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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와 임종자에 관한 윤리문제
1982년 1월호 (제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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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공동체를 위한 선교방안 - 40가지의 實踐 方案 및 技術〈II〉
1982년 1월호 (제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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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의 말씀
1982년 1월호 (제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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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사상
1982년 1월호 (제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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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확신과 가치의 체험
1982년 1월호 (제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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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觀의 어제와 오늘
1982년 1월호 (제 79호)
III. 超越的 人格的 神觀과 問題性   救世 이래 인간의 상황은 계몽사조 의 대두로 말미암아...

종말론 연구 현황
1982년 1월호 (제 79호)
I. 問題의 提起   사람은 누구나 장래를 염려하기 마련이다. 내일,모래, 몇 년 안에, 몇 십 년...

復活節 事件과 原始敎會의 胎動期 그 歷史的 考察
1982년 1월호 (제 79호)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된 다음 그 직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 부활과 그 뒤에 이어온 일련의 사...

그리스도인의 희망
1982년 1월호 (제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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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거는 희망
1982년 1월호 (제 79호)
새해가 되면 누구나 희망에 벅찬다. 올해는 무슨 좋은 수라도 없을까고 가슴을 설레인다. 새해라고 해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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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1982년 1월호 (제 79호)

종말론 연구 현황

G. 그레사케

I. 問題의 提起

 

사람은 누구나 장래를 염려하기 마련이다. 내일,모래, 몇 년 안에, 몇 십 년 안에, 그리고 먼 장래에 나와 가 족과 직장과 계획은 물론 우리나라와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기 마련이다. 그러니 미래에 대한 질문은 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바로 이 질문에서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는 사 실이 드러난다. 사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고 자신을 이룩해 가는 역사적 존재인 것이다. 어떻게 인생 과제를 해결하는가에 따라서 자아완 성 또는 자아상실이 판가름난다. 만 일 인간이 그 깊디깊은 마음 속으로 부터 미래로 향하는 일이 없다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요理想도그릴수 없을 것이며 어느 한 가지 계획도 실 천에 옮기지도 못하리라.

 

사람들은 우선 가까운 미래, 예측 할 수 있는 미래를 두고 염려한다. 그러나 限界狀況 또는 極限狀況에 부딪치면 미래에 관해 한결 더 심각하게 懷疑한다. 이런 일 저런 일을 묻지 않고 인생 전반을 고려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물음은 마침내 최종 미래에 대한 물음,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물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곧 만사가 끝장나고 절망적인 것처럼 느낄 때면, 그리하여 인생과 역사란 온통 부조리뿐 의미나 목표 따위는 없다고 느낄 때면, 그래도 최종 미래는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반대로 어쩌다 일이 순조롭게 될 때면, 드물고 기이하고 부서질 것만 같은 이 행운을 두고 또다시 이렇게 질문하게 된다. 한편 값지지만 또 한편 단편적인 이 행운을 결 정적으로 그리고 영속적으로 완성하는 미래가 있을 것인가. 거듭 말하거니와, 미래에 대한 질문은 반드시 만사를 포용하고 만사를 완성하는 최종 미래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으로 바뀐 다. 인간적으로 봐서 무의미하고 절망적인 것도, 마침내 죽음도 넘어서 는 미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승 에서 이룩하는 단편적인 가치를 완성하는 미래가 있단 말인가 하는 물음 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계에서 는 미래에 대한 이 근본적인 질문을 받아들이고, 최종적. 보편적 희망을 선포한다. 그리고 이를 다루는 신학을 일컬어 종말론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계의 종말론은 정말 믿을 만한가? 그것은 현대인이 볼 때 전혀 현실감각을 상실한 순수 신화보다 나을 게 없지 않은가? 역사의 종말이 되면 우주에 이변이 속출 한다느니,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신다느니 그때 나팔소리가 울린다느니,죽은 사람들이 부활한다느니,최후 심판을 거쳐 선한 이들은 천당으로 을라가고 악한 이들 은 지옥으로 떨어진다느니 하는 종말 표상이 신화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따위 종말 표상이야말로 미개한 시대의 공상이 아니며 고대 세계관의 망상이 아닐까? 과연 현대인 이 이런 표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II. 傳統的 終末論

 

전통적으로 종말론에서는 하느님의 계시가 담겼다는 성서에서 개개인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에 관한정보를 얻고자 하였다. 전통적 종말론은 오늘 날 신학계에서조차 문제시되고 있다. 사실 성서연구에 역사 비판적 방법론을 도입한 결과, 전통적 종말론에서 성서와 전통의 상징적 표현들을 자주 잘못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상 전통적 종말론에서는 성서나 전통에 나오는 암호와 상징들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종말에 관한 정보인 양 착각하였다· 성 서와 전통에는 최종 미래가 환히 예고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전통 직 종말론에서는 암호와 상징들을 수집·정리하여 종말론을 정립했는데, 이따위 종말론은 비판적인 현대인을 설득시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프랑스 신학자 꽁가르(Y. Cougar)는 전통 적 종말론을 비꼬아 "마지막 일들을 다루는 물리학”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전통적 종말론을 더는 따를 수 없다 면 성서와 전통에서 "종말”에 관해 언급한 것을 새로이 이해해야 할 필요 가 있다·

 

III. 希望과 象徵

 

성서는 종말에 관해서 상징적으로 언급한다는 사실을 오늘날 성서학계 에서는 밝혀냈다. 성서는 최종 미래를 미리 알고 알리는 점쟁이가 아니다. 성서는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역사의 종말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밝히지 않는다. 종말에 관 한 성서의 말은 천지창조에 관한 말 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천지창조 신화가 태초에 관한 정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천지창조 신화에서는 인간이 하느님께 예속되어 있다는 체 험과 인간의 자유는 고귀하다는 체험 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은 이런 현실적 체험이야말로 만고 불변의 진리임을 천명하기 위하여 그 것을 太初에다 투사하였다. 그러므로 천지창조 신화에 나오는 태초는 시간상으로 우주의 기원을 말하는 게 아니라,만고불변의 기초와 만사의 핵심을 뜻한다. 그런데 처음과 끝은 상관 개념이므로 그 구조와 역할도 상응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종말에 관한 말 역시 시간상으로 역사의 종말 에 관해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종말언사는 현실적 인 체 험에서 나온 것이니, 곧 현재의 체험 을 최종 미래에로 투사한 것이다. 이를 풀이하면 이렇다. 과거와 현재에 인간과 역 사를 보살피시는 하느님, 만물의 근거요 받침이시며 의미요 목표이신 하느님, 만물을 이끌고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온 조물의 미래요 최종 의미이며 최종목표라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든 역사의 파국이든 그 어느 것도 하느님의 이런 뜻을 무효화할 수 없다. 하느님이 택한 사람은 지금이나 미래에나 성공하건 실패하건 항상 하느님 앞에 있는 법이다. 최종 미래에 관한 성서나 전통의 언급은 점쟁이마냥 미래를 내다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의 믿음을 인생 과 역사의 종말로 옮겨 놓은 상징적 연역이요 연장에 불과하다. 이 점을 가톨릭 신학계에서는 라너가 분명히 했다. “종말 언급은 희망의 상징이라 하겠다.” 이는 두 가지를 뜻한다.

 

㉮ 종말 언급에는 종말에 대한 선견지명이 아니라 희망이 드러난다. 앎과 바람, 아는 사람과 바라는 사람 은 다른 법이다. 아는 사람은 어떤 사물이 그렇고 그렇지 않음을 안다, 아 는 사람은 확인하고 논증하며 정의하고 演擇한다. 앎은 명백하고 一意的 이 며 확정적인 결과를 구한다. 이 와는 대조적으로 바라는 사람은 만사를 열린 채 놓아둔다. 바라는 사람에게는 바뀌지 않을 만큼 확정적인 것이 란 없다. 세상살이가 비록 모순·협곡·심연·암흑·무의미로 가득 차 있지만 바라는 사람은 이것이 전부라고 보지 않는다. 바라는 사람은 만사가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 미궁과 좌초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만사를 감싸는 최종 의미가 있다는 것, 만물은 결국 화해하고 구원 받는다는 것을 믿는다. 어떻게 그 런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 알지도 못 하면서 말이다. 희망은 흔히 아는 바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희망 한다. ≪희망과 기대는 많은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든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이 속담에는 깊은 예지가 들어 있다. 사실 바라는 사람은 흔히 미치광이 편이며 안다는 사람들,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편이 아니다. 바라는 사람은 자주 반대편에 서며, 확정적인 앎까지 문제시하고,만사를 열린 채 놓아두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경우에도 좋은 목표를 바라본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에 관한 성서의 언사는 희망의 상징이다. 그 뜻인즉 인생과 역사는 결국 구제된다는 것이다.

 

㉯ 종말 희망을 말할 때 상징을 사용한다는 점을 살펴보자. “희망”을 서술할 때는 으례 상징을 사용하는 법이다. 이와는 달리 지식에는 定式, 定 義, 단정, 명제,지론이 있는 법이다. 희망에는 그 대신 상징이 나온다. 꿈 과 징표,상징과 암호 같은 표상을 떠나서는 희망을 표현할 수 없는 것 이다. 그러니까 희망의 상징은 지식과 같은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차원으로 눈길을 돌리게 한다. 희망의 상징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기대를 넘어서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현실을 열린 채 놓아둔다. 이 상징은 지금 여기의 현실을 뛰어넘어 인간으로서는 말할 수도 없고 조작할 수도 없는 것을 번뜩이게 한다. 그러므로 희망의 상징 은 인간의 지식과 능력에 속하지 않는 것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거대 한 미래의 실상이 상징의 탈을 쓰고 인간에 게 접근하는 것 이 다. 상징은 종말 구원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제 상징을 어떻게 알아들을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상징은 그 무엇인가를 뜻하고 노리며, 그 무엇인가를 향해서 주의를 기움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다. 우리는 상징을 잘 못 普이하는 수가 많다. 근본적인 취지는 제쳐두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릴 때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나타나는 종말 희망의 상징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희망의 상징들은 종말 사건들을 미리 알리는 정보가 아니고 하느님께 거는 기대를 드러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저러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기대를 걸고 그분과의 공생을 바라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발타살 (H.U.v. Balthasar) 이 이 점을 분명히 했다.4)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낙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란다. 친교와 사 랑과 완성을 갈구하는 인간의 온갖 염원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바란다. 하느님이 곧바로 천당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고 하느님을 잃을세라 두려워한다. 이런 것이 바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무시무시한 법정 같은 최후심판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최후심판이라는 상징의 뜻인즉, 인간은 자기의 삶을 하느님 앞에서 책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죄를 범했고 또한 범하는 까닭에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하느님과의 만남이 곧 심판이다.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齊定的 審判이라면 인간이 죽는 순간에 또는 역사의 종말에 만나는 것은 최후심판이라 하겠다. 그럼 ?獄이란 무엇인가? 죽은 이들 이 천당에 갈 때까지 기다리는 장소 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간 을 단련하고 정화하신다는 뜻이다. 거듭 말하거니와,그리스도인은 종말 사건에 대해서 아는바 없다. 그는 종 말에 무슨 사건이 어떤 모양으로 일어날 것인지 상상할 필요도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달리 있다. 세상 만사가 끝장이 나더라도 하느님이 자기에게 오시며 자기 자신도 하느님께로 간다는 것을 감히 믿는 것이다. 종말에 하느님이 하늘에서 세상에 오신다는 상징은 바로 그런 뜻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종말 표상들을 철두철미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위격적 관계로 풀이했다.

 

IV. 希望의 根據

 

희망의 근거에 대해서 누가 묻는다 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희망으로 사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사실을 일컬어 “희망구조” 또는 "원초적 신뢰”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원초적 신뢰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것은 결국 兩意的이다. 그 신뢰가 성취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지 않는다. 그리스 도인은 하느님의 언약에 기대를 걸고 살아가는데,이 언약은 무엇보다 예수부활로 실현되었다. 장차하느님 이 이룩하실 미래는 예수 부활로써 이미 실현된 까닭에 예수 부활에서 우리는 최종 미래를 알 수 있다. 아니, 읽을 수 있다. 부활은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음이요,나아가서는 무의미한 것만 같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느님의 마지막 답변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이 마지막으로 보내신 결정적 使臣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러니 예수님은 살아계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외치셨지만 결국 실패하신 것만 같다. 그렇다면 만사는 뜻이 없고 허사이며 끝장이란 말 인가? 그분은 십자가에 처형되는 시각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은 것만 같은 쓰라린 체험을 하셨고 돌아가시는 순간에 "나의 하느님,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읍니까“(마르 is, 34) 하고 외치셨다. 이 체험과 절규는 결국 그분의 삶이 허사였다는 확정적인 증거가 아닐까? 예수님의 비극적인 죽음을 상기 한다면 그 부활의 뜻이 드러난다. 부활의 의미인즉 하느님이 예수님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만사가 끝장난 것만 같은 순간에도 오롯이 구제받고 완성되는 미래를 개척 해 주셨다는 것이다. 죽음이 비록 예수님을 無로 밀어넣었지만 하느님은 그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누리게끔 거두어들이셨다. 겉으로는 허무하게 보이는 예수님의 삶이 실은 완성으로 향하는 인생여로라는 것을 하느님은 부활로써 보여주셨다. 예수 수난 때에 달아났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에루살렘에 다시 모여 교회를 창립했는데, 교회는 철두철미 생명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죽음은 예수님의 이름조차 지워버렸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주님”이라는 존칭을 새로이 받으셨다. 예수주님이야 말로 이제와 영원히 세계의 미래를 구원의 미래로, 영생의 미래로,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충만의 미래로 이끌어가신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부활로써 최종 미래의 하느님으로 드러나셨다. 미래의 하느님은 아무것도 저버리지 않으시고 온갖 암흑과 무의미의 권세들을 쳐부신다. 이는 예수 한분에게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예수 부활로써 우리 모두의 미래도 보장된 셈 이다. 예수께 일어난 부활 사건을 우 리 모두에게 專고부동한 희망의 목표 가되었다. 그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벌써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작용하시어 기쁨. 사랑. 바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힘. 인내. 능동적 참여 등의 선물을 주신다. 요컨 대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 부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V. 歷史的 未來와

 

超歷史的 未來

 

오늘날 가톨릭 신학자 대부분은 위의 논술에 동조한다. 그러나 이제부 터 다룰, 역사적 미래와 초역사적 미래 관계에 관해서는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인 간이 개인의 삶을 꾸려가면서 또한 역사에 관여하면서 하는 일이 하느님께 기대하는 최종 미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

 

만일 역사와 종말은 아주 다르다고 한다면, 그리하여 종말 구원은 역사에서 도피하는 것 이라한다면, 이는 靈智主義일지언정 참 그리스도교는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와 종말,이승 의 미래와 하느님의 미래 사이에는 그 어떤 연관이 없을 수 없다·

 

현대 신학계에서는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5) 세 가지 학설로 대별해 보겠다.

 

㉮ 역사적 미래와 초역사적 미래간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보려는 설이 있다. 예로 라너 (K. Rahner)를 들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초역사적 미래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야말로 인간의 절대적 미래시디-. 그리스도교는 초역사적인 미래를 믿는 종교이니만큼 어떤 종류의 역사적 절대 미래이든 모두 배척한다. 그리스도교는 역사 안에서 절대 미래를 꿈꾸는 일체의 전제주의적 미래 설계를 배척하게 마련이지만, 합리적인 미래 설계만은 환영한다. 하느님의 질대 미래를 받드는 신앙은 합리적인 역사적 행위를 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역사적 투신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인간 본성에 걸 맞는 과업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 과업을 이룩할 의무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적 과업도 수행하게 된다. 종교적 과업이란 절대적 미래를 믿고 바라는 개방성이다.”,멧즈(J.B. Metz) 역시 라너와 같은 관점에서 출발한다. 다만 멧즈에 의하면 절대적 미래를 믿게 되면 정치적 투신을 하려는 충동도 받게 된다고 한다.

 

㉯ 역사적 미래와 초역사적 미래를 진화론적으로 보려는 설이 있다. 인간이 이룩하는 미래는 차츰차츰 역사의 완성인 오메가로 모이게 되는데, 오메가는 역사외 결과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선물이기도 하다는 설을 메이 야르 드 샤르댕 (Teihard de Chardin) 은 피력했다. 오늘날 해방신 계 또는 혁명신학계에서 비슷한 말을 많이 한다.

 

㉰ 인간은 누구나 역사 가운데 살면서 자기 자신을 이룩해 간다. 그리 고 인간은 각자 역사 한 가운데 살면서 이룩한 자기 자신을 즉음의 순간에 거두어간다. 이를 일컬어 개개인의 “역사 수확”이라 한다, 그리고 역사 수확은 수 만년 후 어느 한 시점 에서 일어나는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 개개인이 죽을 때마다 반복되는 사건 이다. ≫

 

여기서는 세 가지 설을 소개했을 뿐 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현대 신학 계에는 통설이 없는 형편이다.

 

(原文 : Gisbert Greshake, Eschatologie. Bemerkungen zur gegenwSrtigen theologischen Positionen, in: Konturen heutiger Theologie, Miinchen 1976, PP. 203 ? 212. 鄭良誤 譯)

 

1) 1ㅡ4항에서는 나의 저서 Starker als der Tod, Mainz 1976 을 참고하였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소개되었다:기스텡트 그레사케, 심상태 역, 종말신앙, 바오로출판사1980 년 (역주).

 

2) K. Rahner, Theologische Prinzipien der Hermeneutik eschatologischer Aus-sagen, in: Schriften zur Theologie y, 401?428.

 

3) 개신교계 변증신학자들과 실존신학자 불트만이 앞장서서 종말론직 언사의 상징성을 밝 혔다. 변중신학자들에 의하면, 종말론적 상징은 결국 하느님과 인간 세상은 "무한히 질 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불트만은 그 상징을 풀이하여 하느님의 구원경륜이야 말로 인간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 또는 인간이야말로 무한히 개방되어 있다는 뜻이라 한다.

 

4) H.U.v. Balthasar, Eschatologie, in: Feiner/Trfltsch/Backle (Hrsg.), Fragen der Theologie heute, Einsiedeln?Ziirich?Kfiln 3. Aufl. 1960, 403?421.

 

5) G. Greshake / G. Lohfink, Naherwartung?Auferstehung?Unsterblichkeit, Freiburg?Basel?Wien 1975, 22ff.

 

6) K. Rahner, Marxistische Utopie, in: Schriften zur Theologie 83.

 

7) G. Greshake, Auferstehung der Toten, Essen 1969, 373ff; G. Greshake/G. Lohfink, Naherwartung?Auferstehung?Unsterblichkeit, 113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