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묵상 기도』
2006년 11월호 (제 334호)
고르네오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십자가를 끔찍이 존경하고 있었으나 전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공부 좀 하...

『관상과 사적 계시』 외
2006년 11월호 (제 334호)
『관상과 사적 계시』 서평·심상태 오늘날 성인(成人) 신자들은 이 땅에서 거의가 각박한 세파를 헤쳐 가...

연중 제31주일~그리스도 왕 대축일
2006년 11월호 (제 334호)
11월 5일 ● 연중 제31주일 가장 큰 계명 “첫째는 이것이다.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

『어르신 예비신자 교리서』의 특성과 활용
2006년 11월호 (제 334호)
“고등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것을 습득하기란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이는 주교...

오늘날 교회와 세상에서 신학의 책임과 임무
2006년 11월호 (제 334호)
이 글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교구장 조제프 도레 대주교가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카가톨릭대학에서 한 강...

쉼터이고자 하는 교회
2006년 11월호 (제 334호)
독일 교회는 변하고 있다. 우선 외적인 면에서 변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줄어들고 있다. 이는 수치상으로...

서울대교구 인라인 하키 동호회
2006년 11월호 (제 334호)
“건강은 행복의 어머니이다.”라는 금언대로, 행복한 삶과 사목을 위해 정기적인 운동을 실천하는 사제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2006년 11월호 (제 334호)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나는 종종 미사 중 평화의 인사 때에 신자들에게 서로 “사랑합니다.”, ...

선교의 불꽃
2006년 11월호 (제 334호)
들어가며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거절하려고 하였다. 한국 교회에 관한 원고를...

사별 가족 모임
2006년 11월호 (제 334호)
올 한 해 동안에도 본당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떠난 이들이 있으면 남겨진 이들도 있게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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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 동향 2006년 11월호 (제 334호)

오늘날 교회와 세상에서 신학의 책임과 임무

조제프 도레

이 글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교구장 조제프 도레 대주교가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카가톨릭대학에서 한 강연이다. 도레 대주교는 오늘날 교회와 세상에서 신학의 책임과 임무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우선 이러한 책임을 총체적 실재인 신앙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원칙을 설명한 다음, 신앙의 여러 측면과 신학의 다양한 임무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고, 마지막으로 신학과 신앙과 직접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신학의 세 가지 형식적인 특징을 설명한다.
신학은 본래, 또 온전히, 신앙과 관련됩니다. 신학은 그 기원부터 신앙에 의존합니다. 신학의 목적이 바로 신앙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의 책임은 신앙에 비추어 규정되어야 하고 신학자들의 임무도 신앙과 관련하여 수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핵심이 되는 설명이지만, 아직 일반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으므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풀어 가고자 합니다. 조금 긴 서론이 될 제1부에서는 ‘신학의 책임은 신앙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라는 원칙을 제안할 것입니다. 이 원칙의 핵심은 ‘전체’라는 말에 있습니다. 조금 더 길어지게 될 제2부에서는 ‘신앙의 여러 측면에서 신학의 다양한 임무로’라는 공식에 맞추어 이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설명하겠습니다. 신앙의 각 특징들을 하나씩 검토하고, 각 특징이 신학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면서 신학의 구체적인 임무를 제시할 것입니다. 신앙은 네 가지 특징, 측면 또는 차원을 지니고 있고, 이 각각에서 신학의 네 가지 임무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짧지만 앞부분에 못지않게 중요한 제3부에서는 ‘신앙의 담론인 신학의 형식적 특징들’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것입니다.

제1부
원칙: 신학의 책임은 신앙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신학은 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의 여러 차원에 따라, 신앙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교리와 관련해서만 존재할 수 없고, 아무리 근본적이거나 규범적이고 제아무리 확고하고 승인된 것이라 해도 담론의 형태에만 관련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신앙은 예배 안에서 거행되기도 하고 영성 생활과 도덕 생활로 적용(윤리 행위로 실천)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신앙은 모든 관계와 제도 안에서 구현되며, 따라서 신학의 책임은 신앙의 이 모든 측면에 관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학은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신학적 담론은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시대에 무관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담론적 측면에만 스스로를 국한시킨다면, 성경이나 성전, 교도권에서 나오는 것 같은 가르침들을 설명하고 수호하고 예증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히 ‘구체적인 적용’이나 ‘실용적인 결론’으로 여겨지는 것을 다루는 일은 ‘엄밀한 의미의’ 신학이 아닌 신학의 분야들에 맡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의 책임이 신앙의 모든 것에 관련되어 규정된다고 한다면, 신학은 신앙의 가르침 자체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르침을 신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하는지, 그러한 가르침이 역사와 사회, 세상과 문화 안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 주어야 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구체적인 역사적 형태나 측면을 지닌 신앙의 가르침들도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현하여야 할 (또한 실제로 그러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사람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소홀히 하고 시비를 걸거나 거부하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신학은 신앙의 교리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신앙의 교리적 측면 이외의 측면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신학이 수행해야 하는 정확한 임무에 관해서나 신학적 담론의 형태적 특징에 관해서, 신학에 관한 몇 가지 결론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밖으로(ad extra) 개방시켜 주는 모든 측면과 관련하여, 신앙 자체가 아닌 다른 권위들도 신앙을 연구하게 되며 신학은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두 번째 요점으로 넘어갑니다.

신앙 이외의 권위들
가르침인 신앙은, 각기 고유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 다른 권위들과 대화하고 논쟁하기 마련입니다. 우선, 맨 처음부터 신학과 꾸준히 대화를 나누어 온 철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신학이 그러한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상당히 변화하였습니다. 일단, 대화할 상대가 늘어났습니다. 철학 말고도, 19세기 말부터 참된 학문으로 자리 잡은 역사학이 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여러 다른 인문학들도 대화의 상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대화 당사자들이 점점 더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단호하게 세속적인 특성을 단언합니다. 신학이 여전히 철학을 ‘시녀’로만 여기던 경향이 있었던 17세기에도 철학은 이미 그러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날 인문학의 경우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인문학은 신앙과 그 ‘권위’에 대하여 해방과 자율성을 획득하려는 분명한 의지에서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말하면, 신학은 이 학문들이 비록 세속적인 성격을 지닌다 하더라도 이들 학문과 그 방법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신학은 신앙이 담론과 사상과 이해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철학과 기꺼이 대화를 나누었고, 그리스도교가 다름 아닌 역사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학과 대화를 나누었듯이, 오늘날 신학은 신앙이 분명 제도 질서의 한 실재이기 때문에 사회학과 대화를 나누고, 신앙이 인간 정신의 흐름을 따르기 때문에 심리학과 대화를 나누며, 신앙이 문자로 설명되기 때문에 언어학과도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물론 신앙이 스스로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에 의존하는 것은 신앙의 일부 측면들을 더욱 잘 조명하고 이에 관련된 한계나 비판들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이러한 다소 새로운 학문들은 승인을 받기도 전에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분석과 ‘비평’을 시도하기도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들 학문에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해당 학문 분야에서 이들과 연계하여 더욱 적절한 대화를 나누려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이제 문제는, 어떤 절차와 분석을 채택하든 그것이 고유 영역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신학이 이들 학문의 도움을 받아 신앙을 신앙으로, 또한 신앙 자체의 모든 측면에 따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더욱 갖추느냐 갖추지 못하느냐를 아는 것입니다.

제2부
적용: 신앙의 여러 측면에서 신학의 다양한 임무로

이제 원칙에서 적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신앙의 네 가지 측면을 순서대로 설명할 것입니다. 신비의 고백인 신앙, 성령 안의 삶인 신앙, 세상 안에서의 임무인 신앙, 그리고 교회의 몸 안으로 통합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각각에서 신학의 임무를 이끌어 낼 생각입니다. 신앙의 첫 번째 차원은 신앙이 무엇보다도 신비의 고백이라는 그 기본 특성에서 시작됩니다.

1. 신비의 고백인 신앙
지식과 신앙
신앙이 인간 지성의 탐구 대상이 아니라면, 또한 무엇이 되었든 외부에서 신앙을 고려하거나 비판하거나 왜곡하는 것과 논쟁을 벌일 의무 없이 신앙이 스스로 유지되고 전달된다면, 신학이 필요 없게 되고 신앙은 스스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또는 신앙이 지성과 지적 활동에 거슬러 반대하거나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s)을 요구한다면 그럴 때에도 신학이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강렬한 투신과 감정이 이내 신학을 필요 없게 만들 것입니다. 또는 신앙의 자명성(自明性)이 요구될 때 신앙이 자신에게만 고유한 방법과 절차로 이를 성취한다면, 신앙은 확실히 자신의 고유한 지적 분야만을 수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다루는 그 밖의 모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들을 ‘외부의 어둠’ 속으로 던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않게 막아 주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실제로 “합당한 예배”(logike latreia, rationabile obsequium, 로마 12,1)가 되는 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을 낳는 계시, 신앙으로 응답해야 하는 계시는 그 본질상 전달된 말씀의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시는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지식의 요소와 관련하여 받아들여질 때에만 효과적으로 수용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계시를 받아들이는 이의 지적 능력을 동원하고 자극할 때에 참된 수용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앎이므로, 신앙 고백은 신자의 이해를 요구하는 행위입니다.
같은 이유로, 신학적 성찰 역시 신앙의 요구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신학적 성찰은 특정한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으로서의 신앙
신학은 신앙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본질적인 것이므로, 신학의 담론으로 신앙의 담론을 대신하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식으로든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도록 신중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학은 신앙에 낯선 절차와 방법으로 신앙을 다루기는 하지만 신앙의 신빙성과 유익과 부요를 바로 신앙으로 드러내려고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신앙이 신앙으로서 더욱 자명해지고 더욱 활기 있는 것이 되게 하는 그런 길로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임무는, 계시된 하느님의 신비에 의식적으로 충실한 신앙의 행위와 태도와 몸짓과 고백이 아닌 어디 다른 곳에 신앙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학은 신앙이 매우 훌륭하고 책임 있는 인간의 태도일 뿐만 아니라 그 고유한 질서 안에서 다른 어떤 것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밝혀야 하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신학은 신앙의 문제들에 적용되는 ‘인문학’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종교학’과 그 모든 세부 분야들과도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을 지닐 수 있습니다. 이런 종교학들도 마찬가지로 신앙의 표현과 신앙의 형태와 측면들을 다루지만, 무엇보다 신학은 이러한 형태들이 신앙에서 비롯되고 신앙으로 참된 일관성을 얻게 되며 신앙으로 부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신학은 신앙 고백을 표현하는 한 방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신학은 신앙의 여정 자체를 완성시키는 한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이 신앙을 다루는 방식에서, 신학의 특수성은 본질적으로 신앙과 다른 어떤 것, 예를 들면 전혀 다른 유형의 지식으로서 신앙에 이른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신학의 특수성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신앙 자체에 본질적인 두 가지, 지식과 이해의 측면을 최대한 지적으로 검토하고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신앙의 첫 순간부터 입증된 이러한 요소에 접근하고 있습니다.1)

2. 성령 안의 삶인 신앙
신앙은 지식의 형태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신학은 또한 신비에 대한 충실함으로 이해되는 신앙 안에서, 지식을 넘어서는 모든 것에 관련한 책임도 지니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것을 ‘성령 안의 삶’이라고 부를까 합니다. 신학의 다른 임무들은 바로 이 책임에서 비롯됩니다.

신앙의 영적 차원
적어도 서구 신학에서는 신학을 지성에만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수세기 동안 팽배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습니다. 현대 신학은 이성과 계몽을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중요한 동료로 여기는 경향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 결과로 흔히 두 가지가 희생되었습니다. 하나는, 신학이 단순히 추론과 논증과 연역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학은 신학의 대상이 인간의 순수 이성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대상에 이성적 방식 말고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신앙의 고유한 영적 차원이 단지 그 자체로만 머물지 않고 ‘금욕적이고 신비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영성 신학’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은 언제나 신앙 고백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온갖 심리적 역행과 정서적 과도함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위대한 신학적 산물은 교회 안에 활기차게 흐르던 영적 활력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북아프리카 교회가 꽃피지 않았다면 아우구스티노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초기 수도원 운동이 없었다면 카파도키아 교부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며, 도미니코회가 없었다면 토마스 데 아퀴노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륄이나 뉴먼, 라너나 발타사르도 마찬가지입니다.2)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신학은 기도와 영적 체험, 더욱 넓게는 ‘대중 신심’이라 불리는 것들과 상당한 간극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교회의 역사에서 분명히 새로운 상황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신학 연구에 참된 영성 교육이 동반되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신스콜라주의 시기에도, 훗날 대부분 사제나 수도자가 된 학생들은 신학교나 신학원에서 영성 교육을 받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에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기도하는 분위기와 다양한 ‘영성 수련’들 속에서 신학이 다루는 신비의 실재와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수단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학생들은 매우 좌절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신학적 담론과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신학이 다루고 있는 실재에 접근할 가능성 사이에는 관련성이 희박하다고 느끼며 이를 다른 곳에서 채울 수도 없기 때문에, 신학을 원망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실제로 신학으로 이끈 것은 영적인 길이었는데, 신학은 영성을 뒷받침하거나 풍요롭게 하여 그 길을 추구하는 데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학의 책임이 신앙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의 모든 신학자는 신앙의 고유한 영적 차원의 자리를 만들고 다시 마련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요제프 라칭거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말은 다소 논쟁적인 어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의미가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 없이 수영을 배울 수 없듯이, 신학이 숨 쉬는 배경이 되는 영적 실천 없이는 신학을 배울 수 없습니다. 이 말은 평신도 신학자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흔히 사제들이 부끄러움을 느낄 만큼 훌륭한 영성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말은, 신학이 궁극적으로 자가당착적인 학문의 무기력화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신학 연구의 틀을 의미 있게 세울 수 있을까 하는 기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입니다.3)
신학의 성사적 준거
그러나 기도와 영적 추구는 신앙이 의존하고 있는 실재, 곧 다름 아닌 하느님의 신비 자체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지식을 전달하고 생명의 길로 불러 주는 데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단 한 번에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중개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서 교회의 성사들 안에서 당신을 계속 전해 주고 계십니다. 신앙은 이러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므로, 신앙에는 성사 생활이 포함됩니다. 성사 안에서,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자기 통교를 지금 여기에서 효과적이고 유효하게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신학의 책임은 신앙의 이러한 측면에도 미칩니다. 신학자들은 그들이 논하는 신비가 바로 성사 안에서 우리가 만나고 받아들이는 신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거행을 실제로 언급하지 않고는 삼위일체 신학도 구원 신학도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신학은 성사 거행을 위한 예식서 본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실천하는 예식인 성사를 유효하게 만들어 주는 상징적이고 신비로운 체험도 말합니다. 신학이 설명할 수 있고 또 신학이 좇아야 하는 신앙은 교회가 거행하고 교회 생활의 원천으로 삼는 성사들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에는 성사적 차원이 필수적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4)
본성상 담론인 신학은 신앙의 표현들을 직접적으로 다룰 뿐입니다. 그러나 (i) 명실상부한 신학은 신앙을 신앙으로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ii) 명실상부한 신앙은 “진술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진술된) 실재에 머무릅니다”(non terminatur ad enuntiabile sed ad rem).5) 그러므로 신학은 신앙 안에 내포되어 있는 실재, 곧 다름 아닌 하느님의 계시된 또는 전달된 신비를 실제로 계속 접하고 이 실재에 실제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수단들을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수단들은 담론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담론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수단들로는 성령에서 나오고 성령에 부합하는 실재들, 곧 성사와 전례 거행, 그리고 기도와 영적인 추구를 들 수 있습니다.

3. 세상 안에서의 임무인 신앙
신앙은, 그리고 신학은, 이 세상 안에서만 존재하고 실현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신학은 인간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방금 신앙과 신학의 영적 차원으로 말씀드린 것과 상충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육화를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스스로 육화될 수단을 찾을 때에만 참으로 일관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실천적 차원
신앙은 회개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신앙은 회개에 이르는 길과 무관한 진리가 아니며, 또 그것이 주고자 하는 성령 안의 삶, 더 정확하게는 ‘세상 안에서 성령 안의 삶’을 지니지 않은 진리도 아닙니다. 따라서 신학은 ‘영적인’ 유형의 활용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윤리적 결단에도 열려 있는 방식으로 신앙을 제시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결정은 실천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여기서 신학의 또 다른 임무가 나옵니다.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신학은 세상 안에서의 임무로 여겨지는 신앙에 중요한 여러 가지를 규명할 임무가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면, 신학은 신앙의 온갖 결함과 온갖 일탈까지도 신앙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형태 안에서 제시하여야 합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신학은 그리스도교 전통을 더 잘 앎으로써 또는 오늘날 사람들의 열망과 가능성을 더욱 잘 표현함으로써 신앙이 지닌 모든 가능성을 밝혀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신앙의 결심과 실천을 뒷받침하려는 관심은 신앙의 진리들의 위계를 존중하는 데에 신학이 이바지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때문에 신앙의 본질과 중심, 가장 중요한 핵심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신앙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교리의 전체성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는 그 어느 때보다 본질을 직접 다룰 것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본질은 모든 것을 보여 주고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준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적으로 제시하고 신앙에 관련된 실천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에 도움을 주는 여러 임무들이 부차적인 방법만을 요구하는 하위 임무, 곧 ‘기법’이나 심지어 ‘요령’에 그칠 수 있는 단순한 사목적 문제의 임무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여야 하겠습니다. 신앙이 관련된 문제라는 것, 그 미래가 성찰과 사고의 임무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신학은 참여하지 않고 갇혀 있거나 멀찍이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집니다.

신학의 ‘투신적’ 측면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실천적 관심과 실천적 차원에서 신학은, 단순히 신앙이 세상에 더 잘 받아들여지게 하고 교회가 더 성장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세상과 문화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사명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도 포함됩니다. 신앙은 더욱 인간답고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이바지하고 정의와 평화를 앞당김으로써 세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이러한 ‘교회 밖의(extra-ecclesial)’ 관점에서도 실천적 차원을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신앙, 그리고 신학이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믿지 않는 이들이 신앙과 교회에 갖고 있는 반감과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거나, 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증언의 부족하고 불충실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신앙과 신학은 적어도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듯이(요한 3,16) 그렇게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과 신학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으로 인간을 이끌기 위해서 비추고 변화시켜야 하는 세상은 바로 인간들의 세상, 인간의 삶과 그 삶의 여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통적으로 ‘제삼세계’라고 불려 온 곳, 더 구체적으로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이 신학의 책임 가운데 이러한 측면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유럽의 ‘정치 신학’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위대한 그리스도교 전통은 언제나 도덕적`-`실천적 차원이 신학의 요지라고 생각해 왔으며, ‘윤리 신학’이라는 이름 아래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모두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의 개요 참조). 더구나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주권에 관한 가르침에는 실천적인 의미들이 일종의 ‘부차적 효과’로 담겨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이미 사회 정의, 정치 질서와 정치 조직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이해되어 왔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단일한 이중 계명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선포한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는 자리는 아니지만, 흔히 소홀하기 쉬운 신학의 책임의 한 차원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신학은 원칙적으로 세상의 영향에서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실제로는 다소나마 그러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신의 책임들을 짊어질 의무가 있으며, 여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곧 모든 그릇된 입장과 논쟁의 왜곡과 부당한 간섭을 피하면서, 신앙의 이유로만, 세상에서 맡은 고유한 책임의 이유로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신학은 역사 안에서 하느님에 관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세상을 향해 하는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신학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과 인류가 맺은 계약의 틀, 역사와 구원 사건, 생명과 축복의 근원인 계명, 세상에서 권능으로 실현되는 심판, 하느님 안에서 인간 역사의 미래, 약속과 소명의 형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미 시작된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신자들의 은총의 선물인 동시에 임무인 이 모든 실재는 역사 안에서 드러나고 성취되기 위하여 역사 안에서 형성되어야 합니다.6)

4. 교회의 몸 안으로 통합되는 신앙
신학이 설명하는 신앙은 명백히 교회적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의 경우에도 당연히 이러한 특성이 입증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신앙의 교회적 차원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신앙에 관하여 이미 열거한 모든 측면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으로 신자들을 효과적으로, 점점 더 뚜렷하게 통합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또 그러한 결과를 낳습니다. 신학이 자신의 책임을 규정하는 준거가 되는 신앙은 바로 교회의 신앙입니다. 교회가 선언하고 선포하며, 거행하고 실천하며, 증언하고 구현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언제나 교회의 구체적인 실재와 관계를 맺고 그 안에 내밀하게 통합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실제로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앙은 세상에서 맡은 중대한 사명 때문에 장소와 환경에 따라 상당히 다른 모습과 형태를 지니게 됩니다. 신학의 교회적 준거는 일반적이고 이론적이며 추상적인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준거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게 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교회의 정확한 맥락 안에서 매우 구체적인 형태를 띠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자는 그들의 정확한 교회적 ‘토대’가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토대는 단순히 교회법에서 규정하는 사명이나, 공식적으로 가르칠 권위를 그들에게 부여하는 교계적 ‘증서’로만 보장될 수는 없습니다. 비록 한계가 있다 할지라도, 구체적인 교회 활동, 사목 활동, 사도직 활동에 대한 참된 투신과 효과적인 노력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조건 위에서만 신학자는 신앙의 한 사상이나 표현이 아닌 온전한 신앙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신앙에 참으로 활기를 불어넣고 역사와 사회 안에서 구현하는 형태로 신앙을 다루는 것입니다.7)

‘교도권’에 관련한 신학의 상황
신학은 교회 안에 몸담고 있고 언제나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교회 안에서 신학은 진리의 위계에서 최상의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신학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이를 해석하는 교회의 전통에 반영되는 하느님 말씀에 종속되며, 또한 교도권에 의존합니다. 권위 있는 교계가 통치의 직무로써 행사하는 이 교도권에는 계시된 신앙의 전달과 해석, 가르침에 관한 책임이 포함됩니다.8)
사도들의 후계자인 교회의 주교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주님에게서 만민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습니다.” 이처럼 주교들은 하느님 말씀의 봉사자로서 이 말씀을 보존하고 설명하며 전파할 임무를 받았습니다.9)
그러므로 신학이 신앙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신학이 교회의 교도권을 기준으로 자신의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할 일은, 각 경우에 해당 영역에서 교도권이 취하는 입장이 어떤 ‘유형’ 또는 어느 ‘정도’의 권위를 지니는지를 언제나 주의 깊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정확한 규범이 있습니다. 그러한 권위는 “문헌의 성격, 그리고 어떠한 가르침을 반복하여 강조한다는 점과 그 가르침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명백해집니다.”10)
신학자들이 두 번째로 할 일은, 이러한 가르침의 내용과 주장, 목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신학자는 열심하고 꾸준하게 성찰하고, 또 필요하다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며 동료들이 제시할 수도 있는 반대 의견들을 진지하게 검토하고자 해야 합니다.11)
그러나 세 번째 임무는 “신실한 노력을” 기울임에도, “그들이 보기에는 근거가 충분한 이유들 때문에, 교도권의 가르침 가운데 개정이 불가능하지 않은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참으로 “책임감 있는” 신학자들에게 주어지는 듯합니다. 그런 경우 신학자들은 문제를 더욱 깊이 검토할 가능성에 열려 있으면서 “복음의 정신으로” 관할 교도권에 그들의 어려움을 알리도록 권고됩니다.1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한 연설에서, 신학과 교도권의 협력과 논쟁을 위한 바람직한 정신을 잘 요약하셨습니다. 이 연설은 1980년 11월 18일 독일 알퇴팅에서 수많은 독일 신학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은 또한 신앙의 증언과 교회의 교도권에 대한 충실성을 뜻하며, 이러한 사랑이 신학자의 활동을 저해하거나, 부인되어서는 안 되는 자율성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교도권과 신학은 서로 다른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목적에 이바지합니다. 바로 이러한 구조 때문에 교도권과 신학은 언제나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공의회 이후, 신학과 교도권이 긍정적으로 협력한 사례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토대를 더욱 탄탄히 해야 하며, 새로운 갈등이 나타나더라도 같은 신앙의 정신 안에서,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어 주는 같은 희망과 사랑 안에서 여러분의 활동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13)

토마스 데 아퀴노는 (‘교계’에만 유보되는) 사목 교도권(magisterium cathedrae pastoralis)과 (신학의 ‘스승’이 지니는) 교리 교도권(magisterium cathedrae magis -terialis)을 구분하였습니다.14) 그러나 이 둘이 나란히 놓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적어도 가톨릭 신학에서 최후 결정권은 전자에, 곧 사목 권위, 또는 교계 직무, 또는 교회의 통치에 속해 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후자가 복종하는 형태로만 끝난다면 그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둘의 임무는 상당히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전통이 이해해 온 대로 사도좌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분명히 교도권이 할 몫입니다. 한 분이신 주님의 진리를 고백하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확인하고 강화하는 임무도 교도권에 맡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임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오늘날 세상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신앙에 활기를 불어넣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세상은 새로운 문제들에 관하여 신앙에 물음을 던지고, 신앙을 비판하거나 반박하며, 신앙에 노골적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신학자들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명백히 필요불가결한 역할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신중함과 대담함을 겸비해야 합니다. 신학자들은 신뢰를 받아야 하고 자유를 보장받아야 하지만, 그들 편에서도 이러한 신뢰를 얻기 위하여 노력할 임무가 있으며 보장받은 자유를 책임 있게 행사한다는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제3부
결론: 신앙의 담론인 신학의 형식적 특징들

지금까지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하여 신학의 책임과 임무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신학의 과정과 방법에 관한 몇 가지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신학은 역사적이고, 고백적이며, 근본적이라는 것입니다.

1. 역사적인 신학, 따라서 실천적이고 종말론적이다
우리는 온전한 신앙,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사실로도 여겨지는 신앙에 관련하여 신학의 책임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규정하는 신학적 관점은 철저히 역사적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관한 학문과 지식으로서의 역사라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역사에 관련된 것, 다시 말해 그 사회 문화와 정치 경제의 구조와 상황에 관련된 역사임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학의 조건이 되는 신앙은 역사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신학의 과정과 방법도 역사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것도 다양한 방식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과거의 역사에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시대를 초월한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에, 신학은 ‘적극적인’ 연구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화와 수용이라는 본래의 조건들을 온전히 유지하면서 교리들을 검토할 수 있도록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앙은 현재의 역사 안에서 실천되고 구현되어야 하고, 따라서 윤리의 정치적 차원을 포함한 윤리학 분야에서도 입증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학은 실천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신앙을 이념에 가두게 됩니다.
신앙은 역사를 미래로 열어 주고, ‘희망의 원리’와 ‘종말론적 준비’가 결합된 청원을 통해 역사가 나아갈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신학은 마치 폐회로처럼 닫혀 있는 전체성으로 표현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신학은 이미 결정적이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완전하게 성취될 계시를 지니고 계신 더욱 크신 하느님을 지향하고자 늘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의 활동은 언제나 종말론적 표징 아래 이루어질 것입니다.

2. 고백하는 신학, 따라서 해석학적이고 제도적이다
신학은 신앙을 설명합니다. 신학이 지식의 차원에서는 하느님의 계시된 신비에 대한 충실함이고, 삶의 차원에서는 그 신비와의 약속이라는 점에서, 여기서 이해하는 신학은 스스로 고백적인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단순히 지적 사고와 정서적 내면성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고백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자체를 받아들이는 행위로만, 또한 그런 행위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신학의 과정과 방법을 위한 결론이 나옵니다.
신앙 고백은 절대 신비이신 하느님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완전한 무상성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며, 그러한 무상성에 대한 인식은 그것을 아는 만큼 증진될 수 있습니다. 지성과 사고의 작용이라는 구실 아래 신학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다루는 대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인상을 조금이라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과정과 방법에서 신학은 본질적으로 관상적인 측면, 또는 찬미적인 측면을 위한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신앙 고백은 스스로에게 그 ‘대상’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대상이 고백보다 앞서고 대상이 고백을 권유하는 그만큼만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이미 이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만 그들의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학자들은 실제의 역사적 상황 안에서 어떻게든 이 대상을 이미 만났을 때에만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은 해석학적 측면을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비의 계시가 실제로 전달되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교회의 중재를 통해서, 또한 교회 공동체와 교계 제도에 따라서입니다. 따라서 신학 담론에는 제도적 요소도 있습니다. 이 담론에 참여하는 이들은 언제나 상호 관련된 다양한 교회 권위와 직면해야 하며, 한편 이들 교회 권위는 신앙이 구체적인 형태의 신학적 담론으로 나타날 때에도 신앙의 참된 작용을 권유하고, 가능하게 하고, 규제합니다.
3. 근본적인 신학, 따라서 비평적이고 신학적이다
역사적인 신학, 고백하는 신학으로서 신학의 책임은, 적어도 능력이 닿는 한에서 신앙을 ‘설명하여’ 신앙에 대한 이해를 낳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의 토대를 밝혀 주고 이를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하는 것이 신학의 임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임무는 신학이 근본적이며 따라서 근본적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이러한 임무는 신학 과정의 첫 순간이나 어느 한 순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신앙의 어떤 측면이나 규정을 고려하고 있든지 간에 그 전 과정을 특징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성찰과 이성으로 보장될 수 있는 것만을 근본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성찰의 결과가 신앙이 자신의 바탕이라고 고백하는 실재 자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도 여전히 사실입니다. 신학과 신학의 논리는 신앙의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신학의 임무는 이성적 관점에서도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바탕이 신앙이 고백하는 ‘토대’, 곧 다름 아닌 하느님께 대한 인식이라는 것을 (최대한) 명백하게 밝혀 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학의 과정과 방법에는 어떠한 결과가 따르겠습니까?
신앙은 앎, 확고한 앎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신앙은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지닌 지식의 모든 실질적이고 방법적인 측면을 동원하여 활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신학은 성찰적이고 사변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행여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신학은 ‘신앙이 부족한’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신학은 인간 사고가 지닌 모든 효과적인 자원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여기서 덧붙여야 할 것은, 신학은 스스로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셨던 신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여러 수단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그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수단이라는 사실입니다. 철학이든 인문학이든 각자의 이성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학문들은 모두 계시의 법칙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강조할 수 있으며 또 가능한 한 그렇게 강조하도록 촉구되어야 합니다. 신비가 계시되는 그만큼, 인간은 그 신비를 더욱 잘 알게 되며 그 신비의 위대함과 비할 데 없음뿐만 아니라 그 탁월한 무상성을 더 잘 확인하게 됩니다.
신학은 신앙의 토대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자 하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대로,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에 접근하는 조건들과 수단들에 대한 우리 나름의 입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현대에는 실제로 지식에 대한 일반적인 비평과 인간 지식을 구분 짓는 여러 학문에 대한 인식론이 수립되어 있습니다. 신학이 문화 안에서 인간에게 또 인간을 위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한, 비평의 임무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신학은 너무 쉽게 들릴지 모르나 이른바 ‘비평에 대한 비평’을 실천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한계를 잊지 않는 것은 이미 참다운 비평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은 자신의 비평적 사변적 성찰의 결과를 신앙의 토대로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성적 관점에서도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바탕은 신앙이 고백하는 토대가 되시는 분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신학의 임무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여야 합니다. 말하자면 결국 신학의 임무는 인간에 관한 모든 것, 하느님에 관한 모든 것, 이들의 관계, 그리고 ‘전체성’에 관한 포괄적인 관점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형이상학의 종말’이라고 일컬어지는 시대 이후에도 신학은 ‘실재’의 전체성을 논해야 할 임무, 곧 신학 담론에 올바른 존재론적 차원을 부여해야 할 자신의 임무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이며 또한 존재론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과 역사의 모든 실재의 토대로 인식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전해 주시는 하느님의 계시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존재론입니다. 절대적 존재는 당신 자신을 다른 존재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순한) 존재 이상의 존재’로 인식되어야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