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신자들의 기도」에 관한 고찰(考察)
1967년 5월호 (제 1호)
1. 기도의 역사와 그 의미 신자들의 기도 즉 공동기도는 새로된 것이 아니고 벌써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다....

제 2차 공의회에서 제시된 평신도 사도직
1967년 5월호 (제 1호)
서 론(序論) 평신도 사도직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취급한 문제 중에 가장 비중(比重)이 큰 문제 중...

새 교리서의 교회상(敎會像)
1967년 5월호 (제 1호)
교황 바오로 6세는 우리가 앞으로 신자들에게 교회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공의회 정신에 상응...

대인 영세의 새 의식서 (儀式書)
1967년 5월호 (제 1호)
성 토요일 부활 전야의 전례를 개정한 중요한 발기인 중 한 사람인 P. Low 는,비오 12세가 완성한 개...

공의회는 왜 있었는가
1967년 8월호 (제 2호)
I. 머 리 말 역사적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종결된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분명히 그 공...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
1967년 8월호 (제 2호)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헌장 중에서 가장 핵심이라 볼 수 있는「교회에 관한 교의헌장」(Constitutio Dogm...

결혼문제에 관한 고찰(考察)
1967년 8월호 (제 2호)
우리 교회는 소위 결혼의 불가해소성을 부르짖으며 교회에서 성사로써 이루워지는 혼배는 물론 사회적인 정...

젊은 세대
1967년 8월호 (제 2호)
인간은 날 때부터 악(惡)으로만 기울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선(善)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생물계의 진화(進化)는 확실한 것인가
1967년 8월호 (제 2호)
많은 신자들은 진화론에 대한 말을 들을 때에 불안감을 느낀다. 들리는 바에는 모든 생물들이 간소한 형태...

복음은 교회 안의 모든 신심의 기준이다
1967년 8월호 (제 2호)
I. 문제 제기 작년 여름에 「덕행의 실천」이란 책이 발간되었다. 그 책은 예수회 수련장 Rodriguez 신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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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輯. 그리스도ㅅ의 가난 1976년 9월호 (제 47호)

가난 : 연대성과 반항

G. 구띠에레즈

근자에 몇년 동안 우리는 교회내에 다시금 가난을 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증거하고자 하는 경향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아왔다.⑴ 이런 일은 먼저 최근에 창설된 여러 수도자 공동체들 내에서 일어났거니와, 그러나 이것은 '수도자의 가난'이라는 좁은 한계를 급히 넘어서서 교회의 다른 부문에서 도전과 문제점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가난은 현대 그리스도교인 영성의 중심 과제의 하나가 되었고, 실로 하나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가난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보다 충실히 모방하고자 하는 관심에서 자연히, 가난의 문제에 있어서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반동적인 표징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며 항쟁적인 태도가 대두하게 되었다.

이런 관심을 보여준 사람들은 一 요한 23세를 필두로 하여 ㅡ 계속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을 두드렸다. 공의회 개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한 중요한 메시지에서 요한 23세는 하나의 풍요한 시야를 열어놓았으 니, "저개발 국가들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교회는 있는 그대로의, 되고 싶은 그대로의 ㅡ 만인의 교회요 특별히 가난한 이들의 교회로서의 一 자신을 드러낸다"고 했던 것이다.(2)  과연 공의회의 첫 회기부터 벌써 가난이라는 테에마는 대단한 열기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3) 나중에는 가난 문제에 관하여「스케마 13」(Gaudium et spes 초안)을 능가하는「스케마 14」라는 것까지도 있었다. 공의회의 마지막 결과는 그러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못되고 말았다. 그 문헌들을 보면 가난에 대하여 몇차례 암시하고 있는 바는 있었으나 가난을 주요한 과제의 하나로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바는 없다.(4) 나중에 나온 Populorum progressio에서는 가난과 관련된 여러가지 문제점들에 관해서 어느 정도 더욱 구체적이고 분명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불행과 불의의 대륙에·있는 교회가 가난이라는 테에마에 관하여 그 응당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문제가 남은 것이라고 할 것이니, '복음 메시지의 설교의 진정성은 이 증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5)

가난의 테에마는 근년에는 특별히 영성분야에서 취급되어왔다.(6)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정 부패 위에 수립된 부와 권력에 현혹되어 있는 현대 세계에 있어서 가난은 하나의 불가피한 聖性의 전제조건으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최대의 노력이 경주된 것은 그리스도의 가난을 환기시켜주는 성서의 텍스트를 묵상하는 일이었고 그럼으로써 이를 증거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일이었다.

더욱 최근에는 나날이 풍성해지고 갈수록 정확해지는 성서해석학의 연구에 입각하여 가난에 관하여 본격적인 신학적 사색이 도모되어왔다. 이 첫 시도들에서 오히려 충격적이라 할 하나의 결과가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것은 가난이란 신학적 취급을 매우 적게 받아온 개념이며 어느 모로 보나 아직 전혀 불분명한 개념이라는 사실이다.("해석의 노선들이 이리저리 엇갈리고 있다. 여러가지 상이한 성서해석론들이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매우 다른 맥락 속에서 발전한 것들까지도 포함해서 오늘날 여전히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테에마의 어떤 면들은 따로 靜的으로 구획된 특수분야의 구실을 하고 있어서 가난의 전반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방해가 되고 있다. 이런 모든 요인들이 우리를 불안정한 지경에로 몰아왔던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명석하고 훌륭히 정립된 사상에 의해서보다는 직관에 의해서 꾀를 부리려고 해왔던 것이다.

II. 가난이라는 말의 애매모호성

'가난'이라는 말은 하나의 同音異義語이다. 그러나 이 말의 애매모호성은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개념들의 애매모호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가난'이라는 말로써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한다면 우리는 행로를 분명히 하여 그 애매모호성이 연유하는 근원의 몇가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우리는 나중에 우리가 사용하게 될 여러가지 표현들에 대해서 부여할 의미도 지적해둘 수가 있을 것이다.

'가난'이라는 말은 우선 첫째로 '물질적인 가난', 즉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에 필요한 경제적인 제화의 결핍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는 가난은 현대인의 양심에 의하여 가치를 저하시키는 것으로 생각되며 배척되고 있다. 이런 가난은 그 근본 원인들을 모르고 있는 一 또는 알려고 하지 않는 ㅡ 그런 사람들까지도 싸워서 물리쳐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러나 이 물질적인 가난에다가 하나의 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여 이것을 거의 하나의 인간적이며 종교적인 이상으로까지 생각하려는 경향이 자주 있다. 이것을 검소한 생활이라고, 이 세상 사물에 대한 무관심이며 복음과 일치하는 생활의 한 전제조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그리스도교의 요구들이란 오늘날의 사람들의 큰 열망과는 목적이 어긋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연에의 예속에서 스스로 해방되기를 원하고,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일부의 사람들을 수탈하는 것을 불식시키고 싶어하며, 만인을 위한 번영을 창조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8)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가난'의 이중적이며 모순된 의미로 해서 하나의 언어를 또 다른 하나의 언어에다가 부과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자주 애매모호성을 낳는 원인이 되고 있다. 더구나 물질적인 가난이라는 개념이 계속적인 진화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에 넣게 되면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해진다. 예컨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인 어떤 가치들에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불식시키기를 희망하고 있는 그런 가난에 속한다. 그리스도교인의 생활의 한 '이상'으로서의 물질적 가난 역시 이런 것들의 결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한편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주 가난을 한계상황에 처한 사람들, 곧 우리의 자비의 대상인 '가난한 이들'의 처지에 속하는 것으로 ㅡ 어떤 운명론적인 관점에서 ㅡ 생각하고 체험해왔다. 그러나 이미 사정은 이와 같지가 않다. 사회적인 계급들이, 국가들이, 또 온 대륙들이 자기들의 가난을 더욱 더 뚜렷이 의식해가고 있고, 그 근본 원인을 알게 되면 거기에 반항하여 일어나고 있다. 현대의 현상은 하나의 집단적인 가난이며, 이 집단적인 가난은 이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끼리 연대적인 결속을 이루고 조직화하여 자기들이 처해있는 상황과 이런 상황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대항하여 투쟁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 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인 가난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인간이하의 상황이다. 나중에 보겠거니와 성서 역시 이와같이 생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가난하다는 것은 굶어죽는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타인에게 수탈당한다는 것을, 수탈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자기가 인격을 가진 한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적 가난의 의미가 규정되자면 이러한 가난 ㅡ 물질적이요 문화적이며, 집단적이요 항쟁적인 가난 ㅡ 과 관련해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영적 가난'이라는 개념은 더욱 더 분명하지가 않다. 흔히 이것은 단순히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하여 초연한 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란 따라서 물질적인 재화가 없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재화에 집착하지 않는 ㅡ 그것을 실지로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ㅡ 그런 사람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적으로는 가난하면서도 부유한 사람의 경우도 있을 수가 있고, 마음으로는 부자이면서도 가난한 사람의 경우도 있을 수가 있다. 이런 것들은 극단적인 경우들로서 예외적이며 부수적인 데로 주의를 이산시키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런 접근방법은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에 관한 마태오의 眞福에 입각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구경에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유심론적인 관점은 곧장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어 내적 자세란 필연적으로 물질적인 가난의 증거에 의하여 구현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이러한 가난이란 어떠한 가난을 말하는 것인가? 현대인의 양심이 인간이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가난을 의미하는가? 영적인 가난이 구현되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라야 하는가? 혹자는 그처럼 극단에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대답하면서 궁핍과 가난을 구별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증거는 살아가는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지 궁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가난이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사람들이 실지로 생활하며 인식하고 있는 그러한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상적인, 우리의 영적인 가난의 특수한 형태들에다가 맞추어 조작된, 어떤 다른 종류의 가난을 두고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것은 말장난이다 ㅡ 그리고 사람들을 우롱하는 짓이다.

복음적 권고와 계율을 구별하는 것이 또 다른 애매모호성을 조성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복음적 가난은 하나의 특수한 소명에 상응한 하나의 권고이며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의무를 과하는 그런 계율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구별은 '복음적 권고'에다가 초점을 두고 있는 수도생활이라는 좁은 한계에다가 복음적 가난을 감금시켜 버리고는 오랫동안 외부와의 상통을 차단해 놓고 있었다.(9) 오늘날 이 구별은 또 하나의 오해의 장본에 불과한 것이다.(10)

이런 모든 애매모호성과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는 확고한 지반을 딛고 행진해올 수가 없었다. 불확실한 행로를 방황하면서 전진이 어려웠고 길을 잃기가 쉬웠다. 또 매우 막연한 용어에서 헤어나지를 못했고 마지막 분석에서는 현상유지를 정당화하는 일종의 감상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현재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와 같은 처지에서는 이 점이 특별히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다. 우리들 눈앞에는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 예컨대 보쑤에(Bossuet)가 "교회내의 가난한 이들의 탁월한 존엄성"을 논한 글에 대한 여러가지 주석들이 그렇고,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을 가리켜 "하느님께 대하여 굶주림을 느끼는 인간 영혼의 모상"이라고 생각하는 상징론이 그렇다. 혹은 심지어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라는 표현까지도 一 요한 23세의 이론의 여지가 없이 순수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 온정주의의 냄새가 나는 해석에 빠져버릴 위험이 있다.

문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아래에 우리는 적어도 광범한 개요만이라도 약술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ㅡ 어느 영성 작가가 말했듯이 一 가난의 제1형태는 가난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버리는 일이라는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III. 성서상의 가난의 의미

가난은 구약성서에 있어서나 신약성서에 있어서나 하나의 중심 테에마이다. 성서가 취급하고 있는 가난은 간략하면서도 동시에 깊은 의미가 있다. 성서의 가난은 사회적인 상황들을 설명해주고 있으며, 어려움 없이는 전달될 수 없는 영적인 체험들을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자세와 온 백성의 하느님 앞에서의 자세와 사람들의 서로의 관계를 규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사상 주류를 따라가면서 실마리를 풀어내고 시야를 분명히 해보는 것은 가능한 일이니, 그 하나는 욕된 조건으로서의 가난이요 또 하나는 영적 어린이다움으로서의 가난이다. 복음적 가난은 이 두 가지 관점을 비교함으로써 밝혀질 것이다.

I. 가난 : 욕된 조건

성서에 있어서 가난은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하나의 욕된 조건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이 가난의 거부는 성서가 사용하고 있는 어휘에서 매우 분명히 나타난다.(12) 구약성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두고 말할 때에 가장 적게 사용되고 있는 말은 rash 인데, 이것은 비교적 중성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절랑(Gelin)이 말하고 있듯이, 예인자들은 사람들의 현실 생활을 '寫實的'으로 표현하는 말들을 더 좋아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이란 따라서 ebyon이다. 즉 무엇을 바라는 사람, 구걸하는 사람, 무엇인가가 없어서 그것을 다른 사람이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다.(15) 그는 또한 dal 이다. 곧 약한 사람, 피해받기 쉬운 사람이다. '토지의 가난한 이들'(농촌 무산자)이라는 표현은 매우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이다.(16) 가난한 사람은 또한 ani이 다. 허리가 굽은 사람, 과중한 노동에 억눌리어 일하고 있는 사람, 온전한 힘과 정력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천시당하는 사람이다.(17) 그리고 마지막으로그는 anaw이다. 이 말은 앞의 말과 동일한 語根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보다 종교적인 개념ㅡ '하느님 앞에 겸손한 사람' ㅡ이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18)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희랍어 ptokos가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ptokos는 먹고 살아가는데에 필요한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 빌어먹기에 내어몰린 불쌍한 사람을 의미한다.(19)

'가진 것이 없다, 약하다, 허리가 굽었다, 불쌍하다' 하는 말들은 가치가 저하된 인간의 처지를 잘 표현해 주는 말들이다. 이런 말들은 이미 은근히 하나의 저항을 암시하고 있다. 무엇을 묘사하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20) 이 입장은 힘찬 가난의 거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가난이 묘사하고 있는 분위기는 분노의 분위기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분노를 가지고 가난의 원인들이 압제자들의 불의가 지탄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원인은 욥기의 텍스트에 잘 표현되어 있다 :

악한 자들은 경계석을 옮기고

양떼와 그 목자들을 몰아가네.

들에서 제 것 아닌 것을 거두고

부자의 포도밭에서 늦포도를 훔치네.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고

밧줄로 과부의 소를 몰아가네.

아비없는 아기를 품에서 앗아가고

가난한 이의 자식을 볼모로 잡네.

길에서 가난한 이들을을 밀어제치니

비천한 사람들이 한데 엉켜 몸을 숨기네.

가난한 이들은 들나귀같이 일찍 일어나는데,

그 때 들나귀는 먹이를 찾아 광야를 쏘다니는데,

그러나 밤이 내리도록 일한다 해도 자식들은 주려만 가네.

헐벗어 알몸으로 밤을 보내니

추위 속에서 가리울 것이 없네.

언덕에서 붙어오르는 비바람에 젖으니

오로지 한 피난처 바위를 안고 있네.

헐벗어 알몸으로 일하러 가고

주리면서 곡식단을 나르며,

두 벽이 만나는 그늘에서 기름을 짜고

포도주틀을 밟건만 목말라가네.

도성 멀리서 죽어가는 사람처럼 신음하고

상처입은 사람같이 울부젖는데…···

살인자는 미명에 일어나

가련한 천덕꾸러기 몇놈을 죽이네(24,2-12,14).

가난은 운명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가 저주하고 있는 그 사람들 때문이다 :

이는 주님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의 잇따른 범죄로 인하여

나는 그들에게 가차가 없으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에 궁핍한 이를 팔아서이요,

가난한 이들의 머리를 갈아 흙을 만들고

겸손한 이들을 제길에서 몰아내어서이며…··· (아모 2, 6-7).

가난이 존재하는 것은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나쁜 규정들을 내시 명하는 자들에게,

또 압제의 글을 많이 써내는 서기들에게 앙화이로다.

이들은 빈약한 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나의 백성 중 빈궁한 자들의 권리를 빼앗으며

과부들을 저희 노략으로 삼고

고아들을 털려 하는도다(10,1-2).(21)

예언자들은 온갖 종류의 학대행위를 저주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가난에 머물게 하거나 새로이 가난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짓이면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저주하고 있다. 예언자들의 말은 단지 현실의 상황을 암시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손가락을 들어 책망받아야 할 사람들을 지목하고 있다. 기만적인 상행위와 수탈을(호세 12,8; 아모 8,5; 미케 6,10-11; 이사3,14; 예레 5,27; 6,12), 토지의 死藏을(미케 2,1-3; 에제 22,29; 하바 2,5-6), 부정한 법정을(아모 5,7; 예레 22,13-17; 미케 3,9-11; 이사 5,23; 10,1-2), 지배계급의 폭거를(II 열왕 23,30.35; 아모4,1; 미케 3,1-2; 6,12; 예래 22,13-17),노예화를(네헤 5,1-5; 아모 2,6; 8,6), 불의한 세금을(아모 4,1; 5,11-12), 불의한 관리들을 (아모 5,7; 예레 5,28) 저주하고 있다.(22) 신약성서는 부자들의 압제도 저주하고 있다. 특히 루가 복음서(6, 24-25; 12,13-21; 16,19-31; 18,18-26)와 야고보의 편지(2,5-9; 4,13-17; 5,16)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가난을 고발하는 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성서는 가난이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기정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이며 구체적인 준칙들을 말해주고 있다. 레위기와 신명기에는 부의 축적과 거기서 결과되는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단히 상세한 법제가 마련되어 있다. 예컨대 수확 후에 남은 것과, 올리브와 포도를 따고 남은 것을 모아들여서는 안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뜨네기들과 고아와 과부들의 몫이다(신명 24,19-21; 래위 39,9-10). 그뿐 아니라 들판 가장자리까지 깡그리 수확해서도 안된다. 가난한 이들과 뜨네기들을 위해서 일부는 남겨두도록 해야 한다(레위 23,22). 주님의 날인 안식일은 하나의 사회적인 의의가 있다. 이 날은 노예와 뜨네기들을 위한 휴식의 날이다(출애 23,12; 신명 5,14). 3년마다의 十一租는 성전에 갖다 바쳐질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뜨내기와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것이다(신명 14,28-29; 26,12). 빌려 준 돈에 이자를 매기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출에 22,25; 레위 25,35-37; 신명 23,20). 그 밖에 중요한 준칙들로서는 안식년과 경축년을 들 수가 있다. 7 년마다 들은 곡식을 심지 말고 놓아두어야 하는데, 이것은 "너희 백성들 중의 가난한 이들이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함"이다(출애 23,11; 레위 25,2-7).  다만 이 의무가 언제나 수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 시인되고 있다(레위 26,34-35). 7년이 지나면 노예들은 자유를 되찾을 수 있게 되어 있었고(출애 21,2-6), 빚은 탕감받도록 되어 있었다(신명 15,1-18). 레위 25,10 이하의 경축년이 뜻하는 것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23) 보오(Vaux) 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해방이었다.…… 토지의 모든 주민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경지는 곡식을 심지않고 놓아 두었고 모든 이들이 다 자기 조상의 재산에로 되돌아 들어갔다. 즉 따돌림을 받았던 경지와 가옥들이 그 본래의 소유자에게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이들 텍스트의 이면에서 우리는 이처럼 열렬히 가난을 거부하는 세 가지의 주요한 이유를 볼 수가 있다. 우선 첫째로, 가난은 바로 '모세의 종교' 의 의미 자체와 모순되고 있다. 모세는 에집트의 노예신세와 수탈당하고 따돌리는 처지에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해 내었다. 그것은 그들의 인간다운 존엄성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그런 땅에 정주하기 위함이었다. 모세가 해방의 사명을 맡게 된 데에는 야훼의 종교와 노예상태의 제거라는 두 가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

그때에 모세와 아아론이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야훼께서 너희를 에집트 땅에서 인도해 내셨음을 알 것이요 아침이 되면 너희가 야훼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야훼께서 너희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무엇이길래 너희는 우리를 향하여 원망하느뇨?" 또 모세가 이르되 "저녁이  되면 야훼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이 되면 빵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야훼께서 너희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무엇인고?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야훼를 향하여 함이로다"(출애 16,6-8).

야훼의 숭배와 토지의 소유는 양자가 다 동일한 약속에 내포되어 있다.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수탈하는 것을 배격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뿌리에서부터 발견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게 주실 땅의 유일한 소유자이시다(레위 25,23.38). 그분은 당신 백성을 노예상태에서 구해내시고 그들이 또다시 노예상태에 예속되는 것을 허용하시지는 않으실 유일한 주님이시다(신명 5,15; 16,22; 레위 25,42; 26,13). 그리고 이 때문에 신명기는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 형제애의 이상"(26)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가난을 배척할 때에, 모세의 이상의 계승자들인 그들은 과거를 이스라엘 백성의 기원을 돌이켜 지적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의로운 사회를 수립하기 위한 영감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과 불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에집트에서 해방되기 이전에 존재하던 노예상태에로 다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다.

에집트에서 유대 백성이 노예신분과 수탈을 거부한 둘째 이유는, 그것이 '창세기의 명령'(1,26; 2,15)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과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고 지상을 지배할 운명을 타고났다.(27) 인간은 모름지기 자연을 변형시킴으로써만,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만 자기 자신을 성취한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노동을 통하여 실현되는 창조적인 자유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온전히 의식하기에 이른다. 가난에 암시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수탈과 불의는 노동을 어떤 노예적이며 인간 가치를 저하시키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게 된다. 소외당한 상태에서의 노동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노예화시킨다.(28)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과 노예들과 소외당한 뜨내기들을 의롭게 대우하도록 요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 역시 에집트에서는 뜨내기요 노예였다는 것을 환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출애 22,21- 23; 23,9; 신명 10,19; 레위 19,34).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은 비단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과 닮은 존재로 만들어진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또한 '하느님의 聖事'이다. 우리는 이 심오하고 절실한 성서상의 테에마에 대하여 이미 주의를 환기해 둔 바 있거니와,(29) 성서가 가난을 거부하고 있는 다른 이유들도 그 근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가난한 이들을 압박하는 것은 하느님 자신을 범하는 것이요,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들과의 만남 속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우리의 행동은 곧 하느님께 하는 행동이다.

한 마디로, 가난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연대성도 하느님과의 일치도 갈라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은 하나의 죄악의 표현이다. 사랑의 否定의 표현이다. 그것은 따라서 사랑과 정의의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와는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난은 하나의 악이다.(30) 욕된 조건이다. (31) 그리고 그것도 우리 시대에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악이요 욕된 조건이다. 가난을 제거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 속에서 하느님을 직접 대면할 순간에 더욱 가까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가난 : 영적 어린이다움

성서에는 가난에 관하여 생각하는 제2의 노선이 있다. 가난한 사람은 야훼의 '단골'이다. 가난은 "하느님을 환영하는 능력이요, 하느님에의 개방성이요, 하느님에 의하여 사용되고자 하는 용의이며,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이다.(33)

여기서 사용되는 어휘는 하나의 악으로서의 가난을 말할 때 사용되는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는 용어들이 점점 더 절실하고 엄밀히 종교적인 의미를 받아들이게 된다.(34) 이것은 anaw라는 말의 경우에 특별히 그러하니, 이 말의 복수형(anawim)은 무엇보다도 특별히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듭해서 결약에 불충실했던 까닭에 예언자들은 '소수의 남은 이들'이라는 테에마를 다듬어 내게 되었다(이사 4,3; 6,13). 야훼께 언제나 충실한 자세로 남아있는 이들로 구성된 이 남은 이들이 미래의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그 가운데서 메시아가, 그리고 따라서 새로운 결약의 첫 열매들이 출현할 것이었다(예레 31,31-34; 에제 36,26-28). 소포니아 시대(기원 전 7세기)로부터 메시아의 해방사업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가난한' 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가 너희 가운데 고생하고 가난한 백성을 남겨두리니,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이 야훼의 이름으로 보호를 받게 하리라"(소포 3,12-13). 이런 식으로 이 말은 하나의 영적인 의미를 얻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가난은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되었다. "야훼를 찾으라, 그이의 법에 따라 겸손하게 사는 이 땅의 모든 이들아. 의로움을 구하라, 겸손한 마음을 구하라"(소포 2,3). 이런 식으로 이해할 때 가난은 오만의 반의어요 자기만족의 반의어이며, 한편 신앙의 동의어요 주님 안에서 초연성과 신뢰의 동의어이다.(35) 영적 의미는 소포니아 시대 이후에 이스라엘의 역사상의 체험이 계속되는 동안에 더욱 강조되어간다. 예레미아는 하느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 자신을 가난한 자(ebyon)로 일컫고 있다(20,13). 영적인 가난은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이다. "'이 모든 것을 나의 손이 만들었고 이것들이 다 내게 딸렸느니라'는 야훼의 계시 말씀이로다. '내가 굽어보는 자는 가련한 자와 기가 섞인 자와 나의 말을 두려워 하는 자 그런 자니라'"(이사 66,2).

시편은 이러한 종교적 태도를 좀더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가 있다. 야훼를 안다는 것은 그분을 찾는 것이다(9,11; 34,11).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그분께 의탁하는 것이요(10,14; 34,9; 37,40), 그분 안에서 희망을 가지는 것이요(25,3-5.21; 37,9),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며(25,12.14; 34,8.10), 그 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25,10). 가난한 이들은 의로운 이들이요 온전한 이들이며(34,20.22; 37,17-18) 충실한 이들이다(37,28; 149,1). 가난한 이들과 반대되는 자들은 오만한 자들이요 야훼의 적이며 구제할 길이 없는 자들이다(10,2; 18,28; 37,10; 86,14).

영적 가난은 신약성서의 眞福에서 그 최고의 표현을 발견하고 있다. '마태오'의 구절은 ㅡ 견실한 성서해석학상의 연구 덕택으로 ㅡ 이미 해석상 별로 큰 어려움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마태오 5,1(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은 복되도다)에서 "복되다"고 일컬어진 가난은 소포니아 시대 이래로 이해되어 온 바 영적 가난이다. 즉 전적으로 주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36) 그것은 따라서 영적인 어린이다움이라는 복음의 테에마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상통하는 것은 하나의 사랑의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가, 영적인 어린이가 될 필요가 있다. 이 가난은 부와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이 세상 재물에 대한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상의 깊은 뜻이 있다. 하느님의 뜻 이외에는 영속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자세이다. 실로 진복팔단이 근본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모두가 그리스도 그분인 것이다. (37)

루가의 구절,"여러분 가난한 이들은 복되도다"(6,20)에 있어서는 해석상 비교적 큰 문제점들에 봉착하게 된다.(38)

이들 어려운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두 가지의 상이한 노선을 따르고 있다. 루가는 사회 현실에 극히 민감한 복음서 저자이다. 그의 복음서 및 사도행전에는 물질적 가난과 재물 의 공동관리와 부자들의 저주라는 테에마들이 자주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자연히 도출되는 생각은, 그가 축복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이란 그가 저주하고 있는 부자들과 대립되는 말이며, 그 가난한 이들이란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루가가 첫째 진복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이란 '물질적인 가난'인 셈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하나의 이중적인 난점을 드려내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계급을 신성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특혜자들인 셈인데, 그것도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자기들 편에서'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에게 이미 기정사실로 부하되어 있는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의해서 확보되어 있다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특혜자가 되는 셈이다. 이것은 복음적이라 할 수 없으며 루가의 본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일부 주석가들은 주장하고 있다.(39) 이 해석론 안에 속하면서 극단적인 반론을 펴는 이들로서, 이 난점은 피해야 하되 루가 복음서의 구체적인 사회학적 의미는 보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지혜 문학의 관점으로 보는 입장에서 말하기를, 루가의 첫째 진복은 현세와 내세를 대립시키고 있으며 오늘의 고통은 미래의 삶에서 보상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40) 내세의 구원이 현세의 삶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절대가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은 단순히 또 순전히 루가가 불행과 불의를 신성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거기서 초연할 것을 선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같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또 다른 관점에서 설명을 구하게 된다. 그것은 곧 마태오의 관점이다. 루가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마태오와 마찬가지로 영적 가난 즉 하느님에의 개방성이라는 것이다. 루가의 사회적인 문맥에 대한 하나의 양보로서 이 해석은 현실적인 가난을 강조하고 있는 바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해석이 가난을 "영혼의 가난을 지향하는 하나의 특권적인 좁은 길"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할 뿐이다.(41)

이 둘째 계열의 해석은 우리가 보기에는 루가의 텍스트의 의미를 경감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이 복음서 저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가난하다'는 말이 가진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의미를 회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말은 무엇보다도 먼저 현세의 재물의 결핍으로, 더구나 불행과 곤궁으로 특징지워지는 그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이 말은 또한 하나의 한계상황에 있는 사회집단을 가리키며 압제와 자유의 결핍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42)

이런 모든 이유로 해서 우리는 발걸음을 되돌려 어려운 문제점들 一 위에서 우리가 주의를 환기한 바 있는 ㅡ을 재고하기로 하면서, 루가의 텍스트가 가리키고 있는 것도 물질적인 가난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러분 가난한 이들은 복되도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것이니"라는 말은 우리가 보는 바로는 "여러분의 가난을 받아들이시오, 후에 이 불의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보상될 것이니까" 하는 뜻이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역사상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고 있다면, 또 종말론적인 약속들이 ㅡ 참으로 인간적으로 역사적으로 충만한 내용을 가진 이 약속들이 우리에게 지적해주고 있듯이 하느님의 나라란 필연적으로 현세에서의 정의의 재수립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을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즉 "때가 이르러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마르 1,15) 때문이라고 믿지 않으면 안된다. 바꾸어 말해서, 가난한 이들이 완전히 인간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수탈과 가난을 제거하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요, 가난한 이들이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만큼의 정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형제애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가난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은 복된 것이다. 메시아께서 맹인들의 눈을 열어 줄 것이고 주린 이들에게 빵을 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복된 것이다. 하나의 예언적인 관점으로 보는 입장에서 루가 복음서의 텍스트는 우리가 이미 고찰한 바 있는 첫째의 사상 주류의 전통 안에서 '가난하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즉 가난이란 하나의 악이요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와는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는 그 충만한 형태로 역사 안에 들어왔고 인간 존재 전체를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44)

IV. 종합의 시도 : 연대성과 반함

물질적인 가난은 하나의 욕된 조건이다. 영적인 가난은 하느님에의 개방성과 영적인 어린이다움의 자세이다. '가난'이라는 말의 이 두 가지 의미를 분명히 했으니 우리는 갈길을 뚜렷이 한 것이요, 이제 그리스도교인의 가난의 증거를 보다 잘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우리는 이 말의 제3의 의미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니, 그것은 곧 연대성과 반항의 헌신으로서의 가난이다.

우리는 처음 두 가지 의미를 배제했다. 그 첫째 것은 미묘하게 기만적이요, 그 둘째 것은 편파적이며 미흡하다. 우선 첫째로 '물질적인 가난' 이란 성서가 열렬히 주장하고 있듯이 배척되어야 마땅한 것인데, 그렇다면 그러한 가난의 증거가 그리스도교인의 이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그러한 조건을 열망하는 셈이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따라서 보다 훌륭한 생활조건을 창조하는 존재라는 이상에 전혀 배치되는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로서, 그것은 가난의 원인인 불의와 수탈을 본의 아니게나마 정당화시키게 되는 셈이다.

또 한편 '영적 가난'에 관한 성서의 텍스트를 분석해 본 결과에 힘입어 우리는 그것이 직접 혹은 일차적으로는 현세의 물질적인 재물에서 내적으로 초연한 자세, 즉 물질적인 가난으로 그 자체를 구현함으로써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그러한 영적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적 가난이란 좀더 완전하고 심오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바치는 자세이다. 그것이 경제적인 재화를 사용하거나 소유한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피한 사실이나 그것은 이차적이며 부분적일 뿐이다. 영적인 어린이다움, 그것은 하나의 받아들이는 능력이지 하나의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다 ㅡ 은 하느님과 인간과 사물 앞에서의 인간 존재의 자세 전체를 규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의 진정한, 실질직인, 구체적인 가난의 증거의 복음적인 의미를 어떻게 의미해야 하는가? Lumen gentium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가난의 가장 깊은 의미를 찾으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 "그리스도께서 가난 속에서 또 압제 하에서 구속사업을 수행해내시듯이, 교회도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같은 길을 걷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그리스도 예수께시는 본성으로 하느님이시면서도···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본성을 취하셨으며'(필립 2,6) '부요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었다'(II 고린 8,9). 이와같이, 교회가 그 사명을 수행해내는 데에는 인간적인 자원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 만, 교회가 설립된 것은 현세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모범에 의해서까지도 겸손과 극기를 전파하기 위해서인 것이다"(8항). 강생은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해방하여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시었고 죽으시었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시었다"(갈라 5,1).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죽음을 불식하고 하나의 새로운 생명에로 들어가는 것이다(로마 6,1-11 참조).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자유의 봉인이다.

제 2 이사야에 예언되어 있는 바 인간의 굴욕적이고 죄스런 조건을 입는 일을, 바오로는 하나의 자진해서 가난해지는 행위로 표현하고 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읍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읍니다"(II 고린 8,9). 이것이 그리스도의 굴욕, 그분의 kenosis(필립 2,6-11)이다. 그러나 그분이 인간의 죄스런 조건과 그 결과들을 입으신 것은 그것을 이상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요 그런 사람들과의 연대성 때문이다.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속하기 위함이요 당신의 가난으로 그들을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다. 인간의 이기심을 거스려, 인간을 갈라놓는 모든 것을 거스려, 부자와 가난한 자,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압제자와 피압제자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모든 것들을 거스려 싸우기 위함이다.

가난은 사랑과 해방의 행위이다. 그것은 救贖的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수탈과 소외의 궁극 원인이 이기심이라면 자진해서 가난을 선택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이웃사랑이다. 그리스도교인의 가난은 가난한 이들 과의, 불행과 불의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성의 헌신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이 헌신은 죄의 결과인 악을, 일치의 파괴인 악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난을 이상화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가난을 가난으로 ㅡ 하나의 악으로 ㅡ 받아들여 거기에 반항하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하여 싸우는 문제이다. 리꾀르(Ricoeur)가 말하고 있듯이 가난을 거스려 싸우고 있지 않는 한 참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이 연대성으로 해서 一 그것은 특정한 행동으로, 하나의 상황방식으로, 자기의 사회적 계급과의 절연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ㅡ "또한 가난하고 수탈당하는 이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수탈당하는 처지를 의식하게 하고 거기서의 해방을 추구하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사랑의 표현인 그리스도교인의 가난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성이요 '가난에 대한' 반항이다.(45) 이것이 가난의 증거의 구체적 현대적인 의미이다. 그것은 가난 자체를 위하여 가난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실로 모방하기 위하여 가난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죄와 그 모든 결과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인간의 죄스런 조건을 입는 것을 의미하는 그러한 가난이다.(46)

루가는 초대교회에 있어서의 재물의 공동관리를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사행 2,44),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사람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쓸 수 있게 하였다(사행 4,32). 그들은 이 일을 깊은 일치로써,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상동) 행했다. 그러나 뒤뽕(Jacques Dupont)이 바르게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은 가난을 하나의 이상으로 내세우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라고는 아무도 없도록 도모하는 문제였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사행 4,34-35). 재산 공동 소유의 의미는 분명하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난을 없애는 것이다. 뒤뽕은 바르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 "재물을 공동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따라서 가난이라는 하나의 이상을 좋아해서 가난하게 되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게 되기 위함인 것이다. 추구되는 이상은 거듭 말하거니와 애덕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참 사랑이다."(47)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가난'이라는 말은 비단 막연하고 예수장이 냄새만 날 뿐 아니라 또한 어딘지 모르게 감상적이고 방부제 냄새가 나는 말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이란 압박받는 사람이다.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이요 지극히 기본적인 권리를 위하여 싸우고 있는 무산자 대중의 일원이다. 그는 수탈당하고 약탈당하는 사회계급이요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국가이다. 오늘의 세계에 있어서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연대성과 반항은 그것이 해방을 의미하고 있는 한 하나의 명백하고 불가피한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압박받는 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압박하는 자들을 대항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 시대에 있어서 또 우리의 대륙에  있어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개인적인 모험을 ㅡ 심지어는 자기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ㅡ 감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ㅡ 또 비그리스도교인들이 ㅡ"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적 과정에 헌신하고 있으면서 이런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하여 재래의 '이 세상의 재물의 포기'와는 다른 새로운 살아있는 가난의 길을 출현시키고 있다.

모름지기 가난을 배척함으로써만 그리고 가난에 반항하기 위해서 스스로 가난해짐으로써만, 교회는 유독 교회 자체에만 고유한 어떤 것을, 곧 '영적인 가난'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에의 인간과 역사의 개방성을 설교할 수가 있는 것이다.(48) 모름지기 이렇게 함으로써만 교회는 진실되게 ㅡ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ㅡ 인간에게 모든 불의를 고발하는 교회의 예언자적인 기능을 다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름지기 이렇게 함으로써만 교회는 인간을 해방하는 말씀을, 진정한 형제애의 말씀을 설교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49)

오직 가난한 이들과의 진정한 연대성과 우리 시대의 가난에 대한 현실적인 반항만이 가난의 신학적인 논의에 필요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문맥을 제공해 줄 수가 있다. 가난한 이들과 소외당한 이들과 수탈당하는 이들에 대한 충분한 헌신의 결여, 거기에 아마도 오늘날 가난의 증거에 대한 견실한 사색이 부재하는 근본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특별히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증거가 교회의 사명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불가피하고 대단히 절실한 하나의 표징인 것이다. 

(原文 : Gustavo Gutierrez, Chap. 13s Poverty: Solidarity and Protest, A Theology of Liberation, New York, 1973, pp. 287-306. 鄭漢? 譯)

〔註〕

(1) 이 章은 1967년 7월에 Montreal 대학교에서 "The Church and the Problems of Poverty"라는 제목으로 행한 일련의 강의안을 요약한 것이다. 이론을 재검토하고 참고서적을 새로이 시의에 맞추었다.

(2) 1962년 9월 11일의 라디오 메시지. The Pope Speaks 8, no. 4(Spring 1963): 396.

(3) "만일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라는 테에마를 공의회의 여러 테에마들 가운데 하나로서 취급한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가장 진실되고 가장 깊은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요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일치의 희망에도 부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것들처럼 하나의 테에마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은 우리 공의회의 테에마 '자체'이다"(1962년 12 월 6일의 Lercaro 추기경의 연설 ; 원문은 La Docmnentation Cathclique 60, no. 1395, March 3. 1963, col. 321, n.2에 있다).

(4) 가난에 관한 언급의 대부분은 Lumen gentium (16)과 Gaudium et spes (14)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일 중요한 텍스트는 Lumen gentium 8항이다.

(5) "Poverty of the Church"를 논한 Medellin 문헌과 그밖에 앞서 7장에서 인용한 라틴 아메리카 교회의 성명서들을 보라.

(6) 예컨대 다음 저서들을 보라 : Pie-Raymond Regamey,Ο.P., Poverty: An Essential Element in the Christian Life, trans. Rosemary Sheed (New York: Sheed & Ward, 1950); R. Voillaume, Seeds of the Desert(Nοrτe Dame: Fides Publishers Association, 1955): Paul Gauthier, Chirst, the Church and the Poor, trans. Edward Fitzgerald (Westminster, Md.: The Newman Press, 1965) .

(7) "가난에 관한 불확실한 점들은 오늘날 문제를 처음부터 재고할 필요가 있을 정도의 형편에 있다"(A.Hayen and Pie-Raymond Regamey, "Une anthropolgie chretienne" in Eglise et pauvrete, p.83).

(8) 미래의 사회를 가리켜 Mounier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이렇게 썼다: "우리가 물질적인 가난 속에서 영적인 가난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아마도 인류는 물질적인 풍요속에서 영적인 가난을 실천해야 할 어려운 과업에 불림을 받게 될 것이다"(La revolution personalite" in Oeuvres completes, 1: 413).

(9) 수도생활에 있어서는 가난은 자주 순종과 연관이 된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경제적인 재화에 대한 '개인적인' 지배력을 가지지 아니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의 '공동생활의' 차원에서는 사정이 매우 달라지는 것이다.

(10) 복음적 권고의 개념에 관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서는 다음 글을 보라 : Hayen and Regamey, "Anthropologie",pp. 106-12. 그 밖에도 Η. Feret, L’Eglise des Pauvres, interpellation des riches(Paris: Les Editions du Cerf, 1965), pp. 211-28; Yves Congar, O.P., "Poverty, in Christian Life amidst an Affluent Society," War, Poverty, Freedom, ed. Franz Bockle, Concilium 15(New York: Paulist Press, 1966), pp. 52-53; Karl Rahner, "Theologie de la vie religieuse" in Les religieuse aujourd'hui et demain(Paris, 1964), p. 71.

(11) 이 두 가지 사상 주류합 지적 연구한 선구적 저서는 : Albert Gelin, P.S.S.,The Poor of Yahweh, trans. Mother Kathryn Sullivan, R.S.C.J.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64) ; 이를 매우 명석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으로는 Gonzaklez Ruiz, Pobreza evangelica.

(12) 용어 설명에 관해서는: Gelin, Poor; A. George, "Pauvre," in Supplement au Dictionnaire de la Bible, 1966, cols. 387-406; Jacques Dupont, Les beatitudes, vol.2, La Bonne Nouvelle (Paris: J. Gabalda et Cie Editeurs, 1969) pp. 19-34; Ernst Bammel, "Ptokos"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rehard Friedrich, trans, and ed. Geoffrey W. Bromiley(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8), 6: 885 -915; Jesus Maria Liano, "Los pobres en el Antiguo Testamento" Εstudios Biblicos 25, no. 2 (April-June 1966): 162-67.

(13) Rash는 구약성서에서 21번 사용되고 있다. 특히 잠언.

(14) 보라 : Gelin, Poor, p. 19.

(15) Ebyon은 구약성서에서 61번 사용. 특히 시편과 예언서. 보라: P. Humbert, "Le mot biblique ebyon,” Revue d'Histoir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 1952, pp. 1-6.

(16) Dal은 구약성서에서 58번 사용되고 있다. 특히 예언서들과 욥기와 잠언.

(17) 이것은 가장 일반적인 용어이다. 구약성서에 80번 나온다. 특히 시편과 예언서들.

(18) Anaw는 구약성서에 25번 나온다(단수로는 단 한번). 특히 시편과 예언서들.

(19) Ptokos 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34번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가진 것이 없는 사람, 필요한 것이 결여된 사람을 가리킨다.  단 6번만은 이 말이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 가난한 사람은 맹인이나 신체불구자나 나환자나 병자의 경우로서 매우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문맥을 제공해주는 그런 경우로 나타나고 있다.

(20) 가난은 결코 예언자들이 무관심하게 보아넘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언자들이 가난을 말하고 있을 때 그들은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압재와 불의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연히 그들은 자기들의 감정과 어울리는 표현들을 찾아서 쓰고 있었던 것이다"(Van der Ploeg, "Les pauvres d'Isra?l et leur piete," in Oudtestamentische Studien 7, 1950: 258ㅡGelin, Poor, p. 19에 인용되어 있다).

(21) "약한 자와 고아를 감싸주어라, 낮은 사람, 없는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라, 아쉽고, 억눌린 자를 구하여 주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그를 빼내어 주라"(시편 82,3-4).

(22) 보라 : Gelin, Poor, pp. 17-18.

(23) 함께 보라 : 신명 23,16-21; 24,5-22.

(24) Roland de Vaux, O.P., Ancient Israel : Its Life and Institutions, trans. John McHugh(New York: McGraw-Hill Book Company, Inc., 1961),p. 175. 저자는 그러나 이러한 법제가 충실하게 준수되었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있는 바는 별로 없다고 믿고 있다(PP. 175-77).

(25) 출애급기 1,9-14는 수탈당하는 대중의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서 이득을 보는 지배계급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26) Gelin, Poor, p. 16.

(27) 보라 :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39-48; 그리고 C. Spicq, O.P., Dieu et l'homme selon le Nouveau Testament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61), pp. 179-213.

(28) 本書 제 9장을 보라.

(29) 本書 제10장을 보라.

(30) 오래 전에 Thomas Aguinas는 이렇게 말했다 : "부도 가난도 …… 그 자체로 인간의 善은 아니다"("Neque divitiae neque paupertas…… est secundum se hominis bonum"; Summa Contra Gentiles, 3:134).

(31) "가난은 결핍과 부족의 세계에 속하며 참을 수 없는 치욕이다"(Gonzalez Ruiz, Pobreza evangelica, p. 32).

(32) Gelin은 이 밖에도 성서에 가난에 관하여 생각하는 보다 덜 중요한 몇가지의 노선들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가난과 죄와의 관계 및 부와 가난의 중간 지위의 이상이라는 두 가지를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Poor, pp. 23-26). 그러나 주된 테에마는 우리가 지적한 테에마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차적인 테에마들을 적절히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주어지는 것이다.

(33) Ibid., p 26.

(34) "한때는 하나의 사회적인 현실을 지시하는 데에 한하는 말들이 하나의 영혼의 자세를 의미하기에 이르렀다"(?bid., p.26). 비슷한 현상이 '정의'라는 말에도 일어나고 있다. 성서에 있어서 이 말은 우선 첫째로는 하나는 사회적인 상황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점차로 ㅡ 그 본래의 의미를 잃지는 않고 ㅡ 하나의 영적인 의미에 의하여 풍부해지는 것이니, 곧 정의는 성덕의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35) George, "Pauvre," col. 393.

(36) "영적 가난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에 개방되는 이 능력이다"(Pierre Ganne, "Aujourd'hui, la beatitude des pauvres," Bible et Vie Chretienne 37, January-February 1961, p. 74).

(37) 이 생각은 Bonnhoeffer가 힘차게 역설한 바 있다 : The Cost of Discipleship, rev. ed.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63) .

(38) Jacques Dupont, Les beatitudes: Le Probleme litteraire, Le message doctrinal (Bruges: Edition de l'Abbaye de Saint-Andre, 1954), pp. 82와 122-23, 그리고 L. Vaganay, Le probleme synoptique(Tournai: Desclee,& Co., 1954), pp. 255와 291-2에서는 루가가 더 원천에 가깝다고 믿고 있다. Gelin은 한편 마태오 복음서의 텍스트가 더 고대성이 있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Poor, p. 107).

(39) "이것은 우리가 예수께서 '하나의 사회계급을 축복하셨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 '복음서는' 어떠한 사회적 지위를 신성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요 그것을 직접 하느님의 나라와 관련짓고 있는 것도 아니다(Gellin, Poor, p. 127). Dupont, Beatitudes(1954) p. 242를 보라. 또한 p. 215, n.1에서 루가 복음서의 ebionism과 '사회주의'의 가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바도 참조하라. Leοn-Defour 역시 이와 동렬의 해석론의 입장에 있는 것 같다. 그에 의하면, 만일 성서해석학자가 "루가만을 선택하면 그는 하나의 사회학적인 상황을 축복하는 경향이 있고, 만일 마태오만을 택한다면 부자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하나의 가난의 정신으로 진복을 허구화시켜 버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L'exegete et l'evenement historique," Recherches de Sciences Religieuses 58, no. 4, October-December 1970: 559).

(40) "루가의 진복에 있어서 기본 관점은 …… 사후 보상이라는 관점이다 …… '루가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를 긍정하는 선택을 해야 할 불가피한 의무를 보고 있다(Dupont, Beatitudes, 1954,pp. 213-18).

(41) Gelin, Poor, p. 108. 저자는 성서상의 가난의 테에마를 영성화하는 뚜렷한 경향이 있다. 이와 비슷한 관점으로는 George, Pauvre, col. 402를 보라. Dupont, Beatitudes (1969), pp. 141-42에서 논박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ㅡ 그리고 그 말은 옳은 말이다 ㅡ 이 해석에는 하나의 변질된 요소가 있으니, 즉 가난한 이들 一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一 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영적인 자세가 더욱 용이하게 생길 것이므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Karel Truhlar, S.J.도 역시 그의 글의 제목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오히려 하나의 유심론적 관점에서 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 The Earthy Cast of the Beatitudes," The Gift of Joy, ed. Christian Duquoc, O.P., Concilium 39 (New York: Paulist Press, 1968), pp. 33-43.

(42) '가난하다'(ptokos)라는 말은 루가 복음서에 열 번 나온다(4,18; 6,20;7,22;14,13·21; 16,21-22; 18,22; 19,8; 21,3). 방금 우리가 고찰한 의미는 이 표현이 나오는 문맥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 매우 분명히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루가 복음서의 처음 세 가지 진복은 하나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는 이들"과 "굶주리는 이들"이란 영성화시켜 버릴 수는 없는 매우 구체적인 현실들인 것이다(Dupont, Beatitudes, 1969, pp. 45-51과 139를 보라).

(43) 本書 제9장을 보라.

(44) Dupont은 문제의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이서 예언자적인 관점을 포함시키고 있다(Beatitudes, 1954,ρ.212를 보라). 그러나 그는 루가가 이 관점을 떠나서 지혜문학의 전통의 관점을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Ρ. 213). 그런데 또 그의 가장 최근의 저서에서 보면(Beatitudes, 1969) 이 입장을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5) 어느 경도 상이한 문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나 Regamey는 명료하게 또 현실론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진복의 영적 충족성이 그 메시아적인 의미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희망을 자신의 것으로 취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메시아의 임무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임무가 된다. 진복의 의미의 바로 핵심에서 그 메시아적인 의의를 보존한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진복이 20세기 전에 유태인들의 정당한 열망의 성취를 고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것은 만백성의 정당한 열망을 ㅡ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ㅡ 심취시키도록 도전을 제기하고 있는 변화라는 환경 조건에 맞추어 변형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Le portrait spirituel du chretien,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63, p. 26).

(46) “완덕은 그러나 현세적 재물의 포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완덕에의 길이기 때문이다"(Thomas Aquinas, Summa Theologie a, II-II, q. 19, a. 12).

(47) "Los pobres y la pobreza en los Evangelios y en los Hechos," La pobreza evangelica hoy(Bogota: Secretariado General de la CLAR, 1971), p. 32.

(48) "Poverty of the Church"에 관한 Medellin 문서는 '가난'이라는 말의 의미를 세 가지로 구별하고 이 구별에 의하여 교회의 사명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그 문단 전부를 인용해 두는 것도 유익한 일이라 하겠다.(a) 인간으로서 가치있게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현세 재물의 결여로서의 가난은 그 자체가 악이다, 예언자들은 그것이 주님의 뜻에 반한다고 고발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인간들의 불의와 죄악의 열매라고 고발하고 있다.(b) 영적 가난은 야훼의 가난한 이들의 테에마이다(소포 2,3; 루가 1,46-55 참조). 영적 가난은 하느님께로 개방된 태도요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희망하는 사람이 갖추고 있는 자세이다(마태 5,3 참조). 그는 현세의 재물의 가치를 인정하기는 하나 거기에 집착하게 되지는 않으며 더욱 높은 하느님 나라의 부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아모 2,6-7;4,1; 예레 5,28; 미케 6,12-13; 이사 10,2 기타 참조).(c) 헌신으로서의 가난, 이 가난을 통하여 사람은 가난이 드러내어 주는 악을 증거하고 물질적인 제물을 대하여 영적인 자유를 증거하기 위하여 스스로 현세의 곤궁한 이들의 조건읕 자진해서 기꺼이 수용하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인간들의 죄스런 조건의 온갖 결과를 스스로 취하시고(필립 2,5-8 참조) "부요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신"(II 고린 8,9 참조)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른다.

'이런 문맥에서 볼 때 하나의 가난한 교회란 一 현세 제물의 불의한 결여와 그것이 낳는 죄악을 고발한다" 영적인 어린이다움과 주님께서 개방성의 태도로서의 영적 가난 안에서 설교하고 생활한다 ㅡ 스스로 물질적인 가난에 속박을 받는다. 교회의 가난은 실질적으로 구원의 역사상의 하나의 영속적인 요소이다'(4-5번)

(49) 이와 관련하여 심각하게 제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부유한 국가들의 교회가 가난한 나라들의 교회에 주는 원조의 의미이다. 이 원조는 이들 가난한 교회들이 실천해야 할 증거에 대하여 역효과를 내기가 매우쉽다. 그뿐 아니라 이것은 이들을 하나의 개혁론자적인 접근방법에로 이끌 수도 있으며, 그 결과 미침내는 단지 소외당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행과 불의를 연장하는 데에 그치고 마는그러한 피상적인 사회 변동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 원조는 또한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나라들의 시민인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하나의 양심의 위안을 ? 값싸게 ㅡ 제공해 줄 수도 있다. 이 점에 관해서 다음의 유명한 글을 보라 : Ivan Illich, "The Seamy Side of Charity, “ America 116, no. 3 (January 21, 1967) : 8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