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1982年 木? 共同體의 해 - 韓國主敎團 共同 司牧敎書
1982년 5월호 (제 81호)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는 마음과 뜻을 합하여 전국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 및 신자들에게 이 사목교서를...

주일의 말씀
1982년 5월호 (제 81호)
부활 제4주일 배척당한 자의 구원 제 1 독서 : 사도 4,8-12 제 2 독서 : 1요한 3,1-2 복 음 : ...

이레네우스 - 교부들의 사상
1982년 5월호 (제 81호)
리용의 주교인 이레네우스 (Irenaeus) 는 ‘가톨릭 교리의 수호자’라 불리울 정도로 가장 뛰어난 2세기...

신관의 어제와 오늘
1982년 5월호 (제 81호)
歷史-存在論的 神觀의 特性 여기서 뜻하는 ?史 “存/H論的 觀은 전통적 우주론적 신관이나 7세 이후의 ...

罪란 무엇인가 - 罪에 관한 神學的 考察
1982년 5월호 (제 81호)
현대에 오면서 철학이나 신학 분야에서 초월적 神개념은 단지 人間性의 內心이나 深衷에 존재하는 것으로...

유교적 인간이해와 그리스도교
1982년 5월호 (제 81호)
이 글은 1981년 10월 31일 '한국인의 심성과영성‘을 주제로 한 제8회 신앙대학 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올 ...

하느님 앞에 선 인간
1982년 5월호 (제 81호)
1. 머리말 인간은, 희랍 철학에 따르면 정신계와 물질계를 연결시키는 小宇宙(micro-cosmos)이다. 그러...

k. 라 너
1982년 5월호 (제 81호)
이 글은 ?山·敎區 공의 회 사무국이 Karl Rahner 의 Strukturwander der Kircheals Aufgabe und Change(...

200주년 記念事業을 위한 提言
1982년 5월호 (제 81호)
1.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지 2백 년이 되는 기념스러운 해가 바로 눈앞에 ...

200주년 精神運動의 方向
1982년 5월호 (제 81호)
머 리 말 솔직히 고백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저는지금...

   1      


特輯 - 200주년올 맞이하는 韓國敎會 1982년 5월호 (제 81호)

200주년 精神運動의 方向

李漢澤 (예수회 한국지부, 신부)

머 리 말

솔직히 고백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저는지금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순교 선열들의 거룩한 얼을 선양하는 일과 주어진 주제, 즉 정신운동과의 연결점올 찾지 못하고 있으며 사실은 정신운동의 개념마저 분명하게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운동” 하면 제게 제일 먼저 연상되는 것은 큰 집단이나 군중을 물리 적으로 동원하거나 움직이려 할 때 그 동원이나 움직임을 정당화하거나 뒷받침하셔 주는 정신적 ㅡ非物質的, 非物理的바탕과 비슷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영웅이나 집권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사용한 수단이고, 우리시대에도 또 이 땅에서도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 방법을 심각하게 연구해 내고 있읍니다. 그런데 우리 200주년 기념행사에서 말하는 정신운동은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며 사실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의 주관적 해석이기는 하겠읍니다마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주어진 주제를 다루어보려 합니다. 즉 200주년 기념행사를 그 규모에 있어서나, 계획이나 진행에 있어서나, 운영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수용하게 하는 대의명분으로서가 아니라, 200주년 기념행사의 필요성 내지는 가치를 전제로 하고, 그 예산의 규모라든가, 계획이나 운영방법이라든가, 그 진행과정 등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가짐으로서의 정신운동에 대하여 몇 가지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결국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정신적이라기보다는 영성적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읍니다.

200주년 기념행사 준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反한과 變化 이고 타인 혹은 이웃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자신이 먼저 변화함으로써 이웃을 변화시켜야 하겠고, 우리가 과시할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스스로 변화되고 있는 (회개하는) 모습부터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200주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또 교회 전체의 또 한번의 회심의 때, 은총의 계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외적 발전과 성장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진 것이 별로 없으면서도 희망과 평화가 가능할 뿐 아니라 이 희망과 평화를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까지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내지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200주년 기념행사의 이성적 바탕이 되었으면 하는 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II. 韓빼?會의 黎明期.

2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인 사제 보서 우선 가장 소중하게 가슴에 와닿는 것은 나에게는 누구 못지않은 순교선연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 선열들의 신앙인으로서의 생활환경과 처신은 오늘 제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며, 제가 마음으로 부터 준비해야 하는 200주년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백년 전 그러니까 복음의 빛이 이 땅에 밝아올 무렵으로 잠깐 소급해 올라가보겠습니다. 그 당시 우리 사회는 사색당파의 등 살로 경제상태는 도탄에 빠져 있었고, 정신 세계는 관념적 儒?思想이 지배하고 있었읍니다. 당파 싸움은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들과 참되게 백성을 이끌어가려는 지도자들을 압박하거나 제거하였고 실속없는 대의명분으로 탁상공론을 일삼은 유교사상은 가치관을 상실케 하는 결과 외에는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하였읍니다. 이러한 상황이 실학파 출현의 배경이라 하겠읍니다. 賞學은 당시 保學者의 입장에서 볼때 실로 이 단점이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실학파에서는 유교사상의 본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복고적 연구뿐 아니라 정치·경제·과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한 實用 主義와 民本主義를 그 특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복음의 서광을 받아들여 화산과 같은 불길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바로 이 실학파 석학들이었읍니다. 이분들은 본시 서학이라는 천주교블 연구의 대상 즉 학문으로 받아 들였으나 종국에는 송두리째 포기냐 아니면 실천이냐 하는 신앙생활의 차원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것은 양심을 통하여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에 대한 과감한 응답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진리를 생산속에 실천한다는 것은 곧 그 살이 누리고 있던 모든 제물이나 권세나 명예는 물론 나아가서는 처자나 생명까지도 희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한국 교회의 초기 50년을 되돌아 보면서 제가 느끼는 바 및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1784년은 우리에게 가장 감격적인 은혜의 해라 아니할 수 없읍니다. 실학파 선조들의 피눈물나는 기도와 연구와 노력의 첫 열매로 메드로 李豫? 선조가 북경에 가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성세를 받음으로써 한국 교회 의 효시가 된 해 입니다. 이승훈 선조의 영세와 귀국을 계기로 하여 우리 교회는 이른바 假聖職?fF 시대로 접어들게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북경에 드나들면서 직접 목격한 교회조직의 형태를 갖추려는 의도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목상으로 당면한 현실적 이유로 서로 천거하여 주교나 사제가 되어 교계제도를 갖추려 하였습니다. 이 사건만을 따로 때놓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비합법적인 처사라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이 사실을 안 다음에는 즉각 가성직교회를 해산함과 동시에 북경교구를 통하여 성직자를 요청하고 필사적으로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한 사실로 볼 때는 오히려 우리 선조의 열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 선조들의 백절불굴의 노력은 10여 년을 기다려 마침내 중국인 周文講 사제를 맞이하여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고난의 길도 이제 겨우 시작하는 단계에 지나지 않았읍니다. 주 신부님은 밤낮 숨어다니며 사목생활을 하서야 했고 우리 선조들은 신부님의 안전에 온갖 정성과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첫 사제가 첫 발을 들여 놓은 지 6년 만에 우리 교회는 다시 목자없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주 신부님께서 한국에 입국하신 깃이 1795년, 辛?迫害가 일어나 많은 교우가 희생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하여 자진 출두하여 새남터에서 군문혼수 형을 당하신 것이 6년 후인 18이년이었습니다.

목자없는 교회가 되어버린 한국 교회가 두번째 목자를 맞이하기까지는 30여년의 긴 시련기를 겪어야 했읍니다ㅡ역시 중국인인 劉方濟사제가 입국한 것이 1834년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사제 한 분율 모시지 못한 교회라 할지라도, 사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직접 우리 선조들께 더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셨읍니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아니하고, 심지가 깜빡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시는" (이사42, 3)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교인을 버려두지 않으섰을 뿐 아니라 주 친히 우리 선조들의 목자가 되시어(에제 34,11 이하 잠조) 어둠속에 헤매는 그들을 인도하여 주셨읍니다. 그리하여 선교사 한 사람 없는 교회였지만 우리 교회는 숫자로도 날로 성장해 갔을 뿐 아니라 우리 신조들의 탄원의 소리는 멀리 교황청에까지 메아리쳐져 마침내 1831년에는 독립된 조선교구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제 1대 교구장이신 소 주교께서는 한국 땅을 멀리서 바라만 보시고 끝내 입국하시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1836년에 모방 신부님이,그리고 다음 해인 1837년에는 제2대 교구장 앵베르주 교님과 샤스땅 신부님이 입국하시게 되어 한국 교회는 이제 명실공히 주교와 사제와 신도를 갖춘 교회가 되었습니다.

III. 뺐性의 이삭

일단 여기까지를 한국교회의 여명기로 보고, 우리 교회사의 이 부분에서 제가 얻는 것 중에 특히 200주년기념 준비하여 마음의 밑거름이 될 만 하다고 느껴지는 것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2백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증거해야 했던 바보 그것(V 오늘의 우리도 증거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시대는 변했다 하더라도 사회 부조리는 그때나 지금이 나 다를 바가 없고 우리의 젊은이의 가치관의 혼란과 범람하는 世俗化 와 물질주의 현상 속에 방황하고 있읍니다. 우리 교희와 우리 크리스찬만 이 참다운 빛과 소금의 억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온 겨레가 특히 젊 은 세대가 구름처럼 교회에 물려오는 사신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순교 선열이 피로써 심어놓으신 그 진리 우리 역시 피로가 꾸고 키워 풍성한 열매를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이 과업은 지금 유행하는 무사안인주의나 요행주의로 이투어지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죽을 각오와 피로써만 이루어진다는 신념이 있을 때만 이루어질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교회는 가난히·고 연약하게 시작된 교회였지만 가장 풍요로운 은혜를 받은 교회었읍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2백년 전의 우리 교회 는 결코 財政的인 기반이나 성당 긴물이나 학교나 빙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보장해 줄 수 없는 것 그리나 빈 손으로도 누구든지 얻을 수 있는 진리 자체를 찾아얻고 그 진리불 보존하기 위하여 내놓을 수 있는 재산이란 죽음밖에 없었던 가난한 교회였읍니다.

세째, 이렇게 가난한 교회였을망정 우리의 선열들은 절대로 절망을 모르고 일하셨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분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과감 하게 수행하고 동시에 분수에 맞게 행하셨다고 믿습니다. 가성직교희의 형성과해산과정이라든가, 丁夏相의 성직자 영입 운동이라른가, 完淑 의 周文講 신부 보호 등은 지극히 평범한 사건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각오 해야만 했던 무수한 일들 중에 몇 가지 예라 하겠읍니다. 물론 우리 순교 선열들께는 거대한 일이나 전시효과를 전제로 하는 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매일 매순간 생존 자체에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셨을 것입니다.

네째, 우리 교회가 그때에 가장 크게 가난함을 체험하였다고 하면 그가 난은 성직자의 빈곤이었을 것입니다. 李承蒸의 세례로부터 已亥迫害(1839) 때까지 55년 사이에 우리 교회가 사제를 가졌던 기간은 주문모 신부님의 6년과 유방제 신부님의 입국에서 세 성직자를 몽땅 잃은 기해박해때까지의 5년 동안의 사목기간을 통털어 11년이 됩니다. 이 동안에 사목하셨던 성직자들은 주 신부님이 6년,모방 신부님이 3년, 앵베르 주교님과 샤스탕 신부님이 2년동안 사목하시다 치명하셨고 유방제 신부님이 2년 계신 다음 중국으로 되돌아가셨읍니다. 자리를 좋아하는 시대에 사는 사제로서 저에게는 이 성직자들의 단명 사목기간이 된지 가슴 깊이 사무첩니다.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辛酉迫害(1801) 때만 보더라도 주 신부님이 군란 가운데 숨어다니면서 돌보아야 할 신자 수가 이미 1만여 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모든 편의시설과 보장된 특권을 누리면서도 양의 무리가 3,4천 명만 되어도 짜증을 내야 하는 우리네의 사정과는 너무나 대 조적이라 하겠읍니다.

다섯째, 다른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 교회의 평신도들의 존재와 활동은 우리 겨레의 보배라 아니할 수 없읍니다. 이 명·에 진리가 전래된 것은 이역의 선교사가 목숨을 걸고 들어와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진리를 목말라하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있던 우리 선조들이셨고, 그분들은 물론 주교도 사제도 아니었고 아직 신자도 아니었읍니다. 말하자 면 평신도 중의 평신도였다고나 할까요…그러나 李藥, 茶山을 비롯한 丁 氏 3형제, 이승훈 같은 선열들의 연구심과 전도열은 첫 선교사라고 할 수 있는 주문모 신부님의 입국에 앞서 이미 신자 수가4천 명이 넘는 대 교회를 세우고 있었읍니다. 또 정하상과 강완숙 같은 순교선열은 선교사제 영입운동 내지는 성직자에 대한 봉사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분들이십니다.

이 몇 가지 예는, 무진장의 매장량을 달고 있는 광맥의 일부가 노출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평신도 형제자매들은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에게 숙제가 있다면 무엇보다도 이 무진장의 보고를 교회가 어떻게 활성화시킬 것인가 하는 괴께 이겠읍니다. 즉 과연 한 국교회는 능력있는 평신도 형제자매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그 힘과 사랑으로 교회와 사회에 더욱 크게 봉사할 수 있도록 격려와 봉사를 다하고 있는가 물어보고 대답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성직자의 기능이 있고 평신도의 기능이 따로 있는 것만은 사실이나 교회생활의 분야에 있어서 성직자가지도자의 입장에서는 주종관계는 반드시 탈피하여야 겠읍니다. 성직자 없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꼭 같이 하느님의 백 성 없는 교회도 상상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이 땅의 교회는 실로 용맹 한 평신도들의 순교의 선혈로 세워졌고, 그들의 백절불굴의 의지력으로 성직자들의 도래를 재촉하였으며,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로 성직자들의 생활 과 성무집행이 보장되었던 것이며,대부분의 그들은 끝내 그들의 삶을 성직자들을 위하여 성직자들과 함께 주님 대전에 봉헌하였읍니다. 처는 서슴치 않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순교선혈들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의 정신을 이미 2백 년 전에 앞당겨 살고 가셨다고…

IV. 몇 가지 提案

이제까지 저는 한국교회의 여명기를 되돌아보면서 마음에 와닿는 일 몇 가지를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이 몇 가지를 바탕으로 한 실천사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역시 제 나름대로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선열들의 순교정신은 구호로 외치거나 행사로 전시하기 이전에 생활로 증거함으로써 순교선열들올 본받고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현양 해야겠읍니다. 순교정신을 산다는 것은 1984년 어느 광장, 어느 날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음 시작하고 꾸준히 성실하게 심화시켜 가야 하며 표 4:우어? ?^-Α] 살아가야겠읍니다. 그리고 순교의 길은 언제나 어려움과 외로움을 수반하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읍니다. "남들이 다 저렇게 하는데 어떻게 나 혼자만이···“또는"나 혼자 잘해본댔자 망망대해에 물 한방울인걸” 하는 등의 유혹을 던고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님과 순교복자들께 겸손되이 간구해야겠읍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순교의 기회가ㅡ그것이 아무리 작다하더라도ㅡ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 입니다.

둘째로,가난한 교회내지는 가난한 그리스도자로 증거생활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무수한 군중ㅡ하느님의 백성一의 아쉬움에 조금이라도 동참하고자 하는 노력은 보여주어야 하겠읍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차원에 서나 개인생활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이 가난한 모습, 검소한 생활태도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큰 호소력을 갖고 있는 복음화의 수단이 라 하겠읍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물론 궁핍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누더기 옷을 입거나 굶주려야만 가난한 것이 아니라 부자이면서도 지극히 가난할 수가 있고 궁핍하면서도 부자일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서 진정한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일체의 것에서 필요할 때는 언제고 얼마나 큰 희생이라도 미련 없이 감내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그야말로 모든 소유물을 보다는 섀희 보고, 독점하기에 혈안이 되기보다는 나누는 데서 보람을 찾는 사람입니다. 200주년을 맞으면서 이러한 가난의 생활도 병행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이 가난함을 조금이라도 실감하기 위하여 각자의 방이나 캐비넷이나 호주머니를 가끔 살펴보고 나에게 꼭 필요 하지 않지만 무섭게 애착하고 있는 것이 있나 없나 보십시오. 종종 놀라 실겁니다. 또 나는 '제일 고급스러운 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지 또는 ‘편한 것은 모두’ 갖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닌가도 가끔 자문자답 할 만합니다. 이러한 예들이 너무 째째하다고 느끼시면 그 스케일을 자동차나 심지어 우리 본당 성당이나 기념관의 차원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여하 간에 우리가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자처할진대 우리 가난의 저울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으셨던 그 생활이고 우리 순교선열들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 외에는 있을 수가 없겠읍니다.

세째로 제언하고 싶은 것은 분수에 맞는 생활 속에서 한편으로 보람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위에서 대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昔을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와 우리의 거리는 그럴 듯한 표어들이 적혀 있는 현수막과지시판과 스피커 소리로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생활에는 보람있는 일,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이 크게 작게 많이 있읍니다.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마더 데레 사께서. 하시는 일들이 숭고하게 보인다면 바로 그 일들이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평범한 일들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거만해서도 안되지만 하느님 의 자녀라는 긍지를 가진 사람으로서 열등의식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뽑내서도 안되지만 내 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과소평가해서도 안되겠읍니다. 오히려 내가 착한 지향을 갖고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싸라기라고 간주하고 정성껏 행하며 보람을 느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네째로는, 제 자신 성직자의 한 사람으로 성직자의 쇄신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길게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 세계적으로 훌륭한 평신도 가있다면 우리 성직자들이 쇄신될 때 우리 교회는 얼마나 더 번영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얼마나 더 크게 확장되겠읍니까? 한마디로 우리 교회 초기의 성직자들이나 복자 김 안드레아 신부의 생활이, 우리 凡人들은 따라 갈 수 없는 密人의 길이어서 나에게는 무관한 일인 양 생각한다면 이 사고방식부터 고쳐져야 한다고 민습니다. 그분들이 가신 길이 분명히 쉬운 길은 아니었읍니다마는 또 우리에게 결코 불가능한 길도 아닐 뿐 아니라 사실은 우리도 마땅히 가야 할 길이라고 봅니다.

끝으로, 우리 한국교회는 이제 평신도 형제자매들을 몰고가는 모습이나 이용하는 인상을 씻어버리고,평신도 형제자매들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맞는 대우를 받고,동시에 그정신에 바탕을 두고 교회생활에 보다 더 능동적인 자세를 갖도록 보다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격려하여야겠읍니다. 평신도 형제자매들도 수동적인 태도에서 이제는 좀더 능동적인 참여를 지향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성직자들도 평신도의 말과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알고, 신도들이 오만에서가 아니라 사랑과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성직자들에 대한 겸손한 도전도 가능할 정도로 성숙한 교회로 성장해야 할 때라고 읍니다. 성직자나 평신도나 두려워하는 주종관계에서 이제는 해방되어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수준이 높아지는 평신도의 자질을 기뻐해야 하고 평신도물은 성직자들이 날로 거룩해지도록ㅡ세속화되도록 이 아니라一채찍질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기회에 한마디 덧붙이고싶은것은, 우리나라 성직자들의 수녀들과의 관계도 근본적이 아 니라면 대폭적으로 개선되어야 된다고 봄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수녀님들은 들러리나 시녀의 역할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 인상이 인상에서 끝나면 좋겠읍니다만 만일 사실에도 근거가 있다면 이러한 인상도 이 기회에 마땅히 씻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본래는 석 의 측면에서 한 단원, 또 善의 측면. 에서 한 단원씩 말씀을 드리려 했으나 이미 주어진 시간을 훨씬 넘겼으니 일단 이만 줄이기로 하겠읍니다.

끝으로 아무쪼록 이번 200주년 기념행사가 안으로 알차게 여문 우리 교. 회의 모습이 넘쳐 흘려서 이루어지는 외부 행사가 되어,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뜻있는 행사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