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신자들의 기도」에 관한 고찰(考察)
1967년 5월호 (제 1호)
1. 기도의 역사와 그 의미 신자들의 기도 즉 공동기도는 새로된 것이 아니고 벌써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다....

제 2차 공의회에서 제시된 평신도 사도직
1967년 5월호 (제 1호)
서 론(序論) 평신도 사도직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취급한 문제 중에 가장 비중(比重)이 큰 문제 중...

새 교리서의 교회상(敎會像)
1967년 5월호 (제 1호)
교황 바오로 6세는 우리가 앞으로 신자들에게 교회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공의회 정신에 상응...

대인 영세의 새 의식서 (儀式書)
1967년 5월호 (제 1호)
성 토요일 부활 전야의 전례를 개정한 중요한 발기인 중 한 사람인 P. Low 는,비오 12세가 완성한 개...

공의회는 왜 있었는가
1967년 8월호 (제 2호)
I. 머 리 말 역사적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종결된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분명히 그 공...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
1967년 8월호 (제 2호)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헌장 중에서 가장 핵심이라 볼 수 있는「교회에 관한 교의헌장」(Constitutio Dogm...

결혼문제에 관한 고찰(考察)
1967년 8월호 (제 2호)
우리 교회는 소위 결혼의 불가해소성을 부르짖으며 교회에서 성사로써 이루워지는 혼배는 물론 사회적인 정...

젊은 세대
1967년 8월호 (제 2호)
인간은 날 때부터 악(惡)으로만 기울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선(善)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생물계의 진화(進化)는 확실한 것인가
1967년 8월호 (제 2호)
많은 신자들은 진화론에 대한 말을 들을 때에 불안감을 느낀다. 들리는 바에는 모든 생물들이 간소한 형태...

복음은 교회 안의 모든 신심의 기준이다
1967년 8월호 (제 2호)
I. 문제 제기 작년 여름에 「덕행의 실천」이란 책이 발간되었다. 그 책은 예수회 수련장 Rodriguez 신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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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輯 · 그리스도人의 가난 1976년 9월호 (제 47호)

가난한 敎會

김 夢 恩 (明洞本堂 神父)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이사 61,1 이하; 루가 4,18). "맹인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이사 61,1; 마태 11,5).

I. 福音에 나타난 가난한 敎會의 모습

우리 교회의 본래의 모습이 가난한 자로서의 그것이었음은 여기에서 再論할 필요도 없겠지만, 구체적으로 主님이 福音을 통해서 어떻게 그 모습을 보여주시고 계신가를 살펴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선 혼인잔치에 招待받은 모두가 한결같이 못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그러자 "집주인은 대단히 怒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큰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맹인, 절름발이 할 것 없이 모두 이리로 데려오너라'하고 명령했다"(루가 14,21). 이것으로써 우리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이며,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것임을 表明했다고 본다. 사실 初代敎會에서는 '가난한 者'만이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했다. 특히 富者靑年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 사실은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부자청년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남을 속이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마르 10,19)는 계명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지킨 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다. "아직도 당신에게 한가지 부족한 점이 있읍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르시오"(10,21). 그러나 그 靑年은 큰 부자였기 때문에 무척 침울한 채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을 보시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루가 18,18-27; 마태 19,16-26; 마르 10,17-27 참조).

사실 그리스도 자신의 생활이 가난했으며, 舊約時代의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으셨다. 그래서 말구유에서 탄생하셨고, 30년 동안 木手生活을 하셨을 뿐 아니라, 公生活에 있어서도,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는 스스로를 낮추사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필립 2,8) 하셨다.

그것은 진정한 가난함이란 겸손한 마음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는 靈的인 가난함만이 진정한 보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즉 靈的인 淸貧없이 福音의 寶貨를 가질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읍니다"(마태 6,34).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덧붙여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6,33; 13,22; 묵시 2,9; 3,17 참조). 또한 사도들에게는 傳道旅行을 하는 데 있어서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분부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넣어가지지 말며, 신은 신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가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그런데 마태오(10,10)와 루가 (9,3; 10,4)는 지팡이나 신발도 가지지 말라고 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使徒的 淸貧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신 것으로서,財富에 대한 內的自由 없이는 福音을 옳게 해명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복음을 옳게 전할 수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내적자유에 의해 自發的인 淸貧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現實社會에서 실제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를 해당시키고 계신다. 예를 들어, 가난한 과부가 동전 한 닢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이 헌금궤에 넣은 돈보다도 더 많은 돈을 넣었읍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처지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자기가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입니다"(마르 12,43-44; 루가 21,3-4).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가난한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루가 6,20)라고 하셨으며, 가난한 라자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있으나 부자는 죽은 후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을 말씀해 주고 계신다(루가 16,19-31 참조). 그리고 실제로 使徒들은 自己들의 재산을 다 빼앗기면서도 그보다 더 영구한 재산을 차지할 수 있음을 깨닫고 기뻐했던 것이다(히브 10,34 참조).

II. 敎父들이 받아들인 가난한 敎會像

예수님 시대에 함께 살고 있었던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게 됨에 따라서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사라져 가고 제자들의 제자들이 교회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기들의 스승을 통해서 들었고, 그 스승의 가르침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임을 자각하고 실천했다.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조금도 어김없이 후세에 전하기 위해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敎父들의 神學이다.

2世紀 이후 예수님의 직접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그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어 받아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바를 그대로 실천해 갔다. 그들은 교회가 가난한 자의 것임을 아무런 異議와 抵抗 없이 받아들이고 실천해갔다. 특히 敎父들이 받아들인 '가난한 ?會'란 곧 '奉仕하는 ?會'임을 자각했다. 따라서 사회에 대한 봉사없이 가난한 교회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하신 주님의 모범에 따라 민중들에게 행동으로써 보여 주었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당신들 중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러온 것입니다"(마르 10,43-45; 마태 20,26-28). 그리고 루가는 다음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당신들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합니다"(루가 22,26). 그리고 사도들도 봉사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말해둡니다"(II 고린 4,5; I 고린 9,19 참조). 사도 베드로도, 사목자는 지배자가 아니고 봉사자임을 강조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떼를 지배하러들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모범이 되십시오"(I 베드 5,3).

敎父들도 역시 그 모범을 따라 봉사자로서, 가난한 자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權威를 세웠는데, 그것은 "청렴을 통해서 빛나는 靈性 그 자체의 권위"(꽁가르 著, 奉仕하는 敎會, 가난한 敎會가 되기 위하여, 韓國語 譯, p. 36)였다.

大聖 그레고리오(540-604)가 敎皇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말과 "나는 모든 사제의 종이다"(Cuactorum sacerdotum servus sum)라는 말을 진심에서 우러나서 사용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소위 최고이며 普遍的인 大修道院長과 같이 아버지로서의 권위에 어머니로서의 다정한 配慮를 결부시켜 스스로의 권위를 행사했다"(前揭書; P. 39). 또 428년에 교황 첼레스띠노 1세는, 아를르의 주교로 임명된 레린의 대수도원장 호노라또가 특별한 의복을 입은 것(뚜니첼리와 허리띠를 착용한 것)을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교들의 복장은 일반인과 완전히 똑같았으며, 典禮儀式에 있어서 그들은 다만 청결한 것을 착용하는데 불과했다고 한다. 또 첼레스띠노 ?皇은 나르봉 ?區의 主敎에게 다음과 같은 서간을 보낸 일이 있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의복이 아니라 지식에 있어서이며,생활양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하는 것들에 의해서입니다"라고.

그러나 "권위는 단순히 자기 포기와 봉사의 정신으로써 행사해야 한다고 결론짓는 것만으로써는 부족하다. 물론 그것은 유익한 發展으로 인도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 착한 牧者는 스스로 자기 羊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양떼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어느 代價를 요구하지 않고,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들이 돌봐주어야 할 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우리는 저들의 종이기 때문에, 信者들은 우리의 주인 것이다"(前揭書, P. 64).

성 보나벤뚜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逸話가 있다. 그가 아씨시에서 열리는 프란치스꼬 總會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 그의 조력과 위로를 구하는 한 修士가 그를 불러 세웠다. 그가 멈추어 서서 예의 수사와 이야기를 시작하자, 함께 가던 일행들이 "보다 더 중대한 일이 있지 않느냐"하며 가기를 재촉했다. 그러자, 總會의 議長인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봉사자이며 종입니다. 저분은 나의 주인입니다"라고. 또 聖 빈첸시오는 가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나의 主人입니다." 어느 사람이 진정으로 종이라면, 다른 사람은 주인이다. 따라서 주인은 명령하는 자이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 하며, 그 주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 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자기의 主敎成聖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하느님은 나 自身으로부터 나를 데려가시어 당신의 것으로 만드시고, 이웃에게 나를 내주었읍니다. 내가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성 베르나르도가 敎皇 에우제니오 3세에게 보낸 글에는 다음과 같이 봉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권력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봉사하도록 위탁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주교라는 이름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임무를 의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使徒的인 형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지배는 금지되고, 봉사가 주어진 것입니다. …… 당신은 所有와 支配를 그리스도께 맡기고, 오직 교회를 돌봐야 할 일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위에 서는 일과 지배하는 것은 금지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까? 바로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나 큰 配慮로써 당신은 일을 해야 합니다. 또 이웃을 위해 일하고, 그들의 이익을 도모하며, 주의하고 봉사하기 위해 윗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De Consideratione 중에서).

그리고 성 아우구스띠노가 말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여러분을 위해서 내가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恐怖를 일으켜 주지만,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나를 慰勞해 줍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主敎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크리스챤입니다. 前者는 職名이요, 後者는 恩寵의 이름이며, 전자는 위험한 이름이지만, 후자는 구원받을 이름입니다"(강론집 중에서 번역 교회헌장 제4장 32항에서 引用).
III. 꽁가르 神父가 表明한 가난한 敎會

第2次 바티칸 公議會의 中楓役割을 담당했던 神學者의 한 사람으로서, 프랑스의 꽁가르 神父는 그의 著書「봉사하는 敎會, 가난한 ?會가 되기 위하여」(Pour une Eglise Servante et Pauvre) (筆者의 拙譯으로 가톨릭 출판사에서 發刊)에서는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봉사하는 교회가 아니고서는 결국 교회의 存在意義를 찾기 힘들다고 역설하고 있다. '가난'과 '봉사'는 서로 연결된 것이며, 車輪의 兩바퀴와 같은 것이다. 그러면 그 개략적인 것을 말함으로써 '가난한 敎會像'을 서술해 보고자 한다.

1. 奉仕하는 敎會

앞에서도 言及한 바 있지만, 특히 꽁가르 신부는 봉사하는 교회의 전통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敎에 있어서 萬物의 尺度는 眞福八端의 精神이다. 교회에 있어서의 권위는 '지배하는 것,' 또는 강제로 의무를 부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奉仕, 謙遜, 無私, 獻身인 것이다'라는 말은 周知의 사실이다"(前揭書, 筆者拙譯, Ρ. 64).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봉사자는 하느님의 심부름꾼, 종으로서 행동할 의무와 보람이 있다고 역설한다, 특히 "diakonia(봉사)라는 의미에서의 그리스도敎的 敎職을 구성하는 움직일 수 없는 질서가 있다. 그것은 '말씀' 과 典禮에 대한 봉사를 行함으로써 本仕者로서의 全?會를 形成"(前揭書,p. 69)하기 때문이라고 한다.「교회헌장」에서도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께서 당신 백성을 司牧할 牧者들에게 맡기신 職務는 참 봉사로서 성경에는 뜻깊게도 '디아코니아 (diakonia)' 즉 '섬김'이라고 표현되어 있다"(2장 24항).

그리고 mission이라는 말의 넓은 의미에서의 해석은 "파견한 사람이 파견된 사람에게 파견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한 충분한 수단을 부여하면서 위탁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mission이란, 그리스도敎的 생활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혹은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주신 모든 은혜 중에 포함되어 있는 봉사와 의무와 책임을 의미한다"(前揭乳 P. 70). "그리스도의 神秘體 全體는 봉사하기 위해서, 또한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거룩한 것이며, 司祭的인 것이다"(I 베드 2,6 이하; 출애 19,6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평화의 주이신 하느님의 뜻에 의해 조직된다(I 고린 14,33-40 참조). "하느님은 종들 중 어느 사람을 뽑아 봉사하는 데 있어서 지도자가 되도록 부르신다"(前揭書,p. 74).

그러나 이러한 모든 봉사의 개념들은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한 데에서만 빛을 발한다. 信者 그 자체에 속하는 봉사의 의무에 따라 어느 사람은 명령하고, 어느 사람은 복종한다. 즉 그들은 모두 長上으로서, 또 한사람의 兄弟로서, 그리스도와 그들의 형제들을 위한 봉사에 專念하는 것이다"(前揭書, P. 78). 그리고 이어 "우리는 사랑 가운데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에페 4,15)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 있어서의 봉사와 청빈은 모두가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配慮에 따라 만민의 행복과 救靈을 위한 것이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적극적으로 사회와 대화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의 정신에 따라, 겸허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봉사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으로써 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 있어서의 健全함이란 우리들 각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자신의 일일 뿐 아니라,他人과의 진실된 親交를 實現化시키는 일인 것이다. 이와같이 해서 대화하는 교회는 또한 가난함과 봉사의 교회가 될 것이며, 사람들에게 전해줄 복음의 말씀을 지니는 교회가 될 것이다. 즉 이 世上의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상과 함께, 이 세상을 위해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前揭書, P. 117).

2. 가난한 敎會

奉仕에 대한 글을 쓴 꽁가르 신부는, 가난한 교회에 대해서는 자신의 글을 쓰는 대신에 第 2次 바티칸 公議會의 ?父들이 공의회 정신에 따라 가난한 교회를 이해하고, 가난한 교회가 되고자 노력하는 모습, 즉 그들의 글을 수록해 놓았을 뿐이다. 역시 거기에서도 奉仕와 淸貧은 함께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간추려 紹介한다.

특히 第2次 바티칸 公議會의 개최에 있어서, 요한 23세께서 全世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봉사자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명한다, "信望愛 三德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굳게 密着하는 것은 이 세상의 과업에 대해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섬기러, 오신 사랑하올 주님을 따라 남김없이 우리의 兄弟들에게 봉사하는 일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읍니다. 우리도 또한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低開發國家들을 앞에 놓고 교회는 스스로의 참 모습을 提示하면서, 그 모습대로 存在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萬人의 敎會,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로서 말입니다"(1962년 9월 11일, 世界에 보내는 메시지 중에서)·

한편 現 敎皇 바오로 6세도 교황대관식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정 내가 이 戰鬪의 敎會(地上의 ?會)에 있어서 활동한 권력의 敎階的단계의 최고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그와 동시에 하느님의 종의 가장 낮은 지위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통감합니다. 이런 이유로 권위와 책임, 영예와 겸손, 권리와 의무, 권력과 사랑은 기묘하게도 ㅡ致하고 있읍니다. 그리스도의 代理로 선출된 나는 그리스도의 ?訓을 잊지 않고 있읍니다. '당신들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합니다'"(루가 22,26) (1963년 6원 30일, 대관식에서).

보로니아의 大主敎 레르까로 樞機卿은, 公議會의 全 테에마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면, 現世界에 교회의 설 땅은 없다고까지 말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만일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공의회의 많은 테에마 중의 하나로서만 취급한다면, 우리는 현대의 가장 진실하고, 가장 깊은 요구에 응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모든 크리스챤이 품고 있는 일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많은 테에마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공의회의 테에마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 공의회의 목적이 자주 되풀이된 것처럼, 만일 교회를 복음의 眞理에 보다 밀접하게 適應시키고 또한 현대의 여러가지 문제에 보다 더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이 공의회의 중심 테에마는 실로 가난한 사람의 교회라 말할 수 있읍니다"(Dolmentation Catholique, 1963, Col. 321, no 2).

그리고 교회가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에 자칫 忘却되었던 가난에 대한 再認識과 더불어,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각성을 촉구한, 릴르의 主敎 리에나르 樞機卿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여러 세기를 지내오는 동안 약간 흐려진 면을 또다시 명료하게 해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가난함이라는 면입니다. 使徒들은 가난한 갈릴래아의 漁夫에 불과했으며, 主님 자신이 빈곤한 중에서 생활하시기를 원하셨음을 기억한다면, 교회는 더욱 더 이 現實에 완전히 忠實하고자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Le Monde, 1963년 5월 12-13인).

리용의 大主敎 제르리에 추기경은, 교회는 內面에서만 가난할 뿐 아니라, 外面에 있어서도 가난한 형태를 취해야 하며, 靈魂의 양식뿐 아니라, 肉身의 빵까지도 베풀어주는 자로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富者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교회는 부자의 외관까지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근본적인 일입니다. 교회는그 진정한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1962년 9월 11일, 敎皇 요한 23세가 '교회는 萬人의 교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이며, 또한 그렇게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듯이 교회는 자기 자녀들에게 우선 육신의 빵과 영혼의 빵을 마련해주고 배려하는 貧者의 어머니여야 합니다. 교회는 富裕한 자들로 하여금 필수품이 결핍되고 있는 자들에게 그것을 베풀도록 인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교로서의 우리들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說敎하고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문제를 公議會의 中心 테에마로 해야 합니다. 이번 공의회는 이 사실을 강조하는 기회가 되어야만 하겠읍니다"(Equipes Enseignantes, numero specie 2e trimestre, 1962-63, p. 89).

현재 우리 가톨릭敎會에서 사용하고 있는 온갖 典禮用具라든가, 聖職者의 祭衣, 그밖의 主敎들의 冠이나 지팡이 등이 모두 우리 교회 본래의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고, 될 수 있으면 그러한 것들을 개선하든가, 아니면 使徒時代로 되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아리스의 휴이게 主?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교로서의 나는 모든 것을 갑자기 간소화시킬 수는 없읍니다만, 그러나 전통에 의한 典禮의 儀式이나 그 밖에 내가 입은 의복, 그리고 聖務중이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나에게 베풀어지고 있는 존경의 표지들에 대해서 나는 自問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區 내에는 여러가지 존경의 標識가 있읍니다만,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면 좋겠읍니까? 다음 성 바스트 祝日에 參事議員을 임명하는데, ?區내의 많은 司祭들은 단순히 19세기로 되돌아가는 그리스도의 정신보다도 '世俗의' 정신에 속하는 이와같은 慣例를 중지하도록 원하고 있읍니다. 사제로서의 우리들에게는 예를 들어 교회의 장식에 대한 문제가 있읍니다. 성 요한·크리소스토모(金口)가 여러 차례나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聖器를 팔았읍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를 모방할 필요는 없겠읍니다만,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굶어 죽어 가려 하고 있는 오늘날 이 시기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어떠한 훌륭한 것이든, 어떠한 값비싼 것이든간에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읍니다"(Documentation Catholique, 1963, Col. 323-24).

역시 그와 똑같은 말을 러그호드의 메르시에 主敎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많은 主敎들은 이미 자신들의 복장을 한층 더 가난하게 하고 간단하게 할 것을 채택했읍니다. 왜 우리는 더 나아가서 '金도 銀도 가지지 말라'는 복음서의 권고를 주교의 표시에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 보통 재료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또 주교에게 부여된 世俗的인 존경의 칭호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할 때, 진정 가난한 정신의 참 증거자가 될 것입니다· ······ 또 典禮에 있어서의 祭衣와 생활양식 등을 보다 더 간소화시킬 수 없는 것일까요? 물론 전례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사용해야 하겠읍니다만, 그것은 곧 개인 생활에서까지 값비싼 것을 사용해도 좋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가난한 상태에 있음을 발견한 최초의 공의회입니다. 즉 교회는 세속적 권리를 가지지 않고, 敎皇職은 정치적 권력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한층 더 빛나는 존재로서 그 전보다도 더욱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되어 있읍니다. 이와같이 再發見된 淸貧으로써 보다 더 聖靈의 인도하심에 따라 일치를 위한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세상와 고통에 민감하게 행동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봉사하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겸손함이 흘러나올 것입니다"(Εquipes Enseignantes, no. spec. 2c trimestre, 1962-63, pp. 89-90).

교회가 가난한 자(貧民, 勞動者, 農民)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벗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교회는 설 땅을 잃게 될 뿐 아니라,그 存在意義마저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안티오키아의 맥시몬 總大主敎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敎會와 貧民' 즉 교회를 진정으로 萬民의 교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노력해야 할 일이 있읍니다.…… 가난함이란 교회에 있어서 死活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교회는 세계의 노동자를 잃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히 서부 유럽의 몇몇 지방에서 많은 노동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떠나고 있다는 사실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Εquipes Enseignantes, no. spec. p. 87) ·

또 교회가 부유층과 손을 잡고 빈민들을 돌보지 않을 뿐 아니라, 차별 대우까지 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을 지적하고 그것이 福音傳播의 장애라고 말한다. 칸보레의 게리 주교가 그것을 표명했다. "제2의 福音的 價値는 청빈과 단순함입니다. 많은 庶民들은 교회에 있어서의 外見的인 부유함과 화려한 예식과 그 外觀, 그리고 예배식에 있어서도 부자나 '地位'를 존경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에 대해 비난합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에는 자기의 앉을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 서민들의 복음화에 대한 진짜 장애물인 것입니다.……  1962년 9월 11일, 교황은 스스로 그 연설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읍니다. '우리는 가장 비천한 사람들에 대해 깊은 心慮를 기울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는 굶주림과 비참과 無知로 괴로와하는 군중들을 볼 때 동정을 금할 길이 없읍니다. 인간 및 사회의 크나큰 문제, 특히 빈민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상설 사무국이 설치되도록 계획했읍니다"(1963년의 敎書 중에서).

IV. 結論을 대신해서

눈부신 社會發展과 더불어 貧富의 격차가 너무나도 심해가고 있는 現今의 세계는 여러 모로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弱者의 편에 서서 가난한 사람들의 옹호자로서 교회는 그들에게 최대의 봉사를 아끼지 말아야할 위치에 있다. 그것은 교회의 創立時부터 우리 敎會가 지닌 본래적 사명이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현재 우리 교회가 그러한 위치를 固守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전파에 많은 支障을 초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약간 그 양상이 다르다. 社會正義에 대한 교회의 確固한 태도는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교회가 서야 할 좌표를 말해 주는 것이 된다.

끝으로 南美의 아르헨티나 레콘키스타의 이리아르데 主敎가 르 몽드(Le Monde) 誌에 기고한 글을 소개하고, 결론을 대신코자 한다. "20세기에 있어서의 우리 그리스도 교회의 가난한 주교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宣言한다는 것은 진정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메시지는 최초로 降生, 말구유, 十字架의 가난 속에 잠겨 여우(狐)도 가지는 굴조차 없는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벗'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고 잃어버린 銀錢의 그 다정한 비유를 말하던 저 勞動者에 의해 설파된 메시지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메시지는 가난한 階級에 속하여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즉 그들 중 65%는 굶고 있으며, 빈집과 같은 마을, 슬럼 거리, 움집과 판자집에서 살고 있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전하지 많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메시지를 높은 대리석 祭壇과 主님의 '官邸'에서 말하고 있으며, 主? 미사에서는 기묘한 主敎冠을 쓰고 바로크 시대의 이해하기 어려운 樣式과 알아듣기 힘든 敎會用語를 사용하고 있읍니다. …… 이 역사와 전통의 모든 重壓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아가는 것은 용이한 일은 아닙니다"(Le Monde, 1963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