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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월호 (제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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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월호 (제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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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월호 (제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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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월호 (제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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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信仰에서 본 샤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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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巫歌와 그 祝術原理
1978년 1월호 (제 55호)
I. 序 言 巫歌의 원형은 神話이다. 이는 "神話는 祭儀의 口述相關物”이라는 祭儀學派의 명제로부터 자명...

옛 가톨릭典禮와 韓國巫俗
1978년 1월호 (제 55호)
두 죽음의 通過儀禮 비교I가톨릭에는 옛날 라틴 ‘慰靈미사’(Missa Requiem)가 있었듯이 무당의 의식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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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輯 · 샤머니즘과 그리스도敎 - 두 죽음의 통과의례 비교 1978년 1월호 (제 55호)

옛 가톨릭典禮와 韓國巫俗

D. 키스터 (서강대 교수, 신부)

두 죽음의 通過儀禮 비교
I

가톨릭에는 옛날 라틴 ‘慰靈미사’(Missa Requiem)가 있었듯이 무당의 의식에는 죽은 이의 넋을 비는 ‘오구굿’〔惡鬼굿〕이 있다. 전자는 서구의 전통적인 宗敎文化의 독창적 산물이고 후자는 한국인의 宗敎的 創作의 풍부함을 보여주는 산물이다. 지금은 쇠퇴일로에 있거나 이미 사라져 없어졌지만, 둘 다 인간이 이승의 일시적인 존재에서 인간의 최종적 상태라고 믿어지는 저승으로 건너가는 그 어려운 과정을 보다 더 쉬운 것이 되게 하였거니와, 여러 세기에 걸쳐 전승되어온 연극적 행위를 놀랍게 반영하고 있는 의식이기도 하다.

라틴 慰靈禮式은 근본적으로 느리고도 음울한 宗敎舞踊이었다. 거기 사용된 말이며 느리고도 엄숙한 그 動作들은 生과 死의 의미에 관한 ?義的 믿음에 따라 엄격하게 구성되어 있다. '오구굿’ 또는 서울 일원에서 말하는 ‘진오귀굿’은 演劇的 舞踊이기는 하지만 그 엄숙함 속에서도 諧謔을 잃고 있지 않으며 완만하고 퍽 자유스러운 표현동작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影像的이고 잘 짜여진 信仰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역사가 오랜 이 두 慰靈儀式을 관찰하면 근본적인 類似性이 엿보이면서도, 전통적인 가톨릭 사고방식 및 믿음과 한국 巫俗信仰의 사고방식 사이의 중대한 차이가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양자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藝術的 劇的 儀禮節次 사이의 차이는 더욱 현저하다.

예술적으로 구성된 儀式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전통적인 라틴 위령미사는 괄목할 만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그 음악만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레고리안의 단순 소박한 「디에스 이레」(Dies Irae)에서부터 모짜르트의 「위령미사곡」의 바로크식 우아미에 이르기까지 서구음악의 가장 감동적이고 기념할 만한 유산이 담겨져 있다. 이와는 달리 ‘오구굿’에는 劇的 生動感이 탁월하게 넘쳐 있다. 이 생동감은 분방하고 인상적인 劇的?果를 지닌 장면들에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감동을 주는 象徵的 劇的 이미지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II

실존적인 의미로 보면 두의식이 인간의 종국적 상태의 의의를 표현하면서 사용하는 象徵들은 퍽 다르다. 종교적으로 볼 때에 믿음의 對象 역시 다르다. 양편 의식 모두가 인간 존재의 가장 중대한 순간에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그 자리에 능동적으로 나타나서 保佑를 베푼다는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聖事的節次와 劇的媒體를 통해서 그 믿음을 표현하고 보전한다는 점에서도 같다. 또 그 절차와 매체도 서로 전혀 다르지는 않다. 여기서 필자의 ‘聖事的節次’라고 하는 표현은 하느님 또는 神靈이 그 자리에 現存하여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내리고, 아울러 象徵的接觸의 구체적이고 신체적인 표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는 믿음에 기초하는 敬神禮를 가리킨다. 가톨릭 신앙은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근본적으로 같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가톨릭이 이성사적 절차를 구체화한 演劇的儀式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프로테스탄트 형제들보다는 巫俗信仰을 신봉하는 사람들과 더 비슷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사실 프로데스탄트들은 전통직으로 奉讀되는 말씀에만 의존 해오고 있다. 劇的媒體에 의존하는 정도는 무당굿에서 더 현저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가톨릭 미사에서도 그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다. 이 경우 라틴말로 집전하던 예식은 사람들이 일부분밖에 알아듣지 못했었다.

위령미사와 오구굿은 처음부터 매우 다른 象徵들을 구사한다. 그 상징들을 구사하여 亡者가 그의 窮極的 實存狀態로 건너가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징들과 의례적 행동을 둘러싼 感情的 분위기가 다른 데에 누구나 놀랄 것이다.

주로 불교 색채를 띠고 있는 오구굿의 상징들은 대개 밝은 색종이로 만들어진 것들로서 처음부터 생동감과 홀가분하고 명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꽃 특히 연꽃〔溝發速〕, 초롱, 彼岸으로 건너가는 나룻배, 둘레에 꽃 장식을 단 저승에 이르는 가시문, 부처의 화상, 冥府十大王의 화상, 그리고 여러 神靈의 화상들이 등장할 수 있다. 이 상징물들의 儀禮的 역할과 의미는 차후에 밝혀진 것이다. 울긋불긋한 의상이며 활달한 가락이며 소란스럽고도 거친 춤 등은 무당의 굿거리에 그야말로 현란한 생동감을 불러 일으킨다. 예식이 진전될수록 엄숙한 분위기에서 갑작스레 그와는 다른 분위기로 달라지는가 하면, 응어리진 슬픔에서 떠들석하고 명랑한 분위기로 돌변하는 등 感情的 분위기는 굉장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현란한 색깔이며 흥겨운 가락이 독특하다고는 하지만, 그 모든 동작이 이루어지는 곳은 일상생활을 하는 안방이나 안마당과 전혀 다른 바 없다.

그에 비해서 위령미사가 시작되는 典禮場所의 象徵들은 매우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그리스도의 十字架像(돌아가셨고 또 죽음을 정복한 분의 모습이다), 형태가 정해진 祭壇(그곳에서는 그리스도가 죽음에 앞서 거행하였던 만찬이 상징적으로 再現된다), 그리스도와 聖母, 그리고 여러 聖ㅅ과 天使들을 나타낸 聖畵와 聖像이 등장한다. 그리고 전례가 거행되는 장소 또한 평소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空間과는 전혀 다른 곳이며, 주님이 현존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세계, 亡者가 장중하게 건너간 세계를 表象한다. 衣裳은 검정이며 색조는 단조롭다. 쓰이는 음악과 동작이며 모든 움직임은 시종일관 장엄하고 엄숙하다. 생동감은 거의 보이지 않으며, 감정의 강렬한 대조가 나타나지 않을 뿐더러, 유모어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구굿에서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승의 다채로운 視覺과 音響의 세계 속에 죽음을 굳게 정착시키기 위해 예술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것을 거기 집중시킨다. 그러나 전통적인 위령미사는 죽음에 대한 감각을 예술적으로 소유하되 현세의 變化와 感興에서 눈을 돌려 하느님이 시간을 초 월하여 현존하시는 그 장엄한 靜寂을 바라보도록 전개된다.

III

구성면에서 본다면 일반적으로 굿은 일상생활의 구조와 매우 유사한 律動으로 전개된다. 짜임새가 느슨하고 자유자재로 변경될 수 있는 토막극이다. 그렇지만 미사는 주의깊게 짜여져 있고 조직적으로 획일화되어 있으며 예술적 형태를 띠고 있다. 오구굿이나 위령미사나 구성상으로 크게 두 부분 또는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둘째 단계를 달성 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서 치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 단계는 종국적으로 훨씬 중대한 부분이며 거기서 象徵들과 儀禮行爲들이 점차 강도를 더하여 마침내 최종적인 목적을 성취하게 된다.

오구굿 또는 진오귀굿의 전반부는 서로 별 관계없는 일련의 토막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神靈들을 聖事的으로 불러내려 죽은 넋을 옹위하여 저승까지 무사히 데려가 달라고 빈다. 이때에 죽은 넋도 그 자리에 나타나는 것으로 믿고 있다.

다른 어느 굿에서도 그렇듯이 넋을 보우하는 이 신령들 중에는 조상신 이외에 정체가 다소 분명한 신령들로는 '용왕님’ '성황님’ ‘부처님’이 있고 약간 불분명한 ‘가망신’과 ‘별상’들이 있다. 이 신령들이 하강하고 죽은 넋이 나타나 그 자리에 현존한다는 사실을 신앙의 안목에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어느 굿에서나 신령이 내려와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연기로 보여준다. 거기에 어울리는 衣裳을 하고 三枝槍과 假月刀 같은 小品이 등장 하고 실감나는 몸짓을 해 보이며 눈을 끄는 재주를 부린다. 그 연극적 도구들이 무당이 부른 신령들의 강림을 실제로 증명하려는 경우에 迷信的 태도를 유발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굿의 演技的性格이 본연의 기능을 다하는 것은 그것이 신령들의 강림을 立證하는 데 있지 않고, 신봉하는 그 신령들이 강림하여 있다는 것을 상상적으로 눈에 보이게 드러내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무당이 신지펴 神의 말을 할 때에는 참석자들이 무당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聖事的으로 神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다고 믿는다.

죽은 넋을 위해 베푸는 굿의 전반부에서 주요한 거리는 죽은 넋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고 믿는 대목이다. 죽은 넋이 무당의 입을 빌어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아직 살아있는 집안사람에 관련된 생생한 臺詞가 나온다. 죽은 사람이 생시에 하고 싶었던 말이 전달된다. 때로는 죽은 넋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집안사람들한테 품었던 원한이나 불만을 털어놓기도 한다. 고기잡이 갔다가 태풍을 만나 물에 빠져 죽은 젊은이의 넋은 돈 때문에 목숨을 잃었노라고 "돈이 원수다!”라고 모친에게 원망하는가 하면, 고기잡이 나가기 전에 "바다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푸념한 것을 상기시킨다.

넋이 恨을 푸는 이 和解의 대목이 잘 풀려야 굿 전체가 성공한다. 서로 마음을 풀어야만, 살아남은 가족은 그 넋이 끼칠지도 모르는 煞에서 벗어 날 수가 있고, 죽은 넋도 이승에서 자기가 평안히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구경꾼들이 흥미틀 갖고 한몫 끼이고 요란한 劇的인 局面이 이루어지는 여러 거리의 장면을 거치면서 오구굿이나 진오귀굿의 전반부는 여러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와는 달리 전통적인 가톨릭 위령미사의 전반부는 20여분밖에?걸리지 않는다. 예술면에서는 그 과정이 주로 음악에 좌우되게 구성되어 있으며, 신자들이 육체적으로 적극 참여할 기회는 좀처럼 없다. 비록 간결하고 차분한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위령미사 역시 오구굿에서 엿보이는 관심사들과 매우 비슷한 관심사에다 초점을 두고 있다.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의 保佑를 구하는 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 화해ㅡ죽은 넋이 자기 가족과 이루는 가족적 화해가 아니고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종교적 화해一를 모색하는 일 등이 그렇다.

굿에서 그러하듯이, 미사도 처음부터 죽은 영혼이 혼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령스러운 존재들의 호위를 받아 마지막 길을 가도록 배려하고 있다. 확실치는 않으나 권능이 있는 天使들과 우리의 신앙의 조상들, 곧 聖ㅅ들이 그를 호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른 미사도 그렇지만 위령미사의 전반부는 성서의 봉독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에 성서는 典禮가 거행되는 그 자리에 현존하시면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간주된다. 전통적으로는 이 모든 말씀과 노래가 라틴말로 봉독되고 노래되었기 때문에 전례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다른 교본이나 자료를 참조해서 그 내용을 알아 들어야 했으니 그들이 그것을 알아듣는 정도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전통적인 위령미사에서 행하여진 봉독은 한결같이 그리스도가 자기 벗 라자로를 부활시킨 것을 일깨워주고 우리가 죽음을 거쳐간 뒤에 우리도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1 텟살4,17)이라고 하는 위로가 가득한 희망을 표시하는 것이다.

성서 봉독에 곁들이는 詩篇과 다른 노래들은 그 전례 전체를 지배하는 感情的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울러 죽음의 문제를 초월하는 하나의 핵심적 과제를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그것은 죽은 이든 살아있는 이든 간에 죄많은 인간이 하느님과 和解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노래하는 시편과 찬송가는 그리스도가 죽음을 정복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더 중요한 일로서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켰음을 극력 강조한다. 이 화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인간의 가장 두려운 죽음, 하느님으로부터의 終局的 離脫, 인간의 진정한 實存的狀態로부터의 決定的 疏外에서 인간을 구원한 것이다.
전례에 쓰이는 음악은 자연히 슬픔과 喪失의 근본 감정을 띠면서 罪實과 겸손, 심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慈悲에 대한 신뢰를 나타낸다. 입당송의 노래는 참으로 적나라하고도 간절하다. 송가는 "나는 죄중에 생겨났고 내 어미가 죄중에 나를 배었나이다"(시편 50,5) 라고 노래한다. 附屬歌 「디에스이레」(Dies Irae)는 음악상으로나 감정적으로 전반부의 절정을 이루는 것으로서, 죄에 대한 심판의 공포에서 시작하여 “십자가로 나를 구한” 그리스도의 和解能力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맺는다. 그리하여 전례에서 거행되는 일의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음악들은 하느님과의 和解를 바라는 願望의 계기를 만들어준다. 물론 그 화해가 전례적으로 成事되는 것은 후반부의 중심을 이루는 상징행위인 聖餐에서다.

IV

전통 위령미사나 죽은 넋을 위해 베푸는 굿이나 후반부의 절정을 이루는 상징적 행위인 예식의 주요부분은 聖事的儀式에 의해서 죽은 이를 그 넋이 소원하는 궁극적인 상태에 이르게 하는 일이다. 미사에서는 이 일이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어지며, 굿에서는 巫祖神(무당 본인 의 祖上神)의 신통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미사에서나 굿에서나 반드시 적대세력의 가공할 세력을 먼저 상기시킨다. 그 세력은 죽은 넋이 생전의 行業을 엄중하게 심판받을 때 그가 마땅히 가야 할 終局的인 비참한 처지로 끌고가려고 술책을 부린다고 한다.

전통적인 위령미사에서는 祭物로 드릴 빵과 포도주를 준비할 때 올리는 奉獻頌에서 이 사상이 드러난다. 미사의 본기도에 나오는 "그를 원수의 손에 넘기지 마시고”라는 모티브를 살려서, 이 노래는 ‘영광의 왕’ 그리스도의 권능을 기리면서 상상력 풍부한 언어를 빌어 기원한다. "죽은 모든 신자들의 영혼을 지옥벌과 깊은 구렁에서 구하소서. 그들을 獅子의 입에서 구하시어??????”

미사에서는 이 모티브가 간결하게 끝나고 말지만 서울 일원에서 행해지는 진오귀굿에서는 이와는 다르다. 극적인 생동감과 구경꾼의 운집과 퍽이나 우스꽝스러운 笑劇的亂暴을 보이면서 이 모티브는 길고 긴 장면을 펼치게 된다. 무당을 통해서 冥府十大王의 세 使者가 내려온다. 그 사자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섭고 비참한 죽음과 심판의 장소로 죽은 넋을 끌고가려 한다. 흰 종이로 상징되는 죽은 넋은 祭床 위에 놓인 壽發蓮에 불잡혀 매어져 있디-. 무당의 시늉에 대해 가족은 죽은 사람에 대한 정성의 표로 격한 몸짓을 해가면서 그 넋을 지키는 시늉을 해 보인다. 으시시하고 소름끼치는 그 가락에다 때때로 깔깔거리는 웃음을 섞는 품이 가히 중세기 유럽의 ‘악마놀음'의 장면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죽은 넋이 집안사람들에게 갖는 원한과 불만은 전반부에서 이미 풀린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죽음의 무시무시한 면모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죽은 이를 위해서 베풀어지는 굿은 이제 神話的 樣相을 띠는 종교적이고 실존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진 장면들로 접어든다. 이어서 巫祖 神이 죽은 이를 저승으로 데려가는 威力을 보여주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 대목이 굿거리의 절정을 이룬다. 무당은 신화적 이야기를 빌어 죽음을 물리치는 巫祖神의 威力이 나타난 유래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이 줄거리가 짧게 끝나는 일도 있지만 때로는 여러 시간에 걸쳐 엮어지는데 그것은 「바리 공주」라고 하는 原初的 巫祖神의 설화이다.

이 설화는 여러 형태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대강 줄거리를 엮으면 다음과 같다.

아들이 없는 임금이 일곱째 딸을 낳자 화가 치밀어서 그랬던지, 용왕님에게 제사를 올리자고 그랬던지 딸아기를 바다에 쳐넣어 버렸다. 그러나 용왕님 또는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자비로 바리공주('버린 公主’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는 죽지 않고 父王의 궁으로 살아 돌아온다. 그때 부왕은(때 로는 왕비까지도) 병으로 죽어가는 중이었다. 부왕의 목숨을 건질 수 있는 不死藥이 있었지만 그것을 구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효심이 지극한 바리공주는 그토록 어려운 장애를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부왕을 구하겠다고 바리공주는 멀고도 험한 길을 떠났다. 나룻배를 구하여 黃泉江을 건너 그 菜을 지키는 神靈이 살고 있는 땅으로 갔다. 일설에는 그 약이 東海 龍王의 如意珠라고도 하고, 다른 설에는 ?花에서 흘러 나오는 藥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공주는 당장 그 영약을 가지고 돌아올 수가 없었다. 먼저 그 신령이 요구한 대로 그와 혼인을 맺고 여러 아들을 낳아준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보니 부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하지만 공주는 영약을 써서 아버지를 소생시킨다. 슬픔과 괴로움은 기쁨으로 변한다. 바리공주가 남편과 함께 돌아가는 흥겨운 장면에서 이야기는 끝난다.
바리공주는 신령이 된다. 혹은 아무도 몰랐지만 실은 이제나 저제나 항상 신령이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원초적인 巫祖神이다.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는 상상이 풍부히 담긴 說話로서 인간 행실의 뜻 깊은 귀감을 보여주거나 인생의 가장 중대한 사건, 여기에서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해석하는 본보기를 마련하는 데 의의가 있다.

신화는 종교적 기원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들을 다루는 것이 예사다. 역사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는 없지만 인간 행동의 중대한 類型이 되는 것들, 말하자면 여러 세력들이나 사건들을 취급한다. 이 신화에서는 인간이 죽음을 거쳐 평안히 저승으로 가도록 힘쓰는 무당의 능력과 영험 이 다루어졌다. 바리공주 설화의 강렬한 상상적 구성은 그 뜻 깊은 도덕적 실존적 차원으로 미루어 가히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유형과 일치한다고 보여진다. 다만 크리스챤들은 그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알고 또 신학적으로 이해한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효성으로 무릅쓴 온갖 고난과 역경의 도덕적 차원이라든가, 실존적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능력을 손에 넣었다든가 하는 사실로 말미암아 죽음이 이제는 그 무서운 힘을 잃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예수가 보여준 삶과 죽음의 유형과 바리공주 설화의 구조는 비슷하다고 보여진다. 

그렇지만 중대한 차이도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을 신봉하는 크리스챤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당신 아버지께 대한 그리스도의 효심이 하느님 아버지를 향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권능 역시 죽음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중요한 罪를 쳐부수는 데까지 미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분리시키고 인간의 진실한 궁극목적을 등지게 만들 수 있는 罪까지도 인간을 절대의 공포로 몰아넣던 그 위력을 잃게 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궁극적 두려움을 잃은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위령미사나 오구굿이 거의 비슷한 죽음을 통해서 최종적 상태로 건너가는 일의 실존적 의미와 그 최종적 상태 자체가 지니는 의미는 매우 다르며 그 표상적 상징들도 퍽 다르다.

 V

다른 미사와 마찬가지로 위령미사에서도 단연 지배적인 상징행위는 聖餐이다. 그 最後?餐은 감사와 봉헌과 희망의 정신으로 거행하는 聖事的 再現이다. 전통적인 위령미사에서는 전반부에서 참석하는 사람들의 심중에 하느님과 화해할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고 후반부 첫머리에서 마련된 빵과 포도주라는 상징적 예물봉헌이 있고 나면, 전례는 급진전되어 성찬의 聖事的 ?行이라는 절정부분으로 들어간다. 오구굿에서 볼 수 있는 장황한 신화적인 이야기 대신에, 간결한 感謝序文經을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성찬을 거행하는데 필요한 驚異와 謝恩의 情을 충분히 유발하고 남는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된 부활의 희망이 우리 위에 비치오니???”하는 한 마디로 죽음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다시 한번 강렬하게 상기되는 것이다. 이어서 司祭는 최후만찬에서 이루어졌던 그리스도의 自己奉獻을 성사적으로 再現한다. 이때에 그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봉헌은 죄를 극복하는 행위라고 선포했던 그 말씀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니라.”

그후 화해의 필요성을 또 한번 상기시킨 다음에 참석자들은 聖事的食事에 초대받는다. 이것이 전례 전체를 총망라하여 會象(신자들)이 육체적으로 전례에 참여하는 첫번 행동이다. 이리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된 일치를 도모하는 영원한 잔치에서 위령미사의 전례적이고 상징적인 절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잔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사람들은 지금 聖事的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고 또 화해하게 되는 것이고 죽은 이들은 보다 완전하게 낙원에서 그 일치를 향유한다고 믿는다. 끝으로 유해가 성당 밖으로 운구되어 나가는 동안에도 기도가 반복된다. 그가 천사들의 호위를 받아 그의 최후 안식처인 하느님의 처소에 이르기를 빌며, 방금 교회에서 이뤄진 聖事的 상징의 힘을 통해서 그 소원이 틀림없이 성취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위령미사의 핵심적 행사가 이처럼 간결하고 언제나 똑같은 일련의 풍부한 象徵에 기대어 있음에 비추어서 오구굿의 중심행사는 시간도 길 뿐더러 현란한 극적 거리들도 각양각색으로 전개된다. 그 거리들은 주로 다양한 불교적 상징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바리공주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맺어 져 있다. 그리고 이 거리들은 죽은 이의 '최후의 상태’ 자체보다는 그 최후의 상태로 '건너감’에다 초점을 두는 것 같다. 무당이 밝은 색종이로 불교식 초롱을 마련해 두고는 죽은 넋이 등을 타고서 별나라나 빛나는 세상으로 올라간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彼岸으로 타고 가라고 색종이 나룻배를 내주기도 한다. 무당이 덩실덩실 춤추는 걸음으로 죽은 이의 손을 잡고 祭床을 돌면서 그의 갈길을 막는 장애를 피하게 이끌어준 다음 가시문을 지나 저승으로 바래다 주는 경우도 있다. 무당이 칼을 써서 넋을 묶은 고(매듭)을 푸는 시늉을 상징적으로 해보이는 일도 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은 무당이 '중디’ 때로는 ‘佛事 다리’라고 하는 긴 천을 깔아놓는 절차가 있는데, 그것은 저승길을 상징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무당은 그 천을 밀고 힘껏 달려감으로써 천을 가르면서 나아가는 행동을 해 보인다. 그 동작은 저승으로 향한 길을 가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과 함께 이승의 삶을 아주 여의고 떠나가는 것이 애끓게 슬프다는 것을 표시한다. 때로는 무당이 초롱과 나룻배를 먼저 통과시킨 다음에 장대 위에 꽃을 둘러 들고서 엄숙하게 또 천천히 천을 찢어 나간다. 그 장대는 聖事的으로 죽은 넋이 실려 있는 것은 표시한다. 이때에 천을 찢는 상징적 행동은 집안식구들과 영이별하는 슬픔과 더불어, 천신만고끝에 한 인생이 花冠을 쓰는 마지막 경지에 도달하는 크나큰 安息을 아름답고 극적인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죽은 이가 저승에서 산 사람을 돕겠노라는 약속을 더러 하는 수가 있으나 굿에서 보이는 극적 상징들로 미루어 평안과 빛이 흐르는 세상에서 살아있는 다른 가족들과의 접촉이나 상면이 이뤄지리라는 암시는 없는 듯하다. 오구굿의 절정을 이루는 상징적 행동은 위령미사의 祈願과는 반대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위령미사는 전례 전체를 통해서 죽은 이가 "길이 평안함과 영원한 빛"을 누리도록 기도하거니와 성찬이라는 일치의 상징을 통해서 그 기원은 최종적으로 具現을 본다. 위령미사의 궁극직인 상징이 인간 실존의 궁극적 본질은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사람과 일치를 이루는 것임을 강조하는 데 반해서 오구굿의 상징직 행위들, 그중에서도 천을 가르는 장면에서 인간 실존의 궁극적 본질은 離別이라고 암시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경신례와 신앙, 즉 그리스도의 놀라운 권능이 인간을 窮極的 疏外에서 어떻게든지 구원하리라는 사상과는 너무도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VI

전통적인 위령미사의 절정을 이루는 象徵的 行爲와 오구굿의 상징적 행위를 비교해볼 때에, 전자는 감정적 분위기가 경쾌한데 비해서 후자는 억누를 길 없는 서러움을 담고 있으려니 추측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라틴 위령미사의 가장 적극적인 감정도 슬픔에 찬 安息에서 그친 다. 그와는 달리 오구굿에는 색깔과 익살과 생동감, 말하자면 인생에 대한 격렬한 열정과 기쁨을 표현하는 감정적 분위기가 깔려있다.

오구굿 전편을 통해서 이 분위기는 두가지 놀라움을 자아낸다. 이상하고 두렵고 呪術的인 것들 앞에서 소박하고 심지어 어린 아이들같은 매혹 거리를 보이는 것이 그 하나다. 일체의 비판적 감각을 마비시키고 마는 이 매혹은 迷信으로 유도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어쩌면 문화적인 정체를 의 미할지도 모른다. 다른 놀라움은 흔히 보이지는 않지만 마지막 상징적 장면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신비로운 矛盾들, 인생의 아름다움과 고통이라는 모순에 대한 심원한 경외감이다. 이 경외감은 모든 인간 문화와 창작의 토대가 된다. 이 두번째의 놀라움, 특히 꽃으로 둘레가 장식된 장대를 들고 천을 가르는 의식에 나타나는 경외감은 위령미사의 장엄한 그레고리안 성가와 그리스도의 성찬이 재현되는 순간의 엄숙한 침목에서 풍기는 감정과 대단히 흡사하다.

전통적인 위령미사는 느릿한 무도 형태며 지상의 것이 아닌 정교한 음악이며 장중한 건축 공간으로 말미암아, 이 경외감에다 하느님의 영원한 현존의 曙光, 일상생활에서 온전히 격리된 만세상의 曙光을 비추어 주는 듯하다. 그와는 다르게 오구굿은 요란한 상징적 小品들이며 거칠고 다양한 춤과 가락이며 일상의 생활과 똑같은 장면 때문에 이 경외감을 이승의 매일의 생활을 배경으로 해서 단단히 고정시킨다. 그런데 이 두가지 전례에서 경외감은 구체화된 형태로 나타난 신령스러운 존재에 대한 신비의 지각에서부터 시작된다. 미사를 드리는 신자들에게서 이와 같은 신비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 안에서 드러나며 무당굿에서는 순수하고 상상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한국 무속과 같은 고대 전통이 갖추고 있는 풍부한 儀式的資源을 면밀히 연구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것은 비단 한국 가톨릭교회뿐만은 아니고 전체 교회이리라 여겨진다.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이 예배에 있어서 '말씀'에 비중을 두는 사실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것을 현재 진척중인 典禮刷新의 노력에다 여러 모로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쇄신 자체가 예술적으로 풍부한 우리 가톨릭의 전례적 전통을 잃게 하는 경향을 띠어왔다. 그 결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제시하는 일이 빈약하고 무기력하고 때로는 따분하기까지도 한 전례의 틀이 되고 말았다. 무당굿은 여러모로 비평할 수 있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儀式的으로 극적으로 풍부하고 활력있는 무당긋이 따분하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筆者 原名 : Rev. Daniel Kister, 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