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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5월호 (제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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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학교에 관한 지침
1978년 5월호 (제 57호)
서 론 1. 가톨릭 학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Lumen Gentium)과 「현...

정치질성에 관한 그리스도교 원리
1978년 5월호 (제 57호)
- 브라질주교회의 제 15차 총회 성명서 - 지난 수년간 브라질 로마가톨릭교회 주교들은 社正義와 人權에 관...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 VIII. 신앙의 교회성 -
1978년 5월호 (제 57호)
1. 敎會ㅡ신앙의 障碍 또는 後援 主題 ‘信仰의 敎會性’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쉽사리 불쾌감을 일으...

프래그머티즘의 문제점 - W. 제임스의 학설을 중심으로 -
1978년 5월호 (제 57호)
현대인들에게 직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상 중 하나를 말한다면 '프래그머티즘’(...

교회없는 종교 생활
1978년 5월호 (제 57호)
작년 5월 독일가톨릭중앙회(ZDK)의 사목위원회에서 "교회없는 종교생활ㅡ신앙과 교회에 대한 挑戰”이라는 ...

그리스도론의 어제와 오늘
1978년 5월호 (제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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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담긴 종교적 심성
1978년 5월호 (제 57호)
I. 巫俗과 文學 발생론적으로 보아, 문학과 종교, 詩와 신앙은 ㅡ卵性 雙胎兒다. 하나의 모태에서 한 순...

한국 현대문학 속의 종교성
1978년 5월호 (제 57호)
옛부터 한국에 있어온 종교 및 종교적 ?態로서는 대체로 巫?(shamanism), 佛敎, 儒敎 등을 들수 있다. 이 ...

신을 찾는 자연주의자
1978년 5월호 (제 57호)
I 일본의 어떤 無神論者가 病苦와 老衰로 死境을 헤매게 된 어떤 날 弟子들을 불러놓고 "이제 조금만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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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단 1978년 5월호 (제 57호)

프래그머티즘의 문제점 - W. 제임스의 학설을 중심으로 -

朴 道 植 (대건신대 교수, 신부)

현대인들에게 직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상 중 하나를 말한다면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래그머티즘은 전세기 말에 미국에서 시작된 미국 고유의 철학사상이므로 어떤 점에서는 ‘아메리카니즘’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오늘의 미국 사회에 그 주추를 놓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전세계의 정치 경제 사상면에 있어서 헤게모니의 主役國을 미국이라고 한다면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은 미국의 것으로서만 끝나지 않고 그 영향은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직접 간접으로 프래그머티즘이 있는가 하면 우리 교회내에도 크게 그 힘을 떨치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본론에서 필자는 프래그머티즘의 기원과 사상의 핵심 및 그 사상이 끼치는 문제점을 극히 요약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1. 프래그머티즘의 개념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이란 말을 우리 말로는 實用主義라고 번역하며 그 어원은 희랍어 프라그마(pragma)에서 나온 말이다. '프라그마'라는 희랍어는 행동 또는 實行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practice(행위, 습관, 실행) 또는 practical(실제적, 실천적)이란 말도 희랍어인 pragma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와같은 어원적인 고찰로 미루어보아 프래그머티즘은 행동과 실천을 중요시하는, 다시 말해서 이민 이본보다 구체적인 면을 중요시 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프태그머티즘이란 말은 1878년 1월에 챨스 퍼어스 (C. Peirce, 1839?1914)가 「통속과학월보」誌에 발표한 그의 논문 「우리의 觀念을 어떻게 분명히 한 것인가」에서 치음으로 사용한 철학용어이다. 그러나 실제로 철학적인 체계를 세운 사람은 월리암 제임스 (W. James, 1824?1910)이다. 그는 1907년에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이란 논문집을 내면서 철학계의 이목을 끌었다. 제임스를 이어서 죤 듀이 (J. Dewey, 1859~1952)는 소위 道具主義로 발전시키고 있다.

미국의 철학은 영국철학과 더불어 대체로 經驗主義的인 색채가 농후하다. 이런 점에서 형이상학적 요구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독일철학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미국에서 발단된 이 프래그머티즘도 다른 경험주의적 실증주의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그것을 모체로 해서 나타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내용과 경향이 약간씩 다르지만 그들의 근본입장은 인간의 실제생활을 존중하면서 지식이란 실제생활에 어떤 유용성이 있다고 입증이 될 때 ‘참’ 이라고 보는 데 있다.

본론에서는 프래그머티즘의 대표적 학자인 제임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몇 가지 점만을 보기로 한다.

2. 제임스의 사상

제임스는 전술한 바와 같이 그의 저서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에서 그의 중요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프래그머티즘의 意義」라는 강의에서 먼저 다람쥐의 예를 든다.

다람쥐 한 마리가 나무 둥치 한쪽에 붙어있다고 가정하고 그 반대편에는 사람이 서 있다고 가정한다. 이 사람은 다람쥐를 보기 위해서 나무를 뱅뱅 돌고 있으며 다람쥐도 동시에 사람과 같은 속도로 나무를 돌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나무가 가로막혀 그 다람쥐를 볼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실제로 그 사람은 다람쥐를 쫓아 나무를 돌고 있는가, 혹은 다람쥐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실제로 그 다람쥐를 쫓아서 돌고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실제적’인 문제가 중심이 되어 이 비유의 결론은 이렇게 된다. 즉 그 사람이 다람쥐 꼬리를 따라서 돌았다면 실제로 그 다람쥐를 쫓아서 나무를 돌 것이며 반대로 다람쥐가 사람을 쫓아서 돌았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다람쥐를 쫓아서 나무를 돈 것이 아니다.

이상에서 얘기한 다람쥐의 비유에 대해서 형이상학을 하는 사람들은 끝없는 논쟁을 벌일 수 있다. 그러나 제임스는 말한다.

“프래그머티즘의 방법은 다른 방법으로써는 논쟁이 끝이 없을 형이상학의 논쟁을 해결 하는 방법 이다. 세계는 하나냐, 다수냐? 숙명이냐, 자유냐? 물질적이냐, 정신적이냐? 이러한 개념은 두가지가 다 세상에 적당하기도 하며 적당치 못하기도 하다. 이리한 개념에 대한 논쟁은 끝이 없다. 이러한 개념에 관한 논쟁이 벌어 진다면 프래그머티즘의 방법은 각기 개념의 실제적 결과를 살펴서 각기 개념을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윌리암 제임스 著, 李南? 譯, 프래그머티즘의 哲學, 大文出版社, 194면 참조).
이와같은 제임스의 말을 빌려볼 때 프래그머티즘은 경험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프래그머티스트들은 抽象, 그릇된 先驗的 推理, 일정한 원리, 어떤 정확한 결론을 가지고 있는 사상체계 그리고 假裝된 절대적인 개념을 전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具體性 과 適切性, 事實性을 보여주는 행동과 힘만을 인정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경험론자의 기질에서 합리적이고 독단적인 이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스트들은 과거의 기존학설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제임스는 또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한다.

프래그머티즘은 넓은 호텔 안의 복도와도 같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학문적 이론들의 중간에 존재한다고 했다. 즉 이 복도를 중심으로 양 쪽에 많은 객실들의 문이 개방되어 있다. 어느 객실에서는 어떤 사람이 무신론을 저술하고 있고 그 옆방에는 하느님께 믿음과 힘을 달라는 기도를 바치고 있다. 또 다른 방에는 화학자가 화학실험을 하고 있으며 옆방에서는 관념론적인 형이상학을 운운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가 같은 복도를 共有하고 있기 때문에 각자가 자 기 방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이 복도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같은 비유에서 모든 것을 포용 하는 것이 프래그머티스트들의 철학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논리적인 것이든 감각적인 것이든 심지어는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때로는 비근한 개인의 경험까지도 고려하는 자세를 취한다.

3. 제임스의 宗敎觀

제임스는 그의 저서 「종교 체험」에서 주로 ‘체험적인 하느님'을 역설하고 있지만 그의 종교는 어떤 도그마틱한 종교가 아니요 바로 프래그머틱한 종교이다. 그는 말한다.

“프래그머티즘 입장에서 하느님이란 가설은 그 말이 지니는 최대한도의 의미로 만족스럽게 통할 수만 있다면 진리라고 봅니다”(제임스, 世界思想大全集, 大洋書籍 47권 150면 참조).

“만일 제가 여러분에게 마아디(Mahdi)를 믿으라고 권한다면 여러분에게 불꽃같은 신앙심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가설은 완전히 죽은 가설입니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마음은 움직일수 있는 가설입니다. 즉 살아 있는 가설이란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설이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은 그 가설이 지니는 본질적인 성질이 아니라 사고하는 개개인과의 관계에 따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읍니다. 다시 말하면 개개인이 행동하려는 의욕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측정될 문제입 니다. 최고의 살아있는 가설이란 개개인으로 하여금 행동하려는 의욕을 품지 않을래야 품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가설을 말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신앙을 의미하게 되는데 사실인즉 행동하려는 의욕이 다소나마 있으면 반드시 약간의 신앙적 태도는 따르게 마련입니다”(上揭書, 156면 참조)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제임스는 종교를 어떤 敎條的인 면에서 보지 않고 개인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 체험이 개인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그 유용성으로 보아 종교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그는 궁극적으로 종교를 부정한다든지 또는 불필요성을 말하지는 않지마는 어떤 경우에, 예컨대 잘못된 신앙으로 개인 생활에 어떤 차질을 가져다 준다고 할 때 제임스의 종교관은 일변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그의 종교관은 어디까지나 프래그머틱한 종교이며 그의 신앙은 궁극적인 가치 위에 박혀진 순교자적인 신앙과는 그 방향이 너무나 다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유신론자임을 전제한다. 즉 신의 존재가 우리 개인생활에나 사회생활에 유익을 주는 것이고 결코 해로운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르기를 “有神論의 테두리 안에서 어떤 생각은 그 실제적 합리성이 보다 크기 때문에 같은 테두리 안에 있는 다른 생각들을 제쳐버리고 남아있듯이 유신론 그 자체도 저급한 다른 모든 신조들을 제쳐버리고 살아 남을 것이 확실합니다. 唯物論이나 不可知論은 설혹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널리 보편적으로 신봉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上揭書, 200면 참조).
여기서 그는 유신론의 사상이 무신론이나 유물론의 사상보다 더 실제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인다는 이론이며 더구나 그는 "유물론이나 불가지론은 설혹 그것이 진리라 할 지라도???" 이런 표현에서 그의 眞理觀을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유신론도 유물론도 같은 진리라고 한다면 그가 규정하는 진리의 기준이 문제가 된다.

4. 제임스의 眞理觀

제임스의 진리관은 역시 어떤 객관적인 원칙에서 출발되지 않고 프래그머틱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는 「프래그머티즘의 진리관」이란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떤 관념이나 信條가 진리라고 할 때 그것이 진리라는 것은 실제생활에 있어 어떤 구체적인 차이점을 우리 생활에 가져오는가, 그 진리는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만일 그 신조가 허위일 때 얻어지는 경험과 진리일 때에 얻어지는 경험의 차이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경험적 견지에서 말할 때 진리의 현실적 가치는 무엇인가(프래그머티즘의 哲學,  219면 참조).

제임스에 의하면 어떤 사건이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진리는 우리 생활과 同化할 수 있고 실증할 수 있는 실제적인 구체성이다. 진리의 확실성은 사건이요 그 사건의 과정이다. 따라서 그가 말한 대로 진리는 어떤 관념에서 ‘우연히 생긴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내가 어떤 숲 속에서 길을 잃고 굶주리고 있을 때 하나의 오솔길을 발견하게 되면 나는 그 길을 따라가면서 그 길 끝에는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퍽 유용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유용한 생각이 되는 것은 그 길을 쫓아가면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퍽 유용한 이유는 그 대상인 집이 유용한 내용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진리의 실제적 가치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미치는 실제적인 중요성과 유용성에 달려있다. 그런데 때로는 그 대상이 나에게 어떤 실증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유용성이 잠정적으로 없을 수도 있고 한편 어떤 시기에 가서는,  즉 다른 상황에 가서는 나에게 중요성을 띠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제임스는 소위 ‘餘分의 진리’, ‘어떤 狀況에 있어서의 진리’라는 용어를 쓰면서 이런 것들을 우리 기억에 간직하여 두면 그것이 참고서가 되어 쓰여지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분의 진리'가 어떤 긴급한 사태에 적절한 실제성을 갖게 될 때마다 그것은 그 貯藏所로부터 나와서 현신세계에서 활동하게 되어 그 진리는 실제적인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는 그의 진리관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요약한다. 즉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有用하다.”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에 진리이다.”

제임스는 인식에 있어서 思考에 의한 先天性을 부인하고 경험을 인식의 근원으로 생각했고 그가 내세우는 眞理性도 구체적인것, 충분히 실제적으로 현실성이 있는 내용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데 얼마만큼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는가에 따라 진리가 될 수 있고 허위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원인과 원칙에 앞서 실생활에 유용하고 편리하면 그 대상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이와 같은 제임스의 프래그머틱한 진리 이론은 실제 우리 사회생활에 많은 문제점을 던져주고 있다.

5. 프래그머티즘의 문제점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제임스에 의하면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인간의 성공, 사회의 번영 또는 개인생활의 편의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윤리적인 면에서 고찰한다면 그 행동의 동기는 묻지 않고 결과만을 보고서 선악을 판단하는 이론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사상이 오늘날 미국을 위시해서 전세계에 던지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점을 생각해 보자.

프래그머티즘의 사상 즉 그것이 우리 생활에 얼마만큼이나 유용한가, 다시 말해서 우리 생활에 얼마만큼이나 편리를 제공하느냐 하는 생활이론은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역력히 볼 수 있다. 예컨데 뉴우요오크市에 있는 아파트들을 유심히 보라. 건축상으로 보아 그 외부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겉으로는 공장처럼 보이는 것이 그들의 주택들이다. 그러나 그 집들의 내부는 대단히 편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공장이든 사무실이든 상관치 않고 다만 살기에 얼마만큼 편리한가가 그들의 생활원칙이라면 이게 곧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이 아닐까? 그리고 미국의 여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쇼오트 팬츠가 판을 친다. 어떤 예의나 예모는 따질 필요가 없다. 더위를 벗어버리고 시원하게만 살면 된다는 생활원칙, 복잡하게 만들어진 음식보다도 핱독이나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면 된다는 식탁이론 등이 모두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이다.

더 나아가서는 생활의 편리를 최대로 구사하는 그들인지라 갖가지 종류의 기계제품을 필요로 한다. 자동차가 있어야 하고 세탁기가 있어야 한다. 자동차가 한 대밖에 없을 때 남편이 출근하면서 차를 타고 나가버리면 가정에 있는 부인에게 큰 불편이 있으니 또 하나 부인용 자동차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자동차를 한대 더 굴리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러니 편리한 생활을 위해서는 돈이 문제의 초점이 된다. 따라서 프래그머티즘의 사상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와같이 자본의 위력이 커짐에 따라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은 월수입이 얼마가 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결국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고 인간은 금력의 노예로 전락되어 버린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방법적인 가치만을 가지고 있는 황금이 둔갑되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다. 이와같이 극단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는 소외를 당한다. 선 과 악의 판단기준과 정의와 불의의 판단기준이 황금이 되어버린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상은 ‘유물론 사상’의 모체가 되어버린다. 물질이 결과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유용성과 편리를 제공하면 그 가치평가는 더 높은 진리의 차원으로 상승되는 것이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유물론은 모든 사실들을 물질의 운동 과정에서 이해하려고 하며 모든 가치기준도 물질에 둔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요소,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뒷자리로 물러선다. 소위 영혼이니 정신이니 또는 종교니 하는 신앙문제는 아랑곳없는 대상이 되어 버린다. 성당에 가서 기도하기보다는 3불짜리 시간 노동이 더 유익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종교나 신앙생활과의 거리를 더욱 멀게 하는 유물론사상은 결국 그 언저리에서 無神論사상을 싹트게 한다.

결국 원칙적으로 프래그머티즘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자본주의를 낳고 자본주의는 유물론을 낳고 유물론은 무신론을 낳고 무신론은 死神神學을 낳고 사신신학은????

인간이 물질을 선용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이다. 물질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편리하게 사는 것도 좋은 일이며 하느님의 뜻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적과 방법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나 좋은 선물을 받고서는 그 선물에 도취되어 그만 그 선물을 주신 분을 잊어버리는 격이 아닐까?

프래그머티즘은 우리 교회에도 활개를 치고 있다. 우리 영성생활에도 ㅡ소위 현대사조에 의한 교회의 쇄신이니, 영성생활의 쇄신이니 하면서 프래그머티즘의 바람을 타고 있다.

단적인 표현으로 현대영성 전문 비판가들의 소리! "십자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 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