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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信仰職制委員會 하나의 聖洗,聖餐,聖職
1978년 1월호 (제 55호)
라. 여자의 서품 (64)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리스도의 직무에 대한 그들의 특수한 공헌이 갖는 완전한 의...

우리의 國家生活? 軍政 3년반을 평가하는 칠레主敎國의 司牧的反省과 指針
1978년 1월호 (제 55호)
1. 倫理的 司牧的 展望 다른 여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는 현재 過渡期를 겪고 있다. 우리는 우...

VI. 信仰의 內容 一
1978년 1월호 (제 55호)
1. 見解의 衝突 속에서의 信仰告白 평범한 그리스도신자에게 그의 信仰에 관해서 물으면, 그는 대개 특정...

인천교구 사목방안
1978년 1월호 (제 55호)
I. 서 언 1961년 서울 교구에서 분리, 設定된 仁川敎區는 경기도 인천시와 부천시 그리고 강화군, 김포군...

離婚者와 無?婚姻者들의 司牧
1978년 1월호 (제 55호)
여기서 말하는 사목활동이란, 혼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다시 聖事에 참여하도록 그들의 처지를 원상복구 ...

信仰과 體驗
1978년 1월호 (제 55호)
뻔한 일이거니와 經驗 내지 體驗이라고 하면 그것은 他Λ으로부터 간접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本人이 직접 ...

마르코복음서 개관
1978년 1월호 (제 55호)
예수께서는 대략 기원 후 27년부터 30년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구원을 이룩하셨다. 그러다가 그분은 유대교...

그리스도信仰에서 본 샤머니즘
1978년 1월호 (제 55호)
I. 序 言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科學과 機械技術의 경이적 발전에 힘입어 前世紀에는 상상...

韓國의 巫歌와 그 祝術原理
1978년 1월호 (제 55호)
I. 序 言 巫歌의 원형은 神話이다. 이는 "神話는 祭儀의 口述相關物”이라는 祭儀學派의 명제로부터 자명...

옛 가톨릭典禮와 韓國巫俗
1978년 1월호 (제 55호)
두 죽음의 通過儀禮 비교I가톨릭에는 옛날 라틴 ‘慰靈미사’(Missa Requiem)가 있었듯이 무당의 의식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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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1978년 1월호 (제 55호)

信仰과 體驗

G. 비 이 머

뻔한 일이거니와 經驗 내지 體驗이라고 하면 그것은 他Λ으로부터 간접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本人이 직접 획득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몸소 겪는 것, 스스로 보는 것, 자기가 느끼는것이라고 따라서 왈가왈부할수 없는, 異論이 있을 수 없는 嚴然한 事實이라고. 오늘날 경험은 實在를 파악함에 있어서 높은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더구나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모양의 實在把握法이 특별히 중요한 구실을 한다. 되도록 널리 세상을 배워나가는 길에 있는 그들이므로 어떻든 ㅡ見, 경험이란 간접으로만 얻는, 들어서만 아는, 그런 것이 아니라 實在와의 直接 接觸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그런데 또 一見, 信仰으로 말하면 사정이 사뭇 달리 나타난다. 우리가 信仰告白에 의하여 알고 있는 바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구약과 신약,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啓示에 대한 應答이다. ‘보이지 않는 빛’ 속에 사시는 하느님이기에 그분은 워낙 感覺的인 경험이 미치지 못할 곳에 계실 뿐이다. 하느님이 우리네 인간을 愛顧하신다는 것, 하느님이 우리의 歷史 안에 役事하신다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의 소식을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傅達된다. “바라는 바를 신뢰하고 보이지 않은 바를 확신하는 것’’(히브 11,1)이 신앙이다. 신앙의 證言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 신앙 내용이다. 우리는 몸소 하느님을 겪어보지는 못하는 채로 신앙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비이트 祝祭니 틴에이지 파티니 週末 캠핑이니 하는 데서는 그리스도교인이 모여 하느님을 예배 하는 곳에서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그 實感의 密度가 짙게 나타난다. 모든 것이 儀式으로 규율되고 매사가 한결 같은 節次에 따라 진행되며 그래서 흔히는 참여자들이 서로도 하느님도 겪어보지 못하고 마는 그런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신앙은 삶과는 거리가 먼 姿勢요 경험은 삶과 직결되어 있는 實行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으뜸가는 皮相的 관찰의 소산이다. 또 피상적인 그만큼 널리 蔓延된 先入觀이다.

신앙과 체험과의 관계를 좀더 정확히 파악하자면 문제를 세분해서 다룰 필요가 있다. 여러 思考過程이 필요 하다는 말이다. 이들 사고과정은 3개의 命題로 요약될 수가 있거니와, 이들에 대하여 계속 一目瞭然한 槪觀을 유지해나갈 수 있게시리 나는 아래에 부분적으로도 요약을 시도하면서, 그것도 문제의 전체 범위내에서 주요한 면만을 선택하면서 설명해 나가기로 한다.

1. 체험은 인간이 여러 분야의 實在 와 마주치는 過程 및 그 結果다.

우선 經驗課 하나 :

내가 국민학교 7학년에 올라가던 날의 일인데, 한 반에 키가 훌쭉한 13살 난 아이가 있었다. 약간 신경이 예민해 보이고 얼굴이 창백한 편이었으나 어떻든 생각과 의견이 풍부한 소년이었다. 곧잘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고 주어진 대화에 자기 의견을 발표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급우들은 그의 말에 유심히 귀를 기울였고 나도 그랬다.

마침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수업이 끝난 다음 담임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다. 이 소년에 대해서.一그는 우리 학교로 돌아온 지 1년만이었다. 부모가 그를 김나지움에 보냈었던 것이다. 큰 기대를, 그러나 본인 자신의 그것과는 다른 기대를 걸고서. 그는 그 학교의 엄격한 규율생활을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 섬세하고 민감한 아이였고, 그래서 2년 만에 다시 옛 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처음 급우들은 좀 고소하다는 기분들이었던 모양이다. 부득이 어느날 담임선생은 모두들과 함께 이 문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바른 기대와 그른 기대에 대해서. 행복을 얻으려는 올바른 노력에 대해서ㅡ 나는 이 소년이야말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자기에게 실망하지 않고 자기를 믿어주는 선생님을 만났으니까.

소년이 겪은 일들의 여러가지 解釋:

이 例話에 관한 한.ㅡ소년은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다. 한 특수계통 학교의 요구조건에 적응하지 못한 일, 옛 학교로 되돌아온 일, 친절과 이해심으로 자기를 대해주는 한 인간을 발견한 일 따위. 그가 겪은 일에 대한 評價들도 여러가지였다. 혹은 그가 기대를 저버렸다 했고 혹은 그가 너무 민감한 아이라 했다. 혹은 마땅한 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혹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담임 선생은 그러나 소년이 겪은 개개의 일들을 크게 종합해서 그 의미를 찾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 있어서 학교가 곧 幸福의 基準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나가 일터를 얻어 적응하기 위한 여러 수단의 일부일 뿐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 各自다. 각자가 자기 능력에 따라 행복을 추구할 수가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럼으보써 마침내, 나도 인정받고 있다, 나도 계속 노력하면 된다, 나도 장래가 있다 하는 체험이 이루어진다.一걸국, 자기가 겪은 일들의 하나하나는 평가를 통하여 종합됨으로씨 비로소 체험이 된다. 분명히 해두자. 체험이란 전혀 특정한 어떤 解釋範疇, 어떤 觀點에 의하여 자기가 겪은 일들을 평가하는 해석이다.

위의 보기에서 첫째 관점이 의미하는 것은, ‘성공이 전부다, 학교는 성공을 위한 就業手段이다’라는 이론이 된다. 이 이론으로 소년이 겪은 일들을 평가하면, ‘학교가 무섭다, 산다는 것이 두렵다’하는 결론이 나온다.

둘째 관점: 어떤 基準化된 成功像보다는 인간의 자기 능력에 따른 自己開發이 더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소년의 경우를 해석할 때에 나오는 결론 : 결정적으로 중요한 목적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사가 知識傳達者로서 만이 아니라 敎育者로서, 곧 인간으로서 학생과 만나고 있을 때에 학교는 이 목적에 寄與할 수가 있다.

체험과 그 變化;

위의 예에서 우리는 또 다른 경험의 一面을 찾아볼 수가 있다. 새 선생님과 만나게 된 일로 인하여 소년의 종래의 체험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이 우연한 만남으로 인하여 더 정확히 말해서 소년이 자기가 겪은 일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해석범주에 의문이 제기되고 그래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경험이란 一面 인간이 어떤 사물과 만나고 있는, 어떤 사물이 인간과 마주치고 있는 하나의 過程이요 進行이다. 그 동안에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곧 世界觀은 아마도, 흑은 確認되고 深化되거나 혹은 오히려 問題視되면서 변화의 계기가 주어질 것이다. 여기서 그 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과거의 자기 경험을 이유로 새로이 겪는 일, 우연히 만나는 일들을 外面해버리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는 나의 경험이 있노라고. ㅡ 이런 경우에는 경험이 동시에 學習能力을 封鎖해 버리는 역할도 한다. 實踐面에서만이 아니라 理論面에서도 경험이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체험 ㅡ또 일면 定着의 結果 ;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께서 당시의 사람들과 상종하실 때의 이야기에서 예를 들자. 자기네들의 체험의 틀 안에 매여 있던, 하느님과 그분의 役事하심에 대한 자기들의 해석에 붙박혀 있던, 그래서 새것을 배울 能力 내지는 意思가 없던, 그런 사람들.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셨을 때를 보라. 사람들의 관심사는 센세이션을 目擊하자는 것이었다. 다리병신이 걷고 장님이 보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그런 일이라면 신이 났을 그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러나 그런 기적을 거절하신다.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ㅅ間愛가 경이롭게 표시되어 온 表徵을. 權能의 壯觀을. 예수께서 나자렛 사람들의 기대에 응하기를 회피하심은, 당신을 위하여 또 당신을 통하여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그들의 解釋基準에다가 同化시키기를 피하기 위함이다. 동화는 커녕 예수께 있어서 하느님이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대신하는 분이다. 비단 죽음에서 해방되는 길일 뿐 아니라 동시에 아버지이시다. 이것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럴 수 있는 기회에 마음을 열어놓고 있는 사람, 자기자신 내지는 在來의 期待에 의하여 固定觀念에 빠져있지 않은 사람이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기대와는 다른 분이라는 것을 특별히 뚜렷이 보여준 예로서 포도밭 주인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포도밭 주인에 의하여 하느님의 행동 방식을 示唆하신다: 하루 일이 끝나자 주인은 제각기 전혀 다른 시각에 포도밭으로 와서 일을 시작한 일꾼들 에게 모두 꼭같은 품삯을 주어 나간다. 맨 먼저 온 일꾼이 골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 주인이 묻는다. 내가 착한 일을 해서 네 눈에는 샘이 나느냐?

2. 신앙은 하느님의 自己啓示를 체험함으로 인한 結果 및 하느님을 체험하고자 하는 開放된 姿勢다.

간략히 개관하자.ㅡ순전히 外面으로만 보면 아브라함의 史話에 나타나는 사실은, 한 인간이 드러난 이유도 없이 자기가 살아온 환경을 벗어나온 氏族과 더불어 전 재산을 가지고 未知의 목적지를 향하여 길을 간다는 이야기다.

內面의 動機 : 그는 자기가 살아온 주위의 사회가 雜神들을 섬기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그래서 하나의 洞察 ㅡ 우리는 이것을 啓示라고 부를 수 있다ㅡ에 의하여 하느님을 인식한다. 한 분이신, 그리고 인간을 부르시는 분이신 하느님을. 아브라함은 자기가 편안히 몸담아온 사회를 떠나야 한다는 召命을 스스로 체험한 것이고 그래서 길을 떠나는 것이다.

이스라엘 遊牧民 部族들의 역사에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갖은 惡條件을 무릅쓰고 목적을 성취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놀라운 모험을 감행하면서 파라오治下의 에집트 노예생활을 脫出하고, 정처없이 광야를 헤매면서도 滅亡하지 않고, 끝내 한 땅을 차지하고ㅡ그것도 이미 原住民이 있어서 기진맥진한 유목민으로서는 결코 정복하기가 쉬울 일이 아니었던 領土를. 이처럼 고마운 生存을체험한 데서 나온 해석범주: 하느님의 이름은 "내가 있노라一너희를 위하여 여기 있노라.”
예언자들의 역사는 다양하고도 각별히 중요하다. 그것은 그들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던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현실사건에 대하여 해석범주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언자들도 그 시대, 그 백성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 일어난 일, 그 백성이 겪은 일들을 두고 그들이 표명한 해석에는 사뭇 특이한 관점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약속들이란 깨뜨려지기 쉬운 법이며, 이스라엘 民族은 자기들을 하나의 백성으로 創建하시었고 자기들의 생존을 保佑하시는 하느님을 배반하여 타락하고 있다는. 회개하여 새마음을 가지라고 호소하는. 파멸의 와중에서 용기를 북돋우고 역경 가운데서 미래를 약속하는.

예수의 역사는 이 백성의 체험과 직접 연결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ㅡ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ㅡ중요한 것은, 갖은 고난과 온갖 파멸의 모든 몰락을 꿰뚫고 끊임없이 救援의 사건이 連發하며 미래의 약속이 存續한다는 요컨대 야훼는 忠實하시다는 체험이다. 이 체험을 향하여 또 이 체험을 변화시키면서 예수의 복음이 도래한다.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가까이 계심이 현실의 사건이 되고 있다는.

바야흐로 하느님이 목전의 사실로 가까이 계시다는. 지금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 자신이 체험할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나 계시다는.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의 이 주장이 예수 자신에 의하여 實證되었다는 것을 직접 目擊者로서 證言한다.
그 실례로서 우리는 몇 마디만 기억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 “이 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일찌기 한번도 없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느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가 있는가?” 특히 바오로의ㅡ이미 목격자로서의 체험까지도 넘어선 경지의 一신앙고백 : “나는 내가 누구를 믿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이와같이 예수라는 경험적 사건에 의하여 하느님 내지는 신앙에 대한 종래의 해석범주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도 구약에서 유래하는 이 해석범주가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다.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성취된다. 특별히, 부활에 관한 말씀에 의하여 고통과 각자의 죽음이라는 운명 의 의미가 밝혀짐으로써.

새 解釋範崎를 받아들이라는 要求 :

지금까지 보아온 바로써 결국 신앙이란 하느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체험의 소산이라고 이해되거니와, 이것은 喚言하면, 바로 열두 弟子와 모든 使徒들과 福音史家들이 직접 우리에게 새 해석범주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나중에 작성된 요한 1서에는 이 점이 序 頭에 특별히 明示되어 있다: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처음부터 있었던 것을,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을, 우리가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본 것을”ㅡ그러니까 직접 체험한 온갖 것을ㅡ”우리가 또한 여러분에게도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고 있는 親交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징들도 수없이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고 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

그리스도교 신앙은 길고도 세밀한 체험과정의 소산이다. 실재에 대한 어떠한 해석범주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소식만큼 역사적으로 뚜렷이 실존적으로 파악되는 것은 없다. 따라서 또 그만큼 이 소식은 이 체험의 基礎에 스스로 참여하라는, 이 범주 안에서 실재와 사회와 자기의 삶을 해석 하라는 유달리 밀도짙고 충동적인 요구를 내포하고 있다.

3. 인간의 삶이라는 영역은 하느님의 役事하심이 체험될 수 있는 곳이다.

마지막 세째로 생각할 특별히 중요한 우리의 관심사는, 신앙이란 비단 역사 안에서 하느님에 관한 질문과 대답들에 관계해온 긴 體驗傅統의 所?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예수께서 우리의 삶을 위하여 해석의 열쇠를 주셨다는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기회들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환언컨대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의 생애와 운명과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갖가지 일들이 얼마나 뜻있고 의미심장한가를 말할 수가 있다.

여기서 出發點으로서 나는 (칼 ? 라너와 더불어) 이해하고 있거니와,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가장 깊이 그 뿌리에서부터, 가장 깊은 인격의 중심에서부터, 항상 또 계속 하느님에 의하여 지탱되며 움직여지고 있다. 또 이 基木前提의 '당연한 귀결로서, 우리가 하느님의 意志와 役事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그리스도교 전통으로 恩寵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 그것은 우리가 이 삶의 최후의 깊이에까지 이르게 되는 곳에서라면 어디서나 체험할 수가 있다.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은 그러므로 여늬 삶과는 다른 곳에서나 일어나는 체험불가능한 특수현상이 아니라 "전혀 단순히 靈的 被造物이 겪고 행하고 당하는 모든 일들의 궁극의 깊이요 근본일 따름이다. ?????그러니까 웃고 울고, 책임을 지고, 사랑하며 살고 죽고, 진실을 신뢰하며 이웃에 대한 이기심을 깨뜨리고 온갖 희망에 기대를 걸고, 日常의 어리석은 짓들로 인한 불쾌한 일들을 태연히 웃어넘기고, 되도록 침묵을 지키고, 이 마음의 침묵으로 인하여 자기  안에서 남에게 대하여 싹트는 惡意가 밖으로까지 자라나오지는 못하여 이 마음의 무덤 속에서 죽어가게 되는, 한마디로 인간이 자기의 삶을 살아가되 자기에게 바람직한 그대로, 늘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마음의 절망과 이기심에 대항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모든 일들. 거기서 은총은 곧 사건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행위가 그 궁극의 깊이와 완성에 이르는 곳에서라면 어디서나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거니와, 이것은 뒤집어서 말할 수도 있으니, 곧 복잡다단한 우리의 삶은 계시를 통해서 비로소 그 의미가 충족됨을 체험하게 된다. 예컨대 고통이란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또다시 칼?라너는 지적하고 있거니와, 성체성사가 이 문제를 밝혀주고 있다. 성체성사의 계시가 아니었던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위하여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회피하거나 묵살해 버리고 말았을 이 문제를.

“세계와 그 역사는 죽음과 희생을 숨쉬고 있는 처절하고 비장한 典禮다.?????하고많은 사람들이 나고죽는 역사, 한편으로는 천박함과 어리석음과 모자람과 미움?????이 가득하고 또 한편으로는 말없이 자기를 바쳐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흥하거나 망하거나 죽기까지 책임을 다하는 경신이 충만한 역사, 이 거대한 역사의 온 길이와 너비안에 그야말로 世界의 典禮가 주어져 있다. 그것도 하느님의 아들이 에오라지 당신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전례가 바로 여기에 속하게시리. 바로 여기서, 이 세계라는 은총의 근원에서 나오게시리. 바로 이 전례의 ?頂이 되게시리???"

“그리하여 한 사람이 미사에 간다. 그는 많은 것을 풍부히 알고 있다. 자기자신의 삶을 계속 등장시키고 있는 드라마인 세계의 드라마를. 하느님의 喜劇과 悲劇을. 그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목젖을 올리면서 물끄러미 죽음을 바라보고 그리고 안다. 이미 자기 안에도 이 운명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그는 자기 안에서 피조물의 한숨을 느낀다. 보다 감당하기 쉬운 미래를 갈구하고 있는 세계의 탄식을. 그는 하나의 政治家의 책임감을 스스로 느낀다. 정치가들이 未知의 장래를 향하여 渾身의 勇斷을 내려야 할 때에 느끼는 그런 책임감을. 그는 다소나마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영롱한 미래의 희망을 안고 기뻐하는 어린이들의 웃음을. 배고픈 어린이들의 울음을. 병자들의 고통을. 배신당한 사랑의 허탈을.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진지한 냉정을. 인간 해방을 위 하여 싸우는 투사들의 엄숙한 강인성을. 혹은 만일 그가 이 인류의 온 역사를 지금 여기의 현실로 맞아들일 여유가 없을 만큼 껍질만 남은 메마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래도 그는 알고 있다. 이 原始의 曠野와 같은 메마른 마음일 망정 다시 한번 애절히 탄식하면서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으로 채워지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만일 숨어있던 세계사의 본질이 마치 흥분과 마취를 동시에 일으키듯이 차기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올라와서는 자기 마음의 大地를 氾濫하게 된다면, 그래도 그는 놀라지 않는다. 이 또한 모두가 은총의 체험이기에 否認하는 자에게는 審判이 되고 是認하는 자에게는 미래의 祝福이 되어온 역사를 꿰뚫고 있는 은총, 바로 예수의 십자가에서 이미 다시는 잃을 리 없는 승리에 이르러 있는 은총, 그런 세계의 은총의 체험이기에. 그는 믿으면서 체험한다. ㅡ이 십자가는 오늘도 역시 현실임을. 모든 역사가 끝날 때까지 현실로 남아있을 것임을.”
이리하여 우리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을 愛顧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소식이 계시와 은총에 의하여 증명했고 또 증명하고자 하고 있는 바이거니와, 이 소식이 우리들의 세대와 미래에 새로이 의의를 얻게 되자면 모름지기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체험으로 이를 실천해야 한다. 단지 우리 조상들이 근거로 삼아 살아온 신앙고백만으로는, 공식적인 전차로서의 聖事들만으로는, 의무적인 제도로서의 미사만으로는 형식적인 실천으로서의 예수의 回想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름지기 이 모두에 의해서, 그것도 이 모두가 인간의 삶을 통하여 경험적으로ㅡ감각적으로 파악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포함해서ㅡ실현되고 있는 한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본시 어디서 오며 우리들 각자의 삶과 사회의 生活史와 우주의 운행이 장차 어디로 향하는가를 터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체험없는 신앙은 역사적으로 흥미롭기는 하나 죽은 형식이다. 신앙없는 체험은 갖가지 삶의 片鱗들은 수없이 겪어가기는 하나 의미의 종합이 없는 과정이다.

청소년을 위한 어느 주일미사의 말씀의 전례에서 한 젊은 시인은, 경험을 갈구하고 체험을 동경한다는 것이 크게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일과는 사뭇 대조적인 관계에 있음을 표현한 일이 있다.삶에 대한 해석의 視野로서 존재하는, 신앙을 의미하는, 그리고 시인이 幸福이라고 부르고 있는, 巨視的인 삶의 意味追求라는.

다음 귀절을 인용하여 이 글의 맺음을 삼기로 한다 :

"나는 千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밤중에 그물질하는 漁夫며, 얼음 속에 얼어죽는 北極探險家며, 馬上에서 번쩍이는 騎士이고 싶습니다. 늙어가는 美ㅅ이며, 역시 늙어가는 醜女, 손으로 흙을 주무르는 庭園士며, 붙잡히지 않은 살인자. 굶어죽기로 태어난 아이. 무당?뚜장이?우체부?발명가?흑인?노예?동화작가?나환자. 千의 삶을 나는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한번은 행복하고 싶습니다.” *
(原文 : G?nter Biemer, Glaube und Erfahrung, Diakonia Nov. 1976, PP. 403-407. 鄭漢敎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