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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年 木? 共同體의 해 - 韓國主敎團 共同 司牧敎書
1982년 5월호 (제 81호)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는 마음과 뜻을 합하여 전국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 및 신자들에게 이 사목교서를...

주일의 말씀
1982년 5월호 (제 81호)
부활 제4주일 배척당한 자의 구원 제 1 독서 : 사도 4,8-12 제 2 독서 : 1요한 3,1-2 복 음 : ...

이레네우스 - 교부들의 사상
1982년 5월호 (제 81호)
리용의 주교인 이레네우스 (Irenaeus) 는 ‘가톨릭 교리의 수호자’라 불리울 정도로 가장 뛰어난 2세기...

신관의 어제와 오늘
1982년 5월호 (제 81호)
歷史-存在論的 神觀의 特性 여기서 뜻하는 ?史 “存/H論的 觀은 전통적 우주론적 신관이나 7세 이후의 ...

罪란 무엇인가 - 罪에 관한 神學的 考察
1982년 5월호 (제 81호)
현대에 오면서 철학이나 신학 분야에서 초월적 神개념은 단지 人間性의 內心이나 深衷에 존재하는 것으로...

유교적 인간이해와 그리스도교
1982년 5월호 (제 81호)
이 글은 1981년 10월 31일 '한국인의 심성과영성‘을 주제로 한 제8회 신앙대학 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올 ...

하느님 앞에 선 인간
1982년 5월호 (제 81호)
1. 머리말 인간은, 희랍 철학에 따르면 정신계와 물질계를 연결시키는 小宇宙(micro-cosmos)이다. 그러...

k. 라 너
1982년 5월호 (제 81호)
이 글은 ?山·敎區 공의 회 사무국이 Karl Rahner 의 Strukturwander der Kircheals Aufgabe und Change(...

200주년 記念事業을 위한 提言
1982년 5월호 (제 81호)
1.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지 2백 년이 되는 기념스러운 해가 바로 눈앞에 ...

200주년 精神運動의 方向
1982년 5월호 (제 81호)
머 리 말 솔직히 고백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저는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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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輯 - 200주년올 맞이하는 韓國敎會 1982년 5월호 (제 81호)

k. 라 너

교회의 미래상

이 글은 ?山·敎區 공의 회 사무국이 Karl Rahner 의 Strukturwander der Kircheals Aufgabe und Change(한국어 역; 분도·출판사 발행,「시노드를 위한 ?會의 未來像)를 요약 제공한 것임. 編輯者 註

I.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1. 敎區 公義會의 基本 ?念 定立의 必要性

교구 공의회는 그 교구의 중대사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의 행사에 불과한 것이거나 그 결과가 서류상으로만 남는 어떤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실천에 옮겨져야 하고 생활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구의 전 구성원이 마음과 힘을 합하여 참여할 때에 가능한 일이다.

교구 공의회가 무엇이냐는 기본 개념이 명확해야 하고 그 방향도 처음부터 뚜렷해야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의된 것이 그 기본 개념이라는 생각은 틀린다. 이것 들은 어떤 윤곽은 말해주지만 너무 일반적이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충분하지 못하다. 따라서 이 기본 개념은 현 사회현상과 의식구조 등을 참 작, 근거한 것이라야 한다.

2. 敎區 公義會를 위한 狀況 分析의 必要性

교구 공의회를 시작하면서 교회가 처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분석하려는 것은 교회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주위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고,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다 그런 상황에 근거하고 또 그런 상황을 상대로 하여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교구 공의회가 질문을 제기하고 토의를 전개하며 결정을 내려야 하는 모든 것이 사목적인 자료이며, 따라서 사목 신학적인 자료이기에 신학적 상황 분석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3. 現代社會 안에서의 敎會

Ο 개인 외식이나 사회 의식이 과학ㅡ역사과학, 자연과학, 경험적 사회과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

? 인간은 여러 차원에서 인간 자신의 창조 능력과 개조 능력의 대상이 되어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자체가 확정된 하느님의 모상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오히려 우주의 한 정점으로 이해되고, 이 정점은 아무런 확정된 목표도 없고 유토피아적인 시도들에 의해서 미래로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어떤 것에 불과하다.

?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전형이 될 만한 인간상 및 인간의 목적이 뚜렷하지 못하고 유동적이며 또한 다원화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방황을 하게 파고 순간에 만족하는 생활을 영위하려고 하거나 절대자를 찾아서 의탁하려는 경향도 크다.

? 심층 심리학이 인간 내면올 말해준다고 믿는다. 이 심층 심리학은 인간의 자유는 등한시하고 심리적 기법으로ㅡ"이것은 자연과학에 속한다“一그리고 인간의 생물학적 유래를 이루고 있는 무명의 힘으로 인간을 분해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또 신령한 힘으로 인간을 통찰하고 미래의 행위에 대한 방향 제시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도의 힘으로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크다.

? 산업사회에로의 전환기에 처한 사회는 다원주의적이고 일외인지도 이념이 없다.

? 대중사회의 권위는 기능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추세도 종래의 권위의식이 양립하고 있다.

? 매스콤이 사회를 조종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이 매스콤을 조종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4. 宗敎 社會.學的 狀況

수계범절하고 사주干령하겠다는 종래의 개인주의적 신앙은 소위 구교우들에게서 아직도 볼 수 있다.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나 기도, 전례생활에서 외적인 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이것이 구령하는 데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기도함으로써 화를 면하고 복을 받겠다는 생각에서 교외에 나오는 경향 이 크다. 이것은 기독교 밖에서도 볼 수 있는,우리나라에 널리 펴져있는 사고방식인데 적은 노력내지 희생으로 자기가 바라는 일올 성취하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더 위대한 자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이라고 하겠다. 또 생활에서 오는 불안내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절대자를 찾아 의지하려는 동기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경향도 있다.

이러한 경향들은 다 절대자 하느님을 인정하고 공경하지만 종교성의 발로이거나 종교심과 결부된 구태의연한 신앙심에서 나온 신앙생활 형태라 하겠다. 교회에 나오면서 또 기도하면서 그때그때, 혹은 순간순간 어떤 체험을 하고 마음이 뜨거워져야 참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이고 신비주의만이 참된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 데서 오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신앙생활을 참된 신앙생활과는 차이가 있다고 해서 배척해서는 안되겠다. 그 속에도 하느님을 인정하는 것뿐 아니라 그의 참된 신앙생활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고,또 참된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자유로이 복음에 응답하고 신앙의 결단을 내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고 신앙 공동체에 참여하면 사회가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에 위배될 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리스도화 시키려고 노력한다. 또한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각자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발견하게 되고 이들이 모여서 사회에 고유한 영향력을 주는 신앙인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루게 된다.

5. 작은 양떼의 敎會

우리 교회는 작은 양떼의 교회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수가 전체인구에 차지하는 백분율이 적다는 의미에서,또 사회에 행세하는 세력이 크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겟토불 이루거나 종파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겟토나 종파는 숫자가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정신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작은 양떼의 교회라 함은 안일하게 종래의 신자생활을 계속하면서 새로운 신학, 새로운 신자 생활형태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이단시하고, 그들이 교회를 ‘프로테스탄 화’ 한다든가 교회를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고 생각하며 만사가 옛날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통 교리와 교회에 대한 충성과 엄격한 도덕을 제창하지만 교회 안에 위험시되어 야 할 무리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다원주의 현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작은 양때로 머물러 있게 된다 해도 겟토나 종파와 정신을 버리고 개방된 자세를 취해야 한다. 또 교회 안에 속하는 사람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 사이에 경계선이 어디에 있는가를 경우 경우마다 판단하기 어렵게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현재와 같은 추세를 보여 새로 교회를 찾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그들을 정신적으로, 또 실천의 모범으로 기존 교회에 포용 홉수하고 지도해 나갈 수동성이 없는 한 명목상의 신자내지 냉담 교우의 숫자만 늘어날 것이다. 한때의 구미식의 그리스도교 사회는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또한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II.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方法論的 栽說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세계의 특징이다. 이 예견 불가능한 세속의 미래가 앞으로의 교회가 활동할 장소요,교회의 행동을 좌우하는 한 요소라면 교회의 미래 역시 불투명하다. 이렇게 예견 불가능한 미래를 향하여 나가는 이.것은 교회의 인간적인 운명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적 소망과 진리의 당연한 전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해오던 것이나 답 습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미래에 다가올 일을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의 미래는 매사에 그리스도교 원리를 적용하는 것만으로 설계되고 건설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매사가 하나의 원리에서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교회의 삶을 위하여 불행하고 또 교회를 경직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내려야 하는 중요한 결정 중에는 최선의 지식과 양심에 따르면서도 합리적인 원리의 적용만이 아닌, 창조적 자유에 속하는 카리스마적인 결정올 필요로 한다.

그러나 미래를 향한 이 교회의 행동은, 특히 교구 공의회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데 있어서는 단호한 선택이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 또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유한한 인간의 능력을 어디에 중점적으로 투입할지를 두고 논쟁이 있을 수도 있다.

또한 교회는 경우에 따라 전통적으로 고수해 온 과제와 지위를 포기하는 용기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손상될 수 없는 교회의 과제와 교회의 권리가 역사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의 발전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교회 안에서만 편한 마음을 느끼는 사람들은 변화 앞에서 소외와 충격을 느낄 수 있기에 그들의 입장도 진리와 사랑에 찬 마음으로 생각해야겠지만 불가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에 으레 보수적인 사람들이 정당하다는 법칙은 없다. 그러므로 세계의 미래를 위하여 보다 큰 역사적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거기에 대부분의 인간적인 능력을 투입하고 나머지는 더 큰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둘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때맞추어 제기되고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남녀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교회의 일에 봉사하고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진다는 것은 교회사에 성령께서 하시는 중대한 역사로 보아야겠고 이것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는 이런 시기를 놓치고 기회를 잃게 하는 것이고 구원 역사에 역행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자유로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교회가 건설되어 가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리라.

2. 脫聖職主義 敎會

교회 안에 특정한 임무와 권한을 면 직무가 존재한다. 교회의 이 직무는 교회의 본질, 사명에 유래하고 성령으로부터 오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 것이기에 일반 사회의 직무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 고유한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에서 유래하여 그 직무 담당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분리 시켜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직무는 한 단체로서의 교회 안에서 기능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단체로서의 교회는 교회를 참된 교회가 되게 하는 것,성령, 신앙, 소망, 그리고 사랑을 가진 참된 교회의 표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적 구조상의 위계 질서는 교회의 고유한 본질상의 위계 질서와는 구분된다. 따라서 교회의 직무는 존중되어야 하나 사심없는 사랑의 봉 사를 실천하고 예언자 역할을 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물론 하느님의 영은 교회내에서 성령 보유자와 직무 담당자와의 어떤 절대적 분열을 능히 막으실 수 있다. 따라서 교회내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직무에 어떤 영적 자질이 주어진다는 것은 가톨릭 신앙에 속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 보유자와 직무 담당자가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

탈성직주의 교회란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불며 직무 담당자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을 마련해 주신 바 없다는 것, 직무란 단순히 성 령과 동일시 될수도,성령을 대신할 수도 없으므로 직무에 못지않게 법적으로 완전히 규제될 수 없는 카리스마적 현상도 교회를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 직무 역시 사람들 앞에서 참으로 효과적인 신빙성을 지니자면 성령의 도우심을 입증해야 하며, 아무리 정당하다고는 하더라도 공식적 사명과 권위에만 호소해서는 안된다는 것, 이런 모든 것을 직무 담당자들도 기꺼이 겸손하게 고려하고 있는 그런 교회다.

직무는 그리스도로부터의 사명에 근거하는 것이지, 단순히 신앙인 개인들의 사회적 결합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직무가 지니고 있는 권위의 현실적 효과는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바치는 신앙의 순종에 의한 것이다.

권위의 주장이 으레 개인의 자유로운 신앙행위에 대한 하나의 호소로써 나타나고 개인의 신앙행위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지 못하고서는 실질적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되어있는 교회, 따라서 직무담당자가 자신의 권위에 호소한다는 것이란 구체적으로 보면 사실상 그가 신앙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교회, 바로 그런 교회가 탈성직주와 교회 다.

탈성직주의 교회에서도 직무의 권한들은 신품성사라는 특별한 예식을 통하여 수여되며,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교회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직무 담당자들에게 제공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그러나 직무 담당자는 자신이 참된 인간이 되고 성령에 풍만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만 자기 직무에 대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

3. 人間에 奉仕하는 敎會

교회는 자신이 아니라 인간을 중요시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교회는 세계를 위한 구원의 성사이다. 세계는 사실상 대부분이 제도로서의 교회 밖에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될 것이다. 교회가 만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올 받아 파견되어 있다고 해서 교회와 가견적 형태 밖에서는 구원 이 없으며, 세계의 점진적 구원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교회가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얻는 일이 일차적으로 지니고 있는 뜻은 길 잃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있기보다 세계 도처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만인에게 뚜렷이 밝혀주는 증인들을 얻는 데 있다.

인간들을 교회에로 이끌겠다는 노력은 인간들에게 봉사할 사람들을 확보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적 자연 가치는 존중할 줄 아는 선의를 가졌으면서도 교회를 무시하고 그리스도인을 적대시하는 그런 사람에게도, 가난한 자들과 같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봉사해야 하고,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인간 존엄성올 옹호해야 한다.

4. 道德化 없는 道德의 敎會

(도덕 규범에 굳어지지 않으면서도 참된 도덕을 실현하는 교회)

교회는 복음 메시지를 설교하면서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참 다운 도덕원리의 복합체를 옹호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규범만 내세우고 부도덕한 세상에 대하여 개탄하면서도 그 도덕규범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내면적인 인간본질의 체험이나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내면적 체험으로(성 령, 자유, 사랑의 메시지) 승화시키지 못할 때에는 교회가 도덕화되어 버 리고 만다. 교회의 도덕화란 교회가 윤리도덕을 가르치면서 그 규범에 종속되고 굳어짐으로 교회의 가르침이 도덕적인 가르침만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실존의 내면적인 복된 비밀을, 불안과 자기 소외에서 해방시켜 주 는 속량의 비밀을 알려주며 인간을 깊은 삶의 불안과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하느님의 영올 체험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윤리가 의미 있게 된다.

옛날보다 훨씬 복합적이며 엄청난 현대사회에서 교회는 사람들이 일반 적, 추상적 규범만이 아니라 구체적,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규범을 요구할 때 속수무책일 경우가 허다하다。그런데도 교회가 마치 스스로 언제, 어디서나, 어느 경우에나 손쉽게 적용할 수 있는 규범을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한다면 교회는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버린다는 인 상올 주며, 그런 값싼 처방에 불신감만 조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각자의 양심에 맡겨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 주장도 나오게 된다. 이때 양심이란 미명 아래 주관적인 독단이나 취향을 옹호하기도 한다. 이것은 교회가 복음 선포 과정에서 도덕의 영역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며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는 양심교육을 통하여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과거의 윤리로는 생각도 못한 분야에까지 자주적이며 책임성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일깨워주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복음 선포가 도덕규범인 것처럼 혼돈하고 있지 않은가? ("돈 벌어놓고 나이 많아져서 죄짓지 않게 되면 교회에 나가겠다.“)

도덕화 없는 도덕을 이루려면 하느님께 호소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의 진정한 관계 안에서 보다 개방된 정신과 보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속수무책인 세상의 문제들(예를 들면 인구 폭발문제, 세계의 기아문제, 보다 큰 자유와 정의를 위한 사회건설)까지 깊이 窮究하고 큰 소망을 가지고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5. 참된 靈性의 敎會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영성이라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참된 그리스도교회의 영성이 우리에게 있는가? 영성이란 개인적인 영역의 하느님과의 내밀한 사랑만이 아니라 보다 큰 정의와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진정한 투쟁으로도 드러나야 한다. 그것은 내향적으로 자기 자신의 아름다운 영혼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로 운 사회의 구현을 위한 헌신도 그리스도적인 영성이란 이야기다. 교회가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자면 영성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유물론적 인 수평주의의 거부만이 아니라 교회가 자신의 영성적인 능력들을 새로이 발견하고 실현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무서우리만큼 영성적으로 활기없는 교회가 되었거나, 일부 생기있는 영성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의 일반대중(이들은 대개 도덕화된 교회에 머물면서 의식주의나 합법주의, 또는 행정적 통제에 의해 타성적인 교회의 소속감 안에 사는 것으로 만족하고 만성적인 권태와 체념에 젖어드는 것 같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올 떠 나 소수의 비밀 집회에 머무는 경향이 있고 그것마저 진정한 그리스도적 영성인지 의심을 품게 하는 요소들이 적지 않다. 주교나 사제들까지도 교회 공직자로서의 그들이 누리는 사회의 전제 조건들(종신적, 고정된 생활 환경, 타성적인 복음 메시지 설교, 성사집행, 신성불가침한 신앙공동체 의 대표)로 인해 지나치게 안이한 그리스도교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복 잡한 사회현실 속에서 청소부나 상인, 노동자, 공무원, 학자 등 현실적인 삶에 몰두하여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그들의 구체적인 삶에도 의미와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하느님과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설교자는 위험하면서도 생활과 직결된 우리 현시대의 실존이 (이것이 은총이기도 하다) 제공하는 내용으로 조심스럽게 전진해 나가는 것이 일마나 어려운지 걱정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본질과 하느님의 자유에 속한 불가사의성 안에 우리의 유일한 최후의 해결책이 있을 따름인 그런 때에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된다.

ㅡ어디서 불과 같은 혀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ㅡ어디서 하느님의 계명을 고역스럽게 준수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인간을 노예화하는 삶의 불안과 인간을 좌절시키는 이기주의로부터 언간 올 영광스럽게 해방시켜 주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가?

ㅡ어디서 기도가 참으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은혜와 같은 것으로,영광스런 은총으로 체험되고 있는가?

ㅡ어디에 하느님 존재의 합리적인 증명 방식을 넘어서서 참으로 자기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솟아나는 생생한 하느님의 체험으로 인도해 주는 그런 신비 교육이 있는가?

ㅡ어디에서 합리적 추론을 넘어 인간이 인간을 위하여 지금 여기서 유일하게 적용되는 하느님의 뜻을 추구할 실존적 결단의 논리가 이해되고 있는가?

_어디에서 보다 많은 자유와 정의를 위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의무로써 사회 비판적이며 사회 정책적인 참여와 투신이 그 자체 안에 신비스런 영성을 내포하고 있거나, 또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가?

이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인간에게 부과되고 있는 가장 내면 적이며 절대적인 의문에서부터 자라 나오고 있다. 따라서 관상수도자들의 의미도, 영신적 사부들이나 은수자들의 처신도 이러한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자세(한 인간이 자기 삶의 형언할 수 없는 비밀을 기도하면서 사랑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 ㅡ죽음이 영원한 생명의 승리와 시작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번 명분도 없는 약속임올 소망에 찬 마음으로 내다보면서 현세의 온갖 그럴싸한 보화들을 떨쳐버리는 포기 행위로써 나타내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영성을 바라보며 신비의 교회요, 속량받은 자유에 대한 복음적 기쁨의 교회이어야 한다. 하느님이란 말도 인간체험의 온갖 높은 고지와 깊은 심연을 통과하며 거듭 새로이 짐작되고 감수되어야 한다. 또한 이와 더불어 곡읍에 붙여지고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살아계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선포하는 것이 참된 영성의 교회가 할 일이다.

III. 우리의 未來는

(1) 구태의연한, 흑은 현대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학과 복음선포 방법을 검토.

가) 현재 사용되고 있는 교리교재 파악 검토 및 분석.

나) 본당 교리교사 확보, 교육 및 대우에 대한 조사.

다) 현행 본당 및 교구 차원의 신자 재교육 계획 검토.

라) 교회의 각 단체를 통한 신앙생활 지도 및 교리교육 검토.

마) 현재 교구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 피정 및 세미나를 통한 복음 선포 및 센활지도는 건전한가?

바) 예비자를 위한 교리반 운영 실태조사.

사) 매스미디어를 통한 복음 선포 검토(주보 활용, 통신교리, 통신성서, 신문 및 방송 이용 가능성)

아) 현행 강론은 그 내용과 방법이 현대인을 위한 복음선포에 적합한 가?

(2) 하느님 백성의 생활이 복음에 입각한 것이며 복음선포에 적당한 것인지 검토.

가) 직무 담당자들은 자신의 직무의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 실천하고 있는가(봉사자로서)?

나) 직무 담당자들은 말씀의 선포,성사 관리 및 생활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가(미사성제에 대한 을바른 이해, 고백성사, 혼인성사 및 기타 성사관리, 또한 기도생활 및 대 인관계)?

다) 평신도 사도직 검토(복음선포에 있어서 직무 담당자와의 협력).

라) 현행본당 운영 체제는 교회의 직무 수행에 적합한가?

마) 신자들이 자신의 일상j활에 있어서 교회 직무의 도움을 받으며 기도와 성사생활로 성화교고 있는가?

바) 지속적이고 발전적인 교회 직무수행을 위해서 성소자 확보와 교육에 들이는 노력은 충분한가?

사) 교회내 직무 담당자(비성직자 포함)들의 생활은 보장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