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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間發展과 그리스도敎 救援
1978년 3월호 (제 56호)
- 國際신학委員會 선언문 - 序 文 ㅅ間發展과 그리스도敎 救援과의 상관관게에 대한 문제는 가는 곳마다 ...

?皇廳正平委와 各國 正平委와의 關係
1978년 3월호 (제 56호)
가. 역사적 개관 1. I967년 1월 6일자 자의교서「그리스도의 가톨릭 KCatholicam Christi Ecclesiam) 로 ...

회칙 [민족들의 발전]과 신 국제질서
1978년 3월호 (제 56호)
1. I967년에「민족들의 발전촉진에 관한 ?칙 jXPopulorum Progressio, 이하 ‘민족들의 발전,으로 약칭) ...

정의와 평화 ㅡ교황청 正平委의 조직 확정에 관한 자의교서一
1978년 3월호 (제 56호)
‘정의와 평화,(Justitiam et Pacem)-U- 구현하고 인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복 음의 빛과 누룩을 가지고 ...

Α. 돈대인 箸·張益 譯 세상에 열린 신앙
1978년 3월호 (제 56호)
저자는 1933년 이래 줄곧 벨기에 루뱅 대학교에서 칠학을 가르치는 분으로 .여기 소개하는 책을 1964년 프...

十字架의 聖 요한의 ㅅ間神化
1978년 3월호 (제 56호)
I. 서 언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년)은 시성(I726년)된 지 200년 후에「인간 의 하느님 께 로의 변화...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VII. 신앙의 구원의미 -
1978년 3월호 (제 56호)
1. 現世的이며 또는 超世的 救援 信仰의 現狀況은 소위 限界問題들 만이 논의되고있지 않다는 것으로 특 ...

안동 교구 사목 실태
1978년 3월호 (제 56호)
I.머리 말 사목신학의 不在風士.에서 뾰족한사 목 방안이 있겠는가싶고, 디더구나 타교구에 도움될 애기를 ...

교회와 세계 - 바티칸공의회 이후 신학계의 주류를 이룩한 다섯가지 사조 -
1978년 3월호 (제 56호)
얼마 전에 醫-大에 다니는 제자를 한 사람 만났다. 무심결에 요즘은 필 배 웠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걸작...

선조들의 전례 음악
1978년 3월호 (제 56호)
1. 序論 인간은 地上에 존재하면서부터 자 기의 감정과 의사를 몸짓, 말, 글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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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헌 1978년 3월호 (제 56호)

ㅅ間發展과 그리스도敎 救援

國際신학委員會

- 國際신학委員會 선언문 -
序 文

ㅅ間發展과 그리스도敎 救援과의 상관관게에 대한 문제는 가는 곳마다 크게 중요시되고 ■있다. 이것은 제 2치- 바더칸공의회 후부티 시작된 일이다..공의회 등안 그리스도신자들의 책임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교회는 現世組織에 관한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병효·와 기타 지역에서 여러가지 解放 神學이 날로 더욱 주목을 ?었디Β際神學찾β色는 1976년 10월 4~9일에 있 었던 年例總舍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이리한 새로운 논문들과 경향들의 핵 심을 파헤치기 위하여 인간발전과 그리스도교 구원 간의 관계에 대한 가장 기 초적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품으로써 인찍부티 계획하였던 사목헌장 연구를 실 현시켰던 것이다.

다음의 글은 우리가 찾아얻은 요점-:1-의 종합이라고 뷴 수 있다. 이같은 최 종보고서는 연구대상이 된 문제들의 難解性과신학자들 간의 논쟁 현황을 감안 한 것이다. 우리가 다문 신학적 경향-&은 그 자체가 다양할 뿐 아니리-, 많은 변화를 하고 있으며 계속 修正되어가고 있다, 또한 이 神學潮流들은 세계와 개별지역의 사회적 조건 및 정치상황과 밀첩히 관련되이 있다. 마지막으로 간 과할 수 없는 일은 이런 논문들의 논쟁이 여러 지역에시 교회의 일치를 해치 면서까지 政見 矩立에 이용될 우려 때문에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하간 본 국제신학위원회로서는 새로운 신학조류가 내포하고 있는 유익성 과 위험성을 檢討하는 데에 공힌하고자 하는 바이다.

1977년 6월 30일,委貝長 K. Lehmann

1. 새로운 神學運動의 출발점인 ?困과 不義의 상황명해 줄,,(사목헌장, ‘1항) 항구적 의무가 교회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 권고의 실 현이 바로, 1968년에 콜롬비아의 메델린에서 열렸던 제 2치-南美 主敎總會에서 발표된 문헌 속에서 특별히 강조의 대상을 이루었다. 교회는가난한 이들의 율 부젖음을 듣고 그들의 고민을 해명해주어야 한다. 抑iS과 貧困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전세계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은「어머니와 교사」, 「지상 의 평화」,「民族들의 발전」,「노등헌장 반포 80주년을 맞이하여」둥 교황 문헌 에 나타나 있을 뿐 아니라, 19기년 주교시노드 선언문(세계의 징의)에도 나타 나 있다· 바오로 6세도 197S년 I2월 8일에 발표한 使徒的 권고「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이에 관한 교회의 책임을 재강조하였다(M-38항). 一 최근 몇해 동안 이 문제에 관해서 수많은 神學書籍들이 출판된 사실을 이해 하려면 위에서 말한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비록 학술적 성격 을 띠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런 서적들은 그 자체가 어떤 이론적 연구의 결과 도 아니요, 더구나 하나의 ‘神學害,는 물론 아니다. 그들은 불행에 희생당하 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이런 환경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깊이 집착 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ㅡ 빈곤과 고통에 억눌린 형제들의 울부짖음을널리 들 려주자는데에 있디-. 기아, 질병,이익추구의 불의 때문에 겪는 실패, 강제 추방, 억압 등에서 우러나오는 한탄을 널리 알리자는것이다. 또 의지할 곳 없 이 路上에서 밤을 새우며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어가는, 가장 초보적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강요당하고 있는 비인간적 대우도 없지 않다.

복음의 빛을 받는 신자들에게 이같은 ‘時代의 表徵,은 분노를 자아일으키는 挑戰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형제들을 그 비인간적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서 신앙의 이름으로 온갖 可能한 노력을 다해야 하겠다는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불행에 대한 이런 관심과 억눌린 사람들과의 제휴감은 정의,해방, 희 망, 평화라는 성경 말씀 가운데서 特殊暗示를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福音(루가4,18)에서 결론된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관심의 증거 가 이런 조류의 신학자들이 공동으로 계속 강조하는 靈性이다. 그들의 신학적 견해와 정치적 견해는 이런 영성에서 필연직으로 결론된 것이다. 영적체험이 知性을 충동하여 인간적 反省과 소위 학문적 分析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그리 스도교적 사랑을 실천하는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것이다. 기초의 성격을 지닌 영적체험과 신학적 내지 학문적 견해라는 두 요소는 서로 補充役割을 하여 한 單位活力을 이룬다. 그러나 혼동하지는 말아야 하겠다. 만일 그들이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보다 나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응답해주려고 노력한다고만 하면 그들을 반대하는 論評의 권리를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나 동시에, 現在 그들이 내놓은 그대로의'神學的 結論들이 과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대의 특징읍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보다 ㅅ間的이고 보다 兄弟的인 世界로 향한 所영을 보다 적절한 方法으로 解 決하기 위한 唯--한 길윤 열어줄 깃인가 하는 질문도 다당한 것이 아닐 수 없 디-. 사실, 어띠한 神^이는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제 根本使命을 완수하기 위 하여 요청되는 만큼의 修]Η은 수시보 받아물여야 한다.

2. 神學의 새로운 形態와 그 難關는 것같은 樂觀主雜는 아니었디、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예언자들이 사 회개선의 전제조건으로서 悔改와 ]}·:효의 태도를 요구했다는사실이다:."악한 행실을 비려라,착한 길움 익히고 바른 삶읍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人權을 찾아주며 과부-& 두둔해주어라”(이사 1,16 이하). 그뿐만 아니라 社會關係에 보다 큰 正義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그런 可能性을 내려주서야한다. 마침내 하느님 홉로 인간뮴에게, 특히 억눌린 인 간들에게 참 權利와 참 宰福움 효과직으로 마련해주실 수 있다(이사 1,24 이하; * 애 3,7-9; 시 103,6; 72,12 이하; 신명 10,17 이하),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善行과 惡 行을 초월해서 구원을 이북하신다.

이 점에 있어서 예언자들은 냐ㅣ·못된 構逝二體制’같은 그 무엇이 存在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하였으나, 惡이란 곧 社한描造의 標誠과 결과 외에 다른 것。 이 아니라든가, 所有權의 現在形)!만 없애면 온갖 濫用이 자동적으로 제거될 수 있다고는 이해히·지 않았다. 또한 개인적 요소도 염두에 넣어야 할 것이다. 구 약성서에 따르면 解放여부가 개인적 요소에 달려있으며 게인의 책임이 무엇보 다 앞서 밝혀지고 강조되고 있다(에제 18; 예배 31,29).

구약성서의 여러 중요한 부분에 새로운 사회건설의 전망이 나타나 있다· 새 로운 사회는 당시 도치에서 반견되던 그런 稱避나 體制에 따라 조직되지 않은 사희라고 소개된다(이사 55,3-5; 에제 34; 40,48; 예레 31,31 이하)· 詩篇 著者들은 명백히 하느님을 억늘린 이들의 해방자, 가난한 이들의 辯護者(9.10.40.72.76. 06편; 유덧 9,11)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抑隨에서 해방시키실 때 하느님께 서는 인간을 억누르는 온갖 억압을 그만두라고 그들에게 요구하셨다(출애 22,10; 레위 19,13.18과 33; 신명 10,18; 24,14; 시 82, 2-4). 마지막으로 반드시 와야 할 하 느님의 나라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온갖 지배를 없엘 것이라고 되어있디·. 이런 사회에 대한 希 H-은 진 ■구약시대 f- 통하여 구체적 역사와 충분히 구별되 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모든 현실을 초월하는 전대적 나라임을 몰랐다. 오늘날까지도 ‘俗化된,구원관을 주장하는 수많은 이데-?.·로기가 이런 하느님의 약속이 역사와 인간활동의 범위 내에서 실현되리라고 ? 고 기다린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이런 思想온 구약성서에서 배제되고 있다.

마침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약의 마지믹 默示的 經典은 현대를 초월하는 저 世上의 來牛. (vita futunO 에 희망을 걸었고, |≪史神學은 인간의 無力과하느 님의 全能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 新約

新約聖害는 구약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인마간 인용하거나(이사 61,1과 무가 4,16-17) 혹은 전제하고(마태 12, 29-30과레위 19,18) 있다. 幸福에 관한 說敎(마태와 세계건설의 인간활동이 그 진행과정에서 온진.히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進 化論的 樂觀主義-’도 피해야 한다.

司牧患.!??: 자체도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ㅅ·問發展,神化作用과 ㅅ問化作用, 하느님 은총의 질서와 인간활동의 질서(38.39.40.42.43.58항; 평신도 교령,7항)의 구 별을 짓고 있다. 비록 그에 앞서 에 두 秩)브에 서로 이바지하는 要素들을 취급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디-. 地上에서의 인간-ii-봉사는 ‘하늘나라의 材料’를 준비한다(사목헌장, 38항),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는. 우리 활등의 좋은 결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 ?-은 온갖 缺陷유 씻어비리고, 빛을 받고 變形된 모습으로 남게 된다. 즉 시·랑만이 남는 것이(1 .V-린 1:!,8) 아니라 사랑의 業績까 지 남는다(사목헌장, 39항).

終末論的 희망은 俗 1ft 生沾의 구조發 통해서도 표현되어야한다(사목헌장, 35항( 그렇기 때문에 公識傳는 現世의 旅耗이란 특성뿐 아니라 그 變形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사목힌징·, 38.39힘.). 地上國家와 天 hH家가 신앙의 지도를 받아 서로 결부된다. 그 둘의 구병도 존중히.면서 동시에 일치의 조화를 이룬다(사목헌장, 36항). 이러한 교리는 평신도사도직 교령에서도 倫된다. "그리스도의 救援架 業은 본래 사람물을 구원함 목직·?Γ 가졌지만,現供秩;Ρ륨 개선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은총을 사람들에 게 전할 뿐 아니리-, 現世秩)Ρ에 복음정신윤 침투시켜 현세질서를 완성하는 그 것이다. S的秩序와 現世秩벼는 비록 서로 구변되지만, 하느님의 한 계획 속 에 긴밀히 연절되어있다. 하느님께서는 ^字 W-P- 그리스도 안에 새로 창조하 실 계획이시며 이 새로운 창조는 이 地Jㅡ、에서 시작하시어 마지막 날에 완성하 실 것이.다.'’

이 文獻으로 보아 우리는 위한 부쟁과 現lit改떤에의 침·여를 ‘信仰宣

布의 한가지 構成要素’로보아야 한디·097?ν? Μ;敎시노드,ι≪:界 正義에 관한 문헌서·εο ‘播成要素,(constitutivum) 라는 이 표현은 아직도 ;M· 論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보다 징확한 해석을 요구한다. 이 표현의 임직한 뜻음 첫·는다면 本質的 (essen ㅡ tiale) 이 아닌 袖充的 (integrans) 요소라는 말이다 (U)74vl 시노드 解釋). 일반적으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은 남용된 :··分法읍 배격하면서 現世建設의 인간 노력과 종말론적 구원의 조화롭 가르치는 것이라는 해석이 통상적 해석이다. 오늘날 이 두 대상의 ㅡ·致性올 강조하면서도 오히려 附^의 相逾性을 더욱 확 실하고 엄격하게 분변할 필요가 있다. 現世狀況이 최:e의 적극적 변혁을 반대 하는 저항 자체와 죄의 세력과 이긴· 발전의 이중적 진과(평신도 i령, 7항) 등은 救援歷史의 일치 속에서까지 하느님 나라의- ㅅ問發展 사이에 tn存하는 相違件: 을 명백히 인정하고 찬된 구원운동의 5;1수조저인 십자가-이 神秘-S·(사목헌장, 22.



가· 문제의 神學者들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억눌린 사람들의 억압상태에서 출반하여 자유불 着求한다. 인류의 이같은 역사적 상황 을 變化不能의 상태로 볼 수는 없디역사라는 것은 실제로 ‘創造的,발전으로 서, 存在 각 분야에서 보다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되어가고 마침내는 ‘새 Λ 間,이 출현하도복 되어있다고 한디非ㅅ間的 상황들의 변화 속에 하 느님의 요청과뜻이 내포되어있디-, 당신의 救援:·ji.菜으로 인간들을 온갖 형태 의 죄악에서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시 형제적 ㅅ類家庭의 새로운 기초를 놓아주셨다고 본다.

문제의 신학자물이 起點으로 삼는 이같은 견해는그듭에게신학의 특수형태, 어느 정도로 새로운 형태普 제공한디하느님온 歷史的 事件들을 통하여 당신 의 신비를계시하신다. 그더-"-로 그리스도信펴뮴은 구체적 상황과 역사적 발 전과정에 깊이 파고들수목 더욱 윤바Α 하느님 말씀에 應答하게 된디·. 이리하 여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의 神的 ?史와 사람-U:·의 편리와 권리를 增進 시키기 위한 노력의 인간역사와의 깊은 일치성-g- 더욱 명백히 깨닫는다, 世俗 ?史와구원의 역사를 단순하게 동일시하지는않지만 이두 역사의 관계를‘ㅡ 致'(unites) 라는 단어로 알아듣는다. 인간역사와 구원은 서로 無關한 것이라고 전제하는 二元論的 뜻으로 서보 구빈짓는 相많件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오 히려 인간활동은 역사 속에서 보다 인.간다운 사회를 긴설하는 한,바로 이 때 문에 새로운 가치, 진정한 신학적 가치를 인게 된다, 정의로운 사회의 到來는 사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롭 앞당기는 것 (antidpatio) 이다고 이해한다(사목헌징., 39항의 :새 땅과 새 하능’/>1탄:인용한다), 션과적으로 그리스도?信仰은 무엇 보다도 사회적 내지 정치적 진서를 변화시키고 刷新하는 역사적 실천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思考方式은 큰 가치의 많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信 者들은 救援에로의 riL:2 架^(사목힌짐, 10.11.Γ>7.59. ≪항; 선교교령, 8항; 민족들의 발 전, 15-16항)를 보다 완전하게 絲合的으로 알아들어야 히.겠닥. 의심없이 성경에 나타난 뜻대로의 信仰은 행동화됩 때에 비로소· 그 풍요성과 완전성에 도달한다. 제 2차 바티칸공의회도 그나롬대로(:사목헌장,22.2G.38.41.57 항; 종교자유선언, 12항) 성신께서 세계역사 속에 활동하시고, 교회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어느 징도 까지는 신앙의 前提段階, 즉 하느님께 관한 진리와 규범, 共益과 같은, 건진 한 지성이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알려주시며 이것이 그리스도敎의 기초를 이 룬다고 하였다(제 1차 바리칸 공의회 DS 3005;.

그러나 여러 神學論文 속에서는 이상의 基礎要素들이 너무 일방적으로 (nmk_ teraliter) 해석되고 있다. 그때문에 반대에 부딪친다. 사실은 世俗?史와 예 수의 복음을 同一視할 정도로 세계역사와 구원의 역사 사이의 ㅡ®: (unites) -1-주장할 수는 없다. 이것은 超自然 秩序의 신비로서 다른 어느 現實 (realitas) 과 도 일치시킬 수 없는, ㅅ間知性을 온전히 초월하는 現實이다(제1차 바티칸 공의 회 DS 3005). 또한 교회와 세속의 한계를 전혀 없앨 수도 없다. 역사적으로 現 存하는 세속은 그 속에서 구원의 神的 계획이 전개되는 장소임에 틀림없으나 하느님 말씀의 능력과 활동이 사회적 내지 정치적 발전을 증진시키는 데에만 한정시킬 정도에는 이를 수 없다. 따라서 신앙의 實踐(praxis fidei)을 인간사 회 개선을 위한 노력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실제로 신앙의 실천은 不표의 고발과 함께 良心形成, 마음의 회개, 온갖 우상숭배에 반대되는 참 하느님 평 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숭배 등을 같이 내포한다. 따라서 실천적 신앙 을 마치 인간의 온갖 활동을 전체적 내지 극단적 (totaiitarie et radicaliter) 방법 으로 포괄하고 지배하는 정치적 임무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나. 여기서 두 가지 점을 밝혀두어야 한다.

(1) 일반적으로 힘의 대립을 동반하는 政治分爭이라 해도 그리스도敎的 사 랑의 ?有結實이요 대상인 평화와 화해를 도외시하거니· 없애버리는 결과몰 초 래하지는 말아야 한다.

(2) 또 한가지 명백히 밝혀두어야 할 일은, 그리스도信者에게 있이서 '政治 的 要素’가 全生活의 마지막 의의를 부여할 만큼 절대적 가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信者 생활 안에서 정치직 요소는 절대적 것이 못되고 오직 봉 사를 위한 도구의 성격밖에 지니지 못한다. 이원리를 잊어버리는 까닭에 ㅅ間 自由 위에 尊制政權 (regimen dictatoriale) 到來를 촉진시키는 운동에 가담함 위 험을 부과시킨다. 또 한편 神學自體가 어느 경도 실천과 관계지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그 뛰어난 使命은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탐구하는 데에 있는 것이 다· 어떤 모양으로 실천에 옮겨지든간에 神學은 스스로 구체적 조건들과의 일 정한 거리를 유지할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디、구체적 조건들은 거의 언제나 行動 秩序에 있어서 은갖 억압과 강제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신앙과도덕에 관 한 가톨릭敎義의 원리믈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子女로서의 자유를 잃을 위험없이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스스로의 행동방법을 판단할 수 있는 빛 을 제공한다. 이같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神뿌이 腐理에 부합할 수 있고 最 高權威를 안전하게 보존하≫1 하느님 말씀의 特殊性格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敎를 一方的(unilateraliter)으로 보 는 햇讓에 삐여지 않도목 조심해야 하겠다. 이런 임방적 견해는 그리스도論, 敎會論, 救援의 槪念Γ?體, 그리스도교적 존재, 신학의 고유임무 등 전반에 긍 해서 형성될지도 모른디.

다. 不?에 대한 예언적 심;發과 가난한 사람-문 편이 되라는 호소는, 일정한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되고 사회적 내지 징치적 일정한 조건하에서 결정된 극 히 複合的인 상황에 관한 것이다. 時代狀況에 관해시 내려지는 예언적 판단은 확실한 표준의 기술직 적응없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그런데 解放神學의 이 론들은 백성晉의 울부짖음읍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사회학 이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神^은 본래 자체의 神^Κ(理에서 정치활동에 관한 구체적 규범을 제시할 능력이 없다(incapax). 따라서 神學者도 사회학 분야의 분쟁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따리써 보다 인간다운사회를 건설해보겠 다는 의도에서 형성된 神^理論도 사회학적 이론에 부딪힐 경우에 그 理論利 用에 수반되는 위험윤 염두에 두어야 한디각 경우마다 그 이론의 확실성 정 도를 세밀히 건토해야 한다. 신제로 그 이론들은 가끔 推理에 불과하고 표면 적 혹은 짐-재적 이데윤로기 요소들-s- 내포하거나 아직;논쟁중에 있는 철학적 전제나 그룻된 ㅅ問觀에 바탕읍 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예컨대 대부분의 사 회학적 분석이 마르크스와 레닌:k 義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런 종류의 이 론이나 분서에 바탕-s- 문 사람이라면 神^^·&이 거기에 가담했다고 해서 그 이론과 분석이 더 확실해졌다고는 생각치 말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神學은 社會 現?에 대해서 ^的 解釋의 多樣性-2" 認定하고 그 어떠한 社會學的 分析 에도 쉽사리 ?調해서는 안될 일이다.

3. 聖書神學的 觀點

문제의 신학자들이 자주 성서-rr 인용하고 있으Η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救援과 ㅅ間福祉 내지 ㅅ權과의 관계류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깊이 檢討해볼 핀요가 있다. 여기에 비로소 ?究對象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現代 槪念들을 성서에 적용해버리는 시대착오는 피해야 한다.

가. 舊約?®

오늘날 하느님의 救援과 시!51發展 사이의 관게-&규정하기 위해서 언제나출애굽기의 이야기를 리用한다. 과연 에집트에서의 ?出(측에 1ㅡ24장)은, 구약에 있어서 救接의 주요사건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外國支配와 강제노동에서의 해 방이었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그 백성을 에집트에서 밖으로 끌어내고 귀 양살이 에서 다시 이끌어내는 것에 解放全體를 국한시키지 않는다. 이 해방은 시나이 山에서 거행된 契約의 崇拜를 위한 것(출애 24장)이었다.

이같은 R 的性을 도외시한다면 그 해방의 본 뜻은 없어지고 만다. 또한 ?? 篇 著者도 불행, 한탄, 감사,도움 둥에 관한 노래 중에서 언제나 종교적 구 원과 해방을 希求하는 기도의 형태를 취했다(시 18). 不幸과 극도로 가난한 社 會條件이 동일시되지 않을 뿐더러, 동시에 원수관계., 3Η, 不義,죄에서의 진 과,죽음의 위협, 죽음과 더불어 열리는 所않 등을 말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서 요·청되는 필요의 대상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 가장 뛰어나는 요소는 하느님께만 기대하는 능력으로 얻어지는 구원과 治癒의 體驗이다. 이런 종류 의 구원을 두고 인간적 행복이나 ㅅ權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社舍狀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뿐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종 합적으로 神學的 檢討를 해야 할 것이디-. 그뿐만 아니라, 에집트에서 나오는 ^旅程에 있어서 하느님 친히 당신 백성의 해방과 靈的 반化를 시켜주셨더 것 이다.

하느님 啓示에 바탕을 두고 ㅅ間存在의 환경음 개선해 보려던 인상깊은 예 는 社會環境을 꾸젖는 에언자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그 누구보다도 아모스를 들 수 있다(2,6이하; 3,U); 5,11; 6,4 이하; 8,4 이하). 다른 예언자들도 아모스의 初 期主題를 계속 재강조하며 발전시켜 나간다. 예컨대 大地主를 책한 일(이사 5,8; 니케 2) 같은 것이다. 호세아는ㅣ ?時代 인간들이 速帶件.음 모른다고 업·히 책한 다(4,1 이하; 6,
預??·者들의 생각으로는 社會惡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고쳐진다· 그러나 그뮤 은 과연 인간이 現在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힘· 능력음 갖추었는가 하는데에 대 해서 몹시 회의직이었다. 이것은 분명 ?史神學에 바탕을 둔 일부 사람들이 믿5,!-7,29 특히 5, 3-12)는 온전히 특수한 방법으로, 마치 구약성서기· 인간 마음 의 悔改와 刷新을 요구한 것같이, 오히려 더 강하게 그것을 재강조하고 신약 에 있어서는 성신의 힘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ㅡ이미 여 러 기회에 언급한 바이지만ㅡ신약성서는 社會現 Λ 과 인간의 집단생활에 관해 서 관심을 덜 표명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今時初聞인 새로운 복 음은 시초에 있어서 아마도 現世生活에 대한 관심을 퍽으나 희박하게 만들었 던 것같다. 새 백성 가운데 來臨하신 하느님의 位格的 사랑의 超?的 중요성 이 현세적 문제들을 2次的인 것으로 몰아붙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예 :하느 님 나라의 박두라는 主題). 受難하시고 復活하신 주님의 신비에서 발사되는 빛 때문에 인간적 요망은 그리 급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졌다. 또 한편 로마帝國 의정치적 상황이 그리스도信者들로 하여금 現世에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없도 록 만들었다.

그러나 새 복음과 신약의 윤리가 社會評價를 活性化하기에 적합한 많은 규 법과 생활의 표본을 가져왔다는 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원수 사랑의 계명(루가 6,35; 마태 25,31-46),부자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 에게 관한 사건들파 威脅(루가 6, Μ 이히-; 마태 6,24; 1 고린 11,20 이하; 야곱2,1 이하; 5,1 이하),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돌볼 의무(루가 6,20; 1 고린 12,22 이하), 아무 차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이웃을 도와주라는 계명(마르 10,21; 루가 12,33),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배격함(:마르 10,42-45; 마태 20, 25-28; 루가 22, 25-27), 인간들의 보편적 형제에(마태 23,8; 25,41 이하) 같은 것만 생각하면 넉넉하다,

신약성서는 또한 그리스도敎的 사랑의 실천을 위한 制度的 형태를 취하도록 信者들에게 권장한다. 그예는 예루살렘에 보내기 위한 조직적 모금이다(2고린 8,1 이하). 또한 副祭들을 세워 慈善事業을 하게 한 것도 마찬가지다(1 고린 12, 28; 15,15; 로마 12,7; 16,1; 필립 1,1; 1 디모 3,8과 12). 그러나 적어도 始初에는 이 런 자선제도가 신자공동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 크게 발전히ㅡ지 못 하였다.

解放分野에 있어서 신약성서는 검토의 對象이 될 만한 한가지 중요한 다른 요 소를 제공한다. 이로써 解放 (liberatio) 을 어띤 뜻으로 알아들었는지가 밝혀질 것이므로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아야 하겠다. 예를 들면 사도 바오로가 새 自 由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은 義化 (iustificatio) 의 宣布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해방 그 자체로서는 다른 주제·!:을 떠나서 별도의 주제를 이루지 못한다, 그 리스도의 救援活動은 인간 마음의 내면 깊은 곳을 열어놓았다. 따라서 참 자 유의 否定과 인간의 참 예속의 뜻을 잘못 오해하기 쉽다. 義化의 福音을 깊이 살펴보면 인간은 악한 세력에 속박되어 있다. 죽음과 없어질 것, 罪의 세력ㅣ, 律法(현세적 요소도잊지 말아야하겠지만) 등에서의 해방이 先行되지 않으면 (로마 5ㅡ7장) 아무도 진정하고.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 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같라 5,1). 의심없이 여기에 하느님께서 全ㅅ類 역사-1- 심판하신 때 잃ㅅ들에게 신물로 주실 자유의 시작 (anticipatio) 이 있다. 하느닝의 정의는 ®神피- 그 ^릭을 통하여 우리에게 解放 運動을 가능케 해주신다. 이로씨 우리는 콤음 행할 수 있고, 이 운동은 사랑 에서 그 最高完成을 얻는다. 그러므로 신약성서가 ‘자유를 주는 解放,에 대해 서 말할 때, 그것은 은총이요,윤리적 衝動이며 終末的 언약으로서 이러한 표 현들이 義化의 선포 속에 포함되었고, 따라서 자유는 義化에 바탕을 두고 거 기서 모든 힘과 권위가 휴러나온다. Φ 物을 이런 깊은 수준에서 관찰할 때에 비로소 신자들이 신약성서 안에서 해방운동을 위하여 발견하는 활력을 이해할 수 있고 길러갈 수 있다.

신약성서의 빛으로 관찰하면 인간과 하느님,인간과 인간의 화해 없이는 사 회의 참변혁이란 있윤 수 없다. 인간들이 화해와 정의로써 ‘새 被造物,이 되 어야만 비로소 인간생활이 충분하고 항구한 방법으로 개선되어갈 수 있다. ㅅ 權, 福祉, ㅅ問解放 등은 所사할(habendi) 대상이 아니고 根源的으로存在樣式 (essendi) 이란 범위 내부에 속하는 깃이다. 물론 거기서 인간존재의 온갖 조건 의 개혁이 흡러나오는 것이다.

4. 體系的 神學的 考察

가. 解放者로서의 하느님과 인간의 해방운동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헤방에 관한 구약성서의 표현들이 신약의 쇄신된 상 황 속에서,모든 입장에서 모두 맞는 말일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통하여 완성 된 계시는 구원의 계속적 ?史과정음 약속의 시대와 실현의 시대로 구분한다. 이 두 계약을 결합시키는 요인은 ?上主시요 지극히 자유로우신 하느님 홀로 인·간들의 福祉를 섭리해주신다는 保證이다. 그분 홉로 참뜻의 解放者이시다. 분명 信仰의 이같은 주장읍 이해하리면 인간의 해방 요청이 경제적 물질적 어 려움에서 뿐 아니라 危險과 喪失의 조건까지를 합한 전체적 상황에서라는 것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 홉로 참으로 우리를 解放시킬 수 있다 는 强한 주장을 迷信的인 것으로 (Deus ex machina) 알아들어서는 안된다. 미 신을 崇尙한다면 오히려 불행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無力性과非活動性과無 感覺性을 더욱 부채진하는 샘일 것이디-· 진정한 신앙의 입장에사 보면 비인간 적 조건들 앞에서 책임을 면한 수도 없거니와 共犯의 책임도 없다. 하느님께서는혁명의 ?擾속에 개입하시지 않는다. 다만당신 恩寵으로 인간들의 精神 과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산 信仰의 힘으로 보다 正義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노력하도록 양심을 통하여 밀어주신다,

이런 목적을;?성하기 위하여 全ㅅ的으로 온갖 惡의 권세에서 해방되어야한 다. 그러므로 진정 효과적인 회개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쇄신이야말 로 실제로 해방되기 위한 必要要素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信仰에 따라 완전한해방은현재 사건들의 진행과정에서 즉 역사속에서는완성될수 없다. 그것은 ‘새 명-’과 ‘하느님의 都市’에서만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그 동안에는 온갖 解放運動도 일시적 성격을 띠었으며 최후심판 때의 상벌의 대상이 될 것 이다.

우리의 考察은 정신적 쇄신과 개인적인 救護活動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 "일정한 제도의 형태를 취한 不義”의 경우도 고찰해야 한다. 이것이 지배하 는 동안 그 상황 자체가 正義의 발전과 개혁을 요구한다. 현대인들은 社食構 造가 자연스럽다거나, 이런 상태가 하느님의 뜻이라거나,어떤 進化의 無名法 則의 결과라고는 이제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信者라면 社會制度는 社 會窓識의 所産이며 윤리적 책임의 대상이라고 항상 생각해야 한다. 성경상의 罪라는 말이 ㅅ間自由의 개인적이고 故意的인 (expressa) 결정을 뜻하는 限, 의 심없이 우리는 ‘制度的 罪'라든가 ‘罪스러운 描造’라는 말을 과연 할 수 있을 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그러나 팬 때문에 蔑視와 不義가 사회 경치구 조 속에서 잠동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말한 대 로 改善의 노력은 不 S 한 狀況과 稱造에도 미쳐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 운 窓識을 가지게 된다. 과거에는 여기에 관한 책임감을 오늘과 같이 명백하 게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리한 觀點에서 正?라는 말은 모든사람들의 동 둥한 品位의 기본적 認定, 행복한 발전, 본질적 Λ權擁護(正義平和委員술.· 救舍와 人權참조), 주요 생활필수품의 공평한 분배 등을 뜻한다·

나. 인간적 발전과하느님께로부터 온구원과의 관계를 어떻게 定義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과 인간의 解放運動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려면 민 저 ㅅ間發展과 구원, 현세 건설과 終末論的 건설과의 관계를보다 정확하게 규 정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考察해온 내용에서 결론지을 수 있듯이, 우선 ㅅ間活動과 그리스도 ?的 희망과의 관계의 올바른 개념을 가져야 하겠다. 마치 한편으로 現 地上 世界만 존재하고 다른 편으로 現世와 전혀 상관없는 후세만이 존재한다는 식 으로 이 두가지를 온전히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지배78항) 인정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런 相通件을 밝혀놓는다면 ㅡ 다른 편으로 이 두 對象을 연결시키는 매듭 을 잊지 않는다면一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二元輪,(dualismus) 은 모두 배제됩 것이다. 반대로, 이렇게 완전한 이해를 갖춘다면 오히려 더 큰 인내와 항구와 신뢰로써 善益 및 正·S促進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며, 노력이 아무 結 賞을 못거두었을 경우에 생길 수도 있는 失望을 방지할 능력을 보장 받을 수 있다.

이같은 姑付의 一致性과 인간발전과 그리스도敎的 구원과를 구별지어주는 相違性은 그 구체적 형태에 있어서 확실히 세로운 탐구와 분석의 대상이 되어 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現代神學이 受諾해야 할 任務 중의 하나이다. 문제된 이 일치성의 근본 성격이 말하자면 현실 중심에 뿌리박혀 있으므로 이吾 모르 는 체 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 구체적 역사는 거기서 이 세상이 하느님의 신비에 접할 정도로 변 혁되는 자리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과 그 結實이 ‘남는다,' 이것이 ? 世的 행복과 권리를 구원에 결부시키는 요소를 인정할 수 있는 마지막 이유이 다. 그러나 종말의 到來가 구체적 역사룰 제거하고 지나가게 하느니 만큼 완전 한 일치는 성립될 수 없디·.

또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를 지배하며 절대적으로 온갖 地上Η 現의 가능성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업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世上이 아무리 완전하게 발전했다고 인정하더라도,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 과의 관계를 끊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디개인의 역사 속에서 이같은 不連 續性은 죽음으로 切感하게 되고, 變化라고 보면 그것은 全?史에 걸쳐 現世 의 '滅亡,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두개의 混同할 수 없는 原理 속에 나타난辨證法은 해결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나그네’ Cviator) 狀態에 있는 한, 現世生活에서 없앨 수도 없고 없에 서도 안된다. 아직 기다림의 대상인 終末論的 완성이 바로, 왜 우리가 하느님 나라와 역사와의 관게를 ㅡ元論的으로도 二元論的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가 하 는 그 이유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계의 경의는 본질상 保®된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또 한편 종말론적 구원의 S布와 역사적 시간으로 따진 미 래의 건설이란 관계도 그 ,?和와 相違性을 도외시하고 ㅡ線上 (in linea unica) 의 진행같이 -■·義的 (univoce) 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이런 뜻으로 5? 투가 福音의 말씀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 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혹은 ‘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 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17,20-21). 司牧憲Μ은 歷史와 救援 128 Λ間發展과 그리스도敎 救援과의 이 근본관계의 또 한가지 결론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땅과 인류의 ^成時期를 알지 못한다. 宇'?·變환의 방법도 모른다. 罪로 이즈러진 現世의 모습은 분명 지나간다"(39항).

이것은 확실히 啓示의 주요 사긴들율 통해서 얻어진 우리 문제의 形式的 (formale) 해답이다. 그러나 이 관계의 구체적 進行過程에 있어서 이 관계가 구체적 현실에 적용될 때 서로 다른 여러 局部的 형태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 로 알아듣게 될 것이다. ?史過해에서 이 해답의 읍바른 적용방법을'택하려면 舊世界,新世界, 第三世界에서 서로 디-른 방법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구라 파와 北美같이 利潤에 자극을 받아 :rjs發展에 진보한 나라들에 적용되는 것 이 인구의 대부분이 빈곤에 허덕이는 대륙에서는 같은 효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정도의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위에시 확인된 ㅅ間發展과 그리스도敎的 구원과의 근본관계-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模糊하지 않고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하느님 禮拜, 祈禱, 聖體 와 다른 ffi事, 개인윤리, 죽읍과 영생 같은 종말의 문제, 역사 속에서 어두움 의 세력을 거스려 遂行해야 할힘겨운투쟁(사목헌장,?항) 등을뒷전에 몰아붙 일 정도로 사회적 내지 정치적 해방운동율 특권적 위치에 을려놓는다면 위에 서 말한 인간발전과 구원과의 근본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罪와 不표의 상황에 있어서 신앙의 진리를 때에 맞추 어 宣言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디-. 이런 방법으로 하느님 나라의 正義를 擁護 하며 가끔 들려오는 批判도 제거할 수 있다. ?히 교회는 사람들의 불행을 베 일로 가리어 버린다거니,가난한 사람·U:을 그들의 곤궁한 상태에 잠재우고 있 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참된 援助를 제공하는 깃과 고통감을 경감시키는 데 에 국한시켜 거짓 慰安의 희망만음 북는아주는 깃은 전혀 다른두가지 일이다.

다. 人間發展과 救?과의 관계와 敎合의 使命

교회가 현 시점에서 증거를보여주어야할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敎 會共同體는 일정한 정치적 선택이 이루어진 구체적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는 아주 득수한 공동체를 이불 수밖에 없다. 교회든 일정 한 이데올로기의 支配 속에서 이런 혹 저런 구체적 방법으로권력이 實際로行 使되고 있거나 권력을 爭取하려는 후보자들이 경쟁하고 있는시합장에 계속살 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紀元上으로 보나, 超自然的 그 성격으로 보나, 종교적 그 使命으로 보나, 終末論的 그 希望으로 보나 교회는 “어떤 民族이나 國家에도,또 어띤 특수관습이나 古今의 어면 생활습성에도 불가분의 排他的 관계로 읽매이지는 않는다”(사목힌장, 58.42항; 교회헌장, 9항). ?會는 다른 어떠한 사회적 Κ制와도 혼동될 수 없고,또 그것과는 어떠한 불가분의 필연적 자격으로도 맺어질 수 없디-· 敎會는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음모에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中立的(neu-trale) 이고 無關心的 (indifferens) 인 태도만지닐 수도, 온전히 非政治的 (apolitica) ®保態度만 보일 수도 없다. 분명 현시점에서는 世界 여러 지역에서 교회의 행동 가능성은 몹시 제한되아 가끔 다른 모양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도복 강요당하고 있다. 다른 모양의 證言이라고 해서 덜 預U的일 수는 없다· 예 컨 대 우리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강요된 침묵 속에서 당하는 고통이 바로 그런 것이다. 敎략는 정치세력들처럼 어떤 計略이나 음모를 꾸며서는 안되고 오히 려 조심스럽게 자기 행동이니- 침묵으로 야기될 정치적 변화를 미리 내다보아 야 한다. 때로는 가난한 사람, 익눌린 사람, 不義의 희생자들의 상황을 고발 하지 않거나 더구나 이런 상태를 덮어두거나 干與하기를 거부함으로써 共犯者 가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구약의 預??者들올 본받아 교회는· 신앙 의 빛으로 社會 現喪을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양심올 洗·練해야 한다. 가 난한 사람들과 連帶性을'유지해야 하며 그 범위는 정신적 심리적 물진적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 이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保草해주는 효 과적 救濟事tS은 분명 옛날부터 교회와 신자들의 主要任務 중 하나였다. 오늘 에 와서 이런 활동은 산 신앙의 보다 빛나는 증거가 되었고 교회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 信憑性 判別의 명백한 표준이 된다.

사회적 내지 정치적 現世秩序의 건설과 개선은 분명 평신도들에게 특빌히 맡 겨져있다(평신도교링, 7항; 교회힌장, 31.37항; 사목힌징, 43항). 그러나 온 ?會가ㅡ주 로 교황, 주교, 사제, 부제들의 봉사로 대표되는一 인간의 尊嚴性과 基木ㅅ權 이 짓밟히고 있을 때 沈默을 지킬 권리는 갖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 會는 전체적으로 너무 늦지 않게 힘있게 자신의 의견을 표시할 책임을 질 수 있 다. 또 한편 많은 특수환경 속에서 그리스도ⓒ者는 共同目標 追求의 여리가지 방법 중에서 어느 한가지를 자유로이 선택하여 행동할 권리를 누린다(사목헌 장 43항에 긴 설명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社會政治問題에 있어서 그리스도 信者들 가운데서 생기는 논쟁을 온전히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얼핏 보아 서로 대립되는 듯한 敎友들에게 교회는 서로의 입장과 서로의‘行動 動機를 이 해하도록 요구한다”(노동힌장 반포 80주년, 50항). 각자의 개인적 선택을 포기하는 일 없이도 共同 Η 標를 실현시키는 데에 공헌하기로 노력하며 자신의 提案을 陳 述하며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을 것이디-. 思考方式의 多?性 가운데서 信표라 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公理를 잊지 않을 것이니, "信者들을 갈라놓는 要 因보다 신자들을 일치시키는 요인이 훨씬 강한 것이다”(사목힌장, 92항).

그와는 달리 만일에도 社街陪展 사이에 존재하는 불화가 ‘險級?爭' 조직에 흡수된다면 교회의 일치는 중대한 위험을 당하게 된다. 계급들 사이에 불평둥 이 있는 곳에서 어느 정도의 긴장까지 온전히 피합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리 스도信者는 이런 紛밤을 해건하는 그 방법에서 구벌지어진다. 신자는 폭력을 거스‘려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 ?識開發,의견교환, 폭력 아닌 운동에의 협조 등 다른 방법으로 상황의 변화-S- 얻으려고 힘쓴다(여기서 暴力이나 힘에 관계 되는 더 많은 문제들을 더 깊이 考察할 수는 없다).

또한 신자라면 화해라는 가장 중요한 指針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사회적 내지 정치적 대립이 뜻하지 않게도, 예컨대 서로 다른 政治見解 때문에 투쟁하 는 신자들끼리 그 이유 때문에 함께 미사도 봉힌하지 않거나 서로 다른 사람 을 배제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는 것은 피해야 한다. 정치적 대립이 부자들과 탄압자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할 구원의 그리스도敎的 宣敎의 보편성까지를 위태롭게 할 정도로 싸울 권리는 주지 않는다. 교회는 그 사랑 의 대상에서 아무도 배제히·지 못한다. 그러므로 政治要因에 절대적 가치를 부 여하지 않도록 계속 세심한 심려기울여야하겠다. 다른政治見解를전혀 용 납하지 않는 배타적 정치선택은 폭군화할 뿐 아나라 경치의 본질 자체를 부정 하는 것이다. 어떤 獨'政政權이 흔자서 배타적으로 모든 사람의 각 분야를 다 스린다고 주장하며 ≪制的 報復읍 감행할 때 교회는 그것을 반대해야 할 거부 치 못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분명 이러한 환경 속에서 가끔 교회는 公的으로 자신의 의견을 알리기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그릴지라도 교회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용감하게 권력의 濫用을 반대하든지, 혹은 침묵의 고통을 당하든 지,혹은온갖형태의狗牧-l·· 하든지, 보다商次元的방법으로그의무를다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륨 자유롭게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敎的 해방은 이같은 극단적 상 황 속에서 아무런 장애도 받읍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최고 위안이요 우리 신뢰의 중심 기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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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듬의 고찰움 통하여 가톨릭敎현의 품안에는 여러 地域敎會들의 서 로 다른 상황이 있다는 사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多樣性 자체가 걱정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불평등의 무게가 우리 의 共通信仰의 일치와중심읍 이루는 요소에 있어서까지 긴장과 분열을 극복할 수 없는 것같이 짓누르는 경우가 있다. 隨際神學婆艮다 안에서 이루어진 토론 과 연구는 여러 민족의 상황이 언마나 서로 다른 것인가도명백히 밝혀놓았다.
그러나 敎會 안에서는 아무도 자기자신만을 위해서 말하지 않는디형제들 이 地球 그 어느 구석에서 외치든지 그들의 울부짖음에 모든이가 귀를 기울여 야 한다. 不義하게 虐待를 받거나, 고통에 억눌려 있거나,가난에 허덕이거나 飢餓에 못이기는형제들의 울부짖음을들어야한다. 이 점에 있어서우리는 서 로 남에게 배워야 하겠다. 敎會와 社舍의 역사 과정에서 남들이 무수한 고통 의 대가를 치르며 실현시켜 보았던 그릇된 解決策을 우리만은 비록 새로운 형 태를 취해서라도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배워야하겠디、問?解決 을 위해 정치적 차원을 극구 찬양한 失敗의 ≪例 등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이러한 努力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精神을 받아 일치될 수 있다. 이 러한 觀點에서 교회를 구성하는 여러 民族의 다양성과 인간적 文明水準의 다 양성 가운데서 유지되는 교회의 單一性과 替遍性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인 동 시에 우리 자신의 요구인 것이다.

수고로이 얻은 것인 만큼 그것을 輕率함으로 위태롭게 해서는 안된다. 이 원 칙은 그무엇보다도특별히 ㅅ間發展과그리스도?的 救援과의 관계에대한 문 제들에 적용되어야 할 原則이다· (譯者 : 金南汰- · 水原敎區長 主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