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하느님 백성에게 보내는 메시지 - 제4차 주교 시노드
1978년 7월호 (제 58호)
서 론 1. 교황 바오로 6세의 부름으로 로마에 모여「현대의 敎理敎授 특히 아동과 청소년 교리교수」를 토...

W. 카스퍼 저, 박상래 역 예수 그리스도
1978년 7월호 (제 58호)
그리스도信仰의 死活과 存廢가 달려있는 에수 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한 물음 이 오늘날 새로운 절박성을 띠...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 IX. 신앙의 역사성 -
1978년 7월호 (제 58호)
1. 歷史·“"우리의 가장 큰 問題 ■금세기 초에 프로테스탄트 神^者 이며 宗敎歷史家인 트된취 (E. Tro·...

아시아의 貧困과 共産主義의 誘惑
1978년 7월호 (제 58호)
一아시아修女聯合會 第4次 總會에서 1977년 11월 20일부터 3()일까지 10 일간 인도의 항구도시 봄베이에서 ...

社會的恩寵ㅡ새로운 司牧戰略을 위해
1978년 7월호 (제 58호)
ㅅ問의 言語는ㅡ우리가 말하는 것, 말하지 못하는 것,말하지 않는 것을 다 포함하여 ㅡ어떻게 보면 인간 ...

1966년까지 가톨릭 사회사상의 역사적 개관
1978년 7월호 (제 58호)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많은 사 란은, 1891년에야 비로소 가톨릭교회 가 체계화된 사회적 가르침을 제시...

現代世界의 敎會와 ?少年 敎理敎育
1978년 7월호 (제 58호)
ㅡ 主敎 시노드 제4차총회 의제를 중심으로 지난해 S월 30일부터 10월 28일까 지 로마에서 열렸던 主敎시노...

敎父들의 思想
1978년 7월호 (제 58호)
I. 序 論 "敎父들의 말씀은 믿고 기도하는교 회의 실생활가운데 풍부히흐르고있 는이 聖傳의 생생한現存을 ...

主日聖化를 위한 司牧的 配慮
1978년 7월호 (제 58호)
I. 머리말 어디로저렇게 열심히들가는것일까? 서울거리의저 인파와차량듭, 고속버스정류장의 저 장사진! ...

罷工法의 社會學的 考察
1978년 7월호 (제 58호)
I. 서 론 가톨릭敎會에는 主日을.거룩하게 지내라는 法이 있다. 그 방법으로 미 사參禮의 의무가 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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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단 1978년 7월호 (제 58호)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 IX. 신앙의 역사성 -

W. 카 스 퍼

1. 歷史·“"우리의 가장 큰 問題

■금세기 초에 프로테스탄트 神^者 이며 宗敎歷史家인 트된취 (E. Tro· eltsch)는 신학과 역사의 逝遇가 그 당 .시 정신들을 일차적으로 흥분시켰던 신학과 자연과학의 해후보다 더 큰 문 제 들을 미 래 에 는 제 기 할 것 이 라는 기 대를 표명하였다,⑴ 트될취의 예고는 그동안에 완전히 채워졌디、 역사는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는 현재 모든 ?在領城의 급진직 인 歷史化를 체험하고 있다. 만사가 激動과 變遷 속에서 파악되고 있디-, 어떤 고정적이고 영속직인 것이라고 는 거의 없다. 이 역사적 격변은 교 회와 교회의 β仰觀도 사로잡았다.

교회와 敎導權 그리고 敎義들온 지 금까지 는 수다한 사람들에 게 시 대 의 激流 속에서의 확고한 尖裕이며 역사 의· 激浪 속에서의 不動의 盤石으로 보였다.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은 시 간의 浮沈과 역사적 세계관과 이데읍 로기들의 短命性 가운데에서 마지막 堡활를 소유하고 있다고 민었었다,

많은 진지한 그리스도신자들이 이제 교회에도 만사가 토론에 빠져버렸다 고 우리하면서 단정하고 있다, 그리. 고 교회가 어제는 所과 立場들을 위해서 싸우도록 그들을 격려하였고, 이함은 교회에 .향한 충성심 때문에 공격을 받았었다· 이제 이들은 이 소 견과 입장들이 바로 교회에 의하여 推定的이거나 실제로· 포기된다고 격 정스레 단정하고 있다. 교회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듄과 신앙의 옹호자들 이 바로 그 때 문에 敎導權의 대 표자 들보부터 버린반았다고 생각하고 있 다. 트될취는 지당하다: 만사가 요동 하고 있다. 교회의 空間과 신앙의 領 城에서 이 일반적 의식의 격변은 특 히 예리하고,많은 사람들에게 충격 적 이 다, 교회 와 교회 의 기 본적 信仰 fti'l들은 古代世界 속에서 형성되었 디、고대의 思考는 영원한 본질범칙 성유 지닌 宇≪I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여기서도 당연히 운동과 변화가 있었 디그러나 이들은 말하자면 영원한 本 ?? 基盤의 표면현상으로서,불멸하 는 실체의 偶fl的 ■변화로 파악되었 다. 역사와 역사적 변친의 현상은 결
코 명시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었 다. 역사는 포괄적인 질서의 범위 속 에서의 한가지 현상이었다. 近世思想 에서는 이와 반대로 역사는 포괄적인 질서내의 한 素因(契機: Moment) 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질서가 그것을 즉시 다시 상대화하는 ?史內에서의 한 素因이다. 여기서는 Μ在가 하나 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고, 실재는 아주 깊이 역사이다.

歷史的 思考에로의 번혁은 ㅅ本主 義이태 준비되어 19세기에로의 전환 기에 성취되었다.(3) 思想과藝術의 방 면에서 이 혁명은浪漫主義와독일 觀 念識을통하여 일어났다. 헤겔 (Hegel) 에게서. 참된 것은 전체적인 것이다. “그러나 全體는 자신의. 발전을 통하 여 자신을 성취하는 본질이다.” "참 된 것은 거기서 어떤 肢體도 취하지 않은 것이 없는 만취상태이다.”≪ 觀 念主義思想에서 ?對精神에 대해서 언 급되던 것이 實存主義的 사상에서는 인간에 대해 거론된다. 인간은 그에 게 어떻게 하거나 .외적으로 머무는 역사 안에서만 생활하지 않는다. 역 사는 오히려 인간의 內的次元이며 態 勢性 (Verfa&heit) 이다. 인간은 存在 와 生成,과거와 미래 사이의 途上에 있는 存在(Wesen)이다. 인간은 자신 의 삶의 결정적 상황 속에서 몇번이 고 반복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그는 아주 깊이 역사적이다. 오늘날 사람 들은 실존주의적 특수용어 歷史 性에 대해 벌써 다시 지쳐 있다. 사람들은

그대신, 다시· 실제의 역사를 더 강조 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여러모로 마르크스와 新마르크스주의 와 관계 를 .맺고, 인간은 세계를 그가 생활하고 양육할 수 있는 보다 인간적인 세계 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勞動과 機 械技術 그리고 문명을 통하여 역사적 으로 변화시키도록 의존되고 있다고· 말한다. 세계는 이를테면 旣成的이 아니다. 인간과 세계는 相互變化시키 고 相互規定하는 지속적인 과정 속에 서 파악되고 있다. 세계는 영원한 白 然秩序가 아니 라 ?史世界이 다.

近世의 흐름 속에서의 역사의 자각 은 기이하게도 그때까지의 역사와의 斷絶을 前提로 한다. 역사는 역사적 傳承이 더 이상 自明하게 생활되는 Κ在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超克하려 한 克服된 과거로 느껴질 때에 비로 소역사로체험될수있다. 이점에 있어서 역사적 意識의 대두는·主體에 의 近世的.전환을 전제하고 있다. 이 것은그때까지의 權威論證의 싱때화 를 의미하고 불가침적인 原典의 절대 적 타당성을 근본적으로 의문에 처하 였다. 이러한 양식으로 역사적 의식 은 역사에의 아주 새로운 관계와 傳承 과 비판적이고 간격올 지니는 논쟁올 가능케 하고 그 근거를 세워 놓았다.

이 意識후命化의 실천적 歸結들은 도저히 과대평가하게 되지 않는다. ㅅ 本主義者 판라 (Laurentius Valla) 에 의 한「콘스탄틴의 贈呈」(Konstantinische &henkUng) 의 條造性 實證은 그때 까지 있어보지.않았던 교황직의 권위와 권세의 동요를 의미하였다· 그리스도 의 부활에 異識를 제기하는 레생 (E. Lessing) 에 의한「밸 fㅣ 뷰델 無名人의 斷章」(Fragmente des Wolffenbuttel-schen Ungenannten)의 출판음 그리스 도 교계는 오늘날까지 완전히 소화시 키지 못하였다. 리차드 시몬 (Richard Simon), 살로모 세물리 (Salomo Sern-ler), 후에 바우어 (F. Ch. Bauer) 와 슈 트라우스(D.E. Strauss) 같은 인물들이 註釋學과 ?義史的 문제에 제기하였 던 것을 신학은 오늘날까지 취급하고 있다. 이미 그당시 이 문제들에 과감 히 관심을 보이고, 그럼으로써 새로 운 형태의 신학을 개시헌- 것은 지난 세기 가톨릭 튜빙겐學派의 별로 대수 톱지 않은 공로가 아니었다.

적어도 암시적으로 ?史科^을 통 하여 제출된 문제들 중에서 두 서넛 을 지칭할 수 있다. 宗敎史와 禪^ 은 聖害 메시지의 역사적 제약성,' 그 것의 他히敎로부터의 ?脇性, 그 시 대의 文學形式과 思考形式 그리고 언 어와 記述形式으로부터의 예속성, 그 들의 역사적 발전. 그리고 그로써 주 어진 각개 성서 滴辭 사이의 간장상 태를 제시하였다. 사회학적이고 역사 적 인식들은 교회의 많은 ?示形式과 構造素因들을 時限的인 것으로 보이 게 한다. 그리고 상응하는 敎?들윤 이데올로기 혐의를 받도록, 즉 한 특 정한 역사적이고 사회적 상태의 上Jff 構造와 이 상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倫理神學에서의 변혁은 가장현저하다.® 사람틀은도덕적 의 식과 인간의 ?値尺度의 변천을 과거 에서만 단정할 수 았을 뿐 아니라, 현새대 빈화 속에서도 바로 손으로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은 인격적 良心 의 존엄성음 점점 더 많이 발견케 된 인간자유의 역사가 있다. 이것 역시' 인간의 역사성에 대한 自覺·이 점차 중가한다는 標徵이다.

역사성의 문제는 요컨대 神學內的 으로 註釋향과 敎義神學 그리고 倫理 神/!의 몇 소수 문제 에 국한하지 않 고 보편적이머 현대사상과 신앙 전체 에 해당한디이것은 그리스도교의 ?對性 주장을 철저하게 의문에 처한 디그 때문에 근본적으로 물어야 한 다 : 우리는 이 철저한 역사적 사상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이것은 모 든 신앙의 확실성을 지양하고 모두가 타당하고, 그러므로 아무 것도 타당 하지 않은 相對主義로 이끄는가? 혹 은 이것은 보다 깊은 신앙의 이해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들의 해답에 근세사상에 대한 神^ 立場의 存亡이 크게 달려있다·

2. 歷史의 法則과 約束.下의 그리스 도信仰

한편으로는 구약과 신약의 啓示와 다른편으로는 古代世界의 神話와 自 然宗敎들 사이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들 중 한가지부터 우리는 시작한 다 : 그리스도신앙은 자신의 전체 내용에 의해서 역사적 신앙이다. 神話 들은 항상 일어났고 또 걸코 일어나 지 않았다 (산무스트-- Sallust) 라는 것 이 神話에는 해당되는데,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 고백은 "예수는 主님 (Kyrios)이다’’(1 고린 12,3)라는내용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 속으로의 Q己外形化는 다른 것 이 아니라,하느님이 여러 시대에 그 리고 다양한 양식으로 예언자들올 통 하여 이끈 오랜 역사적 대화의 終結 이었다(히브 1,1). 자연과 인간영혼의 深?이 아니라, 역사가 우리가 그리 스도신자로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次元이다. 그때문에 그리스도의 복 음선포 행위는 실재의 無名的 深層根 據나, 철학자들의 神, 보다 높은 정 高의 存在를 가르쳐 야 하지 않고,아 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파 스칼)을 증언해야 한다· 그것은 추상 적진리의 體系나 일반적인 세계관을 대변해야 하지 않고 하느님의 역사적 위업을 크게 전파하고 말과 성사를 통하여 현존화해야 한다.

그리스도신앙이 자신의 대상에 입 각하여 역사적 신앙이라면, 이것은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 제들올 신앙의 상상적 內面空間으로 후퇴하고 역사적인 문제들을 신앙에 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워버림으 로써 모면하지 못함을 뜻하고 있다. 역사로부터의 이러한 도피는 현재로 두가지 樣式으로 시도되고 있다. 사 람들은 교회의 신앙을, 자기자신을 보

증하고 역사적 문제들이 .대단히 증대 하는 가운데 에 서 도 문제 없 이 안전히; 게 있는 最終形體로 실정하거나(가톨 릭의 위험), 신앙의 ?存論的 解禪윤 ㅣ시도하고 이러한 양식으로 다소간에 내용없는 β·仰性 속에서 공격당할 위 험이 없는 구역융 마련한다· 그리고 는 개인의 신앙의 敢行을 더 이상 내 용직인 역사적 ‘무엇,(Was) 에기- 이-니라, 단지 예수가 도래하였다는 點 的인 ≪것’ (Dafi) 에 관련되어 있는 최 종적인 것으로 믿는다.

■그러면 역사의 의의는 현 신앙의 '지금’ 속에서 성취된다두가지 깅 우에 모두 역사는 신앙을 괴롭히지 않는데, 이는 역사가 신앙 이상 아무 것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가지 경우에 모두 신앙에 본질적인 역사에 의 관련이 부인되고 그리스도신앙의 본질이 의문에 처해져있다. 이렇게 생 각하는 사람은 새로운 型의 假現論 (Doketismus) 에 삐.진다. 그는 肉化 (Menschwerdung) 에서부터 하나의 假 像을 만들고 신앙으로부터 하나의 새 神話를 만들어낸디그러나 신앙이 그토록 無?史的으로 되면, 역사가 無信仰的으로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의 역사적 성격을 강조하고 하느님이 실제로 이 우리의 구체적 역사에 게 입하였으며, 이것·I· 받아들였고 구원 하였다고 말할 온갖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일방적으로 교회적이거나 실제 론직 신앙해석은 그리스도교를 非現世的으폭 만돌고 하느님을 역사로부 터 정중히 작별을 고하게 한다.

이 비판에도 불구하고 神學의 상대적 정당성과 합법적 趣待률 간과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두번째 觀點 으로 이끈다. 신앙은 객관적 救援·· 實이 진실하다고 간주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의 하느님의 행 동은 그저 다른 琪Κ듬 가운데 하나 의 사실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 사 실들처럼 중림적으로 단정되고 확증 될 수가 없다. 하느님의 역사는 인간 의 눈에는 숨겨진 役파이다. 그것은 항상 정체를 숨기고 다른 역사적 사 , 건의 類比에 따라 인식될 수 없디、

하느님의 役*는 신앙 속에서만 하 느님의 役事로 포착될 수 있다. 측량 가능하고 타산가능한 세계에서부터, 자신의 습관의 安樂性과 II明性에서 부터 탈출하여 신앙세계의 새로움올 신뢰하려는 준비가 된 사람만이 역사 속에 서 하느님 의 구원도 인 식 할 수 있 다. 인간의 전적인 開放性과 Ι?己讓 渡 (Selbstentaufierung) 는 보다 위대한 하느님과 그의 自 US 渡를 위해서 자 신 을 비 워 놓는 태 도이 디역 시- 속에 서의 하느님의 事役이 인간의 신앙 속에서 하느님의 事役으로서 受界되 고 認定되며 목표에 이르게 되는 곳 에서,비로소 역사는 救世史가 된다. 구세사는 말하자면 인간이 없지 않는 역 사이 다. 구세 사는 하느님 의 인 간과 의 역사적 대화 속에서 비로소 생성 된다. 구세사는 객관적으로 전개되는

기의 숙명론직으로 인간에게 밀어닥 치는 역사가 아니라, 역사적 信仰敢 行을 통하여 일어난다. 구세사는 일 어나는 ?史이다(부버).

말하자면 救世史의 객관적 성격이 주관주의 적 揮發傾向 (Verilflchtigvmgs-tendenz) 에 대 조하여 중요하더 라도 객 관직 성격만윱 강조해서는 안된다. 신앙의 주관적 역사성을 부인하는 순 전한 容觀主義는 역시 마찬가지로 월 방직이고 다행,스럽지 못할 것이다. 이 :t·:觀的 ?史的 局面은 신앙과 역 사의·관계에 내한 많은 문제들에 있 어서 크게 중대하다. 그것은 대략 奇 騎과 예수 復活 그리고 聖害報道의 역사직 신빙성에 대한 문제들에게서 아주 일반적으로 결정적이 된다. 신 앙이 그에게 닥치는 역사에 관련되어 있읍이 듬어맞으나,신앙을 지나쳐 신앙에 安全을 보증하는 事Κ에로 퇴 거한 수 없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신앙의 확실성은 역사적 敢行의 매개 속에시만 가능하다.

요컨대 하나의 그리스도 ?在에서 두가지 β 面, 역사적으로 생기는 말 과 역사직으로 생기는 應答을 고수해 야 한다. 그리스도적인 것은 하느님 의 인간과의 익사적 대화로써 드러나 고, 이 대화는 자신을 인간들에게 그 들의 자유 속에서 顯示되는 超越에서 인간들이 관계하는 곳 어디서나 근본 직 으로 생 긴 다。 하지 만 하느님 의 인 간과의 이 대화는 교란되어 있을 수 있다. 말과 응답이 .붕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역사적 召命이 들리지 않는 채 ■렷되이 소멸될 수 있고 구원이 되 는대신에 심판이 될수있다. 이점 은 세번째 관점에서 世界史와 救世史 의 구별로 이끈다. 이 구별은 극히 어 렵고,문제를 지니고 있다. 즉 세계사 와 꾸세사는 순수하게 분리되지 않는 다. ?史를 光?의 편과.非救援의 편 으로 양분하여 분할할 수 없다. 모든 실재는 하느님 恩寵의 召命과 提供下 에 서있고 그때문에 잠재적으로구 세사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異?ㅅ들 과 이교적 . 예언자들이 있다.그럼 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 廣義에서 의 구세사로부터 ?義에서의 구세사 를구벌하면, 우리가.그리스도신자로 서 예수 나자렛 속에서 자신의 완성 과 능가를 체험한 이스라엘의 역사 속 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無?的으로, 목표에 이르고, '순수하게,수용되었 고, '올바로’ 증언되었으며, 여기서 인간과의 하느님의 대화가 ‘성공하였 으며’ 우리 모두가 다른 역사를 판단 할 수 있는 척도를 여기 소유하고 있 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때문이다.

물론 구세사도 ‘한 자리 위에서’, '성공하지는’ 않는다. 구세사자체가 비로소 제 정신이 들게 되는 역사를 또 갖는다. 때문에 구약 속에서 신약 이나 우리의 계몽된 意識에 일치하지 않는 아직 神話論的이고 多神論的이 며 異敎的 요소들을 발견할 때에 놀 랄 필요가 없디신약도 역시 어디서. 나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眞理와

實在를 파악하는 데 성공치 않고 있 다. 때문에 구세사를 전체적으로 받 아들여야 하고 전체 증언과 전체 운 동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類比 (analogia fidei) 의 解釋學的 股理 의의의이다. 전 구세사의 救心點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안에시 하느 님의 인간과의 역시-가 궁극직으로 성 공하였 다. 예 수 그리 스도를 지 향하여 , 그리고 그로부터 모든 성서·의 陳述들 이 비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 안에서 다른 모든 역사에게 척도와 의지를 줄 수 있는 어떤 ,궁극지인 것 이 발생하였다.

궁극적 시작으로사 예수 그리스도 는 그러나.救世史가 그와 함께 모든 觀點에서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않았 으며, 이 시작의 완성이 아직 도래하 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 때 문에 교회는 '벌써,와 ‘아직 아니'사 이에 자리잡고 있다. 교회는 계속해서 ‘充滿 속에서의 始作’ (J.A. Mohler) 에 매여있고 전통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증거자료의 고정적 인 수집이 아니라 하나의 생동적 과 정이다·'종말론적 현상으로서 교회는 항상 되풀이하여 새로이 자기자신의 미래 속으로 자신을 추월해야 한다, 교회는 바로 자가자신의 臨時性의 公 布로써 생활하고 있다(K. Rahner). 교 회는 진리를 간단히 소유하고 있지 않 고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새로 추구해 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인내하고 과 감하게 ‘時代의 標徵^ㅣ 유의함으로 일어난다. -

제 2 차 바티 칸 공의 회 의 네牧避·?;?(8) 은 한편으로는 교회가 자신의 복음선 포 행.위로써 그때 그때 시대의 물음 에 해 답을 주어 야 한다고 말하고, 다 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간단히 ‘준비 가다 되어서,이해답을 소유하고 있 지 않고, 시대의 물음은 새롭고 보다 ‘심오한 福昔에의 침투성음 필요로 하 고 있으며,그저 지금까지의 것에서 부터 추상적 결론만올 서술하지 않는 아주 새로운 해답들을 유발한다고 말 하였다. 사목헌장은 이 말 가운데 전 대적으로 필요한 福昔:??布의 時代係 數 (Zeit Koetfizient) 를 강조하여 명시 하였다. 이 해답을 발전하기 위하여 교회와 그의 .복음선포, 그리고 신학 은 자주 역사적 Κ驗과 敢行의 길을 가야 한다. 상이한 狀況 속에서 동일 한 것을 말하기 위하여 그것을 상이 하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컨대 말해야 .한다 : 교회 는 역사적이고 순례하며 求道的이고 분투하고 투쟁하는 교회요,?ㅅ뮴과 罪ㅅ들의 교회이다. 교회는 역사의 모 습을 지니고, 역사의 法?下에 서 있 다, 교회는 密神에 의하여 및빈이고 되풀이하여 새로 모든 진리에로 이끌 리어야 한다(요한 16,13 참조). 그때문 에 敎會史와 神향史뿐만 아니라 ?雜 史와 信仰史도 있다.(9) 이 역사 속에 서 진리에로의 부단히 심오한 침투와 성서적 씨앗〔胚량〕이 점점 장성하여 가지를 치는 ?義體系의 나무〔木〕에

로의 기관적인 자기발육만이 생겨나 지는 않는다. 敎義史에는 망각과 무 능과 거질의 역사도 있다. 그것은 모 든 역사들처럽 사람들이 皮相性과 난 삽한 변두리 문제에 빠질 위험에 처 한 커다란 시기와 시대의 지속적인 起伏이다. 그 때문에 교회의 말은 간 단히 그리고 모든 관점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아니다. 교회는 이것을 위해 서 항심· 새로이 途上에 있다. 교회는 순명 속에서 역사적으로 항상 반복하 여 새로 신앙의 해답을 주어야 하며, 그때그때에 항상 자신의 과실과 목표 뒷전에 처지있음을 고백하여야 한다.

교회의 역사적 도정 속에서 全?史 의 하느님께로의 歸還이 始原的으로 실현된다. 이것이 우리의 주·의를 하 나의 최종 관점으로 이끈다. 하느님 의 인간과의 역사는 다른 역사에 병 행하는 별개의 역사가 아니다. 그보 다 전 ?造?在는 맨 처음부터 그리 스도를 指떼하여 창조되었으며(골로 1, 16; 에페 1,10), 구세사에 연관되어있 디이와 함께 전 창조실재 역시 가 장 내부에서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있 다. 이 렇 게 역 사는 모든 실재 의 最 終地平(祝界 : Horuont) 이다. 역사 안 에시 되고 있는 것은 신학적으로 영 원한 本Η根據의 표면현상이 아니며, 영원한 것의 無常的인 陰影形象도 아 니라, '하勿 자체의 본래 ‘本性,이다. 역 사적 이 고 구세 사적 인 ·모든 구체 성 에서부터 분리시킨 수 있을 형이상학 적 秩序組織이란 없다.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역사적으로 호출된 자이며 응답하도록 소명 된‘ 자라는 것.이 신학 적으로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이 역 사적 말과 응답 규정성이 인간의 ‘本 性’이다. 이것이 그의 유일무이한 존 엄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인간은 이것을 역사적 순종과 하느님 앞에서 의 책 임감으로 새로 구현시켜야 한다.

때문에 그리스도신자의 세계 치신 에는 역사적 敢行이 속하고 있다. 그· 리스도신자는 항상 새로운 것과 관계 하고 있다. 그는 시험되지 않고 예측 할 수 없는 것과 관련을 맺어야 할 것이고 기존적이고 벌써 과거지사의 것에 保守的으로나 復古的으로 고착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신앙심이 적 은 모든 不動性을 거스려, 그리스도 신자는 공포감에 젖어서 안전을 생각 하는 세계 속에서 希望의 標徽이어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 모두 중에 최연 소자라는 것이 들어찾는다면, 그리스 도신자는 항상 젊고 활발해야 하고, '時代의 標徵들을,인식해야 하고 신 . 앙 속에서 이들과 합치해야 힌ㅜ다.

요컨대 요약해서 단경할수있다: 歷史와 歷史性은 그리스도신앙의 기 본 범주이다. 그리스로신앙은 그것의 내용,현실 그리고 매개와 全體地平 에 의하여 역사적이다. 그뿐 아니라 역사의 범주는 성서신앙의 공간 속에 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근세의 역사 ^ 思想이 발생하는데 성서적 역사신 앙의 영향이 없지 않았으며, 그것은 어느만큼은 이 역사신앙의 세속화된

成就를 의미하고 있다. 그리므로 현 대의 역사적 사상이 신앙과신학에게 무조건적으로 의문일 필요가 없으며, 신앙의 原初福音을더 잡·적점하게 파 악하·고 표현하는 긍정적으로·평가하 게 될 새로운 가능성일 수 있다. 이 역사적 사상은 교회에 대해 위협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한 好機로 간 주되어도 좋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는 오늘날 역사적 사상이 그리스도신 앙에 대항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이 그리스도신앙의 내용을 비우게 하고 상대화하는 듯이. 보인다. 현대 역사 적 사상속에서 그리스도교는 점차 ih 揚하는 듯이 보인다. 이 분열상황에 어느 정도 대치할 수 있기 위해서 역 사속에서 불변하는 것에 대해서 묻 고 역사성과 만사를 삼키는 相對主義 와의 명료한 구별에 이르는 것이 필 요하다.

?史 속에서 不變하는 것에 대한 뭉 음은 신학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의 의깊은 인간 존재는 아주 일반적으로 불변하고 가치가 있고 존속하는 어떤 것인가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 렇지 않으면 信賴와 充ft과 같은 아 주 기본적인 인간의 行動樣式은더 이 상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내일이면 죽을테니 먹고 마시 자’’(1 고린 15,32)는 입장만이 있읍 것 이다/ 이를테면 우리 문제의 해걸은 졸속하게 신학적으로 처리될 수 없고 그보다는 '?史,와 ‘?史性,의 단어 가 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천학적 fi 察을 통하여 준비될 수 있다.

‘歷史’와 ‘?.史性’ 단어는 현재의 철 학과 신학적 통용어 ■ 속에 서 의 流行 語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단어 와 이 단어가 뜻하는 화象은 자체로 두려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이점-은 이 말을 相對主義, 無≪心主표와 모든 領의 불안전성과 혼동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史的’이라는 단 어는 이미 거의 하나의 새로운 신앙 고백과 그들 자신의 進步性의 표지가 되었다. 이처럼 이 단어는 모든 가능 한 흥분과 激?으로 짐지워져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그때 그때 물어야 한다.

?史는 특히 運動의 以前과 以後로 서 시간의 中立的·現象 (Aristoteles) 과 年과 Η 時의 단순한 연속과유한한? 事가 예속되어 있는生成과消滅의 영 속적인 起伏과 혼동되어서는 안되겠 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와 더욱 분 명하게 아우구스띠노는 이러한 前과 後가 더 이상 없는 以前과 아직 있지 않는 以後를,전자를 기억하고 후자 를희망하면서두려우;!하면서 선취하는 가운데 포괄하는 인간정신과의 연관 속·에서만 있다는· 것을 알았었다. .現在化에로의 이 힘은 순간의 쐐기에 얽매어 있지토않고(니체),所與된· 것율 그때 그때 超克하고 그럼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지사를 견합하여 함 께 생각할 수 있는 인간 자유에 입각

하여 그에게로 온다. 요컨대 역사는 ??Λ가 있는 곳에만 있다. 자유로 말 미암이· 시간은 비로소 역사로 밀도짙 게 빈화된다. 그러므로 역사는 器官 的] 3Μ (organische Entwicklung) 과도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역사는 발전하 지 않고 決斷 속에서 몇번이고 되풀 이하여 새로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 속에서 이것이 나 저것이' 문제가 아니라 全體가,무 조건적인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여 ?기서 인간과 그의 세계의 효義가 결 정된다. 자유 속에서 인간은 그와 무 조건적으로 관계하는 요청을 대하게 된다(밀리히)·· 때문에 자유는 단순한 起伏과 영속적인 생성과 소멸에 만족 하지 않는디■. 바로 자신의 보편적 開 放性 안에 서 자유는 구체 적 決斷性을 촉구하고 있다. 바로 무조건적 拘束 속에서 인간은 즉 찰라에 탐닉하는 데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가 자기 자신을 목표없이 헤매는 본능의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가운데, 그가 자유롭게 선택한 목표들을 위해 자유롭게 된다. 영구히 개방되어 있 으려 하고 질대로 구속받지 않는 獨 身^의 자유는 자유의 至上的 경우가 아니라, 가소롭고 타락한 자유의 怪 形이다. 요컨대 자유를' 궁극적인 것 에 대한 能力으로 규정會 수 있다-이로써 역사의 본진에는 可變的이고 無常한 것 뿐만 아니 라,無條件的이 고 궁극적인 것도 속한다. 에 반대 해서 인간의 역사성을 근Η 로 내세워 궁극성을 지향하는 言明과 決斷을 근 본직으로 회피하는 사람은 그가 무엇 을 말하고 행하는지를 숙고해야 한다.

그렇 기 는 하지 민: 궁극성 을 지 향하 는 역사의 내적 傾向은 어려운 문제 이다. 인간적 자유는 偶有的인 역사 적 要素들로서 아주 대단히 제0+되고 규정되어 있어서 자기자신의 본질을 그때 그때 破散的으로만'구현시킬 수 있올뿐이다. 인간은단한번만으로 충분하게 자신에 관하여 결정할수 있 을 정도로 그렇게 대단하게 자기자신 을 점 유하는 天使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의 자유는 구체적 具現 속에서 항상 그의 본질 뒤에 처지고, 肉身的, 구체적 成就에로 적합하게 결코 건네질 수 없다.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산만하고 은폐되고 애매하다.

이것이 궁극성을 지향하는 내적 경 향을.가지 고 있 기 는 하나, 완전히 '對 象的으로’ 가질 수는 결코 없다. 인 간자유의 이 追跳不能性이 인간의 肉 身性과 함께 이미 소여되어 ■있·는지, 또는 罪와 탐욕적 상황의 분열의 표 현인지는 여기서 미해결로 남을 수밖 에 없다. 이 脈絡 속에서는 다만 ? 由가 조망불가능한 것의 次.元을 지시 하고 있다는 것이 증요하다. 자유는 밝혀질 수 없는 神秘 4으로 신뢰하 면서 감행되어야한다. 이것이 그리 스도의 확신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가 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속 에서 종국적으로 ‘성공'하였는가 하 는 내적 근거이다. 예수의 힌신 속에
서 唯一ι可的으로 계시된 하느님의 充 ?과 사랑은 역사 속에서 不變하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다. 全歷史 속에 서 傾向과 希望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여기서 구현되어 있다.

여 기 서 역 사 속에 서 종국 적 인 것 이 발생되었고, 그때문에 예수의 復活 과 새로운 永劫의 시작이 십자가의 다른 면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 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종말론적 사 건으로서 그리스도신·앙의 核心이기 때 문에 종말론적 궁극성은 그리스도신 앙의 本資特性이다·여기서는 모 든 입장이 항상되풀이하여 수정될수 있고, 추월될 수 있지 않다. 여기서 는 만사가 영속적 思惟와 討議의 과 정 속으로 용해 될 수 없디궁극적 決 斷과 ??明에의 용기와 냉철함이 없이 그리스도 신앙은 자기자신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거의 말할 수 있겠 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i리스도신 앙의 강점과 약점이 놓여있다. 그리 스도신앙은 인간에게 궁극직인 ;S義 를 약속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이에 대한힘을 소유하지 않는 교회는 饒舌로 영락한 자신의 5?布물 아무도 더 이상 관심올 갖고 대하지 않는 데에 대단한 공헌올 할 것이다.

4. 無®性이란 무엇읕 의미하는가

이 命?로써 우리 는 내 용에 따르면 無?性 槪念이 의미하는 바와 조우하 게 되었다.03) 이 개념이 인정하는 바 와 같이 지속적인 오해의ㅣ 기회를 주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이 개념 을 계획적으로 회피하였다. 그러므로 이 개념 속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아 象的 ?붉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얼 마 동안 연기해야 할 것이다· 이 때 문에 우선 무엇이 문제가 아닌지를 맙 하기로 하자. 무류성으로서 여하한 類의 결함과 오점이 제외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특히 倫理的인 無JHf 性을 뜻하지 않는다. 敎義들은 단연 일방적이고 피상적이며 猫善的이고 어 리석으며 졸속적일 수 있다.

無讓的 信條들에게서 先驗的으로 전 혀 틀릴 수 없는 文후들이,즉 상황 과 그 사용으로부터 분리되어 전혀 어 떤 오류도 포함할 수 없는 명제들이 문제되지 않는다. 敎義듭은 모든 인 간적 發言의 역사성에 예속되고 그들 과 일치하는 맥락과의 관련 속에서만 구체적으로진실하다. 때문에 그들은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새로 註釋되고 새로운 상황속으로번역되어야한다· 하나의 敎義를 인용하는 것만으로는 여전히 거의 아무 것도 증명하지 않 았다. 교의를 역사적이고 市象的으로 도 해석해야 한다. 이에는 각기 다른 本文에서 처럼 동일한 解釋學的 原理 들이 적용된다. 마침내 하나의 敎義 는 한가지 진리를 한가지 Ri面에서,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관定的이고 爭論的 경계설정으로 취급하고 있다. 때문에 그 敎義는 當該問題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언급될 수 있고 또 언급 되어야 하는 모든 솟을 말하려 하지
도 않고 할 수도 없다. .

근본적으로 진리는 한 命題로 결코 디- 만해 버리게 되지 않은다. 때문에 한 가지 敎.裏로써 하나의 신학문제가 절대로 唯. -回的으로 종결되지 않는. 다. 無?的 ?義들이 완전하지는 않 다. 그들은 그들의 定義上으로도 受 取외· 解釋과 統合의 역사 밑에 놓여 있다. 때문에 그·들은 고립되어서 高 姿勢·Ι· 취 해 서 는 안되 고 현書와 聖傳 의 전체 證?r내에서 해석되어야한다.

敎義의 이 역사성은 제 ι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서도 제외되지 않는다. 공의회는 敎義史를 알고 있다. 공의 회는 敎義形式들의 文字性이 아니라, 敎義의 의의를확정하고있다: “…義 잡는 영구히 머물러야· 한다” (-"is sensus perpetuo est retinendus). O4) 문 제가 되는 것은 요컨대 무류적 文草 듬이 아니라 무류적 ‘事象’ (Sache) 이 다. 문제가 되는 ‘事象,은 예수 그리 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진리가 무류적 으로 족 종말론적으로一終局的으로 새상에 왔으.며,하느님의 充實에 의 거하여 더 이상 虎?에 의하에 정복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론 적 ㅡ종말론적 核心演辭는 역사적으 보 증언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가능 하기 위해서 제 1차 바티칸 ?의회는 무류 직 要謙 (Instanz) 에 관해 발하고 있다. 요컨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죽고 硬f£한 文Μ들의 무류성이 아니 라,생동적인 역사적 요체의 무류성 이다. 그들은·상황에 따라 역사적으로 말할 수 있고, 새로운 상황 속에서 자 신의 이전 演辭들을 역사적으로 再解 釋할 수 있다. 이러한 무류적 증^들 이 없다면, 福昔도 역사 속에서 무류 적으로 유효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자체로 감탄을 일게하는 루터 (Luther) 의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새로 유효하 게 하고 말을 듣게 하는 복음의 fi 明 性, 복음의 세력에 대한 想念은 프로 테스탄티즘의 역사 속에서 누차 임의 대로되지 않았다. 그밖에도 이 想念 은하느님이 항상 인간을 통하여 役환 한다는 그리스도 救援秩序의 기본법칙 을 완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 福管 의 증언은 역사적으로는 복음의 증인 들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 證言 ■과 證ㅅ은 상호간에 서로 매여있다· 幅昔을 終局性의 주장을 내세우며 구체적으로 발언하는 要諫는 전체로 시의 敎會이다. 교회는 무류성의 본 연의 주체이다. 교회가특정기관을통 해서만 작용되기 때문에 단지 이차적 으로 主?團 (Bischots Kollegium) 과 주 교단의 으뜽,로마의 주교가 無讓的 言明의 主體이디·. 하지만 ?Si과 主 敎들은 이때에 교회의 신앙의 대변자 들이며 대표자들일 뿐이다. 그들 이 신앙으로부터 이탈할 위험에 있을 때에는,교회내의 다른 恩赦들이 봉 기하여 그들이 언동을 삼가하도록 촉 구하고 그_들의 과업을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공하지 않을 때, 극단의 경우 한 敎皇이나 主敎가 공 공연하게 이단적이고 열교적이 되는

때에는, 대단히 광대한 傅·統에 의하 면 자신의 敎職을 상실한다.

요컨대 敎鶴權的 無?性은 전체 교 회의 무류성 안에 매여 있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 앙에서부터 결정적으로 이탈될 수 있 다면, 그리스도를 離反하는 것이며, 그러면 교회는 구약 合堂 (Synagoge) 의 처지로 추락하는 것이고, 예수 그 리 스도 안에 서 의 종말론적 ?一 종국적 인 하느님의 약속은취.소되는 것이며, 하느님 자신은 神이 아니요 역사의 主 로서 顯;Γ?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 의 무류성은 본시 교회의 특성이나 實敏은 더구나 아니다. 최종적으로 관 건이 되는 것은 그보다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의 하느님 充?의 무류성이 디-. 이것이 역사 속에서 終Ml的인 것 이요,不變하는 것이다. 충실;은· 구체 직이다. 이것은 역사에 妓行하지 않 고 역사 속에서 진행하고 있다. 그때 문에 교회는 자신의 구체적인 敎理에 병행하고 교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 .라,교리演辭 안에서 또 이를 통해 역 사 속에서 불변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충실은 硬直하고 非生産的 인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射 充? (Gegentreue) 속에 서 희 망하고 신 뢰하면서만 포착할 수 있다. 하느님 ■의 충실에 ■의거하여 역사 -속에서 회 망을 가지는 것은 단지 많은 것이 激 變 중에 있기.때문에 오늘날 교회 안 에서는 만사가 몰락하고 있다고 생각 하는 모든 破局神學과 破局氣分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이 회망은 역사안 에서의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의 파멸이고 오늘날에야 비보소 件a의 태양이 교회 위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다고 가정하는 것 역시 금물이다. 두 가지 모두 결핍된 신앙이다· 지나치 게 소심한 保守主義^들에게나 교회 안의 革命家들에게나 마찬가지로 참 된 신앙이 결핍되어 있디、믿는 사람 은 역사 속에서 필쳐지 있는 約束읍 알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확실성은낡은體制와形 式에 소심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켜서,현재의 격변 속에서 최소 한 어떤 것을·획득하기 위해시 가장

안전한것이 愼重이 아니라책임감 있 는敢行이 라는확신에서부터 출발하는 감행의 安쪼決定主義 (Tutiorismus des Wagnisses, 칼 라너 ) 에 로 해 방시 킨 다. 무류성이 이러한 樣式으로 희망의 무 류성으로 이해되면, 이것은 단어의 최상의 의마에서 하나의 福音的 眞理 이다· 물론 그리고나서 교회의 여러 想念과 참辭는 다른 형태를 받아들여 야 할 것 이 미 , 보다 즐겁 고 희 망찬 音 調와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할 것이 다. (디-음 호에 계속)

(原文 :'Walter Rasper, Einfuhrung in den Glauben, 1972, Griinewald Mainz. 沈相泰 神父 譯)‘
(1) 이하에 대하여 목히 E.Troeltsch,tjber historische und dogmatische Methode in der Theologie, in: Gesammelte Schriften II,Tubingen 1913(Neudr·. Aalen 1962)', 729-753 참조.

(2) G. Kruger, Freiheit und Weltverantwortung: Aufsdtze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Freiburg 1958, 97 참조.

(3) 이에 대하여 Darlap,Art. GeschichllickeU, in: LThK IV2(1960), 780-783; 상동 Fundament ale Theologie der Ileilsgesckichte, in: My Sal I, Einsiedeln 1965; 3-156; G. Bauer, Geschichtlichkeit, Wege und Irrwege eines Begriffs,Berlin 1963; L.v. Renthe-Finke, Geschichtlichkeit. Ihr terminologischer und begrif-flicher Ursprung bet Hegel, Haym, Diltliey und Yorck, Gottingen 1964; W. Kasper, Das Absolute in der Geschichte. Philosophie vnd Theologie der Geschichte in der Sp&tphilosophie Schellings, Mainz 1870; P. Hunermann, Der Durchbruch des geschichtlichen Denkens im 19. Jahrhundert, Freiburg 1967, A. Darlap/J. Splett, Art. Geschichte und Geschichtlichkeit^ in: SM 11(1968), 290-304.

(4) Hegel, Phanomenologie des Geistes (ed. Hoffmester), Hamburg 1962(제 2판), 21,39.

(5) J. Grundel, Wandelbares und Unwandelbares in der Moraltheologie, Diissel-dorf 1967; A. Auer,Die Erfahrung der Geschichtlichkeit und die Krise der Moral, in: ThQ 149(1969), 4-22.

(6) R. Bultmann, Geschichte und Eschathologie, Tubingen 1958,183 참조. 實存神學

에서 歷史가 歷史挫에로 용.해되는데 대조적으로現?ㅡ時問的으로 이르는歷史와 그 神學的 효味가 떼이야르 드 사르댕과 그의 영항을 받은 神^^들에 의하여 명시되었다. 救世史神 學이 비슷한 方向으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CX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 Die
urchristliche Zeitund Geschichtsauffassung, Zollikon-Zurich 1948( 제 2판); 상동 s Heil als Geschichte, Tubingen 1965. 救世史 槪念의 問題性에 대하여 Η. Ott의 要約 Art. Heilsgeschichlte, in: RGG 1113(1959)? 187-89. 헤겔의 歷史함學으로부더 깊은 영항을 받아 W, 판넨베르그는 바르트와 불트만을 지나쳐 새로운 普遍歷史的 基點을 시도 하는데,이 基點은希望의 神學에서도(이하행9참조) 계속 작용하고 있다. Offenbartmg als Geschichte, hg. v. W. Pannenberg, Gottingen 1961; 상동,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Gesammelte Aufsatze、 Gottingen 1967; 상동, Grundzuge der Christologie, Giitersloh 1964. 토론에 대 하여 Theologie al§ Geschichte, hrg. v. J.M. Robingen und J.B. Cobb, Zurich 1967. _

(7) 非그리스도敎 宗敎의 神學에 대하여 Ο. Karrer, Das Religidse in der Menschhei1 und das Christentum, Frankfurt a.M. 1949; R. Ohm, Die Liebe zu Gott in den nichtchristlichen Religionert, Freiburg 1957: J.A. Cuttat, Begegnung der Religionen, Einsiedeln 1956; K. Rahner, Das Christentum und die nichtchristlichen Religionen, in: Schriften und Theologie V, Einsiedeln 1962; H.R. Schlette, Die Religionen als Thema der Theologie, Freiburg 1964; J. Ratzinger, Der christliche Glaebe und die Weltreligionen, in: Gott in Welt II≫ Freiburg 1964, 287-305; J. Heislbetz, Theologische Grunde der nichtchristlichen Religionen, Freiburg 1967 참조.

牧^^ 3 항 이:하, 10 항 이하, 22,40.44. 62 항; “時代의 徽標” 槪念에 대하여 Dokmnm-tation in: Concilium 3(1967) 417-422 참조·

(9) 敎義?史의 問題에 대하여 F. Marin-Sol^ 1/Evolution homoghne du dogme catholique, Freibourg 1924; J.R. Geiselraann, Lebendiger Glaube aus geheiligter Oherlieferung·, Mainz 1942; K. Rahner, Zur Frage der Dogmentwicklung, in: Schriften zur Theologie I, Einsiedeln 1954, 49-90 ; 상동, Oberlegungen zur Dogmenentwicklung, in: a.a.O. IV Einsiedeln 1954, 11-50; M. Blondel, Geschichte und Dogma, Mainz 1963; W. Kasper, Dogma unter dem Wort Gottes, Mainz 1965; V. Schulz, Dogmenentwicklung als Problem der Geschichtlichkeit der Wahrheitserkenntnis, Rom 1969 참조,

(10) 그리스도신앙을 위한 進化的 世界觀의 효味에 대해 특히 떼이야르드 샤르병이 누차 반 복하여 지적하였다. 이 중요한 기본문제에 대하여 이밖에 K. Rahner, Die Christologie innerhalb einer evolutiven Weltanschauungy in: Schriften zur Theologie V’ Einsiedeln 1962, 183-221; 상동, in: P. Overhage, Urn das Erschetnungsbild der ersten Menschen, Freiburg 1959, 11-30; 상동, Die Hominisation als theologische Frage, in: P. Overhage/K. Rahner, Das Problem der Hominisation, Freiburg 1961, 13-90 참조.

(11) Aristotles, Pays. 223 a; Augustinus, Confessiones, 11. Buch 27;29.

(12) H. Schlier, Das bleibend Katholische. Kin Versuch iiher ein Prinzip des Katholischen, Mflnster 1970 참조.

(13) 이하에 대해 Η. Kiing, Unfehlbarf Eine Anfrage, Einsiedln 1970; 싱■동s Im Interesse der Sache. Antwort an Karl Rahner, in: StdZ 96(1971),43-64; 105-122; 無?姓의 問題에 대하여 ^Iwiworie≫ auf die An frage von Hans Kiing, hg. ν· K. Rahner, Freiburg 1971; W. Kasper, Zur Diskussion um das Problem der Unf ehl-harkeit, in: StdZ 96(1971), 363-376 참조. .

(.14) DS 3020.

(15) DS 3074:"로마 교황은…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당신 교회가 그것으로 무장되어 있기 를 원하셨던 저 無譯性올 소유한다.”제 1차바티칸 공의회 신앙위원의 대변인인 Gasser大 主敎의 진술 참조. 그에 의하면 교황은 "보편적 교회를 대표하는 분”으로서만 그르칠 수 없다(Mansi, Amplissima collectio conciliorum, Bd. 52, 1213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