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신자들의 기도」에 관한 고찰(考察)
1967년 5월호 (제 1호)
1. 기도의 역사와 그 의미 신자들의 기도 즉 공동기도는 새로된 것이 아니고 벌써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다....

제 2차 공의회에서 제시된 평신도 사도직
1967년 5월호 (제 1호)
서 론(序論) 평신도 사도직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취급한 문제 중에 가장 비중(比重)이 큰 문제 중...

새 교리서의 교회상(敎會像)
1967년 5월호 (제 1호)
교황 바오로 6세는 우리가 앞으로 신자들에게 교회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공의회 정신에 상응...

대인 영세의 새 의식서 (儀式書)
1967년 5월호 (제 1호)
성 토요일 부활 전야의 전례를 개정한 중요한 발기인 중 한 사람인 P. Low 는,비오 12세가 완성한 개...

공의회는 왜 있었는가
1967년 8월호 (제 2호)
I. 머 리 말 역사적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종결된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분명히 그 공...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
1967년 8월호 (제 2호)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헌장 중에서 가장 핵심이라 볼 수 있는「교회에 관한 교의헌장」(Constitutio Dogm...

결혼문제에 관한 고찰(考察)
1967년 8월호 (제 2호)
우리 교회는 소위 결혼의 불가해소성을 부르짖으며 교회에서 성사로써 이루워지는 혼배는 물론 사회적인 정...

젊은 세대
1967년 8월호 (제 2호)
인간은 날 때부터 악(惡)으로만 기울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선(善)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생물계의 진화(進化)는 확실한 것인가
1967년 8월호 (제 2호)
많은 신자들은 진화론에 대한 말을 들을 때에 불안감을 느낀다. 들리는 바에는 모든 생물들이 간소한 형태...

복음은 교회 안의 모든 신심의 기준이다
1967년 8월호 (제 2호)
I. 문제 제기 작년 여름에 「덕행의 실천」이란 책이 발간되었다. 그 책은 예수회 수련장 Rodriguez 신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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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輯 · 그리스도ㅅ의 가난 1976년 9월호 (제 47호)

권고와 계율로서의 淸貧

P. 리 가

부자 청년의 구원과 그의 召命에 관한 이야기는 공관복음 어디서나 찾아 볼 수 있다. 이 사실만 보아도 현재 우리 복음 내용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초대교회의 교리가 이 이야기를 얼마나 중대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가 세 福音史家에 의해 다같이 거론된 것을 보면, 원래의 사도들 가르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누구나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각 史家들은 이 사건을 서술할 때 저마다 자기가 중대시한 것을 강조하였고, 또 독자가 받아들일 관점을 염두에 두고 피력하였다. 소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司牧的 動機가 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각 사가의 주장을 연구하여 서로 비교 검토할 때 그 차잇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이것이 이 小考에서 다루게 될 문제이다.

이 부자청년의 이야기는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흥미롭다. 또한 풍요함을 구가하는 현대사회의 우리에게는 중대한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 이야기 때문에 아주 난감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던진 말씀은 예수의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선택된 일부 小數集團에게만 주어진 것인가?('계명'인가 아니면 '完全을 위한 권고'인가 하는 관점에 따라 상이한 결과가 나온다. 왜냐하면 전자는 의무를 수반하는 동시에 후자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인이 이 자발적인 淸貧을 엄격한 의무로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이를 수락하든 거부하든 자유에 속하는가? 이러한 가르침이 왜 구약성서에서는 전혀 주장되지 않았는가? 이 가르침은 완전히 그리스도교적인 것인가? 자발적인 청빈은 靈神을 단련시키고 교육시키기 위한 修德의 일종인가? 아니면 물질적 우상의 속박에서 풀려나와 자유로이 하느님을 섬길 수 있게 하는 解放의 일종인가? 이와같이 복음의 문헌을 연구하여 해답을 찾아야 할 문제는 상당히 많다.

1. 마르꼬 10, 17-22

마르꼬의 교리나 종교적 가르침은 마태오(19,16-22)나 루가(18,18-23)와 상당히 비슷하다. 그 이유는 세 사람이 모두 공동원천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의 순서는 세 복음이 거의 비슷하며, 그것은 연대기적이 아니라 (복음사가의 의도는 우리에게 엄밀한 의미의 '歷史'를 제공하려 했던 것은 아님),교리문답식이다. 왜냐하면 사가들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의 人格 안에 도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의 到來로 이 세상에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추종자(크리스챤)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거기에 따른 요구가 주어졌다. 그래서 마르꼬는 혼인을 결코 풀 수 없으며(10,1-12),어린이들의 近接을 막지 말라고 결론지었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그리스도교인이 지녀야 할 態度의 본보기이기 때문이다(10,13-16). 그리고 '이러한 성질의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요구 중 아마도 가장 어려운 것은 그 어떤 형태의 富라도 경멸해야 한다는 요구일 것이다. 복음에 나온 부자 청년의 비유를 볼 때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가 주는 교훈과 論理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러한 요구에 대해 그토록 확고하게 주장하신 이유는 다음 구절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마르 10,25). 富를 내던지고 예수의 복음 메시지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백배의 상을 가져다 준다(10,30), 이와같이 마르꼬는 10장 전체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기본주제와 거기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필수적 태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마르꼬가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 보이려고 했던 교리적 의도는 무엇인가? 마르꼬는 그 부자 청년이 예수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고 말했다(10,17). 이는 중대한 人物에게 보이는 존경의 표시이다(I 열왕 1,15 참조). 부자 청년은 예수를 보고 '착한 스승'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 청년이 예수께 감탄을 보인 것으로서 선한 마음의 소유자임을 말해준다. 사실 복음사가도 예수께서 "사랑을 가지고 그를 쳐다 보셨다"(10,21)고 기록하고 있다. 그 청년은 모든 계명을 다 지키고 '영원한 생명'을 찾는 사람이다. 이는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물질적 보상을 받는다는 구약성서의 자세를 뛰어 넘었다는 분명한 표시이다. 그가 바라는 보상은 가나안 땅의 약속(신명 12,2 참조)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미래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대답은 분명하다. 즉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출애 20,12-16)이 명한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10,19). 마르꼬는 여기에다 "남을 속이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선행하는 금지사항들의 요약과도 같은 것이다.

그 청년은 이미 이 모든 계명들을 오래 전부터('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정직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全的으로 속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이 완전히 하느님께 속해 있는가? 예수께서 하신 응답은 바로 이 문제를 시사하고 있다. 그가 비록 하느님의 계명들을 완전히 지켰지만 '그 무엇'이 부족한 것이다. "당신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읍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오"(10,21). 즉 그가 진실히 하느님 나라의 제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保壘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예수를 완전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자기의 마음을 하느님께 바치느냐, 아니면 재물에게 바치느냐의 岐路에 서게 된 것이다(마태 6,24 참조).

부자 청년에게는 근심이 생겼다('침울한 표정'一10,22). 왜냐하면 자기 일생 처음으로 자기가 여러가지 물질적 所有物의 노예임을 의식하게 되었고, 완전할 수 없고 또 하느님을 전적으로 섬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 결과 그의 마음은 兩分되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못하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볼 때 재물에 대한욕심은 하느님의 召命을 따를 수 없게 만든다("그는 근심하며 떠나갔다"). 그는 모든 계명을 지켜 윤리적 完全을 기함으로써 하느님의 소명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여 왔다. 그러나 소명을 받자 따를 준비도 되어 있지 못했고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다. 따라서 예수의 숙명적인 말씀이 뒤따르게 된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오기가 더 쉽다." 예수의 말씀은 어느 시대의 사람에게나 마찬가지로 그 청년을 당황케 한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그 청년에게 물질적 소유물을 포기하라고 명령하시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마르꼬의 교리는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누구든지 하느님 왕국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면 반드시 따라야 할 권고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교인이 되어야 할 義務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이 되고자 한다면 이 권고를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이 자발작인 淸貧의 권고가 결국 그리스도교인에게는 戒律이 된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른 공관복음도 검토해 보기로 하자.

2. 루가 18, 18-23

루가의 이야기는 마르꼬의 이야기를 완전히 반복한 것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表現의 차이일 뿐이다. 루가는 마르꼬 복음의 '어떤 사람'을 '지도자인 한 사람'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資産家임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의 계명의 열거는(18,20) 신명기 5,16-20에서 취해 왔고, 요약 구절("속이지 말라")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말도 누락되어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기의 권고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죄한 것이라고 해석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여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루가는 이 이야기 중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 ㅡ 물질적 소유물에 대한 지나친 애착심의 단죄 ㅡ 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루가의 이야기와 그 교리는 사도들의 宣敎勞力에 관한 부분에서 드러나 있고, 그것이 루가 고유의 목적이다(9,51·-18,14). 이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실"(9,51) 뜻을 굳히신다. 예수께서는 이 선교 부분 전체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당신 수난과 죽음에 대해 환기시키신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의 가르침은 십자가와 그 使命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쁜 소식을 설파할 宜?師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의 교리는 보다 분명하게 밝혀진다. 즉 제자는 예수의 使者가 되고 예수의 使命에 참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청빈과 전인적인 自已贈與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읍니다"(9,58). 루가가 '영원한 생명' 을 보기 위해 예수께 찾아온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강조하고자 한 교리는 바로 淸貧과 自己劍奪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어디로 가든 그를 따르기 위해서는, 보다 정확하게 말해 그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예수와의 선교여행에 장애가 되는 財産을 벗어 던짐으로써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맥을 볼 때 예수의 이 가르침이 福音宜?에 나설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이 가르침은 예수의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져 있다. 왜냐하면 다른 공관복음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루가도 부자가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인간의 不可能性을 지적하면서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18,24-27). 따라서 여기서 루가의 모든 메시지는 마르꼬와 똑같이 하느님 왕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예수의 모든 제자들을 향한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여기서도 예수께서 명령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진 권고이다.

3. 마태오 19,16-22

마태오의 이야기는 루가나 마르꼬의 이야기와 비교해볼 때 상당히 독특하다. 그 사람은 '젊다'. 그래서 마태오는 상기 두 복음사가들같이 어릴 적부터 계명을 지켰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고 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켜왔읍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읍니까?"(19,20). 더구나 젊은이가 계기하는 문제도 조금 다르다. "스승이여, 제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善을 행해야겠읍니까?"(19.16). 예수께서는 '선한' 이로 불리지 않는다. 오히려 善이라는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 젊은이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거의 언급할 필요가 없는 말인 것 같다. 왜냐하면 누구나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善을 행하고 惡을 피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왜 이 이야기에서 이러한 면을 바꾸었을까?

복음사가들의 이야기는 각자의 교리적 목적에 맞추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각 사가는 동일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으나 자기 독자들과 관계되는 교리에 서로 다른 강조를 두려고 하였다. 오늘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각 복음사가의 목적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歷史的 觀點'을 따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의도는 종교적 교리를 傅하기 위한 교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오는 실제적인 몇가지 이유 때문에 이야기 중 세부적인 면을 달리 표현하고 있다.

제자들이 행하도록 불림을 받은 그 善이란 바로 자기네 모든 행동에서 본받아야 할 聖父의 선이다. 이것은 산상 설교의 가르침이며 제자들이 천상 성부를 본받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성부께서는 착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다같이 햇빛을 비추신다. 성부께서는 그들의 죄스런 條件에도 개의치 않고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산상 설교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지을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시오"(마태 5,48). 하느님 오직 한분만이 선하시다. 그리고 다른 모든 善은 하느님 善에의 참여이다(19,17a).

여기서 주시는 예수의 대답은 직접적이다. 그리고 다른 두 공관복음 사가와는 特異하다. "당신이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키시오"(19,17b). 이러한 것이 바로 조건이다. 그러나 이 복음 어디에서도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必須條件이라고 말한 곳은 없다. 아래 구절은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계명의 열거는 마르꼬나 루가의 것과 같다. 그러나 레위의 명을 덧붙임으로써 완성시키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위 19,18). 예수께서는 마태오 복음 전체에서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신다(마태 22,39-4 참조). 마태오는 여러 계명에다 사랑의 계명을 첨가시킴으로써 모든 계명의 완성이 사랑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한다(로마 13,10 참조). 그러나 이것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비록 청년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했지만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켜왔읍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해야 되겠읍니까?"

이어서 마태오는 "당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19,21)하고, 젊은이에 대한 권고를 덧붙인다. 열거된 다른 계명들은 레위기에서 빌려 온 형제적 사랑의 계명도 포함하여 一 여전히 구약성서가 명한 완성일 뿐이다. 이미 모든 것이 그 속에 포함되어 왔었다. 신약성서가 명하는 완성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다 주시는 예수의 現存에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완전한 사람'이 되고, 그리고 천상 성부와 같이 완전한 자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산상 설교를 실현시키고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淸貧이 요구되고 또 주장되고 있다. "당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 " 이와같이 자발적인 청빈은 신약성서의 특징이며 완전히 그리스도교 고유의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의 메시지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 바 있는 그 최후의 종말론적인 날들이 신약성서와 예수에 의해 우리에게 到來했기 때문에, 마태오도 이러한 교리를 펼 수 있게 된 것이다. 옛 계약이 내건 약속은 예수 안에 성취되었다. 우리는 예수의 마지막 도래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I 고린 7,31 참조).

이러한 共觀福音의 가르침은 비록 새로운 시대마다 현명하게 적응되어야 하겠지만,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의무로 주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은 가족을 扶養할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의무를 간단히 벗어 던진다든가 자기 재산을 함부로 내버릴 수 없다. 이러한 재산은 자기 가족의 生存에 필요한 것이다. 이 문제는 역사상 여러가지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교인 각자가 나름대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 구절에서, 청빈의 권고가 일부 小數集團에 한정된 것이라거나, 스스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단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없다. 자발적인 청빈은 자신을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권고이다. 다만 이 권고는 '시대의 표징'에 따라 구체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여 수행해야 한다. 마태오가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5,3)고 眞福을 결론지은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爭點이 되고 있는 것은 실질적인 재산의 결핍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態度'이다.

실천적인 면에서 正義의 의무는 언제나 존중하여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영신의 識別이 필요하다. 각 사람은 자발적인 청빈에 따라 자기의 구체적 생활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과 사회에 부과된 정의의 의무를 망각하고 그저 자기 모든 재물을 포기한다는 것은 지극히 현명치 못한 소행이다. 이러한 행위는 德도 의무도 아니다. 정의와 思慮分別과 識別은 인간적인 덕이며, 生存을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발적인 청빈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그리스도교인에게 주어진 권고이다. 이 권고를 따르지 않으면, 인간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예수의 제자도 될 수 없기에, 의무적인 것이다. 이 의무는 그리스도교인의 良心에 주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구체적 생활조건을 생각하면서 사랑과 정의를 위해 재물을 사용하도록 반성하고 결단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미 종말의 시대를 가져오셨다.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형제적 사랑이다. 따라서 재물도 바로 그 사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기가 열려 완전 새로운 태도와 生活樣式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발적인 청빈이란 참된 解放이다. 소극적인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이 해방으로 財物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적극적인 면에서 볼 때 모든 재물을 사랑과 정의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교인의 자유인 동시에 인간적인 자유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하느님과 인류에게 보이신 사랑의 媒介로 하여 예수를 완전하고도 철저히 따르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청빈이 바로 첫째가는 계명의 의무로 주어진 것이다. *

(原文 : Peter J. Riga, Poverty as Counsel and as Precept, The Bible Today, Mar. 1973, pp. 1123-1128. 諸錫鳳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