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가톨릭 신학의 동향 1967년 5월호 (제 1호)

구원(救援)의 의미(意味)와 전교활동(傳敎活動)

이브.꽁가르 / 정진석 옮김

이번 호의「현대 가톨릭 신학의 동향」특별란에서,현대 신학계의 지도적 신학자의 한 사람인 이브·꽁가르 (Yves Congar,O.P.)의 무게있는두 논문을 게재 소개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고문 신학자이며 국제 신학잡지 CONCILIUM 의 편집위원으로서 그가 현대 신학계에 차지하는 중대한 비중을 고려한다면,이는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Y. Congar 는 1904년 4월 13일, S6dan(프랑스)에서 출생하여, 1930년 6월 25일 사제로 서품. Paris의 Institut Catholique에서 철학, Le Saulchoir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1931년부터 1954년까지 Le Saulchoir에서 기초신학과 교회론 담당 교수로 있었으며 현재는 Strasbourg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있다. Chretiens desunis, Principes d'un Oecumenisme catholique (1937) ; Vraie et fausse reforme dans l'Eglise (1950) ; Jalons pour une theologie du lai'cat (1953) ; La tradition et les traditions (1961-1963).

앞으로도 이 특별란을 마련하여, 현대 가톨릭 신학계의 대표적 신학자 한 사람을 선정 소개하고 그의 논문을 게재할까 한다.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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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께서는 당신이 아시는 방법으로써 자기 탓이 없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신앙에로 이끄실 수 있다”는 것을 교회에서는 항상 인정하여 왔다(Ad gentes n. 7,1). 그래서 아직도 복음화되지 않은 백성이 존재함을 알면서도,(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이 개종과 영세 여하에 절대적으로 달려있다고 믿었다면 응당 겉잡을 수 없이 야기되었어야 할 근심) 걱정이,초세기와 중세기 동안에는 대두되지 않았었다는 것은 의심없이 바로 이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띠누스와 성 베르나르도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던 것을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도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는 전교하려 떠나야겠다는 지극히 강렬한 동기에 의해,오류 가운데 삶으로써 영혼이 멸망되고 있는 백성들에게 빛과 구원을 가져다 주기를 주저치 않았던 것이다.1 이것이, 여러 세기에 걸쳐,그 외의 여러 천명의 사도들의 주요 동기였었다. 베네딕또 15세께서「파멸에로 줄달음치는 자들에게 천국에로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한 것」(ruentibus in interitum coeli viam aperire)2 이라고 전교 활동의 목표를 밝힌 교황회칙 Maximum 에서도 또 전교 사도직 신학8의 몇몇 논문에서도 이것이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전교활동의 동기

1965년 9월 교부들의 토의를 위해 제출된 원안(原案) 중,전교활동의 이유와 필요성에 관한 Ad gentes n. 7는 본 논문의 서두에 인용한 글로 시작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인용한 글」앞에는「전교활동의 동기는 각 사람이 복음화됨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는 것 뿐만이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되어 있었다. 여기서 「뿐만이 아니다」 라는 말을 주의하여야 한다. 실상 영원한 구원은 전교활동의 한 가지 동기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동기는 아니다. 그리고 복음의 설교는 개인의 구원을 위해 필수 불가결의 방법으로서의 특색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 원안은 분명히 개인 (uniuscuiusque homi-num)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이것이 전교 활동의 동기와 필요성을 논하는 글의 첫 머리에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이것은 전교의 필요성을 단지 상대적인 것으로 여기며 따라서 선교사의 성소(聖召)를 불러일으킬 사도적 열성을 약화시키려는듯한 이념을 강조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기에 강한 비판이 무수히 일어났다. 공의회의 교부들은 입교 (入敎)의 필요성과 전교활동의 필요성을 훨씬 강한 어구(語句)로,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까지 강조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마지막 수정안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필요성은 하느님의 뜻과 결부되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중개자이며 인류의 구속자로 삼으심으로써 실현하신 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 (意志)와 (II Tim 2,. 4-5; Act 4, 12) 다른 한편으로는 영세의 필요성을 선언하심으로써' (Mc 16, 16; Jn 3, 5), 영세가 이를테면 문(門)인 바,입교의 필요성을 확고히 하신 그리스도의 제도(制度)가 결부되었다. 이 공식 (公式)은 헌장 Lumen Gentium (n. ⑷ 에 성문화되어 있는 것이다. 개인의 구원은 명백한 입교여하에 달려 있으되, 입교라는 조건이 크게 제한되어 있다고 표현한 점은 주의할만한 것이다. 즉「가톨릭 교회는,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신 것임을 알면서도,입교하기를 거부하거나 교회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자만이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선언된 것이다. 이 가설(假說)은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알면서도구원을 거부할 사람을 가상(假想)할 수 있는가?·

교회 밖에서의 구원?

인생은 모순투성이다. 당치도 않게 보이는 이 가설은 Leonard Feeney의 경우 공적(公的)으로 실현되었다. 그는「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命題)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회원이 아닌 자는 구원 못된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고집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그는 해명을 요구받았고 이의 철회를 종용 받았으나 고집스럽게 이를 거부하여 결국 1953년 2월 13일 파문되었다.4 이리하여 그는 교회의 명백한 회원이 아닌 자는 구원 못된다고 고집한 까닭에 교회로부터 제외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P. Feeney의 사건은 그 유명한 명제가 지니고 있거나 지니고 있지 않은 뜻(意味)을 공식으로 설명하는 기회가 되었다. 1952년 여름,검사성성은 Cushing 추기경에게 1949년 8월 8일에 보낸 편지를 이 추기경에게 공개하라고 요청하였다. 검사성성은 이 편지에서 P. Feeney를 단죄하는 이유들을 열거하면서, 이 사건에 관련된 교리에 관한 확정적이고도 권위적인 가르침을 밝혔다.5 발전 도상에 있는 현재의 가톨릭 양식(良識)을 대변하는 이 가르침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전교의 필요성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성 혹은 제도 (필요한 수단)

이 가르침의 요점은 그 본성 자체상 필요한 것과 실정적 (實定的) 제도로 인하여 필요한 것과의 구별에 있다. 애덕과 따라서 초자연적 신앙 없이 구원되리라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왜냐 하면 애덕과 초자연적 신앙이 하느님과의 일치의 맺음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바, 하느님과의 일치없이는 구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명백한 지식과 교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정식 입교는 하느님의 실정적 제도와의 연결을 맺는 조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취한 역사적이며 실정적인 형식 (Form)이다. 이것들이 구원의 필요한 수단이지만 그러나 실정적 신의(實定的神意)의 덕분으로 구원의 필요한 수단인 것이며,이 실정적 신의에 의해서 하느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안배하신 것이다.

한편으로는 신앙과 애덕과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과 입교가 이를테면 전부터 전해오는 신학의 술어 (術語)로  ResSacra-mentum 혹은 Realite Signe 과의 관계와 같다. 정상적으로는 제정된 수단 혹은 Sacramentum 에 의해서 획득된다. 그리고 후자는 정상적으로는 성총의 Realite를 산출(?出)하는 바, 이를 위해 이것이 제정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의롭고 선하신 정신적 (moral) 존재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통교 (通交) 하기를 원하시는 일치의 관계는 서로가 꼭 같아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와 진지한 태도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제정된 수단과 영신적 열매 사이에 단절이 가능하다. 즉 Sacramentum은 소유하면서도 Res 는 결여될 수도 있고, 또 Sacramentum 은 모르면서도 Res는 가질 수도 있다. 복음 성경의 여러 귀절들이 이를 지적하고 있다.6 성 아우구스띠누스도 같은 생각을 여러번 표현했다. "실제로 밖에 있는데 안에 있는듯이 보이는 이도 많고,실제로 안에 있는 데 밖에 있는듯이 보이는 이도 있다.”7

원의(願意)에 의한 구원

검사성성의 문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그 본성상 필요한 것은 존재하여야 하거나 혹은 사실상 소유되어야 한다. 그러니만큼 주부(注賦)된 신덕과 애덕을 사실상 소유하고 있지 않은 자에게 있어서는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른바 수단의 필요성)만을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자유롭고도 실정적인 안배의 덕분으로 사람이 무의식적이고 함축적일망정 원의에 의해서 이를 소유하고 있으면 넉넉하다. 자기 탓이 없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모르는 자라도 이처럼,「자기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에 순종시키겠다는영혼의 착한 지향 속에 내포된」원의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일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주부된 신덕과 따라서 애덕을 갖기 위해 필요한 바, 하느님께 대한 지식에 관해서, 신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고, Μagisterium 의 원문도 분명치 않다. Lumen Gentium 의 원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섭리는,자기들 편의 탓이 없이, 아직 하느님께 대한 분명한 지식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착한 생활을 하기로 노력하는 자들에게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부하지 않으신다. "8 그러나 이 원문은 이 필요한 도움이 무인지 또는 이것이 하느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과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이에게 갚음을 주시는 분(Ηeb 11, 6)이시라는 지식과 맞먹는 새로운 인식을 내포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분명히는 설명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신덕의 대상은 어느 범위까지 맹목적인가? 주부된 신덕의 인식을 어느 정도까지 확장할 수 있는가? 가설 (假說)이야 어느 것이건간에, 원칙은 끝까지 확실해야 한다. 주부된 신덕없이는 구원되지 못하느니만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하시느니만큼 (I Tim 2, 3), 신덕 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사실상 가능한 것이다.9

하여간「교회 밖에서는구원이 없다」는 명제를 오늘날 해석하는 뜻에 따라서,구원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과 가톨릭 교회에로의 실질적 입교가 필요한 것임을  인정하면서, 전교활동의 필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동기를 다시 새로 따져야 한다. 개인들로서의 사람은 이것들 없이도 구원될 수 있다. 이것이 p. Charles 가 교회의 전파로서의 전교활동의 특별한 목표를 규정짓는 논문을 이룩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우리도 또한 오늘날 이해되고 있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따른「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의 빛과 테두리 안에 우리 자신들을 놓아야 할 것이다.

교회 ㅡ구원의 도구

이것은 가톨릭 교회만이,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위해서,구원의 표지이며 도구 즉 구원의 성사(聖事)로서 합법적으로 위임되었음을 뜻한다. 계시 (啓示)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한 노선 (路線) 에서,교회 는 "천주께서  모든 이가 구원되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원하시는”(I Tim 2,4) 계획의 역사적 형식 (Form)이다. 이것은 또한 가톨릭 교회가 주님의 은총으로써 교회 자체 안에,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와 모든 환경의 모든 이의 구원을 주선하는 수단들을 소유하고 있음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서「교회 밖에서는구원이 없다」는 말의 참 뜻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여러 차례 표명되었듯이,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의 교회라는 이념이다.10 이것은 단순히 정적 (靜的)인 방법으로만 고려되어서는 안되며,완전히 .제정된 것으로서의 교회는 일종의 큰 성사,전반적이며 근본적인 성사로서 분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오히려 교회와 그 기능에 대한 깊은 이해에로 이끄는 길이다.11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교회는 Ad gentes 교령과 교리적 헌장인 Lumen Gentium의 첫 머리에 언급된 강력한 동적 (動的) 운동속에서도 주시 (注視)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며 동시에 제도인 교회는 성부의 결정으로 비롯하여 성자의 사명과 성신의 사명으로 완성된 구원의 역사에 바탕을 둔 큰 동력 (動力)의 구체적이면서도 완전한 구현(具現)이다.

「구체적 구현」이란,역사적,가견적, 공적 형식을 뜻한다.「완전한 구현」이란 이미 역사적 교회가 하느님에 의해서 실정적으로 지향(志向) 되었고 제정되기 이전에,구원과 따라서 하느님과 교회와 일치가 이 세상에서 불가견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이 까닭에 Ad gentes에는 전부터 전해져 오는 네 가지 원인들을 찾아 볼 수 있는 정의 (定義)가 있다.「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교회를 모든 이와 모든 국민에게 전적으로 제시하게 하는 활동」에 의해서 성수(成遂)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함과 성신의 은총과 사랑에 순종함으로써 이 활동을 하고 있다. 이리하여, 교회는 모든 이를 신앙과 자유와 그리스도의 평화에로 인도할 수 있다. 이처럼,모든 이 앞에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전적으로 참여할, 자유롭고도 안전한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n. 5, 필자가 강조함).

인식과 책임성

Journet 추기경이 말하였듯이, 교회 이전에 이미 태동(胎動) 중의 교회 혹은가능태의 교회가 존재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그리스 도와 그의 교회에 의해서 표상된 구원의 실정적 제도에의 명백하고 총체적인 부착(附着)과는 별도의 것이기에, 개인적 구원의 혹은 이의 준비의 총합에 해당하는 교회말이다. 그러나 바오로 6세 성하께서 말하였듯이’12 그리고 Ad gentes 가 선언하듯이,"인류의 구원을 위한 천주의 보편적 계획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이를테면 비밀로 배타적으로 실현되는 것도 아니거니와,사람이 천주를 찾는 방법인 이른바 종교적인 것 따위의 여러가지 인간의 창의(創意)로써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n. 3) "소유는 책임성을 낳는다”는 것은 로마법의 원리이다. 아는 자는 알지 못하는 자보다 다른 의무가 있다. 알고 있는 우리, 신앙의 은혜와 이 진리의 지식과 예수그리스도안에서의 구원의 수단을 받은우리로서는, 또 하느님에 의해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실현하도록 지향된 수단임을 자처하는 교회로서는,복음을 설교한다는 것은 하나의 의무이다. Cor. 9,16 (Lumen Gentium, n. 17 에도 인용되었음)의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을 이런 뜻으로 해석한 Ad gentes 교령은 "이에, 전교활동은 항상 그러하였듯이 오늘에도 힘과 의무를 보유(保有)한다" (Ac proinde missionalis activitas vim suam et necessitatem hodie sicut et semper integram servat) (n. 7,1)를 첨가하고 있다.

Ad gentes 의 최종결정안은,복음의 지식이 가져다주는 바 비할 데 없는 이점(利點)에 대해서 다시 거듭 언급치 않는다. 이 점은 1965 년 9월에 토의되었었다.13 또 회칙 Mystici Corporis 에 구성되었던 이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은「그들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질수없는」14 상태에 있다는 이념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Ad gentes 의 결정안은, 신비체가 그 자체의 성장을 향하여 힘을 집중시키기를 중지하지 않는 생명력을, 첫머리에 언급함으로써 (n. 7,2)애덕에 기초를 둔 전교동기를 강화하였다. 이 원문은 제 3 절에 몇가지 고려할 점을 첨가하고 있는데,이 점들은 우리가 크게 발 전시키고 싶은 점들이다.

"마지막으로, 이 전교활동의 수단에 의해서,천주께서 그리스도 안에 성취하신 바 구원 사업을 인간이 의식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기만 한다면,천주께서는 완전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이 활동으로 말미암아,천주의 계획은,(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보내신 성부의 영광을 위하여 순명과 사랑으로 봉사한 바대로) 완수되는 것이다. 이 계획에 따라,전체 인류는 하나의 천주의 백성을 형성하고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에로 합체되며 하나의 성신의 궁전으로 건설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은 형제적 화목을 말하는 것이니만큼, 이 계획은 확실히 모든 인간의 속 깊은 원욕(願愁)과 합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당신의 모상과 모습을 따라 만드신 창조주의 계획은, 늦어도 단 하나의 인간성을 분유(分有)하고 있는 모든 인간이, 성신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 안에서 재생되고 천주의 영광을 함께 반영하면서",(cf. II Cor. 3, 18)「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실현될 것이다.

개인적일 뿐이 아닌 구원

하느님 은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분에 의해서 형성되어 우리에게 통교(通交)된 그분의 의향은 최소한의 구원 형태를 노리는 것은 아니다. 검사성성이 언급한 바 영혼의 좋은 지향에 입각하되,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모르고  있는 어떤 사람들 (아마 대단히 다수일지도 모르지만)의 구원 혹은 단순한 부단죄 (不斷罪)는, 완전한 뜻에 있어서, 하느님 은총의 계획 중에 지향된 구원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성화(聖化)하고, 이들 상호간의 유대가 없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다. 하나의 백성으로서,진리 안에 천주를 알고 거룩하게 섬기는 백성으로서 구원시키는 것이 천주께 의합하였다.”15 몇몇 공의회 율령은,여러 차례에 걸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즉 인류를 하나의 하느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신의 궁전으로 만드는 것이다.16

하느님께서 노리시는 구원은, 이렇게 저렇게 얻어진 개인의 구원뿐만이 아니고, (모든 개인이 구원된다는 것 여부와는 상관 없이) 인류 전체와 전체로서의 세계의 구원이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찾으시는 그것에 관한 한, 전교활동은 상대적 방법 (개인의 구원만이 문제시되는 경우) 으로서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절대적 방법으로서도 필요한 것임은 분명하다. 전교활동은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는 수단이다. Lumen Gentium 을 연구한 사람중의 많은 이들은 이 위대한 문헌이「일치」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지배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일치」의 명제(命題)도 헌장이 시작했고 (마치 성서적 방법에 있어서 포괄(包括)의 과정 비슷하게) 헌장의 마지막도 이「일치」의 기원(祈願) 으로 끝나고 있다.17 헌장(n. 13)에 Catholicity 라는 재미있는 신학이 있다.

"시초에 인간본성을 하나로 만드셨고,그의 자녀들이 흩어진 다음에는, 이들이 결국에는 다시 하나로 일치되어야 한다고 명하신 천주의 뜻의 목적이 이렇게 해서 완성되리라.” (Jn. 11, 52) 즉 시초의 일치와 마지막의 일치가 있다. 시초의 일치는 우주의 창조 때에 이루어졌다. 이때 ab uno로부터의 인류의 기원(起源)에 성서적 일신론이 반영되어 있다.18 마지막의 일치는 하느님의 나라 또는 하느님의 통치의 일치이다. 이것은,우리의 신적 양자(養子)관계의 원리인,하느님의 정신(Esprit de Dieu)의 은총 아래 회복된 본성으로써 특색지어진다.19 이 까닭에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아들들의 계시를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이다(Rom 8,19-23). 만일 본성 안에 완성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총으로 부터 나오는 우리의 초자연적 거양(擧揚) 여부와는 상관없이)一 막연히 또 그 이상으로 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는 - 완성에로 향하는 경향이 없다면, 이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분명히 본성과 은총을 혼동하지 않았으나 이 둘을 구별지어 온 적도 있었던 피상적인 구별을 과감하게 넘어섰다. 만일 교부들,특히 희랍 교부들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觀點)을 취하지 않는다면 Ad gentes의 n. 2 와 n. 7(3)과 한층 더 신학적인 사목헌장 Gaudium et spes와 첫 부분 전부는 이해될 수가 없다. (희랍교부들과 성 토마스에게 있어서는) 은총은 본성을 이의 현실적 가능성 이상으로 완성하되,존재하는 그것 (qu' elle est)과 호소하는 그것 (qu' elle applle)에 맞추어서 완성한다. 이 관점을 따라야,(위에 인용한 η. 7의 원문을 읽을 때),인간성의 일치가 단지 하나의 하느님의 백성,단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단 하나의 성신의 궁전으로서 재일치된 하느님의 자녀들의 일치가되어 모든 이가 한 마음으로「우리 아버지」를 부를 수 있게 될 때, 창조 계획이 완성된다는 것을 알아듣게 되는 영감을 받는다. 성서적으로 말하자면,한 사물(事物)의 진리 (眞理)는 종말론적(終末論的)이다. 즉 존재하도록 마련되어진 그것이다 (c'est ce qu' elle est appelee a etre). 어린 양과 천상의 예루살렘과의 혼인 잔치로 끝나는 요한 묵시록 "나는 저의 천주가 될 것이요,저는 나의 자식이 되리라’’(21, 7)에 시초부터 예견(豫見)되었던 것의 뜻이 있다. “사람을 우리 모습대로 만들자. ……그들을 사내와 계집으로 창조하였다.” (Gn 1, 26 - 27)하느님의 계획에 있어서, 마지막은 시초부터 예견되었다. 하느님의 계획은 두 단계이지만,이것은 단 하나의 발달의 두 단계이다.

구원의 의미

이 모든 것은,이제까지 우리가 언급하였고, 공의회도 언급하고,(각 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문제를 떠나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바 구원의 개념 바로 그것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다. 불행하게도, 자연과 초자연과의 상관관계 (相關關係)의 개념에 있어서 우리가 부닥치는 바로 그 비본질성 (非本質性)과,바로 그 막을 수 없는 이원성 (二元性)이 이 문제에 있어서도 너무나 자주 방해가 되고 있다. 이 문제를 해명하려 노력한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구원을, 전반적 파멸에서 모면하는 일종의 구조(救助)로 여기고 있다. 이를테면, 선객 (船客)이 타고 있던 배가 파선(破船)이 되었는데,용케 구조를 받아 깨어보니 편안한 병원 침대에 누워있더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구원은 파멸되게 되어있는 세상으로부터 구출되는 (salus e mundo) 구조(救助) 가 아니다. 구원은 세상의 치료 (salus mundi) 이다. 세상이 구원되는 것이고,창조가 구원되는 것이고, 본성이 구원되는 것이다 (Jn 3, 16 -17). 구원은 "성공(成功)된 성과(成果)다.” (c'est ce qui a reussi)20 라고 Peguy 가 말하였다. 이 말은 옳다. 물론 이 배경 속에는 죄와 십자가와 우리의 신적 양자관계라는 거저 받은 은총과 싸우는 교회의 투쟁과 종말과 심판-Ad gentes, n. 8 (n. 3 과 비교)에 말하였듯이「심판과 은총, 죽음과 삶」一이 배치(配置)되어 있어야 한다. 이 성과(成果) 는 성공(成功)에로의 계속적인 상승(上昇)과는 전연 다른 것이다. 오히려, 결론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말하면,이 세상은 이의 창조 이래 운명 지어진 그것, 하느님께서 성자와 성신을 보냄과 교회의 사명을 통하여 실현하시기로 결정하신 그것에로 귀착(歸着)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전교의 역할

교회의 사명은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것의 총합이다. 선교사들은 완정(完正)하고도 우주적 의미에 있어서의 세상을 구원할 사명을 띠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이러한 사업을 어떻게 감행할 것인가? 문제를 좁혀야 한다. 우선, (Ad gentes 가, 비교적 제한된 뜻으로,cictivitas missionalis 라고 부른) 전교란, 결정된 조건 아래,교회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이 점은 Ad gentes(n.6)가 정의한 것이고 가장 중요한 점이다.

조건이란,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었거나 또는 (라틴어의 suffidenter 가 뜻하는뜻의) 충분히 전파되지 않은 상태에 의해서 결정되는 조건을 말한다. 그러나 전교는 사명의 실천 바로 그것이다. 전교의 목표는 교회의 목표 바로 그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의 사명은,인 간성과 세상이 이들의 운명을 성취하도록 도와주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세상의 목표와 지위가 본질적으로 초자연한 것이니 만큼,(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다지도 자주 사용한 공식대로)「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신안에서」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교회의 사명은 다만「영신적」또는 예전적 (禮典的)인 것만은 아니다. 교회의 사명은 종말론적 완성의 관점에서 현세적인 것과도 상관이 있는 것이다· 공의회가 사명을 언급한 것은 이런 뜻으로 한 것이다.21

한편, 교회는 현세적 면에 있어서의 역사에 관여할 바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의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 현세적인 것들의 그 고유한 분야에 있어서의 자치성을 강조하고 있다.22 교회의 역할은,그리스도 안에서 역사를 성취시키고, 역사 안에 거룩한 역사의 영역을 도입시키며 이것을 구원의 역사로 만들거나,또는 적어도, 一세상은 이미 하느님의 정신에 의해 영향을 받었으니 만큼 _ 하느님의 실정적이며 역사적인 구원의 계획에 보조를 맞추어서 하느님께서 오시고 그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해명하고자 한 점이다.
비오 11세 께서 쓰셨듯이 ’ 교회는 복음화하면서 계명 (啓明) 시킨다.23 그러나 교회는 문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도록 즉 구원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 복음의 정신으로써 ([Apostolicam actuositatem, n. 2, 2) 속속들이 감염시켜야 한다.

경제향상과 사회정의

전교는 이것을 부단히 해오지 않았던가? 오늘날 이 사업은,그 폭과 긴급한 점에서 새로운 조건 아래 나타나는 지극히 어려운 과업을 짊어지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화하였고 사실상 부유한 나라에서부터 대부분의 교회 전교활동이 기원(起源)되고 있으며,현재 가난하거나 또는 발전 도상에 있거나 또는 적어도 강렬한 발효상태 중에서 전적으로 급격히 변화되어 가고 있는 나라에서 전교활동이 광범위하게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오래 전에 그리스도화한 나라들은 인류의 20%를 포용하고 있는데,그러면서도 세계 재산의 70%를 좌우하고 있다. 굶주림의 문제,발전의 문제, 세계 수준에로의 (필요한)경제 향상 문제, 그리고 끝으로 평화의 문제들은 극적으로 시급하고도 막중한 문제들이다.

"평화의 새 이름은 발전이다”라고 바오로 6세께서 말씀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단체들이 가난한 나라의 발전과 국가간의 사회정의를 조성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사무국의 창설을 요구하였다.(Gandium et spes, n.90, 3)1966년 7월 Geneva에서 초교파 회의 (Ecumenical Council of Churches) 가「교회와 사회」를 의제로 삼고 개최되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크리스찬 Bandoeng의 모습을 지닌 것인데),우리가 방금 언급한 긴급한 문제들을 강력히 제안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이 (크리스찬이거나그저 선의의 사람들이거나 간에)비가톨릭자들과,특히 평화와 발전과 문화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제 국제기구에서 과감하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서는 여러 곳에서 주장하였다.24

한편 Ad gentes 는, 교회 일치에 관한 교령 Unitatis redintegrandae 와 더불어, 전교 분야에 있어서 초교파적 협조를 고취하였다. 이러한 협조는 명실상부한 복음화 운동분야에서 조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계 초교파 회의의 안건을 적용하게 되면,우리에게 있어 많은 문제들이 야기될 것이다.25 이것은 또 사회적 국제적 활동 분야에 있어서도 항상 적용될만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우리가 현 사태를 관찰하건대,가장 시급히 협조해야 될 점이 이 점인듯 하다. 가난한 나라의 발전과 국가간의 사회정의를 촉구하기 위한 (현재 조직중인) 사무국이,왜 세계 초교파 회의라는 일맥상통하는 기구와의 협조를,이 사무국의 규약 안에 가미할 수 없는 것일까?

가난한 자들의 도전

초교파 운동은,이의 시초 이래,교리 문제들(Faith and Order)의 대화와 사회면에 있어서의 실천적 협조(Life and Work)의 길을 동시에 택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는 처음에는 오해했으나,차차 이 둘째 길ㅡ즉 세계에의 봉사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있어 함께 일한다는 것- 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공의회의 제2기 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이들의 빈곤을 지칠 줄 모르게 대변한 Paul Gauthier가 Protastant 참관인에게 "만일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봉사를 함께 하게 된다면?" 하고 물었다. 그 때 그 참관인은 "그러면 진정한 개혁이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공의회는 인구, 진정한 민주주의, 문화, 노동, 재산과 재물의 분배, 평화와 무장 등 현대 세계의 극적인 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세계로부터 빈곤을 없이하고 가난한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사무국을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1966년 7월에 Genova에서 선수(先手)를 쳤던 회의와 가장 극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언급한) 이 회의에는 참가자의 3분지 2는 제3세계로부터 왔던 것이다. 그때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관한 불가피하게 시급한 거창한 문제들의 목록이 작성되었다. 분명히 미래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그리고 크리스챤들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 중의 하나를 여기에 찾아야 된다는 것도 명백하다. 크리스챤들은, 가난한 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도, 돈의 지배와 이익의 추구를 피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리고 세계에 형제애의 기구를 설치하는 것도 실패하였다. 그 결과 여러 교파의 신자들을 한꺼번에 몰아쳐서 공격하는 두 가지 도전- 부자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도전과 종교에 대한 무신론적 공산주의 도전 혹은 차라리 (크리스챤에 한정해서) 신앙에 대한 무신론적 공산주의의 도전-에 맞부닥치게 되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생사의 문제이요, 공산주의는 자칭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이 문제들을 우리가 과연 성공적으로 대결할 수 있겠는지?

크리스챤의 일치운동은, 공산주의를 거스려 공동전선을 펴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일어난 움직임에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리고 초교파 회의 측의 것이어서도 안되고, 가톨릭 측의 것이어서도 안된다. 내가 공산주의 의 도전을 거론(擧論)한 것은 공산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지, 공산주의가 에큐메니즘의 주동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에큐메니즘의 진정한 주동자는 성신이시다. 세상에 존재하는 비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조를 -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해서 증언할 증인이 될 협조, 그리고 크리스챤들의 공동체의 실현을 향한 거보(巨步) 곧 일치의 담보가 협조를 - 해야 하느니만큼, 우리는 한마음으로 뭉쳐 이 협조의 사업에 착수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이것은 P. Conturier가 언급한 '영적 경쟁심'의 표시가 될 것이다. 이것은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신학적 대화와 더불어 일치화합에로 이르는 길이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오늘 날 (불신앙의 세기에서 초교파적 희망을 불러 일으키신) 하느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 길임을 확신한다. <역자 . 서울 대교구 상서국장 신부>

<참조>
Yves M.J. Couger, O.P., La signfication du Salut et L'activite missionnaire, Parole et Mission, 36, Janvier, 1967, Editions du Cerf, Paris. 와 The meaning of Saluation and the missionary apostolate, Teaching all nations, Vol. No. 1, January 1967, East Asia Pastoral Institute, Manila. 의 번역
Vinum novum amicus novus; veterascet, et cum Suavitate bibes illud.(Ecclesiasticus, cap. Ⅸ, v. 15).
Idem velle atque idem nolle, ea demem firma amicita est.(Sallustius, Catil., cap.)

1. Cf. A. Arbelon, Francisco Javier en el dialogo teologico sobre la justification de los ir.fieles, in Revista espanola de Telogia, 21 (1961) p. 167-194.
2. ASS, 11 (1949) p. 446. Cf. E. Loffeld, Le problime cardinal de la Missiologie et des Missions catholiques. Rhenen, 1956, p. 71.
3. Revue thomiste, 46 (1946) p. 601 에 같은 제목으로 쓰여 있는 M. Labourdette 와 M. J. Nicolas 의 논문.
4. ASS, 45 1953, p. 100. Feeney 사건에 관해서는 Sainte Eglise (Unam Sanctam,. 41), Paris 1963, p. 427 이하 참고.
5. 이 본문의 골자는 Sainte Eglise, loc. cit. 에 있다. 본문 전문(全文)은 The American Ecclesiastical Review, 127,1952, pp. 307-311; Ami du Clerge, n. 62 1952, pp. 741, 742 와 η. 63 1953, pp. 261-264; Docum. cathol., 2 Nov. 1952, col. 1395-1498; Les Missions catholiques, Sept-Oct. 1953, pp. 225-227; Denzinger, 34e ed.’ n. 3856-3873 에 있다
6. Mt 8,11 - 12; 21,31과 43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7. 예를 들면 Sermo 354, 2, (P. L. 39, 1564) ; De Civ. Dei, I, 35 (41, 46); Enarr. in Ps 25, 2 (36, 189) ; 106, 14 (37, 1428) ; De bapt. 4, 2 - 4 과 5,27’ 38, (43’ 155-156 과 196); In Ευ. loan. tr. XXVII, 11 (35, 1621) ; In I loan. tr. IV, 4 (35’ 1999); 등등.
8. No. 16: "Neque ab aliis, qui in umbris et imaginibus Deum ignotum quaerunt, ab huiusmodi Deus ipse longe est, cum det omnibus vitam et inspirationem et omnia (cf. Ac 17, 25-28), et Salvator velit omnes homines salvos fieri (cf. I Tim 2:4). Qui enim Evangelium Christi Eiusque Ecclesiam sine culpa ignoran-tes, Deum tamen sincero corde quaerunt, Eiusque voluntatem per conscientiae dictamen agnitam, operibus adimplere, sub gratiae influxu, conantur, aeternam salutem consequi possunt. Nec divina Providentia auxilia ad salutem necessaria denegat his qui sine culpa ad expressam agnitionem Dei nondum pervenerunt et rectam vitam non sine divina gratia assequi nituntur."
9. 이것이 R. Lombardi 신부의 La Salvezza di chi non ha fede, 4e ed. Rome, 1949 의 출발점이다. (English Translation: The Salvation of the Unbelievers, London, 1956). 신앙의 지향(志向)의 신학에 기초를 둔 주의는 sujet du salut des non catholiques, in Rev. des Sc. relig., 32(1958), p. 53.65 (repr. in Sainte Eglise, Paris, 1964,p. 433444)를 보라. 영어판은 Blackfriars, 1957 p. 290-300.
10. Lumen Gentium, no. 1, 8; 48, 2; Ad gentes, no. 1; 5; 15, 2 (천주의 현존의 표); 21’ 1(그리스도의 표)와 5 (“ut lucidum signum fiat salutis quae in Christo nobis advenit") 을 보라. 우리 글 L' Eglise, sacrement universe I du salut:Eglise vivante, 17 (1965), p. 339-355)를 보라. 또 UEglise de Vatican Zi 를 보라. (이 책은 G. Baraiina의 지도와 Β. Rigaux, Th. Strotmann 과 P. Smulders 의 연구로 여러 나라 말로 출판되었다).
Protestant 관점을 보려면, W. Bieder, Das Mysterium Christi und die Missi on. Ein Beitrag zur missionarischen Sakramentalgestalt der Kirche, ZUrich 1946를 보라.
11. 여러 연구 중에,0. Semmelroth, Die Kirche als sichtbare Gestalt der unsichtba-ren Gnade, in Sckolastik, 18 (1953), p. 23-39 ; Die Kirche als Ursakrament. Frankfurt, 1953, (불어역 판, L’ Eglise, Sacrement de Redemption, Paris 1962), B. Willems, Der sakramentale Kirchenbegrijf, in Freib. Zeitsch. f. Phil. u. Theol, 5 (1958), p. 274-296; K. Rahner, Kirche u. Sakramente, Freiburg, 1960 (많이 토론된 책)을 보라.
13. No. 7: Per cognitionem Christi et Eius Evangelii homines incomparabiiiter illuminari et donis spiritualibus ditari.
14. A AS, 35 (1943), p. 243.
15.Lumen Gentium, η. 9; comp. Ad gentes, n. 3, 1.
16. Lumen Gentium, n. 17 끝; Ad gentes, n. 7, 3; 9 끝; Presbyterorum ordinis. n.l.
17. Chicago Studies, 5 에 있는 논문 The Church. Seed of Unity and Hope for the Human Race (1966/1 "Articles in memory of Albert Cardinal Meyer" 35 - 40) 를 참고.
18. 비 크리스찬 종교에 관한 선언, Nostra aetate, η. 1 에 인용된 Act. 17, 26 을 참고. 아담으로부터의 여인(女人)의 형성(形成)도 분명히 같은 뜻이 있다.
19.본성과 성총의 일치로서의 나라에 관해서는 Jalons pour une thiologie du laicat. Paris 1953, Chapter 3, p. 85 이하를 보라.성총에 의한 우리의 신적 양자관계의 원리이신 성신에 관해서는 Gal 4, 5 - 7; Rom, 8, 14 - 17; I Jn 3. 1 를 보라
20. P. Duploye, La religion de Piguy, Paris, 1965, p. 610을 보라. 구원에 관해서는 Vaste monde, ma paroisse를 보라. Verite et dimensions du salut. 4판, Paris, 1966과 ㅇ. Rabut, Valeur spirituelle du Profane, Paris 1963을 비교하라.
21. 특히 교령 Apostolicam actuositatem. η. 2, 5 - 7을 보라.
22. Lumen Gentium, η. 36, 4; Gaudium et spes, η. 36; 41, 2; 56; 76; Ad gentes, n. 11과 12
23. n. Mgr. Roland-Gosselin에게 쓴 것. Semaines sociales de France, Versailles, 1936, p. 461 - 462’ Gaudium et spes, n. 58, 4 에 인용됨.
24.각별히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Apostolicam actuositatem, η. 8’ 6; 11, 3; 14, 2와 3; 27; 사목헌장 Gaudium et spes, η. 6, 6; 10-12; 15, 4; 21, 3; 29, 4; 34; 36, 5; 41, 4-6; 비크리스찬 종교에 관한 선언 Nostra aetate를 보라.
25. 이 계획에는 다음과 같은 단계가 있다. 즉 공동 탐구 공동 조직,공동 행동, M. J.Le Guillou, La Mission en esprit d'oecumenisme, in Repenser la Mission, XXXVe Semaine de Missiologie, Louvain 1965, DDB, 1965,p. 79-102를 보라. (p. 88 이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