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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와 임종자에 관한 윤리문제
1982년 1월호 (제 79호)
어떻든, 腦에서 생명 활동이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정지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그런 인간은 죽은 ...

본당공동체를 위한 선교방안 - 40가지의 實踐 方案 및 技術〈II〉
1982년 1월호 (제 79호)
21.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스포츠나 포크댄스 등) 젊은이들은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무언가 ...

주일의 말씀
1982년 1월호 (제 79호)
천주의 모친 대축일 마리아의 참 모습 제 1 독서 : 민수 6,22-27 제 2 독서 : 갈라 4, 4-7 복 음:루가...

교부들의 사상
1982년 1월호 (제 79호)
이 글은 74號까지 연재해 오다 그간 필자의 사정으로 중단됐던「敎父들의 思想」의 계속 임. 첫연재는 58號...

신앙의 확신과 가치의 체험
1982년 1월호 (제 79호)
이미 이 정도만으로도 윤리적 관념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더욱 더 우리를 당황...

神觀의 어제와 오늘
1982년 1월호 (제 79호)
III. 超越的 人格的 神觀과 問題性   救世 이래 인간의 상황은 계몽사조 의 대두로 말미암아...

종말론 연구 현황
1982년 1월호 (제 79호)
I. 問題의 提起   사람은 누구나 장래를 염려하기 마련이다. 내일,모래, 몇 년 안에, 몇 십 년...

復活節 事件과 原始敎會의 胎動期 그 歷史的 考察
1982년 1월호 (제 79호)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된 다음 그 직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 부활과 그 뒤에 이어온 일련의 사...

그리스도인의 희망
1982년 1월호 (제 79호)
希望이라는 것은 무언가 오늘보다 더 나은 來日에 대한 바람입니다. 모 든 人間은 意識 無意識 중에 이러한...

우리 시대에 거는 희망
1982년 1월호 (제 79호)
새해가 되면 누구나 희망에 벅찬다. 올해는 무슨 좋은 수라도 없을까고 가슴을 설레인다. 새해라고 해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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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오늘의 不安과 希望 1982년 1월호 (제 79호)

그리스도인의 희망

金壽?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希望이라는 것은 무언가 오늘보다 더 나은 來日에 대한 바람입니다. 모 든 人間은 意識 無意識 중에 이러한 희망을 지니고 있읍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꿈을 지니고 동경을 품으며 삽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자주 해가 지는 서산마루를 바라보며 저 산너머에는 무언가 아름다운 곳이 있을 것 같은 동경을 지녔고, 시골에 살았던 관계로 都市에 가면 크게 成功하여 멋진 모습을 하고 돌아올 것을 空想했었읍니다. 그런가하면 사람 은늙어서 이젠 살대로 다 살았다는데도 무언가 좀더 나은 것을 바라는 꿈을 좀처럼 버리지 못합니다. 적어도 자신은 이미 때가 늦었다 하여도 더 나은 것이 子息代에서는 이루어지기를, 그 子息이 아니면 그 後孫에 의해서라도 이루어지기를 막연하게나마 기대하고 있읍니다. 그럼 으로써 결국은 자기 자신.。간접적으로나마 成就되리라는 期待를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젊으나 늙으나 꿈과 期待와 希望을 지니고 삽니다.

오래전 6.25사변 중에 제가 경험한 일이 한 가지 있읍니다. 共匪 4名이 統殺될 때 그들의 臨終을 宗敎人으로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아 그 現場 에 立會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날 다행히도 執行 전에 저로부터 洗禮를 받았읍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이 곧 총살되리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총살 현장에서 집행관에게 아주 고분고분한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무슨 이유로 반항하지 않고 지시를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것일까하고 이상히 생각하여 돌아오는 길에 집행장교에게 물어보았읍니가. 그의 대답은ㅡ이미 여러 번 겪은 경험에서 一사람은 죽는 순간까지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함께, 혹시나 말을 잘 들으면 살려줄지도모른다는 삶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읍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 는 반항하고 발악하는 사형수도 없지 않다고 했읍니다. 그러나 앞의 경우나.뒤의 경우나 그 행동의 표현이 正反對일 뿐이지 삶에 대한 愛着과 더불어 희망 없는 것에 희망을 가지는 데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읍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 自殺者가 너무나 많이 속출하고 있으며 특히 10代에서 증가하고 있읍니다. 그럼 자살자는 대체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물론 희망을 잃은 사람만이 적어도 현세의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자에게도 비록 이승에서는 희망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해도,이승에서 이룩하지 못한 것이 저승에서는 이룩되기를 기대 하는 것은 분명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살자가 흔히 남기는 遺書에 보면 먼저 간다든지,후에 저승에서 만나자든지, 또는 두고 가는 사람들의 행복을 빈다든지 등 항상 어떤 기대 속에서 죽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읍니다. 먼저 간다,어디론가 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물론 저승으로 먼저 간다는 뜻이지 결코 虛無로 돌아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상당수의 경우는 유서도 남기지 않으나, 이때에도 역시 고통으로 부터의 解放을 기대하는 것은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또 다른 면으로 社會 不義와 不正, ?政에 항거하는 뜻의 자살도 있읍니다. 이런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그 죽음으로써 세상이 달라지기를, 곧 나아지기를 기대하면서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승에서는 물론이요 저승에서까지 아무것도 기 대하는 것이 없는 가운데 그야말로 절대적인 허무의 절망 속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저는 의심합니다. 있다면 어떤 虛無主義的 作家의 作品 속에 있을지는 모르겠읍니다.

햇세는「괴로움의 위안을 꿈꾸는 너희들이여」라는 책에서 자살자는 삶에서가 아니고 죽음에서 救濟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레함·그린의「人間의 深淵」에 나오는 주인공 스코비의 자살은 "主님이 시여,저는 사랑합니다”라고 끝맺고 있읍니다. 어떻든 虛無主義者 즉 虛 無主義의 代表者라고도 할 수 있는 니체에게도 그의 神의 죽음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갈망하는 향수가 짙게 나타나 있읍니다. 그가 한 말중에서 “永遠은 더욱 깊고깊은 永遠을바란다5'(Ewigkeit will tiefer tiefer Ewigkeit)라는 말이 있읍니다. 이 말을 보면 니체는 오히려 모든 인간의 深層心理 즉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영원에 대한 갈망을 누구보다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요즘 市中에 ?無主義的 實存主義 作家 까뮈에 관한 책「다시는 자살을 꿈꾸지 않으리라」는 책이 많이 읽힌 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의 序文만 조금 읽었는데 그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던 것은 까뮈를 단지 허무론자로 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現實의 삶의 不條理,無意味를 절망하면서 동시에 찬란한 지중해의 햇빛 그리고 자유로운 삶을 얼마나 깊고 뜨겁게 熱望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읍니 다. 또한 무엇보다도 끈질긴 자살에의 유혹도 뿌리치고 넘어서서 비극적인 生에 대한 肯定의 局面을 깊이 있게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인간은 누구나 어떤 경우에도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의식 무의식 중에 지니고 살고 있읍니다. 그래서 희망은 人間性의 本質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읍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 희망하는 것이 보다 나은 자기자신, 궁극적으로는 自己完成을 소망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인간다움 즉 인간의 本質은 오히려 희망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희망의 달성이 곧 인간의 완성일 때,참으로 본질적인 인간, 理想的인 인간상은 희망 속에 추구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현재의 인간 곧 "현재의 나”는 아직도 “있어야 할 나”, "되어야 할 나"가 아닙니다. "현재의 나”는 "있어야 할 나" "되어야 할 나”를 "향해 있는 나”에 불과합니다. "참된 나”는 미래에 있읍니다. 이렇게 볼 때에 참된 인간 사회, 참된 세상도 미래에 있읍니다. 이 말은 현재는 인간 개개인에게나 한 민족에게나 인류 전체에 대해서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개 인간도, 민족도, 인류도, 미래를 꿈꾸며 살고 있읍니다. 그리고 그 꿈은 蜜話와 흡사한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누구나 童話를 즐겨 읽습니디·. 이 동화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영웅, 귀공자 혹은 왕자이며, 특히 아름다운 公主와 만나고 사랑하며 꿈같은 궁궐 속에서 끝없이 행복된 인생을 보내는 내용이 대표적 입니다. 여기서는 온갖 시련이 있지만 그 모든 시련을 다 이겨내고 惡의 세력을 물리치는 등 善과 正義의 승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어릴 때부터 꿈꾸는 것은 惡에 대한 善의 승리,보다 낫고 보다 아름다운 인간과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인간은 분명히 未來志向的입니다. 민족도 인류 전체도 미래지향적이요 이것이 곧 희망입니다.

그렇다면 이 희망은 과연 충족될 수 있는가가 문제이겠읍니다. 즉 우리 인간에게는 확실히 충족할 수 있는 미래가 있는가? 그렇게 확실히 약속된 땅,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가?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실 것 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품도 울부짖음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4).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런 신천지가 올 것인가? 이런 미래가 확실히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만일 알 수 있다면 그리고 확신을 갖는다면, 우리는 아마 가진 모든 것을 괄아서라도 이것을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가지게 된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각오에 앞서 이렇게 충족될 수 있는 미래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읍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언제나 존재 하는 사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통해서만 연구하는 것인데 미래는 아직 있지 않고 따라서 실험도 증명도 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증명하지 못한다 해서 미래가 없다고 부징할 수는 없읍니다. 또한 과학은 미래를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자들은 어떤 의미로 누구보다도 미래를 꿈꾸고 있읍니다· 그들의 소망은 천년만년이 걸려도 우주의 신비 를 샅샅이 뒤지고 싶은 것입니다. 언제 그 날이 을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영원히 그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과학은 굉장히 발달하여 우주 신비의 베일을 점차 벗겨가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는 과학 역시 추측 밖에 못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보는 은하수는 그 자체 하나의 큰 천체인데 약 1천억 개의 별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하는 태양계는 겨우 그 가장자리에 있고 이런 은하계가 우주 안에는 또 1천억 개가 있 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주는 얼마나 광대한지 우리로서는 상상 조차 할 수 없읍니다. 그렇다면 몇해 전에 인간이 달나라에 갈 수 있었다 는 것,금년 봄 콜롬비아號가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왔다는 것 등은 물론 굉장한 성취라고 할지라도 우주의 광대함에 비하면 마치 태평양을 걸어서 건너겠다는 사람이 발 하나를 겨우 바닷물에 담근거나 같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주는 워낙 커서 그렇다고 하지만 이 대우주에 대해 小宇宙라고 하는 물질의 元素도 과학은 아직 그 끝이 어딘지 완전히 구명 못하고 있읍니다. 원자가 최후의 단위가 아님은 이미 분명해졌읍니다. 전자,중성자 등 이 있읍니다. 얼마 전에 τν에서 원자를 분해하는 미국의 지하연구 시설을 방영한 일이 있읍니다. 원자를 분해히끼 위해서 지하에 4km나 되는 평장한 시설입니다. 거기서 원자를 분해해 보니 퍼크라는 것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자들 자신이 이 퍼크가 물질의 마지막 단위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소우주의 물질세계도 어디서 끝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질이기에 유한하고 유한하면 그 끝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대우주는 워낙 광대해서 아직은 모른다 해도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우리 눈으로써는 볼 수 없고,현미경 아니 그보다도 더 섬세한 관찰장비로써만 볼 수 있는 물질의 원소 즉 그렇게 작은 것이 그 끝나는 데가 어딘지 오늘의 과학도 아직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과학 지식의 발달은 우주의 신비,존재의 신비, 생명의 신비 앞에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읍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은 인간이 알아야 할 지식에 비하면 그것은 대양같이 넓은 바닷물에 비해서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다.” 저는 결코 과학을 경시하는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것 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학이 더욱더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단지 오늘의 인류가 자랑하는 과학도 우주만상의 신비 앞에서는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 를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든 과학은 그 자체 실험을 전제로 해야하기 때문에 아직도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는 말을 할 수도 없읍니다, 여기서는 과학도 추리밖에 할 수 없으며 미래를 증명할 수는 없읍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분명히 미래지향적입니다. 인류도 그렇습니다. 만일 미래가 없다면 이보다 더 허무하고 모순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미래가 없다면,인간이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에다 모든 희망을 걸고 살고 있다는 것은 모순도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요, 모든 인간은 결국 정신이상에 걸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러나 어느 정신과 의사도 이 때문에 인간은 정신병자라고 진단한 일이 없읍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전혀 미래에 대한 회망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이것이야 말로 정신적으로 무언가 고장이 나있다고 할것입니다. 이렇게 볼때에 미래지향성은 정상이요 합리적입니다.

미래는 비록 과학적으로는 증명하지 못하여도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미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전진하고 또 여기서발달, 발전이 옵니다. 그러면 인간이 지향하는 미래는 어떤 미래여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모든 꿈과 소망,모든 동경,향수, 그리움을 채워주는 것 이어야합니다. 그것은 곧 영원하고 무한한 행복이어야 합니다. 생명과 빛으로 가득 차 있고, 가장 아름답고,가장 거룩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곧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 즉 진,선,미 자체요 또한 생명과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은 결국 의식 무의식 중에 이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읍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을 하느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도 있읍니다. 그냥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생명 또는 끝없는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결국은 같습니다. 예컨대 사랑을 본다면 인간은 어떤 사랑을 찾고 있읍니까? 그것은 영원하고 무한하고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결코 추상적인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추상적인 것이면 非存在 일 수 있읍니다. 비존재는 사랑할 수 없읍니다. 그러기에 참 사랑은 존재여야 합니다. 바로 존재 자체여야 합니다. 바로 영원하고 무한하고 사랑 자체이며,동시에 살아있는 어떤 존재여야 합니다. 이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인간은 이 하느님을 희망하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人의 희망은 바로 이 하느님이야말로 인간이 희망하는 그분이심을 굳게 믿는데 있읍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모든 인간이 지닌 미래에 대한 희망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모순이라는 말씀을 드렸읍니다. 그런데 희망이 충족되 어야 한다는 것을 과학으로 증명할 수도 없다는 말씀도 드렸읍니다. 그러면 결국 희망이 충족된다면 또는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에 대한 인간 의 확신이 서 있을 때 가능합니다. 곧 믿음에서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확실히 충족된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희망은 의미가 있읍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크든 적든 또는 스스로는 不信者 혹은 無神論者 라고 주장할지라도ㅡ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사는 한ㅡ그는 이미 어떤 의미로든지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무의식 중에나마 미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이 없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나마 그가 믿는 미래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완전해 야 합니다.

때르둘리아노 (Tertullianus) 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리스도인이다” (Anima naturaliter Christiana) 라고 했읍니다. 아마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인간은 막연하게나마 미래, 그것도 완전한 미래 즉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별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크든 작든 무의식 중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해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더욱 뚜렷이 인정하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모든 인간이 일반적으로 지닌 막연한 기대와는 결코 다른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이야 말로 우리 희망의 전부임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닌 희망의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그리고 이분이 우리의 희망을 달성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그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거듭거듭 당신을 계시하시는 말씀을 하셨음을; 드디어는 그 말씀이 人性을 취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고,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희망이요, 그 분 안에 우리의 모든 희망의 성취가 있음을 굳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리 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존귀한 일이라고 하면서 그밖의 다른 모든 것은 다 쓰레기로 여긴다고까지 말 했읍니다(필립 3,8).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의 성취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면 사도 바울로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대충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이요 또 그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서 창조된 것입니다. 이 말은 無限하시고 永遠하신 하느님이 당신의 그 무한과 영원을 인간의 모습과,존재와 본성 속에 도장을 찍듯이 깊이 날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인간은 有限하면서도 無限을 갈망하고,時間 안에 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을 갈망하며 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읍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이 점에 대해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께 향하게 만드셨읍니다. 그래서 당신께 가서 쉬기까지는 언제나 평안치 못합니다" 라고 했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언제나 평안할 수 없읍니다.

인간은 자기 고향,자기 집에 살면서도 삶 전체를 참으로 평화롭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그네 같은 심정을 갖고 있읍니다. 이 나그네 심정은, 인간의 참된 고향이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라도 그분과의 깊은 만남 속에서만 비로소 인간은 어떤 平安을 누 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처음으로 인간답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가톨릭 文人이자 사상가인 레옹 불로와(L6on Bloy)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인간은 빵 없이 살 수 있다. 술과 집과 사랑과 행복도 없이 살수 있다. 그러나 神秘 없이는 살수 없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 신비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은 이 세상이 좋다고 하는 온갖 價値가 없이는 살수있으나, 하느님과의 만남 없이는 살수 없다는 뜻 입니다. 그 이유는 성 아우구스띠노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향해서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原型인 그분을 언제나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성서에 의하면 : 인간이 하느님을 찾기 보다는 하느님 이 인간을 더 찾고 있읍니다. 성서는 바로 인간을 찾아나선 하느님의 이야기, 그것도 아주 다이나믹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느님이 가장 찾는 존재이며 가장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애인이자 하느님의 꿈입니다. 그래서 결국에 하느님은 이 인간을 찾으시는 나머지 스스로 인간이 되어 오시기까지 하셨고,이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시고자 스스로 죽음 속에 들어오시어 죽기까지 하셨읍니다. 마침내 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 으로써 인간을 죽음에서 구하셨읍니 다.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여러분께 소개하면서 결론에 대신할까 합니다.

“아버지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께서는 성도들 이 광명의 나라에서 받을 상속에 참여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셨읍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읍니다.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읍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읍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읍니다”(골로 1,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