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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2006년 12월호 (제 335호)
“내가 만든 것을 더럽다 하지 말라.”는 말씀을 외치며 성과 속의 이원론을 타파하고자 하는 나의 삶은, ...

『활기찬 청소년 사목을 위하여』외
2006년 12월호 (제 335호)
『활기찬 청소년 사목을 위하여』 서평·심상태 서평자는 청소년 사목 활성화가 한국 교회의 미래 존폐가 ...

대림 제1주일~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06년 12월호 (제 335호)
그동안 교부들의 복음 해설을 게재하도록 허락하여 준 한국교부학연구화와 분도출판사 그리고 번역을 담당...

『이민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2006년 12월호 (제 335호)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세계는 하나’(We are the world)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었다. 88올림픽과 함께 해...

국제 카리타스 대북 사업 위임과 관련한 한국 카리타스의 입장
2006년 12월호 (제 335호)
친애하는 형제·자매님들! 사랑이신 하느님의 은총이 칠천 칠백만 우리 민족 모두에게 풍성히 내리시기를 ...

나자렛의 영성
2006년 12월호 (제 335호)
이 글은 나자렛의 ‘특정한’ 영성이 아니라 ‘나자렛’이라는 핵심 단어를 중심으로 전개된 다양한 영성의...

“에따 라씨야!”(여긴 러시아입니다!)
2006년 12월호 (제 335호)
“에따 라씨야!”라는 말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상식이 통하지 않는) 러시아의 사회적 ...

마산교구 사제 모임 ‘오름’
2006년 12월호 (제 335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믿음과 친교의 공동체를 위하여! 2006년 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은 마산교구의 중...

제 배우자인 신자들을 사랑합니다
2006년 12월호 (제 335호)
저희 인덕 본당은 2004년 9월에 신설되어 제가 첫 본당 신부로서 현재 살고 있습니다. 저희 본당의 위치는,...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
2006년 12월호 (제 335호)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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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 동향 2006년 12월호 (제 335호)

나자렛의 영성

기스베르트 그레사케 신부

이 글은 나자렛의 ‘특정한’ 영성이 아니라 ‘나자렛’이라는 핵심 단어를 중심으로 전개된 다양한 영성의 동향을 다루고 있음을 먼저 밝혀 둔다. 또한 ‘나자렛’은 단순히 예수님의 ‘드러나지 않은 삶’이 이루어진 장소를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다. 루카 복음에 나타나듯이, 이 시기에도 예수님의 ‘공생활’이라 일컬을 만한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열두 살 나이에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계셨던 예수님’ 루카 2,41 이하).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공생활이라 부르는 시기에도 예수님의 ‘드러나지 않은 삶’이 있다(‘광야에서 보낸 사십 일’, ‘외딴 곳으로 물러가심’ 마르 1,35; 요한 5,15; ‘남몰래 이루신 일’ 요한 7,4; ‘드러나지 않게 머무르심’ 요한 7,10; 8,59; 11,54). 우리는 서로 다른 전망을 지닌 이 예수님의 ‘드러나지 않은 삶’의 이야기에 반영된 ‘나자렛’의 영적 중요성을 간략하게나마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시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 가지 영성의 흐름이 있다. 나자렛의 영성은 그 세 영성을 통해서 폭넓은 전망을 펼치게 된 것이다. 이제 그 세 가지 영성의 흐름을 살펴보자.


1. 철저한 현존으로서의 ‘나자렛’(샤를르 드 푸코)
샤를르 드 푸코에게 나자렛에서 지낸 예수님의 삶은 그가 회개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그의 영성 생활을 자라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에게 이 ‘나자렛’의 이상(理想)은 결코 정적이거나 단조롭다거나 정형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새로운 발견과 변화를 가져와 결국 처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게 하는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여정이다. 이 여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샤를르 드 푸코는 1901년 8월 14일에 친구 앙리 드 카스트리에게 자신의 회개 이후 초기 몇 년간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사랑의 첫 표징이 사랑하는 이를 닮는 거라고 하지 않나.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더 많이 예수님을 닮을 수 있도록 어떤 수도회든 들어가야 했다네. 그런데 나는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공생활을 닮고자 하는 생각은 별로 없었네. 무엇보다 나는 나자렛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목공으로 조용히 살아가신 예수님의 드러나지 않은 삶을 본받고자 했지. 내가 바라는 이 삶을 살아가기에 트라피스트 수도원보다 더 적당한 곳은 없어 보였어. … 그 곳에서 육년 반을 지냈군. … 그 당시 나는 예수님을 더욱 닮으려고 더 많은 포기와 더 큰 겸손을 열망하였네. 그러던 어느 날, 나자렛에 가서 혼자 조용히 평범한 노동자로서 날마다 일하며 살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수도회 총장에게서 받았네. 그래서 나는 나자렛에서 … 가난과 겸손을 즐길 수 있었네. 하느님께서는 내가 주님을 닮도록 내게 이 가난과 겸손에 대한 엄청난 동경을 가지도록 하신 것이라네.”1)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나자렛’ 여정은 가난과 겸손과 노동을 통하여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을 바탕으로 시작된 것이다.

“내 소명은 예수님의 드러나지 않은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 내 자신을 낮추어 가장 낮은 사람이 되고, 한 인간이 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경멸하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한 마리의 벌레가 되고자 합니다. 더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나는 예수님과 더욱 함께합니다. … 가장 가난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노동자들보다도 더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기도와 성경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기 때문입니다.”2)

푸코가 귀족 출신이고 그때까지 방종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나자렛은 그의 예전의 삶과 완전히 대비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삶은 완전한 자기 낮춤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드러나지 않는’ 삶이다. 푸코는 “자신이 이웃의 눈에 높게 비추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자신을 더 낮출 수 있는 일을 찾으십시오. …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편이 더 낫습니다.”3)
나자렛의 이상적인 삶의 초기에는 어떤 본질적인 요소로서 지속적인 관상과 끊임없는 기도가 더해져야 한다. 사실, 샤를르 수사가 보기에 나자렛에서 예수님과 요셉과 마리아는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외딴 작은 집에서 함께 흠숭의 삶, 지속적인 기도의 삶, … 끊임없는 관상의 삶, 침묵의 삶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꼭 필요한 것만 갖춘 작은 집에서 집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이 외부 세계와 최소한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겠다.”4)는 결심을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 가는 나자렛 생활 방식에 대하여 샤를르 수사는 1897년 영성 수련 때에 남긴 기록에서 “나자렛에서 보낸 생활을 궁극적인 삶의 길, ‘영원한 안식처’5)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뒤돌아보지 않고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장소와 일과 상황을 향하여 전진할” 자신의 각오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계획하신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바로 그날의 기록에서 그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너의 소명은 말뿐만 아니라 네 삶으로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이다.”6)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식별하는 시간을 조금 더 가진 뒤에, 샤를르 수사는 구세주이시며 착한 목자이시고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하고 복음 선교 활동에 헌신하게 된다. 그는 나자렛을 떠나고 사제품을 받게 된다.
나자렛을 떠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본래 품고 있던 나자렛의 이상이 퇴색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그 이상을 ‘더욱 생생하게 재연’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7) 이제 중요한 것은 “더욱 비참하고 버려진 양들을 찾으러 가서 우리의 현존과 기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체성사의 참 현존으로 그들에게 선행을 베푸는”8)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하라(베니 아베스)에 정착하여 “고독과 은둔과 침묵의 삶, 육체적 노동과 거룩한 가난의 삶 … 나자렛에서의 사랑하는 예수님의 드러나지 않은 삶과 최대한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다.”9) 이렇게 하여, 나자렛의 이상은 결정적으로 지속되고 새롭게 실현되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수도 생활의 형태를 통하여(그는 이러한 삶의 양식에 함께하는 형제들을 간절히 바랐으나 일생 동안 그러한 형제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명한 선교 지향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 ‘나자렛’의 생활 방식 안에서 그리고 그 생활 방식을 통하여 그렇게 하고자 하였다. 나자렛의 생활 방식이란, 구체적으로 ‘말’이 아니라, 그의 주위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하는 겸손한 삶을 통하여 그리고 조건 없이 열린 마음과 철저한 현존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나자렛의 본래 이상은 ‘그 자체로’ 완전히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오랜 시간에 걸쳐 성체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내어 주신 데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말이 그를 전적으로 다른 이를 위한 삶으로 이끌어갔다. “관상 생활에서 사람들을 돌보는 생활로 옮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이 이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10) 이처럼 이 순간에 나자렛 삶의 이상은 은둔하는 동시에 개방하는 삶, 세속에서 벗어나 있는 동시에 호의적이고 환대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삶, 관상 생활 속에서 예수님과 완전한 친교를 나누는 동시에 사람들을 향한 선교의 길을 걷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11) 베니 아베스에서 그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의 형제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그를 이슬람교 성자로 공경한 오아시스 거주민과 사막 유목민도 있었고, 수비대의 장교들과 군인들도 있었다.
“그리스도인이든 무슬림이든 유다인이든 이교인이든 가릴 것 없이 이곳의 모든 주민이 나를 자기 형제로, 모든 사람의 형제로 생각해 주기를 바랍니다.”12) 이러한 그에게 본보기가 된 것은 이른바 ‘Zaouias’라는 이슬람 환대 센터이다. 이 센터는 순례자든 걸인이든 어디에서 온 누구든 모든 나그네에게 숙소와 쉼터를 제공하였다. 이렇게 나자렛 이상의 ‘새로 발견된’ 특징에는 따스한 환대, 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선교적 현존이 포함된다. 다음의 구절은 나자렛 이상의 이 새로운 ‘생생한 재연’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는 독서나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대하느라 바쁩니다. 가엾은 군인들이 계속 저를 방문합니다. 노예들을 위해 마련해 둔 작은 공간은 노예들로 미어지고, 나그네들이 ‘형제의 집’에 속속들이 도착합니다. 물론 언제나 많은 가난한 이들이 여기에 머뭅니다. … 날마다 자고 가는 손님들에게 저녁과 아침 식사를 대접합니다. 집이 비어 있은 적이 없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여기 머무르고 있는 그 병든 노인을 제외하고도 하룻밤에 열한 명까지 손님이 머무릅니다. 나는 하루에 육십 명에서 백 명의 손님을 맞이하고 … 스무 명의 노예들을 만나며, 삼사십 명의 나그네를 환대하고, 열 명에서 열다섯 명에게 의약품을 나누어 주며, 칠십오 명 이상의 걸인들을 도와줍니다. … 이따금 하루에 어린이 육십 명을 돌보아 줍니다. ‘형제의 집’은 … 아침 다섯 시에서 아홉 시까지 그리고 오후 네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정말 북새통입니다. … 이곳 생활을 이해하시려면, 한 시간에 적어도 열 번 이상 가난한 이, 병든 이, 또는 지나가던 행인이 내 집 문을 두드린다고 상상해 보시면 될 것입니다. …”13)
또한, 샤를르 드 푸코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권리를 위하여 싸웠고, 그들 편에 서서 프랑스 식민 통치 세력에 반대하였다. 프랑스 식민 관료들(식민 통치 장교들) 가운데에는 그의 옛 전우들도 있었다. 그는 식민 체제의 불의에 대항하여, 특히 프랑스 식민 정부가 묵인하던 노예 제도에 대항하여 열렬히 싸웠고,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 의회에 여러 청원서를 보냈다. 그가 즐겨 인용한 성경 표현에 따르면 그는 “벙어리 개”(이사 56,10)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제 나자렛의 삶은 검소한 수도 생활을 통하여 그 지역 사람들을 위하여 거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삶을 의미하게 된다(독일어 원문은 ‘da sein藍繭遮?매우 존재론적이고 의미론적인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 말은 ‘~에 있다’, ‘현존하다’, ‘존재하다’, ‘지금 여기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역시 나자렛 이상의 결정적인 형태가 아니다. 샤를르 수사는 사하라 지목구장 게랭 주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주교님께서 복음 선포를 위하여 베니 아베스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제 의향을 물으신다면, 제 대답은 ‘예’입니다. 저는 땅 끝까지 가고 최후의 심판 날까지 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14)
그는 낙타 뒤를 따라 걸어서 수천 킬로미터의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이 여행 도중에, 그가 생각하기에 아직 복음을 접한 적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원주민 투아레그족도 만나게 된다. 샤를르 드 푸코는 그들에게서 이러한 성찰을 하게 된다. “설교가 아니라 행동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일 말고는 영혼의 성화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15)
1905년 8월 군대에서 함께 장교 생활을 했던 라페린느의 제안으로 그는 당시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지역인 타만라세트에 한 은수 수도원을 세웠다. 그의 일기에 수없이 적혀 있듯이, 많은 사막 유목민들과 함께 오아시스나 물이 있는 지역으로 가서 (특히 약품이나 구호 물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
투아레그족과 더불어, 타만라세트에서도 충실하게 지켜 오던 나자렛의 이상은 다시 한번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비록 샤를르 수사는 처음에 그저 ‘예외적인 일’로 간주했던 이러한 이동 때문에 종종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베니 아베스에서처럼 그를 찾는 형제들을 위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또한 봉쇄 생활과 같은 이상적인 수도 생활의 모습은 계속 멀어져갔다.16) 그러나 이러한 방식을 통해 관상과 선교의 관계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고독과 기도에 대한 바람과 동경이 남아 있어 근본적인 관상의 특성은 지속되었다. 그는 성체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언제나 더 깊이 예수님의 삶 속에 젖어 들고 이웃을 위해 ‘자기 성화’에 힘쓰며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고 그들을 하느님께 인도하고자 하였다. 이제 그는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 그에게 주어진 이 소박한 수단을 통하여 가능한 한 영적 물적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려고 … 밤에 기도하고 낮에 일하게”17) 되었다.
실제로 그는 사하라 사막에서 수많은 여행 경험을 통하여 나자렛의 이상을 실천할 수 있었다. 곧,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가난, 근면, 검소, 노동, 온유를 통하여 선행을 실천하셨듯이 밤의 나그네가 되어 모르는 세상으로 나아간”18)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유랑의 상황’19)에 베니 아베스에서의 특별한 생활 방식인 ‘이웃되기(현존하기)의 규정’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나자렛의 삶은 ‘어디서나 실천할 수 있고’, ‘이웃에게 가장 필요한’20) 방식과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 삶은 이제 투아레그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들을 위한 철저한 ‘현존’을 통해서 실현된 것이다. 그는 투아레그 무슬림에게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직접적으로 전달해서는 소용이 없고, 그들의 신뢰와 우정을 얻는 준비 단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직접적인 복음화는 불가능합니다. 가능한 삶의 유일한 방식은 바로 가난과 겸손과 예배로, 지적 활동이나 육체적 노동을 통한 나자렛의 삶뿐입니다. … 그리하여 사람들의 신뢰와 애정을 얻고, 사려 깊고 우호적인 방식으로 간단한 대화를 통하여 자연 도덕률에 대한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21)

이처럼 그는 투아레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군인들, 그리고 나아가 식민 세력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위해서 헌신하였다. 보존되고 있는 6,000통 이상의 편지 가운데 약 500통의 편지는 그가 식민 정치 문제에 ‘직접 개입’하며 프랑스 군부에 보낸 편지들이다. 그는 사하라 지역 행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강제 징용이나 부당한 권리 행사를 고발하였다. 투아레그족에게 그는 오늘날 성장의 주역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정치 경제 문제에서, 투아레그족의 가장 중요한 부족장 아메노칼의 자문 위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때로는 논쟁하고 때로는 호소하며 투아레그 부족민(과 프랑스 군인들)의 낮은 도덕 수준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는 사하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신기술(철도, 도로, 전신, 기상대 등)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위하여 힘썼다. 그는 지역 경제와 보건을 위한 제안을 하였고, 투아레그 여자들에게 뜨개질하는 법을 가르쳤다. 특히 투아레그 말을 배우고 투아레그 전승 문학을 한데 모았으며(시 5,000여 편), 프랑스어`-`타마쉐크어 사전을 편찬하였다. 총 4권으로 2,000면 분량에 이르는 이 사전은 그의 사후에 처음 출간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모든 노력이 점점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가 스스로를 일컬은 ‘선교 수사’22)라는 호칭에서 ‘선교사’라는 말을 강조하여야 한다. 그러나 사실 ‘선교사’라는 말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섬김’의 요소이다. 그는 “나의 사도직은 선행의 사도직이어야 한다.” 하고 되풀이해서 기록하였다. 요약하자면, “나자렛의 이상은 지속되고, 어디서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샤를르 드 푸코는 타만라세트에서 그 이상을 새롭게 발견하였다.”23)
이렇듯 푸코에게 나자렛은 매우 폭넓고 영적인 핵심 개념이다. 나자렛의 다양한 표현들을 연결해 주는 개념은 푸코가 즐겨 사용했던 ‘현존’이라는 말이다. 이는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그대로 하느님 앞에서 겸손과 자기 낮춤으로, 또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난과 겸손으로 사는 것이다.

2. 가난한 교회의 전형인 ‘나자렛’(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 시작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모임)
나자렛 영성은 1960년경에 다시 부흥하게 되었는데, 그 주역은 폴 고티에와 그의 동료들, 멜키트 예법 교회 나자렛 대주교 조지 하킴, 그리고 하킴 대주교의 승인과 지지를 받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목수 예수의 동료’(Corapagnons de J럖us Charpentier) 모임들이다. 이 나자렛의 부흥은 푸코와는 다른 부분을 강조하였다.
본래 디종 신학교 교수였던 고티에 신부는 다른 많은 프랑스 그리스도인처럼, 교회가 노동 계층과 만남을 갖지 않아서 그 결과 프랑스와 유럽 인구의 대부분이 세속화되었다는 사실에 매우 애석해하였다. 이 불안한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 20세기 중반에 생겨나 훗날 비오 12세가 금지시킨 노동 사제 운동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티에는 “나는 가난한 예수다. 어찌하여 너희는 나와 함께 나를 위하여 살아가지 않느냐.” 하고 나무라시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살고 일하는’24) 데에 전념하겠다고 응답하게 된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노동 세계에 복음을 선포하려고 목수 예수님과 일치하는’25) 가운데 그렇게 하리라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결심이 교황들의 다양한 선포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교황들은 “지난 백 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가십시오! …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가십시오!’(비오 11세, 회칙 「하느님이신 구세주」), ‘이리 와서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을 돕는 일에서 스승이신 하느님을 따르십시오’(비오 12세, Menti Nostrae) 하고 되풀이해서 말하였다.”26)
하킴 대주교의 요청과 유명한 신학자 장 무루의 정신적 지지를 받은 고티에는 자기 주교의 동의를 얻어 나자렛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한 명의 노동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실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가 샤를르 드 푸코를 자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만 그의 나자렛 영성에 대한 관점은 다른 것이었다. 고티에 자신도 이러한 차이를 알고 있었다. 고티에는 “나자렛에서 푸코는 기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생계에 필요한 만큼만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27)고 말하였다. 비록 고티에에게 관상적 측면이 부족하지는 않지만, 푸코만큼 관상적 측면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고티에는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선교 활동의 가장 중요한 전제 요소로 강조하였다.
사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가 되어야 비로소 복음을 전달할 수 있고,이러한 방식을 통해서야 비로소 교회가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28) 고티에에게 ‘나자렛’은 이러한 사실을 영적으로 가리키는 핵심 단어이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기 전에, 우선 “나자렛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함께 고생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고용주를 위하여 일하고자 하셨다. … 그리스도께서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넘어진 이들을 당신께 부르시기 전에, 인간 존재의 힘들고 보잘것없고 수고로운 운명에 동참하고자 하셨다.”29)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가난한 이로 살아가고, 노동자들과 함께 힘들게 일하며, 그들의 운명을 함께 나누는 것, 이른바 잘난 사회가 거부하는 이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다.”30)
이러한 의미에서, ‘나자렛’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이루어야 할 영적 과제로 제시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세계에는, 삶과 말을 통하여 겸손하고 소박하게 현세 재화를 포기하고 가난의 지고한 자유를 선포하는 사도,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절실히 필요하기”31) 때문이다.
‘나자렛’의 이러한 영성의 전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영향을 주었다.32) 고티에 신부는 하킴 대주교의 수행 전문가 자격으로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공의회 초기에 하킴 대주교는 투르나이의 샤를르 마리 힘머 주교와 함께 고티에의 ‘예수님, 교회, 가난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논문 준비에 협력하였다. 1962년 10월에 이 체계적인 소논문의 전망을 바탕으로 하여 50명 이상의 주교들과 30명 이상의 전문가들은 벨기에 대학에서 모임을 갖고 그 이후부터 계속 정기적인 회합을 갖기로 결정하였다(잦을 때에는 매주 만나기도 하였다). 이 모임의 이름은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로 하였고, 의장은 볼로냐의 레르카로 추기경과 리용의 제르리에 추기경, 그리고 멜키트 예법 교회 총대주교 막시모스 4세가 맡았다. 하킴 대주교, 힘머 주교, 그리고 총무 고티에는 이 모임을 이끌어 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 모임은 교황 요한 23세가 언급한 것과도 연관된다.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 메시지인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교회를 ‘모든 사람의 교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33)로 정의하였다. 레르카로 추기경은 1962년 12월 공의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 표현을 되풀이하였다. “이는 공의회의 여러 주제들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핵심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공의회의 주제입니다.”34)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고티에의 주도 아래,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모임은 현대인이 ‘분열’ 속에 있다는 진지한 평가를 내렸다. 곧 ‘눈에 보이는 당신 교회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그리고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의 가난한 예수님의 또 다른 신비로운 강생’ 사이의 분열이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성화와 가난이 결국 같은 의미이고, 거룩하신 한 분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에 가난하게 나타나셨다면, 이 땅 위에서 거룩한 교회는 가난한 교회일 수밖에 없고, 또한 가난한 교회만이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교나 이단에서처럼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에 있는 근본적인 위험은, 하나인 것이 갈라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가난한 이들이 더 우선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비체는 지상의 어떤 다른 교회가 아니라 바로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이다.”35)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모임은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현존,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의 복음화, 가난한 나라의 발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교회가 자신의 ‘가난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가난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하킴 대주교와 고티에 신부는 이러한 주제들을 바로 나자렛의 전망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 모든 노력에도 공의회에서 이 주제는 지엽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8항에서는 이렇게 확언한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걷도록 부름 받고 있다.” 구스타포 구티에레스가 “가난한 이의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 주제가 아니었던 이유는 아마도 시기적으로 너무 앞서 가는 주제였기 때문이었다.”36)라고 말한 것은 올바른 성찰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만이 다시 한번 이 생각의 대부분을 수용하였고, 반면에 고티에는 공의회 이후 교회의 여정에 실망하고 교회 교계의 몇몇 사람들과 갈등을 겪은 다음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아무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계속해서 ‘나자렛’은 교회의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교회는 과연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인가? 사회의 권력 투쟁 한가운데에서 가난하고 무기력하고 겸손한 교회인가?

3. 일상의 의미로서 ‘나자렛’(우리 시대의 과제)
나자렛 이상의 세 번째 모습을 살펴보려면, 무엇보다도 성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나자렛은 세상의 한구석에 있는 완전히 평범한 마을, 성경이 아니라면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았을 마을이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또 이 평범한 작은 마을은 주변 도시에 비해 매우 저개발 지역인 갈릴레아 지방에 위치하였다. 동쪽으로는 데카폴리스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도시 국가들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지중해 도시들이 있었다. 완전히 평범한 이 장소에서, 이 외딴 지역에서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자라나셨다(루카 2,51 참조).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그들과 함께 지역의 풍습과 전통과 의무와 관습에도 순종하셨다. 서로 모르는 이가 없는 이 좁은 세계에 완전히 동화되어 살아가신(요한 6,42; 마태 13,55 참조) 그 30년 동안,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과 다름없이 작고 겸손하게 살아가셨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따라서 나자렛에서 보낸 이 시기에서 ‘특별한’ 어떤 것을 억지로 이끌어 내려는 후기 그리스도교 외경들의 무리한 시도들과는 반대로,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을 순례하신 일(우리는 뒤에서 이것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볼 것이다.) 말고는 주목할 만한 기록이 없다.
그러한 삶의 방식을 우리는 오늘날 일상이라 정의한다. 실제로 일상은 평범한 행동과 관습에 익숙해진 삶,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예외적인 일이나 특별히 새로운 전망 없이 반복되는 삶,37) 그리고 그 특성상 분명히 대개 지루하고 무의미하며 공허하고 단조로운 삶이다.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삼십 년 동안 인간의 일상생활을 사신 것이야말로 나자렛의 내밀한 신비이다. 강조하자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삼십 년 동안 가장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더 위대한 어떤 일을 하지는 않으셨다.” 이 삶은 필리피서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같은 분”의 철저한 자기 비움(케노시스)이 강렬하게 드러낸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필리 2,6 이하 참조) 실제로 이 찬가의 표현처럼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기 비움이야말로 완전히 ‘특별한’ 무언가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진 우화들 속에 흔히 사용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가난한 여인을 사랑해서 거지가 되는 왕자 이야기다. 거지가 된 왕자는 동등한 입장에서 그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화는 읽는 이에게 놀라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나자렛에서 하느님께서 ‘일상’생활을 하셨다는 사실은 자기 비움의 사건에서 나오는 그 극적인 빛마저 걷어 간다. 곧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이 일이 무엇보다도 삼십 년이라는 긴 시간의 흐름 안에서 이루어졌는데, 그동안 (표면적으로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성장하셨다.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은총과 총애도 더해 갔다(루카 2,39.51 참조).
나자렛의 ‘일상’은 자세히 살펴보면 어두운 감옥살이도, 터무니없이 공허한 시간도, 그저 의미 없이 지나가는 세월도 아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이다. 순명으로 이 은총을 바라고 받아들일 때마다 이 은총의 의미는 더 완전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자라면서 총애를 받으셨다. 이 일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출구도 없이 갑갑해 보이지만, 더 높은 실재로 하나하나 열리는 ‘창’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창들’은 본질적으로 일상의 총체적인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축제나 기념의 순간들에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연유로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을 순례하신 일에 관한 성경 구절은 안식일의 정기적인 거행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루카 4,16)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나자렛의 일상 현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축제야말로 시간의 흐름을 멈춘다. 축제는 “일상의 창을 열어, 축일의 상징을 통하여 가시적으로 선포되는 어떤 절대적인 의미의 빛으로 일상이 젖어 들게 한다.”38) 이처럼 인간의 삶에는 일상과 축제의 두 요소가 모두 포함된다. 일상은 축제를 통하여 그 의미를 얻게 된다. 축제의 전망에서 볼 때, 일상은 영원을 향한 시간,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자리,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바탕을 마련하는”(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38항) 기회가 된다.
완덕을 향한 거룩한 시간, 거룩한 자리, 거룩한 준비로서 일상이 지닌 이 메시지는 오늘날 특히 서방 국가들에서 가장 절실한 형태의 ‘나자렛 영성’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몇 세대 전부터 이미 일상은 점진적으로 무의미함에 대한 체험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미 70년 전에 이러한 상황을 가늠하였다. 그는 “일상성의 존재 양식”을 현존재가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그 안으로”39) 추락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는 하이데거에게 일상이란 인간의 불완전한 존재 방식이라는 의미이다. 일상이란 탈출구 없이 주어진 것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으로, 속박, 반복, 공허, 권태, 말하자면 부조리, 권태, 혐오를 낳고, 따라서 도피와 반란의 길을 향한 영원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문제삼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들(일상 노동의 ‘의무’, 관습과 유행에 대한 ‘대중성’, 관계와 권위의 ‘익명성’과 ‘기계적인 반복’ 등, 인간 존재를 획일화하고 비인간화하는 것들)에 파묻혀 살아가는 인간은 일상 속에서 자기 손으로 자기 삶을 이룩해 가며, 자기 자신의 개인적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비본래적 존재 방식’에서 벗어나 의연하게 ‘죽음을 향한 존재’가 되어 ‘온전한 자기 자신을 찾도록’ 권고하였지만, 최근 세대는 비본래적인 것에 더 빠져 들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체로 일상 현실을 오직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결국 돈을 벌고 자아를 실현하는 기회로) 체험한다. 또한, 일상에서 벗어나 특별하고 이례적인 방식으로 더 다양한 체험을 통하여 더 풍부한 여러 ‘사건’을 겪으며 살아가면, 자기 삶의 의미가 더해지리라는 어리석은 환상을 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게르하르트 슐츠는 『체험 사회』(Erlebnisgesellschaft)40)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고전적인 작품을 통하여 우리 시대의 사회를 분석하였다.
그래서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의 기준은 모두 주관적인 체험의 충만한 질과 연관된다. 최근 토머스 프뢰퍼는 다음과 같이 사소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실례를 들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41) 비누 광고는 처음에는 ‘세척력’을, 그 다음에는 ‘향기’를 말하다가, 그리고 이제는 ‘피부 보호’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는 씻는 것처럼 평범한 일도 주관적인 체험의 질과 연관된다는 의미이다. 세차, 명상 교습, 디스코텍, 베토벤의 9번 교향곡 등 모든 다른 경우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모든 것은 실제로 실현 가능한 어떤 특별한 체험으로 전환되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도 분명히 모두 특별한 사건이 된다. 우리 인간은 일상생활을 끊임없는 축제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비그리스도인 철학자들은 오늘날 만연한 이러한 자세를 비판해 왔다. 오도 마르쿠아르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축제 대신 일상을 수호할 필요가 있다.” “축제가 일상의 자리를 차지하여 일상을 없애 버리면 사실 더 이상 축제가 아니다. … 이는 분명히 문제가 되고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42) 왜 그런가?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들이 축제 동안 완전히 ‘일상의 모라토리엄’을 바라고 다 함께 실질적인 삶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네스 스페르베르(Man뢵 Sperber)와 함께 마르쿠아르트는 그 치명적인 결과 중 하나가 일상 관계의 붕괴인 전쟁이라고 설명하였다.
“사람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적어도 무의식적으로는 숨 막히는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고자 전쟁을 바라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전쟁을 바라게 된 근본 원인을 바로 보고 경고하지 못한다면, 전쟁에 대한 모든 경고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전쟁은 비참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바람직한 어떤 것, 일상에서의 해방이나 일상의 모라토리엄으로서 열렬히 바랄 수 있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43)

일상의 ‘완전한 모라토리엄’을 도모하는 다른 시도로는 철저한 심미주의 세계관이 있다. 이는 인생을 ‘종합적인 예술품’으로 미화함으로써 ‘눈앞에 있는 현실을 더 이상 아무런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또 다른 삶’으로의 도피를 바란다. 이 다른 삶은 ‘전혀 다른 새로운 삶으로 현재의 것을 부인하고, 눈앞에 있는 현실이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 커다란 일탈을 통해 일상과 축제를 현실에서 몰아낸다. 따라서 이 삶은 대부분 의도하지 않았지만 호전적인 특성을 띠게 된다.’44)
삶을 끊임없는 축제가 되게 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일상을 부인하는 모든 시도에 대하여, 우리는 마르쿠아르트의 말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거기에서는 인간적으로 참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 이 ‘완전한 축제’가 지향하는 바처럼,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결국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45)
일상을 ‘의미 없는 존재 방식’으로 간주하고 일상에서 도피하려는 시도에서 생겨나는 비참한 결과들에 대한 이러한 전망을 통하여, 나자렛 영성의 중요성이 대조적으로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일상을 거룩하게 만드셨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을 아버지께서 순종으로 따르기를 바라시며 베풀어 주신 은총으로 인식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상을 받아들이시어 인간의 유한성을 몸소 취하셨다. 인간은, 이 지상은 아직 천국이 아니고 시간은 아직 영원하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는 아직 모든 계획과 모든 상황을 자신의 바람과 생각대로 이끌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나 축제(안식일, 예루살렘 순례)가 드러내 보여 주듯이, 우리에게는 의미 있는 무언가를 향한 희망이 있다는 것도 인식하여야 한다. 믿음은 우리가 이따금 참을 수 없는 무게로 여겨지는 일상 속에서 그 무한하신 분께서 가신 발자취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끝없어 보이는 일상에서 오는 단절감을 극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 환경, 기회, 사건들을 조건 없는 은총으로, 곧 모두 창조된 실재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가장 간단한 것부터 일상생활의 전부가 ‘모든 은총을 아낌없이 베푸시는 그분께 대한 믿음으로 이끄는 하나의 계기가 되게’46) 하여야 한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일상의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과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 것이다. 바로 일상의 세계는 나와 다른 이에게 공통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 속에서 나와 다른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같은 운명으로 이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서로 돌보고 책임지고 연대를 실천하며 일상적 관계의 향상을 향한 길을 함께 나아가고 우리에게 약속된 그 ‘위대한 희망’을 직시하여야 한다. 적어도 ‘일상의 모라토리엄’으로서 축제는 공동체적인 전망으로 열릴 수 없다. 누구나 혼자서는 결코 축제를 거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하여 일상 역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자렛의 영성은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영적 전망을 제시한다.
- 자신이 있는 곳 어디서나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온전히 현존하기
-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교회로서 겸손하게 살아가기
- 자신의 일상 속에 감추어져 있는 영원의 의미, 곧 하느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발견하기
이 나자렛의 영성이 이루어지는 곳 어디서나 우리는 일상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1. Charles de Foucauld, Oeuvres Spirituelles, Anthologie, Paris, 1958, 664면.
2. Charles de Foucauld, Immer den letzten Platz, M웢chen, 1975, 65면. 또한 55면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시되 가장 낮은 이가 되셨습니다. … 당신께서는 … 여기 나자렛에서 가난과 고된 노동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노동자들의 삶을 사시려고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삶은 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난과 고된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3. 같은 책, 220면.
4. 같은 책, 233면; Charles de Foucauld, Seul avec Dieu, Paris, 1975, 325면 참조.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리아와 요셉과 나처럼 다른 이들과 최소한의 관계를 맺고 꼭 필요할 때에만 외출하여라.”
5. 같은 책, 257면(필자의 프랑스어 원문 편역).
6. 같은 책, 268면.
7. 특히 적절한 이 표현은 J. Amstutzt, Missionarische Pr둺enz`-`Charles de Foucauld in der Sahara, NZM`-` Schriftenreihe, vol. 35, Immensee, 1997에도 나온다.
8. 1897년 규정, Charles de Foucauld, Oeuvres Spirituelles, 405면. 성찬례와 관련하여, 샤를르 드 푸코는 전 생애에 걸쳐 “오로지 성체성사의 현존으로만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침묵 가운데 성화된다.”고 확신하였다. Charles de Foucauld`-`Abb?Huvelin, Briefwechsel, dt, Salzburg, 1961, 131면.
9. Abb?Caron에게 보낸 1905년 4월 8일자 편지. 또한 그의 누이에게 보낸 1902년 1월 17일자 편지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사하라에서 저는 나자렛에서의 예수님의 드러나지 않은 삶을 따르려고 합니다. 설교를 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난과 겸손한 노동을 고독 속에서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이로써 말이 아니라 기도와 미사 성제를 통하여, 참회와 실질적인 이웃 사랑을 통하여 영혼의 선익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10. 사촌 누이에게 보낸 1902년 1월 7일자 편지.
11. Charles de Foucauld, Seul avec Dieu, 80면 참조. “저는 성체 안에 밤낮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동생이 되어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나자렛의 집에 머무릅니다. … 예수님께서 행동하시듯이, 제가 이웃 앞에서 이 곳(나자렛), 이 공동체에 맞게 행동하기를 바랍니다.”
12. 사촌 누이에게 보낸 1902년 1월 7일자 편지.
13. 게랭 주교(Msgr. Gu럕in)에게 보낸 1902년 2월 4일자 그리고 1902년 9월 30일자 편지.
14. 1903년 2월 27일 편지.
15. 게랭 주교에게 보낸 1903년 6월 30일자 편지.
16. Charles de Foucauld, Carnets de Tamanrasset(1905~1916), Paris, 1986, 45면 참조. “그 당시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어떤 숙소도 봉쇄 수도원도 없었다. … 나자렛 예수님 시대처럼 도시 주변에 가야 이 모든 게 있었다.”
17. 1904년 5월 17일 일기, Foucauld, Oeuvres Spirituelles, 362면.
18. 위와 같음.
19. 더 구체적인 실례는 Amstutz, Missionarische Pr둺enz, 57.120면 참조.
20. 1905년 7월 22일 일기, Charles de Foucauld, Correspondance Sahariennes, Paris, 1998, 369면.
21. Abb?Caron에게 보낸 1906년 10월 1일자 편지.
22. 사촌 누이 R. de Blic에게 보낸 1908년 3월 25일자 편지 참조. “나는 여전히 수도자입니다. 선교 지역의 수사, 선교 수사입니다, 단순한 선교사는 아닙니다.”
23. Amstutz, 같은 책, 137면.
24. P. Gauthier, Diese meine H둵de … Tagebuch aus Nazaret, dt. Graz u.a. 1965, 25면.
25. 같은 책, 8면.
26. 같은 책, 190면.
27. 같은 책, 75면. 그러나 푸코가 제시하는 나자렛 영성의 최고 ‘단계’는 고티에의 관점과 매우 비슷하다. 그래도 푸코는 언제나 관상 요소의 역할을 가장 크게 보고, 선교 활동뿐만 아니라 교회의 실재를 뿌리내리게 하는 일과 같은 노동의 역할은 고티에에 비해서 덜 중요하게 생각한다.
28. 같은 책, 49면 참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대궐 같은 집에서 살지만 그들은 지붕도 없는 데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44면). 그리고 “그러므로 신부들이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될까 봐 교회가 걱정했을 때에, 이는 아마도 임금 노동자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표지가 아니겠는가? 사도는 자신이 파견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여야 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고파는 비인간적인 체계의 실체를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상품으로 사고 팔리는 곳에 신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40면 이하).
29. 같은 책, 35면.
30. 같은 책, 60면. 나아가 고티에는, 예수님께서 목수의 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목수인 아버지와 함께 일하셨으므로, 마르코 6장 3절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목수’, 그 고유한 사명을 수행하시는 ‘나자렛의 목수’이심을 강조한다. 같은 책, 74.75면 참조.
31. 같은 책, 68면.
32. 이와 관련하여, G. Alberigo`-`Kl. Wittstatt, Geschichte des Zweiten Vatikanischen Konzils, vol. II, Mainz`-` Leuven 2000, 237-241면; vol. III (2002), 194면 이하 참조.
33. Y. Congar, F웦 eine dienende und arme Kirche, Mainz, 1965, 121면.
34. P. Gauthier, Consolez mon peuple, Paris, 1965, 201면에서 인용.
35. Gauthier, H둵de, 202면 이하. 조금 뒷부분에서 고티에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말은 부유한 이를 잊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 비록 부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자 할지라도 교회는 그 자체로 가난해야 하며 자캐오의 본보기처럼 부자들이 그들의 부를 나눌 수 있도록 권고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세브리에 신부가 냉소적으로 꼬집었듯이, 어쨌거나 ‘부자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 짐을 덜어주는 사제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또한 204면도 참조.
36. G. Guti럕rez, Die grossen Ver둵derungen in den Gesellschaften und Kirchen der neuen Christenheit nach dem II Vatikanum, in G. Alberigo u.a., Kirche im Wandel, D웧seldorf, 1982, 42면.
37. 일상으로서의 나자렛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미 여러 해 전에 R. Voillaume이 언급한 바 있는데, 그는 이것을 푸코의 영성 전통과 결부시켰다. R. Voillaume, Botshaft vom Wege, Freiburg, 1962, 229면: “우리에게 익숙해진 삶의 과정이 일상(routine)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흔히 이 말에 어떤 변명하는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 영어로 이 말은 완전히 다른 어조를 띠고 있다. 곧 이 말에는 날마다 재현하는 일상의 의무와 임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 나자렛의 삶은 검소한 임무와 의무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오랫동안 되풀이하여 제시된 일상이었다.”
38. B. Casper, Alltagserfahrung und Fr쉖migkeit, in Christlicher Glaube in moderner Gesellschaft, vol. 25, Freiburg, 1985, 62면.
39. M. Heidegger, Sein und Zeit, T웑ingen, 19496, 178면.
40. Gerhard Shulze, Erlebnisgesellschaft, Frankfurt, 1992.
41. Thomas Pr쉚per, Evangelium und freie Vernunft, Freiburg, 2001, 36면 참조.
42. O. Marquard, “Moratorium des Alltags. Eine kleine Philosophie des Festes”, in Zukunft braucht Herkunft. Philosophische Essays, Stuttgart, 2003, 194-204면. 이 글은 196면에서 인용.
43. 같은 책, 197면.
44. 같은 책, 199면 이하.
45. 같은 책, 201면.
46. Casper, 같은 책, 64면 이하.

기스베르트 그레사케 │ 신부.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교의 신학을 전공하였으며, 독일 튀빙겐 대학, 오스트리아 빈 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교의 신학과 교회 일치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사자들의 부활』(1969), 『구체적 자유로서의 은총』(1972), 『은총`-`선사된 자유』(1977, 1986), 『사랑의 보상』(1978, 1985), 『사제의 길』(1982, 1986), 『하느님의 구원 - 인간의 행복』(1983),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1984) 등이 있다.

원문 │ Gisbert Greshake, “Die Spiritualit둻 von Nazaret”, Communio 40/1(2004), 20-34면[“La Spiritualit?di Nazaret”, Communio 193(2004), 33-48면], 박성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