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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와 임종자에 관한 윤리문제
1982년 1월호 (제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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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공동체를 위한 선교방안 - 40가지의 實踐 方案 및 技術〈II〉
1982년 1월호 (제 79호)
21.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스포츠나 포크댄스 등) 젊은이들은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무언가 ...

주일의 말씀
1982년 1월호 (제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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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사상
1982년 1월호 (제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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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확신과 가치의 체험
1982년 1월호 (제 79호)
이미 이 정도만으로도 윤리적 관념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더욱 더 우리를 당황...

神觀의 어제와 오늘
1982년 1월호 (제 79호)
III. 超越的 人格的 神觀과 問題性   救世 이래 인간의 상황은 계몽사조 의 대두로 말미암아...

종말론 연구 현황
1982년 1월호 (제 79호)
I. 問題의 提起   사람은 누구나 장래를 염려하기 마련이다. 내일,모래, 몇 년 안에, 몇 십 년...

復活節 事件과 原始敎會의 胎動期 그 歷史的 考察
1982년 1월호 (제 79호)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된 다음 그 직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 부활과 그 뒤에 이어온 일련의 사...

그리스도인의 희망
1982년 1월호 (제 79호)
希望이라는 것은 무언가 오늘보다 더 나은 來日에 대한 바람입니다. 모 든 人間은 意識 無意識 중에 이러한...

우리 시대에 거는 희망
1982년 1월호 (제 79호)
새해가 되면 누구나 희망에 벅찬다. 올해는 무슨 좋은 수라도 없을까고 가슴을 설레인다. 새해라고 해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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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1982년 1월호 (제 79호)

神觀의 어제와 오늘

沈相泰 (가톨릭대학 敎授 . 神父)

III. 超越的 人格的 神觀과 問題性  

救世 이래 인간의 상황은 계몽사조 의 대두로 말미암아 급변하기에 이르렀다. 17세기 이래 급진적 발달을 보이기 시작한 자연과학의 諸발견은 유사 이래 자명하게 인정되어 왔던 지 구중심의 우주질서와 이에 입각한 일체의 기성질서를 철저하게 의문에 처하였다. 이렇게 모든 기성질서가 붕괴 되자 인간은 우주세계 안에서 의지 할 곳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상황이 급변하자 인간들은 자신과 일체의 實在 그리고 실재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새로 인식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기존하는 객관적 진리에 대해 회의를 하기 시작한 인간들은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사실인 자기 자신의 思惟 안에서 모든 依支와 확실성의 근거를 찾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제 사유하는 인간 주체가 모든 실재를 이해하는 중심점이 되었으며 인간은 자신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새로운 안목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이로써 인간 중심적인 정신사적인 상황이 전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소위 ‘인간학적 전환’이 이루어진 가운데 인간은 자기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새로운 차원에서 제기한다. 인간은 개별적인 주체행위,즉 인식과 의지행위 속에서 객체화된 대상을 초극하고 전체를 지향하는 자신의 초월성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고,이 본질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규명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존재에 부딪히게 되는데 여기서 소위 ?초월적 神規定이 생겨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어서 본시 유다-그리스도교적 계시의 인격적 신관이 현대의 대화적 인격주의에 입각하여 철학적 사유단계에서 새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하에서 인간과의 연관 속 에서,이를테면 인간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는 神에 대해 언급하는 현대 신학의 대표적 두 신관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1. 超越的 神觀의 性格

데까르뜨 (R. Descartes, 1596~1650) 의 신증명은 그의 인식론에 기여하고 있다.“ 이 인식론은 방법적 회의로부터 출발하여 인식능력의 진실성과 이 인식의 보증인 신의 존재를 파악한 뒤에야 전개될 수 있다. 그런데 데까르뜨는 세계의 목적론이나 偶有性에 의지하는 우주론적 증명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外界 實在가 바로 회의의 대상이며 이 회의는 하느님의 존재 수용과 함께 비로소 극복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의 신 존재 定礎의 출발점은 주체적 사고가 성취 되는 가운데 현시되는 明證性이다. 그래서 모든 논리적 推論에 의지하지 않고 순수직관을 통해서 정신에 다가 오는 明哲判明한 觀念(idea clara et distincta)을 곧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로 표현하고 있다.2)  

데까르뜨는 하느님의 존재가 명석 판명한 신 관념에 내포되어 있다고 본 다. 그는 “내가 명 석 판명 하다고 보는 모든 것은 참되다”는 명제를 일반으로 경한 뒤에 자의식을 분석 ≪l· 고 거 기서 신의 관념과 존재를 유도해 내 는 것이다.3) 인간의식 안에는 출처가 다른 관념들이 발견된다. 일부 관념 들은 감각으로부터 유래하고,다른 관념들은 인간 환상의 산물들로서 인간 자신에 의해 형성되었다. 또 다른 관념들은 탄생하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生得的 觀念들이다. 이리한 관념 들은 本有觀念(idea innatee)들이라고 불리운다. 이 관념들은 단순한 상념 들이 아니라 ?在라고 규정된다. 그리고 이 본유관념이 명석성과 판명성 을 많이 제시하면 할수록 이 관념은 더욱 실재적이라는 것이다.  

데까르뜨에 따르면 본유관념들 중 에서 일차적이고 가장 탁월한 관념은 명석함과 판명함에서 다른 관념들을 능가하는 가장 완전한 본질로서의 신 관념이다. 다른 본유관념들이 유한한 在만을 제시하는 데 비하여, 무한 한 본질의 이 관념은 무한한 실재를 대변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관념 이 최고로 명석판명하기 때문에 어떠한 다른 관념보다 객관적 실재를 내 포하고 있고, 그 때문에 더 진실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까르뜨는 신의 존재를 보중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思考過程들을 포착 한다. 우선 그는 모든 사고행위는 어떠한 작용의 가능성의 前提이기에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기본명제 에 의지한다. 무한대한 實在로서의 신관념이 인간정신으로부터 연원되어 나온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유한한 인간정신이 무한한 존재의 합당한 원인일 수는 없으므로 무한대한 실재로서의 신관념이 인간정신으로부터 발원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신을 무한하고 독립적이며 최고의 통찰력과 세력을 지닌 실체로 이해하며 나 자신이 이 실체에 의하여 조성되었으며, 다른 현존하는 존재자들 역시 조성되게 한 실체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치밀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이것이 나에게서 연유될 수 없음이 명백해진다. 언급한 바에서부터 하느님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결론지어야 한다. 실체의 관념이 내 안에 있으면 그건 내가 하나의 실체인 때 문이며,나 자신은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한 관념은 참으로 무한한 어느 실체로부터 접촉되지 않으면 그것은 무한한 실체의 관념은 아닐 것이다. 4) 無에서 어떤 것이 생성될 수 없고 완전한 것이 불완전한 것에서부터 작용하거나 온전한 원인으로서 생성될 수 없다는 것은 과연적 조명에 따라 분명해 진다.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 완전성에 나 자신은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완전성들은 우리와는 상이한 존재,즉 하느님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이 당연하게 나온다. 5)

데까르뜨는 신의 관념이나 의식이 인간의 자아상념이나 자의식보다 先行한다고 가르친다. 우리 인간이 불완전하고 유한한 것을 생각하려면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 완전하고 무한한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완전한 본질의 관념이 내 안에 있지 않다면 내가 의심한다든가 소원을 가지고 있다든가 또는 내게는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고 그러므로 나는 전적으로 완전하 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데까르뜨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예속성 그리고 偶有性으로부터 가장 완전한 존재로서의 하느님의 존재를 추론하기도 한다. “내가 회의하는 존재 이며 불완전하고 예속적이라는 점을 유의하면 할수록 나로부터 독립적이고 완전한 존재로서의 하느님의 명석 판명한 관념이 제공된다. 이러한 관념이 내 안에 있고,이러한 관념을 가진 내가 존재하는 데에서 하느님은 역시 존재하고 나의 실존이 그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점이 분명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7)신 관념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마치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 자기 표지를 주입하듯이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이 관념을 주입한 것으로 데까르뜨는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인간 은 특정하게 그의 모상으로서 그와 유사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을만 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관념이 담기어 있는 이 유사함은 인간이 자신을 포착하는 같은 능력에 의하여 나로부터 포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논증은 하느님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인간본성과 더불어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 자신의 존재 가능성이 부정된다는 통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요컨대 데까르뜨의 신존재 증명에서 특기할 점은 하느님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이 인간 주체성 속에서 함께 사유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관념을 통해서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인간만이 하느님을 자기자신의 남(者)으로서 자신 위에 정초하도 록 요청한다는 것이다. 데까르뜨에 의해서 정립된 이러한 신관은 스피노자 (B. Spinoza, 1632?1677), 칸트 (I. Kant, 1724?1804)를 거쳐 독일 관념 론 (J.G. Fichte, 1762~1814; G.W. Hegel, 1770? 1δ31; F.WJ. Schelling 1775?1854)에서 심화되고 금세기에 이르러 가톨릭 신학계에서 칼 라너 (K. Rahner, 1904~ )에 의해 주도 되는 인간학적 초월신학(Tranzenden-taltheologie) 에서 결정적으로 신학에 수용되어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라너는 인간학적 전환을 이룩한 현대의 정신적 시대상황이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을 요청한다고 보고 소위 초월신학의 전개를 통하여 시대적 요 청에 부응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8) 그런데 라너는 그가 추구하는 인간중심적 신학이 결코 신중심적 신학과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고 보고있다. 이 두 국면의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 없이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한 사건의 두 측면이라 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신학의 다른 주제들,이를테면 친사들이나 물질세계들과 병행하는 부분적 테마이거나, 또는 인간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고도 하느님께 관하여 신학적으로 언급할 수 있다는 견해를 거부한다. 이러한 초월신학의 기본취지의 맥락 안에서 칼 라너의 神規定過程을 一瞥할수있다·9)

라너는 인간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被投되어 있는 세계 내 존재 (Sein in der Weit) 라는 철학적 통찰올 神思惟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은 세계 에 던져진 가운데 다른 存在者들처럼 단순히 現前하지만 않고 필연적으로 존재 일반에 대한 질문 (Frage nach dem Sein iiberhaupt)을 제기하는 現存者임을 강조한다. 이 존재에 대한 질문은 인간으로 생활하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표출된다. 그리고 인간이 존재일반에 대한 물음 속에서 존재와의 明示的 관계에 들어서고 함축적으로 모든 존재자들과의 관계에 들어서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라너는 존재일반에 대한 질문을 제 기하는 가운데 인간은 존재에 대하여 주제적이고 명시적은 아니나, 비 주제적이고 함축적인 先行的지식을 가진 다고 본다. 그 어떤 면에서도 전직으로 未知의 것에 대해서는 도대체 질문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험적 지식을 부정할 경우에는 의심없이 명백한 질문제기 현상도 부정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개별적인 인식이며 意志의 주체작용은거부할 수 없이 주어진 존재의 地平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울러 시사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 안에 서 만나는 모든 事象들을 유한한 실재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그가 존의 地平 안에서 이들을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어떠한 實在의 한계는 인식 자가 그 한계를 넘어섰을 때에만 비로소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개별 事物에 대한 인식은 이륜 파악하는 행위가 이 사물의 한계를 넘어서 '보다 많은 것' (das Mehr) 을 지 향해야 만 가능하다. 라너는 개별사물을, 유한한 것으로 파악하고 抽象해 내는지 성적 가능성을 ‘前取,(VorgHff) 라고 부른다.10) 이 前取가 개별 사물을 능가하여 지향하는 ‘보다 많은 것’은 개별 사물과 같은 유형의 대상일 수는 없고,인식될 수 있는 개별대상들 의 절대폭 (Absolute Weite) 이라고 라너는 규정한다. 개별대상은 이 절대 폭을 채우지 못하는 속에서 유한한 實在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라너에 의하면 前取가 개별대상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地平을 의식하도록 開顯케 한다.

라너는 개별대상의 유한성을 비로소 인식하도록 하는 地平 자체도 대상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찬으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의 유한성이 인식되게 하는 地平南體도 당연히 현존해야 한다고 보고, 이 前取의 지향점인 地平이 바로 存在 (das Sein) 라고 규정하는 것 이다. 인간의 주체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초월적 前提인 前取는 바로 무한한 존재를 지향하는 前取라는 것이다.

‘(이 前取는 存在를 지향한다. 이 前 取의 幅은 단순히 감각 속에서 표상 될 수 있는 것의 총체성이 아니라, 자신의 否定的 비제한성 속에서의 存在 바로 그것이다.”11) 여기서 뜻하는 存在의 否定的 비제한성이란 말은 前取의 지향점으로서의 存在가 유한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를테면 前取는 存在를 자체로 무한한 것으로 드러낸다.  

라너는 매 주체작용 속에서 보다 많은 것을 지향하는 前取 속에서 하느님의 存在가 함께 긍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식의 필연적이고 따라서 항상 이미 성취된 조건으로서 이 前取 속에 …절대존재의 실존이 함께 긍정되고 있다. 가능한 대상으로서 前取의 幅에 맞닿을 수 있는 것이 함 께 긍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존 재가 前取의 幅을 남김없이 채울 것 이다…이러한 의미,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다. 前取는 하느님을 지향한다.”라너는 여기서 절대존재로서의 하느님의 實在가 前取의 幅을 통하여 함축적으로 함께 긍정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前取가 하느님을 지향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存은 인간이 세계 안에서 발견하는 유한한 존재자를 파악하는 가능성의 조건으로 요청된 것이다. 라너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자들을 존재의 地平 안에서만 비로소 인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동시에 항상 절대 존재인 하느님께 개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그(人間)는 이것을 명시적으로 알고 있거나 모르거나,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상관없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道上에 있음으로써 비로소 인간이다. 그는 항상 하느님께 무한하게 개방되어 있는 유한자이다·”13)

라너는 요컨대 인간이 매 주체행위 속에서 지향하는 地平으로서 절대존재가 인간정신의 본질이 前取의 폭을 남김없이 채운다는 점에서 이 절대존재인 하느님이 인간의 주체행위 성취 속에서 함께 긍정된다고 보고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본질을 '하느님 지향의 초월’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인간학적 전환을 이룩한 근세의 형이상학적 사상가들이나 현대의 초월 신학자들 사이에서 표현의 차이, 강조점의 이동 등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동일한 원리가 작용한 다.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實在에 대한 물음은 古代 및 中世의 우주론적 思考에서처럼 객관적 실재세계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서가 아니라,오히려 인간실재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 로 된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現 存하는 한,하느님이 이 現存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인정되고,인간의 심층적 素因으로 內住하고 있다고 파악된 것이다. 이들 학자들은 의식을 존재와 동일시하여서 절대존재인 하느님을 절대의식이라고 규정하면서, 하느님이 인간의식 안에서 비주제적 으로 항상 공정되고· 있다고 보는 것 이다. 이들에게서 하느님은 더이상 세계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古代 우주론적 신관)도 아니요, 세계 彼^者 로서의 초월자(전통적 유신론적 신관) 도 아니고,인간 현존재의 심충적 소인으로서 인간 안에서의 초월자(Deus in me)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2. 人格主義的 神觀의 性格  

초월적 신관에서는 유다-그리스도 교적 계시의 인격적 신상이 후퇴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면 소위 대화적 인격주의 (Dialogischer Personalismus)에 입각하여 형성된 인격주의적 신관 에서는 사물처럼 대상화, 객체화될 수 없는 신의 인격성이 강조되고 있어서 현대 개신교 및 가톨릭 신관의 대표적인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14)  

주체로서의 인간실존이 사물처럼 대상화되거나 객체화되어서는 안되는 다른 주체 ‘너,당신’들인 인간세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며, 인간의의 식 역시 선행하여 작용하는 다양한 복 합 요인의 영향을 받고 있음이 구명된 것은 정신사적으로 볼 때 연륜이 길지 않다.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 1804~1872)에 이르러 상대방인 ‘너, 당신’이 주체인 ‘나’의 실존을 위해 본질적 의미를 지니고, '너, 당신’과의 관계를 맺는 가운데 도대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음이 철학적으로 규명되기 시작했다. 이 철학적 규명작업은 사상사의 획기적 돌파구로 평가되고 있으며, 소위 인격주의 (Personalismus)의 사상가들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착수된 바 있다. 금세기에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1878~ 1965)와 페르디난드에 브너 (Ferdinan-di Ebner, 1882?1931) 그리고 프란즈 로센즈봐익 (Franz Rosenzweig, 1886?1929) 등 유다계 독일 철학가들에 의해서 인간의 사고가 무진제적이 아니라,본시부터 他者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화적 사고 (Dialogisches Denken) 라는 것이 규명되었다. 인간이 애당초부터 완성된 존재자로서 현존하지 않고, 타자로부터 실존을 선사받고, 타자에 의해서 자아완성에 이르는 존재자임이 이 대화철학에서 깊이 있게 제시된 것이다. 나에게 말 을 걸어오는 타자의 체험이 인간이 세상에서 하게 되는 최초의 체험이라는 사실에 입각해서 세계 안에서 자유로이 역사하는 인격적인 하느님의 존재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많은 신학자들이 노력하고 있다. 스위스 태생의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 한스우르스 폰 발타사르 (Hans Urs von Balthasar, 1905? )는 母子관계를 분석 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실재를 제시하려고 한다·15)  

새로 탄생한 아기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비로소 눈뜨게 된다. 아기가 짓는 첫번째 웃음과 첫번째 삶의 표시는 어머니로부터 받는 사랑에 대한 첫 응답이다. 이 어머니의 미소와 사 랑 없이는 아기의 정상적 심장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인격적 기능을 대치할 수 없다. "태양이 초목을 일깨우듯, 사랑이 사랑을 일깨운다. 발타사르는 어머니가 사랑이 가득 찬 시선으로 아기를 바라보는 속에 실재의 충만이 근본적으로 현시되고 있다고 본다. 이 사랑의 체험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고 원초 사랑인 하느님의 실재를 함께 현시케 할 수 있다고 그 는 간주한다. ‘당신’(어머니)에게로 향하는 움직임 속에서 나는 당신으로 부터 제공된 공간을 나의 성장과 자유 그리고 인식을 위한 것으로 체험 하는 가운데 자신의 자아를 비로소 의식하게 된다." 공간이며 세계가 나의 은총에 의하여 존재하지 않고 당신의 은총에 의하여 존재한다.”17) 내가 아니라 당신에 의해서 허용된 공간 속에서,그리고 당신의 부름에 대한 응답 속에서 나의 전 실존이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어머니의 품에 자기 자신을 마치 둥근 공처럼 내던지며 응답하는 어린이들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랑에 대한 이리한 응답적인 자기성취는 전인적이어서 '존재와 사랑은 공존한다’ 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18) 이 말은 세계 내 존재로서 인간의 자아는 사랑에 의해 가능한 ‘나-당신-우리-관계’의 지평 안에서만 성취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다른 인격체를 지향해서 자신을 초극할 때에 비로소 자신을 성취하고 보다 충만한 자아를 형성하 게 된다. 남을 지향하는 초월 속에서만 인간 본연의 인격화내지 자아구현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이 이러한 원초체험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될 때에, 고맙게도 자신이 존재의 영역에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경탄스럽게 느끼게 되고 동시에 세계에 被投되어 있게 된 우연성에 대한 경악이 발생한다고 발타사르는 본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의 우연성에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 질대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자신의 정신을 통하여 알게 된다는 것이다.  

존재의 인격적 성격의 발견은 발타사르에 의하면 바로 귀납적으로 인격적이요, 역사적으로 자유롭게 役事하는 사랑의 하느님, 아브라함과 이사악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 계약의 하느님,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지시한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물음은 일차적으로 최고 존재자나 모든 존재자의 최종 원인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기보다, 자기 자신과 인류를 존재케 하는 인격적 사랑에로 이끈다는 것이다.  

3. 超越的 人格主義的 神觀의 間題性 

인간 주체성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요청된 하느님의 신성은 여러 계층으로부터 문제시되고 있다. 우선, 인간중심적 신관은 오늘날 인간중심적 무신론에 의하여 비관되고 있다. 근세적 형이상학이나 초월 신학 안에서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의 존재영역 안에로 편입돼 있는 하느님 의 신성은 포이에르바하 이래 논란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정신의 지향점으로 규정된 신을 무한한 행복을 갈구하는 인간의 投射(Projektion) 에 지나지 않는다고 폭로한다. 그에 의하면 무한자의 意識이란 인간의식이 무한대한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무한자를 의식하는 인간에게는 그 자신의 본질의 무한성이 의식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으로 보고 자기의 본질을 독자적인 것으로 내세운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행위란 실제로는 인간의 자기 경배이고, 신이 탄 투사되고 위격화 된 인간의 반향일 뿐 이라는 것이다. 신의 규정들도 대상화된 인간본질의 규정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본질은 인간성의 대상화 된 인간 본질이자,인격화한 윤리성의 본질이며, 인간 사랑의 대상화 된 일반적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포이어바하는 인간의 초월을 인간의 자기기만적 투사로 보아, 인간은 종래에 가서는 자기자신만을 만날 뿐 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인간들의 신이란 다름 아닌 神化한 인간본질이 고 신의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라 고 단정하였다. 결론적으로 신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학이라고 규정된 것이다. 사실상 인간의 주체행위의 가능성의 조건으로만 현존하고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사건과 무관한 신은 무한을 갈망하는 인간의 투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초월적 신관에서 문제되어야할 점은 여기서 단지 抽象的인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추상적 인간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구체적으로 특정한사회,또는 국가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 역시 無前提的이 아니라, 다양하기 그지없는 복합적 요소, 예컨대 생리적, 심리적, 유전적, 경제적, 정치적,지리적,문화적 요소 등에 의하여 제약되어 있으며,인간의 범주적 행위가 의식에 명료하게 노출되지 않는 무의식적 요인에 의해서도 규정된다는 점이 오늘날에는 주지되어 있다. 따라서 무전제적으로 인간의 주체행위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규정된 신의 신성은 당연히 문제시되기에 이른 것이다.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존재를 이미 인정하는 계시신앙 안에서도 인간의 인식과 자유행위의무전제한 가능성의 조건으로 요청된 신은 문제시된다. 신앙 속에서 대하게 되는 하느님은 사물처럼 대상화, 객체화되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인격적 실재이다. 인간학적 초월사고의 주체-객체-도식 (Subject -Objekt - Schema) 에 입각하여 파악된 신에게는 절대적 자유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신은 인간의 주체행위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요청되고 있다. 현대와 같이 인간 에 의 하여 이룩된 2차 내지 3차 세 계 안에서는 인간만이 만사를 제조내지 조작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주인공으로 쉽게 등장하기 마련이다. 만사를 이미 파악하는 인간의 주체능력 앞에 경탄을 불러일으킬 만한 참신한 사건 이란 존재치 않으며 예기치 않게 선물로 나타날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기계기술의 영향을 극도로 받고 있는 이 현대 사회에서 지구중심의 우주론적 사고에 입각하여 형성된 형이상학적 신관이 논란되고 있는 한편,근세 이후의 인 간학적 초월적 사고나 현대의 인격주의적 사고에 입각해서 형성된 신관 또한 문제가 없지 않다.

인격주의적 神信仰은 그때그때 인격적인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관통된 사람들에게나 타당성을 제시할 수 있으나, 그러한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사랑은 관통된 사람에게만 ‘明證性’ 을 지니는 배타적 관계를 이룬다. 예컨대 세상에 태어나서 일평생 참된 사랑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고 남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수락과 인정을 단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조주인 절대사랑으로서의 인격적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 신앙이 보편적 요청을 내세우는 한, 창조 이래의 파란 만장한 과정으로 이어오는 역사 현상을고 려치 않는 인격적이고 대화적 사고에 입각한 신관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런데 이러한 인격주의적 신관은 신앙을 私事的 사건으로 오해하여서 내적이고 사사영역에만 극한시켜 신비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비현세적 신관을 유포시킬 우려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관은 다분히 분파적 폐쇄성으로 나아갈 경향을 지니고 있어서, 동서고금의 만인과 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며 완성자로서의 하느님의 실재를 제시하는 데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신관은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다가와 이야기하고 촉구하는 하느님의 인격성을 강조하고 이 점에서 다른 종교의 신관과 구별되는 점을 드러낸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어떻게 ‘당신’이라고 부르며 인격체로 대할 수 있는가는 신중히 취급해야 할 문제 이다. 인격은 타 인격과의 구별을 뜻하며 따라서 유한성을 자체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인격범주를 하느님께 적용할 때에 문제가 생긴다. 모든 존재자를 존재케 하는 하느님이 인간과 같은 존재자로서의 유형의 인격체일 수는 없다. 우리는 인격범주의 비적합성을 알면서도 보다 적합한 다른 용어를 알지 못하기에 인격적 호칭으로 하느님을 대하고 있을 뿐이다, 인격적 인간을 존재케 한 근거이며 원천인 하느님이 物-?在일 수는 없기에 인격적인 실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비유사성이 유사성보다 더욱 크다는 교부들의 통찰에 유의하고 하느님을 의인화하여 표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부재하고 침묵하고 사망했다고 선포되는 하느님은 바로 이 의인화한 인격적 신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1) R. Descartes의 神觀에 대하여 : 金炯孝 Γ方法敍說 外」, 三省版 世界思想全集 19, 서울(三省出版社) 1976; 鄭義采,「存在의 根據問? J, 서울(성바오로출판사) 1981, 221-229; W. Schulz, Der Gott der neuzeitlichen Metaphysik, Pfullingen 1957, 31-85; Q. Huonder, Die Goltesbeweise, Stuttgart 1968, 62-65; U. Neuenschwander Gott irn neuzeitlichen Denken I, Gutersloh 1977, 96-106; H. Kttng, Existiert Gott?, Munchen 1378, 23-63 참조.  

2)「方法敍說J, 44.  

3) 같은 책 45.  

4) R. Descartes,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edit.) Ch. Adam/P. Tannery I, Paris 1964, III, 45.  

5) R. Descartes, Principia Philosophiae, Amsterdam 1644, I, 18.

6)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III, 46.  

7) Ibid., 53.  

8) K. Rahner의 超越神學의 基本趣旨에 대하여 : 졸문, "칼 라너 超越神學의 基調思想>>

「가톨릭大學 論文集」, 5(1978), 53-89 참조. 9) K. Rahner의 超越的 神規矩에 대하여 그의 작품 : Geist in Welt : Zur Metaphysik der endlichen Erkenntnis hei Thomas von Aquin, Innsbruck 1939; Horer des Wortes: Zur Grundlegung einer Religionspkilosophiey Miinchen 1941; Grund-kurs des Glaubens: Einfiihrung in den Be griff des Christentums, Freiburg 19 76, 35-96 참조.  

10) Geist in Welt, 98-100; llbrer des Worles, 76-78 참조,  

11) Geist in Welt, 289. 

12) Horer des Wortes, 81; Geist in Welt, 128.  

13) Hdrer des Wortes, 85.  

14) 對話的 人格主義에 대하여 : B. Casper, Das dialogische Denken: Eine Untersuc-hung der religionsphilosophischen Bedeutung Franz Rosenzweigs, Ferdinand Ebners und Martin Bubers, Freiburg 1967 참조.

 15) H.U. von Balthasar, Der Zugang zur Wirklichkeit Gottes, in; MySal II, 15-43.  

16) Ibid., 15.

 

17) Ibid., 16.

 

18) Ibid., 17.

 

19) 超越的 神觀의 間題性에 대혜서 : 좀문,Glaube und lleil: Eine Untersuchungzur Theorie von den uanonymen Christen” Karl Rahners, Tubingen 1975, 187?19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