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예비자와 교회 공동체 1992년 4월호 (제 159호)

예비자 중도 탈락의 원인과 대책

이 상 훈(가톨릭대학교리사목연구소장?신부?교리교육)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루가 15,3-6)

Ⅰ. 서론
이론적으로야 복음 선교와 예비자의 교육이 교회의 최우선 과제라는 점을 모를 이가 없겠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 중요성에 비추어 현재의 예비자 교육이 만족스럽다고 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그런 반면에 이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좋은 의견들을 모으고, 실천을 위한 실제적인 노력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면 그 또한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런 필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전개하기에 앞서, 우선 국내의 신학이나 교회의 문제들에 대한 간행물로서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사목」과 「신학전망」을 소장하고 있는 대로 다시 훑어 보았다. 단편적이긴 하겠지만 잡지가 창간된 후로 예비자의 문제에 대해서 나온 다른 분들의 그간의 의견들을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첫째는, 상기의 두 간행물이 예비자 교육에 대한 더욱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일선 사목자들에게 이론적, 실제적 도움이 될 논의들을 제공하는 데 보다 힘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세히 이야기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두 간행물이 창간 이래 예비자 문제를 한 호(號)의 전체 주제로 다룬 것이 「사목」은 1974년 9월의 35호, 「신학전망」의 경우는 1982년 59호에서 각 한 번씩뿐이었으며 그 외에 교리 교육에 관한 논의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물론 사목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교리 교육의 현황을 간행물에 게재된 글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권위 있는 교회 여론 형성의 차원에서 조직적인 역할을 당부하고 싶다. 그리고 두 간행물의 편집 방침에 의해 그런 현상이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예비자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저런 의견을 제기한 분들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며 그 중에서도 평신도의 위치는 더욱 적어서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 두 간행물에 나타난 현상이 간행물상의 현상만이 아니라 실제 우리 나라 예비자 교리 교육에 대 한 관심의 폭과 깊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는, 십년이나 그 이전에 선교나 예비자 교육에 대해서 제기된 문제가 지금도 여전히 다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지금으로부터 거의 이십년 전인 1974년 9월의 「사목」 35호에는 ‘주일 학교 교리 교육의 실태와 그 문제점’이라는 글이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전문직으로서의 교리 교사가 필요한 것은 어떤 사목자라도 인정하나 교리 교사양성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연구대책이 없을뿐더러, 개선을 위한 획기적 지참이 서지 않아 후퇴와 발전도 없는 현상 유지로 교사의 자질 문제는 교리 교육에 큰 손상을 초래하고 있다. 전문직 교리 교사 양성이 여러 난점을 안고 있다면 현재 단기간을 봉사하고 있는 교리 교사들의 양성과 교육의 문제에 어떤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다.”
그런데 같은 문제가 8년이 지난 뒤인 1982년의 「신학전망」 59호의 '교리 교육의 과거와 현재’라는 유재국 신부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반복 제기되고 있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교리 교육에 있어서 교재가 아무리 잘 편찬되어 있고 실용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교육받지 않은 교사는 교리를 가르칠 수가 없다. 현존하는 교사 교육 기관으로는 가톨릭교리신학원 하나밖에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현재 교리 사목에 봉사하고 있는 교사들은 대부분이 무자격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각 교구마다 교사들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이 있지만 너무나 빈약하며 체계적이고 정규적인 교육이 되지 못하고 있다. 전국적인 차원과 교구 차원에서 정규적인 단기 교육을 실시하여 교사들을 양성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최소한의 교육이라도 이수한 교사만이 효과적으로 교육을 실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각 교구청의 교육국을 강화하는 것 이 바람직한 일이다.”
그 이전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런 문제가 제기되고 거의 이십 년의 세월을 낸 오늘 과연 우리가 세우고 실천에 옮긴 그 ‘시급한 대책'은 무엇이었노라고 주님께 답해 올릴 수 있을까. 만일 그 대책을 세우는 일에 무관심했거나 소홀함이 있었다면, 그 이십 년의 세월 동안의 소홀함으로 해서 주님의 우리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책임은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평신도 교리 교사들의 양성을 위해서는 특수한 센터와 기관을 설립해야 하며 주교들은 이들 기관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 분야에는 교구적, 초교구적,전국적 협력이 풍부한 결실을 맺으리라 봅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현대의 교리교육’ 1979).

셋째, 선교나 예비자 교육에 대한 교회의 사고 방식에 어떤 허점이 있지 않은 가 하는 점이다, 교회가 진리를 전하는 것은 교회가 자신의 것을 가지고 남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한다면 주님으로부터 조금 먼저 얻은, 그것도 자신의 공이 아니라 순전히 주님의 은총으로 거저 얻은 진리를, 잠시 후에는 다 같이 공유하게 될 사람들에게, 그들도 이 진리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귀뜸해 주는 일에 인색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이런 처지에 있는 교회가 예비자들에 대해서 당연히 가져야 할, 그리고 당연히 알고자 노력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을 부르실 때는 각자의 처지에 따라, 각자에게 합당한 시기에, 각자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하신다. 하물며 교회가 하느님을 알림에 있어서, 나는 다른 할 일도 많고 당신들의 수도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내 할 말만 할테니 듣겠거든 듣고 말겠거든 말라는 듯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복음 선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복음 선교의 방법과 수단에 대한 연구도 중요합니다. 어떻게 복음 선교를 하느냐의 문제는 시간, 장소, 문화 등의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에 언제나 현실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 발견과 적응이 우리의 능력의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 사목자들인 우리가 먼저 복음 선교의 내용에 전적으로 충실하면서 현대인에게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대담스럽게 또 지혜롭게 발견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현대의 복음 선교’ 1975).

Ⅱ. 문제와 대책

1. 교회 밖의 문제

그럼 이제 구체적인 일선 사목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예비자 교육의 문제들을 살펴본다. 문제를 언급하기 전에 우선 한 가지 전제로 해야 할 것은 지금 예비자의 중도 탈락을 심각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전체 예비자 수의 감소라든가 예비자들 중에서 중도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다거나 하는 것들이 문제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탈락하는 사람이 비록 백만 명 중의 단 한 사람이라고 해도 주님은 바로 그 한 사람의 회개를 바라시며 그 한 사람은 우리 각자가 그렇듯이 이 온 우주보다 더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서 또 남자 신자가 여자 신자보다 월등히 적은 현재 우리 교회의 현실도 염두에 두고 남자의 예를 들어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우선 교회 밖의 상황은 참다운 신앙 생활은 물론 새로이 종교를 가지는 일부터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먹고 살기도 어렵고 시간도 없는데 눈에 뵈지도 않는 신을 찾아 나선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일의 가치관 사이의 간격이 점점 커져 가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갈등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예비자가 직장에서 외국의 바이어를 접대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면 그 사람은 오늘 저녁 외국의 바이어를 데리고 접대를 하러 가야 할 것인지 교리반에 가야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 바이어가 원한다면 신앙인으로서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 이런 생존여건과 신앙 사이에 적절한 타협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평소에 알고 지내는 어떤 신자는 공무원인데 소위 생기는 것이 많은 부서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자신은 신앙인으로서 물론 이유 없는 돈을 받지 않았지만 그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이 그러한 자신을 배척하고 유무형의 압력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이런 차원 높은 갈등을 들기 이전에 생존은 우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나라의 보통의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이 종교 생활을 위해서 정기적인 시간을 확보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더욱 힘든 일은 신앙에 점점 발을 들여놓을수록 사회 생활에서 자신이 부정해야 할 것들이 많아져 간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다하는 일이고 또 당연히 여기며 해야만 하는 일을 나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 각자가 이런 상황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적응해 가겠지만 여하튼 분명한 것은 현대 사회의 진행 방향과 교회가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엄연한 사실은 교회의 가르침이 불변의 진리인 동시에 나와 내 가족의 생존도 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이런 사회의 현실을 직접 당장에 어떻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현실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의 바탕을 가지고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아야 한다.
굳이 특정 종교와의 갈등이 아니라고 해도 현대의 삶과 가치관은 인간의 본성 자체와도 문제를 일으킨다. 현실은, 남이나 자신이 돌아볼 여유도 없이 오로지 더 가지기 위해서, 좀더 편하고 좀더 즐기며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하고 모든 편함과 즐거움을 다 바쳐 정신 없이 달려야 한다. 이러한 현실이 옳다고 자발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에 따라가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회라고 하는 이 거대한 흐름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차라리 포기하고 사는 것이 쉬울 것이다. 필자의 한 친구는 이러한 현실을 "조금 덜 고생하기 위해서 열심히 고생해야 하는 세상”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의 영혼에 채우기 어려운 공백을 만들어 놓았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공백이 진리를 찾는 목마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렇게 만든 그 원인인 물질이나 쾌락을 더욱 추구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목마른 사람이 소금물을 마시고 더욱 목말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매우 어두운 것이지만 한편 사람들이 목말라 하고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교회는 존재하며, 그 사람들에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바로 이 사명으로 교회는 희망과 힘을 얻는다. 이 점에서 교회는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야 하며, 진리의 삶을 실천으로 보임으로써 자신이 믿는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리를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가 되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요한7,38).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부수고 참다운 진리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종교를 찾는다. 이렇게 종교를 찾아 나서기까지의 과정이 힘들고 용기가 필요하면 할수록 그 종교의 의미는 더욱 클 것이다, 이렇게 진리의 여정에 나선 사람들이 먼저 만나는 것은 진리 그 자체의 깊은 의미에 대한 체험보다는 외적으로 보이는 교회 즉 교회라는 제도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신앙의 여정에서 제도로서의 교회와 동료 신자들이 가지는 역할은 또한 중요하다. 물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동기나 자세가 교회가 바라는 그만큼 진지하고 투신하는 자세가 되지 못하는 경우나, 참으로 교회에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을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고 세태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태가 그렇다고 해서 또 교회를 찾는 사람이 바른 자세를 지니지 못했다고 해서 교회가 그들을 바로 이끌 수 없다거나, 그럴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옳은 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지만 교회는 그들에게 옳은 것을 보여 줄 의무가 있을 뿐이다.
2. 교회 안의 문제
한 사람이 큰 용기를 가지고 성당을 찾았다.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물을 것인 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안내판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안내 책자도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을 붙들고 물어 보았더니 사무실에 가서 물어 보라고 했다. 사무실에 가서 처음 성당에 나왔는데 무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예비자 모집 기간이 언제이니 갔다가 그때 다시 오라고 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어찌 됐든 기왕 시작했으니 끝까지 해 보리라고 마음먹고 예비자 환영식에 갔다. 환영식을 하긴 했는데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지, 교회라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고 그 일원이 됐다는 기쁜 사실이 썩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교리반을 정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맞는 시간이 없었다. 일반, 청년, 학생, 부녀자, 노인 등으로 반이 나뉘어 있는데, 반에다 맞추자니 시간이 맞지 않고 시간에 맞추자니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반이었다. 그렇다고 교회에다 대고 자신에게 맞는 반을 자신에게 맞는 시간에 만들어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가능하고 말고 이전에 그런 말을 해 볼 기회조차 없었다. 어찌어찌 한 반에 들어가 교리를 시작했는데 강의를 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말 자체는 다 옳고 거역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은 알겠는데 이해할 수 없는 용어는 물론이려니와 내용이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질문을 하고 싶어도 수업의 방식 자체가 일방적 강의에 의한 주입식이려니와 인원도 많아서 일일이 질문을 하고 설명을 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차차 알게 된다는 말을 믿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대로 세례를 받기 위해서 열심히 나가다 보니 차차 여러 의문이 생겼다. 짧은 시간이지만 단편적으로 보여지는 교회의 모습은 교회가 가르치는 진리와는 좀 다른 면이 있는 것 같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라고 가르치셨다는데 교회의 모습은 꼭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교인들도 자신이 생각했던 교인상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러던 중에 피치 못할 일이 생겨서 한 번 결석을 했는데 다음 시간이 되니 왠지 썩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미적미적 망서리다 그냥 다음에 가기로 해 버렸다.
우선 교회의 인식과 자세가 문제이다. 요즘 들어 예비자 모집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기는 하지만 예비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일 못지않게 그 사람들에게 세밀하고 실제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일도 중요하다. 하면 좋다는 정도의 중요한 일이 아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면에서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예비자에 대한 교회의 시각과 자세는 바뀌어야 한다. 예비자들은 무엇이 모자 라는 사람들도, 무엇을 구걸하러 오는 사람도 아니다.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리고 힘들지만 옳고 기쁜 삶을 함께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초대를 받고 온 사람들이다. 예비자를 위한 교리 교육에 예비자들의 상황이나 의사가 반영되지 않고 있는 일은, 아무리 여건이 여의치 못하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일이다. 가능한 한 그 들의 여건에 맞는, 가능한 한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과 내용과 언어로 이루어져야 함을 새삼스레 강조해야 하는 일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세상은 매우 빠르게 변해 가고 있다. 그 변화가 진보이든 아니면 궤도 이탈이든 변하고 있으며, 사회가 변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가치관과 삶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사회와 인간이 얼마나 어떻게 변하든 우리가 전해야 할 진리의 내용이 변할 수는 없다. 반면에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면 사회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교회의 믿는 바가 어떠하든 거기에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리를 제시하는 방식에 있어서 과거를 안일하게 답습하면서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만 강변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태도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재와 교사는 중요하다. 수도 없이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성직자나 수도자는 그들이 성직자, 수도자라는 그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훌륭한 교리 교사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신학적인 내용을 아는 것과 사람들에게 교리를 잘 전달한다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다. 한편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평신도이니까 적당한 선까지만 알고 봉사하는 선에서 그만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잘못이다. 교사가 성직자이건 평신도이건 간에 아무 관계 없이 하느님의 진리를 가장 최선의 방법을 통해서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교리 교사들의 체계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그 신분이 무엇이든간에 교육을 통해 좋은 교리 교사로 양성이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 좋은 자질을 가진 인원들이 많은데 이들을 그때그때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쓰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교사로서의 소명 의식과 교사관, 신앙관을 뚜렷하게 가진 교사들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인재를 길러야 한다. 많은 수의 훌륭한 교사가 있어야 단순히 교리 내용만 가르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삶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전담교사가 담임식으로 20명 이하의 인원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방문이나 면담을 통한 철저한 신앙 지도도 가능할 것이고, 강의의 진행도 전례 위주의 암기식, 주입식 강의에서 벗어나 참신앙인을 길러내는 창의적인 방법들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리반의 편성도 보다 다양화하고 시간도 세분화해서 각자에게 알맞는 반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교리 시간도 일주일에 한 번뿐 아니라 한 번은 강의, 또 한 번은 좀 다른 내용이나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예컨대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서 봉사 활동을 한다든가, 아니면 강사를 모셔다가 특강이나, 신앙간증 또는 기도회를 가지는 등 다양한 신앙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교리반은 단순히 교리 시간에 만나서 교리 내용만을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 전담 교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과외 활동을 통해서 서로 깊은 사랑의 일치를 추구하는 작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각자가 그 안에서 하늘 나라를 보고 느끼도록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대부 대모의 역할도 중요하다. 대부와 대모는 단순히 영세 증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의 부모로서 교리 시작 때부터 함께 기도하고 신앙의 모범을 보이며 인도할 책임을 가진다.
예비자들의 지적 수준은 높아 가고 있다. 그리고 예비자들이 교회에 던지는 질문은 실제적인 삶에서 순간순간 부딛치는 살아 있는 고민들이며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서부터 개인의 삶의 매 국면에서 만나는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한다. 교회는 결코 이 문제들로부터 초연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고민들을 교회는 먼저 이해해야 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의무가 있다. 조건 없이 기억하고 받아들여야 할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나 보다 잘 설명할 수 없고 잘 이해시킬 수 없어서 그저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것은 곤란하다.
따라서 교재도 교의 위주의 주입식 편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앙은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결국 삶으로 녹아 들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교리가 초자연적인 신비나, 신학 지식, 계명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날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고 그분과 대화하마 진리를 살아가는 길을 배우는 것이라면 이러한 면에 초점을 맞춘 교리서들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 다 양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본당 차원에서의 협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우선 예비자 교리 교육을, 단순히 모집하고 가르치고 세례 주는 일회적인 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상설 학교와 같은 체제를 갖추고 전용의 사무실도 마련해서 전담자들이 예비자의 여러 가지 상황을 조직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과감한 투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일이 진정 교회를 짓는 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다. 이 일이 교회의 투자 순서에서 최우선이다. 현재의 교회의 사목이 전례, 신심 단체의 활동 지도나 건물을 짓는 일에 치우치고 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주일학교 교사연합회와 같이 예비자교리 교사연합회와 같은 단체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단체를 통해서 회원들의 자체 발전을 위한 공부라든가 정보의 교환도 가능하고 교구 차원의 교사 관리도 가능하다고 본다.
본인의 경험이나 주위의 사목 담당자들의 경험에 의하면 현재 예비자들의 중도 탈락률은 어림잡아 거의 50%에 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처음 온 사람들의 약 50% 정도가 탈락하고 그 후에 다시 추가되는 인원을 합해야 숫자상으로 처음 인원의 70% 정도가 영세에 이른다고 본다. 우선 가능한 일들부터 순차적으로 실천해 나가면 이런 많은 인원의 탈락은 줄여 나갈 수 있다.

Ⅲ. 맺음말

지난 80년대에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을 만큼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기록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여하튼 모진 박해에 맞서 순교의 피를 뿌린 선조로부터 이름 없는 신자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앙인들이 알게 모르게 뿌린 씨앗이 그 열매를 맺은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더 크게는 하느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에 내리신 은총이다. 그 은총을 감사하게 받아 잘 관리하여 백 배의 소출을 내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다. 반면에 스스로 도취하고 자만하여 시기를 놓치면 있는 것 마저 빼앗아 가실 것이며 이미 이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지는 않은 가. 교회의 안과 밖에 교회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들이 늘어 가고 있다. 교회가 인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기적이고 가시적인 물질 위주라는 의미에서의 소위 교회의 중산화(中?化)와, 사회의 악과 부조리에 대한 침묵과 외면은 의식을 가지고 고민하는 이들의 등을 돌리게 하며,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서조차 사랑과 자비의 따뜻한 품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일부 성직자, 수도자들의 고압적이고 냉랭한 태도는 이들을 더욱 슬프게 하고 있다.
한편 토착화는 한때 말만으로 무성하다가 이제는 그나마 시들해지고 일부는 지쳐 버리고 일부는 식상해져 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토착화는 어설픈 민족주의나 전통 물화 운운의 차원아 아니라 아주 엄밀한 현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교회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한국의 교회이다. 그리고 그 교회는 우리 나라 사람들로 구성된 우리 나라 사람들의 교회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세우신 교회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과 하늘, 산과 나무와 호수와 바람, 자신들의 언어, 문화, 풍습 등 삶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았듯이 우리가 우리들 안에서 하느님을 뵙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교회의 관례가. 이러하니, 다른 시도들은 어설프고 오류의 위험이 많으니, 교회법전의 어느 조항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 그 조항의 근본 취지야 어쨌든 그대로 따라와야 한다고 큰소리 칠 수 있는 호시절이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이 글을 통해서 이제껏 깨닫지 못했던 색다른 점을 지적했다거나 예비자의 중도 탈락에 대한 뾰족한 대안을 제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또 많은 분들이 이를 위해서 알게 모르게 노력하고 계신 것으로 안다. 그러나 사실 대안이란 교회 즉, 위로부터 아래에까지 우리 모두의 회개와 투신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다시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누군가가 또 똑같은 문제를 이야기해야만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여봐라,저 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태 25,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