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전례주년』
2006년 5월호 (제 328호)
『전례주년』 지은이 | I.H.달매 & P.쥬넬 옮긴이 | 김인영 출판사 |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발행일 | 19...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의 마리아』
2006년 5월호 (제 328호)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의 마리아』 지은이 | 돔베스 그룹 옮긴이 | 유봉준 출판...

부활 제4주일~주님 승천 대축일
2006년 5월호 (제 328호)
5월 7일 ● 부활 제4주일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

공관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얼굴들
2006년 5월호 (제 328호)
1. 얼굴 없는 예수님의 교회 교회 안에는 신경, 곧 신앙 고백을 규정하고자 하는 오래된 전승이 있다. 수차...

가톨릭의 나라 이탈리아, 그 가까이에서
2006년 5월호 (제 328호)
이탈리아 본당 사제의 일상을 접하며 프란치스코 성인으로 유명한 아시시 근처의 페루자에서 어학 공부를 ...

청주교구 젊은 사제들의 모임 ‘양업회’
2006년 5월호 (제 328호)
“지혜와 함께 편히 쉬리니 그와 함께 지내는 데에 마음 쓰라릴 일이 없고 그와 같이 사는 데에 괴로울 일...

‘은평의 마을’ 열차 카페
2006년 5월호 (제 328호)
‘카페(cafe)’의 사전적 의미는 “가볍게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수 있는 소규모 음식점”. 그러나 카페...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
2006년 5월호 (제 328호)
부산으로의 긴 여행 나의 한국 이름은 문애현이고, 세례명은 요안나이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부모님...

본당사 편찬 매뉴얼
2006년 5월호 (제 328호)
최근 들어 본당 설정 10, 25, 30, 50주년 등을 맞아 본당사를 집필하는 본당이 늘고 있다. 그렇지만 개별 ...

생명의 그물인 자연
2006년 5월호 (제 328호)
지난 3월 16일, 온 국민이 세계야구대회(WBC)를 보며 우리나라 대표 팀이 일본 대표 팀을 이겼다고 기뻐할 ...

   1      


교부들의 복음 해설 2006년 5월호 (제 328호)

부활 제4주일~주님 승천 대축일

편집부

5월 7일 ● 부활 제4주일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 10,11-18에서
착한 목자와 삯꾼
교회 안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 중에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필리 2,21)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것만 추구”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사랑하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만 찾지도 않으며 세속적 이익을 쫓고 유익과 사람들의 존경을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감독자가 이러한 것을 좋아하고 이 때문에 하느님을 섬긴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삯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 우리들 가운데에도 삯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께서 그런 사람을 분별하실 수 있습니다. (…) 주님께서 이리에 관하여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라고 하신 말씀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혹으로 고난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숨긴 채로 지내기도 합니다. 주님의 양 떼는 감독자들이 필요합니다. 이 감독자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일 수도 있고 삯꾼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들인 감독자들만이 목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목자는 양 떼를 다스리시는 오직 한 분이신 목자의 지체가 되는 것이기에 세상에는 오직 한 분의 목자만이 계시는 것입니다.
(…) 그러나 삯꾼도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사실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 유익을 추구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곧 삯꾼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삯꾼을 통해 나오는 목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마태 23,2-3) 하고 말씀하신 대로 삯꾼들의 말을 경청하기 바랍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기에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주장을 가르치거든 그것을 듣지 말고 실천하지도 말기 바랍니다. (…) 포도송이는 수확하되 가시를 조심하기 바랍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46,2-6

목숨을 내놓으심
제가 여러분 안으로, 곧 여러분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고자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제가 다른 것을 선포하려 했다면 다른 방법을 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제가 여러분을 향하여 나아가는 문이 되시는 분입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집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안으로 들어갑니다. (…) 여러분이 저를 통하여 열심히 들으려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 이유는 여러분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값을 치르신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 오직 죄 없으신 분으로 귀한 피를 흘리신 주님만이 그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값을 치르신 당신께 속한 이들의 피도 소중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의 눈에는 소중하네.”(시편 116[114-115],15)라는 말씀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말씀은 당신만이 아니라 당신의 지체들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47,2

주님과 아버지
주님께서는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스스로 알고 계시고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문이십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아버지께 나아갈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1티모 2,5)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47,3

한 목자와 한 양 떼
주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곧]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친히 나아가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서는 주님께서 친히 나아가시기도 하시고 제자들을 파견하기도 하셨습니다. (…) [그래서] 주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오시지 않고 제자들만 파견하셔서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당신께서 파견하신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뿐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버리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하신 이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어 보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특별히 이방인들을 위하여 파견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여러분이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2코린 13,3)라고 하여 이방인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친히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라고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이 양들은 이방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님의 종을 도구로 사용하셨어도 그들을 데려오는 분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당신의 종을 통하여 직접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두 양 떼가 두 벽이 되어 이를 바탕으로 모퉁잇돌이 세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에페 2,20 참조). 그래서 주님께서는 문이시며 모퉁잇돌이 되시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47,4-5

5월 14일 ● 부활 제5주일
나는 참포도나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 요한 15,1-8에서

참포도나무와 농부
여기에서는 (…)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1티모, 2,5 참조)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주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하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는 농부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외면적인 일만 하는 농부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심거나 물을 주는 이가 아니라 자라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코린 3,3-7 참조).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하느님이십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하느님은 하나이신 것입니다. (…)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셔서 당신께서 포도나무이실 뿐 아니라 농부가 하는 일인 가지를 깨끗이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가지를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비록 이들이 자라게 하지는 못하여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조차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80,1-2

말씀으로 깨끗하게 됨
물론 물 안에 깃들어 있는 말씀이 깨끗이 하는 것이지만, 주님께서 물로 씻는 세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너희가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이 없으면 물은 그저 물일 뿐입니다. 말씀이 더해지면 물이 일종의 가시적 말씀이 되듯이 성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런 의미로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에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요한 13,10)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작용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것을 말로 표현해서가 아니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면, 어떻게 물이 영혼을 깨끗이 하고자 몸에 닿게 될 때 그토록 커다란 효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실 말 중에서도 지나가는 소리와 남아 있는 효과는 다른 것입니다.
(…) 베드로 사도는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1베드 3,21) 하고 말하였습니다. (…) 우리와 함께 계신 포도나무이시며 아버지와 더불어 농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시고”(에페 5,25)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에페 5,26)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더해지지 않고 흘러가서 소멸되는 요소[물]만으로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믿음의 말씀은 그와 같은 힘을 가진 것이어서, 주님께서는 믿음 안에서 현존하고 축복하고 물을 뿌려 주는 이를 통하여 아직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지 못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는(로마 10,10 참조) 어린아이까지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말씀으로 이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80,3

포도나무와 가지
가지는 포도나무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지만 포도나무는 가지에게 생명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고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 그리스도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유익이 됩니다. 가지가 잘리면 생명의 뿌리에서 다른 가지가 자라나지만 잘린 가지는 뿌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 진리이신 분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 누구든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하는 이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이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농부는 적은 열매를 맺는 가지를 쳐냅니다. (…)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불에 던져지지 않으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 그리스도께 맞갖은 것만을 바라게 됩니다. 구세주 안에 머물면 구원에 맞갖은 것만을 바라게 됩니다. (…)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오직 기억 속에만 머물고 삶 속에 자리 잡지 못한다면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못합니다. 그 가지는 뿌리에서 생명을 이끌어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81,1-4

아버지의 영광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주님의 제자가 되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된다고 해서 마치 우리 힘으로 열매를 맺은 듯이 그 영광이 우리의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은총을 주시는 것이기에 그 영광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라는 말씀에 이어 바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것은 바로 은총을 우리보다 앞서 마련하시는 주님 덕분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된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에페 2,10 참조).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82,1
5월 21일 ● 부활 제6주일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 15,9-17에서

아버지의 사랑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고 말씀하신 것에서 우리 선행의 근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갈라 5,6 참조) 아니라면 우리가 선행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먼저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요한 사도도 똑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그러나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하고 말씀하실 때는 인간의 본성과 주님 사이에는 주님과 하느님 사이와 같은 동등함이 아니라 은총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이때에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 분명히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포도나무, 곧 아드님 안에서 열매를 맺고 제자가 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는 사랑이 샘솟는 근원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드러나는 수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당신 사랑 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더욱 뚜렷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82,2-3
충만한 기쁨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고 (…) 우리가 주님과 함께할 때 우리의 기쁨은 충만하게 됩니다. 이러한 뜻으로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기쁨은 우리에게 내려 주신 당신의 은총입니다. 또한 이는 우리의 기쁨인 것입니다. (…) 사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없다고 해서 줄지도 않고 우리가 있다고 해서 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한 주님의 기쁨은 (…)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의 것인 이유는 그 기쁨으로 우리가 은총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기쁨은 회심한 이들의 믿음에서 시작되고 이들이 부활하여 보상받을 때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83,1

주님의 계명
앞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낡은 습관을 버리라는 말씀이고, 여기에서 “내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그 계명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유일한 계명이라는 뜻일까요? 이보다 더 큰 계명, 곧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도 있지 않습니까? 바오로 사도도 최소한 (…) “믿음, 희망, 사랑 (…)”(1코린 13,13) 세 가지를 말한 바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의 계명이 사랑의 계명 안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유일한 계명이 아니라 가장 으뜸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 사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믿음과 희망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이 있으면 반드시 하느님의 사랑도 있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모든 계명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계명이 이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83,2-3

목숨을 내놓는 일
요한 사도는 “그분께서[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하고 말하였습니다. (…)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순교자들은 주님의 식탁에서 받은 것과 같은 사랑을 그들의 형제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피를 흘리면서까지 주님을 증언한다고 해서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우리가 동등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내놓고 다시 얻으실 수 있습니다(요한 10,18 참조).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만큼 살 수도 없고 우리가 바라지 않아도 죽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으심으로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으로 죽음에서 구원되었습니다. 주님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습니다(사도 2,31 참조). 우리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본 뒤에 세상의 종말이 오면 주님 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포도나무이시면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위하여 죽지만 어떤 순교자의 피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자 흘리지는 못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84,1-2

주님의 친구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종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사람을 당신의 친구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종의 의무가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임을 알려 주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주님’ 하고 부른다면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여 여러분이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권한을 주셨기 때문에(요한 1,12 참조)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 그러나 우리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느님을] 섬기도록 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을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종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은 어떤 선행을 하면 그것이 주님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처럼 자만하고,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고도 마치 [자신이] 영광을 받지 않은 것인 양(1코린 4,7 참조)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친구가 되려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보통 사람이 아닌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85,1-3

너희를 뽑아 세움
주님께서 착하지 않은 이들 가운데 뽑으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들은 뽑히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착해서 뽑힌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공로를 앞세우면 은총은 더 이상 은총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 뽑히는 것은 분명히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은총의 선택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로마 11,5-6). (…)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착한 이를 뽑으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뽑으신 이들을 착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 주님께서는 우리를 뽑으셔서, 우리가 가서 열매를 맺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열매를 가지고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시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바로 우리가 가야할 길이며, 주님께서 우리가 갈 곳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를 앞서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까지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이 남아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우리의 열매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 사랑이 간절한 소망일 뿐 완전한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간절한 소망을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외아드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기에 마땅하지 않은 것을 구세주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구세주의 이름으로 오직 구원의 길에 참으로 맞갖은 것만 간구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86,2-3

사랑의 열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열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주님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어도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시고 우리가 가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곧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 것을 보아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분명히 주실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 없이는 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매는 바오로 사도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1티모 1,5) 것이라고 설명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또한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 관한 이 두 가지 명령에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마태 22,40 참조). 이것이 우리의 열매입니다. 이러한 열매를 염두에 두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는 육의 행실에 대립되는 성령의 열매를 권유할 때 “성령의 열매는 사랑”(갈라 5,22)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자신의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에서 나오며 이에 연관된 것으로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등도 함께 엮어 놓았습니다. 자신의 기쁨의 원천으로 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열정적인 사랑이 아니라면 누가 착한 마음을 참을성 있게 간직하면서 인내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돌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호의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아니라면 누가 착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통한 믿음이 아니라면 누가 건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면 누구의 온유함이 자신의 성격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자신에게 명예로운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타락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선하신 주님께서 사랑을 마치 유일한 명령인 것처럼 그토록 자주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 없이는 다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87,1
5월 28일 ● 주님 승천 대축일
주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 마르 16,15-20에서

땅 끝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사도 1,8 참조) 이르기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명령은 그것을 직접 들은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만으로는 그 엄청난 과업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사도들에게 매우 개인적으로 하신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약속을 지속적인 탄생과 죽음을 통하여 이제부터 세상의 끝에 이르기까지 보편 교회에 하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편지」 49

신자들이 받는 사도들의 은사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사도들, 예언자들, 교사들을 보내시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성령을 통한 치유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많은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은사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도, 예언자, 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병을 고치는 은사,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은사를 누구나 다 가질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1코린 12,30 참조). 한 사람이 하느님의 모든 은사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신이 바라거나 자신에게 알맞은 은사를 가지게 됩니다.
암브로시오, 「성령론」 2,13,150


오늘날 교회 안에서 나누어진 은사
더욱 감추어진 특성을 가진 이 표징과 권능에 대하여 좀 더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는 오늘날에도 과거에 사도들이 협력하여 한 일을 날마다 영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은총을 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악한 영들이 이들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할 때 그것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신자든지 과거 생활의 더러움을 청산하고 거룩한 신비를 말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창조주를 찬미하고 그 권능을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 나아가 신자들이 좋은 설교를 하여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있던 악을 몰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손으로 뱀을 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기적들이 영적인 것이고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이기에 더욱 위대한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여러분이 원하면 이러한 표징을 실행하기 바랍니다(시편 91,13; 요한 14,12-14; 1코린 13 참조).
대 그레고리오, 「설교」 29

인간 본성의 승천
부활절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뻐하고, 오늘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것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본성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다른 존재들과 모든 천사, 그리고 하늘의 권세를 넘어서 하느님 아버지 권좌 곁에 이르기까지 승천한 것을 장엄하게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어도 하느님 활동의 이러한 질서 있는 구조 위에 우리가 굳건히 서서 믿음이 변하지 않고, 희망이 흔들리지 않으며, 사랑이 식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은총이 더욱 훌륭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 부활하신 지 40일 되는 때에 복음 전파와 새로운 계약의 신비에 관한 모든 것을 세심하게 마련하신 뒤에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셔서 더 이상 그들 앞에 몸소 나타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러한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이후로 하느님께서 교회의 자녀들이 늘어나도록 정하신 기간이 다할 때까지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 기간이 다하면 주님께서는 승천하실 때의 몸으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구세주의 가시적 현존은 성사가 되었습니다. 경험적 시각이 믿을 만한 가르침으로 대체되었기에 더욱 고귀하고 강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 가르침의 권위는 신자들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늘이 밝게 비추어 줍니다.
대 레오, 「설교」 74,1-2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는 동안에도 지상에서 현존하심
승천하신 분께서는 하느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시기 때문에 당신께서 지상에서 선택하신 인성으로는 성인들과 함께 지상에 머무십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공평하게 채우시는 신성 안에서도 똑같이 “이 세상이 다하는 날까지 항상” 머물러 계십니다. 여기에서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고 또한 그 안에 머무시는 사람들이 이 세상이 다하는 날까지 늘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손님처럼 와 계시며, 이 세상의 싸움이 끝난 다음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임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나 있는 하느님의 위엄이 선택된 이와 벌 받을 이에게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벌 받을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위엄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위엄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아시고, [인간의] 생각을 모두 이해하시고, 모든 인간이 갈 길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선택된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위엄이 자비로운 보호의 은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위엄으로 하느님께서는 마치 아버지가 자녀를 이끌 듯 현재의 은사와 훈육을 통하여 이들이 미래에 상속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베다, 「복음 강해」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