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묵상 기도』
2006년 11월호 (제 334호)
고르네오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십자가를 끔찍이 존경하고 있었으나 전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공부 좀 하...

『관상과 사적 계시』 외
2006년 11월호 (제 334호)
『관상과 사적 계시』 서평·심상태 오늘날 성인(成人) 신자들은 이 땅에서 거의가 각박한 세파를 헤쳐 가...

연중 제31주일~그리스도 왕 대축일
2006년 11월호 (제 334호)
11월 5일 ● 연중 제31주일 가장 큰 계명 “첫째는 이것이다.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

『어르신 예비신자 교리서』의 특성과 활용
2006년 11월호 (제 334호)
“고등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것을 습득하기란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이는 주교...

오늘날 교회와 세상에서 신학의 책임과 임무
2006년 11월호 (제 334호)
이 글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교구장 조제프 도레 대주교가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카가톨릭대학에서 한 강...

쉼터이고자 하는 교회
2006년 11월호 (제 334호)
독일 교회는 변하고 있다. 우선 외적인 면에서 변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줄어들고 있다. 이는 수치상으로...

서울대교구 인라인 하키 동호회
2006년 11월호 (제 334호)
“건강은 행복의 어머니이다.”라는 금언대로, 행복한 삶과 사목을 위해 정기적인 운동을 실천하는 사제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2006년 11월호 (제 334호)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나는 종종 미사 중 평화의 인사 때에 신자들에게 서로 “사랑합니다.”, ...

선교의 불꽃
2006년 11월호 (제 334호)
들어가며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거절하려고 하였다. 한국 교회에 관한 원고를...

사별 가족 모임
2006년 11월호 (제 334호)
올 한 해 동안에도 본당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떠난 이들이 있으면 남겨진 이들도 있게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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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의 초상 2006년 11월호 (제 334호)

선교의 불꽃

강 디에고

들어가며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거절하려고 하였다. 한국 교회에 관한 원고를 왜 하필이면 외국인인 나에게 청탁하는 것인가? 더군다나 한국 교회에 대한 조언을 해 달라고 하다니…. 내가 이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주제넘은 일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당혹감을 한 친구에게 토로하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생각해 보게. 사람이 거울만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한들 자기 자신을 전부 다 알 수 있겠나? 다른 관점도 필요한 법이네. 이것이 『사목』에서 바라는 바 아니겠는가. 그러니 원고 청탁을 받았으면, 한 번 써보게나.” 그래서 결국 다른 생각을 접고 원고 청탁을 수락하게 된 것이다.
나는 사물을 바라보는 완전한 시각이나 모든 것을 명확하게 밝히는 뛰어난 언변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저 꾸밈없이 간단하고 겸손하게, ‘내가 본 그대로’, 곧 선교사가 본 그대로 한국 교회에 관한 몇 가지 생각과 성찰을 독자들과 함께 나눌까 한다.

물 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1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당신 제자들에게 지체 없이 “온 세상에 가라.” 하시며 우선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에, 그러나 어떠한 지역적 경계 없이 ‘선교하러’ 보내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우리의 어떠한 특별한 미덕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의 ‘도구가 되도록’ 뽑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서 이른바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고 호기심과 관심과 매력을 느끼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들 자신의 소명을 깨달을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부름받은 신분의 ‘표징’이 된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모든 이에게 ‘파견되기 위한’ 교회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이중의 체험을 하게 된다. 자신이 아버지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과, 아버지와 또 가장 가난한 사람부터 시작하여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체험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참모습이며, 그리스도인은 이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명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든 그 자리에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부름받고 파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결코 스스로 목적이 될 수 없고, 비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도구가 된다.

선교사로서 교회의 신원에 근거한 이러한 몇 가지 성찰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본다. 우리 한국 교회는 충분히 선교적인가? 한국 교회는 다른 이들을 위한 도구, 세상을 위한 도구인가?

최근 몇 년간 한국 교회에는 수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선교 의식이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가끔 이렇게 자문해 보곤 한다. 우리 한국 교회가 내부에서부터 타오르는 고유의 진정한 ‘선교의 불꽃’을 느낀다면,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사제들과 신자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선교의 불꽃’이 타오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분명 ‘혁명’이라 일컬을 정도의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내게는 다음과 같은 ‘꿈’이 있다.
- 한국의 모든 본당에 나뉘어 있는 수많은 ‘반’들이 완전히 다른 의미와 차원을 지니고 다달이 반 모임을 갖는 것이다. 이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소공동체가 되어 ‘빛과 소금’이 되는 자리와 방법을 발견하고자 하며, 그 구성원들은 하느님 말씀의 빛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읽으려고’ 겸손하게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병자, 노인, 고통받는 이, 가난한 이에게 생명을 전해 줄 것이다.

- 많은 본당 레지오 단체들과 통상적인 여러 본당 공동체들이 새롭고 활기차고 열정적인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이는 ‘잃어버린 양들’을 누가 더 많이 본당으로 데려오는지 서로 경쟁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시장이나 일터, 가정,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이 아버지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모든 이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며 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충만한지를 증언하려는 자세다. 그렇게 될 때에, ‘밖’에서 바라보는 이들에게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한국 신자들의 뛰어난 조직력과 독특하고 매우 체계적인 공동 작업 방식을 통하여, ‘다른 이’의 필요에 응답하고 신앙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 ‘우리 신앙의 이유’를 전달하는 크고 작은 수많은 창의적인 활동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꿈을 꾸는 이유는, 누구나 어떤 구체적인 인간 공동체의 복음으로 변화된 진정한 삶을 보면 이 새로운 ‘생활양식’의 ‘직접적인 체험’에 대한 가능성을 인식하고 존재의 원천이신 분을 따르는 데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방을 비추는’ 선교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것이 변화의 여러 측면 가운데 한 면에 불과하다고 확신한다. 더 중요한 다른 측면들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너무 ‘멀리’ 있어서 공동체의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 영역(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영역)이 있다. 이는 반드시 지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이따금 이데올로기와 같은 문화적 거리감, 사회적 차이, 상호 무관심과 연관된다.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는 특히 젊은이 세대, 낮은 사회적 신분의 노동자, 외국인 이민, 다른 종교 신자와 종교무차별주의자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방을 비추는’ 선교에는 언제나 ‘파견 선교’도 포함되어야 한다. 파견 선교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기 구성원 중에 누군가를 ‘보낸다’는 의미다. 파견된 이는 자신에게 익숙한 삶의 터전과 가족의 품에서 ‘떠나서’ 멀리 있는 이들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에게 선교 활동을 하고 증언하고 대화하며 복음을 선포한다.

괜찮다면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꿈’을 소개하고자 한다. 만일 다음과 같은 상황이라면 한국 교회가 어떻게 변화하겠는가.
- 흔히 여리고 ‘소극적인’ 본당 청년 단체들을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젊은이 세계로 ‘선교하러 보낸다면’ 어떨까. 가톨릭 청년들이 바람직하게 어울린다면 또래 젊은이들 사이에 ‘지루한 동아리 회원들’이 아니라 그들의 관심을 끄는 참다운 불꽃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나 공원, 그리고 디스코텍(왜 안 되겠는가?)이나 오늘날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장소로 그들을 만나러 ‘나가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이전에 해 왔던 본당에서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나 성가대, 전례부 활동 등이 소홀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교회는 자신이 대리하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더 충실하고 매력적인 새 얼굴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수녀가 ‘제의방에서 해방되도록’ 노력하고, 지역 교회는 수도자, 선교사와 더욱 깊은 친교를 도모하게 되면 어떨까? 아마 제대포가 지금처럼 새하얗지 않을 것이다. 전례도 지금만큼 장엄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더 ‘참되게’ 참여하는 전례가 될 것이다. 남녀 수도자와 선교사는 사실 일반적으로 은사에 따라 특별한 방식으로 ‘멀리 있는 이들’을 위하여 일한다. 그들과 함께 본당 신자들은 여러 다양한 세계 속으로 언제나 더 깊이 ‘들어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세계에는 임대 아파트나 공장 지대 주위에서 늘 더 ‘가려진 채로’ 살아가는 이들, 이주 노동자, 폭력 피해 여성, 에이즈 환자, 장애인, 수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현대인 등 가난한 이들의 세계가 있다. 또한 한국에 존재하는 여러 종교의 신도들 같은 ‘다른 이들’의 세계가 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마땅히 이런 다른 종교 신도들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깊은 종교 간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고자 노력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두말할 나위 없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수많은 국가들처럼 극심한 궁핍과 가난에 시달리는 ‘지역적으로 멀리 있는 이들’의 세계가 있다.

- 그리고 사제들? 한국 사제들의 마음속에 ‘선교의 불꽃’이 힘차게 타오른다면 어떻겠는가? 어떤 자리에서 나는 한국 사제들이 너무 적어서 매우 유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마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일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한국에는 사제들이 ‘너무’ 많다고 본다. 라틴 아메리카의 실례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신자 수가 십만 명 이상인 큰 본당에서도 한두 명의 사제가 모든 본당 신자를 돌보고 있다. ‘선교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사제들은 세상과 모든 이를 위한 자신의 소명을 명심하고 “자기 양떼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하여 파견된 목자”가 되는 법을 안다.

구체적인 여정

지금까지는 그저 개인적인 꿈이었을 따름이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이 차츰차츰 현실로 바뀔 수 있도록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여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에 ‘선교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특히 시급하고 중요하게 보이는 것들 가운데 두 가지를 조심스레 제안하고자 한다.

- 지역 교회(교구와 본당)와 수도자·선교사들 간의 비극적인 분열을 용기 있게 극복하여야 한다. 이는 교회의 몸 안에서 은사들이 자유롭게 교류될 수 있게 하고, 그러한 지향의 일치는 위에서 말한 ‘꿈’의 실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수도자와 선교사는 교회 구조에, 그리고 교구 위원회들이나 본당의 통상적인 사목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또한 그들의 실질적인 ‘다른 이들을 위한 존재’ 방식으로 모든 이에게 봉사하려는 원의를 스스로 더욱 다져 나가야 한다.
- 하느님 백성의 ‘선교사 양성’을 위한 기구를 설립하여야 한다. 특히 지역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자신이 ‘세상에 파견’되었다는 것을 언제나 더 잘 인식할 수 있도록 생생한 의식을 일깨우고 자극하도록 부름받은 ‘본당 선교 단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본당 선교 단체는 관심과 지도 아래 본당 구조 안에서 원활히 통합됨으로써 국제 자원 봉사 단체나 평신도 선교사, 다양한 ‘멀리 있는 이들의 세계’에 대한 개방 활동 등 다른 시도들을 낳는 토대가 될 수 있다.

물론 지역 교회와 수도자나 선교사들이 꿈의 실현을 위해 일하려는 원의를 지녀야 한다. 모든 이가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의 부족함과 모든 한계에도, 우리 공동체와 수많은 다른 수도 공동체와 선교 공동체는 ‘선교의 불꽃으로 타올라’ 기꺼이 이러한 활동에 헌신할 채비가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