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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年 木? 共同體의 해 - 韓國主敎團 共同 司牧敎書
1982년 5월호 (제 81호)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는 마음과 뜻을 합하여 전국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 및 신자들에게 이 사목교서를...

주일의 말씀
1982년 5월호 (제 81호)
부활 제4주일 배척당한 자의 구원 제 1 독서 : 사도 4,8-12 제 2 독서 : 1요한 3,1-2 복 음 : ...

이레네우스 - 교부들의 사상
1982년 5월호 (제 81호)
리용의 주교인 이레네우스 (Irenaeus) 는 ‘가톨릭 교리의 수호자’라 불리울 정도로 가장 뛰어난 2세기...

신관의 어제와 오늘
1982년 5월호 (제 81호)
歷史-存在論的 神觀의 特性 여기서 뜻하는 ?史 “存/H論的 觀은 전통적 우주론적 신관이나 7세 이후의 ...

罪란 무엇인가 - 罪에 관한 神學的 考察
1982년 5월호 (제 81호)
현대에 오면서 철학이나 신학 분야에서 초월적 神개념은 단지 人間性의 內心이나 深衷에 존재하는 것으로...

유교적 인간이해와 그리스도교
1982년 5월호 (제 81호)
이 글은 1981년 10월 31일 '한국인의 심성과영성‘을 주제로 한 제8회 신앙대학 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올 ...

하느님 앞에 선 인간
1982년 5월호 (제 81호)
1. 머리말 인간은, 희랍 철학에 따르면 정신계와 물질계를 연결시키는 小宇宙(micro-cosmos)이다. 그러...

k. 라 너
1982년 5월호 (제 81호)
이 글은 ?山·敎區 공의 회 사무국이 Karl Rahner 의 Strukturwander der Kircheals Aufgabe und Change(...

200주년 記念事業을 위한 提言
1982년 5월호 (제 81호)
1.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지 2백 년이 되는 기념스러운 해가 바로 눈앞에 ...

200주년 精神運動의 方向
1982년 5월호 (제 81호)
머 리 말 솔직히 고백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저는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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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1982년 5월호 (제 81호)

신관의 어제와 오늘

沈 相 泰 (가톨릭대학 敎授 . 神父)

歷史-存在論的 神觀의 特性

여기서 뜻하는 ?史 “存/H論的 觀은 전통적 우주론적 신관이나 7세 이후의 인간학적 인격적 신이 지니는 정당한 취지를 수용하는 한편, 그 문제성들을 의식하면서 '하느님다운 하느님'의 모습 제시하려고 한다. 이 신관에서는 전통적인 神表象과의 관련성 및 분별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주론적이고 인간학적 思惟過程 을 거쳐 파악된 하느님은 우주 안에서 現前하거나 ?存하는 유한한 존재자들의 근거에 대한 물음이나 세계 내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실존 영역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의 해답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전통적 우주론적 神觀 안에서의 하느님은,다양하기 그지없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서로 은연되어 있는 이 세계와는 달리 단순하고 단일함 뿐만 아니라,완전하고 전능하며 무량하고 무한한 분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제4차 라때란 공의회(1215)나 제 1차 바티칸 공 의회(1869~1870)의 가르침이 명시 하듯이 전대로 불변하는 존재1〉로 파악되었다. 변화하는 것은 한 상 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전하는 것을 뜻하는데, 하느님은 당신 존재의 무한성에 입각해서 불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파악된 하느님은,무상하고 고통으로 가득찬 이 造物世 界와는 무관하게 그 위에서 당당하게 군림하는 절대자로서, 그러면서도 이 유한한 세계의 근거이자 주재자로서 영원히 존속하는 분으로 파악된 것이다. 이렇게 파악된 하느님은 절대군주 체제 안에서의 임금이나 황제처럼 빈곤과 고통으로 특징지어지는 백성의 부자유스러운 삶과는 무관한 절대적 권력과 영광을 누리는 절대자와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절대군주나 황제가 일반 백성이 지어야 하는 갖가지 고통과는 무관한 존재이듯이 하느님 역시고 동과는 무관한 존재로 파악된 것이다(6>eos , 이렇게 하느님이 고동과는 무관한 전대존재로 파악됨으로써 無常이라는지 죽음 등의 고통에 처해지는 이 세상 조물들과 는 완전히 구별되는 분으로 간주된 것 이다.

하느님이 고통과는 무관한 존재라는 이 사실은 특정한 구원관으로 부터도 요청되고 있다. 즉 인간의 구원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때에 비로소 성취되는데 구원 속에서 의 삶은 더 이상 무상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至福의 삶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생명의 완전한 至福 性은 고통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통찰로부터 결과적으로 하느님이 이 세계 역사 속에서 겹쳐지는 갖가지 비극과는 무관한 無感情 (Apathies] 소유자로 규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神의 무감정성을 신의 완전성과 지북성 을 나타내는 展性으로 규정하는 본 시 희랍형 이상학의 통찰이 전통적 그리스도 신관에 자연스럽게 수용 되었고 神論의 한 기초개념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신과 동일시되는 개념들인 ‘不動的 動者’, ‘第一原因’, '必然有’, '最高存在' 그리고 '最 高知性的 設計표' 둥에서도 무상하 고 고통에 가득찬 조물과는 무관한 초월성이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표상범주 안에서 하느님을 ‘고통당하는 분’으로 규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가장 심각한 反論은 '저항적 무신론자’들에 의하여 제기된다.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갖가지 천재며 역사적 재난 그리고 형이상학적 惡으로 말미암아 고농의 체험에 직면한 이들은 인간과 세계의 운명과는 무관한 신에 대해 反旗를 드는 것이다. 사실상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現存樣式에 관한 물음과 비교해 볼 때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는 대단치 않은 것이다. 유한한 세계의 창조주로서의 절대자가 무고하게 고통을 겪는 피조물의 비참과 무관하게 고고한 자세로 군림하는 것을 저항 적 무신론자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은 '기만자, 교수형리, 독재자, 인형극 감독자’ 등으로 나타나되 '하느님 다운 하느님’으로 나타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에는 인간과 세계의 비참한 운명과 무관하게 군림하는 절대자의 '하느님 다움' 이 정당하게 의문에 처해져 있다. 그리고 '하느님다운 하느님에 대한 갈구’는 수많은 求道者들에 의하여 더욱 강력하게 표출되고 있다. 오늘날 다양한 세계관을 가진 많은 사람들로부터 念願되는 '하느님다운 하느님'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취지가 歷史 在論的 神의 기본취지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자신의 존재를 동일시하는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악과 고통과는 전혀 무관한 무감정의 소유자가 아니라, 일정적으로 역사 속에 개입하여 스스로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이라고 이미 다른 기회에 말한 바 있다. "악과 고통은 인간사회를 여전히 짓누르고 있 다. 이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간 을 고문에 처한다. 함께 고통당하는 하느님은 고통당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문제에 해답을 주었다.“2) 여기서 하느님은 인간과 세계 일반이 겪는 고통과는 무관한 분이 아니라, 이 고통에 깊이 관련을 맺고 ‘고통당하는 분’이라고 규정된 이다. (θεο? παΟητογ).

그리스도 신앙은 순진한 친학식 思惟의 결과로써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연역해 낼 수 없는 역사 안에서 발생하고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른 하느님의 계시와의 해후를 통해서 가능 하게 된다. 그리스도 신앙의 思惟 는, 인간이 되고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무판한 그리스도와 ?述에 대한 思惟로부터 -S-발해야 마땅하다. 바로 이 '그리스도事件 속에서 하느님은 '不動的 動者'가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는 분으로, 무감정의 소유자가 아니라 안정적으로 조물의 운명에 동참하여 ‘고통당하는 분’으로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교적 복음 선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 神이 형성된 이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하느님의 수난불가능성을 동시에 주장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이들은 '고난당할 수 없는 하느님의 수 난,(passio Dei impassibilis)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3) 서구의 전통적 그리스도 신학은 희랍철학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자연신학’ (theo-logia naturalis)으로 이해하면서 신학일반의 기반으로 삼아왔다. 이 자연신학의 기능을 담당한 교의신아의 첫 주제인 신론(De Deo t/≪o) 은 스물라 선학의 형이상학과 거의 구변되지 않았다. 신본의 구성과 수요t증은 이 형이상학에서 원용 되었다. 이 신론 속에서 거론되는 신의 속성 중와 하나가 무감정이고 따라서 하느님은 수난과는 무관한 존재이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자신을 일치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수난당하는 당사자가 하느님이 아니고 순전한 인간적 존재일 때에 그리스도의 수난은 수많은 인간적 비극의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은 실제로 고난을 겪지 않으면서 무죄한 인간으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는 존재가 과연 하느님다운 하느님일 수 있는가? 하느님이 본질상 고난을 받을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하느님의 계시의 절정 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인 것 이다.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둘째 位格아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친히 수난당하셨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神論역시 이 구체적인 계시사건으로부터 思惟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그리스도의 수난 안에서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뚜난 을 하느님 안에서 발견해야 할 것 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고난과'열 정'에 대해 말함으로써, ‘하느님은 사랑이다’(1요한4,16)라는 그리스도 신관의 기본진리가 생생하게 제기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뜻하는 歷史-存在論的 神觀은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과정 속에서 하느님이 과연 어떠한 의미로 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며 완성자일 수 있는가를 구명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세계가 겪는 고통에 대한 해답으로 함께 고통당하는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 거론하는 것이다.

4. 이 神觀에서의 하느님과 苦痛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의 고통이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하느님에 대한 물음과 고통의 근원이라든가 正體에 대한 물음은 공동운명적인 성격을 지닌다.4) 이 물음들은 공동 해답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한 가지 물음도 만족할 해답을 찾지 못 할 것이다. 단 한 사람의 무죄한 고난이, 전능하고 전선한 유신론적 神表象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反 論일 수 있다. 고통 속에서 아픔을 울부짖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하느님의 하느님다움은 의문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와 함께 고통당하는 하느님이 어떻게 고난 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 가를 구명하는 작업이 神觀을 정립 하는 데 관건이 된다고 믿는다.

역사란, 개별 인간과 사회. 그리고 인간과 자연세계와의 관계가 완걸 된 것이 아니라 개방된 過程이라고 앞에서 규정된 바 있다. 이 개방된 과정으로서의 역사의 內的 根據는 자유이다. 인간들이 자유롭기 때문에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면 변화무상한 이 세계 과정이란 존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造物인인간 과 조물주 하느님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생겨나도록 주어진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자유롭게 응락할 수 있도록 창조한 것은 진정한 사랑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인간의 창조는 전능한 사랑이 이룩한 기적 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전능은 그의 ‘사랑의 힘’이다. 이 사랑이 인간과 그의 세계에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 주고,인간으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두고, 인간의 자유에 의하여 하느님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두는 전능한 힘이다. 즉 하느님의 전능한 힘 이란 인간과 세계를 자유롭게 두고자 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과의 자유로운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기 때문에 인간을 결코 억압하지 않는다.“5) 자연세계와 인간의 창조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질에 부응하는 일이다.

사랑은 본시 善의 己傳?이요, 自己讓渡이다.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떠나가 다른 存在者에게 들어가 다른 存在者에 참여 하고 그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善의 힘이다. 이 사랑은 파괴적 열정과는 구별된다. 사랑은 자기 아닌 남을 존재케 하고,남에게 생명을 선사하려고 한 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포기를 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양도하고, 자 기해소를 하지 않고 자기를 헌신하는 善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남인 상대방 속에서 전적으로 존재하면서,바로 이 상대방 속에서 전적으로 자기자신으로 머문다. 사랑 자체인 하느님은 강요나 恣意 에서가 아니라 기쁘게 당신 자신을 다른 존재자에게 건네주면서 바로 하느님, 곧 사랑으로 머무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세계는 영원한 사랑인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창조적으로 건네주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 는 순수한 사랑의 자기양도를 통해서 생겨난 조물의 삶 이 고통스럽게 나타나는 데 있다. 인간은 세계 안에서 갖가지 형태의 악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겪는다. 인간의 삶은 불가피한 죽음에 직면해서 하나의 모순으로 나타난다. 삶은 살려고 하고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은 많은 것, 영원을 소유하려고 노력하지만 아무것도 이룩할 수 없는 비극적 존재이다. 현실적 세계는 고통스러운 세계, 海로 나타난다.

여기서 피조물 세계가 겪어야 하는 고통의 근거, 고통의 원인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인간이 체험하는 고통은 인간 스스로 잘못 내린 자유결단에 의해서, 말하자면 자유의 誤用, 내지는 남용에 의해서 초래되었고, 이 과실이 누적된 것이 역사 속에서 체 험하는 고통의 원인이라고 일단 말할 수 있다. 이 입장은 성서 교부적 근거에 입각하여 대변되고 있다.6) 고통과 죽음은 인간이 범한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는 통찰이 구약 이래 성서 안에서 증언되고 있다. "죽음은 죄의 보수이다”(로마 6, 23).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 사 실은 죄의 보편성을 제시한다고 일단 말할 수 있다. 사실상 죄악과 고통 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행동하면 자기 본연의 상태로부터 멀어져서 무의미한 공허 속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때에 인간은 고통을 맛보게 된다.“7) 그리고 악과 고통 사이에 상호 인간적인 연관성이 자리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즉 한 사람 내지 집단이 겪는 고난이 다른 사람내지 집단이 범한 과실의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조물세계가 겪는 고통이 인간의 과실로 말미암은 하느님으로부터의 형벌이라는 견해는 제한된 의미에서만 정당하다. 고통에 대한 윤리적이고 법률적인 이해가 모든 고통에 대한 보편적 해답이 되기에는 부적합하게 나타난다. 이 세계 안에서 과실과 무한하게 겪어야 하는 고통들올 여러 형태로 만나기 때문이다. 홍수, 지진,화산폭발 또는 기근과 같은 천재로 말미 암은 고통들의 원인을 인간의 과실에서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악을 범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고통도 존재하지 않았으라' 라고 하는 것은 세계 안에서의 삶의 조건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 안에서 무죄한 사람들의 고난, 어린이들이며 의인들이 겪는 처절한 고난 등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 인간이 과실을 범하는 경우에도 자유의지로 범한다기보다 어쩔 수 없이 과실을 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범한 과실에 비해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의 정도가 지나친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고통이 인간의 행위에 의한 마땅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자 신의 원의와는 무관하게 던져진 채 살아야 하는 이 세계 안에서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회생물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는것이다. 극도로 빈곤한 나라에서 태어나 자의식을 느끼기도 전에 餓死하는 어린이들이나, 가혹한 독재국가에서 태어난 인간이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마저 알지 못한 채 노예처럼 살다가 삶을 마치는 사람들의 운명을 그 예로 들 수가 있겠다,

인간이 세계 안에서 겪는 고통은 그가 범할 수 있는 과실의 정도를 훨씬 능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고난 속에서, 설령 과실을 범한 사람들이 겪는 고난 속에서도 ‘無罪한 고난’의 순간들을 발견하게 된다.9) 그리고 과실을 범하면 고통을 받기 마련이라는 일반적 견해, 즉 범죄하면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의식은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고난을 감축시키거나 극복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견해는 결과적으로 세계 안에 서의 고난을 증가시키고 마땅히 개 선되어야 할 기존질서를 합리화하려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겪는 고동의 근원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 자체에 위치하고 따라서 그의 창조 자체에 위치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원의와는 전혀 관계없이 세계 안에서 現存하고, 또 불완전한 삶을 영위 하도록 규정된 것이다. 그가 아무런 결핍을 모르는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였다면 과실을 범할 이유도, 죽어야 할 근거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맨스(Clemens von Alexandria, 卞215)나 오리게네스 (Origenes, 185?254) 와 같은 교부들도 이미 고난과 죽음이 죄악으로부터 연유한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이들도 죽음이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창조와 함께 주어져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 죄의 결과도, 하느님의 형벌도 아니라고 본 것이다. 원초의 창조 役事가 애당 초부터 선과 악의 ?史에 개방되어 있었고,이러한 점에서 창조 役? 자체가 고난을 함께 자아내는 창조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하느님이 온갖 善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온갖 惡의 원천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하느님이 善과 惡의 원천 이라는 말은 올바로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이 말은 하느님이 惡올 창조하셨기 때문에가 아니라 창조하시기를 거절하셨기 때문에 존재한 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善自體로서 질서를 이북하고 혼돈을 배제함으로써, 이 혼돈이 창조로부터 배제된 함으로서 창조세계를 항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惡은 하느님이 존재치 않도록 명하시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역설적 명제가 진술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엄청난 창조의 모험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하느님은 완전히 거룩한 분으로서 악을 절대로 원하지는 않았으나 자유로운 조물을 창조하는 가운데 악이 발생할 수 있는, 그래서 고통이 초래될 수 있는 가능성도 허용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겠다. 이처럼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지극한 敬봤의 念으로 대해야 할 신비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엄청나기 그지없는 대담한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자유로운 조물을 창조하면서 악과 고통의 기능성까지 허용하는 대담한 모험을 감행한다는 데 엄숙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12)

하느님의 모험을 말하는 데서 더 나아가 ‘하느님의 비극’에 대해서 도 말할 수 있다.13)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베풀어줄 수 있는, ‘당신의 他者’인 당신의 모상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인 인간을 사랑하고,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그리워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존재의 출현은 하느님의 사랑스러운他者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그리움은 하느님이 당신 자신으로부터 나아가 당신의 '他者’인 인간에로 이르는 하느님 안에서의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인간과 세계의 고통 가득찬 ?史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그리 움의 수난 역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 역사가 지니는 비극성은 자유로운 당신의 모상을 원하고 이를 사랑으로써 창조하고 지탱하는 하느님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세계역사의 근거가 하느님의 창조役事에 있다면 ‘하느 님 안에서의 운동, 열정, 역사와 비극’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하겠다. 역사속에서 구현된 비극적 갈등이며 고난의 깊은 원천이 바로 하느님 내부에 이미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 안에서의 어두운본 성’, '하느님 안에서의 모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창조 속에서 하느님 의 모험이자 비극이요, 헤아릴 길 없는 신비에 접하게 된다. 하느님 아닌 造物世界의 창조와 함께 하느님의 S己卑虛가, 그분의 自己制約 이, 영원한 사랑의 고난이 시작된다. 우선 창조주는 造物이 자유로 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야 하고, 조물을 위해 시간을 할애 해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창조적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이 다. 한 존재자의 자유, 아니 자유로운 모든 조물의 삶은 창조적 사랑의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생성되기 때 문이다. 유한한 조물의 자유는 고난당하는 창조적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될 수 있다. 하느님은 끝을 모르는 당신의 사랑으로서 모든 생명체 안으로 진입한다. 무한한 분이 유한한 창조세계 안으로 진입 한다. 하느님이 유한한 창조세계 안으로 진입하면, 역사의 과정은 바로 하느님 자신의 과정이 된다, 여기서 ‘하느님의 존재가 ?史 속에서 생성 중이다’라는 말이 성립 된다.그리고 하느님이 이 ?史 의 과정 속에서 조물세계의 고통에 참여하고, 만물 속에서 고난을 당 하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는 하느님은 모든 조물이 겪는 고난을 아프게 느낄 것임이 틀림없다. 사랑은 본시 존재자로 하여금 자유로 생활하도록 하는 긍정적인 힘이다. 그래서 사랑한테는 오로지 '무죄한 고난’만이 존재할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고통을 당할 때에, 고통의 원인에 대해 해명하고 이를 합리화하거나 수수방관하기보다는 고통을 극복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고난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자신의 생명마저 기쁘게 회생 한다. '무죄한 고난‘은 사랑의 고난이고 사랑받는 자들의 고난이다. 그리스도의 肉化, 수난과 죽음 속 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한己卑?, 하느님의 고난은 바로 지고한 사랑의 고난인 것이다. "전능한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신 나머지 친히 사람이 되시어 인간을 대 신하여 속죄행위를 이북하기 위해 십자가에 처형된 것이다. 바로 여 기에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위대함이 다시 한번 나타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 의 전능이란 바로 스스로 고통당하는 사랑의 전능이다. 이 전능은 자발적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되었던 사랑이며, 십자가에서 죽고 세계를 구원한 사랑이다. 이것이 하느님다운 하느님의 본질이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그리스도가 세계 안에서 행한 것을 성부 하느님이 영원으로부터 행하신다.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微小하고 비천하게 모멸당할 때에 하느님이 천국에서 미소하고 비천하게 모멸당하신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의 신비’의 계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수난이 하느님의 영원한 수난을 계시한다면, 하느님의 영원한 본질이 바로 사랑 의 자기희생임이 드러난다. 하느님은 사랑이고 사랑은 고난을 당할 수 있다. 물론 하느님의 고난은 존재의 결핍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사랑이 겪는 수난이다. 이 사랑의 고난은 자기희생과 자기헌신 속에서 완성된다. 이 사랑의 자기희생이 바로 하느님의 본질 자체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기희생을 통해서 당신의 본질에 모순되는 깍을 참아견디고 극복한다. 하느님의 至福 역시 고통의 不在에 입각한 지복이 아니라,고통을 수용하고 변모시킴'으로써 복되게 되는 지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이 참고 견디는 악이 하느님의 지복의 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사랑이며 자기희생인 하느님의 완전성은 이 수난역사의 완성일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원한 존재를 획득하기 위해서 시간을 거쳐가야 한다. 그리고 이 經路에서 그분은 아픔을 변모되지 않은 아픔으로 체험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만 그분은 고통을 변모시키고 당신의 영원한 지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랑의 하느님은 歷史 안에서 어디서나 계시되 어느 곳에서도 강대한 전능자로 계시지는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을 고통당하는 분으로, 추구하는 분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분으로, 그러나 승리하는 분으로 보게 된다. 고난으로부터 세계가 구원되는 것은 세계의 모순으로부터 하느님이 救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史 속에서 겪는 인간의 고뇌 속에서 하느님이 만물올 새로 운 세계의 질서 속으로 재결합시키는 최후 미래를 향한 희망이 표출된 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최후미래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창조적인 사랑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 대한 희망이다.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께 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 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3-5). 고통의 정체와 구원에 대한 물음은 고통이 사라지는 새로운 세계의 체험을 통해서만 해답될 수 있는 물음이다. 새로운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그리움은 역사 속에서 겪는 고난에 절망하지 않고,그 고난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하느님 사랑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하느님이 소외된 세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고난당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길을 부르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하느님, "임마누엘”(마태 1,23)인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죄인들과 비천한자들을 수락하섰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분은 악순환 이 지속하는 역사 속에 새로움을 가능케 하는 문을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열어 놓았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회로 애락을 함께 하면서 구원에로 이끄시는 사랑의 하느님임이 ?史 속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게 계시된 것 이다.

바로 이 하느님을 인간과 세계 안에서, 인간과 세계를 위한 그리고 인간과 세계의 하느님다운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V. 맺는 말

하느님의 不在, 침묵 그리고 죽음이 공공연하게 거론되는 대중적 무신론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어떻게 ‘하느님다운 하느님’에 대해 책임감있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신학적 취지를 가지고, 古今의 神觀을 피상적으로나마 소묘하고자 시도하였다.

우리들 모두는 오늘날, 신의 존재가 자명하게 인정이 되었던 고대의 중세에서처럼 우주론적 思惟과정올 거쳐 推論된 절대자(우리 위에 군림 하는 하느님, Deus super nos; 세계 피안의 하느님, Deus supera mundum), 이 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학적 초월주의 자들이 말하는, 인간존재의 성취를 가능케 하는 '主體 안의 他者’ (우리 안의 하느님, Deus in nobis) 그리고 개인주의적 인격적 체험 속에서 만나는 '나의 님, 당신’(당신으로서의 하느님, Deus Dominus meus)으로서 의 하느님을, 창조 이래 온 역사의 운명을 함께 하는 ‘하느님다운 하느님’으로 고백하기가 어려운 처지 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창조 이래 역사 속에서 발생한 온갖 고난의 처절함을 의식하고 있고, 하느님을 조물과 함께 고난을 겪으면서 새로 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향하여 앞으로 이끌어가는 하느님(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Deus cum nobis ㅡ Emmanuel) 의 모습은 대략적으로 소묘하면서' 이분이 ‘하느님다운 하느님’이라고 이해한다.

물론, 이러한 하느님 이해로써 피조물이 겪는 고난의 물음이 해결 되었다고 믿지는 않는다. 우리는 보다 ‘하느님다운 하느님’을 가까이 대하고자 그분을 찾아나선 순례의 도상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해답을 찾기 어려운 갖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하느님의 존재와 관련된 물음 중에서 극히 힘든 물음 중의 하나가 하느님의 인격성(personitas)에 관한 물음인 것이다.

역사 속에는 질서와 조화뿐만이 아니라 무질서와 부조리 그리고 갖가지 재난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이고 양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세계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의미로 창조주요, 주재자며 완성자로서 인격체일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이 모순적 사건들과 존재론적으로 어떤 관련을 맺는가? 하느님은, 조물을 항시 위협하고 죽음 속에서 자신을 관철하는 無의 勢과는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하느님의 實在에 대해 사유해야 하는 모든 求道者들이 간단히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중요한 문제들이다.

계속되는 순례의 도정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보다 분명 한 해 답이 모습을 나타내기를 바라는 기도하는 자세로 이 글을 맺는다.

1) DS 125; 150; 800; 1330; 3001 참조.

2) 졸지,「그리스도와 구원:전환기의 신앙 이해」,서울(성바오로출판사) 1981, 72.

3) B.R. Brasnett, The Suffering of the impassible of God, London 1928 참조,

4)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Munchen 1972, 255?267; 같은 저자, Trinitat und Reich. Gottes. Zur Gotteslehre, Munchen 1980, 36ㅡ76;「그리스도와 구원;J, 57-73 참조,

5)「그리스도와 구원」, 69.

6) J. Moltmann, Trinitat und Reich Gottes, 63?68 참조,

7)「그리스도와 구원」, 68.

8) 같은 체,63.

9) J. Moltmann, 위의 채 66 이하 참조.

10) 같은 체, 65 이하 참조.

11) 같은 체,45?51 참조.

12)「그리스도와 구원」,71.

13) J. Moltmann, 위의 책, 57?63 참조.

14) E. Jiingel, Gottes Sein ist im Werden, Tubingen 1966.

15)「그리스도와 구원」,71. 、

16) J. Hinton, The Mystery of Pain, Edinburg 1866, 246.

17)「그리스도와 구원」, 106?10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