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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신부의 유언』
2006년 6월호 (제 329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이유와 방향을 아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알고 생각하는 ...

『사람이여, 당신은 - 생명 공학과 가톨릭 윤리』 외
2006년 6월호 (제 329호)
『사람이여, 당신은 - 생명 공학과 가톨릭 윤리』 지은이 | 이용훈 출판사 | 가톨릭출판사 발행일 | 2...

성령 강림 대축일~연중 제12주일
2006년 6월호 (제 329호)
6월 4일 ● 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아라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해설
2006년 6월호 (제 329호)
현대인은 통신 및 교통의 발달에 힘입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며 더불어 살게 되었다. ...

이슬람교, 역사상의 근본적인 변화와 현대의 도전
2006년 6월호 (제 329호)
서론 이제는 유다인이 아닌 무슬림에 대한 의혹이 널리 도사리고 있다. 이슬람교의 선동 때문에 무슬림은 ...

일본 교회의 새로운 사목적 시도
2006년 6월호 (제 329호)
- 성소 부족과 고령화, 외국인 신자의 증가에 초점을 두고 들어가는 말 일본 가톨릭 교회는 1549년 ...

수원교구 성사모
2006년 6월호 (제 329호)
… 성령의 능력으로 저희의 얼을 새롭게 하시어 성서를 가까이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이웃을 더욱 잘 알게 ...

마산교구 창원 여성의 집 ‘무지개 빌라’
2006년 6월호 (제 329호)
2005년 말 현재 전체 가출자의 26.8%인 16,894명이 청소년인 것으로 드러났는데(‘청소년 통계’, 통계청),...

좀 더 열린 교회가 되었으면…
2006년 6월호 (제 329호)
『사목』 잡지 독자 여러분께 따뜻한 인사를 보내 드립니다. 본인에게는 『사목』과 닮은 점이 한 가지가 ...

본당 연계 가정 간호
2006년 6월호 (제 329호)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된 현대 사회라고 하지만, 고령 인구의 증가와 각종 사고와 재해, 환경오염 등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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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 동향 2006년 6월호 (제 329호)

이슬람교, 역사상의 근본적인 변화와 현대의 도전

한스 큉

서론
이제는 유다인이 아닌 무슬림에 대한 의혹이 널리 도사리고 있다. 이슬람교의 선동 때문에 무슬림은 모두 폭력성을 잠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덕분에 비폭력적이고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과연 정말 그런가?
당연히 우리는 공정해야 한다. 민주 법치 국가의 시민인 우리는 강제 결혼과 여성들에 대한 억압, 이른바 ‘명예 살인’(honour killing,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가족 구성원을 살해하는 관습. 특히 정조를 잃거나 간통을 저지른 여성들이 그 대상이 된다. - 역자 주 ), 그 밖의 여러 낡은 비인간적인 행위에 인간 존엄성의 이름으로 반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슬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행에 반대한다. ‘무슬림’이나 ‘이슬람교’라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부당하다. 그들은 충실한 무슬림이 되고자 할 뿐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이슬람교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우리는 공정해야 한다. 일부 그릇된 방향의 극단주의자들이 자행하는 납치나 자살 공격, 자동차 폭파, 참수 때문에 이슬람교를 비난한다면, ‘그리스도교’와 ‘유다교’ 역시 미군이 저지르는 야만적인 포로 학대, 폭격, 탱크 공격(이라크에서만 1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군의 테러에 대해서 비난받아야 한다. 중동을 비롯한 도처에서 벌어지는 석유와 패권을 노린 다툼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나 ‘반테러 전쟁’으로 가장하려는 이들은 세계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들은 없다.
코피 아난 국제 연합 사무총장은 2003년 튀빙겐에서 열린 세계 윤리 강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어떠한 종교도, 어떠한 윤리 체계도 일부 신봉자들의 도덕적 탈선 때문에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만약 그리스도인인 내가 십자군이나 종교 재판 때문에 내 신앙이 비판받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소수의 사람들이 그들 신앙의 이름으로 저지른 행동들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신앙을 비판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맞서기만 하여 더욱 큰 비극만 불러올 것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 폭력과 전쟁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태도가 요구된다. 아랍 국가나 미국의 경우처럼 권력에 눈먼 통치자들이 국가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념주의자들과 선동주의자들이 국가를 망쳐 놓지 않는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모든 국가가 바라는 것이다.
초승달 깃발 아래에서만 폭력이 행사된 것이 아니다. 중세와 현대의 ‘십자군’들은 십자가 깃발 아래 폭력을 휘둘러 왔으며, 이 때문에 십자가는 화해의 표징에서 전쟁의 표징으로 전락하였다. 두 종교 모두 역사에 걸쳐 공격적으로 영향권을 확장해 왔고 권력을 지키려고 폭력을 행사해 왔다. 각자의 영역 안에서 이 종교들은 평화가 아닌 전쟁의 이념을 전파해 왔다. 따라서 상황은 복잡하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정보의 홍수 속에 완전히 잠겨 방향 감각을 잃을 위험에 있다. 심지어 종교학자들도, 종교학 분야에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 예를 들어 사회학자들은 미시 분야에만 몰리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려고 하지 않으며, 그럴 역량도 없다. 따라서 변화를 고려하려면 새로운 범주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역시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두 종교인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 비추어 이슬람교에 관한 어떠한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다. 곧바로 주제로 들어가 세 가지로 나누어 논의하고자 한다. ‘제1부 영원한 핵심과 토대’에서는 우리가 고수해야 할 것을 알아보고, ‘제2부 근본적인 변화’에서는 가변적인 요소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제3부 현대의 도전’에서는 절박한 임무를 제시한다.

1. 영원한 핵심과 토대
우리의 각 종교에서 고수해야 할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모두 예언자적인 이 세 종교에서 우리는 극단적인 입장을 발견한다. “지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과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 완전히 세속화된 그리스도인들은 지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흔히 하느님도 하느님의 아드님도 믿지 않으며, 교회를 무시하고 설교를 듣지도 성사를 받지도 않는다.
그들은 기껏해야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유산만을 인정할 뿐이다. 대성전이나 요한 세바스찬 바흐나 정교회 전례의 아름다움, 또는 역설적이지만 성 윤리에 관한 교황의 가르침과 권위주의를 비난하면서도 교황을 확고한 질서의 기둥으로 인정할 뿐이다.
- 완전히 세속화된 유다인들도 지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총대주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약속을 믿지 않으며, 회당 기도와 예식을 무시하고, 극단적 정통 유다교에 조소를 보낸다.
그들은 종교성이 결여된 유다주의 대신 이스라엘 국가나 유다인 대학살에 대한 호소를 새로운 종교로 삼는다. 이러한 호소는 세속화된 유다인들에게도 적어도 유다인의 정체성이나 연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비유다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국가의 테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 완전히 세속화된 무슬림도 지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으며, 쿠란을 읽지도 않고,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으며, 샤리아(이슬람법)를 대놓고 거부한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모든 종교적 의미가 결여된 이슬람교는 기껏해야 정치적 이슬람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를 위한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지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러한 입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반대의 목소리, 곧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모든 것은 과거에도 언제나 그랬으며 따라서 지금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로마 가톨릭 통합주의자들은 “가톨릭 교의의 위대한 건축물에서 돌멩이 하나도 치워서는 안 된다. 그러면 전체가 흔들릴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 극단적 정통 유다인들은 “할라카(유다교 율법)에서 한 글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모든 단어 뒤에는 주님(아도나이)의 뜻이 담겨 있다.”라고 주장한다.
- 많은 이슬람주의 무슬림은 “쿠란에서 한 구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곧 하느님 말씀이다.”라고 강조한다.
이 모든 입장에서 우리는 갈등이 불가피하게 전제되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입장들을 군사적으로 또는 공격적으로 주장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이 세 종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세 종교 안에서도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입장들은 흔히 서로를 부추긴다. “극과 극은 통한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다. 많은 나라들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들이 선동하지 않는 이상 극단적인 입장은 주류가 아니다. 국가별로, 시대별로 다르기는 하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유다인, 그리스도인, 무슬림은 비록 자신들의 종교 관습에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이거나 무지할지언정 결코 그들의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신앙과 생활을 모조리 저버리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은 결코 모든 것을 지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청의 교의나 윤리적 가르침을 무턱대고 받아들이거나, 개신교 신자들이 성경의 모든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유다인들이 할라카의 모든 내용을 지키거나, 무슬림이 샤리아의 모든 계명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근래의 역사적 표현이나 형식이 아니라 본래의 가르침과 계약으로, 곧 세 종교의 ‘경전’인 히브리 성경, 신약 성경, 쿠란으로 되돌아간다면, 각 종교에서 영원한 것(영원해야 할 것)이 현재의 것(현재의 상황)과 꼭 일치하지는 않으며, 각 종교의 핵심과 실체,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그들의 ‘경전’으로부터 정의될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 매우 실제적인 문제가 걸려 있다. 우리 종교들, 우리 각 종교에서 영원히 유효하며 항구한 의무가 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든 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 곧 각 종교와 경전과 신앙의 핵심과 토대를 지켜야 한다. 이제 구체적인 질문에 간략하게 원칙적으로나마 대답해 보자.
1) 그리스도교가 그 ‘혼’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대답: 역사적 문헌적 사회학적 성서 비평이 어떤 식으로 비평하고 해석하고 환원시키든지 간에, 표준이 되고 역사적으로 권위 있는 신앙의 기록인 (히브리 성경의 맥락에서 읽는) 신약에서 볼 때, 신앙의 핵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메시아이며 아브라함의 한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하느님의 동일한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이시고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라는 고백 없이는 어떠한 그리스도교 신앙도, 그리스도교 종교도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결코 정적이지 않게) ‘신약의 핵심’을 이룬다.
2) 유다교가 그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대답: 역사적 문헌적 사회학적 비평이 어떤 식으로 비평하고 해석하고 환원하든지 간에, 표준이 되고 역사적으로 권위 있는 신앙의 기록인 히브리 성경에서 볼 때, 신앙의 핵심 내용은 한 분이신 하느님과 하나인 이스라엘 백성이다. “야훼(아도나이)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다.”라는 고백 없이는 어떠한 이스라엘 신앙도, 어떠한 히브리 성경도, 어떠한 유다교도 있을 수 없다.
3) 마지막으로, 이슬람교가 참된 의미의 ‘복종’과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이슬람교가 되고자 한다면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대답: 쿠란의 여러 장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편집하는 데에 아무리 오랜 세월이 걸렸다 하더라도, 쿠란이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책이라는 것은 모든 충실한 무슬림에게 분명한 사실이다. 무슬림이 메카에서 받은 계시들과 메디나의 계시들의 차이를 고려하고 계시의 배경을 해석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해도, “알라만이 유일한 신이며,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이다.”라는 쿠란의 핵심 메시지는 매우 명확하다.
이슬람교가 생겨난 씨앗이자 이슬람교를 구성하는 핵심은, (유다교에서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하느님과 맺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고, (그리스도교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그 하느님과 맺는 특별한 관계는 더더욱 아니며, 쿠란이 하느님과 맺는 특별한 관계이다. 이슬람 국가들이 겪은 그 모든 갈등과 혼란 속에서도, 이것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이슬람교의 기본적인 이해를 이루고 있다.
요약하자면, 세 유일신 종교에서 보존되어야 할 특징들은 세 종교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인 동시에 세 종교를 분리시키는 것들이다.
-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 은혜와 자비의 창조주, 모든 이를 돌보시고 심판하시는 한 분이며 유일한 아브라함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
- 세 종교를 분리시키는 것:
유다교: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며 땅이라는 것,
그리스도교: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
이슬람교: 쿠란이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책이라는 것이다.
세 종교의 항구한 핵심 안에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 맨 처음부터 시작되었으며,
- 수세기에 걸친 오랜 역사 안에서 계속되고 있고,
- 언어와 민족, 문화와 국가의 차이에도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핵심, 이러한 토대, 이러한 신앙의 본질은 추상적으로 동떨어진 기정사실로 존재해 온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요구에 맞게 다시 해석되고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왔다. 그러므로 체계적-신학적 설명은 이를 설득력 있게 정당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연대기적 설명과 결합되어야 한다.

2. 획기적이고 근본적인 변화
시대마다 새롭고 획기적인 총체적 상황, 곧 그 시대의 사회, 신앙 공동체와 신앙 선포, 신앙 성찰의 총체적 상황이 이러한 하나의 핵심을 다시 재해석하고 구체화한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서 이러한 역사는 매우 극적으로 전개된다. 세계 역사의 새로운 도전들에 응답하여, 미약하게 시작된 공동체는(특히,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경우에는 급성장했지만) 종교적으로 수많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결국에는 대대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하였다.
패러다임 이론은 단지 해석학적인 틀에 불과하며, 이를 구체적 역사적으로 이행하고 현재를 분석할 때에만 그 해석 능력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다. 필자는 그리스도교와 유다교, 이슬람교에 관한 폭넓은 연구에서, 또한 더욱 기초적인 수준에서는 힌두교와 불교, 중국 종교와 관련한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이를 증명해 왔다. 한 종교의 패러다임들, 말하자면 거대 패러다임이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총체적 상황들에 대한 철저한 역사적 분석은 이해의 방향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러한 분석으로 우리는 종교 역사에 관하여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정확한 세계적인 시각을 선택할 수 있다. 패러다임 분석은 근본적 상수와 결정적 변수에 동시에 주목함으로써 위대한 역사적 구조와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세계 역사의 분기점들을 파악하고, 거기서 비롯된 각 종교의 기본적인 획기적 모형들을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모형들이 오늘날까지 각 종교의 상황을 좌우하는 인식 유형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중요한 역사를 배경으로 획기적인 총체적 상황에 대한 역사적 체계적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 필자는 『그리스도교』(Das Christentum, 분도출판사, 2002년, 이종한 옮김)에서 그리스도교 역사의 거시적 패러다임을 다음과 같이 간추렸다.
1) 원 그리스도교의 유다계 묵시 문학 패러다임
2) 고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헬레니즘 패러다임
3)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
4) 종교 개혁 개신교 복음 패러다임
5) 이성과 진보에 정향된 근대 패러다임
6) 현대의 일치 운동 패러다임(근대 이후)?
같은 방식으로, 『유다교』(Judaism)에서는 유다교의 거시적 패러다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국가 이전 부족 패러다임
2) 군주제 시기의 왕국 패러다임
3) 바빌론 유배 이후 유다교의 신정주의 패러다임
4) 중세 랍비-회당 패러다임
5) 근대의 동화(同化) 패러다임
6) 현대의 일치 운동 패러다임(근대 이후)?

3. 현대의 도전
따라서 각 종교는 모든 것이 언제나 지금 모습대로 유지되어 온 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여러 다른 획기적인 총체적 상황을 거쳐 오면서 살아 있고 발전하는 실재인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결정적인 통찰이 나온다. 패러다임들이(최초의 것만 빼고는)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정확한’ 학문 영역에서는 오래된 패러다임(프톨레마이오스의 패러다임과 같은)을 경험적으로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코페르니쿠스의 패러다임과 같은)을 지지하는 결정은 증거에 힘입어 ‘시행된다’. 그러나 종교 영역에서는(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렇지 않다. 신앙과 도덕, 예법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어떤 것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결정될 수 없다(예를 들어, 동서 로마 제국의 분리나 로마 예법과 루터교의 관계에서처럼). 또한 종교 영역에서는 오래된 패러다임들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들과 나란히 수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들(개혁 패러다임이나 근대 패러다임과 같은)이 오래된 패러다임들(원교회나 중세 교회 패러다임과 같은)과 나란히 존재한다.
종교의 상황을 평가하는 일에서, 이러한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의 지속과 경쟁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두 번째 중요한 통찰이 나온다. 오늘날에도 같은 종교의 신봉자들이 여러 다른 패러다임들 안에서 살고 있다. 왜인가? 이들은 기본적인 원칙들에 따라 형성되고 특정한 사회 구조에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안에는 심지어 오늘날에도 지적으로는 13세기에(토마스 데 아퀴노와 중세의 교황직, 절대적인 교회 질서와 나란히) 살고 있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있다. 동방 정교회를 대표하는 일부 사람들은 지적으로 4∼5세기에(그리스 교부들과 나란히) 머물러 있다. 또한 일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는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상황이(다윈 이전,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개혁자들) 여전히 권위를 지닌다.
비슷하게, 일부 아랍인들은 아직도 위대한 아랍 제국을 꿈꾸며 모든 아랍 민족들이 단결하여 하나의 아랍 국가를 만들기를 갈망한다(범아랍주의). 다른 이들은 민족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아랍인 신분이 아니라 이슬람교라고 생각하여 ‘범이슬람주의’를 선호한다. 일부 정통 유다인들은 중세 유다교를 그들의 이상으로 여기고 근대 이스라엘 국가를 거부한다. 반면 많은 시온주의자들은 다윗-솔로몬 제국의 영토 안에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전 종교 패러다임들의 바로 이러한 지속과 존속, 경쟁은 분명 종교 내부의 갈등과 종교 간 갈등, 서로 다른 전통과 당파, 긴장과 분쟁과 전쟁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세 번째 중요한 통찰은 다음과 같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에 핵심적인 질문은, 이 종교가 중세(적어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서는 ‘황금기’로 여겨진)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이 세 종교 모두 스스로 수세에 몰렸다고 여기는 근대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종교 개혁 이후 또 한 차례의 패러다임 전환, 곧 계몽주의를 겪어야 했다. 반면 유다교는 계몽주의를 먼저 거친 다음, 적어도 자체의 개혁 전통 안에서 종교 개혁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슬람교에는 종교 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근대성의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근대의 패러다임에 동의하는 많은 유다인, 그리스도인, 무슬림은 다른 패러다임에서 살아가는 같은 종교 신자들보다 서로 더 잘 지낸다. 중세에 머물러 있는 가톨릭 신자들은 성 윤리 문제에 관련하여 이슬람교나 유다교의 ‘중세인’들과 힘을 합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국제 연합 세계 인구 회의, 카이로, 1994년).
화해와 평화를 바라는 이들은 패러다임의 비판적 분석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답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또한 다른 종교들 안에서) 상수와 변수, 연속성과 불연속성, 또 합의와 반대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네 번째 통찰이다. 곧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주로 종교의 본질과 토대, 핵심이며 그 기원에서 비롯된 상수들이다. 우리가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 기원에 본질적이지 않은 것, 껍데기에 불과하고 핵심이 아닌 것, 토대가 아닌 부가물이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변수들을 포기할(또는 다시 발전시킬) 수 있다.
따라서 패러다임 분석은 특히 세계화 시대에 세계화를 지향하는 것을 돕기 위해 모든 종교적 혼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국제 관계, 서구와 이슬람의 관계, 그리고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세 종교인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해야 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계에 있다. 선택은 분명해졌다. 종교 간의 경쟁과 문화 간 충돌, 국가 간 전쟁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 간 평화를 위한 지름길로서 문화 간 대화와 종교 간 평화를 택할 것인가. 전체적으로 인류 파멸의 위협에 직면한 우리는 증오와 보복, 반목의 장벽을 쌓기를 중단하고 대신 편견의 벽을 하나하나 허물어 그 벽돌을 대화의 다리, 특히 이슬람과의 다리를 놓는 데에 사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4. 이슬람교와 세계 윤리
이러한 다리를 쌓기 위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세 종교가 다르고 여러 환경에서 수세기에 걸쳐 변화해 온 패러다임들 또한 다르지만 특히 윤리학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다리를 놓을 수 있게 하는 상수들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계에서 발전하여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답지 못한 방식이 아니라 인간답게 행동할 수 있다. 한편, 인간은 이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본성상 본능의 충동에 이끌리기 때문에 인간성 안에는 야수성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답지 못한 방식이 아니라 인간답게 행동하려고 계속해서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종교적 철학적 이념적 전통에서,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류의 단순한 윤리 명령들을 찾을 수 있다.
- “살인하지 마라. - 고문이나 가혹 행위, 폭력도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생명을 존중하라.” 비폭력과 모든 생명 존중의 문화를 위하여 노력하라.
- “도둑질하지 마라. - 착취나 뇌물 수수, 부패도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정직하고 공명정대하게 행동하라.” 연대와 정의로운 경제 질서의 문화를 위하여 노력하라.
- “거짓말하지 마라. - 기만이나 위조, 조작도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진실 되게 말하고 행동하라.” 관용과 진실한 삶의 문화를 위하여 노력하라.
- 마지막으로, “성을 남용하지 마라. - 상대방에 대한 학대나 모욕, 굴욕도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라.” 평등과 남녀 협력 관계의 문화를 위하여 노력하라.
이상의 네 가지 윤리 명령은 요가의 창시자인 파탄잘리의 글에서, 불교 경전에서, 히브리 성경에서, 신약 성경에서, 쿠란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윤리 원칙에 근거한다.
- 첫째, 황금률이다. 그리스도보다 수세기 전에 공자가 이미 수립한 이 황금률은 세계의 모든 대 종교들과 철학 전통들에도 알려져 있지만,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라.”라는 이 규율은 매우 단순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그 단순함만큼 큰 도움이 된다.
- 황금률은 이것과는 분명히 구분이 되는 인본주의의 원칙으로 뒷받침된다. “모든 인간은, 젊거나 늙었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장애인이거나 비장애인이거나, 그리스도인이거나 유다인이거나 무슬림이거나, 비인간적으로가 아니라 인간답게 대접받아야 한다.” 인간성은, 인간은, 나뉠 수 없다.
이 모든 것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공통의 인간 윤리 또는 세계 윤리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데 아퀴노나 칸트 식의 윤리 체계(윤리학)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개인적 도덕적 확신을 형성하는 어떠한 기본적인 윤리적 가치와 척도와 태도(윤리)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윤리는 물론 언제나 현실과 거리가 있다. 인간애에 대한 명령은 선험적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코피 아난 국제 연합 사무총장은 2003년 튀빙겐에서 열린 세계 윤리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봉자들의 행위나 선언을 근거로 특정 신앙이나 가치 체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잘못이듯이, 어떠한 가치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가치들이 보편적이라는 생각을 접는 것도 잘못이다.”
끝으로 코피 아난이 자신의 강연을 마무리한 말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아직도 보편적인 가치들이 있는가? 그렇다. 분명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치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이들을 신중하게 숙고하고 수호하며 강화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개인 생활과 지역 공동체와 국가 공동체, 그리고 세계에서 우리가 선포하는 가치들에 따라서 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원문 | Hans K웢g, ?slam: Radical Changes in History - Challenges of the Present? Concilium (2005. 5.), 93-102면, 최문희 옮김.

한스 큉 | 1928년 스위스 수르제 출생. 1954년 사제품을 받고,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 소르본느 대학과 파리 가톨릭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신학 자문으로 참여한 가톨릭 석학으로, 독일 튀빙겐 대학교 신학부에서 기초 신학과 교의 신학, 교회 일치 신학 교수와 교회 일치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96년 교수직을 퇴임하면서 세계윤리재단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저서들로는 『그리스도교』(Das Christentum), 『왜 그리스도인인가?』(Die christliche Herausforderung), 『교회란 무엇인가?』(Was ist Kirche?) 『신은 존재하는가? I』(Existiert Gott? I), 『세속 안에서의 자유』(Freiheit in der Welt), 『세계 윤리 구상』(Projekt Welt-ethos), 『믿나이다』(Credo)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