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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動에 바탕한 連帶性
1982년 9월호 (제 83호)
모든 聖職者들에게 禁止된 몇가지 運動과 團體에 관한 宣言文   聖職者聖省   일부 主...

모든 聖職者들에게 禁止된 몇가지 운동과 단체에 관한 선언문
1982년 9월호 (제 83호)
일부 主?들이 최근 몇해 동안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두 가지 문제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

주일의 말씀
1982년 9월호 (제 83호)
듣고 응답하고 실천하라   제1독서: 이사 35, 4-7a 제2독서: 야고 2,1-5 복 음: 마르 7,...

오 리 제 네 스
1982년 9월호 (제 83호)
I. 生涯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가장 유명한 오리제네스(ㅇrigenes †254)는 동시에 초대교회...

人間의 生命에 관한 考察
1982년 9월호 (제 83호)
V. ㅅ間 靈魂의 單一性 인간 영혼의 주입 시기 (생명의 기원)문제와 관련해서,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의 ...

「ㅅ問의 救援者」에 나타난 司牧特性
1982년 9월호 (제 83호)
사목자는 사목방향이 뚜렷하여야 한다. 가톨릭 사목자는 가톨릭적 사목방향을 가져야만 가톨릭의 사목자...

敎會共同體
1982년 9월호 (제 83호)
I. 우리의 反省   우리 敎會가 가장 결핍되어있는 것이 있다면 共?體意識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韓國 平信徒의 未來像
1982년 9월호 (제 83호)
우리가 흔히 平信徒라고 번역하는 교회 용어 laikos(平民)는 laos(백성)에서 파생된 말이다. 70인역 구약...

가톨릭의 실업 윤리
1982년 9월호 (제 83호)
이 글은 1982년 6월 13일 한국 가톨릭 실업인회 담당주교인 황민성 주교님께서 가톨릭 실업인들을 대상으...

예언과 정치
1982년 9월호 (제 83호)
1. 預言者의 傳承史的 位置 이스라엘을 그 기원에서부터 고찰해 보면 이스라엘의 構成員 자체가 中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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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1982년 9월호 (제 83호)

가톨릭의 실업 윤리

黃旼性 (대전교구장, 주교)

이 글은 1982년 6월 13일 한국 가톨릭 실업인회 담당주교인 황민성 주교님께서 가톨릭 실업인들을 대상으로 행한 강연을 정리한 것임. 〔編輯者 註)

I. 敎會를 통해 내리시는 하느님의 뜻

벌써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온不況과 不景氣와 근자에 일어난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實業運營에 얼마나 고충이 크시고 얼마나 고통이 심합니까? 여러분은 국가와 민족의 경제발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온갖 역경을 헤쳐나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위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와 희망이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과 실업에 충일하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분의 도우심으로 각종 고뇌와 갈등에서 해방되어 기쁨을 간직한 가운데 실업에 종사하게 되기를 아울러 빌겠습니다.

1980년대라는 중요시기에 직면한 한국 천주교회는 새로운 각오로 부지런히 뛰어야할 여건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2년 후에 닥칠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은 물론이려니와 각종 聖域化事業, 선교 제3세기를 향한 사목적 상황 및 활동 등은 우리를 힘차게 부르고 있읍니다. 그러나 반면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정황은 그리 밝지 않을 뿐 아니라 극히 우려되고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당면하는 사회적 어두움을 신앙과 양심의 빛으로 조명시키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그리스도의 뒤를따르며 성경 말씀을 체험을 통해 묵상하고, 우리 신앙의 社會的 意義를 실천을 통해 돋보이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세적 신앙은 사회를 파고들며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회를 개조하 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여러분 가톨릭 실업인들의 사명과 책임은 실로 막중하고 귀중한 것입니다.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신앙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갖 박해와 고통과 고민을 겪고 십자가위에서 운명하시고 다시 살아났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이 부활의 신앙은 아닙니다. 우리의 全人間됨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느끼며 깨닫고 생동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신비스런 생활이며 지상에서 벌써 영원히 사는 길이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과 은총속에서 그와 함께 세상을 구원하는 생활입니다. 세상에서 부정과 부패와 암흑을 몰아내고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영생의 광명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추는 생활입니다.

200주년을 기념하는데 있어 우리 가톨릭 실업인들은 民族史와의 맥락에서 이 민족의 아픔과 아울러 희망을 함께 하며 우리의 실생활을 통해 우리 민족사를 영생을 향한 희망의 발판으로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가 가난하지만 활기를 되찾고 화목하며 보람에 차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가 그 안에 자리 하도록 만들어 희망에 찬 미래가 약속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미래는 바로 민족사의 미래요 교회의 미래인 것입니다. 미래에는 반드시 이 나라 전체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정착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평화통일도 뜻하는 것이고 따라서 평화는 이 나라의 염원인 동시에 교회의 비전이기도합니다. 이 비전이 달성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치하고 기도와 희생 을 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바짝 따라가며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을 비우고 이기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당신의 착하고 위대한 업적 때문에 동족인 바리사이들의 시기 질투와 오해를 한몸에 받으시고 억울한 누명까지를 뒤집어쓰시게 되었읍니다. 그럼에도 그들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을 철저히 사랑하시기 위해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셨지만 아무도 이를 이해하거나 옳게 보아주지 않았고 도리어 모든 이가 비뚤어진 눈을 부릅뜨고 곡해하려 했고 박해했읍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이런 억울한 입장을 보살피시기는커녕 이 배신하고 사악한 백성과 전 인류의 종이 되고 제물이 될 것을 명하셨읍니다. 아버지의 이 명령은, 예수님으로서도 받아들이시기에 고통스러웠읍니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나“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이런 고통스런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끝까지 순명하셨읍니다. 이제 나자렛 예수께는 한가닥의 아집도 이기심도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아버지의 뜻만이그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셨고 묻히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인간적으로도 하나되셨으며 그분은 평화 자체가 되시어 가시는 곳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시며 평화를 심으셨읍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결합하고 지금 교회를 통해 내게 임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면 내 주위에 평화를 심고, 내가 경영하는 실업 깊숙이 예수님을 모셔 들여 그 안에 평화와 사랑이 충만케 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병들고 험악한 이 나라 사회를 순화하고 개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 實業에 대한 敎舍의 가르침

 

實業의 目的

 

실업도 국가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해야 온당한 것이며 본디 국가사회는 爲政者와 각계각층의 國民으로 구성되고 그 각자의 노력의 총화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국민 가운데는 資本을 투입하여 생산과 판매에 종사하는 실업인들이 있게 마련이고 오늘날에는 株式을 통해 전국민이 실업에 참여한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따라서 실업은 사회를 위한 것이고 전 국민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민의 福利를 목표로 삼아야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만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실업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봉사기관입니다. 실업이 實業主를위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실업주가 실업을 위해 그리고 국민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업주는 자신의 실업체라 해서 제멋대로 운영하거나 임의로 처리해서도 안됩니다. 실업은 또 共同善이기에 공동참여의식을 길러줄 의무가 있고 실업의 모든 종사자들이 그 이득분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평등과 호애의 원칙이 준수되어야 하고 탐욕을 앞세우며,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어 끝없는 사치생활로 허세를 부리는 실업가가 생겨서도 안되겠지만 “실업은 망해도 실업주는 사는” 경우와는 정반대로 “실업주는 망해도 실업은 사는” 正義社會가 꼭 이룩되어야겠읍니다· 모든 실업인은 사회경제나 사회생활의 봉사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생산업자들이나 유통업자들, 특히 서비스업자들은 국민 개개인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봉사자들입니다. 폭리만을 목적으로 매점매석을 통해 물가를 조작하는 행동은 국민생활을 도탄에 빠뜨리며 더구나 부정식품과 의약품을 생산 판매하여 국민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는 민족반역의 重罪로서 마땅히 국가적 차원에서 규탄되어야합니다. 정당한 물품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하고 양심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봉사의 대가를 받도록 우리 가톨릭 실업인들은 특히 명심해야겠습니다.

 

實業과 勞動組合

 

실업체 안에서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사람들이 서로 사랑으로 협동하고 단합하는 것입니다. 자본주, 고용주, 지배인, 노무자는 각자의 직무에 따라, 업무상 필요한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적절하게 규정된 방법에 의해 모든 이가 실업운영에 적 극 참여하도록 촉진되어야합니다. 연이나 노동자 자신과 그 자녀들의 장래를 좌우하는 경제적내지 사회적 조건을 규정하는 일은 실업체보다는 정부가 하는 것이기에 노동자들은 대표를 내세워 이러한 규정을 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주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을 진실로 대표하여 경제생활의 올바른 질서를 수립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勞動組合’을 자유로이 조직할 권리와, 아무런 방해나 보복 없이 조합활동에 참여할 권리는 기본 인권에 속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또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인정되어야합니다. 질서 있게 실업에 참여하면서 우애를 기르고 경제적 내지 사회적 훈련을 쌓는다면 각자 자기 직책과 의무를 더욱 강하게 느낄 것이며, 각자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국가경제발전의 모든 과업과 인류 공동선 실현에 함께 이바지하는 동료의식과 긍지가 날로 강해질 것입니다. 항간에 노동조합이 ?爭과 罷業을 주도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단체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우리 실업계에 그동안 있었던 쓰라린 단면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심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경제적 내지 사 회적 분쟁이 생길 때에는 언제나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쌍방이 꾸준히 인내와 사랑을 앞세운 대화를 시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罷業은 노동자들 자신의 권익 을 수호하고 그들의 욕구를 해소시키기 위한, 물론 최후의, 필요하고 정당한수단일 수는 있읍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조속히 협상과 타협을 위한 대화의 길을 되찾아야 하겠읍니다. 더구나 오늘 같은 불경기 하에서는 파업이 쌍방간에뿐 아니라 국가경제에도 큰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사회정의, 145 참조).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회가 장엄하게 다시 주장한 것처럼 “모든 사회제도의 근원도, 주체도, 목적도 인간이며 또 인간이 아니어서도 안됩니다.” 각 인간은 자신의 勞動權을 가지고 일정한 직업을 통해 자기 능력과 인격을 발전시켜 나아가는 것이며 이에 따르는 정당한 보수를 받아야 하는 권리도 갖고 있읍니다. 정당한 보수란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종교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을 정도”라야 하고 또 누구나 질병과 노년기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제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민주주의 사회라면 의당 노동조합 구성 원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권리 행사가 언제나 허용되고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뜻의 노동조합의 구실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반대로 남용되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겠읍니다. 참된 노동조합은 각 분야의 노동자 들을 대표하고, 그 사회의 경제발전에 단체적으로 협력할 것을 보장하고 공익을 도모할 노동자들의 책임감을 북돋아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의 권익만을 내세워 투쟁 일변도로 노동조합을 이끄는 것은 교회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울 때는 고통을 분담하는 것도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며 협동정신을 기르고 실업과 사회에 공헌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노동조합 활동에는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여기저기서 힘의 지배를 시도해 보려는 유혹을 당하게 됩니다. 특히 파업 같은 방법으로 지배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파업은 권익보장의 최후방법으로 인정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방법은 경제계 전체에 너무도 무거운 짐이 되고 또는 정치질서를 평온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에 큰 지장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전체 국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공공봉사분야에 있어서는 꼭 한계를 지키도록 자중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사회정의,14 참조).

 

가톨릭實業人의 使命

 

사회는 점점 각박해지고 이기심이 극도로 발달하고 있는 차제에 우리 교회는 보다 완전한 정의와 보다 강한 책임감, 그리고 보다 희생적인 사랑에 입각한 인간관계를 시도하고 강조해야 하겠읍니다. 이러기 위해 가톨릭 실업인들이 앞장서 할일을 한다는 굳은 각오 아래 현실을 반성하고 탐구하고 실험하는데 노력하며 특히 노동자들의 정당한 소망을 너무 늦게까지 지연시키거나 소홀히 보아 넘기지 않도록 최대의 아량을 베풀어야 하겠읍니다. 노동자들의 교육과 인간 존엄성의 자각과 조직의 역량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들의 요구도 따라서 커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맹목적 이기심과 지배욕도 인간에게는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유혹입니다. 따라서不義 한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재빨리 간파할 수 있도록 상황판단에 주력하여 점진적으로 불의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야 하겠읍니다. 사람까지를 기계화하는 공업발전은 계속 급격한 적응을 요구하므로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많아지며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힘과 言權과 人權이 무력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상실했거나 적응의 능력을 잃었거나 이미 노쇠했거나 기타 여러가지 이유로 소외당하는 새로운 ‘貧民’들에게 가톨릭 실업인단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찾아다니며 도와주고 보호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는 지금 지나친 경쟁과 욕심때문에 인간성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 있읍니다. 세계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정신적 각 분야에 있어 선견지명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공동 작업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요새 수출이 안됨으로써 실업계가 극심한 불황을 쥐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실업계도 세계적인 협력 없이는 이제는 앞길이 막힐 것이며 이 점은 비단 경제계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은 개인이나 사회가 서로 돕고 교류하는 데서 그 진가가 발휘되고 진보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하느님을 숭배하고 인간끼리 교환하고 사랑하며 우주를 정복하라는(창세기 참조) 하느님의 명이기에 인간의 진리이기도한 것입니다. 사람이 이 진리를 무시한다면 사람이건 실업이건 파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進步는 거듭 말하거니와 경제적 성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보가 올바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개인 전체와 인류 전체의 발전과 향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경제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에서 분리시키거나, 어떤 진보를 그 배경인 문명에서 분리시키는 것을 찬동할 수 없읍니다. 가장 중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사람하나하나와 그 집단,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가 극히 소중한 것입니다(민족들의 발전, 14항 참조).

물건을 생산하고 교환하고 경제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간노동은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경제생활의 다른 요소들보다 훨씬 고귀한 것입니다. 이 노동은 자가 노동이든지, 고용된 노동이든지 직접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며 창세기의 말씀대로 우주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꾸리고, 형제들과 결합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며 ,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완성하기 위해 협조합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침으로써 인간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나자렛에서 손수 일하심으로써 인간노동의 품위를 드높이셨읍니 다. 여기서 우리는 충실히 노동해야 하는 의무와 노동에 대한 권리가 사람에게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는 사회대로 현 실정에 따라 국민들이 충분한 노동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안배해야하는 것입니다. 또 노동의 보수는 각자의 임무와 생산성, 실업의 상황과 공동선을 고려해서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 물질, 문화, 정신, 종교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는 수단 을 제공할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경제활동은 여러사람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어느 사람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을뿐더러, 그 누구도 소외됨이 없도록 각자의 처지와 상태를 충분히 고려해서 모든 이가 깊은 단합을 이루고 사랑하며 책임감을 갖을 수 있도록 실업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과 인격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제공되어야 하겠읍니다. 노동자가 올바른 책임감을 가지고 자기시간과 능력과 힘을 실업에 쏟아부어야 하겠지만 가정, 문화, 사회, 종교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휴식과 여가도 가질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하겠읍니다. 더 나아가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직업적 노동만을 통해서는 계발할 수 없는 기술과 능력도 달리 자유로이 연마할 수 있는 기회도 가능한 한 제공되어야 하겠읍니다(사목헌장,67항 참조).

 

Ⅲ. 맺는 말

 

끝으로 한국의 정치경제계가 쇄신되어 하느님의 뜻대로 운영되는 가운데 크게 향상되고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해 주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적어도 우리 가톨릭 실업인들이 경영하는 기업만이라도 내실을 기할 수 있고 번영과 아울러 전종업원의 일치단결이 이룩되어 교회의 가르침이 통용되는 가톨릭적 분위기가 충분히 보장되고, 특전을 입은 은총사회가 실현되도록 우리 실업인들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안에서는 누구하나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써 행복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평화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勞動司牧을 아울러 담당하는 저로서는 우리 노동자들의 지위가 향상되고 복지가 증진되며 신자로서의 책임과 봉사정신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특히 가톨릭 실업인들의 크나큰 배려있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요새 지방의 몇몇 공장에서는 우리 근로자들이 참으로 모범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가톨릭 노동청년회에 소속돼 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해고당하고 있읍니다. 참으로 통탄해 마지않습니다. 공장에 무슨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는것 같은데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은 노동청년회의 기본정신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곡해하는 것으로 이는 국가적으로 하나의 비극이 아닐 수 없읍니다. 하루 빨리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이 인간 존엄성 을 회복하고 사람답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는 소득이 보장되어야 하겠읍니다. 복지사회란 바로 이런 분들의 생활이 안정되는 사회를 뜻합니다.

가톨릭 농민회 담당주교로서도 할 말이 있읍니다. 농민회가 가난한 농민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억울함을 소리높여 외치고 때로는 정부시책을 비판한다 해서 유독 한국의 언론이 容共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어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돼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 농민회는 무신론을 주장하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말살하는 공산주의를 교회정신에 입각해서 철저히 배격하는 한편, 농민들이 감언이설의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경제가 발전하면 농민들도 그 혜택을 입으며 잘 살게 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가톨릭 실업인들의 책임이 큽니다. 언제나 가난한 노동자, 농민들을 의식하면서 교회의 사회정의의 가르침을 충분히 받아들여 실업의 원만한 성장과 발전을 꾀하여 주시기 재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