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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世界에의 새로운 奉仕
1978년 9월호 (제 59호)
이 글은 예수회 총장 배 드로 아루빼 신부가 1977년 11월 21일 캐나다 몬트리을에서 열린〈제3차 秒I美 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 X. 신앙의 미래 -
1978년 9월호 (제 59호)
1. 信仰의 未來一世界의 未來 의심없이 ㅅ類는 오늘날 비판적인 過渡期에 처해 있다. 깊이 파고드는 願覆...

使徒敎父 (Patres Apostolici)
1978년 9월호 (제 59호)
使徒敎父란 1?2세기 초의 그리스 도교 著者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12사 ...

사도 베드로와 주 예수 그리스도
1978년 9월호 (제 59호)
베드로는 이미 成ㅅ이 되었을.때 예 수를 만나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그 는 이미 인간성숙의 제단계를 거...

크리스찬과 世上
1978년 9월호 (제 59호)
現世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요한 15,19; 17,16 참조) 오직 하느 님과의 일치를 삶의 궁극목적...

惡의 本質과 惡의 救援
1978년 9월호 (제 59호)
- 마르틴 부버의 對話的 實存思想 - I..序 論 마르된 부버 (Martin Buber, 1878~ I965)롤 가까이 알게 된 ...

轉換期 祈禱의 定立
1978년 9월호 (제 59호)
祈禱는 인간이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여,홈승과 감사’ 속죄와 청 원을 발하는 종교 내지 신앙행위의 ...

가시와 장미
1978년 9월호 (제 59호)
"나는 나자신에게 수수께끼가되었고,그래서 나는 내 혼에게 물었다,,고, 고통과 은총을 체험한 성 아우...

고대 수도자들의 기도
1978년 9월호 (제 59호)
ι. 성 베네딕또의 意義 이 글을 쓰게 된 의도는 본래 베네딕또 聖ㅅ의 祈禱에 대하여 고찰하려 는 것이었...

전례적 기도로서의 시편
1978년 9월호 (제 59호)
I. 머리말 ㅅ類文化史에 있어서 고대로부터 宗?는 예술의 모체요 그 발상지의 역 할을 했다. 종교적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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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단 1978년 9월호 (제 59호)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 X. 신앙의 미래 -

W. 카 스 퍼

1. 信仰의 未來一世界의 未來

의심없이 ㅅ類는 오늘날 비판적인 過渡期에 처해 있다. 깊이 파고드는 願覆과 變化의 시기를 관통하면서 새 로운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정신적發 展들이 개시되고 있다. 文化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이 위기 속에서 그 리스도敎 역시 비판에 내맡겨지고 있 다· 그리스도信仰이 未來社會 속에서 未來톨 가질 것인가? ㅣ이 신앙이 미 래룔 결정적으로 함께 규정할것인가, 또는 별로 중대하지 않은 例外?存을 영위하도록 선고받게 될 것인가?

현존하는 신앙위기의 많은 형식 裏 面에는 신앙과 교회의 未來에 대한 절 멍·이 자리잡고 있다. 많은 사·탐들이 점점 더 기계화하고 세속화된 세계 속' 에서 아주 일반적으로는 종교가, 그 리고 특별하게는 그리스도敎가 아무 미래를 가질 수 없노라고 생각하고 있 다· 아직 未來를 胚胎한 교회의 機能 들이 미래에는 점점 더 남들로부터, 대개 心理療法者들(Psychotherapeuten)

과 社會敎育者들에 의하여 담당되는 것이 아닐까? 계획가능성·과 제조가 능성에 겨냥된, 원칙적으로 驚異에서 벗어난 세계에서 奇?을 위한 자리란 원칙적으로 없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고 추출해 낼 수 없는 새 로운 것의 範 I辯는 그리스도신앙에는 본질적이다. 그때문에 미래를 예측하면서 宗敎要 因을 전적으로등한시할 수있다고 믿 는 未來探究家들이 있다. 이와 병행 해서 종교는 미래의 사회에서 단지 안 으로는 단결되어 있으나 의부로든 폐 쇄된 채 사회의 변두리에서 명맥을유 지하는 일종의 宗派的ㅣ 小集團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 력하는 社會學者들 중에 벨 거 (P.L. Berger) 가 있다.⑴

리스도信仰의 未來에 대한의심 은 신앙을 가장 가혹하게 의문에 처 하는 것 중에 하나이 다. 인 간은 미 래 의 存在이다. 이것은 所與된 것을 추 월하는 그의 자유 속에 있다. 事Κ들 속에는, 즉 과거에 生成되고 지금 단 정할 수 있는 것 속에는 자유와 창의적 환상을 위한 여지라고는 없다. 거 기에는 實狀인 것에 대한 확인만이 있 을뿐이다. 오로지 미래만이 열려진 가능성의 왕국이다. 미래는 Θ由의 活 動領域이다. 때문에 미래에 대한물 음과 함께 인간 지-신의 운명이 걸려 있다. 절대적 無未來性은 죽음의 본 질이다, 그때문에 미래없는신앙이 란 죽은 것이리라. 그것은 未來를 향 하여 照準된 인간에게 성취 불가능한 것으로 실증될 것임에 틀림없다. 아 무도 미래없는 신앙에서 매력을 느낄 수 없을것이다. 이신앙읍위해서는 아무도 더 이상 참여하지 않을 것이 다. 현대의 문제성에 직면한 ?3·仰定 立은 그 때 문에 마지 막에 가서 야 비 로소 信仰의 未來次元을 제시하도록 고려되어서는 안된다.

이 課業의 중요성은우리의 최근敎 會史의 체험으로부터 쉽게 드러나게 된다. 요한 23세 치하의 교회의 짧은 躍進 동안에 확인되었던 신앙의 확신 과 신앙의 희열이 여기서야 비로소 그 근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요 한 23세는 그의 저명한 제 2차 바티 칸 공의회 개막연설에서, 우리에게는오 늘날 거의 순진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樂觀主義로써 未來에 관해 이 야 기하고 교회에 새로운 聖神降臨 (ein neus Pfingsten)을 약속하였다. 하지 만 교회 는 상대 적 으로 짧온 이 새 로 운 躍進期間 이후에 자기자신의 용기 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사람들 은 이제 자유와 미래를 의미하는 敢

行을 두려워하고, 旣存的인 것올 보 전하고 復古에 몸을 내맡겼다. ,하지 만 교회가 어제의 것에서 안정과 휴 식을 구하는 자들의 피난처가 될 때 에는,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 등을 돌 릴 때에 놀라서는 안된다. 그리고 교 회의 공포가 남겨놓은 공백을 메워 준다고 약속하는 救援이데올로기와 救 援유토피아 속에서 이들이 未來를 추 구할 때에 놀라서는 안된다.

이 狀況은 역설적이다. 미래 차원 의 발견은 성서적 종교의 업적이다. 古代世界의 다른 모든 종교들은 거룩 한 源東의 영원한 回歸만을 축하한다.: 이들은 循環의 모델에 定向되어 있다. 여기서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아 무 것도 없다, 항상 있었고 영원한 것 만이 참되다.® 성서적 사고는 이 지 옥같은 0M1 를 돌파한다. 여기에는행 위 와 사건, 미 래 를 보장하는 진정 한 새로운 始作들이 있다. 여기에서 구 원은 시 작에 놓여 있지 않고, 오히 려 ?史의 종말을 위한 약속이다. 이와 함께 성서적 사고는 동일한 것의 영 원한 회귀의 숙명론을 止揚하였다. "저 回周들은 이미 폭파되었다”(Cir-cuitus illi iam explosi sunt) SL 아우·?2· 스티 누스는 Γ神國論」(CiViiai 에 서 환호하며 기록하고·있다.(3) "事實 들은 순전히 現象들이 아니라, 행동 이요 사건이다. 부단하게 아떤 새로 운 것이 창조되고 있다.”⑷ 예수와 초 대교회에게 이 새로운 것은 직접적으 로 임박해 있다. 臨迫期待는 그들로 하여금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하 고 모든 것울 포기하게 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靈感을주고, 우리에게는도 저히 상상될 수 없는 열광주의에로고 무하였다. ‘

이것은 바울로를 宜敎的 投身으로 서, 문자 그대로 당시 알려진 전세계 를 가로질러 휘몰았다. 하지만 벌써 둘째 世代에서 종말론적 긴장의 해이 가확인케 된다·® 교회는 점점 더 종 말론적.열광주의를 광신자들에게 내맡 겨ㅣ 주었다. 이에 반해서 교회자신은 세계 안에서 정비를 하고 그뿐 아니 라 하나의 정착된 세력과 하나의 보 수적 형체가 되었다.

이처럼신학역시,終末論이 그리스 도信仰 전체의 地平을 드러내며 모든 信仰陳述들의 靈感을 주고 약동케 해 야 하는 것을 자주 망각하였을 때 놀 랄필요가 없다. 終末論(Eschatologie) 에서부터 우리 敎義學의 末尾에 올바 로보다는, 粗惡하게 간신히 명맥을이 어가는 가련하고 빈약한 '최종 事件’ (Letzte Dinge) 에 관한 論考가 되었 다.

. 공식적인 敎義學에서 점점 더 驅逐 된 종말론적 약동성은 광신적인 움직 임 .이외에는 世俗思想온로 이주하였 다. 근세의 ■未來이데올로기와 未來유 토피아는 실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새 토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의 來到에 대 한성서적 希望의 世俗化이다. 西方 的미래신앙과진보신앙이나, 모든역 사적 疏外들이 극복되어 있는 장래의 114 획在와 未來를 위한 信仰

無階級 사회에로의 질적 도약에 대한 공산주의적 希望이나 성서적 종말론 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狂亂된,그 리스도敎的 觀念들이다/ 이들의 未 來躍動性은 유대 ?ㅡ 그리스도교적 종 말론의 遺?이다.® 그때문에 수많 은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敎가 미래 의 범주로서 자기자신까지 추월하고 능가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스도교 는 이것으로써 .미래가 종래에 가서는 그리스도敎까지도 초과한다는 데 이 르지 않았는가? 그뿐만 아니라 근세 의 미래의 약동성 안에로 그리스도敎 는 오늘날 역사적으로 자신올 지양해 야 하지 않는가? 요컨대 그리스도교 希望은 오늘날 現世的이고·世界史的 으로 구현되어야.하는가? 이 물음들 에 대한 해답은 단지 단호한 否定이 있을 뿐이다. 미래의- 차원은 唯ㅡ回 的으로 소유할 수 있기 위해서 唯一 回的으로 발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 는 것보다 불행한 것은 없다. 현재 외견상 안전한 것과 과거의 외견상으 로 시험을 필한 것에 고착하려는 유 흑은 어느 때나 크다. 미래의 요청 앞에서 我執과 自己閉鎖,지금까지의 沿捧을 벗어나서 개방된 未來의 大洋 으로 나가려 모험하는 용기의 결핍온 항상 되풀이하여 있다. 이 두려움온 오늘날에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기계기,, 理性의 숙명주의에 관해 바로 말'할 수 있으 며, 확정 가능한 것만을 신뢰하려는 의식상태를 소심한 회앙과 공포, 그리고희의로표현할수있다·단지確 定可能性,製造可能性,計劃作향에만 의지되어 있는 생각은 미래의 전망을 아주 대단히 열어준다고 하더라도 외 견상으로만 미래 깨방적이다. 실제에 있어서 이 생각은 요구를 기존하는 것의 事實性에 전적으로 국한시키기 위해서 경이롭게 하고 아주 새로운 것의 素因올 차단하는 것임에 틀림없 다. .

實證主義的 機械技術學的 思考에게 미왜란 과거와 현재의 연장일 수밖에 없다. 컴퓨터화한미래란 그때문에 역사의종말일것이고지금旣存關係 들을 단지 연장하고 개선하고 고정시 키는것으로의 宣告일것이다. 인간 적 자유와 창조적 환상의 모든 m凌 가 그에게 아직 소멸되지 않은 사람 은 질겁하여 이러한 가능성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다. .

管理되고 계산되며 조작된 세계의 비전에 경악한 나머지 젊은세대의 抗 拒가 일어났다. 제 1차 세계대·전 이 후의 靑少年運動 이래 이 항거는 항 상 새로운 形式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동일한 하나에 머물렀다. 이 항거는 근세의 進步와 菜績을 참으 로 인간다운 인간존재의 退化이고, 抑匪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이 진보가 우리의 環境問題들이 명백히 보여주듯이 새로운 위협으로 변모하 고이와함께 무의미하게 될때에 현 존재의 기계기술적이고 물질적 개선 에 만족하지 않으려 한다. 생동적인

자유가 아니고 즉은 사실들이, 인간 이 아니라 機械技術的이고 경제적 事 象法則性들이 역사를 규정하는 곳에 서 미래는다만非ㅅ間的일 수밖에 없 다. 때문에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해 밑바닥까지 미치는 비판적 省察이 참 으로핀요하다.· 문제는물론정착되 어 있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기계 기술적 세력으로부터 操縱蛇 (Steuer) 들의 방향을 변경시키기에 인간적 自 由의 비판적 힘과 인간적, 환상의 창 조적 힘이 충분한가아다.

또 한편으로 하나의 폭력혁명은형 언키 어려운 혼돈과 아무도 더 이상 자유롭게 생활할 수 없는 無政府狀態 로 휘몰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면 謙念과懷疑만남는가? 여기서 그 리스도敎 복음의 現Κ性이 갑자기 아 주 새롭고 非常한 양식으로보여진다· 왜냐하면 외견상으로 아주 낡은,罪의 용서의 福昔을 가지고 그리스도敎는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고 미래에로 해방시키려는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 려고한다. 질적으로 새로운 시작의 선물로서 그리스도교는 막강한 정착 된 제도를 거스려 추출해 낼 수 없이 새로운 것에 참여하는 힘과 용기이기 도 하다. 그리스도교는 우리 노력하 는 미래의 미래이고이로써 우리.시 대의 깊온 곤경과 헤어날 수 없는 처 지에 합치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우 리가 오늘날 그 중인들인 항거운동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에 대한 회답

2. 終末論的 福音의 새 발견

-근세 시민사회의 약점과 위기가 공 공연하게 되고 새로운 혁명적 관념들 이 대두하였던 바로 그 순간에 ,성서 적 終末論 역시 새로발견되었던'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슈바이 찌 (A. Schweitzer) 와 봐이 쓰 (J. WeiB) 그리고 오버벡 (F. Overbeck)과 같은 인물들의 업적이었다. 이들은후에 바 르트(K. Barth)가 정식화하였듯이 전 적으로 그리고 남김없이 終末論이 아 닌 그리스도敎는 그리스도와 전적으 로그리고 여지없이 아무 상관이 없 음을 인식하였다

세기 전환기에 대두된 註釋學的이 고 ?史的인 洞察들이 組織神學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기까지는 물론 대단히 오랜 시간을 요하였다. 바르트와 불트만의, 그러나 역시 라 너 (K. Rahner) 와 발타사르 (Balthasar) 의 거대한 企劃들 속에서 성서적 終 末論은 실제로는 非?史的 範隨에 둘 러싸여 있다.

최근 神_學 속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그리스도信仰의 希望構造를 아주 진지 하게 취급하려 시도하고.있다.ω 이 것이 일어나는데 블로흐(E. Bloch)의 "希望의 哲學”(Phiolosophie der Hoff-mmg)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神學을 단지 小 블로흐ㅡ音樂으로 만 형용하려 한다면, 이 神學을 을바 로 평가하는 것이 아닐게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기서 ?史內的이고 歷史

末的 未來의, 그리스도교적이고 마르 크스주의적 希望의·形態의 關係規定 이 모든 점에서 아직 성공하지는 않 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未來가 그리스도信仰의 본질 차원으로 다시 발견되었고 현재와의 대화를 위해서 풍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것이 그리스도교의 미 래 비전인가? 이 물음에 思?晉이 갈 라진다. 어느 정도 도식화하면서 세 가지 모델들을 구별할 수 있는데 사 탐들은 이들의 도움으로써 종말론적 미래를규정하려고모색하고 있다.(10) 봐이쓰와 슈바이껴는 종말론적 미래 에 대해 자주默示文學的演辭體토말 하는 新約聖經의 직접적 言明울 고 수하였다. 후기 유대아의 默示文學 (Apokalyptik)은 世末的 事件을 비유 적으로 자연재앙의 형식으로 소개한 다. 빌들이 하늘로부터 떨어져서 지 구를 파멸시킨다. 세계는 거대한 화 염 속에서 소멸되고 불가사의하게 새 로운 예루살렘이 하늘에서부터 날아 내려을 것이다. 대부분의 신약성경 저 서 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이 來到를 곧 迫頭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 만 즉시 이들은 主께서 당신의 來到 를 지연시킨.다는 것을 체험해야 하였 고(마태 24, 48 참조), 호기심에 차고 조 소적인 질문들을 감수해야 하였다 (2 베드 3,4 참조). 오늘날 묵시문학의 세계는 부분적으로 잔혹한 表象과 도 저히 조화될 수 없는 比?들로써 우 리들에게는 완전히 소원하게 되어버렸다. 現世上과 來到할 세상의 이원 .론 속에서, 묵시문학의 세계는 역사 에 대해 파괴적 입장까지는 아니라해 도,부정적 입장만을 허용한다.' 때문 에 ?혁명적이고 파쇼적 운동들은 묵시 문학적 表象과 象徵들을 자주 채용하 였다. 이 惡用 속에서 묵시문학적 사 상의 어떤 위험성이 의심없이 드러나 고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묵 시문학적 모델.대신에 α的論的 모덴 (teleologisches Modell) 에 대 단히 자 주 호소한다. 사람들은 現世의 終末 을 역사의 파멸로서가 아니라, 역사 의 완성과 충만으로 표상한다· 목적 론적으로 이해된 종말론적 미래는 말 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현금 進化的 世界像에 거의 힘들이지 않고 편입될 수 있다. 이것은 현대의 進步信仰과 너무도 쉽게 화해한다. 사람돌은 이 것을 위해서 으레 떼이야르 드 샤르 댕 (Teilhard deChardin)을 근거로 이 끌어댄다. 물론 때아야르에게 특정한 묵시문학적이고 예언자적 면모가 아 주 결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 이 완전히 정당하지는 않다.(11) 이것 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惡과 부당한 고통의 現象이 조화를 이룬 이 表象에는.나타나지 않고,있다. 그리 고 역사가 순전한 上乘發展이 아니라 높은 문화의 시기 뒤에 야만행위와혼 돈에로와 추락올 알고 있다는 체험이 여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聖편 에 있어서 目的論的 思想은 낯설다.
거의 일치된 성서의 陳述에 따르면 終 末(Eschaton)은 충만일 뿐 아니라 심 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이를테면 分離의· 決斷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審判烏面이 종 말론적 商事和解를 위해서 없어지게 되면, 역사는 그의 결단의 진지함을 잃을 것이고, 종내에 가서 f 萬事가 무관하게 될 것이며 善과^의 엄격 하고 화해될 수 없는 相反性이 무녀 지 버릴 것이다. 이들은 종말에 가서 는 웅대한 調和와 和解 속으로 이끌 리게 되는 순전히 兩極的 긴장이 될 뿐이다. 그러나이것을 정의와 진리 의 완성이라고 여전히 표현할 수 있 을까? 그러면 ?事가 실제로는 어떻 든 상관없는 것으로 될 것임에 틀림 없지 않는가? 이처럼 目的論的 모델 은 默示文學的 사상의 정 당한 요소들 을 포착하고 통합하는 데 성공하지 못 하고 있다.

희랍적 형이상학과 관념론적 철학 과 더 합치하는 目的論的 모델의 극 복 뒤에 사람들은 현재에 본래의 성 서적 終末觀, 預言者的 모델을·성찰 하고 있다.애 이것은 다니엘 (Daniel) 아래 비로소 발견되는 묵시문학적 진 술들보다 오래고 근본적이다. 묵시문 학적 모델이 역사의 한 主體, 즉 하 느님만을 알고 있는 데 비해서 위대한 예언자들에 따르면 역사는 하느님의 자유와 인간자유의 共同活動·속에사 발생한다. 물론 하느님의 자유와 인 간 자유가 한 平面 위에 서지는 않는다. 이들은 종래에는 어느 양식으로 나 서로 결산될 수 없다. 하느님의 자유는 절대적으로先行하고 卓越하 여 包括的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役 事는 인간 역사의 S動(Pro-vokation) 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을 억 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한다. 아 展 望 속에서 歷史는 歷史로서 진지하게 취급된다. 역사는 전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하느님은 당신 主權의 구체적 到來를 인간의 手中에 놓는다. 信仰 과 不信仰을 둘러싼 결단 속에서 하 느님의 주권이 함께 좌우되고 있다. 하느님의 주권이 신앙 속에서 수용되 고공정되는 곳에서만그의 주권은진 실로 역사 안으로 도래하였다.

역사가 이렇게 하느님과 인간의 共 同活動으로 이해된다면, 終末의 來到 는 하느님의 영원한 決意에 따라서 진 행하는 일종의 救世史的 시간표에 따 라 거의 決定論的으로 발생할수는 없 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영원이 결정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 활 이래 시간이 영원 자체의 生成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명 은 그의 부활을 통하여 시간 속에서 영원성을 부여하였다. 때문에 永遠이 란 원초시간부터 존속하면서 現世가 끝날 때 救賊된 모든 사람들이 성대 한 行列을이루따 천사들의 호산나노 래를 들으며 입장하도록 마련된 空問 이 아니다. 영원으로의 행진은 이미 지금 시작하고 있다. 이 관점.속에서 歷史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약속하에

서 있고 그러면서도 인간의 책임에 전 적으로 위탁되어있다. 역사는 好機 이며, 은총의 시간이고 永遠을 결정 하는 심 판의 시 간이 다.

사람들이 이 예언자적 i델을 진지 하게 받아들인다면, ?史內的 종말론 과 ?史末的 종말론 사이에 많이 선 서된 相反點들이 퇴락해진다. 두가지 가 함께 필요한구별에도불구하고성 서적으로 定向된 終末論에는 함께 속 하고 있다. 독일어 단어 ‘미래'(Zu-kunft) 도 두가지 의미와 부합된다.≪3) 미 래 (Zukunft) 는 우선 'Futurum’ (미 태)를 뜻하고 있다. ‘Futurum'은 ≪나 는 있게. 될 것이다’’(fu°)에서 유래되 고,· 희 람어 동사 ‘출산한다' (째ω)와 그 명사 ‘fl然’ ((W5oy?)에 상응하고 있 다. '自.然(Physis)은 出?하는것이고, 萬物은 영원히 출산하는母胎이며, 源 初可能의 현실화로서 過程 (Pro-ZeB) 이 다. 그러나 Zukunft(미래)는 ‘待臨, (adventus) 과 ‘到來,(παροιισ/α) 도 뜻 하고 있다.

여기서 '미래,(Zukunft)는 到着과 現存이며 抽出할 수 없는 접근이며 자신을 보내는 것이다. ‘Futurum'으 로서의 미래는 외부로 다듬어져 마무 리되는데 반해서 ‘adventus’로서의 未 來는 先取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언 자적 思想의 특징온 두 형태의 미래 사이에 화핵시킬 수 없는어떤 상반 점도 발생케 하지 않는 점이다.

하느님의 未來는 인간을 당신 자신 의 미래에로 해 방시킨다. 이것은 심관속에서의 세계의 구원을의미한다. 이것은 近世의 未來이데율로기와 未 來유토피아에 대조적으로보여지게 한 다. 그리스도敎가 여기와 오늘(hier und heute) 미래를, 그리고 이로써 意義充滿을 통고하는 데 비하여, 저 들온 救援待望을 시간적으로 ?豫된 미래로 연기하고 있다. 이로써. 저들 은 극도의 現世否定的으로 증명되고 現世代들을 유토피아적 미래를 위해 서 희생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지들 은 인간들이 그 밑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疏外들을 제거하지 않고 深化한 다. 정확히 관찰하면 그리스도敎가 아 니라, 근세적 未來이데올로기들이 甘 言約束인데 최소한 모두가 혜택을 입 을 수 있는 彼岸에로의 위로가 아니 라,지금 노고하고 辛苦하는 사람들 은 아무 것도 보지도 체험하지도 못 할 미래에의 위로이다.

그리스도信仰에 의하면,?史 속에 서 시 작하는 窮極性은 결국온 다른 것 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다. 그는 희 망의 하느님으로서 (로마 15,13), 동시 에 인간과 역사의 미래이다. ■詩篇 作 家가 자신의 가장 깊고 마지막 希望 을 말하고 있는 거기에는 이것 또는 저것, 재물과 영예나 권세가 문제시 되지 않는다. 간단히 일컬어지고 있 다 ㄴ“하늘에 가도 나에게는 당신밖에 없사옵고 땅에서도 당신만 계셔주시 면 그에서 무엇을 더 바라리이까?” (시편 73,25) 여기서 종말론적 희망에 서의 우주론적인 모든 것이 Κ神話論

化되어 있고 用語의 본래 의미에서 신 학적으로 해석되·어、있다.(14) 궁극적 으로 획득된 분으로서 하느님은 天國 이요, 궁극적으로 상실된 분으로서 하 느님은 地敏이며 淨化하는 사랑의 불 로시 하느님온 우리가 ?獄이라고 부 르는 것이다. 우리가 終末을 하느님 을 통하여 定義하듯이 逆으로 종말을 통하여‘하느님도 정의된다. 종말은 인 간과 역사를 위한 어떤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어떤 것 도 의미하고 있다. 하느님은 종말에 가시 萬^가 당신께 歸還되어 있을때 에, 비로소 萬항 안에서의 萬事가 될 것이다(1 고·련 15,28 참조). 이것은 희 람의 형이상학과 하느님의 無變遷性 에 대한 이 형이상학의 개념세계 안 에 서 는 대 담한 생 각이 다. 이 생 각은 하느님의 존재가 生成중이라고 말하 고 있다(E. Jtagel). 하느님의 하느님 임은 그가 역사에 개입하되, 그 안에 서 溶解되지 않음으로써 바로 증명된 다.

그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 를 두루 통하여 비로소 자기 정신으 로 돌아오고 자기자신의 充滿을 따라 가 찾는 生成된 하느님은 아니다. 하 지만 그는 당신 자신을 선사하는 사 랑속에서 탁월하게 자유로운분이다. 그는 당신의 임을 역사 안에서 그 리고 역사를 통하여 층명한다.o≪

종말론적 展1!은 말하자면 모든 信 仰陳述들의 성질을 형성한다. 이것은 그 안에서 우리가神學과 ㅅ間學올 보아야 하는 地平이 다. 때 문에 그리 스 도?를 요약해서 絶對的 미래의 종교 라고 記述할 수 있다.(1β) 이 定義로 써 三重的인 의미가 언급되었다.

(1) 그리스도敎는미래의 종교이다. 그리 스도敎는 ?在를 영 원하고 고정 된 秩序가 아니라,보다 위대한 미래를 지향하여 정돈되어 있는·역사로 이해 한다. 그리스도敎는 所與되어있는 모 든 것으로 하며금 보다 위.대한 가능 성을 지향하여 超克하도록 가르친다. 그리스도敎는 부유하고 자기에 만족 하는 사람들의 宗敎가 아니 라, 正義 를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의 종 교이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信仰 은 조용하게 만들 뿐만 아나라,?擾 하게 도 만든다. 그것은 마비 시 키 는 아 편이 아니라 力動시키는 酵素이다.

(2) 그리스도敎는절대적 未來의 종 교이다. 그리스·£:敎는 스스로 ?史內 的인 미래기획과 미래진단을 직접적 으로 내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러 한 歷史內的 未來企劃들과 직접적으 로 경쟁하지 않고 있다. 물론 저들이 절대적으로 정착하고 그것으로써 인 간적· 자유에 대하여 全體主義的으로 될 때, 그리스도교는 저들과 死?에 빠진다. 절대적 미래의 종교로서 그리 스도敎는· 이로써 인간적인 傲慢의 危 機이다. 하지만그리스도교는보다改 善된 역사적 미래를 위해 투신하£록 격려하기도 한다. 사랑은 항상 불멸한 다는 것이 들어맞는다면(1 고린 13,8) 사랑의 行業이 항상 머물고, 사랑에

서부터 행해지는 모든 것이 영원히 實 在의 存續에 함께 설정된다는것도 들 어맞는다.

(3) 절대적 미래의 종교로서 그리 스도교 자신은 항상 未來를 소유할 것 이다. 그것은 대치될 수 없는 복음읍 대변할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 의 해 선포된 미래 속에 근거를 두고 서 있다. 그리스도事件의 종말론적 성격 속에 교회가 항상 존째하리라는 것이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敎 會의 未來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여 지게 되고, 우리가 이 미래를 구체적 으로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에 판하 여 구체적어떤 陳述들을유도하게 되 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信仰은 일 단 그리스도교적이었던 나라와 대륙 들이 항상 그렇게 머물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인류의 대부분이 그리스도 교를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내 용으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萬事 가 文字 그대로 개방되어 있다. 경솔 한 낙관주의를 취할 근거는 일이 어 떻게 돌아가는지를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게 만 있 다. 심 자가 위 에 설 립되는 希望은 스스로 십자가에 처형 된 희망일 수 있다. 이 희망은 여하 한 형태의 ?旋的인 교회 (Ecclesia triumphaus)를 배제한다. 좀더 ?困 과 迫害는 참된 그리스도敎會의 徵標 이다. 요컨대 교회의 미래는 교회가 비록 어찌할 바를 모르나 의기소침하 지 않고, 압박받으나 壓殺되지 않i 미래일 뿐이다(2 고린 4,7-9).
3. 信仰의 未來形態

終末論이 비록 預言術일 수는 없다 하여도 신앙의 구체적 역사적 미래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 는 않다.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여 信 仰의 終末論的 展望의 再發)!에서부 터 現世界狀況을 고려할 때, 信仰의 未來形態를 위하여 무엇이 결과로 나 타나는가 질문하게 된다. 이하에서 이러한 신학적 ‘未來論,(Futurologie) 의 세가지 요소들을 명시하려 시도하 겠다.

그리스도신앙의 종말론적 전망의 재 발견은 첫째로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구별”을 위한 결정적인 관점의 재발 견을 의미한다. 오버벡 (F. Overbeck) 에게 종말론적 전망의 손실이 까닭없 이 곧 그리스도界의 그리스도性의 손 실인 것이 아니었다. 전체적 손실에 관해서는 물론 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종말 론적 성격이 다시 더 분명하게 의식 되기에 이르렀으면, 이것이 보다 더 자각되고 결정적이 되며 본질적으로 되는것이 미래 신앙의 특징이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 라 앞으로는 外的要 因들이 이 점에 기여할 것이다. 신앙 은ㅣ이것을 오늘날 말할 수 있는 범 위내에서ㅡ점차적으로 일반적으로 인 정을 조금밖에 받지 못하는 形體이고 社會的 自明性일 것이다. 그러나 보 다 外的인 이 관점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성격의 보다

명확합 인식은 내부로부터 보다 意識 的인 境界를 굿도록 독촉할 것이라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唯ㅡ 回的으로 世界의 救援이 나타났다는 告?이 그리스도 신앙의 始原的 스캔 들·명 시 하고 있 다. 불쾌 감을 자아 내는 그리스도希명의 이 具體性은 여 하한 模糊性과도 모순된다. 이 구체성 이 결정적·이고, 구별되는 그리스도적 인 것의 기초가 되고 있다.

β仰의 ff踐을■위한이 ‘終末論的 가시,의 결과는 그렇게 쉽사리 과대 평가될 수 없다. 脫終末論化 (Entes-chatologisierung) 는 이미 일찌기 그리 스도교를 일종의 市民化와 世界 속에 서의 일개 組織에로 이끌었다. 콘스탄 틴 황제 이래 그리스도교는 당대의 상 태와 자주 일치시켰고, 자신을 당대 지배자들의 일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리나 거의 모든 그리스도신앙의 피 의 證據者들이 정치적 폭력을 거스리 는 저항 속에서 신앙을 증거하였음 은 특징적이디-. 그리스도교가' 자신 의 信仰證據의 ?上에 있던 곳, 어디 서나批判的으로나타났다. 오늘날위 험은ㅡ직어도 西方世界에서는ㅡ國家 權力편으로부터가 아니라,다른 사회 적 세력편으로부터 특히 與論편으로 부터 들이닥치고 있다. 神學 속에서 현재 넓혀가고 있는 모든 사회비판적 인 熱情(Pathos)온 긴급히 요청되는 교회의 세계에로의 開放이 여론의 손 아귀에 빠지는 모험을 여러번 당한다 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많은 批到者들은 비판적으로 들리는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여 말하는 대신, 보다 더 無批判的이 아니라기보다 더 비판적이어야 할 것이다. 세계에로의 개방이 무비판적‘이고 순진하게 일어 나는곳에, 모든 테두리들이 抹消된 곳에서, 이러한개방은교회에도세 계에도 아무 이로움이 되지 못한다. 福音의 推進力은 외견상 自明性의 궤 도를 돌파하여서 보다 많은 자유와보 다 많은 ㅅ間性을 위한 공간을 이특 하는 힘으로 오로지 비판적으로만 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區別化를 보 전하는 신앙은 요컨대 批判的 信仰이 어야할것이다. '批判的’이라는말 이 너무 流行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은 안심하고 ‘참회 준비가 된’ (buB-fertig)이라는말을 대신 사용할수 있 다. 이 말이 여기서 비판적인 것을정 확히 뜻하고 있다.

傲悔는가장 극단적 비판이다. 참 회는 밑바닥에까지 이르는 回改률요 청하고 있다. 이 참회는 萬事의 종말 론적 회개 속에 기초를두고있다· 이 렇게 이해된 비판은 미래에는 교회내 에서도 있을수있고 또 있어야한다. 그래서 신앙의 종말론적 성격의 강조 는 信仰의 敎含性을 이해하는 데에서 의 변천을 의미한다. 왜냐하면-교회 와 하느님의 나라,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차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면, 교회는 자기자신율 더 이상직접 적으로하느님의 代理이며, 媒長된 그

리스도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主張 을 내세움으로써 과거에 교회는 모든 비판에 대해서 자주 불가침적이었으 며 이 비판들을 非敎會性 내지 더 나 아가 不信仰의 표현으로 낙인찍었다. 하지만 교회가 幅音 속에서 자신보다 앞서고 우월한 規範을 소유하고 있다 는 것을 인정하면 신학적으로 근거톨 두고 있는 교회에 대한 비판도 역시 가능하다.

이 비 판 스스로 복음의 내 용으로부 터 ■나오고 복음의 종말론적 危機性格 을 유효하게 하기 때문에 이것은 외 부로부터의 모든 비판보다 더 극단적 이다. 이 비판은 교회 자신의 言質을 받아서 내부로부터 교회를 변혁시키 려 추구한다. 그러므로 이 비판은 상 부로부터의 優越感과 거리감율 지니 는 비판이 아니라, 열렬히 참가하는 비판이다. 이것은批判家를 함께 관련 시킨다. 이것은 열정적이며 고통스러 운비판이다. 이것의 목표는구별되고 결정적으로그리스도교적인 것을명시 하고, 이것을 교희자체 안에서의 爾 動으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종말론적 展望으로부터 다시 의식 적으로 생활하는신앙의 未來形態의 ■이차적 요소는 신앙의 普遍性(Katho-lkitat) 이다. 종말론적 약속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平和와 보편적 和解에 대한 약속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奮約은 現世上의 終末時에 만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이사 2,2-5; 60; 미케 4,1-3). 新約은 세계적 宣敎에서 이 종말론적 회 망의 始原的 구현을 보고 있다. 현재 에 宣敎는 여기서 개별적으로 詳論할 수 없는 많은 이유로 위기에 빠져 있 다. 한 인류의 비전이 오늘날 다른 樣 式으로 실현되는 듯이 보인다. 새로 운 ㅅ本主義와 결합된 과학과 기계기 술에 입각하여 점점 더 單一的 世界 文明이 형성되고 있다. .이 世俗化한 일치운동은 그리스도신앙의 상황을 밑 바닥.에서부터 변모시켰으며, 그리스 도교를 모든 백 성 들과 종교들, 그리 고 현재의 커다란 ㅅ類間題에로의 직 접적인 이웃으로 이끌어갔다.

이 상황은 世界尺度 속에서의 크리 .스찬임 (Christsein) 을 요청 하고 있 다. 이 상황은지배적인 유럽적 형태를 탈 피하고 자신의 가톨릭성, 자신의 보 편성을 새롭게 구현하는 그리스도교 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그·리스도교에게 엄청난 세계적 책임 을 지워주기도 한다. 즉 오늘날 西方 文明이 혼자만으로는 하나의 λ類를 이룩하고 인류의 ;s義充滿을 이끌어 갈수있는힘을소유하지 않고있음 이 항상 더 분명하게 되고 있다. 그 리스도교가 ?史的 宗敎로서 홀로 역 사적으로 된 세계에서 β;義와 依持롤 주고, 인류의 내적이고 외적 統合을 이를 수 있는 처지에 있을지 모른다.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상대자로서 는여기 실제로는마르크시즘의 救援 이데올로기만이 그리스도교에 對!時하 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오늘날의 그

리스도界에게 종말론적ㅣ默示的 思想 이 세차게 다가들고 '있다. 그리스도 교는 세계적 전망 속에서 ■자신의 진 실을 드러내야 하며, 그리스도신앙이 어떻게 오늘날의 ㅅ類의 문제를 참으 로 ㅅ道的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를 立 證하여 야 한다. .

보편적 ㅅ類文明의 이 新紀元 속에 서의 信仰의 基本形態는 하느님께 대 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단일 성일 것이다.이것은 예수의 종말 론적'복음 중심에 서 있고 모든 세기 를 통한 최상의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속한다. 이것은 우리들로부터 오늘날 형제적이고 ㅅ問의 곤경과 連帶的인 신앙을 요청하고 있다. 信仰과 사랑 의 이 단일성 속에서 存在理解의 결 정적인 새 성격형성이 그리스도교를 통하여 표현 된 다. 자체 로 존재 하는 實 體 (Subsistenz) 가 아니라, 사랑의 爲他 存在 (Fdr-die-andern-Sein) 가 至高한 것이다. 이것은 장차 聖性과 靈性의 새로운형태를 결과로가질 것임에 틀 림없다· 이 새로운 형태는 최대로 가 능한 開放性을 최대로 가능한 信仰의 決斷性과 연결시켜야 한다. 現敎會의 본연의 빈곤은 이 恩賜.(Charisma)가, 이 窓者의 모습이 4직 교회에 선사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교회는자체 안에 實體없이 일 반직인 ㅅ本主義 속에서 용해하여 없 어지는 開放性과 오늘날의 ㅅ類의 ■問 題와 나란히 通交없이 살면서 교회를 최종적인 歸結에서 小宗派性의 危險으로ㅣ몰고가는 자체로 硬直된 決斷性 사이에서 찢기고· 있다.

미래 신앙의 세째 요소를' 이하 진 술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신앙 은보다더 단순하여질것이다. 그리 스도계는 미래에는 거의 확실히 지난 세기둘의 사회적이고 문화적 영광을 더 많이 상실할 것아다. 좋아하는 많 은 表象들과 信心形態와 修道共同體 들로부터 작별을하여야 할것이다. 外的으로는 이전보다 더 빈약하게 서 있고 수자적으로 전체 세계 인구내에 서 小數集團임을 드러낼 것이다. 증 가하는 單純性의 法則은 신앙 자체에 게도 통용된다. 물론 교회가 미래에-는 자신의 ?義들을 부분적으로나 또 는 아주 일반적으로 廢棄할지도 모른 다고 생각하는 것온 순진할 것이다. 그러나 敎義들은 더 이상 직접적으로 우리;1"의 질문이·아닌 물음들에 대한 해 답이 다. 이 들은 직 접 적 으로는 점 점 더 단지 ?史家들에게만 여전히 가까 이하고 있고, 역사.적 의식은 周知하 는 바와 같이 점점 더 감퇴하고 있다. 그리스도신앙이 이 점에 관해 더 이 상 空虛하고 實體없이되지 않아야 하 고, 그때그때 크게 流行하는 것에 간 단히 적응하지 않으려면, 넓이 대신· 깊이면에서 성장하고 좀더 의식적으 로 만사를 포괄하는 자신의 중심으로 부터 생활함으로써만 이것이 일어날 수있다. 이러한뜻에서도그리스도 신앙은 미래에는 보다 단순하게 될 것 이다.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이 中心 은어면다른것이 아니다.지금까지 언급한모든것, 裏面에서 基本理想으 로서 서 있었고, 이제 終決的이고 요 약적으로 한번 더 지침되어야 하는 것, 인간의 인간됨을 가능케 하는 것 으로서 하느님의 하느님됨에 대한 복 음이다. 이 중심은 역사의 고결한 撞 慢이요, 예수의 하느님 나라의 福昔 의 중심이며, 교회의 救援委託의 眞 髓이다. 예수그리스도는그의 인격 속에서 두가지룔 일치시켰다. 바로 그 의- 완전히 인간적인 순명 속에서 그 는진실한 인간이며 진정한 天主이다. 그때문에 그는 ㅅ格속에서의 하느 님의 主權이다. 그와 함께 하느님의 주권이 궁극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 였다. 그로·말미암아 우리에게 궁극 적으로 希望이 가능케 되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교적이고 교회적 行爲 의불변하는척도이다. 때문에 말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 리와 모든 인간들에게 希望이 열렸다 고 믿고, 구체적인 投身으로서 자기로 하여금 남을위한希望의 모습으로만 들기 위해서 이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 람은 그리스도신자이다. 그는 교회 가 꺼의 이천년의 흐름속에서 이 福 音에서 이끌어낸 모든 결론들을 자 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을 때라도 기 초적으로 全信仰을 믿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主權에 대한 福音 을 신학의 중심으로 만들면,특히 啓 蒙期의 많은 神學者들한테서,. 그리고 본질적으로 더 깊게 19세기의 가톨릭 튜빙겐 학파의 많은 대표자들한테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基tt으로 다시 되돌아간다.(18) 스콜라神學은 이 기 점들을 따르지 않았다. 스콜라신학은 熱狂主義的 운동들이 이 기점을 가지 고 행한 惡用으로 t미암아 망연자실 하였었다. 이 스콜라신학은 물론 이 로써 열광주의와 함께 하느님 나라 복음의 普遍的 展望도 광범하게 상실 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小性으

로부터 다시 자유롭게 될 필요가 있 다. 우리가 信仰의 온갖 明瞭性에도 불구하고 그 보편성을 다시 회복하고 보편성 속에서 명료성을 보전할 때에 만 그리스도신앙은 촛대 위의 빛이 띠, 歷史의 새로운 획기적 시기에 구 체적으로 미래를 소유할 수 있을 것 이다. ?

(IS文 : Walter Kasper, Einfiihrung in den Glauben, 1972, Grunewald Mainz. 沈相泰 神父 譯)
(1) P.L. Berger, Zur Soziologie kognitiver Minderheitent in: Int. Dialogzeit-schrift 2 (1969) 127?132. 이하 W。-D Marsch, Zukunft, Stuttgart-Berlin 1969 참조.

(2) Μ. Eliade, Kosmos und Geschichte. Der Mythos der ewigen Wiederkehr^ Hamburg 1966 참조.

(3) Augustinus, De Civitate Dei, 1≫ 12, c. 20’ n. 3: PL 41, 371.

(4) H. De Lubac, Katholizismus als Gemeinschaftt Einsiedeln-Koln 1943, 125.

(5) 脫終末論化의 문제는 J. Weifi와 A. Schweitzer의 極端的一終末論的 見解의 결과로 제기되었다. 이에 관한 G. Kummel, Das Neue Testament. Geschichte der Erf or schung seiner Probleme (Orbis-Band. IIIS 3), Freiburg-Munchen 1958s 286-309; 상동, Heilsgeschehen und Geschichte. Gesammelte Aufsatze, Marburg 1965. 體 系的인 面에서 이 문제는 F. Buri 이의에 記念碑的이나獨β的인 작품 M. Werner, Die Entstehung des christlichen Dogmas, Bern-Tiibingen 1955 (제 2판) 이 중요하다. 神學史的이고 敎齊史的 局面에 대하여 B. Kotting, Von der Naherwartung der fru~ hen Kirche zur christlichen Hoffnung auf die Endzeit, in: Erwartung-Verhei-Bung-Erfullung, hg. v. W. Heinen und J? Schreiner, Wurzburg 1969, 184-205 ; P. Miiller-Gold-Kuhle,Die nachbihlischen Akzentverschiebungett im historischen Entwicklungsgang des eschatologischen Denkens, in: Concilium 5 (1969) 10-17 참조.

(6) Κ. Lowith, Welt geschichte und Heilsgeschehen. Die theologischen Vorausset· zungen der Geschtchtsphilosophiey Stuttgart 1961 (제.4판).

(7) Κ. Barth, Der Rdmerhrief, Munchen 1922 C再印刷 Ziirich 1940), 298.

(8) 終末論에 관한 現討論의 槪要항 H.U.v. Balthasar 이. 제공한다. Eschatologie, in: Fragen der Theologie hetUe, hg. v. J, Feiner, J. Trutsch, F. Bokle, Einsiedeln-Koln 1957, 403-421; W. Kreck, Die Zukunft des Gekommenen. Grundprobleme der Eschatologiey Munchen 1961; J. Ratzinger, Heilsgeschichte und Eschatolo-gie, in: Theologie im Wandel^ Miinchen-Freiburg 1967, 68-89 ; G. Greshake≫ Auferstehung der Toten. Ein Beitrag zur gegenwartigen theologischen Disku. ssion iiber die Zukunft der Geschichtey Essen 1969.
(9) J. Moltmann, Theologie der Hoffnung. Untersuchungen zur Begrundung und zu den Konsequenzen einer christlichen Eschatologie, Miinchen 1964; 상동 Perspektiven der Theologie. Gesammelte Auf$dtze% Mtinchen-Mainz 1968; 상동, Umkehr zur Zukunft, Miinchen?Hamburg 1970; G. Sauter, Zukunft und Ver-k6t£ung. Das Problem der Zukunft in der gegenwartigen theologischen und philosophise hen Diskussion’ Zurich?Stuttgart 1965; J.B. Metz, Zur Theologie der Welt, Mainz-Miinchen 1968,75-91; 상동, Gott vor uns. Statt eines theologischen Argumentes, in: E. Block zu ehrent hg. v. S. Unseld, Frankfurt a.M. 1965; F. Kerstiens, Die Hoffnugsstruktur des Glaubens, Mainz 1969 ; Diskussion ilber die “Theologie der Hoffnung^ hg. v. W. -D. Marsch, Munchen 1967. 이 未來의 神學이 終末論의 始原論과의 관련성율 거의 보지 않고, 그 때문에 이따금 제한없는 혁명 적인 未來躍動性에로급격히 바뀔 위험에 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언급되어야할것이다.

(10) 이에 대하여 H. Cox, Fortschritt der Evolution und christliche Verhet£ungt in: Concilium 3 (196?) 446-452 참조.

(11) S. Daecke, Teilhard de Chardtn und die evangelische Theologie, Die Wel-tlickkeit Gottes und die Weltlichkeit der Welt, Gsttingen 1967 참조.

(12) 이어? 대하여 G. Greshake, Auferstekung der Toten. 참조·

(13) J. Moltmann, Antwort auf die Krttik der Theologie der Hoffnung, in: Diskussion uher die ^Theologie der Hoffnung^ 2lof.

(14) 終末論的 陳述의 解釋學에 관해 H.U.v. Balthasar, Eschatologie; Κ. Rahner, The이ogische Prinzipien der Hermeneutik eschatologischer Aussagent in. Schriften zur Theologie IV, Einsiedeln-Κ??π 1960, 401-428; E. Schillebeeckx, Einige hermeneutische Oberlegungen zur Eschatologie,in; Concilium 5 (1969) 18-25 참조·

(15) Ε. J angel, Gottes Sein tst im Werdent Tablngen 1965; Vom Tod des lehen-digen Gottes, in: ZThK 65 (1968) 93-116; W. Pannenberg, Die Aufnahme des phtlosophischen Gottesbegriffs als dogmatisches Problem der friihchristlichen Theologie, in: Grundfragen systematiseksr Theologie, Gsttingen 1967, 296™346; H. Kung, Menschwerdung Gottes. Eine Einfiihrung in Hegels theologisches Denken als Prolegomena zu einer kiinftigen ChrUtologie% Freiburg-Basel-Wien 1970, 611-670. 희랍哲學과는 대조적인 神觀의 이 기초적인 새 성격 형성 속에 信仰의 脫 헬레니즘化에 대한요청의 경당성이 있다· L. Dewart, Die Zukunft des Glauhens, Einsiedeln-K6ln 1968 참조.

(16) 이에 대하여 Κ. Rahner, Marxistische Utopie und christliche Zukunft des Menschen, in: Schriften zur Theologie VI, Einsiedeln-Kfiln 1965,77-88 참조.

(17) Κ. Rahner, Ober die Einheit von Nachsten-und Gottesliebe, in: a.a.O. 277·,298 참조.

(18) W. Nigg, Das ewige Reich. Geschichte einer Sehnsucht und einer Enttdu-schungy Erlenbach-Ziirich 1944; K. Lawith, Welt geschichte und Heilsgeschehen; E. Staehlin, Die Verkundigung des Retches Gottes in der Kirche Jesu Christi, Zeugnisse aus alien Jahrhunderten und alien Konfessionen zusammengestelltt 6 Bde.’ Basel 1951-63; J. Moltmann, Art. Reich Gottes III und IV, in: EKL III (1959) 559-566; K. Thime / H. Fries, Art. Reich Gottes III-V, in: LThK VIII (1963) 1110-1120; J.R. Geiselmann, Die Katholische Tubinger Schule. Ihre theologische Eigenart, Freiburg-Basel-Wien 1964, 191-279; J. Rief, Reich Gottes und Gesellschaft nach Johann Sebastian Drey und Johann Baptist Hirscher, Paderborn 1965; A. Hertz / E. Iseloh / G. Klein / J.B. Metz / W. Pannenberg, Gottesreich und Menschenreich. Ihr Spannungsverhaltnis in Geschichte und Gegen wart, Regensburg 197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