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使徒職 遂行 一 敎皇廳 平信徒使徒職 協議會 改編에 관한 자의교서 -
1978년 11월호 (제 60호)
그리스도의 神秘體인 교회를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형태의 사도직 즉 '다양한 봉사직'(1 고린 12,5...

敎父들의 思想
1978년 11월호 (제 60호)
II. 안띠오키아의 이냐시우스이냐시우스 (Ignatius Antiochiae) 는 초대교회뿐 아니라 全敎會史를 통하여 ...

韓國의 敎會一致運動
1978년 11월호 (제 60호)
- 運動展開를 위한 열두 가지 實踐事項 -교황 바오로 6세의 서명으로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가「一致運動에...

現代世界에의 새로운 奉仕
1978년 11월호 (제 60호)
IV. 긴급한 해결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奇形의 만연과 그 기형이 내포하고 있는 깊이와 복잡성, 그리고 그 ...

사회 진화론과 원시 종교론
1978년 11월호 (제 60호)
1. 3가지 基本思潮 19세기의 인류학자와 사회학자들온 대부분 進化論者들이었다. 그듬은 모 두 未開社合에 ...

시험관 아기의 윤리성 문제
1978년 11월호 (제 60호)
序 言 금년 7월 26일,영국의 브라운 부 부에게서 시험관 아기’가 탄생했다 는 뉴스는 전세계의 관심을 집...

테살로니카 前後書 槪觀
1978년 11월호 (제 60호)
(1) 테살로니카 현대 테살로니카는 그리이스 북부의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다. 이 도시 는 알렉산더 大王의 ...

영성쇄신과 교회 일치운동
1978년 11월호 (제 60호)
聖靈刷新은 敎會一致運動이라는 면에시 볼 때 특별히 내세울 만한 어떤 것이 있는가? 이에 관하여 많은 이...

얀세니즘歷史에 비추어본 聖靈運動
1978년 11월호 (제 60호)
1978년 5월 26일,광주 살레시오女高 강당에서 미국에서 온 맥나트(Mc-Natt)신부와 그의 일행, 5명의 신부...

聖靈刷新의 理解와 育成方案
1978년 11월호 (제 60호)
1. 머리말 靈性刷新 또는 聖靈 안에서의 쇄신이란 말은 성령께서 쇄신을 役事하신 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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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輯·聖靈運動 1978년 11월호 (제 60호)

영성쇄신과 교회 일치운동

玄 益 鼓 (왜관 신동본당 신부)

聖靈刷新은 敎會一致運動이라는 면에시 볼 때 특별히 내세울 만한 어떤 것이 있는가? 이에 관하여 많은 이들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성령쇄신은 敎派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認定하고 일치를 향하여 접근하는 일을 위하여 교회내의 어떤 다른 운동보다 더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런가 하면 또한 성령쇄신운동 때문에 교회내에 하나의 새로운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스런 의문을 제기하는 神學者들도 있다. 벨기 에의 브뤼셀에 있는 國際?究 公報院의 한 연구보고서 (Pro Mundi Vata)에서는‘‘아마도 몇몇(가톨릭 성령쇄신운동)외 지도자들은 전통적 五旬節?會로 改宗하거나 아니면 독자적인 宗派를 세워 소수 회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라는 假說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Die katholische Pfingstbewegung; schopferische oder spaltungstrachtige Begeisterung? Brussel 1976, Heft 60, s. 44).

I. 肯矩的인 面들

먼저 성령쇄신이 敎會ㅡ致速動에 비추어 얼마만큼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가를 설명해 보기로 하자.

1. 회 심

一致運動에 관한 교령(7항)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적 회심 없이 참된 일치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精神을 刷新하고 我執을 포기하며 활달 하게 사랑을 發露하는 데서 일치에의 所望은 자라나고 성숙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건설을 위한 카리스마를 되살리는 일이란 성령쇄신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일이기는 하나 가 장 중요한 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運動의 중심아 되는 것은 聖 靈의 힘에 의하여 그리스도人 個人과 共同體를 쇄신하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쇄신운동의 시초에는 으례 철저한 傲悔와 改心의 요구가 있게 마련이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에서는 ‘성령세미나’에서 ‘성령세례'라 는 (별로 적절하지 못한) 말로 표현되는 영적체험의 지도가 행해지고 있다. 참여자들 편에서 보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참여형식으로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올바른 회심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인용 한공의회의 말씀에 따라서 말하자면, 성령쇄신에 의하여 진정한 回心이 이루어지는 그만큼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더 가까와진다고 할 수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특별히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은 성령쇄신이란 하나의 靈的運動이며 근래에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이 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아다. 그래서 그만큼 이 운동은 교회일치라는 면에서 광범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2. 聖 靈

성령쇄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작용과 인도에 대하여 민감한 태도를 가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일치운동이란 '교회일치의 원리’(일치운동에 관한 교령,2항)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따라서 "성령 쇄신은 그 본질에 있어서 교회 일치 운동이다’,(Cardinal Suenens, Ecumenism and Charismatic Renewal, Ann Arbor 1978, ρ.22) 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이 성령이 우리들 안에 계시며 작용하신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 교회들에게 공통된 믿음이다. 따라서 성령은 이러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성령쇄신에 참여하고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누구나가 서로 결합되게 하신다. 이진리를 교회 공동체들에게 전달하여 이 진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명랑하게 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일이 성령쇄신의 課業이다. 그리고 아마도 어떤 다른 곳에서보다도 성령쇄신에서야말로 이런 진리의 생명부여 능력이 더욱 힘차게 실감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쇄신운동이 이런 노력에 있어서 보다 큰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그만큼 더 여러 교회내에서는 비록 교파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모든 信徒들이 그리스도의 神秘體인 교회의 肢體들이라는 의식이 크게 자라나게 될 것이다. 비록 교회분열로 말미암아 교회가 쪼개지고 갈라져 있기는 하지만,그러나 이 신비체의 생명의 숨이신 성령의 일치시키는 능력에 의하 여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이야말로 再一致의 희망이 더 크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3. 祈 禱

성령쇄신을 통하여 영적 도움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형적으 로 나타나는 현상은 그들이 개인적으로든 단체적으로든 기도를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쇄신운동에 있어서는 기도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와같이 기도에 대하여 새로이 기쁨을 느끼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와 하 느님 아버지께로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會ㅡ致的인 면에서 볼 때에도 큰 가치가 있다. 수에넨스 추기경은 교회일치의 쟁취란 하나의 ‘불가능한 꿈,이라고 일컬으면서, 그런데도 그 성취를 우리가 믿을 수는 있다고 말 하고 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이 일치는 우리 인간들이 이루어낼 수있 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우리 에게 허락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일치를 위한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소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 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해주 소서.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1 요한 7,21)하고 受難을 앞두고 아버지께 기도하신 예수님의 곁으로 나아 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정신으로 드리는 기도는 교파가 다른 그리스도인 들이 교회마다 제각기 다른 傅統과 規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로 인한 갈등에 빠지지 않고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이렇게 볼 때 이와같은 많은 기도회들이 교회일치적이라는 것은 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즉 이와 같은 기도회들은 가톨릭신자들과 다른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참여자들 가운데서는 사도 바울로가 "성령의 친교”(2 고린 13,13)라고 일컬은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의 일치의 紐帶가 성령이듯이 우리들로 하여금 형제 자매들이 되게 하는 생명의 유대도 성령이시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자녀로 받아들이셨다. 성령은 이러 한 우리 의 養子된 地位의 보증이시다. 즉 인 간들에 게 대한 하느님의 가장 크고 또 가장 기본이 되는 선물(루가 11,13 참조)이시다.
다만현시점에 있어서 한국에서는아직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기도회 가 이루어지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기야 가톨릭의 성 령쇄신 기도회를 찾아오는 개신교 신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이기는 하겠지만,그러나 筆者가 알고 있는 바로는 아직 한국에서는 교회일치적인 특성을 지향하기까지에 이른 기도회는 없는 것같다. 그러나 아마도 얼마 안가서 사정이 달라질 것으로 보이며, 그것도 교회일치와 성령쇄신에 관한 관심에 의해서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된다. 지 난 5월에 西江大學校에서 맥나트(Francis McNutt, O.P.) 신부에 의하여 실시된〈치유〉라는 主題에 관한 세미나는 이러한 방향에서의 중요한 進一步를 보여주고 있다. 이 세미나에는 改新敎人들도 다수 참여했고,그리하 여 개신교 형제들과의 뜻깊은 유대관계들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4. 카리스마

‘카리스마'란 성 바울로에 의하면 하느님의 당신 백성에 대한 膳物이다. 카리스마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1 고린 12, 7)하게 될 수 있게 해준다. 즉 지혜를 나누어주거나, 지식을 전해주거나, 믿음의 힘에 의하여 행동하거나, 병을 고치거나,기적윤 행하거나, 예언 을 행하거나,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거나, 이상한 언어를 말 하거나,또는 그이상한 언어를 해석하거나 하는 것 들이다(1 고린 12,8-1]). 이런 여러가지의 카리스마들은 어느 시대에나 교회내에 있어왔다. 다만 위에 지적된 것들 중에서 병을 고치거나 예언을 행하거나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과 같은 몇가지 恩賜들은 수세기에 걸쳐 교회의 일반적인 생활 에 있어서 별로 어떤 구실을 하지 못했다. 사실상 거의 잊혀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금세기 초에 성령운동이 개시되면서 달라지게 되었다. 공의회가 ‘특별한 照明力'(교회헌장, 12항)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그런 異 例的인 카리스마들도 다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카 리스마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문제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은사들을 가지고 봉사하는 데 있어서 성숙성과 경험이 부족하면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이미 고린토전서에도 매우 뚜렷이 나 타나고 있다(14,9). 그러나 혼란이 두렵다고 해서 異例的인 카리스마들을 금지한다면 잘못이라고 할 것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카리스마들이 하느님의 당신 교회에 대한 선물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1 데살 5,19)는 사도 바울로의 말은 카리스마들을 허용하지 않 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하는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카리스마 들을. 올바르게 대우한다는 것은 한 공동체의 건실과 宣?的 능력을 위 하여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공동체의 예배에 참여하는 非信者는 바울로의 말대로 "엎드려 하느님을 경배하며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여러 분과 함께 계십니다’하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1 고린 14,25).

카리스마들이 재발견되고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동체에의 봉사를 위하여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교회일치적인 현상이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이 마음을 열어놓고 있는 곳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작용이 교회 내에서 구체적으로 눈에 띄며 피부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敎派가 서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靈의 能力에 있어서도 하나가 되는 데에 대단히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또한 어려움 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믿음을 굳게 하거나 설교를 하는 등의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밖의 靈의 恩賜들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러한 은사와 봉사들도 역시 ‘카리스마적 次元'안에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이들 역시 성령의 감도와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 교회의 삶은 더욱 큰 신빙성과 진실성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교회들 상호간의 내적 접근과 외적 유대도 그만큼 더 성장하게 될 것이다.

II. 위험스런 면들

마지막으로 교회일치운동에 비추어 볼 때 성령쇄신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위험들이 또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도 말해 보기로 하자.

1. 편의위주의 교리 輕視

성령쇄신운동을 통하여 모이는 교파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자기들 사이에 서로 공통된 점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확인하고는 다행스러워하고 놀라와한다. 다같이 하늘에 계신 착하신 아버지를 믿고, 구세주요 주님이 신 그리스도를 믿으며,성령을,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살리시고 각 개인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또 다같이 신구약 성서의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성령세례'라는 영적체험을 믿으며,사랑의 계명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통의 기반은 매 우 확고하고 폭넓은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만하면 족하다고,더 이상의 일치란 필요하지 않으며 아직도 남아있는 차이점들이란 다소 사소한 것들이며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 느낌에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그대로 따르기만 한다 면 그것은 건전한 교회일치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폭넓은 공통의 기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당한 차이점들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예컨대 교도직, 사제직, 전통의 역할, 聖事 등에 있어서 그렇다. 이런 차이점에 관해서는 이들을 사소한 것으로 경시할 것이 아니라 더욱 분명히 밝혀내어 그 중요성에 따라 좀더 많은 것을 알게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피상적이 아니고 깊은곳에까지 이르는 일치는,애오라지 교리상으로나 실천상으로나 제도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차이점들을 뚜렷이 바라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解決可能性들을 추구하여 어떤 새로운 종합에 의하여 이런 차이점들을 극복함으로써만 달성되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西江大學校 세미나에서 폐회미사 때에 한 지도자가 가톨릭의 현행 규칙상으로 비가톨릭신자는 가톨릭의 예배에서 영성체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었다. 이런 규칙에 대하여 세미나에 참여한 사람들의 일부에서는 매우 실망한 기색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가톨릭신자들도 있었고 개신교신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지적된 것은 뜻있는 일이기도 했다. 일치는 아직 달성된 것이 아니라는, 또 한편 저 교회의 현실이 副應하지 않고 있는데 聖事의 次元에서 미리 일치가 선행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가혹한 현실이 이로 말미암아 똑똑히 의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信心의 我執

성령쇄신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그리스도·성령과의 새로 운 직접적인 관계를 체험하고 있다. 참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하느님은 말씀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크나큰 은총의 선물에 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러나 여기서도 우리의 寶貨는 질그릇 속에 담겨있다. 이를테면 자기 의 견해와 구체적인 결단이 교회의 직무와 대립되는 관계에 빠지게 될 때 에는 어려운 일이 생기기 쉬운 것이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신자로서 순종하려 하지 않고 자기자신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노라고 큰소리를 치게 되면, 원칙적으로 약자 편이 하나의 새로운 분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처지에 서게 된다. 이미 많은 분파를 형성한 바 있는 五旬節敎會들의 역사가 이런 사정을 경고해주는 좋은 事例이다. 이와 똑같은 일이 가톨릭교회에서 나 개신교회에서 나 되풀이되지 않게 하자면 高度의 교회 적 규율이 요구된다.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이 규율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말 한다. 교회의.공식직인 지시와 개인이 심령의 인도하심으로 느끼는 바와 의 사이에 견해차이가 있을 때에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설정된 교회의 權威에 대한 순종이 마땅한 일이다.

3. 가치판단의 혼란

카라스마들이란 일치에 공헌할 수 있는 힘찬 잠재력들이다. 그러나 가령 이들을 잘못 이해하거나 그룻되이 사용하게 되면 분열을 낳을 수도 있 다. 오순절교회의 역사상으로 볼 때 특히 이상한 언어의 카리스마에 있어 서 이런 일이 생기기 쉬웠다. 이 카리스마를 신학적으로 잘못 평가하여,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필요불가결한 표현이며 표징이라고 판단한결과,처음에는 개신교의 기존교회들 내에서 새로운 성령의 체험이 인정되지 못하고 독자적인 오순절교회가 생겨나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내에 있어서도 카리스마들(특히 이상한 언어와 예언과 치유)을 지혜롭지 못하게 사용한 나머지,마치 성령쇄신운동의 祖上인 오순절교회들 을 대하듯이 성령쇄신 자체마저 異質的인 존재로 배척당하게 하는 결과를 낳고 마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경우라면 카리스마란 일치를 위하여 도움은커녕 방해가 된다고 할 것이다.

수에낸스 추기경의「교회일치와 성령쇄신」(Ecumenism and Charismatic Renewal) 이라는 著書의 마지막(p. 107f) 에서 제시하고 있는 전망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끝맺기로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제 3千年代의 문턱에 있다. 제 1천년대는 기본적 으로,그리고 위기와 혼란에도 불구하고,분열없는 교회의 시대였고, 제 2천년대는 11세기와 16세기의 고통스런 분열에 의하여 특징지워졌으며, 제 3천년대는 지평선에 동터오는 확실한 징표들ㅡ그 중에도 특별히 희망찬 표징은 성령쇄신이다一에 의하여 可見的인 一致의 회복이 다가와 있음을 바라보고 있다.” ψ

(筆者 原名 : Rev. Bartholomeow Weroer Henneken, O.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