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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 해설 제2권 제2편(5)
1990년 2월호 (제 133호)
제1부 교회의 최고 권위 제2절 주교대의원 회의 <표1> 제3절 거룩한 로마 교회의 추기경 ...

주일의 말씀
1990년 2월호 (제 133호)
연중 제 5주일 : 2월 4일  장인산 (청주교구 교현동천주교회 신부)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성찰과 전망
1990년 2월호 (제 133호)
I. 머릿말 이 글에서 지난 40여 년 간 한국 천주교회가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이라고...

노조 운동이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
1990년 2월호 (제 133호)
의견 1 - 신찬균 (국민일보 수석위원)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나의 고백
1990년 2월호 (제 133호)
사회의 다양한 삶을 통하여 확인된 체험을 모으려 합니다. 여러 사람의 다양한 시각을 서로 교환하려고 합...

모두가 성인이 되는 사회
1990년 2월호 (제 133호)
1. '신앙과 사회'라는 주제를 놓고서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필자는 신앙을 연구하는 종교학자도 아니요, ...

현대 사회의 노조 문제
1990년 2월호 (제 133호)
대담자 : 정인숙(노동사목전국협의회 사무국장)/ 박홍수(여의도성모병원 노동조합 총무부장)/ 최 ...

노사 관계에 대한 교회법 규정
1990년 2월호 (제 133호)
새 교회법1)은 노사 관계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현대적인 가르침을 성문화하고 있다. 이 가르침은 189...

전교조는 살아 있다
1990년 2월호 (제 133호)
1. 서 언 1989년 여름 명동 성당은 이 땅의 억압받는 민주화 운동의 마지막 보루인 전교조(全敎組)가 다...

가톨릭교회와 노동문제에 따른 재인식
1990년 2월호 (제 133호)
선교 200주년을 맞이했던 한국 가톨릭교회는 눈부신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특히 1960년대 이후의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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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자료 1990년 2월호 (제 133호)

주일의 말씀

장인산 (청주교구 교현동천주교회 신부)

연중 제 5주일 : 2월 4일  장인산 (청주교구 교현동천주교회 신부)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이사58,7-10) :예언자이사야는 참회의 날에 모여 와 단식 을하는 예루살렘의 군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가르친다. “여러분들의 단식이나 예배도,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이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눌 마음이 없으면, 곤경에 처해 있는 이웃을 도울 생각을 안 하면, 하느님과도 일치를 이룰 수 없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바라기 힘들다는 가르침이 독서 안에 들어 있다.


제 2독서(1 고린 2,1-5) :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의 내용이 십자가의 소식임을 일깨워 준다. 하느님께서는 구원 사업 자체를 비천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 눈에 부적당하게 비쳐지는 방법을 통하여 이룩하신다.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을 뽑으실 때에도 분명히 드러났다. 바오로 같아 예수를 미워하던 사람을 뽑아 쓰시고, 어부와 세리 등을 제자로 뽑아 쓰셨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의 위력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홀로 속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복 음(마태 5,13-16)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몸담고 사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셨다.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빛은 환 하게 만들고, 소금은 음식 맛이 나게 도와준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 들이 말 잘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신자들의 행동을 보기를 원한다. 세상 사람들이 설령 신자들의 옳은 행동을 보고 난 뒤에 조롱과 박해를 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교신자들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빛이신 주님의 운명을 같이 나누어야 할 사명을 수여받은 사람들이다.


2. 강론 핵심


우리는 하느님 공경을 건성으로 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고 살아야 한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모두 믿고, 그분이 시키시는 일은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하느님 공경을 옳게 하는 일이다. 하느님 공경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려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행동으로 심는 것이 훗날 세상의 모습을 결정짓게 된다. 선행은 세상을 밝게 만들고 악행은 세상을 어둡게 만들 것 이다. 크고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내 작은 행동이 이웃 한 사람에게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준다면, 이미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큰 일을 하신 셈이다.


3. 교부들의 가르침 :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세상의 빛이시다


이 점을 유념하십시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또 다른 곳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너희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너희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제 주장이 옳은 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이런 말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인들도 물론 작은 빛들이신 것은 사실이나 그분들은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빛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나게 되면 누구나 다 어두워지는 법입니다. 그들을 비추신 그 빛은 전연 변함이 없는 빛 자체이시고 자체 내의 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큰 빛으로부터 빛을 받은 작은 빛들을 신뢰합니다. 즉 예언자나 사도들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신뢰하는 것이 작은 빛 그 자체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언자나 사도들을 비추시는 그 원래의 빛 자 체를 믿는 것이고, 그래야만 우리들도 그 원래의 빛 자체이신 분께로부터 빛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으로 주님은 어둠 속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찾아오셨음을 분명히 말씀하셨고, 또 그분을 만난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빛으로 나오게 되고, 이 빛을 믿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 빛은 세상에 오셨는데 원래 이 빛 덕으로 세상이 창조되었던 것 입니다. (아우구스띠노주교의 요한 복음 주해서, 54째 강론)


4. 예화 : 밤과 낮의 구별

예전에 한 유다인 랍비가 젊은 제자에게 질문하였다. “언제 밤이 물러가고 낮 에게 자리를 내주는가?” 그 젊은 제자가 대답을 하였다. “아마도 사람의 눈에 하늘에서 훤한 빛의 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는 때가 아닐까요? 혹은 사람과 숲을 구별하여 보게 될 쯤이 아닐까요?” 랍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 밤이 낮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물러가는 때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자신의 형제 자매를 보는 것을 깨닫는 때이다. 아직 그렇지 못한 동안에는 우리 마음속에 어두운 밤이 물러가지 않은 상태이다.”


5. 마무리 묵상


입으로만, 말로만 자신이 신자라고 하면서 행동으로 교회에 협력하지 못하면 밝은 신자가 못된다. 주님께서도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셨다(마태 8,21). 하느님의 뜻은 이 세상을 밝히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아드님을 빛으로 보내주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거울 노릇을 하는 것이다. 거울이 깨끗하면 주님을 더 잘 보여 드릴 수 있다. 또 촛불은 자신을 태우고 녹이며 주위를 비춘다. 소금도 자신을 녹여 음식을 맛내고 썩지 않게 보호한다. 우리도 자신이 손해 보더라도 주님의 뜻을 따를 때 하느님의 빛을 받게 되어 주위를 밝히게 된다. 손해는 조금도 보지 않으려고 할 때 신자의 사명은 이룩할 수 없고 하느님의 뜻도 따르지 못하게 된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비우신 주님의 모범을 따르도록 하자.


연중 제6주일 : 2월 11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집회 15,15-20) : 지혜의 스승인 벤 시라흐(그리스도 강생전 180년 경)는 두 종류의 그릇된 주장을 물리치려고 입을 연다. 첫째 오류는 사람이 죄 짓게 되는 것은 운명이니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즉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으니 인간의 죄는 그 책임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이다. 또 둘째 오류는 하느님은 인간을 전혀 돌보지 않으신다는 주장이다. 즉 인간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하느님은 전연 모르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장이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인간에 대해서도 부족하게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과 악 사이에서 자신의 갈 길을 선택하는 것이 그 본성에 속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속하는 것은 당신의 창조물인 인간을 돌보시는 것이다.


제2독서(1 고린 2,6-10) : 고린토 교회는 우리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모범 교회는 아니었다. 여러 가지 문제점과 다툼이 있었고, 그 외에도 자신들은 남보다 더 깊은 지식과 영적 체험을 갖고 있다는 자존심이 강했다. 그러나 참된 지혜는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는 데 있는 것이다. 이 지혜는 바로 하느님의 오묘한 비밀을 아는 지혜인데, 하느님께서 이 지혜를 오직 완전한 사람에게만 부여하신다. 완전한 사람은 바로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다.


복 음(마태 5,17-37) : 예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하여 드러내신 하느님의 뜻으로 설명하신다. 하느님의 법규를 지키는 일은 외적인 준수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 자세가 문제 이다. 즉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2. 강론 핵심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란 말은 옳은 말일까? 이 말아 옳은 말이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동을 원하고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즉 하느님께 순명할 줄 아는 사람이 곧 자유로운 사람이다. 오늘날 시대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이해하려면 그 배경을 이해하여야 하듯이, 우리의 신자 생활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신자들을 살게 도와주시는 그 배경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 안에 잘 드러났다. 즉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여 계시고 우리를 돕는 분이시다. 이것이 우리들의 온 희망이다.


3. 교부들의 가르침 :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주인이시므로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고 율법을 만드시는 분이시다


요청하는 방법에 꼭 맞는 방법대로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는 점은 정말로 경탄 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으십니다” 하고 말씀드리자, 주님의 대답은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대답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고, 주님께서 사랑의 행동을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주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었”습니다. 율법은 문둥병자를 손으로 만지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 금하였습니다(레위 13,3 참조). 그러나 율법의 주인이신 주님은 율법의 지배 아래 계시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만드십니다. 주님께서 만지지 않으시고는 낫게 할 수 없어서 만지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만지셨습니다. 또 사람들처럼 문둥병자 만지기를 무서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분으로서 오염될 수 없는 분이셨기에 문둥병자를 만지자 즉시, 보통 때는 전염시키던 문둥병도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던 것입니다.

(암브로시오의 루가 복음 주해서 5,7)


4. 예화 : 무서운 바람과 따뜻한 햇볕


옛날에 바람과 햇님이 누가 먼저 사람의 옷을 벗기나 내기를 하였다. 먼저 바람이 세차게 찬 바람을 불어대기 시작하자, 옷을 벗기는커녕 추워진 그 사람은 옷깃을 세우고 웅크리고 꼼짝 하지 않았다. 그 다음 해가 따뜻하게 햇볕을 쪼여 주자, 그 사람은 차차 겉옷부터 벗기 시작하더니 더워지니까 내복까지 벗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율법의 주인이시면서도 우리를 엄하게 꾸짖으시거나 멸망케 하지 않으시고, 죄를 짓고 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데 부름을 받은 사제들이다. 본당 일이 우리 뜻대로 잘 안되고, 신자들이 잘 따라와 주지 않을 때 쉽게 야단을 치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믿음이 강한 신자는 그대로 견뎌내지만, 약한 사람들은 대부분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이제 새해부터는 절대 분노하거나 특히 고백소 안에서 화를 내어 꾸중하지 말고 온순한 말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드리는 사제들이 되도록 노력하자. 되도록 모든 신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햇볕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며 태양이신 주님의 사랑을 배우는 길이다.


연중 제7주일 : 2월 18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레위 19,1-2.17.18) : 레위기 책 속에는 규칙들을 모아 놓은 부분들이 있는데 그 중 한 부분을거룩하게 사는 생활규칙이라고 부를 수 있다.(17장-25장).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바쳐진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이 백성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께 속해 있고, 그 생기는 순간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 야훼가 너희를 에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가 정해주는 모든 규정과 내가 세워주는 모든 법을 지켜 그대로 살아야 한다. 나는 야훼이다”(레위 W,36-37). 이 말씀으로 하느님께 속한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결과가 생긴다. 형제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즉 선을 베풀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이 구약의 가르침에 사랑의 계명으로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셨고 실천하셨다.


제2독서(1고린 3,16-23) :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이다. 교회가 거룩하다고 고백하는 것은 교회 안에 하느님의 성신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는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자이다. 크거나 작거나 분열은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 본성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겨 무슨 고상한 경지에 오른 듯이 뽐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복 음(마태 5,38-48)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복수, 즉 모욕이나 손해를 당했을 때 그대로 복수하는 것은 아주 잘하는 행동같이 보이고 구약 시대에는 옳은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고집스러웠던 백성에게 적용되던 이 법을 이제 하느님의 사랑의 표시로 더 이상 여길 수 없게 되었다. 새 계명은 ‘조건 없는 사랑’ 이라 불리운다. 이 계명의 근원은 하느님 자신의 본성 안에 있다.


2. 강론 핵심


예수께서는 불의를 당하고도 폭력이나 복수를 행하지 않고 참는 사람을 진복자라고 부르셨다(마태 5,5). 자기의 권리를 늘 찾아 먹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니 다. 복수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찾다가 자칫하면 더 큰 불의를 부르게 되고, 증오를 더 부채질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자기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큰 선물을 얻게 된다. 즉 자유와 평화를 주님께로부터 얻는다.


3. 교부들의 가르침 : 원수를 사랑함은 완덕의 표시


우리가 복음 성서를 읽으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젊은이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태 19,18). 이런 계명들은 조금 모자라는 중간 계급에 속하는 계명들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가 예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해야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 19,21). 그 전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하셨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44).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완전하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 되기를 원하면 이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은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햇볕 을 비추어 주시고 구별 없이 땅을 비와 이슬로·촉촉하게 적셔주십니다(마태 5,45. 48). 이것이 바로 완전한 본분으로, 그리스 철학자들은 kα?oρθωμα 라고 불렀습니다. 이 완전한 계명을 통하여 언제 한번 실수한 사람이라도 다시 쾌차하게 됩니다. 자비의 덕은 좋은 덕행입니다. 그 이유는 자비도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기 때 문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완전하신 성부를 닮기 때문입니다.


4. 예화 : 양파 한 뿌리


옛날에 나이 많은 부인이 살았었는데 아주 악하게 살다가 죽었다. 이 구두쇠 여인은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마귀들이 와서 그녀를 붙들어 지옥 불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그 부인의 수호천사는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어떤 한 가지만이라도 선한 행동을 한 일이 있으면 하느님께 알려 드릴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수호천사는 하느님께 말씀드렸고 하느님의 허락으로 그녀의 일생이 기록된 책을 뒤져 보았으나 선한 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보고 드릴 것이 있었다. “주님, 그 부인이 한 번은 양파 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에게 던져 준 일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러면 그 양파를 가지고 가서 지옥 불바다 속의 그 부인에게 내밀어 붙들게 하고, 만일 그 파로 그 부인이 들어 올려져 나올 수 있다면 낙원에 가서 살게 하여라. 만일 양파가 끊어지면 그대로 지옥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수호천사는 즉시 부인에게 달려가 그 양파를 내밀었다. “자, 이 파를 잘 붙드세요. 내가 당신을 끌어낼 수 있는지 봅시다.” 천사는 조심스럽게 당기기 시작하였다. 거의 그 부인이 다 올라왔을 때였다. 거기 있던 다른 죄인들이 그것을 보고는 매달려 붙기 시작하였다. 그 부인 덕에 같이 구원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은 악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발길질로 차서 떨어뜨리려고 요동을 치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나 혼자만 끄집어내는 거지, 너희들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야! 이 파는 내 파이지 너희 파가 아니란 말이야!”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여리디 여린, 다 썩어 가는 양파는 뚝 끊어지며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 여인은 불바다 속으로 도로 떨어져 오늘날까지 거기서 타고 있다. 천사는 울면서 떠나갔다. (도스토예프스키)


5. 마무리 묵상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이웃에게도 사랑을 베풀게 된다. 주님께로부터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이웃의 곤경을 볼 때 역시 자비로워진다.

교회에 바치는 교무금도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고, 결국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교무금을 마치 교회에 뜯기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하느님께 정성껏 바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도로 몇 배로 축복을 주시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세상의 저축이나 보험은 들면서도, 하느님의 은혜에 선행으로 정성으로 가입하는 것을 깨닫지 못함은 안타까운 일이다. 천상 재물에 마음을 돌린다면 오죽 좋을까!


연중 제8주일: 2월 25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이사 49,14-15) :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 속에는 하느님께 자기들을 다시 해방시켜 고향으로 데려가시리라는 것을 믿기 힘든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고 잊으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언자 이사야는 구원의 소식으로 시원한 대답을 전해준다(이사 49,15^20).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잊지 못하듯이 하느님은 자녀 백성을 결코 잊지 못하신다.


제2독서(1고린 4,1-5) :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봉사자들이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그대로 베푸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셨다. 하느님을 이웃에게 계속 보여 주는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가 하는 판단은 하느님께서 홀로 하실 일이다.


복  음(마태 6,24-34) : 오늘 복음의 말씀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재물에 대한 사랑이 병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재물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 히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다. 전에나 지금이나 이 사실은 불변하는 진리이다.


2. 강론 핵심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돌보고 계신다고 진정 믿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섭리 대신 오늘날의 과학 기술이나 사회 기관의 힘을 믿고 있는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모든 생명의 주님이시다. 하느님을 떠나면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과 같고, 하느님 안에 머물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한다.


3. 교부들의 가르침: 세상 제물의 노예가 된 사람은 하느님을 공경할 수 없다


의인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결핍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착한 사람은 굶어 죽지 않게 하신다.”(잠언 10,3). 또 다른 곳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버림받거나 그 후손이 음식을 구걸하는 것을 나는 젊어서도 늙어서도 보지 못하였다”(시편 고25),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약속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7, 31-33).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약속을 따르자면 다른 모든 것도 곁들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모든 점에 있어서 하느님께 의탁하면 말 입니다. 다니엘은 믿음의 명령에 의해 사자 굴 속에 갇혀 있었을 때 하느님께서 는 다니엘에게 음식을 장만해 주도록 섭리하셨습니다. 맹수들이 보는 앞에서 이 하느님의 사람은 음식을 먹었고, 배고픈 사자들은 그를 잡아먹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아도 도망쳐서 홀로 숨어 있었을 때 까마귀가 와서 시중을 들었고, 새들이 음식을 물어 다 먹게 하여 박해 때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1 열왕 17,6).

(치쁘리아노의 주의 기도에 관한 설명,21)


4. 예화 : 감나무 교무금과 하느님의 섭리


예전에 한 동네에 농부가 살았는데 몹시 가난하였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신자 생활을 하였고 식구들이 여럿이어서 여유가 없었는데도 교무금은 정성껏 바쳤다. 그 집에는 두 그루의 감나무가 있었다. 집 앞에 있는 나무는 작고 열매가 어느 정도 달리는 나무였다. 집 뒤에는 큰 감나무가 있어서 매년 감이 다닥다닥 많이 달리곤 하였다. 그 농부는 앞에 있는 감나무는 교무금 나무로 정해 매년 그 수확을 하느님께 바쳤고, 뒤에 있는 나무의 열매로 가족들의 살림에 보태 썼다. 한번은 흉년이 들어 모든 풀과 나무가 다 말라 죽었는데,이상하게도 교무금을 마련한 앞의 감나무는 죽지 않고 오히려 열매가 많이 달려 그 덕으로 온 가족들 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한 그 농부는 진작 뒤와 나무를 하느님께 바쳐 드리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였다. 하느님이 우리를 먹여 살리시는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때가 많다.


5. 마무리 묵상


“천주사랑 재물사랑 함께사랑 못하는 것……”이라는 옛 노래가 생각난다. 우리가 숨 쉬고 밥 먹고 물  마시고 걸어 다니고 눕고 일어나고 하는 것이 또 생각하고 말하고 보고 듣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하느님의 은총인데, 너무도 자주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며 감사하지 않는 때가 많이 있다. 몸의 건강이 나빠지거나 기능이 마비된 후에야 그것을 깨닫게 됨은 우리가 평상시에 하느님께 대한 고마움을 너무 모르고 지내고 있다는 표시이다. 눈으로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사람, 귀로 듣고 싶어도 못 듣는 사람, 입으로 말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 발로 걷고 싶어도 못 걷는 사람, 손으로 디디고 일어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우리 중에는 너무도 많다. 일거일동 모든 것이 주님의 은덕이다. 주님을 잡으면 모든 것을 잡고, 주님을 놓치면 모든 것도 놓친다. 성녀 대 데레사는 “홀로 하느님만이 내게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것은 하느님 것이니 하느님을 붙들지 못하면 물거품을 잡은 셈이다. 이 세상을 다 얻어도 하느님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가치가 없다. 영혼을 잃기 때문이다.


재의 수요일: 2월 28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요엘 2,12-18) : 요엘 예언자시대에 유다 땅이 메뚜기 떼로 황폐하게 되어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성전에서 매일 바치는 제사를 위한 양식도 포도주도 없을 정도였다(요엘 1,1-12). 요엘은 메뚜기로 인한 황폐가 앞으로 닥칠 더 큰 벌의 예표로 보았다(요엘 2,1-2). 그리하여 모든 이에게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자고 경고하였다. 이 회개는 어떤 전례적인 통회 예식으로 끝 날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인간 전체가, 몸과 마음이 모두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돌아서야 한다. 그렇게 되면 혹시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닥쳐올 재앙을 거두어 주실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마음을 돌이키시어”라는 표현은 우리 인간 편에서는 아무런 주장이나 요 구도 할 처지가 못 된다는 표현이다. 다만 희망은 가져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용서하실 수 있는 근거는 두 가지 있는 셈이다. 첫째는 하느님의 사랑은 용서해 주실 수 있다는 점과, 둘째는 하느님 자신의 영광에 대한 점이다. 즉 야훼 하느님께서 만일 당신 백성을 멸망시키실 경우 이방인들이 하느님을 우습게 이야기하고 조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생각도 사람들의 생각이지 하느님의 생각은 더 깊으시다.


제2독서(2 고린 5,20-6,2) : 새 창조사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마지막 날까지 계속된다. 그때까지 하느님께서는 화해하자고 인간에게 제안해 오시는데 당신의 사절들을 통하여 하신다. 이 사절들의 임무를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은 성직자들이 실천하고 있다. 성직자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얼마나 큰 사랑을 보여 주셨는지를 항상 새롭게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또 하느님의 큰 사랑에 대하여 어떻게 감사하고 응답하여야 하는지도 일깨워 주어야 한다.


복    음(마태 6,1-6.18) : 예수님이 복음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선행(의로운 일, 옳은 일)이란 오직 한 가지만 염두에 둔다. 즉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생활을 하느냐는데 정성을 기울인다. 자선을 베푸는 것, 기도를 드리는 것, 단식을 하는 것. 이 세 가지는 신심의 세 가지 표현이다. 이 세 가지 행동 안에 인간의 기본적인 세 가지 점이 표시되는 것이니 만큼 가식이나 위선이 되지 않게 조심해서 진정한 뜻을 부여해야 한다. 첫째로 자선을 베푸는 것은 ‘사랑의 표시이고, 둘째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희망의 표시이고, 마지막으로 단식을 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보이는 겸손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순수한 지향으로써가 아니라, 건성으로 하느님을 대할 때 이 세 가지 표현도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위선자는 마치 심판 때에 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 세 번씩이나 “나는 분명히 말한다.”는 말로 강조하셨다.


2. 강론 핵심


사순 시기는 적게 먹고 적게 마시는 데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덜 하고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적게 쓰는 것에도 있는데, 그 본뜻은 인간 자신이 온전히 자유롭고 건강하게 되는 데 있다. 또 자신을 다시 찾는 데 있다. 즉 세례성사로 변화된 자신의 그 삶을 사는 생활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때가 사순 시기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대로 따라서 사는 것을 배우는 때이다. 즉 받기만 하는 생활을 버리고 베푸는 생활을 배우는 때 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도 버리는 법을 배우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 활의 생명을 주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생활을 맞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이다.


3. 교부들의 가르침 : 회개의 눈물은 세례성사와 같이 죄를 씻어준다


우리가 물과 성신으로 깨끗하게 된 것과 같이(=세례성사) 통회의 눈물과 죄의 고백으로 새롭게 죄의 용서를 받게 됩니다. 단지 우리가 이것을 겉으로 보이려고 하거나 존경을 받으려는 뜻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해야 합니다. 만일 위선으로 혹은 존경 받을 마음에서 눈물을 흘렸다면, 그런 사람 생각에(자기 얼굴을 색깔과 화장품으로 꾸민 사람보다) 더 야단과 비난을 나의 경우처럼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가 들리지 않는”(1사무1,13) 눈물을 원합니다. 그러나 한나의 눈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팔소리보다 더 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자궁을 열어 주셨고 딱딱한 돌 바위를 비옥한 땅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마태 복음 주해서,6째 강론 5)


4. 예화 : 타락했던 동정녀의 회개


세 명의 동정녀들이 모여 9년 내지 10년 동안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그 중 한 명은 유혹을 당하여 가수한테 도망쳐 부정한 관계를 맺으며 살다가 아이를 낳게 되었다. 얼마 후 그 자신을 타락케 한 남자가 몹시 싫어졌고, 마음속에 깊은 가책이 되어 죽음으로써 보속하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인은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위대하신 하느님! 당신은 모든 사람들의 잘못을 짊어지시고 죄인들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또한 잘못한 사람들이 망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에제 33,1 참조). 만일 주님께서 제가 구원되기를 원하시면, 당신의 기적 의 힘을 저에게 보여 주시어 제가 이 세상에서 지은 죄의 열매(아이)를 데려가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끈으로 목을 매어 죽거나 어디 가서 떨어져 죽을 것 입니 다.” 그녀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셔서 얼마 후에 그 아이가 죽었다. 그 날 부터 그녀는 자신을 쾌락의 노예로 만들었던 그 남자에게 등을 돌리고 떨어져 나와 열심히 자신을 고신극기로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그 후 30년간을 환자를 돌보는 일로 보냈는데 얼마나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던지, 어떤 거룩한 사제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여인은 회개의 생활로 동정녀 때보다 오히려 더 내 마음에 들었다.”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우리 중에 아무도 참되게 통회하는 죄인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빨라디오의 거룩한 조상들의 생애, 69장).


5. 마무리 묵상


주님의 마음에 드는 생활은 겸손의 생활이다. 겸손의 참자세는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자신보다 이웃을 더 훌륭하게 생각하는 데 있다. 재의 수요일에 성지 가지를 태운 재를 머리 위에 뿌리며 우리 인생의 무상함과 나약함을·실감하게 된다. 하느님 앞에 죄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어린 아이도 죄는 다 있다고 고백하였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인 우리를 위하 여 사랑을 베푸시니, 죄인인 우리들끼리는 역시 사랑밖에는 줄 것이 없어야 한다. 남을 비웃거나 판단하기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 자신을 보도록 하자. 죄 중에 태어나 죄 중에 살다가 죄의 짊을 지고 죽는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과연 무슨 소리를 지를 수 있단 말인가! 오직 한마디뿐,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