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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 해설 제2권 제2편(5)
1990년 2월호 (제 133호)
제1부 교회의 최고 권위 제2절 주교대의원 회의 <표1> 제3절 거룩한 로마 교회의 추기경 ...

주일의 말씀
1990년 2월호 (제 133호)
연중 제 5주일 : 2월 4일  장인산 (청주교구 교현동천주교회 신부)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성찰과 전망
1990년 2월호 (제 133호)
I. 머릿말 이 글에서 지난 40여 년 간 한국 천주교회가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이라고...

노조 운동이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
1990년 2월호 (제 133호)
의견 1 - 신찬균 (국민일보 수석위원)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나의 고백
1990년 2월호 (제 133호)
사회의 다양한 삶을 통하여 확인된 체험을 모으려 합니다. 여러 사람의 다양한 시각을 서로 교환하려고 합...

모두가 성인이 되는 사회
1990년 2월호 (제 133호)
1. '신앙과 사회'라는 주제를 놓고서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필자는 신앙을 연구하는 종교학자도 아니요, ...

현대 사회의 노조 문제
1990년 2월호 (제 133호)
대담자 : 정인숙(노동사목전국협의회 사무국장)/ 박홍수(여의도성모병원 노동조합 총무부장)/ 최 ...

노사 관계에 대한 교회법 규정
1990년 2월호 (제 133호)
새 교회법1)은 노사 관계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현대적인 가르침을 성문화하고 있다. 이 가르침은 189...

전교조는 살아 있다
1990년 2월호 (제 1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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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와 노동문제에 따른 재인식
1990년 2월호 (제 1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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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사회 1990년 2월호 (제 133호)

모두가 성인이 되는 사회

성찬경 (성균관대학교.교수,영문학. 시인)

1. '신앙과 사회'라는 주제를 놓고서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필자는 신앙을 연구하는 종교학자도 아니요, 또한 사회의 여러 현상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도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필자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결코 어떤 체계적인 생각을 역시 어떤 이미 확립된 방법론에 의해서 논술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다만 필자도 한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여러 가지의 역사적 변동을 겪으면서 살아온 한 사회인임에는 틀림이 없고, 또 한 천주교도임에는 틀림이 없으므로 사회와 종교(특히 천주교)의 상호간의 관련과 작용에 대하여 그 때 그 때 어떤 단편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므로 그런 것들을 모아 보는 형식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나아갈까한다. 


기실 ‘신앙과 사회’란 엄청나게 큰 주제임에 틀림이 없다. ‘신앙’ 하나만으로 도 굉장히 큰 문제요, 또 '사회’도 그러한데, 이 둘을 함께 묶어 놓았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는 이 문제를,"신앙인이, 또는 신앙인의 무리가 한 사회 안에서 어떠한 구실을 해야 그 사회가 살기 좋고 보람 있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규제 단화해서 생각하고자 한다. 이때에 신앙이란 천주교를, 사회란 한국의 사회를 주로 뜻하게 된다는 것도 필자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필자는 평소에 곧잘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본다. 즉, 만약에 어느 날 하루아침에 우리나라의 사람이 한꺼번에 모두가 성인(聖人)이 된다면 우 나라는 그야말로 행복한 사회, 행복한 지상 낙원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성인(聖人)들만 사는 사회에서 무슨 법이고 뭐고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작, “하느님을 흠승하라.”하는 것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하는 이계명(二戒命)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 밖의 모든 문제는 서로 사양하고 양보하는 가운데서 조화롭고 부드럽게 해결될 것이기에 말이다.


그런 공상은 그만두라는 조소 섞인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만을 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사회 제도가 합리적으로 잘되어 있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저절로 좋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사회 제도만으로 그 문제가 해결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사회 제도가 좋으니까 그 바탕에 좋은 사람이 된다면 과연 그것이 크게 보람 있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필자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훌륭하고 합리적인, 모순이 최소한으로 축소된 사회 제도야 얼마나 바람직한 것이겠는가. 그것도 사회를 행복한 사회가 되게 하는 하나의 길일 것이다. 필수 조건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사회를 행복한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길 또 하나의 필수 조건이 있으니, 그것은 곧 우리의 마음 안을 다스리는 일,'마음 안의 정치’이다. 즉 각자가 마음 안을 다스리는 일이다. 이 두 길은 마치 양극과도 같아서 둘이 서로 균형을 이룩하면서 나아가야만 하며, 어느 한쪽을 등한히 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한 종교가, 특히 천주교가 우리 사회에서 해야 할 일은 우선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을,그 다음으로는 그 선한 전파력과 영향력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사회 전체의 모든 사람들을 제각기 하나하나 성인(聖人)이 되게 하는 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박에 안 되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50년의 세월이 짧다면 100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1세기가 모자란다면 몇 세기가 걸리더라도 궁극에는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지체에 해당하는 교회와 교회에 속하는 모든 형제 자매의 궁극의 목표와 이상을 여기에 두어야만 할 것이며,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이미 짠 맛을 잃은 소금이나 다름이 없다 하겠다.


‘모든 이의 성인화(聖人化)’,참으로 지난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목표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일을 우리의 목표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일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결과보다도 우리가 추구하는 과정 그 자체에 더욱 뜻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성인이 무엇인데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하느냐고 할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성인을 '매우 착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성인에도 아우구스띠노 성인이나 프란치스꼬 성인과 같은 ‘대성인’에서부터 그렇지 못한 이를테면 ‘작은 성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착한 사람'이 성인되는 길의 시발점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이나 프란치스꼬 성인 같은 분은 ‘매우’자가 여러 개 붙을 수밖에 없는 성인이다. 다시 말해서 극히 착한 분들이다. ‘매우’자가 한두 개 붙는 성인은 조촐한 성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성인이건 큰 성인이건 간에 사람은 성인이 될 의무가 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교의 형제들은 성인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 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하고 가르치셨다. 교회는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더 착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그 계기를 제공해야 하며 인도해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매일매일 ‘주의 기도’를 통 해서 염원하듯이 땅 위에 하늘나라를 세우는 길이다.


2. 우리나라(한국)의 인구를 4천만으로 보고 천주교도를 대략 2백만으로 볼 때 천주교도는 전체 인구의 약 20분의 1 정도가 되는 셈이며, 이만하면 상당히 큰 하나의 무리 또는 집단이라 할 수가 있다. 따라서 만약에 한국의 천주교회가 사회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 집단적인 행동으로 대처한다면 상당히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때에 자연히 생각하게 되는 것이 순전히 사회 여건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단체와 종교 단체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의 사회적 집단으로서는 그 대표적인 것으로 정당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 문제를 좀 더 단순화해서 생각해 보면 결국 교회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되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교회와 정당이 전연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한 사회가 옳은 길에서 크게 벗어났을 때 교회 에서 하는 소리나 정당에서 하는 소리가 비슷하고 또 드물게는 집단적인 행동까지도 서로 유사한 모습을 떨 수 있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시적으로 그런 현상이 일 수 있다 하더라도 교회 본연의 사명과 정당과 같은 단체의 목적을 혼동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교회가사 회의 불의에 대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번 세계 성체대회 때에 내한했던 W. Kasper 주교의 강연에서 매우 적절한 생각과 해답을 얻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카스퍼 주교의 글을 인용할까 한다.


그러므로 만일 현실적으로 인간의 기본권 이라든가,정의나 자유나 자유와 관계되는 사안에 교회가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믿음과 정치를 서로 분리하기가 힘들지만 이 둘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르 12,17)


이와 같은 구분은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에 들여온 자유의 유산이다. 이는 모든 자유로운 질서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종교 행위의 자유를 보호할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하여 국가의 자유도 보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는 구분하되 둘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이 상호간의 관련을 과거 그리스도론의 형식을 대비하여 활용할 수 있겠다 : 둘을 혼합하지도 말고 분리시키지도 말라.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신앙과는 동일한 것이 아닌 선택의 폭이 있는 정치의 일상적인 것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상관이 되는 것에 대하여는 자신의 소리를 드러내야 한다. 이를테면 정당하고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품위라든지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와 같은 문제들이다('일치의 성사인 성체 성사’에서, 가톨릭대학 신학부편 제44차 세계성체대회 기념 국제학술대회 “성체와 교회”(1989),16면)


인용이 좀 길어졌지만 매우 함축적인 카스퍼 주교의 말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큰 원칙을 이끌어낼 수 있다. 즉 교회는 인간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 막는 국가 또는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침묵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해서 선택의 여지가 있는 정책적인 여러 문제에 대해서 일일이 발언해서도 안 된다는 원칙이다.


이러한 생각은 80년대 후반의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 및 민주화의 과정에 비추어서 생각해 볼 때에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이 교회에 소속되는 용기 있는 분들에 의해서 얼마나 크게 힘입었는가 하는 일은 모두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다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나 그 의로운 행동의 방향에 일단 커다란 관성이 붙고 난 후에,이번에는 그 관성의 힘에 끌려서, 교회를 통해서 나온 발언 중에는 지나치게 정치적인 문제와 인간의 자유 및 기본권에 관한 근원적인 문제를 가리는데 있어서 다소 신중하지 못했던 경우가 없지는 않았는가 하는 반성도 해봄직한 일이다. 상황이 급박할 때에는 개인이고 교회고 정당이고 간에 모두 똑같은 소리와 똑같은 행동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서도 교회가 지니는 본래의 사명을 잊을 필요는 없다고 여겨진다.


3. 교회와 교회에 속하는 교우들은 하느님을 흠승하고, 예수님의 본을 따른다는 점에 있어서만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뜻 자체를 제외하고,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느냐 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만인이면 만인이 다 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점에서는 결코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행동 통일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얼굴이 다 다르고 체격이 다 다르듯이 각자의 개성 또한 만인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실존적인 조건 또한 다 다르다. 나의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나의 생각의 결합이다。갑의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갑의 삶과의 결합이다. 을의 신앙 또한 그러하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 또한 모든 사람이 각자의 개성을 따라서 세부적인 여운과 무늬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느님은 모든 교우가 형제 자매로서 한 마음 한 뜻이 되기를 바라시겠지만, 그것은 그렇게 서로 일치하며 서로 나누는 것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구령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 각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하신 말씀 중의 (‘사람’은 모든 각자를 두고 하는 말이며 결코 집단을 동시적으로 뜻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교회라는 무리와 정당이라는 집단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교회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각 개인이 모두 자유스럽게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러한 공동체이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에 그 공동체는 아름다운 모든 꽃이 만발하는 꽃밭과도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반면에 정치적인 단체의 경우에는 일단 어떤 정책 강령 같은 것에 합의를 볼 수 있게 된 후에 그것이 그 단체 구성원 각자를 획일적으로 규제하는 작용을 할 것이며,따라서 그 구성원은 좋든 싫든 그 점에 관해서는 집단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야 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반면에 교회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뜻과 관련이 되는 일 이외의 일에 있어서 만의 하나라도 이러한 획일적인 규제를 상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참으로 행복한 사회는 그 사회의 모든 장소가 다 교육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이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 한가, 사회의 분위기가 맡고 있는 교육적인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나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교회야말로 가장 중요한 교육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 까닭은 교회는 사람을(교우를) 교육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보다 근원적으로 감화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감화란 표 안 나게 이룩되는 교육을 말한다. 교회는 하느님이 손수 임하시는 교육의 장소이다. 또한 하느님이 손수 임하시는 감화의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완벽 그 자체이신 스승을 모시고 있다.


교회가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을,또는 사회가 사회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성화’(聖化)하는 방법적인 원리에 관해서 필자의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필자는 어디까지나 그것은 '각개 격파(各個擊破)의 원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 전체의 분위기, 도덕의 수준 같은 것도 물론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성화의 문제도 마치 각자의 구령의 문제처럼 궁극적으로 개개인 스스로가 이룩해 나가야 할 문제이다. 결코 집단적으로 이룩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송충이를 잡는 데 있어서 살충제를 뿌려서 한꺼번에 모든 송충이를 전멸시키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송충이를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잡아 나가서 마침내 그것들을 다 없애 버리는 방법도 있다. 송충이가 너무 많아서 한숨만 쉬고 있다면 송충이가 없어질 날이 올 리가 없다. 그러나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써 한 마리 한 마리씩 잡아 나간다면 마침내 송충이가 없어질 날이 올 것이다. 사람의 성화도 이와 같이 각개 격파식이 될 수밖에 없다. 사 의 성화는 정치 경제의 문제와는 그 방향이 처음부터 다르다. 사람의 성화는 '마음 안의 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우선 교우를 주축으로 해서 차츰 사회 전체에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펴나가는 데에 가장 큰 뜻이 있는 공동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교회는 우선 교우 각자의 ‘성인화(聖人化) : 매우 착한 사람 되게 하기’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아무리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결코 교회가 포기할 수 없는 교회의 목표이자 이상이다.


사회가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서 형제가 형제의 자유를 억압할 때, 교회가 곧은 발언을 해서 사회를 옳은 길로 이끄는 일도 매우 용기 있고 의로운 일이다. 한편 전연 소리 없이 표 안 나게 착한 일을 해서 사회의 분위기를 고요하고 평화로운 쪽으로 이끌어 가는 일도 결코 교회가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이며 의무라고 생각한다. 드러나는 선행은 선행으로서의 가·치가 반감되게 마련이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그렇게 좋을 리가 없다.


“어느 해를 기점으로 해서 한국의 사회가 마침내 너무도 뜻밖에도 빨리 문자 그대로 지상 낙원이 되었다. 이 일이 모든 사람에게는 정말 기적으로만 여겨질 뿐 아무도 그 참된 까닭과 원인을 모른다. 그 까닭을 알고 계신 분은 하느님뿐이었다. 한국 사회의 모든 형제들이 차츰차츰 표 안 나게 착한 일을 해서 그 표양에서 오는 착한 기운이 마치 은은한 향기처럼 소리 없이 사회 전체에 스미고 퍼져서 마침내 한국이 지상 낙원이 된 것이었다. 필자는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를 이런 식으로 변모해 나가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 천주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도 신성한 사명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