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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유산 반대 선언문
1975년 11월호 (제 42호)
1. 머리말 (1) 인공유산과 그 법적 자유화의 문제는 거의 모든 곳에서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다. 그...

79위 한국 순교복자 시복 50주년에 즈음하여
1975년 11월호 (제 42호)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금년은 우리의 한국 순교복자 103위 중 79위가 복자가·되신 지 꼭 50주년의 ...

시청각세계에 있어서의 신앙전달
1975년 11월호 (제 42호)
다음 글은 지난 8월 26인부터 이틀 동안 가불릭 교리신학원에서 개최되었던 뼈에르 바뱅(Pierre Babin) 신...

일제침략기 천주교도의 민족독립운동
1975년 11월호 (제 42호)
朝鮮王國과 ≪本 사이에 ?子修好 條約이 맺어진 이후 조선왕국은 帝隣 主·校의 침략에 본격적으로 직면하...

구 조 주 의
1975년 11월호 (제 42호)
? 序 論 構造란 말마디는 우리 일상생활에 서 흔히 사용되는 말마디이다. 원래 이 말마디는 건물의 짜임새...

오늘의 마리아 선교
1975년 11월호 (제 42호)
전통적인 마리아본의 위기는 우선 마리아라는 테에마가 도무지 거의 취..급 도 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는 ...

追掉辭 - 하느님의 사람
1975년 11월호 (제 42호)
"받으시옵소서/황금과 유향과 물약은 아니더라도/여기 육신이 있읍니다. 영혼이 있읍니다/본시 없던 나 손...

한국교회 농촌사목의 성과와 현황
1975년 11월호 (제 42호)
교회 안의 농촌사목 문제는 어제와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농업 . 문화권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농민...

한국 개신교와 농촌운동
1975년 11월호 (제 42호)
今年들어서 韓國改新?는 宣? 90주년을 記念하는 행사를 많이 하고 있 다· 歷史的으로 變化가 많았던 지난 ...

農村 젊은이들의 필요에 응하여
1975년 11월호 (제 42호)
ㅡ마다가스카르에서의 成功 事例 ㅡ ? 농촌청소년문제 개발도상국가의 청소년 교육 문제는 해 결 하기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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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단 1975년 11월호 (제 42호)

일제침략기 천주교도의 민족독립운동

조 광 (고려대 문리대 교수)

朝鮮王國과 ≪本 사이에 ?子修好 條約이 맺어진 이후 조선왕국은 帝隣 主·校의 침략에 본격적으로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 민족 대다수의 열망을 저버리고 침략세력과 야합한 일부 집 권층의 책동으로 朝鮮王國은 Η本帝 - 國主표의 植民地토 전락하게 되었다· 韓末 國權을 상실할위기에 치하여 그 리고 Η 帝의 식민지로 전락된 이후에 韓民族 각계 각층에서는 權守護運 動과 獨立運動을 줄기차게 전개시켜 나가고 있었다. 曰帝와의 타협을 거 부한 '이러한 저항운동은 19세기 후반 ‘ 기와 20세기 전반기에 있어서 韓?史 ■ 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민중

의 움직임이었다.

韓民族 대다수가 조국이 직면한 상 황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았듯이, 民族의 종교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던 朝鮮의 친 주교도들도 日 帝에 대 한 저 항이라는 거대한 κ·族的 時流를 거익 하지는 않았다. 즉 Η 帝에 대한 저항 을 뚜렷이 보여준 일부 천주교도의 나 움직임이나 韓日合邦 이후 신도들이 천주교도임을표방하며 독립운동의 전선에 집단적으로 투신한 것은 그들이 당시의 민족적 당면과제에 무심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러한 당시의 움 직임올 이 글에서는 日帝侵略期의 宗 敎政策과 韓 Η 合邦 이전의 國權守護 運動 및 그 이후 獨立運動에 천주교 도의 참여 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간 단히 취급해 보고자 한다.

I. Η 帝β略期의 宗敎界

일부 Vi敎史家에 의해 '榮光의 世 紀,라 불리울 정도로 19세기는 기독 교 신앙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나 간 때였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가 列 强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과 결부됨 으로써 급속히 추진된 결과 비록 기 독교 신앙은 널리 전파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많은 후진 국가들에 있어서 19세기는 ‘榮光의 世紀,라기보다는 차리-리 '悲劇의 世紀,였으며 침략에 대한 ‘民族抵抗의 世紀’였다. 韓國史 ?: 일제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 특징 지워지는 19세기 후반기와 20세기 전 반기에 있어서 한반도를 침략하여 효 과적인 植民政策올 피나가려던 日帝당국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보조적인 수단으로 기독교 의 선교를 이용하려 한 듯하다. 일찌 기 伊藤博文이 朝鮮의 統監으로 부임 하였을 때 Η本과 朝鮮의 감리교회 감 독이던 하리스(M.C. Harris)에게 ≪정 치와 일체의 사건은 내가 책임질 터 이니 조선에 있어서의 정신적 방면의 계몽.교화에 관해서는여러분들이 담 당하면 朝鮮ㅅ民 誘導의 '사업은 비로 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⑴라고 부 탁하였다는 것은 기독교 선교와 '침략 정책을 결부시키려던 植民當局의 노 력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伊藤博文은統監으로 부임한이 후에도 YMCA의 활동자금으로 그리 고평양에 교회를 건립할 때 거액의 찬조금을 내어 조선인 기독교도들을 희유하려 하였다. 이와같은 종교정책 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천주교에도 그 대로 적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국내에서의 모 든 종교인들은 日帝의 간악한 술책을 거부하고 국권수호운동에 참여할 것이 촉구되었다. 일례를 들면 ≪韓國宗敎 가 儒 · 佛敎뿐 아니라 耶蘇敎도 有하 며 天主敎도 有하니 其中에 國家主義 를 抱한 宗敎家가 何處에 在한가. 然 이나 吾濟의 耳目所及으로 ?記한즉 ㅡ 次 宗敎家의 名을 帶하면 佛國民이 되 며 天國民이 될 뿐이오 韓國民이 되는 着는 罕하니 幢라”®라는 당시의 신 문기사는 모든 종교인들이 그들의 신 앙문제와 함께 국가의 운명에도 관심

을 가질 것을 역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日帝의 종교계 회유정책에 대 한 저항은 특히 개신교 측에서 활발 히 일어났지만 천주교 신도들도 이에 행동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 시의 개신교에 비하여 민족 엘리뜨의 수가 얼마되지 못하였던 친주교의 경 우는 그러한 저항이 당장 집단적 양 상을 띠기는 어려웠던 것이고 이러한 천주교 안의 상황은 3.1 운동에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3·1 운동이후 조선의 종교계에 대한 일제의 억압과 희유는 더욱 교묘해져 갔다. 그러나 이때 曰帝의 책동을 뿌리치고서 일부 지방의 천주교도들은 日帝에 대한 무 장항쟁에 뛰어들었고 上海臨時政府와 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음을 볼 때, 천주교에 대한 日帝의 희유책이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

II. 天主敎와 國權守護運動

開港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帝國 主義의 침략에 항거하며 국가를 근대 화시켜야 한다는 어려운 상황에 놓 여 있었다. 조국의 近代化만이 日帝 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있 으리라는 확신에서 그들은 여러 근대 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언 론기관의 육성이라든지 교육의 보급 과 같은 것울 바로 國權守護運動과 직결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근대화 즉 開化에 대한 열망으로 말미암아 당시의 지식인돌은 개화된 나라의 종교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의 보급을 권장하였다. "지금 세계 각국에 문명 개화한 나라들은 다 구 교나 야소교를 믿는 나라인즉 이걸 , 보거드면 크리스트교가 문명 개화하

***' 는데 긴요한 것이라”®는「독립신문」 의 논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개 화의 이념적 바탕을 기독교에서 찾으 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 아래에서 천주교,개신교 그리고 러 시아 정교회가 조선의 민중 속에 쉽 사리 전파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외래의 이질적인 종교들은 文化 衝突을 필연적으로 일으켰다.

천주교의 경우 儒林If의 전통적인 저항을 계속하여 받았고 신도들은 이 's^ 때에 이르러서도 마을 共同體로부터 추방을 당하기까지 하였다.⑷ 또한 王朝의 말기적 현상으로 횡행하던 관 리의 침탈에 대하여 교도들이 한데 뭉 쳐서 저항하기도 하였으며(黃海道 各 地의 경우), 官紀의 해이를 틈타 일 어난지방 불량배들과도 충돌하게 되 었다(恩津의 경우)· 뿐만 아니라 丙 寅年(1866年) 迫향 때에 수된 土地 를 찾으려던 敎徒들과 당시에 그 토 지를 소유하고 있던 ,5民듀과의 분쟁 도 있었다(堤川의 경우). 이 일련의 사건들은 일반 민중들에게 교도들이 f天主敎藉勢,를 하는 것으로 인식되 었다. 이러한 £薪勢’에 대하여 일부에 서는 교도들의 준법정신을 촉Φ하기 도 하였으며,(5) 또 일부에서는 그근 본적 원인이 官吏의 태도에 있음을지
적해서, “生命財産의 保護를 위하야 依恃之方을 구한즉 惟西敎가 是在하 야 其勢力이 足히 官吏의 虐陷을 不 受할 만한 然故로 紛紛然 投入함이 요..·.· 百姓을 敲하야 敎徒에 入케 하는 者는 곧 貪官汚吏어늘 彼官吏가 fl 已의 咎는 不知하고 反謂敎民으로 難治라 하니 어찌 痛歎치 아니 하리 오"(≪라고 말하며 官紀의 확립을 요 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천주교회사를 이와 같이 ‘天主敎藉勢’를 하던 신도들의 행위로 특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천주교회도 당시의 개화를 향한 熱氣 찬 대열에 뛰어들어서 조선의 개화와 국권수호 운동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 었다. 즉 교회 당국자들에 의해서 추 진되던 개화운동은 당시의 거의 모든 개화운동이 그러했듯이 넓은 의미에 서의 國權守護運動이었다. 교회당국 이 학교를 세우고 또 나아가서 누구 보다도 먼저.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해서 교육계와 산업계의 인재를 양성하려 했던 것은 모두가 日帝의 침략으로부터 國權을 수호하려던 의 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또한 교도 뿐만 아니라 일반민중올 대상으로 한 Γ京?新聞」을 창간하여 올바른 개화 가무엇인가를밝히려했고,또이언 론기관을통해서 國債補償運動에 적극 참여하고 있음올 보면,여기에서 당시 조선천주교회가 지니고 있던 진면목의 일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당국이 교육과 언론을 통한 온건한 國權守護運動을 전개시켜 나가 고있었을 때 일부천주교도는 이와 는 달리 武力에 호소하는 救國活動율 전개하였다. 일찌기 II帝의 침략에 저 항하는 東學本命이 실패로 돌아간 이 후 패잔한 동학교도와 함께 ‘?學’을 형성하여 활동했던 천주교도도W 이 러한적극적인 구국활동을 시도했던 신도집단이었다고 생각되나,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한 가장 대표적인 천 주교신도로는 安®根을 듭 수 있다. 安重根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09 년 10월 조선침략의 원흉인 伊藤博文 에게 응징을 가하였다. 그는 앞서 국 내에 있을 때 진남포 성당에서 학교를 설립하려 하자 거엑의 보조를 제공하 여 교회의 교육사업에도 열의를 드러 내었고 國勢가 기울자 問황와 沿海州 地方에 망명하여 그 곳에서 栽兵運動 을 전개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국권 수 호운동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들이다.

安®根의 재판기록을 보면 “잡혔올 때 伊藤氏가 죽었다고 하는 소리를 듣 고 그대는 伊·藤氏를 죽였으니 神에게 감사한다고 하면서 가슴에 十字架를 그렸는가” 하는 확인심문에 대하여 ≪그렇다. 그 다음 나는 大·韓萬歲를 불 렀다”라고 대 답하고 있다. W 이 러 한 말마디에서 단적으로 들어나는 바와 같이 安:®根이 드러내었던 투쟁활동 의 근저에는 大ㅡ韓園ㅅ으로서의 애국 심과 천주교도로서의 신앙심이 공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安重根이 실

천한이신앙심과애국심의 결합이라 는 모범은 한일합방 이후 천주교도들 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데 있어서 좋 은 龜鑑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πι. 日帝治下天主敎徒의獨立運動

일본이 韓半?를 병합한 1910년을 전후하여 한민족 사이에는 그들의 허 탈한 마음을 종교에 귀의하여 바로잡 아 보려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1S09 년 조선 안의 전 개신교파가 연합하 여 일으킨 百萬救靈運動(Million Souls for Christ)은 이러한 시대상웁 배경 으로 한 것이며 한일합방은 개신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하나의 계기 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비하면 당시 천주교회의 발전은 미미한 것이 었으며 천주교회의 잠재력은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였다. 이렇게 된 까닭 으로는 많은 민족 엘리트가 새로이 등 장하여 활동하던 개신교와는 달리 천 주교회는 현실의 정치적 권위 즉 일 제에 의한 한일합방을 인정한다는 전 제 아래 선교정책을 추진했고 또한민 족과의 일체감이 부족한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가 움직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와같은 이유때문에 한일 합방 이후 천주교회는 親日的 集園내 지는 민족독립 운동에 초연한 입장을 견지해 온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비록 교회의 공식적인 태도 는 불투명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조선 의 천주교 신도들은 독립운동에 개인 단위로 침·여하고 있었다. 한일합방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 해 日帝에 의해서 조작된 최초의 음 모는 '安岳事件’이었다. 이 사건은 安 重根의 從弟인 安明根의 독립운동 계 획과 관련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安 明根은 間?地方을 중심으로 하여 독 립 운동을. 계 속하J:자 황해 도 일 대 에 서 軍資金을 모집하다가 1910년 10월 2일 Η 帝에 의해 체포당했다. 日帝의 획책으로 이 사건은 확대되었고 황해 도 지 방의 反 日 運動올 말살시 키 려 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황해도 의 反日ㅅ物과 資?家 등 160여명올 총검 거하였을 때 황해 도의 천주교도 들이 당한 피해도 적지 않았디安明 根 사건의 결과 16명이 공판에 회부 되었고 安明根은 ‘內亂未遂罪,등으로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曰帝治下에서 단행된 가장 대규모 적인 민족독립운동으로는 3.1 운동을 들 수 있다· 이때 개신교의 지도자들 은 "세계사의 현시점에서 약소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시민의 자유와 진정한 종교적 자유의 확보를 위해 이 운동 에 참여하는 것도 하느님의 뜻으로 느꼈다”W고 말하며 이에 적극 참여 하였지만 불란서 선교사들의 지도 아 래 있던 조선의 천주교회는 기존질서 에 대한 인정과 정치불간섭 원칙에 입각하여 이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는 아니 하였다. 이 독립운동 당시 민 족대표 33인 중에 天호敎界의 인물이 참여할 수 없었던 데에는 이와 같은 특수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러 나 교희 당국의 태 도와는 달리 교도 들은 3 · 1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일 본측 기복에 의하면 1919년 6월 9일 현재 서울과 元山, 新旌州, 平壤,海 州,公州 그리고 λ邱 등 7개 도시의 감옥에는 Μ명의 천주교도들이 구금 되어 있었다·(10)'이 59명이란 숫자는 개신교도나 천도교측의 구속자와는 비 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것이다· 그 러나 구금자 중 조선의 전통적 종교 사상인 G敎徒가55명,佛敎徒가95명· 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해볼 때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3.1 운동이 민족대표 33인만의 운동이 아 니었고 또 천주교회가 몇몇의 선교사 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할진대 “천주교회가 3.1 운동에 전혀 참여하 지 않았다’,고는 말할수 없을것이다. 당시의 친주교도들도 독립을 바라는 민족적 일망과 과감한 행'동에서 다른 모든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했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 천주교도에 의해 수행된 독립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는 間島地方의 천주교도들에게서 찾아볼수있다. 그 들이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든데에는 간도지방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던 특 이한 분위기가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 했으리라 생각된다. 間島란 일반적으 로 ??滿·?Ι: 對?에 있는·滿洲 吉林省 東南部 일대로서 조선과■淸國 두나라 사이에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던 분쟁지역으로서 이미 조선의 外交權 을 빼앗은 ■日帝에 의해 1909년 淸國領으로 넘겨진 곳이다. 19세기 후반 기부터 이 지역에 대한 조선인의 이주 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서 1898년경 에는 간도지방 전체인구의 80% 이상 을 조선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 한 특이한 地政學的 위치에 놓여있던 간도지방의 천주교회는 조선 본토의 교회와 그 성격이 크게 달랐다. 이 지 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모두가 失? 民이었고 또한 國權이 일본으로 넘어 간 후에는 많은 독립지사들이 이 지 역에서 망명처를 구하였기 때문에 이 곳에서 형성된 천주교회는 본토의 교 회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간도지방에 천주교가 전래된 때는 1896년이었다. 이 해에 간도에 거주하 던 金英烈은 元山으로 나와 Vermorel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돌아가서 그 동료들에게 천주교를전파함으로써 간 도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다. 이와같이 자발적으로 성립된 교회는 그후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곳 의 천주교도들은 집단적인 취락을 형 성하여 상부상조하며 살게 되었다. 이 러한 敎友村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는 부처골(佛洞)의 교도 20여 가구가 이룩한 大敎洞을 들 수 있다. ?大敎洞 은 1900년 Mutel 주교가 처음으로 간 도지방을 순회할 때 이곳에서 수백명 의 신도들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하게 되었다. *敎洞 이외에도 뒷날 간도의 대표적인 도시 로 발전하게 된 龍井村은 1900년 20 여 가구의 천주교 신도들이 개척하여

형성된 도시였으며,朝陽河의 八道溝 도 1903년에 12가구의 천주교 신도들 이 들어가 개간한 곳이었다. 이와같 이 간도지방의 개척에는 조선인 천주 교도의 힘이 크게 기여되었고 아예 行 政區域名으로 聖敎村이 등장하기까지 하였다. 1907년 이후 安重根이 잠시 이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수행하였을 때 그의 배후에는 이와같은 敎友村들' 이 있었던 것이다.

한일합방으로 인해 國權이 상실된 다음 많은 동포들이 이 지역으로 이 주하여 오자 간도 내부에서 진행되던 천주교 포교사업은 1910년 이후 한때 본토의 교회가 침체상태를 겪었던 것 과는 대조적으로 활기롭게 추진되이 갔다. 그리하여 1915년경에는 신부가 주재하고 있던 龍井村과 和龍縣 三? 峯 이외에도 六道溝 :大敎洞, 東良上 里社 泉屯村, 平?下里社 富岩?과 長 興洞, 平?水南社 *五道溝口, 13子 街 河東村, 九松墟 聖敎村등 9개소에 신도들의 집회소가 있었다.≫≫ 이때 를 전후하여 작성된 일본측의 기록에 ≪친주교는 포교 초기에 있어서 인민 에게 施療를 행하고금품을 주며 중국 관헌의 폭정을 배제하여 오로지 보호 희유에 힘쓴 결과 그 기초가 더욱 굳 게 되었다”≪2)라고 말하고 있음을 보 면 당시 간도의 천주교회에서는 주민 의 정착에도 적극 노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주민정착사업은 개신 교(장로교)와 협동하여 추진된 듯하 다. 간도의 조선인 사회에서 강력한 세력을가지고 있던 두 종교집단이 조선 본토에서와는 달리 서로 협조한 것이다. 이들이 협력하여 수행한 주 민정 착사업으로는 신용조합의 일종인 금융회사의 설립을 들 수 있다. 조선 인 천주교도와 개신교도가 연합하여 설립한 금융회사로는 1910년에 발족 한 興業會社와 1911년에 실립된 廣東 商會가 있다. 興業會社와 廣東商會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와 日本ㅅ 금융회 사에 맞서서 간도의 동포들에게 정착 기 금을 대 부하여 그들이 경 제 적 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간도 지방에 개신교가 전개된 것은 1906년 이후의 일로서 천주교보다 비록 전파 된 시기는 늦었으나 천주교와 경쟁적 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 두 이질적인 경쟁집단이 협력할수 있었던 것은 그들 모두가 失?民이라 는 공통성과 日帝에 항거한다는 일치 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생각 된다.

간도의 천주교회는 그곳의 교육발 전에 큰 기여를하고.있다. 1915년 당 시만 하더라도 천주교회는 新明村에 韓成學校(교장 柳SI九),八道溝에 朝 陽義塾(교장 沈 Π順), 新岩村에 德興 義塾(교장 朴永載), ;大敎洞에 敎?學 校(교장 劉沛興),樂敎村에 讀興學校 등 다섯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운 영하고 있었다. 그 후 1918년까지 다 시 :大五道溝에 敬愛學校(교사 南在激) 穆祖洞에 S新學校(교장 金英俊), 土 山子에 光新學校,河東에 東盛學校 등

을 설립하였다.(13) 이때 朝陽學校와 德興義塾은 독일인(신부)이 간여하고 있었으나 그밖의 학교는 대부분 조선 인 신도듭이 운영하였던 것으로 생각 된다. 이들 학교에서는 ㅊ韓地誌, 東 國?史,中等東國史略 등 이미 본국 에서는 Η 帝에 의하여 사용이 금지된 舊韓末의 교과서를 사용하면서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 있었다. ≪간도의 학 교는 간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규의 중심지”α4)라는 日帝의 許은 ..천주교 계통의 학교에서 교육하고 있던 이러 한 교과내용만을 보아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간도의 천주교회는 금 융희사를 통한 對民浸透와 학교교육 을 통한 청년교화를 통하여 이곳에서 독립항쟁을 할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 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곳의 천 주교도들은 ≪排日思想을 고취하는 집 단’’이라는 日帝의 비난과α≪,이곳의 천주교도 중에 ≪安重根과 같은 무명 의사가 많이 隱伏한 줄로 확신한다” α®는 민족진영으로부터의 긍정적인 기대를 동시에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간도의 천주교도들은 3·1 운동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28개、 소에 집희소(본당 및 공소)를 둘 수 있을 정도로 받전한 간도의 천주교회 는 3 . 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 다. 간도지방에·서 제일 먼저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은 龍井村이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했다는 소 식을 듣고 간도’각처에 홀어져 있던 조선거류민들은 龍井村의 장날인 3월 13일 이곳에 모이어 독립축하식을 거 행하기로 하였다. 이날龍井艱?이 정 오룔 알리는 종율 율리자 이것율 신 호로 하여 회장인 金永學이 등단하여 서 독립선언서톨 낭독하고 축하의 취 지를 설명한 다음 곧 시위행동에 들 어갔다. 그러나 간도의 독립운동도 조선 본토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 헌병의 탄압에 의하따 좌절되고 말았다.

3-1 운동이 실패한 이후 일본에 대 하여 무력투쟁을 시도하는 많은 독립 군 단체들이 등장하였다. 이때 조직 된 독립군 단체 중에는 천주교도들로 구성된 義民國이 있었다."7) 이 義民 園은 3·1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천 주교 신도들이 평화적인 시위롤 통해 서 맛보게 된 좌절감을 무력투쟁이란 형태로 승화시켜 좀더 적극적인 항쟁 을 목표로 하는 단체를 조직해야 할 필요성에서 형성된 것이리라 생각된 다. 이 箱民圓은 간도에서 일본군과 싸우기보다는 더 나아가서 국내에 진' 입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할 것율 주장 하는 과감한 무력항쟁 단체였다. 義 民?의 團長은 方雨龍이었고 그밖에 '金演君, 金鍾憲許根,洪林과 같은 간부의 이름이 日帝의 여러 기밀문서 에 실려 있음율 볼 수 있다. 이들은 戰?用 火器 200정 이상(어떤 문서에 는 400정으로 되어 있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당시 북간도에서 활약하던 독립군 단체’ 중에서 洪範圓,金住?

이 이끌던 ‘大韓獨立*國’과 함께 가 장 강력한 전투력과 火力울 갖춘 부 대였다고 할 수 있다.

3.1 운동 후 1919년 10월 15일 상해 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천주교 동포에게,라는 제목의 포고문올 발표 한 기록이 있다.(18) 오늘날에 와서는 이 포고문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으나 이것은 아마도 ■& 民國과 같은 간도지방 천주교도들의 저항운동을 격려하고 또 국내의 천주 교 동포들도 독립운동에 적극참여하 기롤 호소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생 각된다. 한편 임시정부는 1920년 5월 17일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 기 위하여 安重根의 동생인 安定根을 간도로 파견하여 臨時居留民制률 실 시케 하였고, 같은 해 10월 29일에는 간도지 방의 독립 운동단체 를 통합하여 間北南部總辦部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때 義民?은 임시정부 산하의 이 단체에 들어가서 발전적으로 해체되 었고 義民國의 단장인 方雨龍은 이 단체의 副總辦으로 취임하였다. 方雨 龍이 통합적인 독립군 기구에 제 2인 자로 취임한 것은 간도교포 사회에서 천주교도들이 차지하고 있던 비중과 독립운동에외 기여도를 참작한 결과 였으리라 생각되며, 그 후 간도지방 천주교도들외 독립운동은 이 기구롤 통해서 계속되었다. 1920년대에 이르 러 일본측은/이들 간도의 독립군을 분쇄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토벌작전올 전개하였다. 이 소위 토벌작전 과정에서 일본군들은 독립군 을 發本塞源하기 위해 많은 조선인들 올 사살하였고 조선인 주거지를 파괴 하는 만행을 저진렀다. 이때 일본군 에 대한 저항이 치열했던 조선인 마 을이나 독립군이 많이 나은 마을은 더 욱 철저히 파괴되었던 것이다. 일본 군의 이러한 만행으로 인하여 간도지 방의 대표적인 敎友村인 大敎洞은 칠 저히파괴되었고 ㅊ敎洞의주민(남자) 43명이 피살되었으며 부녀자6명이 욕 을 당하였다. 이 러 한 피 해 상황을 볼 때 그곳에 거주하던 천주교도들이 얼 마나 처절하게 Η 帝에 저항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이러한 간도 천주교도 들의 독립운동에의 열의는 국내에 있 던 천주교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上海에서의 독립운동에 이름을 남 긴 천주교도로는 郭然盛을 들 수 있 다. 1921년 조선의 각 지역과 계충, 단체를 망라한 國民代表會議의 소진 이 朴殷植,安η浩 등에 의해서 제기 되었다. 아 국민대표회의는 많은 우 여곡절을 겪은 후 1923년 1월 卜.海에 서 120명의 대표가 모인 가운데 소집 되었다· 민족대표 120명은 엄격한 대 표심사규정을 통과하여 회의에 참석 하게 된 것인데 이때 天:Ι-:敎 代表로 는 郭然盛이 選任되었다.(1≪ 이 국민 대표회의는 創造派와 改遇泥로 분열 되었는데, 郭然盛은 上海臨時政府를 지지하는 改造派의 일원이었음을 보

아,이 회의가. 결렬된 후에도 천주교 가 임시정부와 어느 정도 계속·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리라 상정할 수 있다.

민즉의 절대적인 소망이 국권회복 과 국가독립에 있었을 때 당시의 천 주교도들은 마땅히 하여야 할 민족적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비록 민 족운동에 교회당국이 공적으로 참여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교회에서 중 요한 존재인 교도 중일부는 민족운 동에 투신하였다.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安重根을 들 ㅣ수 있으며 .또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로는 義民團 이 있다· 이 義民團은 離合集散을 거 듭하던 다른 독립군 단체와는 달리 신앙을 매개로 하여 결속됐고 뚜렷한 전투력을 갖춘 무장항일단체였다· 후 일 의민단은 독립운동에 있어서 분파 행위를 배격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독 립군 기관과 통합함으로써 독자적인 행 동은 더 이 상 하지 않았다 하더 라도. :≪民團에 속해 있던 많은신도들은계 속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들이 치한 시대의 정신을 올바로 파 악하여 찬다운 ‘榮光의 世紀’ 를 준비 했던 그들의 행동은 한국친주교희사 에서 신도들이 드러낸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었으며,죽음을 두려워하지 않 고 신앙실천운동을 전개했던 순교자. 듭의 정신과도 어느 면에서는 서로 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