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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年 木? 共同體의 해 - 韓國主敎團 共同 司牧敎書
1982년 5월호 (제 81호)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는 마음과 뜻을 합하여 전국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 및 신자들에게 이 사목교서를...

주일의 말씀
1982년 5월호 (제 81호)
부활 제4주일 배척당한 자의 구원 제 1 독서 : 사도 4,8-12 제 2 독서 : 1요한 3,1-2 복 음 : ...

이레네우스 - 교부들의 사상
1982년 5월호 (제 81호)
리용의 주교인 이레네우스 (Irenaeus) 는 ‘가톨릭 교리의 수호자’라 불리울 정도로 가장 뛰어난 2세기...

신관의 어제와 오늘
1982년 5월호 (제 81호)
歷史-存在論的 神觀의 特性 여기서 뜻하는 ?史 “存/H論的 觀은 전통적 우주론적 신관이나 7세 이후의 ...

罪란 무엇인가 - 罪에 관한 神學的 考察
1982년 5월호 (제 81호)
현대에 오면서 철학이나 신학 분야에서 초월적 神개념은 단지 人間性의 內心이나 深衷에 존재하는 것으로...

유교적 인간이해와 그리스도교
1982년 5월호 (제 81호)
이 글은 1981년 10월 31일 '한국인의 심성과영성‘을 주제로 한 제8회 신앙대학 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올 ...

하느님 앞에 선 인간
1982년 5월호 (제 81호)
1. 머리말 인간은, 희랍 철학에 따르면 정신계와 물질계를 연결시키는 小宇宙(micro-cosmos)이다. 그러...

k. 라 너
1982년 5월호 (제 81호)
이 글은 ?山·敎區 공의 회 사무국이 Karl Rahner 의 Strukturwander der Kircheals Aufgabe und Change(...

200주년 記念事業을 위한 提言
1982년 5월호 (제 81호)
1.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지 2백 년이 되는 기념스러운 해가 바로 눈앞에 ...

200주년 精神運動의 方向
1982년 5월호 (제 81호)
머 리 말 솔직히 고백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저는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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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자료 1982년 5월호 (제 81호)

주일의 말씀

정 진 석 (청주교구장 주교)

부활 제4주일

배척당한 자의 구원

제 1 독서 : 사도 4,8-12 
제 2 독서 : 1요한 3,1-2
복 음 : 요한 10,11-18

요점? 오늘은 착한 목자의 주일이 고, 착한 목자의 본을 따르는 고귀한 성소를 고취하는 날이다. 그리스도는 여느 목자들과는 달리,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착한 목자이실 뿐 아니라 "그 목숨을 다시 얻으신“ 독특한 목자이시다. 예수님의 이 죽으심과 부활이 부활 시기의 핵심 수제다.

제 1독서에서 베드로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들이 죽인 예수가 바로 온 인류의 구세주이시며,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고선언한다. 오늘의 층계송(시편 117장)은 베드로가 오늘 제 1독서에서 인용한 바로 그 구약성경 대목이다,

제 2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이 현세에 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된 사람 은,아직 계시되지 않은 내세에 가서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오늘의 세 가지 성경독서는 각기 다른 내용이지만, 예수의 부활을 입증하고 있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강론? 그리스도는 착한 목자이시라 는 사상은 초대 신자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양때를 치는 목동의 생활양식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있는 대도시의 현대인들에게도 심금을 울리는 개념이다.

착한 목자라는 칭호에는 많은 내용이 내포되어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에제 34장)을 따라서 예수께서 당신이 바로 그러한 목자라고 언명하신 것은, 당신이 메시아임을 주장하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주님이 착한 목자이심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들은 그다지 흔하지는 않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환멸을 느끼고 천저하게 배척을 당해보아야 비로소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가 있碎. 사쾨에서 매장을 당하고 자기 능력으로써는 소생할 기력을 잃은 자가 "사람을 믿기보다 주님 안에 피신함이 훨씬 낫다”(층계송)는 것을 깨닫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십자가의 고난을 겪은 자만이 부활의 기쁨을 체험할 수가 있다.

베드로 사도가 신앙을 얻은 과정도 그러하였다. 처음에는 용감히 물위를 걷다가 중도에 겁이 나는 바람에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던 사람, 위험이 닥쳐왔다고 느끼자마자 칼을 빼어들었던 사람, 스승이 잡히시자 만사가 끝난 줄로 성급히 단념하고 도망쳤던 사람, 이 겁쟁이가 돌변하여,하느님을 죽인 자들 앞에 서서 당당하게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죄상을 고발하였다. 갈바리아에서 실망했던 베드로는 예수를 매장했던 빈 무덤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리하여 예수를 죽인 자의 면전에서 "사람에게 주신 이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예수라는 이 이름밖에는 없다“ 고 폭탄선언을 하였다.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있어서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자들을 "하느님의 패거리”로 여겨오고 있다. 이들은 환멸의 심연에 빠졌었던 덕분에 남달리 하느님의 사 랑에 민감하다. 이들은 ‘삯꾼’의 생리를 잘 아는 덕택으로 '목자’틀 쉽게 식별할 수가 있기에 하느님의 품에 안기기가 쉬운 것이다. 그둘은 사회제도가 마련해 준 혜택을 받고자 하였다. 그리고 지불할 능력이 있는 한도내에서의 각종 서비스를 다 받았다. 그러다가 무 일문이 되고 기력이 탈진하게 되자 '목자’를 찾아해메였으나 ‘삯꾼’만 만났을 뿐이었다.

인간적 사랑에 감싸여 아쉬움이 없이 사는 이들은 하느님께 관하여 비유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탕자의 비유 (루가 15,11-32)나 잃었던 양의 비유(루 가 15,4-7)는 사뭇 감동적이다. 그러나 비유로 알게 된 하느님의 사랑은 마리아 막달래나(마르 14,3-9; 마태 26,6-13; 요한 12,1-11)나 또는 예수와 함께 처형 당한 착한 강도(투가 23,40-43)가 체험으로 알게 된 하느님의 사랑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들은 "이리때의 습격을 받았을 때” ‘삯꾼’에게 무자비한 배신을 당한 끝에 절망 중에 유일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품안으로 달려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별로 개의치 않았다. 세상에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배척당하섰던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그리스도를 닮은 이러한 비참한 처지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는 새로운 요망사항이 별로 없었다. 이 점 때문에 우리는 그 둘의 신앙심을 석연치 않게 여기는 듯하다.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평판에 크게 신경을 쓰고 세상의 여론에 크게 좌우된다. 우리는 사회에 헌신하기보다는 겨우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의 훈계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세상 사람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우리 각자는 대개가 세상으로부터 배척 당하여 매장당하지 않으려고 세상의 비위를 맞추며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회로부터 철저 하게 배척당한 체험이 없는 까닭에,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도 철저하지 못하다. 아버지를 필요치 않게 여기는 자녀 는 결코 아버지를 진정으로 알고 사랑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참 목자를 찾기 위해 양무리를 떠나야 한다거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탕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는'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 신앙의 희망사항과 세속의 주장이 상치되는 경우 세속의 배척을 피하려고 진력하지 말고 오히려 부정한 타협을 거부함으로써 배 척을 당해야 한다. 잃었던 양이 참 목자를 발견하는 것이다.

부활 제5주일

새 이스라엘

제 1 독서 : 사도 9, 26-31 제2독서: 1요한3,18-24 복 음 : 요한 15,1-8

요점? 부활 제 5 주일과 제 6 주일에 는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서 사도·& 에게 남겨주신 말씀을 기록한 요한 복 음을 봉독한다. 오늘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관한 말씀을 봉독한다. 풍성한 결실을 맺는 인생을 살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예수님께 밀접 히 결합되어 있어야만 한다.

제 1독서는 방금 예수님께 결합된 사울이 대담하게 설교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과 여러 계충의 신자 공동체들이 주님 안에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는 역사적 가록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번째 서간에서 믿음과 형제적 사랑으로써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그의 추종자들은 그 가지 라는 사상은 그 자체 로 지극히 매력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또한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예레미아와 이사야 예언자들이 언급한 사상이다. 즉 야 체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포도나무가 계명 특히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 성실한 삶을 삶으로써 성장하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이 예언자들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도ㅡ예를 들면 마태오 복음에서 一하느님의 나라를 포도나무로 상징하셨다. 이처럼 성서 신학에 있어 서는 예수님이 새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표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그분이 건설 하러 오신 공동체이시다. 이 포도나무 에 세 가지ㅡ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긴을 택하고 선행을 하는 신자들ㅡ이 붙는 것이다.

강론? 인생사에는 과학서적이나 기술집여에 서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 직선적인 말투로는 적합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집을 건축한다든가 자동차를 운전한다든가 콤퓨터를 작동하는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직설적인 화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인간의 태도나 환동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시적 표현이 필요하다. 시적 표현은 과 학적인 정확성은 없는 반면에 그 내용 이 필씬 풍부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과 인간 에 관해서 가르치셨올 때 시적 표현을 ■?Τ 겨 사용하셨다. 주께서는 청중들이 실감있게 납득하도록 그들이 체험한 일 들을 예로 들어서 가르치셨다. 당시의 청중은 대개가 농부들이었으니만큼, 예 수께서-b 하느님의 말씀은 씨로, 세상 은 밤으로, 세 상 종말은 추수로 표현하 섰다. 이러한 표현 양식은 동양인들에 게뿐 아니라 전세계인들에게 매우 익숙 한 것이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교훈 중에 가장 아름다운 표현에 속한 다. 주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포도나무를 살 펴보면 어디까지가 나무고, 어디까지가 가지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다른 나 무들보다 포도나무는 디 그 가지와 몸 중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나무는 가 지가없더라도"다시 새 가지가 나올 것이니까…살 수 있으나, 가지는 나무 에서 떨어지면 살 수가 없다. 이러한 식물학직 사실에서 예수님은 근본적인 교훈을 가르치신다.

요한 복음은 이미 서두에서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라고 언명하였다. 주님이 오심으로써 모든 것이 변하였다. 그때 까지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인류를 인도 하는 빛이었으나, 그 빛은 깜박거리는 초롱불 빛에 불과하였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작은 빛들이 일체 필요 가 없는 완전무결한 빛을 보내주셨다. 이제부터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요, 그 길은 바로 나자렛의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시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에집트에서 가져다가 약속된 땅에 심어주신 포도나무라는 말을 늘 듣고 지내던 터였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던 포도나무였으나, 예언자들은 재삼재사 이것이 열매를 맺지 않는 포도나무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일책하고 있다. 이제 예수께서 당신이 참 포도나무라고 묘사하심으로써 일대 수술을 단행하여 구출하셨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 역사에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각 사람이 추수의 기쁨에 참여하려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할 것이 요구된다.

제 2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좋은 의의의 순환 논증이다. "열매를 맺으려면 곧 계명을 지키려면 주님이신 포도나무에 붙어 살아야 한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않으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수가 없다.“ 이제 이러한 외견상의 모순을 계속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신행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선행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은총이라 한다. 하느님은 어차피 인간을 먼서 사랑하신다. 각자의 임무는 하느님께서 각자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물 까지 보내주셨다는 것윱 알아 모시고 이에 응답하는 것이다. 각자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한,사랑을 받을 뿐 아 니라 일곱번의 일흔번씩 용서 받는다는 것을 알게되면, 신자의 본분을 다하는 삶을 살기가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생활은 하느님께로 가는 길에 가로놓여 있는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장애물 경기가 아니다. 오직 천만부당한 자를 먼저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정을 갚아드리려 노력하는 삶에 불과하다. 결점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분에 넘치는 기쁨으로써, 각자가 불가피하게 당면하고 극복해야 될 인생의 각가지 시련을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겨나갈 힘을 얻어야 한다.

부활 제 6 주일

아가페

제 1 독서 : 사도 10, 25-26. 34-35. 44-48

제 2 독서 : 1 요한 4, 7-10

복 음 : 요한 15, 9-17

요점제 1독서는 사도행전의 주요 '한 주제 중의 한 가지 곧 그리스도교의 보편성 ㅡ가톨릭 ㅡ을 요약하고 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유대인의 한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전한다. 첫째,"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도 10,35)것과 둘째,“성령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내리섰다”는(사도 10, .45) 것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의 강림”을 반영하는 내용이다. 세째,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도록 베드로가 공식으로 허락하였다(사도 10,46). 곧 이방인들은 유대교인이 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있었다. 네째, 유대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베드로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교인들과 함께 며칠을 머물러 지냈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런즉 성령께서는 어느 특정한 민족에게만 임하시는 것이 마니라 어느나라 사람에게든지 임하신 다는 것을 사도 베드로가 인정한 것임 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층계송 {시편 97장)으로 만민을 차별없이 구원하시는 주님을 찬미한다.

오늘의 제 2 독서와 복음은 둘 다 사도 요한이 쓰신 것이다. 신명기와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개념을 요한 사도가 개괄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인간 사이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을 고취하고 배양하는 것이면 무엇이른 지 모두가 선한 것이다. 사랑은 하느님 의 내적 본성에서부터 오는 것이기 때 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으로 특징짓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랑이 하느님의 행동양식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접촉했을 때마다 하느님은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게시하시지 않으셨다, 둘째, 하느님이 인간과 맺은 가장 밀접하고 심오한 접촉, 즉 천주성자 예수그리스도一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각별히 명백하게 드려나 있다. 세째, 이 사랑은 본시 쌍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인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다음에 비로소 인간은 하느님께 '사랑을 갚아드릴 수 있게 될 것 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의 근본원인이다. 네째, 각 사람은 바로 이 사랑 곧 하느님을 타인에게 전달해야 할 본분이 있다.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신다. 즉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사랑과 아울러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을 말씀하고 계신다.

강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 성당에 모여있는 우리 신자들조차 ‘하느님'이라는 단어로 연상하는 것이 각기 전혀 다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엄격한 재판관으로 연상한다. 그런 이들은 하느님이 각 사람의 인생에서 살피시는 주요 관심사는 대죄를 범했느냐의 여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무엇을 하지 말라”고 잔소리 막 하다가, 혹시라도 법규를 위반하기만 하면 가차없이 처벌하 시는 분으로 여긴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를까봐 만사를 위험시하고, 행여나 범죄할 기회가 될까봐 몸을 움츠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든다· 그리하여 언제 노여움을 발할지 모르는 신에게 전전긍긍하여, 온갖 자연 현상에 겁을 먹고, 잡다한 미신행위에 몰두하는 미개인들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또 어떤이들은 하느님을 인생의고 통으로부터의 도피처로 삼는다. 죽은 후의 내세에만 집착하여 하느님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매달려 안전하게 내세로 가는 길만을 모색하려 한다. 내세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현세는 잠시 거쳐가는 나그네 길일 뿐이라는 구실로 현세의 중요성과 현실을 모른 척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인도주의자로 여긴다. 하느님이라는 개념이라든지 종교는 이웃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격려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의 존엄성과 자유와 함께 품위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회악이 전무하고, 부귀와 권력이 공정하게 분배되며 모든 이가 정의를 누리는 이상적인 낙원이 건설되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있을 타 없다. 이것은 물론 하느님이 기대하시 는 사랑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 는 아니다. 하느님은 만선만덕을 갖추 신절대적 존재이다. 아쉬운 것이 전혀 없고 어느 것에도 종속될 수 없는 순전한 신이시다. 그러면 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하느님께 "당신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를 사랑받을 수 있는 자로 만드셨나이다“라고 찬미 하였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매력적이기에 우리를 사랑하시게 된 것이 아니다. 리옹의 주교였던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붓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했다, 신약성경은 참다운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아가페(Agape)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먼저 매력이 있기 때문에가 아니라 먼저 사랑함으로써 매력을 창조해 내서 사랑하는 사랑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독생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드러났다. 그 덕분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원하며,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즉 나는 왜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는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통찰할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명상함으로써 “사랑”을 다 잘 이해하고 터득하기 위해서이다.

예수승천 대축일

주님은 승리하셨는가

제 1 독서 : 사도 1,1-11 제 2 독서 : 에폐 1’17-23 복음··마르. 16,15-20

요점? 예수승천은 예수께서 영광의 극치에 이르시고 하늘의 옥좌에 좌정하심을 뜻한다·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임금이 되시고 우주의 지배권을 장악하시 며 성부의 오른편에 좌정하심을 의미한다. 이제 주님의 온 생애가 하느님이 부여하시는 완성에 이른 것이다. 영광 의 완성인 이 예수승천을 제대로 평가 하기 위하여. 예수 승천의 주요한 교훈을 살펴보자.

첫째, 예수의 승천은, 주께서 비천한 인간이 되시어 수난하시고 죽으시며 "지옥 흑은 임보에 내려가셨던” 창피와 수모를 극복하신 승리의 개선이다. 둘째,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윤라가시어 성부의 오른편에 좌정하심으로써 우주의 주인이 되시고 지배자가 되셨다. 만量올 다스리시는 다윗의 왕좌에 등극하신 것이다. 세째,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의 가견적인 접촉을 끝맺으시면서, 신자들의 공동체에 성령께서 작용하시도 록 하신 것이다. 네째, 신자들의 사명 은 만인에게 사도직을 확산하여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랑의 법이 만인의 가슴을 정복하게 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승천을 후사한 성경구절에 대해서 글자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그 묘사는 대개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말투이기 때문이다. 첫째,그리스도의 승천을 묘사한 단어 중에 "올라간 다”, "내려간다” "오른편에 앉는다” 등의 표현은 현대의 우주학의 용어가 아니라 옛날 시대의 표현일 뿐이다. 둘 째, 의도적으로 구약시대의 체험의 “완결”인양 묘사한 대목도 있다(하느님의 발현에 수반되는 구름, 그리고 예수님 은 영원한 왕권을 누리는 옥좌로 올라 가는 새 다윗왕으로 묘사되어 있다). 세째, "내려간다“와 "올라간다”는 단어 는 예수 부활의 주제를 의도적으로 반복한 것 같이 보인다. 네째, 예수님의 승천을 다른 이들이 목격했다는 표현은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에만 기록되어 있다(루가 복음과 사도행전은 사실상 한 권의 책이다). 그런즉 예수승천의 성경 기록은 예수님의 당신 제자들로부터의 가견적인 이별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아울러 거기에 주님의 생애와 사명의 주요한 주제들을 상징적으로 결부시키게 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예수께서 구름 속으로 승천하시는 것을 목격한 사도들의 모습을 성 루가가 감명깊게 묘사하고 있다. 주님께서 옥좌에 등극하시기에 우리는 층계송(시편 46장)으로 환호한다. "하느님이 뭇나라에 왕하시도다. 거룩하신 어좌에 앉으시도다.” 성 바울로는 이 예수승천을 장엄한 신학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현세와 내세의 모든 권력자들 위에 올려놓으섰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이 지상에서의 자지 막 말씀을 오늘 복음성경으로 봉독 한다(Α해에는 마태복음, Β해에는 마르코 복음, C해에는 누가 복음).

강론?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심으로 써 이 우주를 더욱 철저하게 다스리시는 왕좌에 좌정하셨다는 묘사는 평장한 상징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께서 인류를 위하여 사람이 되시고, 수난과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극복하시며, 또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어 그 승리를 완결짓고, 이제 제자들과 가견적으로 이별하여, 성부 오른편의 영원한 옥좌에 좌정하려 개선한다는 것을 공포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승리하셨는가? 예수께서 인간이 되시어 수난하고 죽은 다음 부활하신 것이 진실로 나의 인생에 중대한 의미가 있는가?

나날이 성장 발전하고 변하는 세계, 40억 인구를 볼 때, 그중 삼분의 일이 그리스도교인이다. 그리스도교가 최대의 세계 종교이다. 그러나 소위 자칭 그리스도교인이지만,예수 그리스도와 크리스찬의 가치를ㅡ위하여 성숙한 선택을 전혀 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이즈음의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자. 한국의 기독교는 그동안 외형적으로는 세계 제일의 양적 성장을 이룩했다. 전국 방방곡곡 어디를 가나 교회가 눈에 띄고 신자수도 인구의 사분의 일 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의 비어진 가치관을 바로잡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오염된 사회 가치관에 물들고 있다. 정의와 평화의 선포라는 기독교 신앙의 사명이 망각되고, 교회의 기업화와 팽창주의, 교역자의 이기주의와 권세 선망, 그리고 기복신앙 풍토가 심각한 정도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는 있으나 종교는 없다"는 지탄과 비판의 소리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19β2년 3월 13일 중앙일보 사 실 참조).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은 공산주의자 들이다. 이들은 주의로서는 유물론자요 무신론자들이다. 그러나 재물과 권력이 소수의 수중에 장악되는 것을 배격하고 모든 이가 공유하는 사회를 건실하기를 바라느니 만큼, ㅡ 공산주의 자들은 그들의 이론적 목표에 있어서만은 자칭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서방세제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크리스찬적이라고 할 만하다.

온 세계가 가톨릭이 된다고 해서 각 사람의 구원이 반드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께서 나에게 개별적 이며 인격적인 충격을 가하여 나를 일신시켰을 때에만, 예수께서 나에게 대 하여 승리하신 것이다. 주님의 모범이 나를 충동하고 내가 주님의 사랑을 앓아 타인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 주님은 나에게서 승리하신 것이다. 내가 비록 역경 중에 있더라도, 주님께 대한 신뢰와 희망으로써, 타인들과 사뢰와 하느님께 대한나의 인생자세를 씩씩하고 환하게 유지한다면, 그때 주님은 나에게서 승리하신 것이다. 그때야 예수 승천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성신강림 대축일

양심의 자유와 교회

 

제 1 독서 : 사도 2,1-11

제 2 독서 : 1고린 12, 3b-7.12-13

복 음 : 요한 20, 19-23

요점? 오순절은 본시 유대인의 축일이다. 처음에는 밀의 수확을 마무리 짓는 축제였다가 다음에는 첫 수확의 축제가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날이 해방절(과월절) 다음 안식일로부터 50일째에 해당되므로, 시나이산에서 계약의 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축제가 되었다(풀-에 19,16-20; 신명 5,4-5).

이와 같은 의의가 신약의 오순절(성신강림)에도 내포되어 있다. "새로운 가르침“이 공개적으로 실교되는 기회에,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세찬 바람과 요란한 소리와 불을 수반하여 내려보내시면서 당신이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시키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다. 유대인들 의 율법은 인간을 외적으로 성화하는데 비하여, 성령은 이를 초월하여 사람을 내적으로 강화하고 성화하시는 분이다. 언어의 은혜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서로 의사 소동을 하지 못하게 하였던 바빨탑의 사건의 정반대 현상으로서, 인류의 재일치를 표상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역사상 첫번째 공개적인 복음 선포다. 크리스찬회 중 즉 교회가 형성되고, 교회4) 그의 위대한 사명을 자각하게 되었다.

부활절의 7주간이 끝나 영광스러운 성령의 강림으로써 정점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이래 내 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 오늘 복음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마디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성령을 받아라”였다. 50일이 지 난 오늘, 교회는 주님의 이 줄기찬 행위를 경축한다.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 자들이 세찬 바람소리와 불혀에 놀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하느님의 영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에 우리는 축제송(시편 103장)을 합송한다. "야훼님 당신 얼을 보내시고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성 바울로는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세례로부터 비롯하여 자발적인 신앙의 행위를 동하여 각사의 재능대로 만민의 선을 위하여 행해지는 모든 그리스도교인의 활동은 한길같이 하느님의 성령에 힘입은 행업이다.

강론? 마침내 성령께서 한무리의 설교자들에게 임하셨다. 언어의 은혜로 표상된 인류의 일치의 전망이 성교회에 부여되었다. 교회의 사명은 아무도 차별없이 만인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 하는 것임이 뚜렷해졌다. 성령의 내적 충동에 따라서 신설된 교회는 만인의 마음에 사랑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사랑을 구현하도록 촉구된'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하가 시작한 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교회 는 오늘날· 처음의 그때보다 일치되어 있지 않다. 우리 교회가 창립된 성신강림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본 줄기임을 자처하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사명을 새롭게 다짐해야 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갈라진 형제" 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엄청 난 태도 변화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호 칭이다. 옛날에는 ‘반항자’라는 뜻인 ‘프로태스탄트’라는 호칭이 의미하는 그대로, 개신교 신자들은 정통 교회를 이탈한 "열교 신자들“이니만큼, 가톨릭 신자는 그들과 상종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개신교의 역사를 볼 때, 처음의 신자들은 그 자신들이 가톨릭 교회 에서 이탈한 자들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후손들의 경우는 다르다. 그래서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의 신앙을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자녀들에 대해서 가톨릭의 신학자들은 "불가항력적인 무지”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후대의 개신교 신자들은 자기 탓이 없이 가톨릭 을 알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본 줄기인 가톨릭교를 모른다고 해도 그것이 "불가 항력적”이기에 어느 정도 용납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열교 신자들은 그릇된 길을 걷고는 있으나, 사회적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묵인해 두는 편이 낫다는 소극적인 태도였다. 구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합께 살아야 하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종교적 일치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었다. 가능하다면 열교 신자를 제거하거나 개종시킬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참아준다는 태도였다.

그러다가 특히 세계 제 2차 대전 같은 긴장 시대에 구교 신자들과 신교 신자들이 불가불 함께 지내게 되자, 자연히 상호간에 한층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둘로서의 건전한 자세가 성숙됨에 따라, 각 사람의 양심의 자유를 강조하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본질적인 종교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능력은 오류를 진리로 잘못 인식할 수 도 있고 또 그러한 잘못이 선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 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혜다. 이것은 사람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설복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이 원 하시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2 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러한 견해를 인정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양심이 인간 행위의 강제력이 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원칙도 있다. 어느 누구도 양심을 거스르지 말고 자기의 확신을 따라야 한다.

신앙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이다. 사람이 자기 양심을 진정으로 따르는 한 그의 종교적 확신을 따르는 자유와 권리를 존중 해 주어야 한다.

삼위일체 대축일

공동체의 근본 원형

제 1독서 :신명 4,32-34.39-40 제 2 독서 : 로마 8,14-17 복 음 : 마태 28,16-20

요점? 삼위일체 대축일의 Λ해, Β 해, C해의 성경독서는 차례대로 성부, 성자, 성신의 각위의 역할을 돋보이게 하려는 뜻이 있다. 해인 금년에는 제1 독서와 충계송에 "하느님의 말씀“이 언급되어 있다. 신약의 계시에 의하여 우리는 이 "영원한 말?”이 천주 성자이심을 알게 되었다.

제 1 독서는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 는 하느님“을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는 한 민족을 다른 민족표을 제쳐놓고 선택하시고,그 대신에 이들에게 당신의 계명을 준수하기를 요구하셨다. 제 2독서에서 성 바올로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 은 하느님의 자녀”임을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 을 받을 자들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보다 한층 더 영광스러운 호칭이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복음 성경에는 만민이 이와 같은 "선택받은 지위”에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즉 이 복된 소식은 만인이 들을 수 있도록 전파되어야 하고,이 복음을 듣는 자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에 성자 깨서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 모든 사람 둘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성부와 성자 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도록” 분부하셨다.

〔오늘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 인용 된 세례 예식, 즉 "성부와 성자와 성신 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 예식은 사도 행전 1징- 5절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 예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태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 예식이 완벽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사용해온 예식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첫 세대의 신자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었다.

강론? 광고는 반복함으로써 효과를 낸다. 우리 교회 예식에서도 수없이 반목하는 귀절이 있다. 예를 들면 "세세에 영원히 아멘” 같은 귀절은 너무나 자주 반복하는 까닭에, 그 뜻4 아예 생각치도 않고, 건성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아멘” 하는 성호경도, 하루에도 무수하게 반복하느니만큼, 대개는 건성으로 하기가 일쑤다. 삼위일체에 관해서 잠시라도 깊이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이즈음에 우리 교회 안에서 대인기를 곱고 있는 단어는 "공동체“라는 낱말이다. 강사마다 이 단어를 들먹인다. 그러나 참다운 공동체는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는 흔하지 않다. 오늘은 온갖 공동체의 근본적인 원형인 삼위일체의 대축일이 다. 삼위일체는 세 사람이 동고동락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는 깊은 현의에서,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믿을 따름이다. 예수께서는"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그들 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분부하셨다.

누구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하라는 것은 그 이름을 부름으로써 특별한 영예를 드린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호칭된 그분의 힘을 빌어서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삼위의 힘으로써 세례를 베푼다는 뜻이다.

모세는 오늘 제 1독서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언급하면서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는 하늘에도 물어보아라. 이런 말을 들어본 일이 있었더냐?”고 묻고 있다· 성삼위, 일치, 공동체 같은 말을 자주 반복하더라도 그 신성한 내용이 상실되어서는 아니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에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다.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 17,2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기도가 성취되도록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자헌하셨다. 그리하여 사도둘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세상에 성삼위의 현존을 증거하도록, 사랑의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새롭게 일신한다는 뜻이다. 오염되고 병든 이 세상은 새롭게 쇄신될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 는 만민에게 창조주이신 성부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러 나서야 한다. 세상을 일신하기 위하여 우리는 창조력과 재간과 독창력을 발휘할 것이다. 구세주이신 성자의 이름으로도 세례를 베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듯이,우리도 세상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이 우러나서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을 바쳐야 한다. 사랑과 화해의 영이신 성 령의 이름으로도 세례를 베풀 것이다. 만일 우리 각자가 성삼위의 힘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인류의 일치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그다지도 쉽사리 낙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금 인류를 하느님의 가족으로 복귀시키는 노력을 이다지도 주저하지 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의 동기를 그다지도 의심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각 사람의 동기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성 바울로의 권고대로 "거룩한 키스”로 서로 인사할 것이다.

만인이 그리스도 안에 일치를 회복하기를 바란다면, 일치를 방해하게 될 태도나 언행을 조심할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의 결과로 이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문화와 언어가 있으나, 각 사람은 본질 적으로 하느님의 자녀요 애정어린 가족의 한식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계약의 피

제 1 독서 : 출애 4 : 3-8

제 2 독서 : 히브 9 : 11-15

복 음 : 마르 14,12-16.22-26

요점?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 축일 Β해에는 성현에 대해서 초전을 맞추고 있다. 제 1독서의 출애굽기에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맺을 때,수송아지의 피를 제단과 백성에게 뿌림으로써 계약을 체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계약을 맺음으로써 백성의 구원이 약속되었기에 우리는 감사의 충 계송(시편 115장)을 노래한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제 2 독서에서 성 바울로는,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피는 동물의 피보다 훨씬 힘있는 것이어서 우리 인간의 내직 양심을 정화하고 성화하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복음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반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새로운 계약을 맺으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성체성사는 가톨릭 신자생환의 가장 익숙한 부분이니만큼, 오늘은 본격적인 강론 대신에,성경독서를 그대로 묵상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만 신자들이 그 아름다운 성경 귀절을 좀 더 잘 이해하도록 각 독서 직전에 그 성경 귀절의 배경이 되는 몇 가지 성경 주해를 해두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강론? 믿음과 감사의 정으로 성경 봉독을 경청 하자.

제 1독서 이것은 주께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에집트의 노예 상태로부터 탈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 있었을 때,하느님께서 모세에게 계약을 맺기 위하여 시나이산에 올라오도록 부르셨다. 히브리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이 계약은 대 사건이었다. 일반사람들이 사업상 법적 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으레 공개적으로 계약이 체결되게 되어 있었다. 수송아지나 임소 같은 동물을 잡아죽여 몸을 한 가운데로 잘라 양분하여 놓은 다음, 그 계약에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 이 그 양분된 동물의 몸 사이를 지나가면서 그 계약의 내용을 준수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그 계약을 어기는 경우에 계약 위반자의 몸이 그 송아지처럼 두쪽이 날 것임을 각오한다는 뜻이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에 맺은 거룩한계약도 역시 이런 식으로 체결 되었다. 하느님께서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섰다. 내가 너희를 사랑할 것이 지만, 너희는 내가 명한 열 가지 계명을 지킴으로써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계약의 표로 희생된 동물의 피도 둘로 나누었다. 그 피의 절반은 항아리에 담아, 하느님을 상징하는 제단의 다리에 부었고, 나머지 절반은 백성들에게 뿌렸다. 이러한 예식은 한 동물의 생명의 피가 위대한 하느님과 그의 백성들을 하나로 합치시켰음을 뜻하는 것이다.

모세는 위대한 중개자 그리스도를 표상한다. 달리 말하면 동물의 피는 인간 을 하느님께 합치시키는 그리스도의 피를 예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천주성과 영혼과 그 몸과 함께 그 피를 우리는 성체성사로 흠숭한다.

제 2 독서 ㅡ 대 사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시대와 그 전의 유대인들에게 가장 신성한 장소는 예루살렘의 성전이었다. 이 성전은 크고 작은 여러 건물들의 거대한 집합체로서 그 중심부분이 지성소인데, 그곳은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조그마한 집이었다. 이 거룩한 장소의 입구 정면에 제단이 있었고, 거기서 인간의 삶과 죽음과 모든 것이 하느님께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표시로 동물들을 희생물로 대신 살해하여 번제로 불태웠다. 그리고 큰 종교 행사 때 마다 그 제단 주변에 모여서 있는 백성들에게 희생제물이 되어 살해된 염소나 송아지의 피를 뿌렸다.

제 2독서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의 종교예식 용어로 묘사되어 있다. 그분은 지성소로 향하는 성전에 나 아가는 대사제이시다. 예수께서는 승천 하시어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그분은 이제 하느님의 집에서 영광 중에 계신다. 그분은 인간이 만든 건물에 들어가 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오른편에 오르신 것이다. 그분은 이로써 새 계약을 선포하셨다. 이 새 계약은 전례법의 외적 준수 여부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 법의 준수 곧 성령의 내적 움직임에의 순종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옛 계약에서 동물의 피가 성화하는 힘이 있는 것이었을진대,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이 성덕을 함양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이것이 새로운 계약의 피다.

복음 ㅡ 해 방절

해방절 밤이 되면 유대인들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옛날에 하느님께서 에집트인들의 집 들은 모조리 치시면서도, 그들 가운데 섞여 살던 유대인들의 집들만은 무사하게 지나쳐 가셨음을 기억 한다. 그때 모세의 지시를 반은 유대인 들은 어린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대문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냥 지나쳐 가신 것이다. 주님의 최후의 만찬도 유대인인 예수께서 그의 가족이라 고할 수 있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해방절 기념행사를 한 것이었다. 다만 여느 해방절 기념행사와 다른 점은 예수께서 당신 친히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빠스카의 어린양으로 자처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극적인 장면에서 주님은 해방 절의 예절 외에 몇 마디 말씀을 첨부하셨다. 즉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바로 이 주님의 말씀에 영광을 드리는 것이 오늘의 축일이다.

예수성심 대축일

헌신적 사랑

제 1독서 :호세 11,1. 3-4.8c-9

제 2 독서 : 에폐 3, 8-12.14-19

복 음 : 요한 19, 31b-37

요점? 오늘은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예수성심 대축일이다. 우선 호세아는 하느님의 사랑은 절음마를 배우 는 아기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비슷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 어린이가 배척당할 리가 있겠는가! 오늘의 복음성경에서는 창을 든 군인이 예수의 가슴을 찔러 구원의 샘이 솟게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진정한 생명을 주는 희생을 대신하셨음을 상징한다. 새로운 빠스카의 어린양의 피요, 성령 의 샘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충계송(이 사 12,2-6)으로 하느님의 행적과 사랑을 찬송한다. 그리고 후렴으로 너희는 기꺼이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러라”고 응답한다. 성 바울로는 제2독서에서 예수님을 내세워 이부시기로 작정하신 하느님의 영원하고 찬란한 계획을 요약 하여 설명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져 각 사람이 완성된다는 뜻이다.

강론? 교황 바오로 6세는 1973년 3 월초에 체코슬로바키아출신의 스대파노

트로그타 주교를 추기경 으로 임명하였다. 트로그타 주교는 남달리 매우 험난한 생애를 살아왔기에, 그는 추기경 피명에 즈음하여 몇몇 가톨릭 신문에 화제거리 기사감이 되었었다. 그는 제2 차 세계대전 동안에 독일의 나치에 의하여 다카우 집 단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는 수용소 재감자들의 시체를 달구지에 신는 작업을 배당받았다. 그가 굶주려 기진맥진한 데다가 공포에 질려 기질하자, 작업을 감독하던 나치 장교가 권총을 꺼내 그를 쏘았다. 그가 간신히 의식을 회복하고 보니 달구지의 시체더미 꼭대기에 실려 화장터로 가는 중이었다. 그는 달구지에서 굴러 떨어져 거의 기적적으로 하수구 도랑 속에 숨었다. 거기서 한참만에 기운을 차려 응급치료를 받을 수가 있었다.

이 용감한 사제는 1940년대 후반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서 나치 시대 보다 별로 낫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그는 주교로서 활동하기를 방해당하고 1952년까지 자택에 연금당했다. 가택연금이 둘린지 1년이 못되어 또다시 신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의 정신을 부패케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25년의 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다가 1960년에 그는 노동자로서 생계를 이어 나간다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았다. 그는 자물쇠 제조공, 승강기 보수공, 목욕실 수리공 등의 직장을 얻었다. 그는 가난하여 별로 먹지도 못하고 옷도 남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1961년 어느날 성십자가 성당에 미사참례하러 갔었다. 그 성당은 바로 그가 지은 성당이었다. 그때 마침 그에게서 신품성사를 받은 사제가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주교가 조용히 영성체하려 나왔을 때, 미사를 드리던 그 사제가 주교를 알아보고 눈물을 흘렸다. 함께 미사 참례하던 신자들도 주교를 알아 보게 되었고, 그 주교가 살고 있는 집까지 따라가 음식과 옷을 주선해 드렸다.

노동자로서 밑바닥 인생을 체험한 트로그타 추기경이 농담을 했다. "나는 근로자들을 좀 더 잘 알고 그들과 굳은 우정을 맺을 기회와 함께 몇 가지 기계 수리 기술을 배웠는데, 그 때문에 주교의 품위에 손상이 되지는 않겠지요?" 헌신은 인간의 마음으로 하여금 위대한 사랑과 고난을 가능하게 한다.

트로그타 추기경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의 모습이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그 자체를 위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계시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를 능가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은한이 없고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 는다. 하느님의 사랑은 죽음까지도 무릅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표현되어 있다. 십자가라는 대가를 지불하기조차 마다하지 않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는 구원되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의 사랑이 평생토록 위협받는 상태에서 견디어냈음을 표상한다. 사랑이 우리 각자의 인생에 요구하는 것을 수락하는 방법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로써 교시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이 고통을 당하는 방법과 아울러, 사랑이 세상을 극복할 힘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 깊이와 정력을 탐복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자기의 삶과 아울러 각자의 사랑의 태도를 다시금 음미하고, 우리 각자도 또한 하느님의 마음을 반영하도록 소명된 존재들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성부께서 당신의 성자가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사시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깨달을 수가 있다.

이제 사도 바울로깨서 에패소 신자들과 함께 오늘의 우리를 위해 바치신 기도를 다시 경청하자.

"넘쳐 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 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주시기를 법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의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연중 제12주일

항구한 기도

 

제 1독서:유 38,1.8-11

제 2 독서 : 2 고린 5,14-17

복 음 : 마르 4, 35-40

요점 ? 옵서 의 제 1 독서는 폭풍과 격랑을 묘사하고 있다. 인력의 한계를 넘는 이 폭풍과 격랑을 예수께서 잔잔하게 하셨다는 것이 오늘의 마르코 복음이다. 고린토후서의 제 2독서는 새로운 창조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테면 새 아담으로서 모든 것 을 새롭게 하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폭풍과 격랑을 만나 공포에 민고 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이를 단숨에 가라앉히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기록한 복음서와 제 2독서가 잘 어울린다.

마르코 복음서는 대체로 예수님의 기적을 예수께서 이 물리적인 우주를 지배하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요, 이 우주의 임금이시며 지배자이고 또한 모범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온갖 사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비로소 의미가 있고 존재 이유와 목적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기적은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의 능력 과시가 아니다. 주님의 기적의 근본적 의도는 이를 목격하거나 전해들은 자들에게 주님께 대한 신앙을 싹트게 하고, 그로써 주님을 믿는 각 신자들이 주님의 인격에 밀접히 결합되어 주님의 뜻을 준행하는 성실한 도구가 되기 위해 행해진 것이다.

강론? 폭풍우를 만나 절박하고 다 급한 위기에 처한 제자들은 이때보다 더 진정으로 주님과 인격적인 접촉을 하려하고, 자기들의 감정을 스승에게 알리려 하며, 스승의 행동을 가청하려 한때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폭풍우가 예수의 말씀을 따라 진정되자, 다시 제자들이 주님께 매달리는 심정이 사뭇 해이해졌을 것이다.

우리 각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이와 매우 비숫하다. 우리 각자의 기도생활 역시 이와 흡사하다. 신앙에 의해서 기도를 하는 생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의 부족에 의해서 기도를 하며 사는 것이 우리 각자의 실정이다.

사람들에게 기도의 의미를 질문했을 때의 즉각적인 반응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기도는 내가 잠들기 전에, 매인 밤마다 혹은 거의 매일 밤, 혹은 가끔 하느님께 몇 말씀 드리는 것이다. 또는 기도는 하느님께 아쉬운 것을 하소연하고 청하는 것이다. 대개는 일상적인 것을 청하기도 한다. 가령 "교통사고가 안나게 해주십시요,풍년이 들게 해주십시요, 내 자식들이 늙은 나를 좀 잘 돌보게 해주십시요. 등등.“ 또 긴급한 사정을 구해달라고 청하기도 한다. 가령 "입학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십시요, 암에 걸렸는데 낫게 해주십시요, 등등”

이러한 기도는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받은 위대한 신비신학자들과 영적 저자의 사상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기도하는 사람이라야 인격자다. 하느님께 청원하는 기도를 매일 아침 저녁으로 잘 바침으로써 시간을 잘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생애에 긴급한 사정이 없는 때에도 기도로 그리스도와 긴밀히 접촉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꾸준히 탐구하는 까닭에 기도하는 사람은 훌륭한 인격자인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도하는 사람은 대체로 하느님께서 자기 대신에 행동하시는 것을 신감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 살고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마음내켰을 때 기도나 명상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외부의 현실에 대한 자연적인 반작용일 뿐이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7일 동안에 창조해 주신 세상이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체험했기 때문에,이를 감사 하고 이를 잘 사용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히 그들의 실생활에 반영되게 된 것이다. 과학에서는 우연으로 보는 사건까지도, 성경에서는 만사에 인간의 유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나 온 은혜로 여기고 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전봉에 입각 한 기도에는 청원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으나, 그러나 그것은 긴급한 사정에 하는 기도와는 전혀 다르다. 청원하는 기도라도 하느님의 뜻을 자기 멋대로 거스른다거나, 또는 억울한 재앙을 꾸미신다고 상상하는 하느 님의 마음을 바꾸시도록 원망어린 애원 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서 여러가지 은혜로써 계속 사랑하고 보살펴주시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우리 가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의 청원 기도는 하느님의 계획과 목표가 실현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자 진해서 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움직이게 해주시기틀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주님의 의향대로 나를 낫게 해주소서. 그러나 주님의 뜻이 그게 아니라면, 내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해주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런즉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담당한 일을 잘 하는 도구가 되도록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매달리고 의지하는 마음이 커져야한다. 이것을 겸손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용감한 모험심과 상극되 는 것은 아니다. 겸손할수록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더욱 순응하느니만큼,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어 기이한 일을 할 자질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평범한 일상생활에 있어서라도, 만사의 의미를 더 찾게 된다. "이 슬픔은 나의 유익을 위해 하느님이 주신 은혜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돌려볼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온 생애가 항구한 기도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이 되고, 항상 하느님을 찬미 하는 기쁨의 삶을 살게 된다.

연중 제13주일

무능무력의 은혜

제 ι 독서 :지혜 1,13-15; 2, 23-24

제 2 독서 : 2고린 8,7.9.13-15 .

복 음 : 마르 5,21-43

요점? 오늘 성경독서의 중심 사상은 죽음이다. 죽음은 어디서 오는가?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옛날 성 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인간의 행복과는 상극이 되는 중병과 임종은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도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불행이었으니만큼,질병이나 죽음을 사람이 악에 접한 표지로 간주되었었다. 인간의 죄악 때문에 이러한 불행이 세상에 초래되었는데 이러한 불행은 실로 두려운 것이었다.

지혜서의 제 1 독서 4;- 죽음이 마귀의 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의 마르코 복음은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었다가 에수님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고린토 후서의 제 2독서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고린토 신자들이 재물을 사람들에게 분배함에 있어서 너그러운 마음씨를 지녀야 될 이유를 열거하고 있다. 오늘의 제 2독서는 오늘의 제 1독서나 복음성경과는 직접적인 명백한 연관성은 없고, 다만 연중 주일에 봉독하는 서간경의 차례에 따라 선택된 구절이다.

강론? 야이로라고 하는 시나고가 회당장 중의 한 사람에게 어린 딸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애가 병이 들었으나 속수무책으로 안타까와하고 있던 참 이었을때, 예수께서 그 고장에 오셨다고 사람둘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황급히 뛰어나와서 예수께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애원했다. 그가 애원을 하고 있는 도중에 그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예수께서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 사람들이 울고 있는 그 집안으로 들어가시면서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겨우 12살밖에 되지 않은 시나고가 회당장의 어린 딸이 우리의 구원 사정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 아이의 병과 죽음,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과 그 아이의 소생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어린 소녀는 인형을 갖고 놀기도 하고 동무들과 다투고 싸우기도 했으며, 어쩌다가는 아버지한테 꾸지람도 들었겠지만 대체로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 덕분으로 주님의 사명이 드러나는 기적이 이루어 졌고, 그 애의 병에 대한 속수무책과 필요성의 미분으로 예수님의 능력이 발휘되고 은총이 이루어졌다. 이 기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 소녀의 공헌이 전혀 없지 않다. 그 애 덕분으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가 약간이나마 사람들에게 계시될 수 있었다. 고통에 신음 하는 모든 환자들처럼, 완전히 남의 손에 맡겨져 있는 모든 임종자들처럼, 이 세상에 생존했던 모든 비참하고 외롭던 불구자들처럼, 그 소녀는 이 세상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 곧 사랑을 일깨워주었다. 그리스도에게는 자기와 인간들한테서 사랑을 끌어낼 기회가 매우 아쉬웠던 참이었다. 바로 그러하던 참에 그 소녀는 그리스도께 기회를 마련했다.

의사는 환자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고 있을 때는 의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수술실에서 진땀을 흘려가면서 종양을 절제하고, 병든 세포조직을 치료할 때가 의사인 것이다. 배우는 무대 뒤의 분장실에 있을 때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사상내용과 정서감정을 관중들에게 전달하는 생명체를 창조할 때 빛이 나는 명배우인 것이다. 그리고 연인은 깊은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이 에게 이롭고 좋은 일올 행하는 봉사를 부득불 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가장 애인다운 것이다.

이 때문에 바로 무능하고 무력한 내가 이 세상에 중요하다. 야이로의 딸이나, 청년이나, 노인이나, 가난한 이나 병자나 불구자나 모두가 사랑을 쏟을 기회를 마련해 주는 존재들이다. 갓난 애기는 말도 못하고 건지도 못하고 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 인간본성의 가장 아름다운 온갖 감정이 아기를 돌보아주려고 솟구친다. 아기의 존재 덕분에 그 주변에 있는 이들, 아빠와 엄마같은 이들이 좀 더 위대해 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예수께서 성모 마리아에게 드린 최상의 효도는 갓난 아기 때와 임종때의 안타까운 무능무력이라는 순수한 선물을 드린 일이었다. 만일 이런 일들이 없었다면, 마리아의 초인적인 위대한 모성애의 대부분이 세상에 드러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죄악에 물든 이 세상의 필요성이 없었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영 모를뻔 했다. 예수께서 허리를 굽히고 한걸음씩 갈바리아 산에로 오르시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이다.

큰 강물은 그 엄청난 힘과 아름다움의 신비스러운 비밀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절벽에 이르러 폭포수가 되면 그 평장한 장관이 드러나게 된다. 누가 무한한 사랑이 있다 해도 그 사랑을 줄 대상이 없다면, 그 무한한 사랑의 능력 이 발휘될 기회가 없을 것이다· 폭포는 그 물이 떨어져 들어갈 공허를 필요로 한다. 사랑 역시 그 사랑을 쏟아 부을 필요성이 있어야 한다.

병자나 임종에 처해 있는 사람은, 자기들은 남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이제 야이로의 딸을 다시 보라. 전에는 사랑이 없었던 이 세상에 사랑을 초래한 능력이 그 소녀에게 있었음을 재음미하자. 병자와 임종자들도 이 세상에 불을 지를 수 있다. 사람들로부터 이 세싱에서 가장 아쉬워하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신 사랑을 제공하게 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까닭이다.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 사도 대축일

그리스도의 사도들

제 1 독서 : 사도 12, 1-11

제 2 독서 : 2 디 모 4,6-8.17-18

복 음:마태 16,13-19

요점 ? 오늘의 성경 독서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두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가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으로서도 승리를 거두고 있는 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는 교회의 기도와 천사의 도움에 의하여 감옥에서 탈출한다(제 1독 서). 바울로는 그의 마지막 투옥 상태 에서 하느님께서 자기를 구출하여 하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으면시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제2독서).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께 대한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과, 또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아 열쇠를 맡기실 것을 다짐하신 내용이다.

베드로와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당해야 했다. 그들은 위험한 범죄인으로 지목되어, 사도직을 수행할 수 없도록 투옥되고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 세상 의 어떠한 권력도 그들의 활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늘날에도 그 힘은 교회 안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 가장 탁월한 두분 사도를 경축하며 이분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우리에게 오늘의 사도가 되는 길을 보여 주시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오늘의 어린이들을 내일의 사도들로 키우고 격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강론? 그리스도교의 가장 주요한 세 분의 주역들, 곧 예수 그리스도와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는 모두 범죄인으로서 사형을 당해야 했던 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인들한테 정치범으로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처벌을 당하고 십자가의 사형을 당했을망정, 그것 때문에 달라진 것 별로 없다. 베드로와 바울로 역시 범죄인으로 지목되어 감옥에 수감되어 처형을 기디리고 있었다.

오늘의 제 1독서는 감옥에 감힌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구조된 내용이다. 헤로데 왕은 배드로를 잡아 감옥에 가둔 다음, 그를 공개적으로 재판하고 처형할 작정이었다· 이를 위한 만반의 준비가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감옥은 진고하고 경비병이 지키는 데다가 재판하고 처형할 시간도 임박하였다. 베드로에게는 희망이 전혀 없어 보였다. 베드로에게는 자기의 신앙과 또한 "교회가 그를 위하여 하느님께 줄곧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기대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베드로가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 있기에 그를 구출해 주셨다. 베드로는 자기가 자유의 몸이 된 것을 깨닫자, 하느님께서 자기를 헤로데의 손에서 ‘건져내셨음에 감격하여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

오늘의 제 2독서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로가 디모테오에게 써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바울로는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전도사업이 끝났음을 자각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온 세상의 모든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무모하리만큼 감행한 전도여행과 그에 수반되었던 그 숱한 온갖 간난신고가 끝날 때가 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지난 날을 회고하면서 "주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며 나에게 힘을 주셨읍니다. 그리하여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완전히 선포할 수 있었고, 그 말씀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되었읍니다”고 떳떳이 말하면서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

바울로는 사슬에 묶여 있는 몸인데도 감옥에서 구출된 베드로가 하느님을 찬미했듯이, 하느님을 찬송하였다. 그들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간에,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과 메시지는 결코 묶이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파괴될 수 없음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종사하고 있는 사도직 활동 때문에 조만간에 투옥되고 처형되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임무가 완수될 때까지는 주님께서 살려두시리라는 것을 굳게 민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끄실 것을 믿었다.

오늘 우리는 이 두분 사도의 축일을 경축하면서, 이분들이 자원으로 감행하신 엄청난 전도 행각과 그에 수반된 추위와 주림과 폭풍우와 박해와 투옥과 모욕과 죽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분들은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만 있다면, 이런 장애물쯤 극복하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이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각 사람의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 온 인류의 아버지이심을 모든 사람이 알고 믿게 되기를 바랐을 따름이다. 오늘 우리 교회는 이 사도들의 신앙이 우리 각자의 신앙을 강화해 주시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을 바라보면서 영감과 인도를 받을 수 있다. 그분들이 그 당시에 행했던 것을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 응용하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철저한 사명감과 아울러 허다한 장애물을 극복한 그들의 용기를 본받자는 것 이다. 우리는 주일 미사 때마다 베드로나 바울로나 기타 사도들의 서간경의 일부를 독서로 봉독한다. 그때 서간경 독서를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사도들이라면 오늘 어떻게 처신할까?” 사실 성직자나 수도자들뿐 아니라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사도들이다.

또한 우리는 앞날을 대비하여, 특별히 북한의 전교를 준비하여, 오늘의 어린이들을 내일의 사도들로 키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