그러나 카페...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
2006년 5월호 (제 328호)
부산으로의 긴 여행 나의 한국 이름은 문애현이고, 세례명은 요안나이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부모님...

본당사 편찬 매뉴얼
2006년 5월호 (제 328호)
최근 들어 본당 설정 10, 25, 30, 50주년 등을 맞아 본당사를 집필하는 본당이 늘고 있다. 그렇지만 개별 ...

생명의 그물인 자연
2006년 5월호 (제 328호)
지난 3월 16일, 온 국민이 세계야구대회(WBC)를 보며 우리나라 대표 팀이 일본 대표 팀을 이겼다고 기뻐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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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의 초상 2006년 5월호 (제 328호)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

송영진 (전주교구 신부)

부산으로의 긴 여행
나의 한국 이름은 문애현이고, 세례명은 요안나이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부모님께서 내게 지어 주신 이름은 진 말로니이다. 나는 이란성 쌍둥이인데, 여동생 존 앤은 혼인하여 여섯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나는 메리놀 수녀회 수녀로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1953년에 첫 서원을 하고, 그해 10월 1일 배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5일이나 걸리는 긴 여행이었다. 메리놀 수녀회에 입회하기 전에 간호사 자격을 취득하였으므로 부산에서 선교사이자 간호사로서, 한국 전쟁으로 파괴된 지역의 주민과 피난민들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육체적 고통을 겪는 이들을 매일 만났다.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 쉴 곳이 없는 이들로서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었다. 나는 이 환자들에게 힘이 되고, 친구가 되고 싶어 먼저 한국말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말과 문화를 배울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매일, 아침에는 한국말을 배우고 오후부터 저녁 늦게까지는 환자들과 함께했다.
이것은 50년 전의 일이나 그 광경은 아직도 내 가슴에 선명히 남아 있다. 한국에서의 첫해에 나는 많이도 울었다. 고통받고 죽어 가는 이들을 우리 병원에서 모두 치료하고 도와주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팠던 아이들이 건강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큰 기쁨이 되었다. 나는 한국의 헌신적인 어머니들의 사랑과, 비록 아프고 직업이 없더라도 자신의 가족을 돌보고자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들을 보았다. 이들이 겪는 수많은 고통들을 함께 느끼며 나의 마음은 가끔 찢어지도록 아팠지만, 기도를 통해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여러 해 동안 다양한 사목 분야에서 일해 오면서 주로 활동했던 것은 의료 분야였다.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질병에 대한 예방 교육을 통해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모든 사람이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하였다. 우리가 함께한 사람들이 가톨릭 신자가 되어, 신부, 수녀가 되고, 평신도 지도자가 되고, 또 성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을 볼 때 나는 행복함과 흐뭇함을 느끼게 된다.

노동자와 여성
한국의 경제 상황이 서서히 좋아지면서, 젊은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한국의 경제 상황은 많이 향상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고통을 보았다. 한편, 나는 남성들의 우월 의식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 가족 안에서조차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여성, 동일한 직종에서 동일한 급여를 받지 못하는 여성, 그리고 딸보다 아들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 등 여성들에 대한 많은 차별을 만나게 되었다. 학대받고 소외된 여성들과 함께하는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용산역 근처 매매춘 여성들의 쉼터이자 재활 장소인 ‘막달레나의 집’에서 13년 동안 일하였다. 이곳에서 나는 학대받고 소외된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떻게 격려하고 힘을 줄 수 있는지를 배웠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은 매우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깊고 넓게 보신다. 하느님께서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를 인내하시며 기다리신다. 또한,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놓고 계신다.

파트너십으로의 여정
몇 년 전부터 나는 한국파트너십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파트너십 교육은 매우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 프로그램을 ‘권위주의로부터 파트너십으로 향하는 여정’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친구라 부르며 함께 일하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파트너들이 되어야 한다.
힘(power)에 대한 생각에는 몇 가지 상반된 의견들이 있다.‘지배하는 힘(power over others)’과 ‘함께하는 힘(power with others)’이 있다. 다른 이를 지배하는 힘은 가득 찬 한 컵의 물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이 물은 한정되어 있다. 이 경우 권위를 잃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금만 다른 이들과 힘을 나누게 된다. 그렇지만 함께하는 힘은 촛불의 빛과 같다. 이 촛불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나누어질 때 그 빛은 더욱 환하게 어둠을 밝힌다. 이러한 힘은 많은 선한 일들을 위해 더 강하고 더 밝아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힘을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나쁜 영을 쫓아내도록 파견하셨으며, 하느님 나라의 사랑과 용서를 설교하고 전파하게 하셨다.

생명을 살리는 일
한편, 점점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를 보며, 자연을 인간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파트너로 삼아야 함을 느낀다. 1999년, 미국에 가서 창조 영성을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이 세상을 위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천주교, 개신교, 불교, 시민 단체가 함께 새만금 갯벌을 살리려는 환경 운동을 접하게 되었다. 새만금 갯벌은 지구상에서 아주 특별한 갯벌이다. 그런데 개발을 명목으로 그것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닌 영성은 지구를 서로 연관된 생명 그물망의 성스러운 장소로 인식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지구 생태계 문제에 대하여 방향을 제시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격려해야 할 것이다. 생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지구를 보존하라고 말하는 것이며, 지구를 구하고자 일하는 것은 모든 생명, 곧 하느님께서 만드신 위대한 창조물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본당마다 신자들을 대상으로 생태 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와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가 펴낸 책 『보시니 좋았다: 창조물을 존중하고 보살피기 위한 열 가지 계명』을 가지고 각 본당에서 소모임을 만들어 교육을 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한목소리로 새만금 갯벌 살리기는 물론, 지구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살리는 데 한몫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무한히 보내 주시고 계심을 깊이 깨달았다. 혼자서 일하지 않고 한국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나에게 우정을 보내고, 선교사로서 나의 성소에 대해 가르쳐 준 한국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나는 하느님께서 내게 보여 주시는 모든 부르심에 “네.” 하고 기꺼이 응답하고 싶고,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나는 우리의 모든 활동은 하느님께서 지니신 우리에 대한 열망이며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이라고 믿는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이러한 부르심에 “네.” 하고 응답할 고유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 있는 것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그 부르심에 기꺼운 응답이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문애현(Jean Maloney) | 메리놀 수녀회 수녀. 미국 출신으로 1953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부산 메리놀 병원, 증평 메리놀 의원, 강화도 그리스도 왕 의원 등에서 간호사로 일하였다. 1959년 종신 서원을 하였으며, 용산 ‘막달레나의 집’에서 13년간 생활하였다. 현재 한국파트너십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줄포는 항구가 아니다
성당 뒤쪽으로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촬영 세트가 있다. 관광객의 눈으로 보면 분명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하기에 적당한, 경치 좋은 바닷가인데, 나에겐 그저 척박한 삶의 현장으로만 보인다. 나도 이제 이곳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노아의 홍수
작년 여름엔 비가 참 많이도 왔다. 비만 오면 성당 마당은 바다로 변했고, 나는 마당의 배수 시설을 어떻게 고치나 하고 고민해야 했다. 새벽 미사가 있던 어느 날, 사제관에서 성당까지 가기도 힘들 정도로 굵은 장대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미사가 끝나고 나와 보니 태평양처럼 변해 있어야 할 마당이 멀쩡했다. 뜻밖에도 물이 잘 빠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신자들이 줄지어 성당에 달려와서 성당과 사제관이 무사한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줄포 지역이 모두 침수되었다고 전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가 보니 정말 줄포 시가지가 거대한 호수로 변해 있었고, 사람들은 고무보트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깊은 곳은 2m를 넘을 정도였다. 만일에 밀물 시간과 겹쳤다면 피해가 더 컸을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물이 빠졌는데, 물이 빠진 뒤의 줄포면의 모습은 참혹한 전쟁터였다.
전 신자가 수재민이 되었기 때문에, 누가 누굴 돕고 할 상황도 아니었다. 평소에는 비가 올 때마다 애를 먹던 성당이 그날의 집중 호우 때에는 신기하게도 물이 잘 빠져서 아무 피해가 없었던 것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하느님의 도우심’이었지만, 본당 신부 혼자서만 수재민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주택이 침수된 것은 그렇다 치고, 논과 밭이 침수되어 입은 피해는 규모가 너무 컸고 계산하기도 어려웠다. 수해 때문에 세례식이며 본당의 날 행사, 성지 순례 등 예정된 행사를 모두 취소해야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돌아다니면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 정도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계절이었다.

또다시 빙하 시대
수해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겨울이 되었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그 눈은 처음부터 폭설이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줄곧 내리는 눈에 도로가 마비되고, 주민들의 축사, 비닐하우스, 창고들이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피해는 여름의 집중 호우보다 더 심했다. 눈을 치우면 그 다음날 다시 쌓이고, 다시 치우면 더 많이 쌓였다. 쌓인 눈을 뚫고 대문에서 성당 현관문까지 터널 같은 통로를 길게 만들었는데, 그 벽의 높이는 내 키와 비슷했다. 나는 성당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날마다 눈을 치우다 지쳐 버렸다. 성탄절은 다가오는데, 신자들이 성당에 올 수도 없고, 내가 신자들에게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판공성사를 연기해야만 했고, 세례식도 다시 취소되었다. 차라리 성탄절을 연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24일이 되어서야 겨우 구유를 설치할 수 있었고, 그런대로 조금 모인 신자들과 함께 성탄 대축일 밤 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 한 친구가 안부 전화를 걸어와서 농담처럼 말했다. 여름의 수해와 겨울의 폭설 피해는 줄포 성당의 본당 신부가 회개를 하지 않은 탓이라고. 그게 줄포 지역만의 피해는 아니었지만, 나는 정말 내 회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감사 헌금을
줄포는 바닷가에 있지만 항구도 아니고 어촌도 아니다. 밀물 때 잠깐 바닷물이 들어오는 개펄이 있을 뿐이다. 거의 모든 신자가 밭농사 중심으로 살고 있는 그저 평범한 농민들인데, 봄에는 때늦은 서리가 내려서 고추 농사를 망쳤고, 수해가 나기 전, 수박 농사는 참 잘되었는데, 그게 너무 잘되어서 가격이 폭락했다. 가을에 기생충 파동으로 배추 값이 폭등했을 때 돌아다녀 보니 신자들 중에는 배추를 심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수해가 있었고, 폭설 피해가 있었다. ‘정말 지지리도 복도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주일 헌금이고 교무금이고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피해를 더 크게 입은 사람들이 오히려 감사 헌금을 더 많이 내는 모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뭐 그리 감사할 일이 있다고 감사 헌금을 바칠까. 교구에서 피해 복구비로 지원해 준 돈을 피해 정도에 따라 분배할 때, 분명 큰 피해를 입었는데도 그걸 감추고 ‘나는 괜찮다.’라고 사양하는 신자들도 있었다. 변산반도의 경치보다 그 마음이, 그 믿음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어디까지 나서야 하나
부임하기 전부터 새만금 사업과 핵 폐기장 유치 문제로 이 지역이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줄포에는 한 가지 갈등이 더 있었다. 부안군의 쓰레기 소각장을 줄포에 만들려고 시도하다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무산된 일이었다. 그런 일들 모두, 사안마다 찬성과 반대가 극단으로 갈려 있었고, 그 갈등의 후유증이 심각했다.
그런 현안들에 대해 종교가 어디까지 나서야 하는지는 항상 숙제로 남는다.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누군가 그런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언급하기만 하면 금방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찬성과 반대의 비율을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 없는 일이었다. 한 공동체 안에 찬성파와 반대파가 함께 있고, 서로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쩌면 여름의 수해와 겨울의 폭설 피해가 사람들에게 그런 논쟁들을 잠시 잊게 만들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떻든 나는 전체 신자들에게 선언했다. 성당은 갈등의 장소가 아니라, 갈등을 푸는 장소여야 하고, 누구나 편한 마음으로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어떤 문제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성당 안에서는 다투지 말기를 바라고, 만일에 무슨 일이 있어서 나서야 한다면 본당 신부 혼자 나가서 할 것이라고. 각종 현안에 대한 찬성파와 반대파 사이의 앙금은 아직도 남아 있고, 어떤 식으로 그 갈등이 다시 드러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떻든 성당 안에서 다투는 일은 없어졌다. 신부 개인이 사회 문제에 앞장서는 것은 자신의 신념대로 할 일이지만 그것을 하느님 뜻이라고 신자들에게 주입식으로 강요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찬성과 반대를 떠나서 그냥 하느님을 찾는 많은 신자들이 성당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작고 가난한 시골 선교 본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없어서 유아 세례를 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서 혼인성사도 없고, 심지어는 노인들마저 때가 되면 자식들에게로 가서 임종을 맞이하기 때문에 장례 미사도 거의 없는 이곳, 선교 활동의 성과도 없고, 오히려 농촌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신자 수가 줄기만 하는 이곳, 도대체 뭘 해야 할지, 이런 본당에서 신부로 산다는 것이 뭔지 참 답답하다. 뭔가 열심히 하긴 했는데, 사목 활동 보고서에는 쓸 내용이 없고,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 막막함뿐. 도시 본당을 기준으로 만든 많은 프로그램들이 이런 시골 성당에서는 거의 효과가 없다는 것을 높은 사람들은 알고나 있는지….
선교 본당 신부로 십 년째 살면서 사무장 일에도 익숙해졌고, 자취하는 일에도 적응이 되었는데,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은 주변의 시선과 고정관념이다. 선교 본당의 어려움을 왜 돈 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신부가 사무장도 없이, 자취하면서 사는 것이 정말 그렇게 딱해 보일까? 그럼 어떻게 살아야, 어디서 살아야 신부답게, 폼 나게 사는 것일까?
작고 가난한 본당은 비효율적이고 사제 인력 낭비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신부가 사무장도 식복사도 수녀도 없이, 더욱이 교구 보조비도 없이 모든 것을 혼자 다 하면서 사는 것은 품위가 떨어지고 신부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그 생각을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착한 신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그냥 함께 사는’ 이 삶이 뭐가 어때서?

송영진 | 전주교구 신부. 1993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팔봉 선교 본당, 만경 선교 본당, 오수 선교 본당 주임을 거쳐 현재 줄포 선교 본당 주임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