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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문
1975년 1월호 (제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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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도 주교 시노드
1975년 1월호 (제 37호)
1. 우리는 주께서 이번 주교 대의원 총회에서 성취하도록 허락하신 일에 대 하여 성신 안에서 위안을 누리...

문헌 - 인권과 화해에 관한 메시지
1975년 1월호 (제 37호)
제4차 세계 주교 대의원총회 (1974.10.23)1971년 세계 주교 대의원총회 이후로 교회와 세계에 대하여 특히 ...

한국 주교단 사목 교서
1975년 1월호 (제 37호)
복음 정신 실천으로 진리를 증거 한국 주교단은 추계정기총회〔10월 14일~18일)에서 최근 교회 안팎에서 ...

포교성성이 본 각지의 현황-
1975년 1월호 (제 37호)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최대의 성과는, 평신도들이 a회생활에 직극적으 로 참가할 길을 열게 된 것이라고 한...

金樂浩의「자신 책가」 소묘《II》
1975년 1월호 (제 37호)
5. 形式 및 內容攻 「자신책가」는 형식상으로 보아 4· 4調 4音步格 (tetrametre) 의 기본음수 율을 어김...

조선후기사회에 있어서의 서학의 조상제사 문제
1975년 1월호 (제 37호)
I. 儒敎世界의 전통적 祭祀觀 朝鮮後期社舍에 유입된 西學은 그 가 가지고 있는 異質文化 에너지의 강력한...

韓國人 宗敎心性의 基底構成
1975년 1월호 (제 37호)
1 1972년에 文化公報部에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韓國내의 宗敎ㅅ口는 圓佛敎를 포함하여 佛敎가 867만명...

그리스도교의 바탕인 사랑
1975년 1월호 (제 37호)
〔譯者註〕사랑은 그리 스도교의 기 본 사상이 며 교회 가 세 상에 제 시 하는 메 시 지의 진수이다. ‘보...

相談者로서의 司祭 ㅡ그 態度와 價値觀을 중심으로一
1975년 1월호 (제 37호)
1 司祭가 되어 일선사목에 임하면 =L 는 조만간 자신이 相談老(counselor) 의 일역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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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1975년 1월호 (제 37호)

조선후기사회에 있어서의 서학의 조상제사 문제

姜 燕 熙 (동정성모회 수녀)

I. 儒敎世界의 전통적 祭祀觀

朝鮮後期社舍에 유입된 西學은 그 가 가지고 있는 異質文化 에너지의 강력한 發散作用으로 旣存의 전통적 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그 連關 構造의 변화를 또한 촉구시켰다. 즉 西學은 봉건가족제도, 사회윤리,정 치체제는 물론 文化전반에 걸친 변화 의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中國과 더 불어 儒敎?의 문화를 共有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특히 忠孝를 天下의 ㅊ 本으로 삼고 孝로써 ㅅ倫의 要道와 百行의 根本을 재는 척도로 삼는 儒 敎傳統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 孝의 사상은 충직한 사회적 원 리였고 倫理道德의 규법으로 그 이론 이 전개되었으나 인격적인 인간, 自 由와 平等을 누리는 인간에게는 不平 等的이고 ㅡ方的이며 無條件的이요 服從을 강요하는 逆機能的 일면도 내 포하고 있었다. 孝의 대상은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이미 고인이 된 조상도 해당되었다. 부모 생존시의 孝는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되어 일관 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 로 祖上혔拜思想은 父家長的 대가족 제도와 상호불가분의 것이다.

孝를 중요시한 사회는 바로 祭祀가 중요시된 사회였다. 備敎세계에시의 제사는 IS와 관련이 있고 이 禮는 또 한 孝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 로 國家에서는 孝와 禮에 출중한 사람 에게 그 정도에 따라 후한 상이 내려 졌고 이와 반대로 어긋남이 있을 때 에는 엄벌로 그들의 죄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러 므로 父權을 강조하고 孝와 順 從을 미덕으로 받든 조상제사제도는 가족들의 단결과 화목을 도모하며 血 緣的 사회의 결합을 강화하는 한편, 국가사회의 안정과사회적, 윤리적 향상을 추구하게 되었다. 대가족제도 와 조상숭배사상 사이에 다각적인 文 化要索가 함축됨으로써 孝意識은 날로 상승되어 갔다.

禮의 本質的인 기원은 제사에 있고 禮의 ?用的인 기원은 인간의 욕구를 조절하자는 政治에 있다. 제사는 孝가 근본정신을 이루고있으니살아계신 부모에 대한 효성은 말할것도 없거니 와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끊임없이 孝를 표현하는 것을 그 근원으로 하였 다. 예를 들면 孔子의 祭祀觀도 조상 제사는 축복을 얻음을 목적으로 하는 祈나,禍를 면함을 목적으로 하는 由 ?가 아니고,오직 부모의 지난날 자 손들에게 베푼 은공에 보답코자 하는 孝心인 報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유교세계에서는 秩序識에 대한 자각이 높았으므로 조상 제사에 대한 가치개념을 제일로 여겨 이에 대한 칠저한 文化 管理가 필연적으로 요청 되었다. 곧 孝情에서 인원된 조상제 사는 부가장제도와 깊은 상관관계를 이루며 전통유교 문화권의 文化能力 기반으로서 중요한 익할을 담당하였 다.

II. 朝鮮敎會와 제사문제

1. 典19問題

조상제사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하여 西學受容으로 야기된 中國에 서의 典禮問題를 살펴보자. 明末 마 태오 릿치가 病?한 1610년부터 시작 되어 淸의 高宗 때인 1775년에 이르 러 일단락되었으나그전후 160년.간에 걸친 전례문제는 먼저 中國傳道에 파

견된 예수회와 다른 전교 단체와의 사이에서 비롯하여 마침내 에수희와 교황청의 분쟁을 자아냈고, 결국은 교황청과 淸활? 간의 確執을 일으켜 마침내 중국통치의 절대성을 굽히지 않는 淸帝에 의하여 중국 天主敎에 대한 박해정책이 굳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

전례문제의 확대와 귀결을 통하여 강인한 전통문화가 異Η文化를 수용 하지 못한 거부와 배척의 문화직 反 應現象을 볼 수 있다. 그것은 自己의 문화를 고잡하고 만 문화를 거부하는 문화적 閉鎖主義였으며 文化的 自己 保存의 본능을 계속 유지하려는 자기 합리화가 크게 작용한 때문에 일어난 ?史展開였다.

2. 朝鮮天主敎會와 廢祀指示 중국에서 일어난西學의 전례문제가 朝鮮王國으로까지 飛化되어 조선 교 회 내외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朱子學을 國是로 출발한 조선왕국은 그것이 국가활동에는 물론 사회전반 에 걸쳐 체질화되었다. 그러나 그 자 체 속에 敎條主義的인 배타성을 내포 하고 있었고, 特權的 지위의 확보를 위한 권력쟁취는 사대부의 대립과 양 반사회의 모순을 심화시켰다. IS세기 이후의 朝鮮哲學은 격변하는 시대에 대하여 본래의 참신성을 점차 잃게 되 었고, 超感®;的이고 抽象的인 ‘理'의 지나친 강조와 實證性이 박약한 名分 論的 合理主義만을 절대시하게 되었다. ‘理’ 위주의 性理學이 현실 극복 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로 말미암아 조성된 逆行的이고 파행적인 역사전 개에 당시 在野의 先驅的 κ學者들이 西學이라는신학문에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 다.

儒敎文化의 구심력이 동요하고 모 순과부조리가확대됨으로써 그것의 S正과 抹弊를 모색하는 朝鮮後期社 會의 추세를 배경으로 在野知識ㅅ들 은 西學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들 은서학에서 새로운社화倫理, 生活 規範,生活樣式,文化窓識과 인생관, 세계관을 찾고자 하였다. 곧 적 극적 인 면으로는 自我의 각성을 기초로 종 교적인 根源的 차원에서 生을 개척코 자 하였다.

초기 朝鮮敎會의 敎徒들이나 천주 교 신앙운동의 주동인물 지도자들은 유교적 기초소양으로 성리학전통을 지닌 이들이었으나 학문적 연구를 통 해서 자율적으로 각성한 바를 실천윤 리로 규정하고 이를 봉행하자 조선왕 국에서는 전통문화에 대한 ?.Κ文化 의 도전으로 해석되어 이에 새 문화 전개를 가져왔다.

英正祖를 전후하여 서학에 대한 예 리한 비판과 논평도 점차 體系化되어 가는 가운데 1785년 ■乙已秋曹摘發事 件이 일어나자 서학은 주자학적 유교 철학과 유교적 규범 체계로 禮敎秩序 와 문화의 가치를 측정하던 이조후기 사회에 새로운 파문을 야기시켰다.
반면 서학의 漸盛과 西敎實踐의 社 會化에 따른 정통문화의 自已喪失의 우려에서 나온 반발은 그 시대의 사 대부층에서 危機意識으로 점차 심각 하게 대두되었다. 乙已秋曹摘發事件 율 계기로 사학에 대한 공격이 시작 되었다. 西敎를 邪學으로 규정 규명 하고 通文과 상소가 잇달아 나돌게 되었다.

李龍舒,鄭淑,鄭拒, 蔡一?,李明 ??,, 蔡현餘,金圭,洪樂欽, 姜世靖, 金源星,禹敬謀,柳識,李基慶, 鄭激 등은 通文을 돌려 斥邪의 뜻을 굳혀 갔고 掌令 柳河源 같은 이가 상소를 올려 異質文化의 해독을 述하여 서학 배격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조선왕국은 결코 문화적 불모지가 아니었다. 朱子學과 西學衛正과 斥邪 保守와 革新 등 이율배반적인 요소로 진통을 겪는 동안 朝鮮後期社會는 종 전의 一元的인 단일 문화체질에서 다 원적 複合文化體質로 移行되었다·

西學奉敎가 邪敎의 행위로 규정되 고 禁敎의 선풍적인 박해가 돌발하자 西敎奉行者들 중 李承蒸,權日身,李 藥 같은 士類出身敎ㅅ들은 가족과 문 벌내에서도 背敎를 강요당하는 .가정 박해를 받은 끝에 天主奉行의 신앙에 서 일시 탈락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전개에서 新文化 수용 에 따른 갈등과 곤란이라는 문화 진 통의 한 양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련을 극복하게 됨으로써 實踐的 행동면에서 그들은 진취적이고 다이나믹한 에너지를 체득케 되었다.

조선후기사회의 西學실천운동이 ? 行的이긴 하나 내적으로 심화되어 조 직되고 構造化되는 단계에 이르러 17 90년 8월 淸高宗 乾隆帝의 八旬節을 맞아 赴京使行 進賀使 城尉 黃仁點의 使行에 尹有ㅡ을 끼어 北京敎會를 使 行케 하였다. 그는 그당시 북경주교 Gouvea로부터 조선교회의 선교사 파 견과 가톨릭敎理에 입각하여 祖上祭 祀를 禁It하는 廢祀指示를 알려왔다.

그러므로 朝鮮敎會內에는 심각한 동요가 일게 되었다. 비록 純正한 마 음에서 만물의 창조자요 주재자로 천 주를 받아들이고 천주교 신앙생활을 개척 奉行하고 있었으나 초기 敎徒들 은 전통적 유교사회에서 탄생하였고 그 속에서 잔뼈가 굵어졌으며 또한 철저한 儒敎敎養을 주입받았던 사람 들이었다.

그들은 天主를 섬기나 한편으로는 전통적 ?俗生活로서 부모 조상 봉행 의 제사를 교리와 구애되지 않는 신 앙체계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러기 에 廢祀指示로 알게 된 조상제사 금 지의 교리에 당혹치 않을 수 없었고, 低迷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부 士類出身敎人들의 신앙실천 대열내에 혼미의 양상이 야 기되었으나, 이런 시련을 극복함으로 써만 조선교회는 그리스도 신앙의 정 통을 확립케 되는 것이다. 신도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전통적 祭纏儀式을 미신행위, 우상숭배로 看傲하여 神

主를 埋沒하고 ‘毁祠廢祀’를 적극직으 로 행하였다. 제사 폐지 문제는 이제 踏敎秩序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非現 實的, 非合理的,비윤리적,비문화적 요소를 함유한 엄청난도전이나,商ㅅ 知性들은 그들의 문화에로의 노력과 진보에로 향한 의식을 진작시켜 혼돈 을 극복하고 西學信仰의 정통을 확립 하여 조선 천주교회 발전의 기틀을 잡아놓았다.

3. 對西敎意識의 深化

西學의 수용 적응을 통하여 다음 단 계의 문화에로 발전하려는 의식적 신 앙실천은 전통적 제사행위의 폐지로 珍山事件의 유혈극을 유발하였다.

1791년 전라도 珍山에서 일어난 辛 亥事件은 바로 焚:主廢祭의 행위로 말 미암은 조선후기사회에 異質文化 에 너지의 새로운 활력을 제시한 크나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珍山事件이 일어난 유교문화지대에 살고 있는 糖神들의 西學에 대한 반 응은 매우 미묘한 것이어서 西學의 理念, 體制, 思想, 制度, 規範을 받 아들이기에는 傳統과 異質의 격차가 너무나 심하게 나타났다. 이에 異質 文化의 용납을 불허하는 서학의 일대 고발장이 洪樂安에 의해 蔡濟恭에게 長書로써 제출되었다.

여기서 洪樂安의 西學告發狀내용을 분석하여 서학배격 원인을 규명하면, 그는 서 학을 ‘惑世諷民’ 이 란 개 념 으로 파악하였고, 이 개념은 儒學者들의 常套語로 자기 문화 수호보존에 대 응하는 異質文化 요소를 공격할때 異質의 피 해를 알리는 文化用語로 사용하였다.

이에 傳統儒敎의 한계성이 있었고 他文化의 수용을 부정하는 문화상황 은 다른 문화와 타협도 결합도 할 수 없는 문화적 봉쇄로 새 문화를 창조 할 수 있는 문화 에너지를. 점차 상실 케 되었다.

洪樂安의 長≫가 논하는 바는 ㅅ倫 紀綱의 滅絶을 우.려 하는 자기 문화 방 위의식에서 거론되어야하나민족적 자존을 표방한 정치 위기 의식에서도 거론되어 조선후기사회의 문화 한계성 의 일모를 드러내고 있다.

전 통 이 조사회 에 서 서 학을 배 척 하는 문화근거로 '同中國之義,를 강하게 내세우고 있음은 進士 成永愚를 비롯 한 20여인이 太學에 斥邪通文을 송달 하자 太學掌議 金益彬은 답서에 "尹持 忠權尙然渠旣名在士流之故 爲先拜施 鳴鼓極罰 以示不與同中國之旌····· 函請天討幸甚,’라 한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동양문화의 원천을 이뤄온 중 국을 文化國으로 인식한 데서 나온 것이나 夷狄禽®의 이단서학의 감염 이 李朝ㅅ을 비문화적이며 비윤리적 인 위기와 궁지에 처하게 하므로 이 러한 文化危機 해결책으로 自尊怠識 과 自己文化守護:t識에 있어서 중국 과 같아져야 한다는 문화의식의 발로 였다.

;同中國之義'의 뜻이 慕華思想에서

연원하고 있으나 적극적이고 능동적 인 문화 풀이에서 이를 中華思想이라 해석할 때 중화사상은 기본적으로 자 기네 문화에 대한 신뢰와 자존심의 바탕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同中國之 JT한다는 것에서 조선후기 지성들이 가진이조문화전통에 대한 신뢰와 이조를 자부하는 문화적 긍지를 충분 히 窺知할 수 있다.

關衛編 剖文에서 전개되는 洪樂安 과 蔡濟恭의 상위된 서학관에서 전자 는 珍山에서 일어난 이질문화현상인 廢祭祀事件을 정치적 권력의 모순을 드러내는 반국가적 행위로 규정하였 고 張角 ?巾 백련교도의 변란이라는 등 정치적 측면에서 서학으로 인한 전통사회의 위기의식을 강조하는 强 硬斥邪派였으며 후자는 廢祭祀事件을 민족문화전승의 대과업을 파괴하는 비문화적, 비합리적,비인간적 행위 로 규명하여 文化朝鮮ㅅ으로서 민족 문화긍지를지닌 文化自衛意識이라는 사회적, 문화적 측면으로서 서학의 위 기의식을 인식한 ?健斥邪派이었다.

이상과 같이 斥邪上疏文과 司諫對 策文을 통하여 珍山事件을 분석한 결 과는 당시 서학배격의새로운측면을 밝힐 수 있다. 즉 유교문화권을 누 려온 傳統李朝가 가장 중시하는 바는 孝思想으로, 효와 직결된 조상제사문 제를 거부한 尹持忠 사건은 고차원의 禮意識과 禮裏面에 전제된 宗法的 질 서의 파괴를 가져오는 변동요인으로 해석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儒者知性들은서학을‘蔑倫亂常之?', ‘?張 禍福恐??之荒誕之說’로, 西學ㅅ을 ‘無父無君之徒’,'禽獸之徒,, ‘蔑倫 亂常之徒’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사회에 반영된 서학의 ‘焚 主廢祭’의 행위는 전통문화를 극복하 려는 이질문화 에너지의 文化應戰으 로 해석되므로 자기문화를 보존 장려 하는 과정에서 용기있게 自生的 문화 에너지의 문화적 자기창조를 실현한 차원 높은 李朝文化意識世界를 명시 하고 있다.

III. 西學側의 祭祀觀

박해당국자들이 서학을 박해한 공 격의 초점에 답변하는 서학측의 제사 견해를 기록한 유일한 基本史料로「上 宰相書」를 들 수 있다.

「上宰相書J는 붙과2백자원고지 17 매 정도의 짧은문장으로 구성되어 있 다. 그러나 深?한 종교철학을 가장 요령있게 표현한 것으로 그 문장은 당당한 천주교 호교론으로 교인, 버 교인을 막론하고 천주교를 이해하는 超珍神本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丁Η祥으로 서학의 孝를 儒學의 孝에 비교할'때 조금도 손상됨이 없고 해롭지 않음을 근엄한 名文으로설파함으로써 문화적 전통의 토대위에 새로운 孝의 창조를 시도하 였다· ’

丁夏祥은 그의 저서「上宰相≪U 끝 부분에 ‘又辭,라 하여 서 학도들이 제

사를 지 키 지 못하는 구체 적 인 이 유를 서술한다. 그는 제사와 神主에 대한 서학인의 명백한 태도를 밝히면서 조 선의 천주교가 제 사를 폐 지 함은, 제 사 가 배격하여야 할 미신이기 때문이요 지극히 비합리적인 유교의 전통제사 관이 그룻되기 때문임을 자세히 설명 하고 있다.

그러나 제사의 의식이 실질적인 행 위가 아님은 물론이나 그렇다고 미신 행위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는 假想 的인 것이지만 先祖에의 思慕之情으 로서 지내는 유교의 제사가 자손들에 게 번거롭고 부자유스런 굴레가 되기 도 하고 갖가지 폐단과 복잡한 형식 으로 홀렸다는 것은 반성하여야할 사실이었으나, 또한 서교가 제사를 迷®≪■하여온 논난도 형식 속에 숨은 좋은 孝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때 문에 야기된 것이 확실하다.

풍성한 문화의 창조가 이루어지려 면 문화간의 폭넓은 대화가 필요하 다. 전통이 가톨릭적인 의미를 가지 고 재창조됨으로써 조화를 이룬 「上 宰相書」에서 우리는 전통적 禮觀과 西敎敎理의 융합을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이조문화의 전통직 토대 위에 새로운 문화창조가 가능함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행 가톨릭의 제사관 에 대해 간략하게 부언하고자 한다.

1Μ0년 한국주교단은 喪祭法에 대 해서 미신적인 것괴- 아닌 것을 구별 하여 가르쳤다.
1. 한국에서 허락될 수 있는 喪祭 禮式:

(1) 시체, 무덤,亡者의 사진, 亡 者의 이름만 적은 名脾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은 可하다。 이것은 유럽 사람들도 시체 앞에서 무 를을 끓어 e를 표시하며 망자를 위해 기도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2) 시 체 앞에 서 나 제 시째 향을 피 우는 것은 가하다.

(3) 제사때 음식을 차리는 것은 可 하다. 생전에 즐겨 잡수시던 음 식을 차려 망령을 기억하는 職이 기 때문이다.

2. 천주교에서 완전히 금지된 喪祭 禮式:

(1) 飯含: 죽은 사람의 입에 밥이 나 물에 담근 쌀, 엽전이나 조개 혹은 진주를 넣는 예식.

(2) 使者상을 차리지 못한다.

(3) 阜復: 죽은이의 겉옷이나 속옷 을 벗겨서 지붕 위에서나 높은 언덕 위에 을라가서 북쪽을 향해 서 죽은이가 남자면 성명을, 여 자면 字를 부르고 3빈 반복하며 외쳐서 죽은이의 혼을 다시 불러 들이는 의식.

(4) 합문: 제사의 음식을 조상의 혼이 와서 먹는 시늉으로 밥에 수저를 꽃아 두는 둥의 모습을 갖추어 두고 어른이 밥잡수시는 동안 대개 15분 가량 들에 나갔 다가 다시 기침을 하면서 제사상 앞으로 들어오는 행위.

(5) 유교제문(유교식으로된 祝文).

가톨릭에서는 연옥사상과 더불어 조상을 공경하며 기도하는 것이 픽 적극적인 것으로 천당에도 지옥에도 가지 못한 조상의 靈이 천국으로 가 도록 남아 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이 끊임없이 기도한다. 그들은 부모 임 종시부터 發喪祭에 이르기까지 또 3 일,7일,30일에는 부모를 위한 제사 를 드리고 그 후 3년간 대소상은 물 론 계속해서 매년 부모 기일에 제사 드리도록 규정되어 있고 매일 조석으 로 부모를 위한 기도문이 있고 11월 2일은 죽은 모든이를 기억하는 날로 정하고 그날에는 조상 산소에 성묘토 록 되어있다.

1%7년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 희애서 선포한「거룩한 典禮에 관한 憲章」에 의거하여 가톨릭교회는 변천 하는 세계의 시대성, 민족들이 보존 하여온 美風良俗의 좋은 점을 살려 종교의식에 반영시킴으로써 적극적인 시민행동에 참례하기를 규정하고 있 다(전례힌 장 37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