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2006년 10월호 (제 333호)
이 책을 통하여, 아니 소화 데레사 성녀를 통하여 영성의 길이 육신을 억누르고 무거운 고신 극기를 하며 ...

『현대 복음화 - 교회의 선교학 총론』 외
2006년 10월호 (제 333호)
『현대 복음화 - 교회의 선교학 총론』 서평·심상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

연중 제26주일~제30주일
2006년 10월호 (제 333호)
10월 1일 ● 연중 제26주일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비정규 성체 분배자를 위한 교육 자료
2006년 10월호 (제 333호)
『성체성사, 나눔의 신비』 들어가는 말 - 성체성사의 중요성과 의미 옛말에 “음식 끝에 마음 상하면 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역사
2006년 10월호 (제 333호)
1. 공의회의 경험 1959년 교황 요한 23세는 가톨릭 주교단이 보편 교회 차원에서 장차 공의회 준비에 능동...

영국 교회와 한인 공동체를 소개합니다
2006년 10월호 (제 333호)
영국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씻기도 전에 영국 차(English tea - 홍차에 우유를 듬뿍 부은 차)를 한 잔...

중국 주교 서품의 파장과 전망
2006년 10월호 (제 333호)
서 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황청과 중국 정부 사이의 관계 개선이 목전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20...

의정부교구 민족 화해 사제 모임
2006년 10월호 (제 333호)
한 민족이 남북으로 나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남북한은 매우 이질적인 사회가 되었고, 우리는 통일과 ...

고해소의 비밀
2006년 10월호 (제 333호)
8월 늦장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두어 시간가량 자동차로 달려 작은 성당에 늦은 오후에...

가르침이 아니라 사귐이다
2006년 10월호 (제 333호)
헨리 나웬(Henri Nouwen)은 “감사하는 것이 선교사의 대표적 덕행이다.”라고 했다. 쉽게 동감할 수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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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 동향 2006년 10월호 (제 333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역사

주세페 알베리고

1. 공의회의 경험
1959년 교황 요한 23세는 가톨릭 주교단이 보편 교회 차원에서 장차 공의회 준비에 능동적 역할을 맡아 줄 것을 당부하고, 이러한 주교단의 자문에 확실한 자유를 보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이 지속된 몇 개월 동안에도 교황 비오 12세의 비밀주의 통치 방식은 여전히 만연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문을 구하는 태도로 전환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주교들의 공의회가 되기를 바랐다. 주교들의 공의회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신학적인 바탕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건의한 소수의 주교들과, 교회 규범을 조정함으로써 교구에서 교황과 같은 권한을 누리고자 했던 주교들의 시각차는 실로 엄청났다. 거의 모든 이가 수도회의 득세를 거세게 비난하였고, 본당 주임의 종신제 폐지와 성직자 배치의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대다수의 주교들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완결 짓고자 한 반면, 소수의 주교들은 주교단의 단체성을 어느 정도 명백하게 추구하고자 하였다.
주교들은 대부분 불안한 마음으로 공의회에 왔다. 그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주교들은 로마라는 도시를 알지 못했다. 또한 리버풀 교구장 존 카멀 히넌 주교의 비망록에 따르면, 주교들은 거대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회의장에서 (성[姓]에 따라 알파벳순으로) 모르는 사람 옆에 앉게 되었다.1) 더욱이 라틴어(특히 ‘외국인’들의 라틴어 발음)를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논의 사항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솔직히 말해서 시대에 뒤떨어지는 경향이 있었기에, 특히 여러 견해를 민첩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논쟁이 지루하게 되풀이된다고 생각하였다. 상당한 불편과 경비를 감수하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본국을 떠나 있어야 하는지 몰랐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공의회가 ‘계획’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부분 알지 못하였다. 특히 공의회 개막 당시에 공의회 교부들의 자세가 소극적인 ‘학생의’ 태도였음을 증언해 주는 일지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장엄하고 중대한 행사에 참석하고 있었으나, 그 계획을 분명하게 깨닫지는 못했던 것이다.
주교들은 총회에서 주로 듣기만 했기 때문에 총회 참석을 ‘지루한’ 일로 여겼다. 300번의 회의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주교들이 대부분이었다. 주교들은 일지 곳곳에서 권태롭거나 이따금 졸기도 하는 일상의 피곤함에 대해 적고 있다. 심지어 어떤 표현들은 거침없고 신랄하였다.2) 그래도 수백 명의 주교들은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위원회에서는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더 많았다. 또한 각국 주교회의의 회의가 있었다. 적어도 이들 회의에서는 라틴어나 다른 언어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없었다.
이 모든 상황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결국 성령과 가톨릭 주교단의 가장 큰 성과임이 밝혀졌다. 결국 성령의 이끄심으로 주교들이 변화되었기에 1960년 수백 명의 주교들이 로마로 보낸 공의회 소집 답변서에 엿보였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에서 공의회가 승인한 주요 결정들까지의 진전(‘반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이 가능하였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공의회의 결정들이 지니는 한계와 미흡한 부분까지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의 초대에 응하면서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문제들을 제시했던 주교들의 관점과, 바로 그 주교들이 모두 합의한 결과로 공의회가 제시한 그리스도교 상과 교회 상 사이의 질적인 도약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주교들은 전례 운동, 성경 운동, 교회 일치 운동 그리고 인적 자원의 문제를 통하여 또 사회의 세속화의 압력 아래, 이전의 몇 십 년 동안 형성된 노선에 따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교회 쇄신을 위한 유일한 기회로 보게 되었다.
공의회 기간 동안 2천 명 이상의 주교들과 그만큼의 전문가(신학자들, 교회법 학자들, 역사가들), 그리고 여론의 관심 정도를 보여 주는 엄청난 수의 기자들이 장기간 머문 로마는 흥분의 분위기로 고조되었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는 주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주교들의 의사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대다수의 주교는 공식 활동 장소인 회의장에서는 수동적으로 듣는 역할만을 수행하였으나, 머지않아 회의장 ‘밖에서’ 더 흥미롭고 편한 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소회의들, 연구 모임, 주교회의의 회의, 식사 시간과 날마다 성 베드로 대성전까지 오가는 버스 안에서 나누는 교류 등을 통하여, 주교들은 자신들의 편협하지는 않더라도 제한된 교구 운영의 시각에서 벗어나고, 보편 교회의 더욱 광범위한 (아마 모르고 있던) 문제를 발견하며, 자신의 체험과 다른 영적 사목적 체험을 하고, 드넓고 다채롭고 다각적인 세상에 직면할 수 있었다.
교구와 공의회 사이를 오간 4년의 기간(해마다 로마에서 석 달, 본국에서 아홉 달씩)은 주요 쟁점(주교단의 단체성, 주교 서품, 보편 교회에 대한 책임, 평신도와의 관계, 전쟁과 평화)에 대해 공의회가 채택한 입장과 자기 지역 교구의 교회 안에서 따르는 기준들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비교는 때로 당황스럽기도 하고, 주교들이 좀처럼 익숙하지 않았던 자기 비평의 자세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많은 주교들은 익숙하지 않은 갈등을 체험하게 되었다. 의견의 차이와 대립적인 사고방식을 세속 사회의 전형적인 결함으로 간주하면서, 주교들의 상당수가 단조롭고 심지어는 무미건조한 그리스도교관과 교회관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주교들은 머지않아 잘 조직된 회의로서 공의회를 마치게 될 것이라 보았고, 실제로 교황청도 이렇게 되도록 주교들을 격려하였다. 참가자들의 일지에 따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실제로 참가한 것은 (기쁨, 배려, 긍지, 이해와 같은) 강렬한 의미와 감동으로 가득 찬 경험이었다.3) 날이 갈수록, 대다수의 마음속에 공의회에 대한 이해가 무르익었다. 공의회와 공의회가 일깨운 희망이 주교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 주교들은 교황과 더불어 그 역사적 순간에 진정으로 복음을 선포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 그 놀라운 사건에서 주교들 각자가 자신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한몫을 담당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2. 문 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대중 매체의 특별한 관심을 불러 모았다.4) 공의회 회기 중에도 여러 언어권의 주요 언론 기사들을 모은 책이 발간되었다. 이러한 책들은 최종 문헌이 발간되기까지 공의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상당 부분 알려 주었고, 그 다문화적 구성과 다양한 입장들을 상세히 기술하여 공의회의 행적을 이해하는 데 첫 발판을 마련하였다.
공의회에서 나온 문서는 실로 방대하여 그 양을 헤아리기가 어렵고 그 사본들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의회 당시 날마다 회의 안팎에서 많은 문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배포되었다. 공의회 사무국은 자료 수집에서 귀중하고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사무국들을 거쳐 간 문서들 이외의 것들까지 관리할 여력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바오로 6세의 선견지명 덕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고는 교황청 비밀 문서고와 그 엄격한 규율 적용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고는 공의회 사무국이 수집한 문서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 있었고, 결국 연구가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총 60여 권으로 이루어진 공의회 회의록 전3집이 매우 신속하게 발행되었다(사실상 공의회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일이었다).5)
‘비공식’ 문서의 보존은 다소 불확실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사무국도 거치지 못한 채 낱낱이 흩어져 버렸다. 실제로 공의회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전체든 일부든) 자신의 공의회 자료들을 보관하였으나 다른 이들, 특히 다른 대륙에서 온 사람들은 항공 여행의 여건상 이러한 자료들을 보관할 수도 없었고, 그럴 의향도 없었다. 1990년대가 되어서야 갖가지 자료를 포함하여 공의회의 ‘비공식’ 문서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문제가 부각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공의회의 ‘비공식’ 문서는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때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고6)의 ‘공식’ 문헌들에 나타난 가르침들을 통합하는 데에 유용한 자료로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3. 역사로 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지 25년이 지난 1988년, 전 세계 여러 문화에서 모인 여러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이 형성되었다. 이 팀의 목적은 1959년 1월 공의회 소집을 공표하여 1965년 12월 8일 그 장엄한 막을 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본래 문서 작업 과정을 토대로 공의회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공의회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관하여 엄격한 방법론을 통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풍요로움과 한계와 모순에 대하여 공동으로 연구하고 깊은 이해를 도모하게 되었다. 오랜 공의회 역사상 그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다문화적인 모습도 드러날 수 있었다. 다수와 소수, 공의회와 교황, 공의회와 교황청, 본회의와 위원회들, 주교들과 신학자들, 공의회와 여론 간의 모든 변증법적 긴장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공의회가 부분적으로는 전례와 전승과 교회론 등과 같이 이미 논의되어 오던 주제를 다루고, 부분적으로는 종교 자유, 타종교와의 관계,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위치와 같은 새로운 주제, 그 새로움 때문에 불안감을 상승시켰던 주제들을 다룬 데서 비롯된 어려움들을 전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회의의 복잡하고 풍요로운 체험을 드러내면서 공의회의 생활을 하루하루 재구성해 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사』(The History of the Second Vatican Council)7)는 공의회 참석자들의 인식을 뛰어넘고, 공의회를 목격한 세대의 생애를 초월하며, 공의회 주역들의 공의회 활동에 대한 ‘해석학적 견제’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가운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사실상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규명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우리는 이 위대한 회의를 세분화하지 않고, 분석적이면서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기로 하였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다양한 자료들을 보존하고 이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역시 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사』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이 책의 출판을 준비하는 수년의 조사 기간 동안, 우리는 또한 충분한 양의 공의회 준비 작업에 관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공의회의 준비 작업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그 준비 기간인 1959~1962년이 실제 공의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의미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이는 이전 공의회들의 경우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만큼 값진 의미를 지닌다.8)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공의회 활동의 서로 다른 국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9) 심지어 논쟁과 문제가 여느 때처럼 뒤섞였을 때에도, 우리는 어떤 도식적인 재현을 삼가고, 흔히 공의회 교부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혼돈을 야기하기도 하고 중복되기도 하는 여러 가지 기록들을 존중하고자 하였다.10) 최종 문서 초안 작성의 힘겨운 작업 과정에서 공의회 교부들이 대립했던 특정한 측면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어려웠던 일은 공의회에서 표현된 다양한 의견들을 어떤 방식으로 반영하고 존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주로 정보의 부족 때문에, 공의회 준비 기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접근법들을 구분하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공의회가 시작된 다음부터는 점점 구별되는 확고한 의견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러한 여러 견해들을 최대한 충실하게 문서로 남기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의무가 있었다.
우리는 열여섯 개의 최종 문헌의 ‘틀’ 안에서 공의회의 작업을 재구성하거나 이를 ‘연대순으로’ 제시하지는 않기로 하였다. 1980년대에는 이러한 작업 방식이 분명한 추세였다. 우리는 준비 기간에 이어진 공의회의 네 번의 회기 구분을 따랐으며, 총회의 전체 토론, 위원회 활동, 비공식 모임, 설명회, 개별 모임 등 공의회 교부들의 매일매일의 주요 일정을 최대한 존중하였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오랜 ‘휴회 기간’의 중요성을 서서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도 위원회들을 통해서나 주교들 간의 만남과 신학자들 간의 교류를 통해서 공의회 활동은 계속되었다. 처음에 우리는 휴회 기간의 활동들을 앞 회기의 끝 부분에 덧붙여 설명해 놓았다. 작업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에 가서야 우리는 휴회 기간의 활동이`-`비록 이전 회기에 있었던 활동의 연장이라 하더라도`-`공의회의 다음 회기의 토론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평가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지난 회기의 끝 부분보다는 새 회기의 시작 부분에서 이러한 휴회 기간의 활동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 새로운 이해
이 연구 조사를 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문헌 작업이 우리가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이해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정말 새로운 정보까지도 드러내 주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깨닫게 된 것은 사전 준비 자문 기간(1959~1960년)과 관련해서였다. 이 기간에 교황청과 타르디니 추기경이 공의회에서 다룰 의제를 제시해 달라는 질문지를 주교들에게 보내자고 제안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전적으로 자유로운 자문을 구하여 이천여 건 이상의 사전 준비 견해를 얻었다. 또한 우리는 연구 조사를 통해서, 그러한 견해들의 내용을 당시 교회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교황청이 분석하고, 결국 그러한 견해들 자체가 ‘교회법적으로’ 치중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게 되었다.
본격적인 준비 작업 기간(1960~1962년)과 관련하여, 준비 위원회들이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를 재구성해 볼 수 있었다. 평신도위원회와 그리스도인일치사무국을 제외한 나머지 준비 위원회들은 교황청 성(省)들에 상응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리스도인일치사무국을 제외하고 이 위원회들은 모두 타르디니 추기경의 관할 아래에 있었고, 준비 위원회에서 다루는 안건들은 교황청 성들이 제시한 것이었다. 『회의록과 문헌』(Acta et Documenta)에 개별 위원회들의 행적이 발표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측면에 관하여 조사할 때는 문서고를 샅샅이 찾아보아야만 했다.11)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일치사무국이 수행한 작업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일치사무국은 ‘사목’ 영성과 교회 일치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현재화(aggiornamento)’를 위하여 공의회의 주제들에 심도 있게 접근하였다. 중앙 위원회의 취약한 모습도 밝혀지게 되었다. 중앙 위원회는 사실상 준비 작업을 이끌었다기보다 위원회들이 준비한 무수하고 장황한 글들을 평가하는 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는 공의회 개막이 임박했을 무렵에도 그러한 모습을 보였고 거의 늘 수동적으로 움직였다.
우리는 준비 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교황 요한 23세가 준비 작업을 위해 설립된 기관들의 자율적인 책임은 철저히 존중하면서 1960년부터 1962년까지 다양한 공적 발언을 통해 공의회의 기틀을 세우는 데에 전념하며, 나름대로 준비 활동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의회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72개 준비 의안을 빨리 승인받으려는 초고속 공의회(불과 몇 주 동안 개회)의 모습과, 다른 한편으로 주교들이 자유롭게 연구를 통해 하루하루 다져 나가야 했던 ‘스스로 책임지는’ 공의회, ‘새로운 성령 강림’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무수한 준비 연구물의 발행과 기고자들의 연례회의 덕분에 완성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사』 제1권은 1959년부터 1962년까지를 아우르며, 마침내 그때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공의회 이전의 복잡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준비 기간이 공의회 자체의 활동과 결정에 미친 적잖은 영향을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12) 그럼에도 준비 기간은 공의회 사건의 풍요로움, 참여 정신, 역동성에 일부만 기여하였을 뿐이다.13)
마찬가지로 공의회의 활동에 대해서도, 자료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입증된다. 곧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교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계속해서 상승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의 단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교회론(De Ecclesia)’과 ‘평신도 사도직(De apostolatu laicorum)’에서 분명히 나타나며, 사회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또는 다른 관점에 비추어 본 교회와 사회의 관계와 관련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논쟁들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비록 취약한 면도 있었지만 ‘운동들’(전례 운동, 교회 일치 운동, 성경 운동, 평신도 진보 운동)의 경험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전반부의 운동들을 진정한 ‘사전 공의회’로 보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롯된 위기로 교회가 당면한 무기력함 역시 신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위축시키는 영향을 주었다. 이는 주교단을 지역 교회들 간의 친교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황권에 대한 견제 세력이라고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교회 일치 운동에 관해서는 일치 계획이라기보다는 다른 교회에 대한 가톨릭의 ‘태도’라고 여겼다. 나아가 교회의 ‘사회 교리’가 그때까지 만족할 만한 응답을 주지 못하던 평화나 혼인이나 이와 유사한 ‘사회’ 문제들에 관한 신학도 부족했다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한 일이다.
문서화 작업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은 그 결과에 대한 폭넓은 이해로 이끌어 주었다. 가장 의미 있는 사실은 현재화와 사목적 고찰이 공의회의 활동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현재화와 사목적 고찰은 주교들이 진중하게 받아들인 결과 공의회 정신에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승인된 문헌의 작성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준비된 의안을 수용하는 태도 아니면 탐구하는 정신 가운데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여야 하는 상황을 서서히 인식하게 되었다. 1962년 10월에 교황 요한 23세가 단죄와 파문을 발표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대다수 교부들은 동의하였다. 그러나 사목적 방식과 정신 안에서 현재화를 표현하는 적합한 글을 작성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풍요롭고 종합적인 진술을 추구하는 경향이 드러난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단체적인 성격을 지니는 공의회 사건과 그 회의가 이루어 낸 최종 결정들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 역시 의미심장한 일이다.14) 우리는 공의회 사건을 (방대하기는 하지만) 일련의 결정들로 축소시킬 수는 없음을 알게 되었다. 공의회의 단체성은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에 나타난 표현보다 더 심오한 깊이와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헌장들과 교령들은 공의회 과정에서 표현되었던 미묘한 의견의 차이들을 모두 반영하지 않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결정들의 총합보다 더욱 알차고 의미 있는 ‘사건’이었으며, 그 결정들에 대한 공표와 승인으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된 배경으로는 공의회 개막 이전 기간의 큰 기대를 들 수 있다. ‘공의회 사건’은 공의회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때, 공의회 소집이 선포된 것만으로도 이미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5. 해석학적 전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사에 대한 조사는 ‘해석학적 전환’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는 회기 중에 날마다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단편적이거나 사건 중심의 이해를 넘어설 수 있었다. 공의회에서 나온 방대한 양의 보완 문서인 『공의회 회의록』(Acta Synodalia)뿐만 아니라 로마에서 주교들이 보낸 서한과 일지들과 같은 개인적인 것까지 포함하는 자료들에 대한 중복되는 분석으로 우리의 이해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회의 전체에 대한 통일되고 종합적인 전망을 통하여, 전체 맥락에서 벗어나거나 종합적인 특성이 결여된 개인적인 일화나 특별한 구절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5)
이러한 방식으로, ‘횡적’ 연구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횡적’ 연구는 공의회의 정신 안에서 되풀이되고 흔히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요소들을 밝혀 주는 것이다. 곧 ‘전례 헌장’과 ‘교회 헌장’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례 쇄신과 교회론적 쇄신,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안에 표현된 것보다 더 깊고 더 견고한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관심,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에 나타난 것보다 더 풍성한 하느님 말씀의 재발견, 무엇보다도 교부들이 점차적으로 그리스도교 선언의 차원으로 그 가치를 인정한 종교의 자유를 향한 근본적인 요구 등이 그러한 주요 요소들이다. 공의회 활동을 포괄적이고 비평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대다수의 공의회 교부들이 나아간 행적을 그대로 좇을 수 있으며 이러한 행적을 그저 눈길을 끄는 개별 일화들로 축소시켜 버리는 위기나 그렇게 하려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16) 이렇게 함으로써 ‘계시의 두 원천설’에 대한 초안의 표결(1962년 11월 19일)로 말미암은 완전한 ‘전환’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성경과 성전의 관계와 같은 미묘한 문제를 ‘사목적인’ 접근을 바탕으로 다루려는 교부들의 결의를 보여 준 것이다.
공의회의 역사 편찬을 통하여 공의회 활동의 깊은 ‘일치’가 밝혀지게 되었고, 공의회의 결정들도 공의회 사건의 전부는 아니지만 권위를 지닌다는 사실이 차츰 밝혀지게 되었다. 이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영감을 주고 공의회의 결정들을 하나로 모아 통합하는 데에 씨실의 역할을 한 개별 요소들에 관한 주제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그러한 연구의 풍요로운 결실도 보장받게 되었다. 공의회 활동 전체에 걸쳐서, 또는 적어도 그 일부 주요 활동에서 이 요소들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본질에 따라 접근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과오에 대한 논박을 하기보다 사목적 성찰을 하는 공의회, 기존의 구조를 완성하기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쇄신하는 공의회, 또는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지침을 밝혀 주지만 절대적인 규범을 내리지 않는 공의회이다.
공의회 역사에 비추어,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결코 ‘공의회 우위설’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곧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세나 교황 바오로 6세와의 관계에서 언제나 헌신적이었다. 공의회의 전망이 교황들의 견해와 달랐던 ‘극단적인 경우’에서조차, 공의회와 교황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이 없었다. 공의회 역사의 비평적 이해는 협의 정신(conciliarity)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유산의 으뜸가는 독창적인 내용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연유로 공의회 역사에 대한 비평적 이해야말로 성령의 이끄심으로 공의회를 이해하는 올바른 전망인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사』의 목표는 초교파적인 ‘교회 일치’ 단계에서 ‘통상적인’ 지역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의 ‘협의체적(conciliar)’ 차원을 더욱 비옥하고 명확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협의 정신(conciliarity)에 기초하고 협의 정신으로 발전하는, 따라서 다각적이고 창의적인 수용에 기여하려는 것이다. 이는 중앙집권적으로 따라서 불가피하게 관료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과는 다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경험에 대한 이해는 공의회를 과거라는 벽 안에 가두려는 시도가 아니라 교회들에게 새롭고 창의적으로 성령을 따르고자 하는 끝없는 열망을 길러 주려는 뜻이다.

1.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2005년 12월 5~6일자 1.6~7면. 본래 2005년 12월 14일자에 발표된 영어 번역본은 “지정석에서의 첫날이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았고, 대부분의 주교들은 자연스럽게 교계별로 앉았다. 우리의 좌석 번호대로 투표용지 번호를 매겼다. 내 번호는 S149번이었다. 낯선 장소에 있다 보니, 우리는 소외감을 느꼈다. 영어를 쓰는 대주교는 내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되자 카라치 대교구장이 바로 내 뒷자리에 앉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굉장히 지적인 젊은 주교였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의제에 관해 논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첫날 아침에는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었다”(바티칸 공의회에 관한 개인 비망록, 볼로냐 종교학연구소).
2. 1964년 11월 10일자 일지에 플로리트 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잠깐 졸았다”(미발행, 볼로냐 종교학연구소). “나는 교만한 주교들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성 베드로 광장의 내부를 산책 삼아 걸었다. 그들은 복음을 우화로, 교의를 계시가 아니라 신학자들의 연구물을 바탕으로 한 확고한 정식으로, 또 신앙을 일개 감정으로 전락시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교회의 교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자신의 사제직을 싫어하는 이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페사로의 L.C. 보로메오 주교는 1962년 11월 23일 일지(Buonasorte)에서 ‘(계시의) 두 원천설’에 관한 초안에 대한 투표 때문에 생긴 이러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다운사이드 대수도원장 B.C. 버틀러 아빠스는 1962년 11월 22일 일지에 ‘주님 탄생 예고’에 대한 그의 입장을 성무성성에 알리겠다고 위협하는 브라운을 만났다고 적고 있다(미발행, 볼로냐 종교학연구소).
3. 몬티니 대주교는 자기 교구에 보낸 1962년 12월 2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이 영적 체험이 공의회 참석자들에게 분명히 지워지지 않는 시간이 될 것이다. 대부분은 순조롭지만, 어떤 때는 격렬하며, 때로는 극적이고 또 어떤 순간에는 고뇌와 고통의 시간이다.`…”
4. J. Grootaers, ?nformelle Strukturen der Information am Vatikanum II? in Biotope der Hoffnung. Zu Christentum und Kirche heute, ed. N. Klein, H.R. Schlette, and K. Weber, Olten 1988, pp. 268~281 참조.
5. Acta et documenta concilio oecumenico Vaticano II apparando, series I(antepraeparatoria), Vatican Polyglot Press 1960~1961; Acta et documenta concilio oecumenico Vaticano II apparando, series II (preparatoria), 1964~1965; Acta Synodalia sacrosancti concilii oecumenici Vaticani II, 1970~1980, all ed. V. Carbone.
6. 교황 바오로 6세가 설립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고는 초기 위상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2000년도에 바티칸 비밀 문서고에 통합되었다. S. Pagano, “Riflessioni sulle fonti archivistiche del concilio Vaticano II. In margine ad una Pubblicazione recente”, Christianesimo nella Storia 23, 2002. pp.775~812 참조. 문서고의 목록 편찬 작업은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다.
7.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사』는 이탈리어어(Il Mulino, Bologna), 독일어(Gr웢ewald, Mainz), 영어(Orbis, Maryknoll, NY), 프랑스어(Cerf, Paris), 스페인어(S뭛ueme, Salamanca), 포르투갈어(Vozes, Petr뾭olis), 러시아어(St. Andrew, Moscow)로 출판된다. 여러 중요한 신학 비평지와 역사 비평지가 이 책을 다루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8. A. Indelicato, Difendere la dottrina o annynciare l'Evangelo, Genova 1992; J. O. Beozzo, Chritianismo e iglesias de Am럕ica Latina en v뭩peras de Vatincano II, Costa Rica 1992; ?la veille du Concile Vatican II. Vota et r럂ctions en Europe et dans le Catholicisme oriental, ed. M. Lamberigts and C. Soetens, Louvain 1992; Verso il Concilio Vaticano II, Bologna 1993; II Vaticano II tra attese e celebrazione, Bologna 1995.
9. Per la storicizzazione del Vaticano II, ed. G. Alberigo and A. Melloni, Bologna 1992; Vatican II commence... Approches fracnophones, ed. ? Fouilloux, Louvain 1993; Der Beitrag der deutschsprachigen und osteurop둰schen L둵der zum zweiten vatikanischen Konzil, ed. K. Wittstadt and W. Verschooten, Louvain 1966; Les Commissions conciliaires ?Vatican II, ed. M. Lamberigts, C. Soetens and J. Grootaers, Louvain 1996; Vatican II in Moscow(1959~1965). ed. A. Melloni, Louvain 1997,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로도 출판하였다.; Experience, Organisation and Bodies at Vatican II, ed. M.T. Fattori and A. Moelloni, Louvain 2000; Herausforderung-Aggiornamento zur Rezeption des Zweiten Vatikanischen Konzils, ed. A. Autiero, Altenberge 2000; Volti di fine concilio. Studi di storia e teologia sulla conclusione del Vaticano II, ed. J. Dor?and A. Melloni, Bologna 2000.
10. M. Velati, Una difficile transizione. Il cattolicesimo tra unionismo ed ecumen뭩mo(1952~1964), Bologna 1996; M. Paiano, Liturgia e societ?nel Novecento. Percorsi del movimento liturgico di fronte ai processi di secolarizzazione, Rome 2000; R. Burigana, La Bibbia nel Concilio. La redazione della costituzione ?ei Verbum?del Vaticano II, Bologna 1998; G. Turbanti, Un Concilio per il mondo moderno. La redazione della costituzione pastorale ?audium et spes?del Vaticano II, Bologna 2000; A. Melloni, L'altra Roma. Politica e S. Sede durante il concilio Vaticano II(1959~1965), Bologna 2000; N. Buonasorte, ?er la ?ura, piena, integra fede cattolica?: il p. V. A. Berto al concilio Vaticano II? Cristianesimo nella Storia 22(2001) pp. 111~151; S. Scatena, La fatica della libert? L'elaborazione della dichiarazione 《Dignitatis humanae》 sulla libert?religiosa del Vaticano II, Bologna 2003; M. Faggioli, Il vescovo e il concilio. Modello episcopale e aggiornamento nella storia del decreto ?hristus Dominus?del Vaticano II, Bologna 2005.
11. Storia del concilio Vaticano II-I. Il cattolicesimo verso una nuova stagione. L'annuncio e la preparazione (gennaio 1959~settembre 1962), Bologna 1995, pp. 17~176.
12. 같은 책, pp. 177~526.
13. Storia del concilio Vaticano II-II. La formazione della coscienza conciliare (Ottobre 1962~Settembre 1963), Bologna 1996. 기각된 되프너 계획(D쉚fner plan 1963~1964)은 1962년에 작성된 초안의 수를 줄여 공의회 활동을 주요 주제에 집중시키고자 (그리하여 활동을 단축시키고자) 한 시도였다. 이 준비 작업은 주로 교황청의 주도권에 대립하여 주교의 책임을 재옹호하는 반응을 낳았다. 1962년 10월 13일 위원회 위원 선출이 연기된 것과 대다수 주교들이 주교회의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4. Storia del concilio Vaticano II-IV. La chiesa come comunione(settembre 1964`~`settembre 1965) and Ⅴ. Concilio di transizione(settembre~dicembre 1965), Bologna 1999 and 2001.
15. 이 점에 관하여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8항의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in)’의 의미에 관한 토론이 전형적이다. 공의회 활동의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예로는 토이펜바흐(A. Von Teuffenbach)의 Die Bedeutung des ?ubsistit in?(LG 8). Zum Selbstverst둵dnis der katholischen Kirche, Munich 2002를 들 수 있다. L. 사르토리(Sartori)의 “Osservazioni sull’ermeneutica del ‘subsistit in’ proposta da Alexandra von Teuffenbach”, Rassegna di Teologia 45(2004) pp. 279~281에서 토이펜바흐의 책을 정당하게 비판하였다. 1963년 10월 30일의 운영 위원회 투표, 1964년 11월의 ‘암흑 주간(black week)’, 1965년의 종교 자유와 평화에 대한 긴장과 같은 사실과 그 의미도 이제 전체 공의회의 맥락 안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16. 대표적인 것으로 성무성성에 관한 프링스`-`오타비아니의 논박(1963년 11월 8일)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