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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교리교육의 새로운 관점
1974년 9월호 (제 35호)
몇 해 전만 해도 교리교육은 신앙의 메시지를 신학적 체계로 설명한 교리문답을 중심으로 실시해 왔을 뿐 ...

교리교육의 주요한 내용
1974년 9월호 (제 35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 초세기부터 예비자들에게 교리교육을 실시해 왔다. 물론 시대에 따라 교리...

예비신자 교리교육의 프로그램
1974년 9월호 (제 35호)
예비자 교리교육 프로그램은 그 대상과 환경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를 생각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본당에서...

主日學校 敎理敎育의 實態와 그 問題點
1974년 9월호 (제 35호)
I. 머리말 아동들의 종교교육이 우리 교회 안에서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경 부터라고도 하겠으나 본...

교리교육과 청소년의 신앙
1974년 9월호 (제 35호)
1. 머리말 지난 2월에 원주 교구에서 개최한 청소년 교리교육을 위한 교사 세미나에 강의를 부탁 받고 원주...

韓國敎會 敎理書의 變遷史
1974년 9월호 (제 35호)
序 論 우리나라에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래 오늘에 이르는 동안 교리서가 어떻게 變遷해 왔고 또는 發展해 ...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와 그 실천
1974년 9월호 (제 35호)
1.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使命受任이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직 사명의 수임에 관한 질문은 各...

침묵의 의미
1974년 9월호 (제 35호)
현대는 말이 참 많은 시대다. 먹고 뱉어내는 것이 입의 기능이긴 하지만, 오늘의 입은 불필요한 말들을 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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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輯 · 敎理敎育의 問題點 1974년 9월호 (제 35호)

韓國敎會 敎理書의 變遷史

崔 奭 祐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신부)

序 論

우리나라에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래 오늘에 이르는 동안 교리서가 어떻게 變遷해 왔고 또는 發展해 왔는가? 이와 같은 특수 분야에 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고찰이 아직 필자가 아는 한에서는 없는 줄로 안다. 역사적 고찰의 대상이 될만한 가치가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우리 측의 무관심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여하간 그 변천 과정은 차치하고 다만 이 나라에 복음이 전래한 것이 세계 어느 교회사에사도 그 類例를 보지 못할 만큼 오직 교리서의 媒介로 실현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연구대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번「사목」誌가 ‘교리 교육'에 관한 특집을 계획할 뿐더러 이를 위해 그 역사적 고찰을 먼저 내세우려 함은 무엇보다도 이 분야에 대한 그간의 우리의 무관심을 깨우쳐 주는데도 적지 않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라 할지라도 과거의 어떤 문제를 연구하려면 먼저 이 방면의 기본이 될 전문지식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 더우기 문제가 안으로는 神學과 聖書와 관련되고 밖으로는 心理學과 敎育學과 같은 多方面의 학문과 관계되는 ‘교리교육학'이고 보면 이같은 요구는 아마도 그 변천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필자가 자신의 관찰이 극히 불완전하고 皮相的이 될까 우려하면서도 감히 시도하는 것은 다만 지금까지의 미개척지를 개척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이 분야의 연구를 촉진시켜 후일 수정 보완케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한국교회의 교리교육 역사에 있어서 가령 ‘회장‘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방면의 연구는 비단 교리서란 한 가지 점에 그친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서 교리교육에 관한 문제가 당연히 전반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교리서에 국한시킨 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내용이 일층 不實해질 것을 두려워 한 때문이다. 

편의상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교리서가 변천한 과정을 몇개의 時期로 나누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轉機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획기적인 교리서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여기서 획기적이라고 한 것은 표면상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지 名實共히 모두가 그러했다는 뜻은 아니다. 획기적인 교리서란 다름아닌 다은의 네가지 지서를 가리켜 말하는 것으로서 즉「主敎要旨」,「성교요리문답」,「천주교요리문답」,「가톨릭교리서」등이다. 이제 이상 네 저서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교회에서의 교리서의 변천사를 4期로 구분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제 1 기 ㅡ「主敎要旨」로 완성되는 時代(1784-1838)
제 2기 ㅡ「성교요리문답」時代(1838-1925)
제 3기ㅡ「친주교요리문답」時代(1925-1964)
제 4기 ㅡ「가톨릭교리 서」時代(1964- )

제 1 기 (1784-1838)

‘교리서' 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아듣는 그런 형태의 교리서는 엄격히 말해서 아직 이 시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시기의 유일한 교리서로 指目될 수 있는「主敎要旨」도 실은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라기보다는 읽기 위한 저서이다. 따라서 일정한 교과서가 아직 없던 이 시기의 예비자 교육이 주로 교리교사에 의하여 좌우되었을 것이고 그들의 교리지식이 절대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초기교회 문헌은 매우 흥미있는 사실을 전해 준다. 즉 서울의 총회장이던 崔昌賢이 잡혀 *廳에서 신문을 받는 가운데서 "정약용의 문서 중에서 神父이니 代父이니 하는 것이 누구를 指目한 것이냐“는 판관의 질문에, 그는 “若鏞의 神父는 李承薰이요,代父는 權日身입니다. 神父라는 것은 領洗를 말한 것이요,代父는 敎授하였다는 稱號 올시다. 矣身도 또한 李승훈을 神父로 삼고 丁약용을 代父로 삼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아주 흥미있는 점은,물론 아직 神父가 없던 시대이긴 하지만 어쨌든 세례를 주는 사람을 神父라 부르고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을 代父라 불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神父는 李承薰 하나 뿐인데 비하여 代父는 權日身과 丁약용 두명이다. 그러나 神父도 李承薰 혼자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李承薰이 1785년 박해로 배교하게 되자 영세를 중단시키지 않으려는 뜻에서 다른 두 사람에게도 세례권을 부여하여 세례를 代行케 한 기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영세에서 시작된 성사집행은 미구에 고해, 성체, 견진성사까지도 함부로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상술한 바와 같이 한국에는 남달리 다만 교리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러한 교회가 곧 성사를 마구 집전했다는 사실은 당시 지도층의 교리지식마저도 얼마나 불충분하고 불완전했던가를 가히 짐작케 한다.

예비자라면 누구나 일반적으로 소정의 교리지식뿐만 아니라 주요한 經文도 익혀야 했으므로 한국교회도 예외없이 그 通例를 따랐을 것으로 추측되며 사실 이와같은 추측을 뒷받침하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제2대 조선 교구장 범(Imbert) 주교는 초기신자들의 기도생활에 관하여 1838년 布敎省에 아래와 같은 보고를 보냈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조선사람들은 천주께 보다 적절하게 기도드릴 수 있는 자기 고유의 말은 멸시하고 도리어 漢文을, 그 뜻을 번역하지도 않고 그 발음만 옮기어 사용함으로써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뜻도 모르면서 기도하였다." 여기서 결과되는 사실은 첫째 초기교회에 이미 경문이 있었다는 점이요,둘째 그 경문은 한문에서 정식으로 번역한 것이 아니요, 한문에다 토를 붙인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비록 경문의 종류는 언급되어 있지 않더라도 당연히 성호경과 主母經 같은 주요경문이 들어 있었을 것이므로 가령 아래와 같은 성호경을 상상해 본다 하더라도 범주교의 보고에 비추어 볼 때 전혀 근거없는 추측 은 아닐 것 같다. “以十字는 聖架號라 天主는 我等主라 救我等於我*키로 因父及子及聖神之名者하여 亞孟하나이다."

周神父의 入鮮이 교리서 편찬에 큰 계기가 되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 것을 뒷받침할만한 문헌은 발견되지 않고 다만 周神父가 고해와 성체성사에 관한「사순절 안내서」를 한문에서 번역했다는 사실과 丁若鍾의「주교요지」를 周神父도 인준했다는 사실만을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주교요지」의 저술연대는 미상이다. 그러나 丁若鍾이 1786년에 入敎하여 1801년에 순교했으니 그 사이의 저술일 것은 물론이려니와 다만 오랜 세월의 연구와 체험을 전제한다면 이 시기의 初期보다는 後期에 속하는 저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丁若鍾에 대하여 "종교의 진리를 강론하기를 좋아하였고……혹시 한 가지 道理라도 모르면 침식의 흥미를 잃었으며 무식한 자를 보면, 힘을 다하여 타일러 가르치므로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깨치지 아니하는 자가 적었습니다”고 한 ?嗣永의 말은,왜 丁若鍾이 그 책을 쓰게 되었고 또 누구를 위해서 써야했는가가 잘드러나 있다. 「주교요지」는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말로 지은 최초의 교리서이다. 그 저자는 비록 일개 평교우에 불과했으나 周神父의 인준을 얻은 것으로 보아 그의 교리지식은 완벽한 것이었다. 이제 上下 2卷으로 되어 있는 그 책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上卷은 천주의 존재,賞善罰惡,영혼의 불멸 같은 진리를 증명하는 한편 異端을 배척하는 말하자면 護敎篇이고, 下卷은 강생과 구속의 도리를 詳述하고 있다. 이 교리서는 무식한 부녀자와 어린이까지도 포함한 무엇보다도 우매한 대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비단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諺文을 사용한 점에서뿐만 아니라 이론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도 대중에게 적절한 방식을 쓰고 있다. "번개와 우뢰를 만나면 자기 악을 생각하니 만일 천상에 임자 아니 계시면 어찌 사람마다 마음이 이러하리오"라고 하여 이론을 따지기에 앞서 인심 자체에서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 것이 그 일례일 것이다. 丁若鍾이 이 책을 저술함에 있어서 여러가지 서적을 인용하였고 자기의 의견도 보태었다고 말함으로써 ?嗣永도 이미 그 책이 결코 한문 교리서의 모방이 아님을 증언한 바 있거니와 근자에 와서 朴鋪德 박사도 "丁若鍾의 著述「主敎要旨」가 西士 著書의 한갓 번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우리의 전통적인 신앙과 실정에 적합한 ?述임을 생각할 때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점이 너무나 많다. 消化 攝取한 증거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하는 까닭이다"('西歐思想의 導人 批判과 攝取'에서)라고 하며 그 창작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제2기 (1838-1925)

조선에 처음으로 교구가 설정되었고 또한 그 교구의 司牧이 파리외방전교회에 위탁되었다. 이어 곧 동회 회원 프랑스 神父와 主敎가 속속 입국하게 됨으로써 교리서 편찬 사업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니 이른바 '요리문답시대'가 서서히 시작하게 된다.

1838년 초,입국에 성공한 범 주교는 곧 예비자들이 외워야 할 주요경문 번역에 착수하였다. 초기교회에서 전해오는 경문들은 漢文經文의 音譯에 불과했으므로 교우들의 보다 효과적인 기도생활을 위해서는 경문의 개혁이 時急했다. 그래서 범주교는 조선말을 좀 이해하게 되자 조선인 통역들의 보조하에 한문 경문 중에서 예비자 교육에 근본이 될 만한 열두 개를 뽑아 번역하였다. 이것이「天主敎十二端」의 기원이다. 1887년 간행된「한국교회지도서」에 보면「십이단」이 모든 成人예비자가 외워야 할 경문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필시 이 시기까지 遡及될 수 있는 전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846-1853년 사이에 포교성에 제출한 조선교구의 보고서에 의하면, 오류가 없고 언문으로 된 교리서들이 여러 개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는「주교요지」외에도 초기교회로부터 전해오는 교리서가 또 있었는가이고,둘째는「성교요리문답」도 이미 번역되어 있었던가이다. 「주교요지」외에 「성교절요」라는 교리서도 발견 된다. 따라서 첫째 의문은 간단히 풀린다.「蜜敎切要」란 성호경, 천주경, 성모경, 信經, 천주십계, 성교사규, 죄, 덕행 등을 풀이한 한문 교리서인데 1837년부 한글역 필사본이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양화진 순교 기념관 소장).

다음「성교요리문답」도 이미 번역되어 있었던가는 쉽게 결론짓기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범주교가 경문을 개혁하는 일뿐 아니라 교리서 개혁에도 착수했다는 기록이 없기는 하지만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기 전에 이미 수년간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약했고 한문에 능통했던 그가 당시 중국에서 널리 보급되어 있던「聖敎要理問答」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문의 해결은 후일의 연구로 미루고 우선은 懸案으로 남겨 두기로 하자.

한국교회가 최초로 공식 교리서로 채택한「성교요리문답」은 상술한 바와 같이 同名 漢文교리서의 번역이다. 최 도마신부는 1860년경, 보다 완전하고 보다 정확한 교리서의 간행을 준비 중이라고 하였으니 늦어도 이 무렵에는 이미「성교요리문답」의 초고가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의심없는 일이다. 당시의 교구장 장(Berneux) 주교는 비단 최 도마 신부만이 아니요 모든 신부를 교리서 편찬 사업에 총동원하다시피 했다. 그는 전교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교우 수가 증가되는 반면에 선교사의 수가 이에 미치지 못하므로 일어나는 교리교육의 결함을 보충하는 길이란 결국 서적의 보급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전교신부들에게도 전교의 바쁜 틈을 타서라도 말을 배우고 책도 번역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렇게 교우들의 無知를 극복하려 했었다. 뿐만 아니라 교리서의 보다 효율적인 보급을 위해 印刷所 시설에 착안한 그는 1864년에 이르러서 두 개의 木版 인쇄소를 준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주교요지」와「성교요리문답」등의 교리서가 처음으로 인쇄 간행 되었다.

「성교요리문답」은「四本要理」라는 別名이 있듯이 영세, 고해, 성체, 견진의 네 가지 근본요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너 무엇을 위하여 성교에 나아오뇨"에서 시작하여 "견진을 영한 사람이 무슨 본분이 있느뇨"까지 총 154조목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한국교회지도서」는 견진을 제외한 영세, 고해, 성체의 세 문답을 영세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나이 많고 우몽한 사람들을 위한 고유한 교리서가 처음으로「진교절요」 라는 이름으로 백 (Blanc) 주교 시대에 간행되었다(1883).「진교절요」는 서두에서 비록 나이가 많을지라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영세조건으로서,①이단을 끊을 것,② 화해와 보상,③ 통회와 정개, ④ 영세도리,⑤ 要經六端, ⑥ 要理六端을 들고 난 다음「십이단」중에서 「요경6단」을 추려내고 ‘천주존재','삼위일체’, '강생구속’, '영혼의 불사불멸’, '상선벌악’,'하나이요 참된 천주교'를「요리6단」으로 제시한다. 끝으로「성교요리문답」 에서 12조목만을 간추려 영세문답으로 제시하였다.

이외에도 이 시기의 것으로 간주되는 여러가지 한문 교리서와 그 한글역 필사본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백주교는 당초보다 나은 교리서의 개혁을 계획하고 그 기초작업으로 한문 교리서의 번역을 추진시켰던 것 같다. 오늘날 남아 있는 한글역 사본들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古經문답」,「新經문답」,「古新經문답」,「*言要理」,「성교요리서(대 문답)」,「영성체요리」,「열교원위문답」등이다. 그러나 번역이 좋지 않았던지 또는 아직 개혁이 시급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던지 아무튼 그 중에서 하나도 간행된 것은 없고 다만 1884년「성교백문답」이 출판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同名 한문 저서의 번역이며 상당히 호교적이고 신학적인 문답 1백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기의 마지막 저서로는 1910년의「요리강령」일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그림 교리서인데 그림은 프랑스판을 그대로 인쇄하였고 한글로 된 설명문은 한 바오로 신부가 덧붙인 것이다.

제 3 기 (1925-1964)

「성교요리문답」은 1864년 初版이 나온 이래 木版 또는 活版으로,순 한글 또는 國漢混用으로 수없이 版을 거듭하면서 새 문답이 나오기까지 무려 70년간 유일무이한 교리서로서 조선교회에 군림해왔다. 그런데 새문답이 나온 것은 1934년인데도 불구하고 1925년을 벌써 이 시기의 起點으로 잡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왜냐하면 이 해에 나온 소위「천주 교요리(대문답)」에서 이미 새문답의 기반이 될 근본적 쇄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 교리서 편찬의 불가피성을 무엇보다도 구 교리서의 교리節目의 부족과 설명의 불충분에서 보고 있는 민(Mutel) 주교는 서문에서 이 교리서 간행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한다.

"모든 교우들이 요긴한 공부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이미 조선에서 두 가지 책을 발간하였으니「진교절요」와「성교요리문답」이 이것이니라.「성 교요리문답」은「진교절요」보다 크기는 크나 또한 도리의 대총뿐이요 도리를 의논한 온전한 책이 못되느니라. 의논치 못한 도리의 절목이 많으며 또 의논한 것도 더 장황한 설명을 요하는 절목이 많으니라. 그래서 교우들에게 한 권 책을 발간하여 주기로 하였다."

「천주교요리」의 저자는 최 (Le Gendre) 누수 신부이고 한국 신부 몇이 그를 도왔다. 3卷 3?으로 되어 있는 이 저서는 권마다 篇을 나누어 1편은 믿을 도리, 2편은 천주계명, 3편은 성총을 얻고 구령하는 방법을 각각 다루고 있다. 구조로 보아 후에「천주교요리문답」이 완전히 그것을 따랐음을 즉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미 서울교구 내에서 서서히 진행되어 오던 교리서의 개혁운동은 마침 1931년「조선교구설정 1백주년」을 맞아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때 개최된 조선 주교 공의회는 교리서 문제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전국에 통일된 교리서의 필요를 느끼면서 새교리서의 편찬을 의결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교리서 편찬을 위한 '5교 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대구 감목 안(Demange) 주교가 위원장이 되었다. 위원회는 약 2년 만인 1934년, 대망의 교리서를 간행하였으니 그것이 바로「천주교요리문답」이다. 같은 해 라틴어 번역판(Caiec/w'imMs Communis Missionum Coreae)도 나왔는데 在韓 외국인 선교사들로 하여금 한글구절의 뜻을 명확히 하고 교리강의 준비에 도움을 주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새 교리서는 최 신부의「천주교요리」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내용 상으로는 「성교요리문답」과 비교할 때 종래의 154조목이 무려 320조목으로 대폭 늘어났다. 그러나 이왕 있던 조목에는 多少의 변경을 가했을 뿐 근본적인 개혁을 꾀 한 것 같지는 않다. 一例로 구 문답의 첫째 조목이 새 문답에서도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뿐더러 문답의 내용도 "너 무엇을 위하여 성교에 나아 오뇨”가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나뇨"로, 또 "천주를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함이니라”를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나니라"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을 뿐 결국 대동소이하다. 반면 구문답에는 그래도 간간이 풀이가 있던 것이 새문답에서는 문답 一色이 되어버림으로써 교리서를 더욱 무미건조하게 만든 느낌을 주고 있다.

구문답은 주로 예비자를 대상으로 했었고 노인 예비자들을 위해서는 따로 문답을 만들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새문답은 이를 위해 따로 교리서를 만들지 않았고 한 가지 책을 갖고 다만 조목의 多少로, 소아문답, 노인문답, 예비자문답, 교우문답 등의 구별을 짓고 있을 따름이니 그것은 신자와 미신자, 노인과 어린이의 이해력을 고려하지 않고 내용과 표현을 一律化시킴으로써 도리어 이 방면에서는 후퇴를 가져온 것 같다.

또한 구문답에서는 대인 영세 예비자라면 견진문답을 제외한 모든 조목을 외워야 했었는데 새문답에서는 따라 욀 조목과 배워 익힐 조목들이 근본적으로 구별되어 있다. 또한 종대에는 찰고 받을 때 문과 답을 모두 외워야 했었는데 새문답이 나옴으로써 찰고 방법도 약간 달라졌다. 즉 찰고 받는 자는 答만 외면 되고 問은 안 외워도 되게 되었다. 암기 중심에서 뜻을 익히지 못하는 폐단을 제거하려 한 조치인 듯 하나 과연 결과적으로 이 방법이 이해력에 일마나 보탬이 되었을까? 끝으로 1931년「한국교회지도서」는 지금까지 최소한 40일 간이던 예비 자의 시험기간을 최소한 6개월로 늘렸다.

제 4 기 (1964- )

현대에 와서「독일교리서」와「화란교리서」만큼 교리서의 개혁과 현대화에 기여한 저서는 드물 것이다. 두 개의 저서가 모두 출판된 지 불과 수 년 만에 수많은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그것을 증명 한다.「독일교리서」가 나온 것은 1955년, 그리고「화란교리서」는 1966년에 나왔다. 이상 교리서들이 특히 포교지방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것들이 나오게 된 경과부터 간단히 알아보기로 하자.

이미 20세기초부터 시작한 교리교육면의 개혁운동은 우선 그 방법 개선에서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교리교육의 개혁이 방법론이란 부분적 쇄신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고 그 내용도 마땅히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다행히도 때마침 일기 시작한 성서와 전례운동, 무엇보다도 소위 ‘케뤼그마’ 에 관한 신학적 저서가 교리서 개혁을 促進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교리서는 그의 주요 관심사를 복음의 선포와 그 전달로 돌리게 된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연 암기할 귀절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본연의 구원 메시지를 핵심으로 하는 포괄적인 서술에 중점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종래의 교리서의 부분적 수정으로는 도저히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고 따라서 전혀 새로운 교리서의 편찬이 불가피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한 時代的 요구에 응하고자 독일주교단은 1938년에 새 교리서의 편찬을 계획하였고 근 20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전문가들을 수없이 동원하여 마침내「독일교리서」란 대작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독일교리서」가 한국, 일본 등지에서 번역 소개됨에 따라 교리서 개혁에 대한 관심은 포교지방에서도 높아갔고 일본과 필리핀을 선두로 극동에서도 교 리서 개혁이 추진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모처럼 포교지에서도 나타난 교리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에 학문적인 뒷받침을 하려는 의도에서 1960 년 독일에서 포교지방 교리교육 쇄신을 주제로 하는 '국제 학술 대회'가 열렸고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당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이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와같이 이웃과 구라파에서의 활발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나라에서만은 아직 뚜렷한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주저 상태에서 한국교회를 교리서의 개혁으로 결정적으로 각성시킨 것은 이 방면에 있어서 유달리 깊은 관심과 우려를 보인 故 한공렬 대주교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덕택이다.

1964년 한국주교단은 산하에 ‘전국교리 위원회'를 창설함으로써 교리서의 현대화 작업을 개시하였다. 이에 위원회는 산하에 ‘교리서 편찬 특 별위원회’를 두어 교리서 편찬을 專擔케 했다. 특히 2년여 만에 새 교리서의 편찬을 끝냈고, 주교단이 그것을 인준, 1967년 부활절을 기하여 간행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현행「가톨릭교리서」이다.

「가톨릭교리서」는 주로「독일교리서」를 모델로 삼았고 따라서 종래 암기 중심의 문답식을 止揚하고 ‘케뤼그마'적인 노선에서 구원의 진리를 성경 중심으로 풀어 엮으려 했다. 전체는 4편 52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課의 구성은〈인도귀절>, <본문>,〈복습〉,〈신앙생활>, 〈성경공부〉로 되어 있다. 그리고 새 교리서는 예비자들과 일반 신자들을 위한 것이고 어린이와 노인용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추후에 내놓겠다고 하였다. 약속된 노인용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고 어린이용만은 ‘전국 교리교육 위원회'가 편찬한 것이 昨年 주교회의의 인준을 거쳐「주일학교교재」로서 발간되었다.

새 교리서가 간행되자 곧 "내용이 어렵고 지루하다", "문장이 딱딱하다", "구성이 산만하다", "편집의 일관성이 부족하다", "成人用으로 내용 이 빈약하다", "아직도 로마교리서적인 구태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좀더 救世史的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등등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개중엔 다음과 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니 "복음 전달을 위주로 하였다", "護敎에서 福音으로 現代化하였다", "어쨌든 교리와 문답, 기도와 생활을 한 단원에서 다루었다는 점과 무엇을 새로 만들어 보겠다는 노력만으로 새 교리서는 훨씬 진보한 것이라고 하겠다" 등등일 것이다.「가톨릭교리서」가 나온지도 어언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그것을  보는 눈도 상당히 客觀化했을 것으로 생각되기에 여기 최근 최윤환 신부의 비판을 그대로 소개한다. "재래의 문답과 비교할 때 문답에 있는 내용은 실제로 교리서에 거의 다 들어있으나, 전과 같이 딱딱하고 알아 듣기 어려운 독단론적 교리를 간결한 물음과 답의 형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므로 암기하기가 힘들고 또 그 답도 선명치 않게 보인다. 그러므로 그 전 문답의 풀이로 보면 좋을 것이며 이 교리서는 어디까지나 응용할 수 있는 방향 제시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司牧 31號 참조).

結 論

旣述한 바와 같이 「독일교리서」이후 그만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교리서 현대화에 가장 큰 자극을 주고 있는 교리서는 분명히「화란교리서」 일 것이다. 1966년 3원에 출판된 이 교리서는 같은 해에 벌써 화란 본국에서만도 근 4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이같이 출판 시초부터 국내의 베스트 셀러로 등장한「화란교리서」는 곧 화란국 밖에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잇달아 많은 나라가 그 번역판을 내게 되었다. 그 번역이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것이 겨우 1971년의 일이기는 하나 여하간 출판 이래 특히 가톨릭 知性인들 사이에 많이 읽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같이 「화란교리서」가 현대 신앙인에게 크나큰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구조와 표현이 현대에 가장 적합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세계에서 출발하여 그 현실과 상봉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케 함으로써 인간 자체를 완성시키려는 자세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서의 주요한 관심사는 결코 지식의 전달이나 철학적인 대답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현실생활 자체요, 현실 속에서의 믿음이요 행동이요 활동이다. 가장 현대적인 이 교리서 앞에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우리의 교리서로 받아들일 유혹의 꾀임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화란주교단은 그와같은 유혹을 예측한 때문인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이 교리서에 대한 외국에서의 큰 관심과 이미 보급된 많은 번역을 고려할 때 아마도 그것을 일종의 세계적인 교리서로 간주하려는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관심이 크고 번역이 많다 하여 반드시 세계적 교리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실정은 나라 따라 아주 判異한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관심이 각국으로 하여금 자기 고유의 成人교리서에 대한 문제를 각성시키는 데 도움이 되어 주길 바랄 뿐이다.

이상 화란주교단의 말과 같이 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교리서의 문제점을 의식했는가 못했는가에 있을 것이다. 문제를 의식한 사람이라면 현행 교리서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고, 반면에 의식하지 못한 사람은 "또 변경되어야 하느냐"고 한탄할 것이다. 변경 여부에 앞서 우선 너무 교리서에만 의존하려는 우리의 태도는 개선되어야 할 것 같다. 교리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리서 자체가 아니요 교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선생과 학생이고 교리서는 그것을 보조하는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현대에 적합한 교리서가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할수 있고 不可能 하다고도 할 수 있는 아리송한 질문이다. 그보다는 먼저 교리교사와 학생이 과연 현대에 적합한 교리교육을 베풀 수 있고 또 받을 수 있느냐를 물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현대에 적합한 교리서일지라도 그것을 연구하고 응용할 줄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현실을 중요시한 교리서일지라도 현실을 외면한 교리교사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고 또한 아무리 신앙과 신뢰만을 가르치는 교리서일지라도 모든 질문에 척척 대답하려는 철학자연한 교리교사에겐 牛耳讀經격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사목」지가 '현행 가톨릭교리서'의 특집(31號)을 내면서 그 活用法의 연구를 主題로 한 것은 아마도 비록 시대에 뒤진 교리서를 갖고서라도 그 활용 여하에 따라서는 충분히 시대에 맞는 교리교육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여 현행 가톨릭교리서의 쇄신을 반대하려는 의사는 추호도 없으며 도리어 그 개혁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전면적 개편이 어렵다면 적어도 공의회에 따른 부분적인 수정만이라도 가해져야 한다. 현행 교리서 편집에 종사한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그 결함과 부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새로운 번역의 성경구절로 바꾸는 것만이라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가톨릭교리서」가 나온지 아직 10년도 못되는데 또 바꿔야 하고, 또 새 것을 기다려야 하느냐고 한탄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분명코 시대의 징조요 요구라면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生動的 물결을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이요 도리어 그것을 新生의 싹으로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