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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信仰職制委員會 하나의 聖洗,聖餐,聖職
1978년 1월호 (제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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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國家生活? 軍政 3년반을 평가하는 칠레主敎國의 司牧的反省과 指針
1978년 1월호 (제 55호)
1. 倫理的 司牧的 展望 다른 여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는 현재 過渡期를 겪고 있다. 우리는 우...

VI. 信仰의 內容 一
1978년 1월호 (제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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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사목방안
1978년 1월호 (제 55호)
I. 서 언 1961년 서울 교구에서 분리, 設定된 仁川敎區는 경기도 인천시와 부천시 그리고 강화군, 김포군...

離婚者와 無?婚姻者들의 司牧
1978년 1월호 (제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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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仰과 體驗
1978년 1월호 (제 55호)
뻔한 일이거니와 經驗 내지 體驗이라고 하면 그것은 他Λ으로부터 간접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本人이 직접 ...

마르코복음서 개관
1978년 1월호 (제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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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信仰에서 본 샤머니즘
1978년 1월호 (제 55호)
I. 序 言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科學과 機械技術의 경이적 발전에 힘입어 前世紀에는 상상...

韓國의 巫歌와 그 祝術原理
1978년 1월호 (제 55호)
I. 序 言 巫歌의 원형은 神話이다. 이는 "神話는 祭儀의 口述相關物”이라는 祭儀學派의 명제로부터 자명...

옛 가톨릭典禮와 韓國巫俗
1978년 1월호 (제 55호)
두 죽음의 通過儀禮 비교I가톨릭에는 옛날 라틴 ‘慰靈미사’(Missa Requiem)가 있었듯이 무당의 의식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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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現在와 未來를 위 한 信仰 1978년 1월호 (제 55호)

VI. 信仰의 內容 一

W. 카스퍼

1. 見解의 衝突 속에서의 信仰告白

평범한 그리스도신자에게 그의 信仰에 관해서 물으면, 그는 대개 특정한 신앙의 내용을 가지고 대답할 것이다. 그는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啓示하였고, 교회를 구원의 手段으로 창립하였음을 믿는다고 대략 말할 것이다. 거꾸로 현재 신앙의 危機에 대해 자주 거론되는데, 사람들은 으례 특정한 信仰內容과 信仰形式에서의 위기를 생각한다. 그리고는 상당히 많은 교회의 肢體들이 자신들을 교회의 모든 신앙내용들과 동일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⑴ 이를테면 信仰은 그 내용에 의하여 정의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한 강력한 反對潮流가 여기에 대립하고 있다.

이 견해는 대개 교회일치 對談에서, 오늘날 신앙이 급격하게 의문시되는데,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무엇을 믿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도대체 믿고 있고 신앙을 사회적 내지 개인적 실천으로 바꾸는 것이 결정적으로 關鍵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신앙의 拘束的 內容性은 명백히 논란되고, 客觀化라고 처리되고 있다. 그리고는 신앙은 삶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하나의 특정한 樣式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는 올바른 신앙을 일차적으로 正統敎理(Ortho-doxie)로서가 아니라 正統實踐 (Ortho-praxis)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람들은 진정한 신앙은 바른 信仰形式에서가 아니라, 신앙의 바른 실천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통교리와 정통실천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보다 보수적이고 보다 진보적 입장을 취하는 集團들이 분리된다. 한 집단에서는 ㅡ回的으로 傳承된 信仰保全이 문제가 되고, 다른 집단에서는 現在 속에서의 이 신앙의 具現이 문제시된다. 상호간의 온갖 비방과 저주 가운데에도 둘 사이에는 보 통 의식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넓은 共同의 基礎가 존재하고 있다. 保守主義者들은 신앙이 오늘도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에 신앙을 보전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進步主義者들이 이 신앙이 인간을 위한 진리요 생명을 뜻한다는 확신에서가 아니라면 왜 신앙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兩者에게는 동일한 趣旨, 오늘날의 신앙의 現實性이 문제되고 있다. 두 입장들이 각기 위험을 감추고 있다. 사람들이 신앙의 在來形式들을 걱정하는 나머지 오늘(das Heute)을 눈에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현실성 때문에 신앙을 잃을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한 사람이 얼마큼 많이 믿는가 에 문제가 달려있다고 자주 믿는듯이 보여지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화 상대방의 正統信仰性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과 규정된 해답의 全目錄을 준비해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들을 실에 꿴 진주알처럼 헤아릴 수 있는가?

이에 반해서 進步主義者들은, 문제되는 것은 사람들이 ‘다다르고'(aukommt) 討議에 머무는 것이라는 편견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자주 보여지고 있다. 여기서는 與論造成者들의 공표된 견해가 마치 모든 眞理基準의 最高인 양 公共?果가 보통으로 아주 ㅊ書特筆되고 있다. 신학자들로서 우리는 신앙의 標準內容에 관한 물음을 우선 신앙의 標準的인 原典, 구약과 신약성서에 제기한다. 여기서 우리는 대립하고 있는 두 系列의 어느 유행어 兵器庫에 직접 적합하지 않고 궁지로부터 한 出口를 제시할 수 있는 척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2. 救世史的 信仰

이스라엘이 자기의 신앙에 대해 질문받게 되었을 때에 神과 世界 그리고 인간에 관한 條文體系를 가지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자기 신앙에 대한 물음을, 하나의 歷史를 이야기하고 이 역사 속에서 야훼의 指導와 充實을 체험하였다고 고백함으로써 응답하고 있다. 하느님을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만나게 되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신앙 속에서도 그를 고백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스라엘의 신앙은 먼저 일어난 말씀(Wort)에 대한 응답(Ant-Wort)이었다. 이 應答構造 속에 구약의 신앙이 순전히 공허한 信賴信仰이 절대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확증되고 있다. 하지만 구약성서 신앙의 내용은 抽象的 條文들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위대하고 충실한 行績에 대한 역사적 고백들이다. 이 때문에 구약성서 속에서 이미 초기에 救世史的 고백형식들이 발견된다.(2) 소위 引導形式(Herausf?hrungstormel)은 확실히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형식은 이미 빌레암 箴言(Bileam Spr?che)에서 증언되고 있다: "그들을 에집트에서 인도하신 하느님”(민수 23,22; 24,8). 十誡命도 에집트로부터의 인도를 상기시키는 이러한 형식으로 導入되고 있다 (출애 20,2; 신명 5,6). 가장 중요한 救世史的 事件들을 담고있는 저명한 신명기의 '小救世史的 信經’속에서 고백적 종합이 발견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召命, 야훼가 ‘강력한 손과 펼쳐진 팔로써 엄청난 놀라운 일들과 표징 그리고 기적으로써' 에집트 안에서의 곤경으로부터 이끌어낸 해방 과 마침내는 땅의 引受 등이다. 하지만 신앙인의 응답은 이러한 ‘救援事實’의 眞實看做가 아니라, 희생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讚美이다. 이러한 역사적 체험의 빛 안에서 이스라엘은 야훼가 누구인가를 깨달았다.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行蹟에 대한 動詞的으로 형성된 고백들에게 백성의 하느님으로서 야훼에 대한 名詞的 고백들이 相應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總體 信仰의 본질은 ‘야훼는 우리의 하느님 ㅡ 우리는 그의 백성’이라는 信條이다(신명 26,16-19; 호세 2,24; 예데 7, 23; 31,33; 헤스 11,20 참조).

이러한 告白의 역사적 성격의 특징은 이 고백들이 새로운 역사적 체험에 입각하여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새로 形式化되고 解釋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체험들은 신앙에 관한 새로운 認識들을 가져다 주었고 거꾸로 새로운 체험들은 지금까지 傅承된 신앙으로부터 이해되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은 모든 관점에서 하나의 ?史信仰이다. 이스라엘은 그의 신앙과 함께 늘상 途上에 있었다. 휴식이 없고 결코 종결되지 않은 어떤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에 고유하다. 대개 저명한 이스라엘 規範’(Schema Israel)에서, 생동적인 ?史信仰으로부터 교리적으로 형성된 硬直한 唯一神論的 告白이 성서 이후의 유대교에서 비로소 생성되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의 하느님은 오직 唯ㅡ者이다”(신명: 6,4).

예수의 宣布는 동시대의 랍비적 유대교 뒤의 예언자적 전통으로 되돌아가서 동시에 이 전통을 극단화하였다. 遙遠한 神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 가까이 있는 하느님이 예수 복음의 내용이다. 추상적인 형식들이 아니라, 살아있는 일상적 체험이 하느님 役事의 譬喩가 되었다. 예수는 "祖上 들의 傳統(마르 7,5)을 절대적으로 무시하고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마르 1,22) 가르친다. 심판과 은총속에서 가까이 있는 하느님께 대한 고백은 地上的 예수한테서 이미 함축적으로 그의 ㅅ格에 매어져 있었다 (마르 8,38 참조). 가깝고 자비로운 하느님에게 직접 말을 걸고 속삭일 수 있는 예수의 全權은 부활 후에 明顯的으로 되었어야 했다. 地上的 예수한테 함축적으로 所與된 그의 位格과 하느님 主權의 來到 사이의 연관성이 해명되었어야 했다. 그 때문에 부활 이후의 고백형식들은 그리스도論的으로 대단히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신앙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다. 신앙은 이를테면 한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추상적 형식이 아니며, 實在의 無名의 深層根據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運(Gescick) 속에서 말씀하고 행동한 하느님이다. 신앙의 내용은 요컨대 한 ㅅ格, 그의 役事와 ?運이다.

초대교회의 초기 고백형식들은 이 聯關性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3) “예수는 주님(Kyrios) 이시 다”(로마 10,9; 1 코린 12,3).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1 요한 2,22; 5,1) 등은 초기 명시적 고백형식들의 내용이다. 후에 다른 모든 고백형식을 제치고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고백형식은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1요한 4,15;5,5기타)라는 내용이다. 이 名詞的 告白形式 (Homologie) 이외에 신약성서는 직접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서의 하느님의 役事,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의 役事를 고백하는 동사적 형식들(Pistis’ formeln)도 알고 있다. 여기에는 특히 “하느님께서 그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셨다”(로마 10,9; 사도 2,24. 32; 3,15; 1 베드 1,21)는 고백이 속한다. 가장 유명하고 가장 중요하기는 코린토 전서 15 장 3-5 절의 신앙형식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있는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그 후에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다.’’ 바오로는 2節로 나누어진 형식 자체를 傳承으로 도입하여 자기자신의 神學의 기반으로 만든다.

신약성서내에는 요컨대 이미 敎義的 傳統이 있다. 하지만 單一敎義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고백형식들은 所與된 ?白狀況과 이들이 거론되는 계기에 따라 대단히 강력하게 변화된다. 이들은 그때 그때마다 처하여 있는 ‘삶 속에서의 座’ (Sitz im Leben)에 의하여 성격지어지고 있다. 이들은 그 밖에도 進步하는 신앙에 대한 思惟와 步調를 맞추려고 추구하고 있다. 요컨대 신약성서적 의미의 고백에는 역사성이 본질적인 차원으로 속한다. 新約聖書 時代 말기에 즈음하여, 司牧書簡들 속에 신앙의 保管品(Depo-situm fidei)을 충실히 보전하는데 가치가 크게 놓여지고 있다. 거기에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形式이 발견되고 있다 : "말씀은 충실하고 모두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1 티모 1,15; 4,9). 이제는 종래보다 더 말씀과 형식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신약성서의 後代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순전한 口頭上의 正統敎理의 한계를 알고 있다. "마귀들도 믿고 떨고 있다’(야곱 2,19). 악마도 정통신앙형식들을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살아 있는 신앙이다(야곱 2,17 이하 참조).

우리는 요컨대 확인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성서에서 이미 개인별 신자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共同體가 그들의 신앙내용을 공공연하고 구속력있는 형식으로 증거하고 있는 뚜렷한 고백형식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不信仰과 異端에 대해 명백한 결단을 요청한다. 그럼에도 또한 이 고백들은 경탄할 만한 역사적 다양성과 신축성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共同的이며 拘束力있는 중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頂點을 발견하는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救梭役事를 가지고 있다. 名詞的 告白形式들은 예수의 位格과 機能을 고백하는데, 이에 반해 動詞的 形式들은 이 인격이 그의 역사와의 연관 속에서만 위격인 바 그것이 된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史를 통한 하느님의 役事가 이를테면 그리스도신앙의 중심이다. 후기의 모든 宣布는 이 中心에로 회부된다. 그것은 이 중심을 해설하고 새로 現在化한다.

이 課題는 이미 신약성서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白?史가 正經歷史와 함께 종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순전한 聖書主義란 그리스도信仰의 역사적이고 보편적 성격과는 거의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正經歷史는 직접 ?義史로 인도한다. 신약성서에 所與된 基點들로부터 3세기 초에 이미 聖洗 희망자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오늘날의 使徒的 신앙고백의 기본구조가 발전하였다.⑷ 그러나 8~9세기에서야 비로소 사도적 신앙고백은 現今의 형식을 찾았다. 이러한 보다 더 西方的으로 定向된 本文 이외에, 특히 동방에는 또한 다른 고백형식들이 있었다. 이 들 중에 한 형식, 추측컨대 체사레아(Caesarea) 교회의 고백은 니체아 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의 첫번째 두 공의회의 敎義形式들이 作業이 된 골자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소위 기다란 信經이 생겨 났다. 이 신경은 그 基本構造上 여전히 구세사적으로. 성격지어져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가지 본성 속에서의 한 位格에 관한 칼체돈 공의회(451)의 敎義形式들이 왜 그 안에서 이미 채용되지 않았는가 하는 근거이다. 왜냐하면 여기 칼체돈 공의회에서는 니체아와 콘스탄티노플과는 다른 信t仰形式과 관계되고 있다.

이제는 "우리는 믿는다”거나 "우리는 고백한다”고 일컬어지지 않고 "우리는 사람들은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救世史的 고백에서부티 이제는 고백에 관한 올바른 敎理, ?白形式에서부터 敎義的 敎理形式이 되고 있다.

이 경향은 그 이외의 敎義史에서 계속된다. 신앙의 한 내용은 점점 더 많이 그것의 개별적인 局面과 含蓄, 그리고 결론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선명은 思辨에로의 嗜好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요청에서 나왔다. 신앙은 수차 되풀이하여 異端的 견해를 거스려 새로 경계를 긋게 되었어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樣式으로 하나의 신앙이 수많은 信仰條文들 속에서 붕괴될 기세가 있다. 사람들은 敎義的 나무들은 보면서 신앙의 숲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3. 邏元 아닌 集中

近世에서의 난처한 상황이 反動을 유발할 것은 이해할 만하다. 사람들은 이제 지속적인 해설을 본질적 내용에로의 신앙의 환원으로 대치하였다. 이미 中世 후기의 神秘學에서, 다음에 ㅅ本主義와 信心主義 그리고 啓蒙主義 이래 강화되어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本質’에 대해 물었다.(5) 사람들은 구원 때문에 모두가 믿어야 하는 基本的인 신앙의 진리들과 각개 信者들의 자유로운 同意에 맡겨질 수 있는 非基本的인 신앙의 진리들을 구벌하였다. 이 還元試圖에 대해서 비오 11세는 칙서 「死者들의 靈魂」(Mortalium Animos, 1928)에서 모든 信仰條文 뒤에는 하나요 동일한 하느님 의 권위가 자리잡고 있어서 말하자면 無染始胎의 敎義를 三位一體의 秘事와 같이 같은 신앙으로 고수하고, 하느님의 肉化를 교황의 無謬的 敎導權과 다르게 믿어서는 안된다는 논증으로 대치하였다. 하느님의 권위를 어느 한 부분에서라도 의문에 처하는 자는 이 권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 생동적인 歷史信仰을 몇개의 추상적이고 건조한 소수의 敎條文과 일반적 本質形式으로 還元하는 위험은 ?導權的으로 추방되었다. 물론 문제가 그것 때문에 해결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信仰에서 가톨릭적인 것, 포괄적인 것의 방어를 값비싸게 갚아야 하였다. 실제로 생동적인 그리스도신앙에서부터 폐쇄적인 敎條體系가 되어버렸다. 이 체계를 통째로 삼키든가 아니면 전적으로 의문에 처하든가 해야 하였다. 敎義的 演辭의 網이 점점 더 좁아지게 된 뒤에 體系는 현대에서의 신앙의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더 이상 진실하게 개방적이 아니었다.

하느님과 교회의 권위에 입각한 모든 敎義의 형식적 義務性格의 일방적인 明示는 근세에서의 주체성 강조로 말미암아 특히 불길하게 작용하여야 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中心眞理를 마리아敎義들과 같은 주관적인 强度로 고수할 수 있는가? 두 가지에서 救援과 非救援의 문제가 동일하게 관 건이 되지는 않는다. 그밖에도 이 생각은 宜布와 信心實踐에서 불운한 平衡移動으로 이끌었다. 근세에서의 敎會像은 교회의 교리의 2차적이고 3차적 특성에 의하여 극도로 성격지워져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을 방어하는 나머지 反宗敎改革的 진리들을 과도하게 강조하였고, 이것은 구원의 道 具(교회, 성사, 교직)에 관계하는 진리들을 본연의 그리스도論的이고 救續論的 진리 자체에 비해서 과도하게 강조하는 데에로 이끌었다. 昨今世紀에 마리아論에 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그리스도論이나 現代無神論에 대한 물음들에 대하여 보다 더 많은 敎皇敎書(Enzyklika) 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均衡障?는 심장과 신진대사가 더 이상 올바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징조이다. 口語的이고 形式的 正統敎理의 일방적 고집은 신앙이 근세 인간에게 점점 더 적게 영향을 미치게 된 데 함께 책임이 있다.

근래에 가톨릭神學에서도 신앙의 結論에까지 이르는 대단히 오랜 解說時機 이후에 오늘날 집중의 회귀운동이 나타나야 하지 않는가 라는 물음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물론 집중은 여기서 환원, 또는 더군다나 消去와 전혀 無味한 本質形式의 脫神化論的 蒸溜를 뜻하고 있지 않다. 關鍵이 되고 있는 것은 수다한 신앙조문들 속에서 하나의 신앙을 透明토록 만들고, 주변을 중심으로 새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集中의 정당성이 가장 중요하고 대부분 미래를 지향하는 公議會 本文들 중 한군데에서 진술되고 있다. 교회일치 敎令에서는 말하고 있다: “여러 敎理를 비교할 때에는 이들의 그리스도신앙의 기초와의 연관이 다르기 때문에 그 진리들 사이에 질서와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기초는 그리스도의 豊饒에 있다고 암시적으로 첨가되고 있다(에페 3,8)(6). 이 本文을 채택 하도록 이끈 樣式에서 진리들은 헤아리기보다는 측정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공의회 본문에서는 이를테면 질적이고 내용적으로 규정된 眞理觀으로 인한 양적이고 형식적인 진리관의 해소가 문제되고 있다. 개별적인 信仰眞理에 말하자면 일련번호를 부여하고서 이러한 양식으로 주요 진리를 덜 주요한 교리로부터 구별할 수 있다고 이해하려 한다면 眞理의 順序에 관한 교리를 그릇 이해하였고 한번 더 질적으로보다는 양적으로 생각하려는 것일 게다. 올바로 이해 된 진리의 位階秩序論은 신앙의 내용이 개별적인 敎理條文들와 총계가 아니라 일정한 비례법칙을 지닌 조직화 된 전체를 제시한다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새로운 定向으로부터 두가지 결론이 나온다. 하나는 소위 信仰의 短形式 (Kurzformeln des Glaubens),(7) 이를테면 하나요 전체인 신앙을 짧고 부각된 양식으로 말하되 이로 말미암아 다른 것이 제외되거나 부정되지 않는 試圖이다. 聖書的 고백들과 사도신경 등은 신앙에 관하여 종합적이면서 또한 포괄적인 양식으로 보고하는 이러한 短形式들이다. 대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이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이며 희망을 뜻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교회가 거의 2천년이 흐르는 가운데 이끌어낸 모든 結論들을 모두 알고 이해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信仰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集中으로부터의 두번째 결론은 신앙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형식적 기준(성서,전승, 교도권)들뿐만 아니라 事項基準과 상응해서 事項批判이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루터는 이 事項基準을 저명한 形式에 담았다: "그리스도를 움직이는 것”(Was Christum treibet), 그는 이것으로써 모든 信仰演辭의 그리스도論的 意義를 재차 발견하였다. 모든 信仰演辭들은, 대개 마리아敎義들은 그리스도論的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에만 신학적으로 정당하다. 중요한 것은 이 事件原則이 선발원칙이 아니라 해석원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 니다. 기본문제들이 상대적으로 周邊問題에서 결정되는 일이 일단 능히 있을 수 있고, 敎會史내에서 이 경우가 자주 있어왔다. 이처럼 대개 하느님의 참된 肉化가 에페소 공의회(431)에서 ‘하느님의 母親’(Theotokos)이라는 명칭의 도움을 받아 처리되었다. 요컨대 소위 변두리 眞理들을 경솔하게 다루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周邊問題들이 중심으로의 통로를 차단하고 이 중심의 투명성을 어둡게 하지 않고, 오히려 수많은 말들 속에서 하느님의 한 말씀이 들리고 알아들을 수 있게 머문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4. 信仰告白의 構造分析

이 命令들이 공허한 요청으로 머물지 않으려면,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간단하게 信仰內容의 構造分析을 시도하고 그리스도論的 중심으로부터 출발하면서, 그리스도信仰의 전체를 진술하는 과제 앞에 서게 한다. 신앙의 결정적인 기본구조는 성서와 사도신경에서 명백히 표현되고 있다.(8) 사도신경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신을 믿는 것 (credere in Deum, in Jesum Christum, in Spiritum Sanctum)과 교회를 믿는 것 (credere Ecclesiam)을 벌써 형식상으로 구별하고 있다. 교회와 ?會와 함께 주어진 모든 것, 聖事와, 敎職들은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신을 통하여 우리 구원을 위해 役事하는 하느님과는 다른 ?式으로 믿어지게 된다. 신앙은 직접적으로 오직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이 신앙 본연의 내용을 형성한다. 이에 반해서 교회와 성사들 그리고 敎職들은 구원의 도구들이며 이들이 구원을 현재화하고 매개하는 한에서 신앙은 이들과 관련하고 있다. 요컨대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듯이 교회와 더군다나 敎皇을 믿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도구들은 구원의 媒介形式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들이 구체적으로 奉仕를 하지 않을 때에는 비판되어야 한다.

목표의 진리와 救援道具의 진리를 구별하는 데에서 출발하면서 신앙의 기본구조를 좀더 해명할 수 있다.(9) 먼저 목표의 진리를 좀더 구별하여 관찰할 수 있다. 즉 신앙의 演辭 자체와 이 信仰演辭에 관한 思惟를 구별할 수 있다. 信仰演辭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신을 통한 하느님의 救援役事에 대한 고백이다. 救援經輪的 三位一體에 대한 고백은 내재적 삼위일체로부터 구별되고 있다. 내재적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先在(Praexistemz)에 관한 演辭들은 직접적인 信仰演辭들이 아니라 신학적 思惟演辭들이다. 이들은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의 役事에 대한 직접적 고백에서 이미 일컬은 바를 高次的 思惟 속에서 한번 더 다른 양식으로 말하려고 한다. 이들은 신앙을 하느님의 永遠性 자체에 繁留함으로써 그리스도信仰의 歷史的 非抽出性음 固守하고자 한다. 三位ㅡ-體論은 ‘우리 밖에서’ (extra nos),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所 與性을 진술하려 한다. 하느님은 자기 안에서 생명이며 사랑이기 때문에 바로 역사 안에서 자기자신을 전달하는 생명이며 사랑일 수 있다. 이처럼 三位ㅡ體論은 하느님이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있는 그대로를 계시하였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삼위일체에 관한 演辭들은 내용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원래 구세사적인 信仰演辭들을 형이상학적 思考와 演辭?式으로 해설하고 있다.

그리스도論的 고백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해설할 수 있는 것처럼 부정적으로도 전개할 수 있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세계의 구원이려 한다는 그리스도論的 演辭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구원이 없고, 그리스도 없는 세계는 非救援중에 있다는 부정적 연사를 내포하고 있다. 原罪論은 이를테면 時限的 理解樣式으로부터 분리할 때 고정적 演辭의 부정적 蒲片 (Folie) 이며 부정적 형식이다. 원죄론은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도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論的 진리 자체를 의문에 처하지 않으려면 원죄론은 이런 의미에서 도저히 완전히 포기될 수 없다. 그러나 원죄론은 새롭고 부가적인 진리가 아니라 세계의 구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中心告白의 否定的 演辭形式이다.

구원의 목표에 관한 演辭들과 같이 구원의 도구에 관한 연사들도 개별적으로 조직화되게 한다. 이미 트리덴틴 공의회는 聖事들이 (敎職들도 비슷하게 해당된다) 그 구체적 형성에서 교회에 의해서 시대의 요청에 따라 “그들의 본질을 살리면서”(salva illo-rum substantia)(10) 구체화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것을 위한 결정적 觀點을 제공하였다. 말하자면 본질과 구체적인 역사적 外形이 구별되고 있다.

이 본진이 무엇인가는 신학자들한테서 항상 논란되어오고 있다. 전통적 신학에서 이미 대단히 관대한 해석들이, 대게 그리스도는 聖事들을 '一般的으로’(in genere), 즉 일반적 觀念에 따라 설정하였다는 해석들이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의 역사적 통찰에 입각하여 이 문제에서는 협소한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관대한 입장을 취하여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聖事와 蜜職들이 이미 성서에서 아주 특정한 사회ㅡ문화적으로 한정된 형식 속에서 우리를 만나고 있음을 좀 더 정확히 알고 있다. 그 때문에 聖事와 敎職들의 형태들은 신약성서와 가장 오랜 聖傳 등이 중언하듯이 우리가 오늘날 간단히 모방할 수 있는 모델일 수가 없고 現今의 관계와 司牧的 필요성을 고려하여 현실화하여야 한다. 교회는 자신의 本質κ體를 결코 ‘化學的으로 純粹하게’가 아니라 오직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具現化 形式으로만 소유하고 있다. 교회가 이러한 역사적으로 생성된, 그 때문에 처음부터 역사적 구체성으로 所與되지 않은 形式들을 후대에 敎義化할 때에, 교회는 자신이 구체성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밖에는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는다.

이 命題는 많은 敎義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사람들이 대략 교회는 12세기부터 비로소 7聖事를 헤아렸고 敎皇의 首位權에 관하여 대체로 더 늦게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의 의미로 思惟的으로 분명하게 되었다고 확인할 때에, 이것이 동요할 아무 근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 眞理들을 오늘날 ?義들로 고수하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 敎會的 順命 (fides ecclesiastica)의 義務로서 만이 아니라 神的 信仰 (fides divina)으로 내 세울 때, 교회는 실제로는 이 구체적 교회가 密事들과 敎職들의 이 구체적 외형을 가지고 使徒的 始原을 실체적으로 지속하며 세계를 위한 하느님의 한가지 救援道具를 명시하고 있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말하려 하지 않는 다.

교회는 이러한 교의들로써 敎會史와 敎義史가 전적으로 다르게도 발전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에 異論을 제기할 수도 없고 하려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이 역사들이 실제로 실현된 樣式이 시작과 단절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진리를 만나는 역 사적으로 구속력을 지닌 형식이다. 실제로는 敎會와 聖事 그리고 敎職에 관한 수많은 演辭들을 한 演辭에 집중시킬 수 있다: 하느님은 구체적인 교회를 세계를 위한 구원의 표징과 도구로 원하고 있다. 敎職과 聖事들은 교회의 自己成就 ?式이다. 이들 속에서 교회는 자신의 기본 본질을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의 구체적 類型樣式에서 교회는 자신의 정체를 단지 역사적 변천을 통하여 보전할 수 있다.

信仰眞理의 마지막 집단을 잠깐 더 관찰해야 하겠다. 目標의 진리들이나 道具의 진리들이나 說話 的 (paradigma-tisch) 이고 豫型的(typologisch) 진리들에 의하여 동반되고 있다. 여기에 제 1차적으로 마리아敎義들이 속하고 있다. 이들은 다른 진리들을 標徵的 凡例的 그리고 豫型的으로 표현하는 기능을 지닌다. 이처럼 가장 오랜 마리아論的 敎義들, 마리아의 하느님母親性과 童貞性들은 실제로 그리스도論的 진리들이다. 이들은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우리 인간역사에 개입하면서 ‘밑으로부터’ ‘살과 피를 통하여’ 透出해낼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을 이룩하였다는 것을 그들 나름의 양식으로 말하려고 한다. 이들은 요컨대 그리스도를 새로운 아담으로 증언한다. 최근 두개의 마리아論的 敎義,無染始胎와 蒙召昇天 교의들은 교회론적이고 구속론적 演辭들을 예시 하고 있다. 여기서 마리아는 교회와 구원된 인류의 原型(typus)으로 나타난다. 이 敎義들을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을 어떻게 할 작정이고 인간으로부터 무엇을 ‘만드는가’가 한 폭 그림에서처럼 언급되고 있다. 요컨대 마리아敎義들은 그리스도論的 中心敎義에 부가되는 첨가적인 내용이 아니라 다만 그것의 豫型的 例證이다.

5. 한가지 主題 : 神과 人間에 대한 올바른 言及

일견해서 前述한 構造分析은 대단히 복잡한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지극히 간단하고 해방적이다. 역사적으로 생성된 演辭들과 演辭?式의 다양성 이면에는 감탄을 일게 하는 단일성과 단순성 안에서의 하나요 동일한 신앙이 자리하고 있다. 각 信仰條文은 각기 상이한 展 望 속에서 하나요 동일한 신앙을 진술하고 있다. 마치 한 遁走曲 (Fuge) 에서처럼 동일한 주제가 몇번이고 반복해서 변화되고 이러한 變異와 合成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내적 풍요와 충만을 보여준다. 敎義史의 시종일관 하는 한가지 주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의 宣布의 主題, 인간의 구원으로서 하느님의 주권이다. 예수의 人格과 役事 속에서 하느님의 사건과 인간의 사건이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信仰演辭의 그리스도論的 집중은 편협하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 집중은 神이 인간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이 신을 위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眞髓이며 요약이다. 그 러므로 인간의 인간성의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具現된 神의 神됨은 수많은 말들 속에서의 하나의 말씀이며 수많은 敎義들 속에서 하나의 교의이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을 위한 구원이며 희망 그리고 평화라는 것을 고수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그리고 他者들을 위한 희망의 形相이 되기 위하여 여기에 참여 종사하는 사람은 전체 신앙을 믿고 고백하고 있다. 이 전체 신앙은 敎理條文들의 총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전체성,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모든 信仰演辭의 이 그리스도論的 매듭에서부티 信仰眞理들의 해석을 위해서 두 가지 주요한 結論들이 야기된다. 첫째로, 그리스도論的 해석은 신학적이고 榮頌的 해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聖母께 이르는 길이다 (요한 14,6 참조). 때문에 그리스도論的 형식들은 자체 안에서 자리하고 휴식 하지 않고, 자신을 지나쳐 움직여서 더 이상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神秘 속으로 초월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per Christum in Deum)는 神學을 위해 方法的이고 解釋的 歸結 등을 지니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信仰Α의 행위가 선언되는 것에서가 아니라 사건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형식화하였을 때, 그는 實狀을 파악하였다.(12) 이 사건, 신앙의 ‘事件’은 그에게 神性의 근거하에서의 神, 우리가 그에 의하면 그것이 무엇인가보다는 무엇이 아닌 것을 많이 알고 있는 하느님의 神性이다. 그때문에 信條는 자신을 지향하는 神的眞理의 認知라는 것이 타당하다. 信仰條文은 神的眞理의 참된 把握이지 순전히 하나의 暗號(Chiffre) 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지나 쳐 더 이상 파악될 수 없는 것 속으로 비상하는 파악이다. 개별적 형식들의 모든 피상적 熟知와 모든 선동적 誇張行爲는 제외되고 있다. 敎義는 최종적으로 榮頌論이다. 삶 속에서 敎義본연의 座는 禮典的 讚頌的 고백이다.

그리스도識的 해석은 두번째로 인간학적이고 ‘世上的’ 해석이다. 신앙의 救援意味에 관하여 언급될 때에 이것에 대해 좀더 상세하게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다음 정도로 논급하고자 한다 : ?義는 福音의 외형으로서, 인간에 대한 구원 약속으로서 유효하게 사용되어야 한 다. 단지 타인의 귀뺨을 때리고 "놈아! 처먹거나 죽어라”고 말하기 위하여 敎義를 사용한다면 사람들은 ?義를 항상 잘못 註釋한 것이다. 敎義들은 福音의 형태로서이지 脅迫消息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敎義들이 인간다운 인간됨의 제공으로 이해될 수 있게 교의들을 해석하여야 한다, 이러한 양식으로만 교의들은 양심의 의무를 지니는 요청이며 生死가 걸린 挑戰이 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끝으로 단정할 수 있다: 信仰內容은 하느님의 인간과의 事件인 예수의 사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決斷에로의 召命이다. 신앙의 이 危機性格을 이중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中立化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든 信仰內容들을 몇몇의 일반 인간적인 俗事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때까지 격하시켜 해서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앙을 아주 급격화하여 聖像破壞的 脫神話論化를 통하여 미묘하게 만들어 신앙이 완전히 내용 이 되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型式化는 보기에는 모든 것을 요청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요청치 않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것 앞에서 無結果的이고 非拘束的이다. 두 가지 입장들이 모두 외견상으로만 보적이다. 교의적 입장의 ‘事件含有姓’ 없이 신앙은 無形態的이고 無光彩的이 된다. 信仰은 實在가 없이 그리고 진지하지 않게 된다. 내용없는 신앙은ㅡ용어의 이중적 의미에서ㅡ無對象的이다.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것, 이것은 여기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단지 信仰이 그리스도적으로 머물고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적으로 神과 인간에 관해서 올바로 거론되 어야 하는가를 그리스도로부터 말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原文 : Walter Kasper, Einfiihrung in den Glauben 1972, Grunewald Mainz. 沈相泰 神父 譯)

[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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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K. Rahmer, Kirche und Sakramente (Quaestiones disputatae 10), Freiburg ? Basel - Wien 1961. 하지만 이 생각이 Rahner 한테서는교회의 제어할수 없는 발전이론과 연계되어 tlber den Be griff des “Jus divinumn im Katholischen Verstdndnis, in: Schriften zur Theologie V, Einsiedeln 1962, 249-277. 이로써 교회의 사도적 시작외 비판적 상위질서와 규범성도 교회의 역사성도 온전히 보전되어 있지 않다.  J. Neumann, Das uJus dtvinum" im Kirchenrecht、in: Orientirug 31 (1967) 5-8 참조 모델” 개념의 도움으로 여기서 제시된 해결에 대하여 W. Kasper, Zum Problem der Rechtglaubigkeit in der Kirche von morgen, 73, 톡히 註60 참조.
(12) Thomas von Aquin. Summa Theologiae II/II q. 1 a. 2 ad 2.
(13) A.a.O. q. 1. a. 1.

(14) A.a.O. q. 1. a.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