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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間發展과 그리스도敎 救援
1978년 3월호 (제 56호)
- 國際신학委員會 선언문 - 序 文 ㅅ間發展과 그리스도敎 救援과의 상관관게에 대한 문제는 가는 곳마다 ...

?皇廳正平委와 各國 正平委와의 關係
1978년 3월호 (제 56호)
가. 역사적 개관 1. I967년 1월 6일자 자의교서「그리스도의 가톨릭 KCatholicam Christi Ecclesiam) 로 ...

회칙 [민족들의 발전]과 신 국제질서
1978년 3월호 (제 56호)
1. I967년에「민족들의 발전촉진에 관한 ?칙 jXPopulorum Progressio, 이하 ‘민족들의 발전,으로 약칭) ...

정의와 평화 ㅡ교황청 正平委의 조직 확정에 관한 자의교서一
1978년 3월호 (제 56호)
‘정의와 평화,(Justitiam et Pacem)-U- 구현하고 인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복 음의 빛과 누룩을 가지고 ...

Α. 돈대인 箸·張益 譯 세상에 열린 신앙
1978년 3월호 (제 56호)
저자는 1933년 이래 줄곧 벨기에 루뱅 대학교에서 칠학을 가르치는 분으로 .여기 소개하는 책을 1964년 프...

十字架의 聖 요한의 ㅅ間神化
1978년 3월호 (제 56호)
I. 서 언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년)은 시성(I726년)된 지 200년 후에「인간 의 하느님 께 로의 변화...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VII. 신앙의 구원의미 -
1978년 3월호 (제 56호)
1. 現世的이며 또는 超世的 救援 信仰의 現狀況은 소위 限界問題들 만이 논의되고있지 않다는 것으로 특 ...

안동 교구 사목 실태
1978년 3월호 (제 56호)
I.머리 말 사목신학의 不在風士.에서 뾰족한사 목 방안이 있겠는가싶고, 디더구나 타교구에 도움될 애기를 ...

교회와 세계 - 바티칸공의회 이후 신학계의 주류를 이룩한 다섯가지 사조 -
1978년 3월호 (제 56호)
얼마 전에 醫-大에 다니는 제자를 한 사람 만났다. 무심결에 요즘은 필 배 웠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걸작...

선조들의 전례 음악
1978년 3월호 (제 56호)
1. 序論 인간은 地上에 존재하면서부터 자 기의 감정과 의사를 몸짓, 말, 글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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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단 1978년 3월호 (제 56호)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VII. 신앙의 구원의미 -

W. 카스퍼

1. 現世的이며 또는 超世的 救援

信仰의 現狀況은 소위 限界問題들 만이 논의되고있지 않다는 것으로 특 징지어지고 있다. 이를태면 신학과 자 연과학, 심리학과 사회학 사이에 접 하여 있는 문제들만이 관건이 되고 있 지 않다. 물론 이 限界問?뮴은 여전 히 自明하게 존속하며 여러 점에서 더 욱 절 실 하게 되 었 다. 하지 만 신 학적 문제성은 본격적으로 더 깊이 놓여있 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신앙의 한계뿐 만아니라중심이 문제가되고있디-. 바로 恩寵과 救援 그리고 救賠과 같 은 중심적이고 기초적인 幅音ft布 단어들이 오늘날 수다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생활한 인간체험을 위해서 는 말할 가치가 없는, 공허한 형식들 이며 과거의 宗敎用語의 無用한 잔해 들이 될 뿐이디-. 이들은 많은 사람들 에게 있어서 인간이 아직 완전한 현 己責任을 발견하지 못하였던 시대의 표현으로 통하고 있다. 이들은 왕왕 우리와 우리 世界의 책임을 超自然的 神 (Deus ex machina) 에게 미루는 데 기여하였다. 때문에 이들은근세의 理 念批判家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悲 慘’에 관한 카알 (J. ΚΛ1) 의 팜플렛 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非救援 性과 非ㅅ問性에 대한 주된 책 임을 지 닌다.⑴그러나 우리에게 제기된 문 제 해결을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는 데에서 출발하면 救牆 單語를 어 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救贈 信仰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동시에 두 개의 세계에서 생활하도록 강요되지 않는가? 合理性과 計算可能性과 製 造可能性으로· 지향된 사회에서 어디 에 은총윤 위한 자리가 있는가? 이 버한 초자연주의가 오늘도 여전히 성 취된 수 있는가?

이것은 진문·Ιι-이지 해답들이 아니 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항여야 하는·- 질문들이다. 이듈은 그리스도信仰을, 非可視的이고 彼Mi 的 ??在들을 단순히 眞實로 看傲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신앙이라는 자 기자신의 주장에 매여 있게 한다·® 그리스도신앙은 ?構的 생각이나 단 순한 세계관이나 世界解釋이려고 하 지는 않는다. 宜布의 말씀이 성서의 미 속에서 순전히 現存在 解釋이나 단 순한 안내인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 은 살아있고(사도 7,38; 히브 m; 1 베 드 1,23) 활동적인(시편 147,15ff; 히브 4, 12) 말씀이다. 때문에 신앙은 자신을 인간과 그의 세계의 구원의 조건이자-, 시작으로 이해한다. "곧 마음으로 믿 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 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 게”(로마 10,10; 사도 16,31 참조)된다. 그 렇다. 信仰은 더 나아가 하느님의 正 義가 오로지 신앙 속에서만 인간에게 분배된다고 주창한다(로마 1,1없; 3,22 참조;). 이 때문에 트리덴틴.공의회는 신앙이 義化,즉 인간의 올바른 존재 의 시작이요 기반이며 根幹이라고 말 한다.® 신앙은 이 救贈論的이고 인 간의 구원에 연관된 展望 속에서만 적 절하게 Η 語化될 수 있다.

하지만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 가 救續에 대해서 말할 때 무엇을 생 각하는가? 성서가 은총과 구원에 대 해 말할 때, 구원의 ?在를 모든 다 른 방향으로부터 묘사하기 위해서 생 명,빛,평화,자유, 화해, 義化, 치 료, 구속,왕국, 사랑,희망, 기쁨 등 의 개념과 상징을 많이 사용하고 있 다. 요컨대 성서는 救援의 實在를 하 나의 유일한 추상적 개념이나 하나의

?義的 矩義에 담으려고 결코 시도하 지 않는다. 성서는 오히려 現存在의 無救援性이 顯示되게 되는 아주 구체 적체험과 상황,즉 疾病, 죽음의 위 험,포로생활,노예신분, 전쟁, 불목 등에서 출발한다. 이들 속에서 인간 은 자기자신에게 온전히 속하지 않고 자신과 자기 세계로부티 疏外되어 있 으며, 그 자신이 主ㅅ이 될 수 없는 세력과 폭력에 賣渡되어 있음을 체험 하고 있다. 이 困境 속에서 그는 하 느님께로 향하는데 이는 하느님으로 부터 분리된 어떤 은총, 은혜가 아니 라 하느님 자신이 인간의 구원인 때 문이다(이사 22,2; 35,4 둥 참조). 때문 에 지칭된 개념과 상징들에게서 특징 적인 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순전히 내적이고 인격적 차원만을 요청하지 않고,하나요 전체적 인간을 뜻하며 그의 身體的이고 公共的 次元을 함께 포함한다. 이를테면 本性으로부터 순 수하게 분리된 超本性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現存在를 부 자유스럽게 만드는 辣外의 극복과 진 정하고 충만한 현존재의 실재가 문제 되고 있다.⑷ 문제는 자기 세계 안에 서 그리고 세계와 함께 인간의 구원 임과 全體됨이다.

이 포괄적 인 救援槪念은 상이 한 精 神史的이고 神學史的 발전에 입각하 여 특히 近代神學에서 망실되어 버렸 다. 근대과학이 事物의 자연적 원인 을 포착하기 위하여 점점 더 잠입하 여 들어오면 들어율수록 神學과 福音 宣布는 더 욱 더 공격 당할 염 려 없는 초 자연 구역으로 퇴각하였다. 17세기에 리팔다 (Ripalda) 는 超本性的 有 (ens supernaturale) 에 관해 말하기까지 하 였으며 19세기에 쉐벤 (J.M. Scheeben) 은 그때까지 단독으로 사용되던 형용 사 ‘超本性的’에서부터 명사 ‘超本性, 올 만들어냈다. 新스콜라神^은 본성 과 초본성의 관계를 단지 부정적으로 非矛盾性의 관계로 규정하였디·. 두가 지 사이의 내적인 W果關係와 상호연 관성이 망실되었다. 이렇게 하여 많 이 논의된 본성과 초본성의 二®體係 (Zwei-Stockwerk-Schema) 에 이 르게 되 었고 이것은 금세기에 제 2차 세계대 전 이후에야 비로소 新神)f (thSologie nouvelle?Η. de Lubac; Η. Bouillard 등)의 자극으로 말미암아 극복될 수 있었다· ®

本性과 恩寵의 이러한 外在:k義 (Extrinsezismus) 는 성서의 甚本陳述 과 모순된다. 密書正經은 2세기 마 르치온 (Marcion) 과의 쟁론 속에서 징 립되었다. 마르치온음 구약을 신약으 로부터, 創造神을 救?神으로부티 분 리하고자 하였다. 교회가 이에 대해 서 신약과 나란히 구약도 S하正經에 채택하였을 띠ㅣ, 그 이면에는 창조와 구속이 함께 속한다는 펴象의 견정이 자리잡고 있었디-. 그뿐 아니라 창조 와 구속의 단일성은 성서의 正經的 W 理이고 성서주석의 해석학적 원리라 고·까지 말할 수 있다. 구원진서가 창 조질서와 관련되어있지 않다면 救賠

의 보편성은 부인될 것이다. 때문에 제 1 차 바티칸 공의회는 자연주의와 합리주의뿐만 아니라, 초자연주의와 신앙주의도 역시 배척하였고 ‘自然的, 이고 ‘超!3然的,啓示의 拉列連結을 계시의 기본적인 解釋原理로 선언하 였다.(6) 창조와 구속 사이의 연관성 은 古代敎會에서 한번 더 두번째 ■경 우에 되풀이하여 문제가되었다. 초 세기의 그리스도론적 쟁론 속에서는 예수의 참된 神性만이 문제가 된 것 이 아니었다. 훨씬 더 위험했었던 것 은 2,3세 기 의 예 수의 참된 인 간성 을 부인했던 異端들이었디교회가 假現 說 (Doketismus) 와 靈知主義 (Gnostizis-mus) 와의 쟁론 속에서 예수의 진실하 고 온전한 인간성을 옹호하였을 때, 교회는 우리가 구원을 인간적 形態 안 에서 그리고 인간적 ?式으로 만나고,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원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것으로써 교회는 하느님이 인간의 하느님이고 인간을 인간적으로 만난 디-고 말하고자 하였다.

당시의 爭論들은 오늘날 우리들에 게 단순한 ?史 (Historie) 가 아니다. 일방적인 水平主義,즉 그리스도적인 것의 共存ㅅRI]性 (Mitmenschlichkeit) 과 社舍批判에로의 還元에 반대하여 현재 新超自然主義와 같은 것이 위협 하고 있다. 구원이 下部로부터가 아 니라 上部로부터 온다는 구실을 내세 워 사람들은 이 러 한 潮流들을 막고 동 시에 교회의 敎職階級的 구조를 옹호할 수 있다고 믿는다. 超自然主義가 위치를· 확고히 한다면, 교회는 사화 와 나란히 通交없이 생존하는 宗派 (Sekte) 가 될 것이다, 교회의 救援福 音은 理念的 上層構造와 無力한 위안 으로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예수 의 진정하고 완전한 ㅅ間的 本性에 관 한 古代?會의, 그리스도論的 결정들 올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하부로부 터의 신학에 副應하지 않는 상부로부 터의 신학이란 없다. 無世界的인 神 과 구원관은 無神的이고 無救援的인 세계관으로 이끌 것임에 틀림 없다. 이것은우리로부터 율바로이해된 ‘世 上的’(현세적) 信仰註釋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이 세계가 바로 올바른 信 仰觀의 기준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으 나 세계는 모든 그리스도 救援理解의 聯?點이요, 目標地點이라는 것을 뜻 하고 있다.

2. 政治神學의 突進

그리스도적으로 이해된 救援을 세 계 의 문맥 안에 서 새 로 숙고해 야 하 는 과제를 현재 특히 政洽神學(Politi-sche Theologie) 이 제기하였다. W 이 神學의 趣旨는 미묘하고 오해될 만한 용어 '政治神學’이 추측케 하는 것보 다훨씬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하 고 훨씬 더 포괄적이다. 정치신학은 ‘革命의 神學’과 동일시될 수 없다. 이 신학은 政治化하는 신학이려고도 하지 않으며, 오랜 右向의 統合主義를 左便으로 회복시키려고도 하지 않는 다. 마침내 이 신학은 政治倫理가 아 니며, 政治社會的 綱領을 전개하리 하지 않는다. 그보다 이 신학에서는 모든 신학적 陳述들을 이들의 사회적 중요성에 비추어 숙고하려는 것이 문 제되고 있다. 왜냐하면 社會는 정치 신학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包括的인 地平이다. 정치는 우리가 近代의 前 提 아래 만나게 되는 바와 같이 ??在 의 總體이다. 신앙을 세상적이고 실 제에 가깝게 매개한다는 것은, 이에 의하면 신앙을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표현하고, 사람들이 社會的 Κ在를 그 것의 구원을위한도움이 되도록 신앙 을 言語化하고 ?踐으로 옮기는 것을 뜻한다. 이 생각에 입각하여 정치신 학은 자신을 神學의 한 枝葉的 영역 으로가 아니 라 神學的 思考의 포괄적 인 새로운 基點으로 이해하고 있다.

政治神學의 신학적 기점은 현재 많 은 토의의 중심이 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현재 신학적 論戰狀態에 있다. 때문에 신앙의 救援意味性의 물음을 취급할 때에 이 입장을 철저하게 검 토하여야 한다. 그 때문에 우선 정치 신학이 스스로 제출하는 論證들을 들 기로 하자. 첫째 논증으로, 통상적으 로 개별적 그리스도신자와 교회가 정 치적 立場表明과 활동에 앞서 이미 항 상 사회적이고 ■경치적 關聯領域에 위 치한다는 것이 제기된다. 교회가 정 치적 입장을택하기 전에 교회는 사회 적 제도로서 이미 하나의 정치적 입장을 소유하고 있디-. 이를테면 교회 가배후에서 정치적 理念으로지위지 지 않으려면 교회는 자신의 모든 陳 述의 정치적 함축성에대한 비판적思 惟를 지나칠 수 없다. 정치적 投혔했 權도 특정한 狀況하에서는 하나의 立 場表明일 수 있으며 旣存하는 不;!®關 係를 위 한 은폐 수단으로 기 여 할 수 있 다. 정치적인 것의 차원은 요컨대 교 회로서도 뛰어넘을 수 없디이.것움 진실로 간주하지 않으려는 것은 近? 的이거나 아니면 실제로 존속하는 權 力과 支配權立場을 은폐하는데 ■隨從 하는 것이디-. 요컨대 근본적으로 非 政治的 神學은 없으며, 일상사로부 터의 退却만이 신학의 후問件의 기?-인 것은 아니다.

두번째 論證은 근본적으로 보다 깊 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向하여 신앙을표현해야하는≪在가 어떤 類 型의 것인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층발 한다. 이 ?在는 오늘날 필경 所與된 β然이니: 우리를 포괄하는 우주가 아 .니라, 인간의 作fi과 文明 그리고 機 械技術을 통하여 함께 형성된 실재이 다. 이 실재가· 존속하는데 인간적 η 車가 本質構成的으로 함께 개입한다. 문제되는 것은 역사직으로 매개된 I'c 在이다.신앙을실재에 가깝게 선포 한다는 것은 오늘날 ?仰올 社싼的으 로 의미깊게 표현하는 것음 뜻한다. 하지만 이것은 神學이 理論"ft踐ㅡ 關係를 새로 숙고할때에만 가능하다. 신앙은 실재에 도달하기 위하어 실천

적으로 되어야 한다. 신앙은 κ踐 속 에서 그리고 실천을통해서 비로소본 연의 위치로 돌아온디.. 전체적으로 政 ■冶神은 오늘날 지배적인 ?在關係 에 값싸게의존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신학은 오히리 그것에 의해서 성서 사상과 일치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眞 押.는 행하여진디■(요한 3,21 참조)는 것 이 성서적 의미에서의 진리에 속한다. 이 진리는 게인적 양심 앞에서뿐만아 니라 공공연한 法作爭論 속에서 책임 지 어 지 야 할 것 이 디·. 이 렇 게 하는 것 만이 예수의 하느님나라 福音의 근원 적 의미에 부응한다. 바오로에게 구 약성시적이고· 공관복음적 복음의 聖· ≪化를 비난한다면ㅡ이것이 자주 일 어나돗이 ㅡ바오로를 오해하는 것이 될 것이디-. 하나의 특정한 정치적 백 성의 b壞으로부터의 그리스도 福音 의 分離는 바오로에게 있어서 개인 직인 ft心에로의 뫼각이 아니라, ?? 猫的 ㅠ?, 만백성의 合?을 결과로 가진디、신앙의 사회직 ?能에 대한 물읍은 요킨대 신학적으로 올바로 제 기되어 있다. ‘

우리는 政治神ff의 趣旨를 진지하 게 반아들이고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물구하고 여기에 고착된 테 두리에 만족해서는 안될 것이디-.. 이 테두리는 여러가지 관점에서 지나치 게 협소하고, 결과적으로는 政治神學 의 본래 대표자-u-이 원하지 않는다 하더 라도 그리 스도의 복음을 단축하 는 데로 이끌 것이다. 社合的 次元에서만으로는 분명 신학적으로 적절하 게 화제 가 될 수 없는 標題語들인 祈 n와 醒事만을 지적해볼 것이다. 이 로써 祈禱와 欺市가 社會的 차원을 가 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리-, 이 次元에서 용해되지 않고 그러기에 그 리스도신앙의 救援意味를 파악하기 위 하여 보다 포괄적인 신학적 기점이 필 요하다고 말하고자 한다. 이 命題를 위해서 우선 보다 철학적 논증과 보 다신학적 논증을예거하기로하자.

ㅅ間의 自由가 헤겔 (Hegel) 의의미 에서 구체적 자유라는 점에서 철학적 으로 일단 政治神學이 옳다고 시인해 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囚ㅅ의 생 각이 자유롭고,자기 監房 어 느 구석 에서나 앉고 싶은 곳을 선택할 수 있 기 때문에, Ηㅅ이 여전히 가지고 있 는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에 대해 순전 히 추상적으로 말하는 것으로는.족하 지 않다. 이렇게 추상적으로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한 인간의 구체적 不自由를 모욕하는 것일 수 있다. 그 래서 구체적이고 인간적으로 충만한 樣式으로 자유는 共同相互間에서만 가 능하다. 때문에 구체적 0由는 社會 的 前提를 가지고 있디·. 구체적 자유 는 다른 자유에 의하여 억압되지 않 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 유는 사람들이 他ㅅ의 자유를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자유는 자유의 질 서를 전제로 한다. 이를테면 자유는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테두리를 필요 로 하고 있다. 法律과 制度는 자유의

반대나 일차적으로 자유의 제한으로 가 아니라 자유를 가능케 하는 것이 며,자유의 전제로 이해되어야 할 것 이다. 그러므로순전히 개인주의적 ? 在觀은 정치신학에 의해 정당하게 거 부되고 있다.

바로 이 논증은 政治神學의 대표자 들한테서 지나치게 짧게 나타나는 局 面을 보여주고 있다. 社會가 비로소 자유를 산출해내지 않고 오히려 자유 를 자기에게 不可占有的으로 所與된 것으로전제하며, 이 불가점유적 자유 를 무조건 보호하는데 자신의 의무를 인정하고 있다. ㅅ格의 자유는 사회 나 제도의 恩赦에 의하여 존재하지 않 고 이들에 비하여 言語의 원천적 의 미에서 上位에 있다. 社會的인 것의 차원을 상회하는 인격의 剩餘와 ?有 僚値가 있다는 것은 全그리스도ㅡ西 方的 傳承의 ‘本質的 要素,(essentia)) 이다· 우리는 이 견해를 오늘날 理論 과 ?踐에서 온갖 힘을 다하여 방어 할 온갖 근거를 가지고 있디-. 그러므 로 私的이고 內密하고 ㅅ格的인 것의 경당한 空間이 있다. 이것은 인격과 사회 사이에,인격적이고公共的인 것 의 영역 사이에 지속하여 Ik揭될 수 없는 緊張狀態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 다. 두가지는 상호간에 서로를 필요 로 한다. 하지만 두가지는 서로 상대 방 속으로 지양될 수 없다. 결과적으 로 사회는 實在의 가장 포괄적 地平 이 아니다.

이 철학적 논중에서 신학적 觀點이 결과로 생겨난다. 방금 個別한의 인 격과 사회적 실재 사이에 지양될 수 없는 긴장상태를 명시하였다· 이것은 Α間들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사회직 실재 사이에 순전히 心理^的이고 社 會學的으로 한정되지 않고, 그때문 에 사회적 노력을 통해서만으로는 지 양될 수 없는 疏外들이 있음윤 뜻한 다. 自然이나 치료불능인 疾稱으로 말 미암아_단지 두가지 예만 뮴자면一 야기된 인간적 痛은 社함政沿的으 로 폐기케 되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相勉性과 孤獨感 역시 마찬가 지로 정치적으로 제거될 수 없디ㅅ 間實在와 함께 본질 구성적으로 조성 된 소외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有 限性과 함께 주어졌으며, 그 때문에 인간에 의하여 지양될 수도 없다. 반 대로, 全體 자체의 연출을 맡고 전체 임과 구원임을 스스로 성취코자 하는 유한한 인간의 여하한 시도는 體.1·: 義的이 되고 無法行화로 이끌 것임에 틀림없다. 구원을 占有하려 하고 스 스로 제조하려 하는 것은 최악의 많 政의 無救援性으로 휘몰고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救援은 개인이나 사회로부터 벗어나 있는 外形體일 것 임에 틀림없다. 전체 Κ體를 관통하 는 균열의 매개와和解는전체에게 폭 력을 가하지 않으면서 천체를 포괄하 며 일치시키는 한 形體 (Grosse) 로부 터만 나올 수 있다. 한데 이것은 ? 對者의 本質規定이다. 절대적인 것은 개별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 이것
을 자신의 獨디性으로 자유롭게 한다.

약간 추상적인 이 考察樣式은 조금 더 구체적인 관점을통해서 補完될 수 있다。인류는 방금 제시된 긴장상태 와 兩極性을 사실·상 견디어내지 않았 다. 이로 말미암아 Κ在를 더 이상 있 는 그내로 나타나게 하지 않는 暴力 과 不.逢 그리고 逾構에 이르게 되었 다. 보다 개선되고 보다 정의로운 질 서를 이룩하려는 인간의 모든 企圖는 스스로 재차 불의와 허위의 條件下에 서며 스스로 폭력을 손에 잡아야 한 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새로운 不和와 새로운 不義의 싹〔胚〕을 새로 운 질서 안으로 가지고 간다. 暴力과 bi많:ij의 악순환, 不義와 復®의 악 순환으로부리 우리는분명코 스스로 의 힘으로는 헤어나을 수 없다. 救援 의 물음이 순전히 양적으로 항상 새 롭고 항상 강화된 노력읕 통해서 해 결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인류는 자신의 종교와 사회적 유토피아 속에 서 이미 항상 萬物의 근본적인 變遷 을 꿈꾸었고 抽出해낼 수 없는 새로 운 시작을 희망해왔다. 바로 사외를 위하여 인간은 그의 구원희망 속에서 사회적인 것의 차원을 超克한다. 여 기가 구속과 恩寵에 대하여 책임있고 뜻있게 말할 수 있고 그리고 인간을 위 해 서 말해 야만 하는 場이 다.

結論으로서 단정할수 있다: 인간 온 구원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 고 그의 狀況이 그가 이를 의식하거 나 않거나 상관없이 救援必要性이다.問存在가 무한한 것을 향하여 자신 율 항상 초극하면서도 그에게는 자신 의 존재의 의의가 빗?니- 있고 이러 한 한에서 초자연적이라는 ^은 ㅅ間 存在의 逆說이다. 이치럼 인간은 초 자연적인 것에 대한 자연직인 ??이 다. 우리가 이 次元에 이를때에만인 간의 실재에 도달하였으며, 1現世的 으로’ 하느님과 그의 은총에 관하여 이 야기 하였 다. 여 하한 다른 경 우에 우 리는 신학적으로 행패를 恣行하였다.

8. 사랑에의 自由로서 恩寵

政治神學과의 논쟁으로부터 우리에 게는 救援꾀- 救?에 대해서 말할 때 뜻하는 바 최초의, 물론 아직 대단히 형식적인 前槪念이 결과로서 생겨났 디구원은 마치 우리 인간존재에 부 가적 으로 첨 가되 는 의 미 에 서 超 0 然的 形體인 것이 아니다. 구원은 우리 자 유의 자유이며, 자유의 자기자신에로 의 해방이며 救陋이다구원은자유 가 구체적으로 자신의 想義Η標에 도 달하는 가능성의 條?牛이다. 구원은우 리에게 새로운 역사를 가능케 하는 새 로운 창조이다. 처음에는 놀라운이 陳述들을 위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증인으로 쉽게 내세울 수 있다. 그에 게서 超自然的 秩序는 근세의 스콜라 神學에게서와 같이 거의 독자적인 자 연적 질서 위에서의 領域이 아직 아 니었다. 그에게서 초자연적 恩寵은 인 간이 그의 자유 안에 부착된 ㅣ.S·≫의
ΕΙ標를 구체적으로 도달할수 있게 하 는 도구이다이 진술들은 생각되 는 것처럼 아주 추상적이지는 않디-. 이것은 解放의 근대적 관념과 구속의 그리 스도福音 사이 에 아무 근본직 인 相反點이 존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전혀 말하지 않고 있다. 복읍의 소식 은 ‘自由의 召命,(Kasemann) 이다. 救?의 救援?在는 자유의 구체적 실 재 이 다.

자유는 물론 애매하고 많이 남용된 말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바오로 . 사도 이 래 단지 드물게 만 자유에 대 해 거론되었고 사람들이 자유·!- 지나 치게 熱狂·主義者들과 分派活動者들에 게만 맡겼던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교회는 늘 자유 앞에서 공포를 가졌었고 그 때문에 지·신에 맡겨진 영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너무 즙거 자유를 극소량으로 쪼개서 자신에게 필요하고 바람직·하게 나타나는 곳에 서 분배하기 위하여 자유의 감독을 ’it 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宗敎故判β 은 예 수에 게 이 의 를 제 기 할 때, ■실 제 로 단연 지당하다: "우리는 천오백년 간 이 자유와 더불어 고생하였디하 지만이것은오늘날극복되었다. 그뿐 아니 라 궁극적 으로!” 신학적 으로 이 '體驗의 智慧’는 물론 알로샤 카라마 조프에 의해 폭로되었다 : "그는 神음 믿지 않는다. 보라, 이것이 그의 전 비 밀이 다”.(10) 신·믿고,이것을 위 해 자유가 實在 ^에서의 ?4終的인 것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요 동일하디-.
그러나自由란무엇인가? 자유가 순전한 放恣와는 구별된다고 이미 헤 겔이 강조하였디자신이 원하는 것 만을 하는 사람은 자유스럽지 않고 오히려 부자유하다. 그는 자기자신의 恣意에 내맡겨져 노예화되어 있다. 신약성경도 여기서 출발한다.≪υ 그 러 나 政治哲^과 政治神學보다 한 次 元 더 깊은 곳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구체적 空間은 오로지 사회적으로 생산될. 수 없다. 모든 內外的 强迫으로부터 자 유롬고,지-신의 現存在를 자유롭게, 占有할 수 있는 사람까지도 신약성경 에 따르면, 자유로우려면 아직 거리 가 멀다. 이 사람이 부자유스러운 것 은 그가 충분한 정도로 자기·δ· 점유 하지 않기 때문에기- 아니라, 즙겨 점 유하려 하머 자신과자신의 실재의 간 독을 담당할 수 있고 담당해야 한다 고 믿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恐怖와 凝慮가 표현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그 안에서 자기자신에의 束縛과 崩? 性이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부자유 는 罪의 본질이다· 죄는 신학적으로 첫 기점에서 윤리직 현상이 아니다. 죄는 인간의 자기고집, 旣存하고 외 견상 안전한 것에로의 沈稱, 他者와 未來의 예상할 수 없는 새로움을 위 해 자유로울 수 없는 無能性이디-. 죄 의 자기자신을 고립시키는 이기주의 와 我執的이고 非和解的이며 자기자 신을 절대화하는 分立?t義 속에서의 죄에게는 公存世界 (Mitwelt) 와 周圍

®Jj| (Umwelt) 이 위협으로서 이질적 이고 소외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것임 에 틀림없다· 이 세계는 죄에게는 더 이상 가능화와 空問이 아니라단지 現

在를 위한 투쟁,권력과 영예를 위 한 투쟁에서 지속적으로 거스려 부딪 쳐야 하는 自己fl 由의 한계일 뿐이다. 죄는 사랑의 不能性이다. 때문에 그 것은 인간의 세계 안에서 그리고 그 의 세계와 더불은 인간의 구원과 전 체임의 반대이다.

자유는 他?由와의 遭遇 속에서 불 붙는다. 자유는 다른 자유를 통해서 만 가능하다. 인간의 구원은 그· 때문 에 인간이 한 자유로운 인간올 만나 는가에 달려있다. 여기에 예수 그리 스도와의 遞遇의 救援意味가 놓여있 다. 그 휸로 죄 없이 (요한 8,46; 히브 4, IS) 참된 자유인이다. 그는 우월하게 선조들의 傅承을무시하고(마르 7,1-13) 권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가르친 다(마르 I’22.27). 전대미문의 自由로 써 그는 宗敎의 ?化된 질서를 고수 하지 않고 타락한 자들과 사회적이고 종교적으로 경멸받는 자들을 지향하 고 그러면서도 다시 구체적 질서에 예속하기에 충분하게 자유롭다. 인간 의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罪過 와 刑35, 功^와 補償의 잔혹한 체계 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예수가 포도밭 일꾼-&에 관한比?속에서 집 주인으로 하여금 마지막 시간에 일하 러 온 자들에게 똑같이 많은 임금을 지불케 하고 하루종일 무더위를 견다어냈던 불평하는 자들의 反論에 대해 서,"내가 선하기 때문에 그대 눈에 거 슬리는가’,(마대20,115)고 대답토록 할 때에, 그는 완고한 法秩序에 대항하 고 그대신에 恩寵의 法을 설정한다. 완고한 질 서 가 최 종적 인 것 이 아니 라 은총의 우월한 자유가 최종적인 것이 다. 이 복음과 이에 상응하는 행동은 예수를 큰 秩序S亂者로 만들었다. 질서의 監督者들이 그를 가능한한 조 속하게 제거하고자 노력했던 것보다 더 자명한 것은 없었다. 질서 곧 法 律이 그것을 요청하였다. 십자가에 서의 예수의 죽음은질서의 최후의 飢 fe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의 보 다 큰 승리였다. 여기서 자유는 실제 로 자유롭게 된다. 자유는 자기를 절 대적으로 無名的인 것 안으로 해방시 키 고, 우리 가 인 간적 으로는 未來를 부 인하는 자들·의 미래를 위한 13己投身 속에서 죽는다. 여기서 인간의 자기 자신과 안전케 하는 秩序에로의 沈溺 의 속박이 깨뜨려졌다. 여기서 자유 로운 現存在를 위한 새로운 可能性이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난 바는 전대미문적으로 새롭기에 모든 시대의 神學者들이 이것을 그들의 뜻 대로 사용하는 범주로서 포착하려고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것은 이미 신 약성서 저자들한테서 증명힐- 수 있 다.aa 이들은 예수와 그의 십자가의 救接意味를 해석하기 위하여 누차 전 통적인 儀牲,補贈,補傲,代贈의

象晉을 이끌어들였다. 하지만 이들은 저 槪念들의 효味範圃를 돌파하고 이 개념들이 본래 뜻하는 實在의 解釋物 로 취급하도록 강요되었다. 이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진 救援을 神化 (VergiHtlichmig) 를 통해 죽음에 치해 진 상태를 극복하는 데에서 보는 희 람교회들의 표상에서나, 救≪問題를 하느님과 인간을 포괄하는 거대한 法 佚序의 復舊로 이해하는 西方神화에 서 定住된 켄터배리의 안셀모 (Anselm von Canturbury) 의 代聽論 (Satisfak-tions Theorie) 에서 유사하다. 이 모든 解釋들은 유효하게 머무는 ㅅ間體驗 과 성서의 신포의 많은 요소들을 포 함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이들은 자기자신을 헌신하는 예수의 사랑 속 에서 구체적 형태를 취한 당신 자신 을 선사하는 하느님의 탁월한자유를 드러 내 는 陳述形式들로 해 석 되서 야 한 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근본적으보 이 解釋의 道稱을 걸어갔다. 그에 따 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捕捉하는 하느님의 사랑올 自由로서 捕捉하였 다."3〕이 順從的 사랑은 십자가에서 최종 완성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그 리스도의 救睛儀牲은 藥父께 대한 순 명과 인간을 위한 봉사 속에서 자기 생명을 자발적으로 獻身하는 데 있 다.(14) 이것과 함께 새로운 現存在의 可能性이 세계 안으로들어왔다. 이것 은 우리에게는 사랑에의 提案이며 挑 發이며 挑戰이다.우리가 이 새로 운 가능성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16) 信仰.과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가되며 이렇게 그·의 삶과 由에 참 여한다.그는 우리-f, 우리의 자 유를■봉사에로 해방시키고 우리.1· 사 랑에로 구속한다.

이것에 의해서 우리는 토마스 아퀴 나스에 접해서 구속과구원의 보다깊 은 이해에 마주치게 되었다 ‘客觀的 救瞭’은우리에게 ‘主觀的 救贈’속에 서 분배되는 救賠勢力의 일종의 兵器 庫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애매한 述 語를 保持하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 스도는 새로운 아담으로서 우리를 사 랑의 자유로부터 새로운 인간적인 ㅅ 間存在로 해방시켜주는 人格 속에서 의 객관적 구속이다. 그러므로 구원 의 구체적 ft在는 우리가 예수 그리 스도에 관한 福한의 소식음 신앙 속 에서 포착하고, 이것과 관계하며 이 것으로서 생활하는것이 그_본질이다. 이를테;면 신앙은 특정한 진리에 대한 동의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 신 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 의 사랑에로 향하는 데에서부터 가능 하게 되고,강화된 인간의 ?改이며≫ 하느님과 共存ㅅ問에로의 歸向이다. 하느님 과 인 간에 대 한 예 수의 가장 쩌 的活動 안에 관여되는 것으로서 신앙 은구원의 실재이다. 신앙은 자신과 그의 세계와의 인간의 和解이다. ?3仰 ■ㅅ이 하느님을 위하여 전적으로 개방 되어있는 가운데 그는 하느님의 全.能 에 참여하고 있다.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그러

나 신앙이 사람 속에서 작용하는 가 운데(갈라5,6),同旗 ㅅ間에게 이르는 ?il密物을동시에 극복한다. 이렇게 신 앙 속에서 실재가 다시 구원되고 완 전하게 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 대의 신앙이 그대를 낫게 하였다’’ (마르 10,52; 사도 16,31)가 들어맞는다.

4. 크리스찬의 諮膽

에수 그리스도의 ㅅ格과 그의 自由 속에 存在理解의 기본적인 새 성격이 시사되고 있다. 회람인들에게는 實體 와 f)立性 그리고 自體性(das An-sich ■Sein) 이 정上的이고 최종적인 것이 었으며, 이에 따라 그들에게는 모든 觀念들의 至 i:觀念이 자기자신 속에 시 순환하고 자기자신을 생각하고 自 足하는 無被動的 勤者로서, 모두로부 티 사랑을 반되 자신은 사랑치 않는 자였다면, 이제는 爲他存在 (Fiir-die-andern-Sein) 가 自由의 形態가 된다. 자기 자신에게 있음(Bei-sichㅡselber-Sein)이 아니라,他者에게 있음(Bei-ckn-andern-Sein) 이, 自己內存立 (In-sich-selber -Stehen) 이 아니라 自己超 克 (Sich-selber-tjberschreiten) 이 진정 한 자유이 다·· 자기자신을 전달하고 흘 러넘치는 사랑이 이제는最上이다. 사 랑은 하느님 본래의 定義이다(1 요한 4,8), 한데 사랑 속에서의 하느님의 탁 월한 Π 由는 바로 이 자유가 자기자신 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위해서 消耗하면서도 여기서 자신을 잃지 않는 데에 증명되고 있다. 無力이 權勢 의 형태로, 白痴性이 하느님의 咎a가 된다(1 고린 1,17-31).

여기서 그리스도敎의 혁명적 勢力 에 관하여 적합하게 말할 수 있다. 마지막 기초에까지 이르는 혁명이 문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혁명적 정치적인 계획.을 이끌어내는 사람은 그리스도敎를 旣存Η係의 이념으로 만 드는 사람과 같이 모든 價値轉倒의 이 기본원칙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두가지 모두 法律性이 다. 완고한 질 서와법률이 아니라, 또개인적이고· 공동적인 실적이나 진보가 아니라, 充溢하고 消耗하고 태평하고 근심없 는 것이 그리스도신앙의 특징이다. 만사를 증명 가능한실적과효과에 측 정하는 사회에 직면하여 볼 때 이것 은 어리석은 行爲이디-.니8) 그러나 계 속해서 새로운 실직을 통하여 자기와 他者 앞에서 자기를 새로이 확인시켜 야 하는 非ㅅ間的 强迫에서부터 자유 롭게 만드는 것이 바로 信仰이다. 이 것은 이로 말미암아靜的으로되지 않 고·, 내적으로 晉어지고 명왜하며 참으 로 인간적인 ㅅ問存在로 해방시킨다.

그리스도信仰은 fl由 속에서 효력.
을 나타낸다. 자유는 신약성경에 따 르면 종말론적 救援≫在의 先取的 표 징이다. 그러므로 諧講이 그리스도신 앙에 최초로속한다. 그리고우리가 오늘날 現 교회와 신학 속에서 널리 빠져있는 無諧讓性과 過敏性은 현 그 리스도界를 거스려 제기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반론 중의 하나이다. 유 모어〔諧?그는 물론 많은 ‘우스광스리 운 聖ㅅMi-의 무미건조한 거룩한 웃 음이거나 쓴웃음과는 다른 어떤 것이 다· 유모어는 인간을 은전히 인간적 이고 그리고 오직 인간적이게 하는행 동인데, 이것만이 하느님을 하느님이 게 하고 ?對品位와 認定의 다른 모든 주장올 가소로운 것으로 만들기 때문 이 다, "하늘에 사시 는 이 가 그들을 비 웃는도다”(시편 vt). 하느님과 인간 의 올바른 구변은 이를테면 죄의 동 물적 嚴肅性의 반대이다. 이 구법은 인간 구원의 근거가 된다. 이것이 유 모어를 가능케 한다, 유모어는 그리 스도신앙의 基本形態이 다. (다음호에 계속)



(1) J. Kahl, Das Elend des Christentums oder Pladoyer far eine Humanitat ohne Gott, Hamburg 1968; 이 점에 대해 Menschlich sein-mit oder ohm Gottf hg. v. J. M. Lohse, Stuttgart-Berlin-Koln-Mainz 1969 참조.
(2) F.X. Arnold, Dienst am Glauben (Uaters. zur Theol. der Seelsorge l), Freiburg ?. Br. 1948; K. Rahner, Wort und Eucharistie, in: Schriften zur Theo-logie IV, Einsiedeln-Koln I960, 313-350; H. Volk, Zur Theologie des Wor-tes GotteSy Mainz 1962; H. Sclilier; Wort Gottes, Wurzburg 1962; O. Semmel" roth, Wirkendes Wort, Frankfurt a.M. 1962; L. Scheffczyk, Von der Heils-macht des Wortes, Miinchen, 1966; Wort und Sakrament, hg.v.Ii. Fries, Munchen 1966 참조.

(3) DS 1532.

(4) 소외와 구숙의 언관성에 대 히·이 P. Tillich, Entfremdung und Versohnung im mo-dernen Denken, in: WW ff f 183-199; W. Pannenberg, Was ist der Menschf Die Anthropologic der Gegenwart im Licht der Theologie, Gottingen 1964 (제 2판:),77-85, 109f.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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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유로서의 은총 이해에 대하여 K. Rainier, Die Freiheit in der Kirche, in-Schrif ten zur Theologie W, Einsiedeln-Koln 1965s 255 237; 상동, G7i£ide als Freiheit (Herder-Bucherrei 322)^ Freiburg-Basel-Wien 1968; J.B. Metz, Freiheit als philosophisch-theologisches Grenzproblem, in: Gott in Welt (Festgabe fur Karl Rahner) I, Freiburg-Basel-Wien 1964, 287?314; H. Schumann, Die Freiheitsbotschaft des Paulus ~ - Mitte des Evangeliums? in: Catholica 25 (1971) 22-62 참조.

(9) Μ. Seckler, Instinkt und Glaubenswille nach Thomas von Aquin, Mainz 1961 ; 상동, Das Ileilin der Geschichte. Geschichtstheologisches Denken bei Thomas von Aquin, Miinchen 1964, 목히 81-108; Ε. Schillebeeclix, Offenbarung und Theologie, Mainz 1965, 261?293; O.H. Pesch, Theologie der Rechtfer-tigung bei Martin Luther und Thomas von Aquin^ Mainz 1967,919-935. 보다 십자가의 신학으로 각인된 보나벤뚜라의 관짐에 대하이s J. Ratzinger, Gratia praesupponit naturam. Erwiigungen iiber Sinn und Grenze eines scholatischen Axioms, in: Einsicht unci Glaube, hg. v. J. Ratzinger und H. Fries, Freiburg-Basel-Wien 1962, 135-149 참조.

(10) F.M. Dostojewski, Die Briider Karamasoff, Darmstadt 1960≫ 409, 426.
(11) Η. Schlier,Art. ?τεροι, in: ThWNT Π (1935) 484-500 : 상동 tjber das vollkommene Gesetz der Freiheit, in: Die Zeit der Kirche, Freiburg i. Br. 1966 (제4판), 193-206; R.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Tubingen 1954 (제 2 판). 336-348, 425f; Η. Conzelmann, GrundriM der Theologie des Neuentestaments, Mtinchen 1967,302-314; 1λ Nestle, Art. Freiheit, in: RAC W (1970) 269-306 참조.

(12) 예수의 죽음의 구원의미에 대하여 H. Conzelmann/E. Flessmann van Leer/E. Haenchen/E KSsemann/E. Lohse, Zur Bedeutung des Todes Jesu. Exegetische Beitrdge Giittersloh 1967(제 2 판) Ε. Biser/W. Furst/ J.F.G. Gfttters/W. Kreck/W. Schrage, Das Kreuz Jesu Christi als Grand Heils, Gatersloh 1967; F. Viering, Der Kreuzestod Jesu, Interpretation eines theologischen Gutachtens, Gatersloh 1969; B.A. Willems,Erlosung in Kirche und Welt (Quaestiones disputatae 35), Freiburg-Basel-Wien 1968; H. Kessler, Die theologische Bedeutung des Todes Jesu. Eine traditions-gesckichtliche Untersuchung、Dusseldㅇrf 1970

(13) Thomas von Aquin, Summa theologiae H q. 34 a. 3.

(14) A.a,0. q. 48 a. 2.

(15) A.a.O. q. 49 a, 1,

(16) A.a.O. q. 49 a. 3 ad 1.

(17) A.a.O. q. 48 a. 2 ad 1.

(18) H.U.v. Balthasar, Narrentum und Herrlichkeiti in: Herrlichkeit I /l, Einsie-deln 1965, 492-551 ; Η. Cox, Das Fest der Narren. Das Geldchter ist der

Hoffnung letzte Waffe, Stuttgart-Berlin 1970 참조. * 本誌 55號의 p. 108 右段 1行의 ‘聖母느는 ‘聖父’의 誤植이었기에 訂正함. <編輯끓 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