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1967년 8월호 (제 2호)

공의회는 왜 있었는가

김수환

I. 머 리 말

역사적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종결된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분명히 그 공의회의 정신과 지침에 따라 교회쇄신을 착실히 실천에 옮겨야 할 때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에 와서도 무엇을 어떻게 실천에 옮겨야 할지 그 향방조차도 모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사목자들은 공의회 이래 버릇처럼 「교회는 쇄신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또 그 때마다「공의회 정신에 따라서」라는 단서(但書)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지만, 막상「그 이른바 공의회 정신이 무엇이냐」고 묻기라도 한다면,말문이 막힐 정도로 스스로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공의회가 왜 있었는가에는 더욱이 답할 수가 없다.

우리 나라 교회에도 공의회의 영향이 전무한 바 아니다. 특히 전례면에서는 불과 몇 해 사이에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할 수 없을 만큼 격심한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는 앞으로도 더욱 더 커져갈 것이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는 새 전례의 실시에 관한 한, 다른 선진국 교회에 비해 뒤지지 않을 만큼 순조롭다고 자부할 수도 있다. 용어 번역상의 애로 등 난관이 없는 바 아니지만, 적어도 서구(西歐)에서는 아직도 있다는 Una Voce(라띤어 고수주의)같은 역조(逆潮)에 부딪힌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는 한국 교회가 그만큼 공의회 정신에 의해 쇄신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 말할 수는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새 전례가 한국 교회에서 별 큰 마찰없이 비교적 순조로이 도입 실시될 수 있었다는 것은, 반대로 한국 교회의 정신과 지식 수준이 평균이하이고, 그 때문에 맹목적인 순응에 불과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근한 예(例)로 새 전례는 모국어 사용을 비롯하여 평신자의 적극적 전례참여를 가능케 했다. 이것은 또한 공의회 정신과 특히 그 교회관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에 과연 얼마나가 이것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그 새 전례가 교회 내에서의 평신자의 지위회복을 비롯하여,성직자와 평신자의 관계 개선 및 상호간의 대화와 협동을 가져옴으로 교회쇄신을 위해 원천적 역할을 할 수 있고 또한 사실상 그렇게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반성해 볼 때 우리는 대체로 새 전례의 양식을 받아들였다는 것 뿐이고,그것의 바탕과 원천이 되는 새 정신을 소화시킨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시점의 한국 교회로서는 전례를 비롯하여 공의회에서 제시된 새로운 지침을 형식적으로 도입 실시하는 것만에 만족할 것이 아니고, 그보다 앞서 공의회 정신이 무엇인지,더 앞서는 공의회가 도대체 왜 있게 되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는 바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여기 필자 나름대로 우선 공의회는 왜 있었는지,살펴 봄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이번 공의회의 의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II. 공의회는 왜 있었는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이전의 20차에 달한 다른 공의회와는 달리 특정교리의 판정 혹은 신앙과 도덕상의 이단유설을 단죄(斷罪)하기 위한 공의회가 아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연 이번 공의회는 그 누구에게도 또 그 무엇도 Anathema sit 한바 없다. 심지어 무신론에 대해서까지,이를 배격하는 교회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음을 천명하였으나, 무신론자들과의 대화는 오히려 장려하고 있다. (현대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사목헌장 21조).

공의회는 이를 소집한 요한 23세에 의해 창도되고,또 그를 계승한 바오로 6세에 의해 거듭 확인 강조된 바와 같이 무엇보다도 교회쇄신을 그 목적으로 삼았다. 이 외에 그리스도교 일치 및 현대 세계와의 대화라는 성격상 이질적인 것 같이도 보이는 목적설정이 있으나, 실은 그 어느 것도 교회쇄신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으며 또한 이를 전제하고 있다.

쇄신은 실로 공의회의 제 1차적,또 그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 공의회의 모든 토의와 분위기, 여기서 나온 모든 교령(敎令)은 「쇄신」이라는 「라이트·모티브」에 의해 낙인되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 예(例)로 새 전례는 모국어 사용을 비롯하여 평신자의 적극적 전례 참여를 가능케 했다. 이것은 또한 공의회 정신과 특히 그 교회관과 깊이 관련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에 과연 얼마나가 이것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시 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그 새 전례가 교회 내에서의 평신자의 지위회복을 비롯하여,성직자와 평신자의 관계개선 및 상호간의 대화와 협동을 가져옴으로 교회쇄신을 위해 원천적 역할을 할 수 있고 또한 사실상 그렇게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반성해 볼 때 우리는 대체로 새 전례의 양식을 받아들였다는 것 뿐이고,그것의 바탕과 원천이 되는 새 정신을 소화시킨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시점의 한국 교회로서는 전례를 비롯하여 공의회에서 제시된 새로운 지침을 형식적으로 도입 실시하는 것만에 만족할 것이 아니고, 그보다 앞서 공의회 정신이 무엇인지,더 앞서는 공의회가 도대체 왜 있게 되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는 바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여기 필자 나름대로 우선 공의회는 왜 있었는지,살펴 봄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이번 공의회의 의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II. 공의회는 왜 있었는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이전의 20차에 달한 다른 공의회와는 달리 특정교리의 판정 혹은 신앙과 도덕상의 이단유설을 단죄(斷罪)하기 위한 공의회가 아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연 이번 공의회는 그 누구에게도 또 그 무엇도 Anathema sit 한바 없다. 심지어 무신론에 대해서까지,이를 배격하는 교회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음을 천명하였으나, 무신론자들과의 대화는 오히려 장려하고 있다. (현대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사목헌장 21조).

공의회는 이를 소집한 요한 23세에 의해 창도되고,또 그를 계승한 바오로 6세에 의해 거듭 확인 강조된 바와 같이 무엇보다도 교회쇄신을 그 목적으로 삼았다. 이 외에 그리스도교 일치 및 현대 세계와의 대화라는 성격상 이질적인 것 같이도 보이는 목적설정이 있으나, 실은 그 어느 것도 교회 쇄신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으며 또한 이를 전제하고 있다.
쇄신은 실로 공의회의 제1차적,또 그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 공의회의 모든 토의와 분위기, 여기서 나온 모든 교령(敎令)은 「쇄신」이라는 「라이트·모티브」에 의해 낙인되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 공의회는 왜 이렇듯이 교회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했는가? 또한 교회는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에 이같이 쇄신을 강조하게 되었는가?
필자는 여기서 공의회 이전의 교회상(敎會像)을 회고해 봄으로써 이에 대한 답을 구해보고자 하며, 그런 고찰은 곧 공의회가 왜 있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시사해 주리라 믿는 바이다.

공의회 전 교회상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위해서나 세계를 위해서나 분명히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공의회를 기점(起點)으로 하나의 새 세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또한 이를 종점(終點)으로 교회 사상(史上) 한 특징적인 세대가 그 막을 내렸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트리엔트 시대의 종식이다. 환언하면 16세기의 종교개혁 이래 오늘날에 이르는 40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에 걸쳐 교회생활과 양상을 결정적으로 지배한 트리엔트 공의회 시대가 종결된 것이다. 지난 세기에 제 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없었던 바 아니나,이는 트리엔트의 영향을 추호도 변경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더욱 강화함에 불과했다.

그럼 트리엔트 시대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종교 개혁에 대한 반종교개혁적 자세(姿勢)와 세속주의에 대한 반세속주의 내지 반세계적(反世界的) 투쟁으로 일관된 시대였다. 이는 물론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시대 상황 아래서는 교회로서도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된 호교적(護敎的) 입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에서 비롯한 프레테스탄티즘이나 르네상스에서 비롯한 인문주의 내지 세속주의는 대체로 반 교회적 색채가 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신조류에는 분명히 오류와 유설의 표방이 있었고 교회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제1차적 목표가 마치 가톨릭 교회의 타도 또는 말살인 양, 이들은 교회를 사사건건에 있어 비방하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자세 역시,그 동기와 취지는 무엇이었던간, 이들에 대하여 엄단(嚴斷)으로만 일관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자세는 교회당국의 그것만이 아니었고,개개 성직자와 신자들의 신앙 생활의 기본자세 같이도 보였다. 왜냐 하면 모두가 이를 선(善)과 악(惡)의 투쟁,「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의 결전으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가톨릭 교회만이 인류구원을 위한 참 진리와 은총을 위탁 받고 있다는 절대적인 신념이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말하는 것은, 신앙교리에 관해서 뿐 아니라 철학, 과학, 정치 등 무엇에 대해서든지 언제나 옳다는 일종의 자부심 내지 Triumphalism(그 원인은 멀리 4세기 초엽에 콘스탄틴 대제(大帝)에 의해 신교의 자유가 확보되고 교회가 특권 대우를 받게 된 그때에까지 소급되며,중세에 있어 교회가 사실상 문화의 주인공이 됨으로써 더욱 굳혀질 수 밖에 없었던 그 Triumphalism) 에 작용되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럼 이제 우리는 트리엔트 이래 교회의 반종교개혁 및 반세계적 자세가 구체적으로는 교회생활과 그 양상을 어떻게 규정지었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1. 반종교개혁 자세

트리엔트 공의회는, 오늘 날의 입장에서는 지나칠 만큼 엄율주의(嚴律主義)로 치우쳤다는 비판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혼란과 교회분열이라는 미증유의 위기는 교회로 하여금 공의회를 통하여 엄율과 엄단(嚴斷)을 단행토록 강요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교회로서도 비통을 극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불가피한 조처였다. 왜냐하면 교회는 오직 그와 같이 엄격한 태도를 취함으로써만 그 위기의 격동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와 같이 엄격한 자세를 지속시킨 데 있다. 물른 그 당시 교회는 자체를 쇄신함으로 종교개혁이 야기된 데 대한 원인요법(原因療法)을 쓰지 않은 바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가 외부로부터 부단히 공격받을 때 자연히 자체의 저항력을 배양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그 기능 역시 그렇게 발전되어 갈 수 밖에 없듯이 교회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할 수 있으며,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의 발전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반사작용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아니할 수 없다.

㉮종교개혁가들은 먼저 자기들 주장의 합리화를 꾀하기 위해서도 교회의 위계제도(Structura hierarchica)를 공격했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위계제도가 신적 권위의 설정임을 주장하고, 동시에 Societas perfecta에 오리엔테이션을 둔 교회의 가견적 사회성(可見的 社會性)을 강조함으로써 응수했다. 가톨릭 교회관이 현대에 이르도록 오랫동안 위계제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 원인은 여기에 있다.

교회는 물론 이번 공의회가 교회 헌장 8조(및 전례헌장 2조)에서 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단지 영적(靈的)인 무엇만일 수는 없다. 그것은 영적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가견적 집단이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면서 동시에 위계제도 중심의 사회이다. 한마디로 교회는 신적(神的)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가 융합된 실재(實在)이다. 그러나 위계제도의 일방적인 강조는 ㅡ비록 호교적 이유가 없었던 바 아니지만ㅡ 가톨릭 교회관에 있어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성격을 후퇴 시킨감이 적지 않으며,동시에 교회의 가견적 사회성의 과도한 주장은 때로 교회의 Mysterium 자체까지 가리운 역효과를 초래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는 다시,비록 교회에 필요한 권위질서를 확립하고 그로써 또한 가톨릭의 일치성을 더욱 견고히 한데는 크게 이바지했다 할지라도 교회로 하여금 군주정체(君主政體)와 다름 없는 봉건적(封建的) 신분사회(身分社會)로 전락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성직자와 평신자 사이에는 격심한 신분적 차별이 개제하게 되었고,평신자가 교회에 속하기는 하되, 그들의 위치는 미성년의 그것과 같이 종속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교회가 공의회 이후 오늘에 있어서도 성직자 위주의 교회상을 완전히 씻지 못한 채,여전히 이른바 Clericalism으로 비난받고 있는 것도, 평신자들 역시 여전히 자기들의 교회 내에서의 위치와 책임에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그 주된 원인은 가톨릭 교회관이 트리엔트 시대를 거쳐 이같이 오래 동안 위계제도 중심으로 발전해 온데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뜻하는 바는 교회의 생동력의 감퇴 내지 침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다음으로 종교개혁가들을 비롯한 프로테스탄측에서는 직위적(職位的) 내지 위계적 사제직(Sacerdotium ministeriale seu hierarchicum), 즉 성직자의 특수 사제직을 부인했다. 이는 물론 위계제도 자체를 공격한 그들로서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반응 역시 또한 당연히 신품성사의 존엄성을 일층 더 강조하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역효과는 수반되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신자들의 일반적 사제직(Sacerdotium commune)의 등한시였다. 지금에 와서 평신자들을 향하여「여러분도 간선된 인종 왕다운 사제군입니다」고 거듭 외쳤자, 이것이 그들에게 잘 납득되지 않는다는 현실의 경험은 가톨릭의 사제직에 대한 관념이 얼마나 성직자들에게만 편중되어 있었는지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 종교개혁가들은 또한 성경을 손에 들고 이를 임의로 해석할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를 복음에서 이탈했다고까지 비방했다. 그들은 또한 성경의 자유해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는 참상을 노출시켰다.

이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무엇이었던가? 성경 자유해석으로 인한 프로테스탄의 유설과 분열상에 대한 경계 때문이기도 하였겠지만, 교회는 지나칠 만큼 성경해석에 조심스러웠고,그것은 또한 불행히도 성경 연구의 부진과 평신자들의 성경에 대한 지식 감퇴를 초래시켰다. 오늘날에 이르도록 많은 평신자들이 성경을 애독하지 않는다는 현상은 그것이 비록 교회 당국의 뜻은 아니었다 할지라도,교회가 성경에 대하여 오랫동안 취해온 위와 같은 경계적 태도에 다분히 연유된다 아니할 수 없다. 신자들이 이같이 성경에서 소원된 개탄스러운 실정을 볼 때 우리는 「주 영생의 말씀을 가지셨으니 우리등이 뉘게로 가겠나이까?」한 시몬·베드루의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개혁에 대한 반종교개혁의 자세는 전례면에서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방어(邦語)가 전례에 있어 프로테스탄티즘의 표지(標識)와도 같이 됨에 따라, 가톨릭에서는 라틴어가 가톨릭의「심볼」이라고 간주될 만큼 그 위치가 절대적으로 강화된 것을 비롯해서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전례가 제도화,율법화,형식화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단지 종교개혁에 연유된 극도의 혼란을 막기 위한 반종교개혁 조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례 자체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대성을 띤 것 인데다가, 그것이 또한 예절 형식으로 밖에 달리 표현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교회는 전례에 관하여 집전자의 행동거지와 손가락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통일될 수 있도록 일체를 엄격히 규제하였다. 후에 가톨릭과 일치된 동방 각 교회에 고유의 전례와 전례용어를 그대로 허용해 왔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 용인에 불과한 것이었고,원칙과 이상은 라틴 전례를 통한 획일적 일원화에 있었다. 그것이 또한 프로테스탄티즘의 분열상에 비하여 가톨릭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을 과시하는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례의 이같은 제도적 획일주의는 무엇을 가져 왔는가? 그것은 이번 공의회 석상에서도 자주 지적 되었던 바와 같이 전례의 생활화를 오히려 저해한다는 역효과였다. 우선 평신자들은 전례용어인 라틴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도 전례에 의식적이요 적극적인 참여가 불가능했다. 전례상의 기도도 복음선포도 그들에게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나 다름 없었고, 그리하여 전례는 성직자들의 전유물화(專有物化)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성직자와 평신자의 계급적 차별과 유리는 어디서보다도 전례에 있어 현저했다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전례용어로서의 라틴어의 탁월성과 라틴전례의 우수성을 인정치 않는 바 아니나,동시에 그것이 교회의 생명 활동을 위축시켰다는 사실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왜냐 하면「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요,그 모든 힘의 원천」(전례헌장 10조)인 전례가 생활화되지 못하는 곳에서,신앙의 생활화나,열렬한 사도직 활동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상황 아래서는 참된 의미의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건설과 성장은 기대하기가 힘들 것이다.

이렇게 관찰해 볼 때에 우리는 트리엔트 시대에 있어, 비록 그만한 이유와 원인이 없었던 바 아니었다 할지라도,교회가 얼마나 교회관을 비롯하여 사목,전례,신학, 개개인의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제도화,율법화,형식화 되어 갔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물론 천주 성자의 강생 (Incarnatio)의 연장(延長)으로서,인간 사회안으로 화신(化身) 즉 Incarnatio 되어 가야 한다. 따라서 신적이면서도 인간의 집단인 교회는 제도나 법규를 만들지 않을 수 없고 이를 또한 필요로 한다. 이미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순수 영적인 교회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그 같은 주장은 당신의 Incarnatio의 연장으로서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의 뜻에도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군주정체(君主政體)와 같이 제도화에 편중되는 것도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었음을 여기서 함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이 잘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법의 정신을 희생시켜서까지 법규의 권화(權化)와도 같은 바리사이즘과 대결해 싸웠기 때문이다.

이번 공의회석상에서 생동적인 교회(the Dynamic Church)가 강조됨과 동시에 교회안에 만연되어 있는 Jurisdictionalism이 맹렬히 비판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2. 반세계적 자세

트리엔트 시대의 둘째 특징은 교회가 이미 반종교개혁에서 굳힌 확고한 자세로서 서구사회의 세속주의적 조류와 부단한 투쟁을 계속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위에서도 시사한 바와 같이 르네상스 이래 급속도로 발전해 간 인간본위(ㅅ間本位)의 인문주의가 반교회적으로 번져간 데 대한 교회의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였다. 교회는 아직 바록(Baroque) 시대까지는 문화 일반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17세기에서부터 그 영향력은 점차 감소해 갔다고 볼 수 있으며, 18세기에 들어서서는 범·세속주의적 조류에 교회는 오직 자기 방어의 태세만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교회와 세계,즉 서구사회와의 관계는 처음에는 상호간의 소원 (棘遠)으로, 그후에는 점차 적대관계로까지 발전해 갔다. 이는 특히 불란서 혁명을 계기로 하여 서구사회가 그 구조에서부터 격변되어 감으로써 날로 더욱 악화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계의 정신적,문화적 발전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었으며, 세계는 인간의 자기각성,자기의 창조력의 재발견과 더불어 교회없이 (sine Ecclesia) 혹은 교회를 거스려 (contra Ecclesiam) 독주해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니체의「신은 죽었다」의 선언,혹은 칼·맑스의 유물주의적 공산주의 선언 등에서 단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 뿐 아니라, 종교와 신(神)마저 거부하는 인간본위(ㅅ間本位)의 세계관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세계의 반교회적, 내지 반종교적 태도에 대한 교회의 답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단지 세계의 발전을 회의적으로 대하는 것만이 아니었고, Anathema sit 즉 단죄(斷罪)로서 응하는 극한적인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는 이른바 현대주의(Modernism)를 비롯한 일체의 반교회적 세속주의적 사조를 단죄한 삐오 9세의 Syllabus이다.

교회가 이같이 극한적으로 나간 데는 위에서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먼저는 그것을 바로 선과 악,「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투쟁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심리적인 작용도 적지 않았으며,그것은 역시 위에서 이미 지적한 Triumphalism 에 교회가 아직 젖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중세에 있어 오랫동안 종교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문화적으로도 서구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교회로서는, 그 기반(基盤)을 벗어난 사회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있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이단적인 것이라 단정될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트리엔트 시대의 교회는 세계와의 대화를 상실한 교회였다. 세계도 교회를 외면했지만,교회 역시 세계를 외면하였고,더 나아가 이를 심판하는 데만 시종하였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종교개혁을 계기로 무수한 양떼가 교회를 배반하고 떠난 데 이어,교회는 철학가,사상가,정치가,과학자 등 지성인 일반을 잃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가 격변하여 중세적 봉건 체제가 무너진지도 이미 오래인데도 불구하고,여전히 자체 안에 봉건제도를 고수한 탓으로 노동대중마저 잃게 되었다. 교회 당국이 노동자들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문제시하게 된 것은 언제 일인가? 그것은 산업혁명도 지난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였다. 또 교회가 민주주의적 사회체제에 대하여 이해하게 된 것은 언제인가? 그것 역시 극히 최근의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이때까지도 교회가 가장 이상적으로 보는 정치체제는 여전히 성 토마스.아퀴나스의 Monarchism 이었다. 오늘날의 교회상이 Anachronism (시대착오)로만 반영되기 쉬운 것도 그 이유는 교회가 이같이 오랫동안 세계 및 그 발전과 절연해온 데 기인한다 아니할 수 없다. 또 교회가 Sacristia의 교회 혹은 Ghetto화(化)된 교회라고 지적되는 것도 전혀 무근거한 말은 아니다. 누군가가 오늘날의 교회상을 뉴욕 (New York)시의 마천루(摩天樓)속에 파묻힌 성 빠뜨리치오 성당(New York 교구 주교좌)에 비긴 바 있으나,이는 참으로 오늘날의 교회가 나날이 발전되어 가고 변모되어 가는 현대 세계 안에 살면서도, 마치 그것과는 인연이 먼 무엇인듯 얼마나 후진성에 파묻쳐 있는지를 잘 말해 준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양상이 후진적이라든지, 초라하다든지 하는 그런 외적인 데만 있지 않다. 문제성은 더 깊은 데 있고,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가 트리엔트 시대를 거쳐 취한 반세계적 자세로 말미암아 신앙과 현실 생활의 분리를 초래했다는 데 있다. 환언하면 세속적인 것이면 무조건 기피 내지 경시한 나머지 세속은 곧 신앙의 적인양 생각하는 관념을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 낳게 한 것이다.

이런 관념의 원인은 실로 트리엔트 시대의 반세계적 자세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더 멀리는 중세적 수덕관에 혹은 그 이전까지 소급해 올라 간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트리엔트 시대에 있어 그런 관념이 일층 더 고정화 된 것은 사실이며,교회와 세계의 대립상은 정신과 물질,종교와 과학, 영혼과 육신,관상과 활동의 대립적인 관념을 만연시켰다 아니 할 수 없다. 그것은 곧 신앙과 현실생활의 균형 상실 내지 분열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가톨릭의 정통적 인생관과 세계관은 전인적(全ㅅ的)이요,전 우주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생활의 관념은 반드시 같은 것도 아니며,우리들의 실제 생활관념은 오늘날에도 어딘지 일종의 이원론적(二元論的) 윤리관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부인할 수 없다. 그럼 그 결과는 다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것은 현대사회 안에 신부재 (神不在)라는 심각한 문제의 제기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현세 도피에 사로잡혀 있어 설교는 공허하고,우리의 신앙 내용조차도 현대인에게는 거리가 먼,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교회나 우리의 신앙이 현대인에게 생활한 신(神)과 신앙을 증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에는 이번 공의회에서 강조되고 또 그 목적으로도 설정된 현대 세계와의 대화 문제는 단순히 세계와의 접촉에 있어서의 방법론,혹은 교회의 외적인 현대적응만의 그것이 아니요,보다 더 깊이 신앙의 문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환언하면 우리 신앙의 생활화를 위해서도 세계와의 대화는 절대적으로 요청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그 근원서부터 대화적인 것이다. 대화의 원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강생 즉 Incarnation, 신과 인간의 대화관계로 주어져 있다. 그 때문에 교회와 세계의 대화두절은 단지 세계와 교회의 유리 혹은 소원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요,교회본질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바로 교회의 존재이유(raison d’gtre)의 부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공의회의「현대 세계 안에 있어서의 교회의 사목헌장」이 지닌 의의는 실로 막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III. 결 어(結語)

이상과 같이 트리엔트 시대의 특징과 더불어,그것에서 결과된 교회상을 살펴 볼 때 우리는 여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왜 있었는가하고 묻기에 앞서「공의회는 있었어야 했다」는 것을 절감치 않을 수 없다. 환언하면 교회가 현대 세계 안에서 참으로 육화(肉化)된 그리스도의 연장(延長)으로서의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사명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나아가 또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공의회는 반드시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제 트리엔트 시대는 지나고 새 시대는 시작되었다. 이는 물론 트리엔트의 의의 상실,더욱이 그 공의회에서 정의된 교리의 변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트리엔트의 신앙고백은 어제에 있어서와 같이 오늘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이는 무엇보다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이 회기(會期)마다 트리엔트의 신앙개조(筒條)를 엄숙히 고백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잘 증명된다.

그러나 이번 공의회는 분명히 트리엔트의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정신자세와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했다. 이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밖에 없으나,필자는 상술한 소고에 이미 그 윤곽만은 간접적으로나마 제시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언급을 더하지 않겠다. 다만 여기 한 마디 부언하고 싶은 것은 트리엔트 시대의 제도적 교회상과 그것에서 결과된 권위주의 내지 율법주의의 문제, 혹은 현대 세계와의 대화 두절의 문제 등은 Curia Romana 또는 현행 교회법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환언하면 그것은 동시에 지방 주교들과 본당 신부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이기도 하며, 어쩌면 쇄신은 여기서부터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성직자인 우리 모두가 우리의 성직을 교회헌장이 천명한 바 그대로 Diakonia 즉 봉사로 (24조) 인식하고,철두철미 그렇게 살고 그렇게 생활하려고 노력하는데 있을 것이다.

또한 공의회 교부들은 사목헌장에서 '교회는 여하한 현세적 야망의 동기없이, 오직 하나만을 지향할 뿐이며,그것은 다름 아닌,위로자이신 성신의 인도 아래,신앙을 증거하고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구원하기 위하여, 봉사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봉사하기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다.’고 천명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입으로 천명한 것을 먼저 주교들을 위시하여 모든 성직자들이, 천명한 그대로 현실의 사목생활과 기타의 인간관계에 옮기는 데 교회쇄신은 달려 있다.

<필자 · 마산 교구장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