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성년과 청소년에 관한 사목교서
1975년 5월호 (제 39호)
ㅡ각 주교회으I, 전국위원희,청소년 지도자들에게 나는크나큰희망을품고 젊은이들에게 말합니디나는 그들...

출판물 감독에 관한 교령 - 1975년 3월 19일 공포
1975년 5월호 (제 39호)
세계 만방에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위임받은 교회 목자들(註:주교, 교회헌장 23항참조)은,신앙의 진리를 ...

성소의 날 메시지 - 1975년 성소의 날에 즈음하여
1975년 5월호 (제 39호)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마태 9, 37; 루가10,2). 주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긴박한 적절성...

한국 주교단 메시지
1975년 5월호 (제 39호)
친애하는 모든 성직자, 수도자, 평신자 여러분에게 ! 1974년 7월 23일부터 영어의 몸이 되셨던 원주교구 ...

방지거의「聖堂歌 묘
1975년 5월호 (제 39호)
I. 序 언 天主歌辭는 한국 교회의 盛衰와 더 불어 밀접한 연관하에서 창작되어 왔 다. 이 둘은 서로 函數關...

道德敎育과 人間形成 ㅡ Erikson 의 人格發達論을 中心으로
1975년 5월호 (제 39호)
道德’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나행위에 대한제약 또는구 속을 정당한 것으로 보는 일면을 가 졌...

임종자에 대한 교회의 사목
1975년 5월호 (제 39호)
原 文 : Alois Muller (프라이 부르그 ㅊ學 司牧神學 교수), "Care of the Dying as a Task of the Church...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현존 양식
1975년 5월호 (제 39호)
II. 예언자들의 비판정신 1. 예언자들의 歷史觀모든예언자들은 한건같이 자기네 백성이 갖고· 있던 史觀을...

洗禮에 관한 改新敎의 敎義
1975년 5월호 (제 39호)
다음은 WCC(세계교회협의회) 총희와·FOC〔신앙과 직제 위원회) 회의에 파 긴된 각 교파 대표들이 동의하여...

개신교에 있어서의 세례
1975년 5월호 (제 39호)
주 예수께서 친히 명령하신 두 가지 성예전, 곧 성만찬식과 세례식은 주님의 명령인때문에만아니라그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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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단 1975년 5월호 (제 39호)

임종자에 대한 교회의 사목

알로이스 뮐러

原 文 : Alois Muller (프라이 부르그 ㅊ學 司牧神學 교수), "Care of the Dying as a Task of the Church", in Concilium 94(1974), 126-130. 譯 者:成 ?

지난 호에 게재된 J. 마이어 쇼이의 글(司牧, 36호와 37호)에서도 병자와 임 종자를 돌보는 일이 교회사목의 중 대한 일익임이 분명해졌으리라고 본 다. 그리고 그 글을 보면 교회에서 그 직분을 공식으로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역할도 상당한 한계에 부딪 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사제’ 들도 임종하는 환자의 사목에는 端役 밖에 감당하지 못하며, 그 나머지 일 은 친척, 친지,간호진이나 의사들이 담당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특히 지역교 회가 임종하는 병자를 돌보는 사목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踐神學의 각도에서 이 문제를 간략 하게 다뤄볼까 한다. 여기서 직접적 처방을 제시할 생각은 없고, 단지 우 리가 당면하게 되는 이론상의 문제와 실천상의 문제를 몇 가지 지적하는데 서 그치겠다. 필자는 이 문제가 교회 의 세 가지 奉仕職務, 곧 說敎, 典禮 그리고 奉仕에 관련 ? 다고 본다.

I. '臨終者의 司牧’ 과 說敎
사람들이 즉음에 대해서 어떤 자세 를 갖고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치는 일은 이 점에 있어서 매우 중대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의 태도를 보건데, 죽음을 맞는 자세를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하며, 또 죽음에 대 한 생각을 자꾸만 억제하려는 사고방 식 을 제 거 하는 일이 대 단히 심 각함을 알게 된다. 물론 사람에 띠.라 태도가 다르기는하지만,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것은 죽음에 대한 그 인간의 자세 때:문이라기보다는 죽음 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주 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바른 자세 를 갖게 하기 위해 교회는 어떤 식의 설교를 해야 하는가? 사실 인간들이 죽음을 그처 럼 공포의 대 상으로 생 각 하게 된 데는 교회의 책임도 있지 않 을까 ? (1) 聖職者들도 죽욤에 대한 思念을 피하려고하는경향이 있으며,‘위령 의 날,에 행하는 설교에서도 죽음이 라는 사건만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 어가는 일이 혼하다. 그리나 이것은 그다지 문제 가 되 지 않는다. 문제 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죽음에 대한 影像 이 이같은 忌避症을 더욱 조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교회가 행 하는 설교는 인간이 至公至嚴하신 하 느님 대전에 서게 된다는 것, 특히 인간의 邪惡을 들추면서 그 사실을 강조하거나 가차 없는 問招를 서술하 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리스도 교인 들은 우선 Dies Irae(저 의 노의 날)의 戰?感에서 벗어나야 함 처지이다: “사언행위 기록한 책 만민· 앞에 될쳐 놓고... 불쌍한 나 무슨 말까 어느변 호 청할소냐?” 여기시 한걸음 더 나 가면 "악인들을 벽파하여 맹렬화염 던지시고 ‘나는,천국 부르소서” 하 는 인정사정 없는 말까지 나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심판의 사상을제 대로 깨우쳐 주려면 로마서 8,31-39 의 노선을 따라야 할 것이다: “하느 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감히 고소할 자가 누구입니까? 올바르다고 인징 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신데 누가 감 히 단죄할 수 있겠읍니끼-?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읍니까? 아닙니 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 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는 하 느님의 오른편에 자리잡으시고 우리 를 위하여 대신 기도해 주시기까지

하는 분이십니다”(33-34). 심판의 준 엄함이 드러난 것은십자가에서디-. 십 자가야말로 하느님을 위하거나 하느 님을 등지는 個個의 決斷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 느님 대전에 인간이 자기 소행을 셈 바친다는 관념은 도대체가 그룻된 것 이디-. 이 관념은 문제를 순전히 외형 적으로만 보고 있으며, 심판받는 것 은 인간의 근본적 자세이며 이 자세 가곧 하느님의 심판을 ‘미리 정한다, 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를 믿 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단받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3, 18). 인간에게 닥치 는 '四末’은 年代的인 것보다 훨씬 중요한 뜻을 가지며, 예수의 救履行 爲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구속행위 가 궁극적으로 證明되는 것이 곧 인 간의 죽음의 순간이다. 그렇기 때문 에 바하치럼 "달콤한 죽음이여,어서 오라 !.',고 하는 것도 좀 괴기한 말이 다. 一

(2)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올바른 자세는 곧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들 한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오로지 은혜로운 선물임을 인정하는 말일 것 이다. 인간은 生物學的,歷史的 構造 를 갖는 까닭에,다시 말해서 有限한 까닭에, 인간의 生이 결코 하나의 所 有일 수는 없다. 따라서 생에 대한 ‘超然,도 생에 대한 執着만큼이나 본 질적이라는 뜻이 되며,인생의 지고 한 가치들은 생에 대한 집착과 초연 사이의 부단한 변증적 과정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우리 는 인간이 죽는데 알맞는시간이라 든가 알맞지 않은 시간이 따로 있 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생 전체에 대한 頓悟, 생의 초자연한 次 元,정말 우리를 황홀하게 만드는 인 생의 진지한 의미 …… 이런 것은 인 생의 어느 순간에도, 어떤 행동이나 어떤 체험에서도, 인생의 어떠한 결 단 속에서도 체득할 수 있는 것이 며,따라서 죽음의 순간에서도체득 할 수 있다. “생의 한가운데서 우리 는죽어가고 있노라"는 명언이 여기 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즉 음을 맞대놓고 거짓말로 허튼수작 을 한다는 것이 크리스찬에게는 무 의미한 짓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찬들에게 그들의 죽음을 소재 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ㅡ 그 이야기가 원칙적 이야기든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든ㅡ그것이 크 리스찬들을 불안케 하거나 위압감을 줄 수는 없다.

II. 임종자에 대한 典禮上의 配慮

?振聖事에서,五官에 密油를 바르 던 습관을 삭제한 것은 잘한 일이다· 오관에 기름을 바르는 예식은 사실 病者의 聖事〔終傅聖事〕에 해당한다. 그러나 임종하는 이를 위해서는 종부 성사는 깊은 의미를 갖는다. 죽음은 인생과구원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 사건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죽

음을 전례직 또는 성사적으로 표현하 는 것은 당연하다. 단 여기서 성사적 표현이라 하면 죽는 이에게 배려하는 전례를 다 지칭한다. 특별한 상황에 서는 바로 塾油를 바르는 일부터 하 지만, 원래 ?Α聖事와 奉聖體도 거 행 하며, 인생 이 끝나는 엄숙한 장면 에 어울리는 다른 예식으로서 매듭짓 도록 규정되어 있다.

(1) 병자의 성사는 聖-事萬能主義者 들 때문에 왜곡된 점이 많디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차비를 차리는 예식으로 오해되어, 몸에 防腐劑를 바르고 서둘리 저승길을 나서는 것처 럼 생각한다. 병자의 성사가 인생 최 후의 순간을 密油로 聖-別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위와같은 미신적인 관념이 있다면 사목적 배려를 하여 그같은 오해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임종자를 위한 전례는 ?典 的 次元과 敎會的 次元으로 발전시켜 서 고찰할 수 있다.

(2) ‘信仰과 秩序’에 관한 교회일치 운동에서 토의되는 내용으로 미루어, 聖-事를 事物化하는 그룻된 사고방식 을 조심해야겠다. 그렇다고 ‘신앙,과 '말씀’을 중대시한다고해서 禮典의 본질을 경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전례거행이 신앙인으로 하여금 자기 신앙을 재확인하고 행복한 안도감을 가져음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구태여 肉化의 신비까지 끌어대지 않더라도, 육체를 가진 인간은, 인간의 사상이 나 표현이나 실존이 담고 있는·肉體的 次元도 그만큼 존중해야 한다는 이론만으로 넉녁하다,

서구의 啓蒙思想을 물려 받은 사람 들까지 합쳐서,무룻 인간은 禮典이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임종 자를 위한 전례상의 배려를 어떤 이 데올로기 때문에 희생시킬 수는 없다.

(3) 에전은 敎合的 의미를 또한 갖 는다. 全體敎舍에 속하여 있는 소속 감을 확실하게 만든다· 그 임종자에 게 교회 공동체가 무슨 의미라도 갖 고 있다면,이것은 매우 중대한 요소 가 아닐 수 없다. 신앙은 fl!通하는 가 운데 생기를 얻는다. 특히 교회 공동 체와의 유대, 즉 JJHA-I-의 通功을 통 하여 신앙은 활력올 얻는다. 그의 신 앙을 補强하는 교회 공통체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면 임종자의 신앙은 틀림없이 견고해질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이 現:f/·은 은연중에 祝術的인 제스쳐로 변히-는 그럴듯한 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임종자에게 베푸는 그예전이 교회 공동체 생활 의 기본이 되어 있어야 한디신자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그 점을 체득했다 면, 임종의 자리에 누위서도 임종자 를위한전례와 교회생활을 직결시킬 것 이 다. 물론 이 런 분위 기 를 조성 하 려면 地域敎會나 病院 또는 養老Κ에 적절한 조직을 갖춰야 할 것이다. 임 종하는 이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일 종의 공동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러 자면 난점 이 한 두 가지 가 아니 겠 으나 어떻게든 방도를 모색해야 한디..
그 자리에 오는 친지니- 친척들이 그 러 한 상황 하에 서 는 자기 네 가 곧 교회 공동체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의식할 수 있다면 매우 유리하다. 양로원에 서 임종자의 베개맡을 지켜주는 善 終會같은 단체가 조직되면 임종하는 당사자나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나 이 만저만한 도움이 아닐 것이다. 병원 에도 그에 유사한 단체를 조직할 수 없을까? 醫療陣이 너무 바쁘다면 회 복기의 환자들로 구성할수도 있을 것 이다。그리고 본당에서는 善終會;ㅡ 단 구태 의 연 한 방식 과 체 제 는 탈피 해 야 한다ㅡ를 조직할 수 있겠다·

물론 여기서 직업적으로 喪家를 쫓 아다니 는 패 거 리 나 哭 女들을 모아서 무슨 단체를 만들자는 말은 아니디-. 임종자에게 끝까지 ㅅ問路係를 지속 해 주는 일이 그에게는 가장 중대한 위로요 힘이 된다는 것이며,그런 뜻 에서 그에게 전례나 인간관계를 돌보 는 교회 공동체의 활동이 조직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바른 정신을 갖고 조 직되기만 한다면, 정말현대적인 공동 생활의 형태로 강화되리라고 본다. 그리고 그런 단체가 만들어진다면 최 근 社合學이 게발한 인간관계의 類型 에다 히기적 변화를 줄 수까지 있을 것이다.

III. 죽음과 교회의 서어비스

여 기 서 '서 어 비 스,라고 하면, 인 간 이 겪는 온갖 불행과 곤경을 두고 교회가 벌이는 활동을 지칭한다. 서어 비스라는 것이 꼭 그리스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나오 는 당연한 귀결이 되어 있다. 실제로 보면 이 서어비스는 말씀과 성사를 주로 하는 '宗敎的,奉仕職과도 다르 며,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배려해 야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사회나 사회단체의 손에 이미 넘어간 부면의 서어비스를 교회가 독점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서어비스 의 사명을 行政當局에 다떠맡기고, 교회에 손을 벌릴때마다, ‘이것은 무 슨 기관에서 할 일이오,하고 잡아땐 다는 것은 더욱 못할 노룻이디-. 교회 공동체가할 일은 인간들이 제대로 처우를 받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그만 한 배려가 가는가를 자상히 살피며, 거기에 결함이 있을 때는 교회가 나 서서 손을써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隣Α愛를 선양하는 弘報活動에 서부터 대규모의 福祉事業에 이르기 까지 여 리 단계 가 될 것이 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 과 연 누가 책 임 (사명 감)을 갖고, 불치 병에 걸려 있거나 어떤 손길을 기다

리면서도 말 없이 숨어 있는사람들을 찾아발 것인가? 그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의 정진적 고통이 어떤 것이며, 가족을 잃게 된다는 비극적인 중압감 을 느끼거나 자꾸만 환자와의 관계를 기피하려는 심리를 갖거나, 같은 질환 이 유전되지나 않을까 고심하는 처지 를 알아내는 일은 누가 해 야 하는가 ?

이런 따위는 한정 없는 일이며, 또 무모한 짓이라고 하는 답변을 할 지 모르지만, (이런 따위,의 일이 곧 서 어비스가 아니겠는가? 위에 열거한 고충이 실제로 있으니까 우리는 수수 방관할 수는 없다. 교회 공동체인 우 리가 반드시 해야 할 바는 무엇무엇 이고, 우리로서는 손쓸 수 없는 것 은 무엇무엇이라고 한계를 긋는 일도 물론 필요하기는 하다.

임종자는 죽음을 맞아 자기를 비우 고 자기를 포기한다. 그런 죽음인 만 큼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대 수롭지 않은 척하며 태평할 수가 없 다. 여기서 교회는 임종자와 그의 가 족들에게 삶을 바르게 하고, 바른 삶 속에서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죽는 지혜를 배우게 만들 사명을 지는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