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성서교리교육의 새로운 관점
1974년 9월호 (제 35호)
몇 해 전만 해도 교리교육은 신앙의 메시지를 신학적 체계로 설명한 교리문답을 중심으로 실시해 왔을 뿐 ...

교리교육의 주요한 내용
1974년 9월호 (제 35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 초세기부터 예비자들에게 교리교육을 실시해 왔다. 물론 시대에 따라 교리...

예비신자 교리교육의 프로그램
1974년 9월호 (제 35호)
예비자 교리교육 프로그램은 그 대상과 환경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를 생각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본당에서...

主日學校 敎理敎育의 實態와 그 問題點
1974년 9월호 (제 35호)
I. 머리말 아동들의 종교교육이 우리 교회 안에서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경 부터라고도 하겠으나 본...

교리교육과 청소년의 신앙
1974년 9월호 (제 35호)
1. 머리말 지난 2월에 원주 교구에서 개최한 청소년 교리교육을 위한 교사 세미나에 강의를 부탁 받고 원주...

韓國敎會 敎理書의 變遷史
1974년 9월호 (제 35호)
序 論 우리나라에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래 오늘에 이르는 동안 교리서가 어떻게 變遷해 왔고 또는 發展해 ...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와 그 실천
1974년 9월호 (제 35호)
1.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使命受任이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직 사명의 수임에 관한 질문은 各...

침묵의 의미
1974년 9월호 (제 35호)
현대는 말이 참 많은 시대다. 먹고 뱉어내는 것이 입의 기능이긴 하지만, 오늘의 입은 불필요한 말들을 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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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단 1974년 9월호 (제 35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와 그 실천

Ν. 그라인아허



1.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使命受任이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직 사명의 수임에 관한 질문은 各異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때마다 새로이 그리고 달리 제기된다. 理想的 類型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西歐의 여러 나라에서처럼 대중사회조차도 교회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아온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여러 교회들이 과거에 있어서는 물론 일부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정치적 기존체제 혹은 어떤 일정한 정당과 더불어 利害를 함께 하는 등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王座와 제단의 이와 같은 연합 내지 야합을 깨뜨리고 이떤 의미의 ‘分業’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할 수 있는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일체의 정치생활에서 격리시키려는 경향들을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東歐의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경치적 권력체제가 교회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활동할 수 없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교회가 單ㅡ정당의 정책수행을 지지하는 경우는 물론 예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體制批判的 사고방식과 운동들을 그 胚芽 때부터 짓밟아 버리려는 경향에 있어서 정당과 교회의 지도층이 의외로 같은 路線을 함께 걷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른바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들의 경우는 또 다르다. 이곳에서의 문제의 초점은 사회 안에서 일고 있는 각종 해방운동들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떠한 태도를 취하여야 하느냐는 데로 집약된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現狀(status quo)을 유지하고 이를 고착화시키려는 일부 정치세력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민권운동 혹은 혁명에로까지 과격화할 수 있는 여러 운동에 가담할 것인가?

이상에서 소묘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사명 수행에 관한 질문은 이렇듯 各異한 現地의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 이 잡지(譯註: Concilium誌)의 권두언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여기에서 사용하는 ‘정치적'이라는 개념은 그 본래의 뜻 즉 매우 넓은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 따라서 국가와 정부 그리고 국가질서에 관계되는 분야뿐 아니라 사회의 全分好를 포괄하는 넓은 뜻으로 알아 들어야 한다. 바로 이 廣義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나자렛의 예수도 당대 사회에 탁월한 정치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역사상 언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어떤 의미와 비중을 인정받아 왔다. 그러기에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이 원하든 원치않든 언제나 정치적 중요성을 띠게 마련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하나의 엄연한 단위사회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때문이다.

최근에 새로이 등장한 정치신학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증요성이란 하나의 기정사실일 뿐만 아니라 교회가 자기 고유의 自己理解를 起點으로 하여 이러한 정치적 의미와 중요성을 의식적으로 발굴하고 효과적으로 현실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지만 이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견해이다. 레닌은 한때 이렇게 기술한 바 있다: “추상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란 언제나 구체적이다.”(1) 철학사적으로 보아서 이것은 헤겔의 전통을 표방하는 말이지만 과연 옳은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나자렛의 예수가 취한 태도와 그 분의 말씀에서 그리고 도대체 성서의 메시지에서 연유하는 가장 중심적 가치들, 예를 들면 이웃 사랑, 평화,화해, 정의와 같은 가치들은 개인주의적으로나 순전히 私的으로 이해되어서도 안되고 순전히 靈的으로나 혹은 순전히 종말론적으로, 더구나 순전히 추상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만 이해되어도 안된다. 이 가치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된다고 해서 이 가치들의 의미가 다 고갈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메시지에 의무감을 자의식하면서 그분의 뒤를 따라 하나의 그리스도교적 正統實踐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에 그 공동체는 하나의 정치적 사명을 수행하여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문제는 이 정치적 사명을 어떻게 현실화시키느냐이다.

2.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偏向性'

정치를 위한 정치란 있을수 없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는 그가 理想으로 삼고 있는 몇 가지 목표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그런 참여라야 한다. 예수께서 祭儀規定에 관해서 하신 유명한 말씀은 정치적 참여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정치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정치에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마르 2,27 참조). 정치적 참여의 의미와 목적은 사회현실을 좀 더 인간화시키고 인간의 여러가지 소외요인들을 극복하는 데 있다. 인간 자신이 문제가 되고 그의 구원과 행복이 문제시되는 곳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중립적일 수만은 없다. 실상 이러한 중립이란 불의와 부정을 연장한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예수의 말씀과 그 행동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인간을 위하고 그의 자유와 그의 인간 존엄성을 위한다는, 필연직인 '편향성’ 을 모면할 길이 없다. 이처럼 극히 일반적으로 목표를 설정해 놓고 보면 그리스도교인들이란 결국 선의의 모든 인간들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도들과 그 공동체에게는 그리스도를 뒤따라야 한다는 그 定命 때문에 또 하나의 특수한 편향성이 첨가된다. 그것은 바로 모멸 받고 쓰레기처럼 버려진 인간을 위해 서 중재 역할을 떠맡아야 하고 그들을 위해 대변하여야 한다는 특수한 편향성이다. 예수는 모든 당파와 종파에 앞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그러기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감연히 나섰고 그들 편에 가담 하였다. 그분의 의도는 분명하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며 또한 미움을 받고 내쫓기고 모욕을 당하고 완전히 소외당한 이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루가 6, 20-23 참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는 이처럼 예수께서 앞서 걸어간 노선을 따라야 한다.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인간들 편에 서서 또한 무슨 이유로든지 좌초와 낭패 중에 괴로와하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야 한다. 그러기에 너무나도 큰 상심으로 해서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간난과 비참 때문에 혹은 권력의 강압을 받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침묵을 강요당한 채 괴로와하는사람들을 위해서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이 사람들의 침해된 권리를 회복해 주기 위하여 교회는 소리높이 외쳐야 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對神奉仕는 본질적으 로 이와같은 對人奉仕로 성립한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I 요한 4, 20). 그러나 거꾸로, 하느님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분께 진지한 자세를 취한다는 의미의 이 對神奉仕 즉 禮拜는 인간에게 유익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옳은 말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이데올로기들의 정체가 폭로되고 ‘세력자들과 권력자들’이 상대화하며 잡신과 우상들이 그 힘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알아듣고 있는 편향성이란 -특수한 몇몇 극한상황을 도외시 한다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동원하여 어떤 특정된 정당을 뒤집어 엎자는 뜻이 아니다.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다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러한 편향성은 인간들을 강제로 예속시키려 하고 그들에게 좀더 큰 자유와 인간애를 베풀어 도와주기는 커녕 그 들을 지배하려 드는 사회 내의 권력들과 비판적으로 대결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일은 인간을 천대하고 노예로 삼으며 그를 내던져버리고 멸시하는 일책의 권력구조와 비인도적인 사회관계를 개혁하고 타파하여야 하는 일이다. 이러한 악순환적 사회 관계는, 畜犬稅를 課稅할 계획이라는소식을 듣고 이를 개탄한 어느 불란서 사람의 말에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고 하겠다: "불쌍한 개새끼들, 글쎄, 너희를 사람으로 대접해 주겠다고들 하는구 나! "(2)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러한 편향성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야 한다는 자기의 사명과는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사실 예수는 인간이 지니는 불가침적 존엄성과 가치를 위해서 이 사회의 변두리로 쫓겨나간 사람들 편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고 해서 이러 저러한 몇몇 사람들만을 부당하게 편애한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바로 인간 그 자신의 편에 가담한 것이었다. 그분에게 중요했던 것은 인간이었고 그의 구원이었으며 그의 새로운 自己正體의 발견이었고 그의 해방이었으며 그의 救讀이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특히 특권층에서 제의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을 대변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그 자체를 구제하자는 것이고 이제까지 다소간 실현된 인도주의직 성과를 좀더 위대한 인간성을 위하여 능가하자는 것이다. 이와같은 교회의 근본적 趣旨가 신빙성 있게 실증되기만 한다면, 정치적 참여를 통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봉사가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함이라는 것을 뉘라서 부인하겠는가? 「하나의 정의로운 세계를 위하여」라는 南美의 페루 主敎團 문헌에 나와 있는 다 과 같은 선언은 너무나도 옳은 말이다: “이것이 페루에 있는 교회 공동체에게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각자가 몸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공동체적으로 투신하여 억압받고 除斥당한 사람들을 대변하고 그들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투신한다고 해서 어떠한 사람도 우 리가 지니는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가지로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투신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의식적이겠지만 억압자라는 역할을 떠맡음으로써 스스로 억압받는 존재들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우리로서는 사랑을 베풀어 주는 하나의 효과적인 樣式이라는 것을 우리는 서슴치 않고 천명 할 수 있다.”(3)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를 위하여 이와같은 기본적 목표를 설정하 는 것으로 할일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인간해방이 라고 하는 포괄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거쳐야 할 중간목표를 설정하여야 하고 이의 달성을 위해서 필요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야 할 자기의 의무를 팽개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당장에 아니면 가까운 장래에 실현해야 할 이러한 중간목표들은 단번에, 더구나 영구적으로 설정될 수는 없다. 이러한 중간목표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그때 그때마다 발굴하고 설정해 나아가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이러한 중간목표 내지 가까운 장래에 실현해야 할 목표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설정해 놓으면 이렇게 절대화한 목적의식은 쉽게 전체주의적 사과와 행동을 유발할 위험을 안고 있다. 정치직 참여가 봉사하려는 인간이 바로 이 정치적 참여 때문에 다시 한번 소외될 수도 있으며 나아가서는 이 정치적 참여 때문에 희생당할 위험마저 없지 않다. 묵시문학적 도식을 따라 전개되 는 이러한 절대주의적 사고방식은 당장 눈앞의 인간소외를 장기화시키고 고착화시키는 데 오히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위험은 적어도 이 자리에서 지적해 두고자 한다.

3. 정치적 참여의 倫理的 拘束力

그러나 여기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가 어느 정도까지 윤리적 의무를 부과하는 구속력을 갖느냐 하는 질문이 뒤늦게나마 제 기된다. 공동체의 정치적 행동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시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며 그러기에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은 예외없이 이 정치적 행동에 나서야 할 의무가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판단에 근거하고 있고-이 판단은 언제나 그릇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공동체 성원에게 아무런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가?

이 질문을 해명하려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떠한 향방을 잡아 참여하고 가담하여야 할 것인가 그 기준들을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두 가지 기준이 고려대상이 된다. 첫째 기준은 예수께서 당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몸소 주신 刺戟과 動機들이다. 약간 형식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을 일러 예수의 木來的 關心事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 기준은 사회 현실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기준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를 위한 필요불가결의 전제들이다. 예수의 본래적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않고서는, 그리고 예수의 생애와 행적, 그분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죽음 및 부활과 더불어 진지하게 맞씨름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 전승되면서 어떻게 구현되고 사회 · 정치적 충격파를 몰고 왔는지를 알아보지 않고서는 교회공동체는 자기의 주님을 언제라도 배신할 수 있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실정에 관해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전문지식 없이는 어떠한 정치 행동도 허공으로 줄달음치고 목표와는 정반대되는 역효과를 낼 것이다. 인간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선의의 정치적 참여라 할 지라도 그것이 現地의 상황과 사회전체의 실정을 할 수 있는대로 객관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분석하여야 할 의무에서 면제될 수는 없다.

동시에 정치적 참여의 전략과 전술을 순진히 연역적으로 예수의 본래적 관심사에서 초자연주의적으로 이끌어내려 한다. 이것 역시 그릇된 태도이다.  바로 다름아닌 신약성서의 메시지는 오늘의 시대를 위해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정치적 활동을 現況分析에서만 연역하려는 태도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올바른 해결 책은 폴 틸리히 (Paul Tillich)가 '相關 關係의 방법'이라고 이름한 방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방법은 현실적 상황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복음의 메시지에 담겨 있는 답변들과 상관관계로 맺어주려는 방법이다. 이것은 질문들에서 해답을 끌어내는 방법도 아니며 질문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해답을 제공하는 방법도 아니다. 그것은 질문과 해답, 상황과 메시지, 인간의 실존과 하느님의 自己啓示를 서로 상관관계로 이어주는 방법이다."(4)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 실천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것을 예수의 본래적 관심사 및 현황분석과 계속적으로 연결해서 보아야 한다. 이 3角 關係를 ‘魔術의 세모꼴'이라고 비유해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실천은 예수의 본래적 관심사에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은 사회분석을 위한 일정한 전망을 제공한다. 이 분석에서는 실천을 위한 좀 더 구체적인 결론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은 상호간에 끊임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또한 상호간에 비판적으로 질문을 받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 참여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어느 정도 의무적이냐 하는 질문도 이제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인권이 직접적으로 유린 당한다면, 그리고 일정한 사회적 구조가 예수의 본래적 관심사에 정면으로 충돌하고 대립한다면, 이러한 경우에는, 정치적 참여를 통해서 인간들을 돕기 위하여, 인간적으로 가능하고 또한 해봄직한 모든 것을 다 해보는 도리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라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의무적인 정치참여가 요구된다. 여기에는 가령 공공연한 인종차별, 拷問, 굶주림, 人命의 집단적 혹은 개인적 殺害, 그리고 한 민족을 滅種시킬 수 있을 만큼 가혹한 전쟁수행 따위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정치적 행동이 예수의 본래적 관심사에서 이처럼 분명하고도 직접적으로 결론되지 않고, 오히려 현황분석, 공동체의 이제까지의 실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제공하는 자극과 전망 그리고 동기들에서 연역되는 경우라면,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에게 부과되는 무조건적 구속력은 감소되거나 아니면 위에 열거한 논거들이 어느 일정한 정치적 참여를 감행하는 데 있어서 공동체 성원 전원에게 확신을 불어 넣어주는 한도 내에서만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각자가 제멋대로 참여 여부를 결정해도 무방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각자의 良心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공동체 내의 소수파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는 뒤에 논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4.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의 諸形態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참여라는 실천은 언제나 매우 다양하게 마련이겠다. 各異한 사회실정이 그 때마다 다른 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主體도 각각 다를 것이다. 類型上으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自明한 그 첫 형태로서는 공동체 성원 각자가 개인자격으로 여러가지 정치적 제도와 기구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동기에서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경우이다. 신도 개인의 이러한 정치적 참여는 다른 市民들과 非信者들, 그리고 정당과 조합 기타 단체들과의 협력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며 이 경우 무릅써야 할 모험과 그 책임은 물론 그 신도 개인이 부담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신도는 개인으로서도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자기의 정치활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근거하는 자극과 전망과 그리고 동기들을 제공받는 곳도 어디까지나 공동체이다. 그런만큼 그의 정치활동도 공동체라는 하나의 전체적 맥락 안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각자가 자기의 개인적 정치활동의 문제를 공동체 안에서도 상세히 토론할 수 있고 이 정치활동을 다른 공동체 성원들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문제삼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 개인의 정치실천을 위해서 다른 성원들의 조언과 협력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면 매우 바람직하겠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라면, 때로는 전투적이기까지한 각종 정당이나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공동체 성원들이라도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좀더 깊이 깨닫고 좀더 잘 실천에 옮길 수 있기 위한 공동의 노력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동으로 거행하는 미사에 다 함께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입으로만 화해를 외치지 않고 실제로 교회라는 하나의 엄연한 사회 안에서도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가지가지 정치적 투쟁과 파쟁 중에서도 교회 안에서는 그래도 형제와 같이 서로 일치단결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정치적 참여의 둘째 형태는 아주 특정된 정치적 행동을 위하여 집회를 열거나 좀 더 장기간에 걸쳐 지정된 몇몇 정치적목표달성을 추구하면서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신도들의 행동단체(Impulsgruppen)들에서 찾 아 볼 수 있다. 이러한 행동 단체들은 어느 한 공동체 혹은 여러 공동체들의 신도들을 규합할 수 있으며 이것은 지방적 혹은 전국적 규모로도 가능하다. 이 행동단체들을 그 자체로서 이미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그 자체와 동일시하여서는 안된다. 이 단체들의 성원들은 모두 혹은 그 대부분이 신도들인 만큼 ‘그리스도교적'이라는 형용사를 부여받을 수 있고 또한 이 집단들은 어차피 그리스도교적 메시지에 의무감을 느끼고 있는 만큼 일반사회와 여론은 그들을 그리 스도교 공동체 그 자체와 연결시켜 보게 마련이며 때에 따라서 한 지방이나 국가 전체의 교회와 연결시켜 보게 마련이고 그리스도교 자체가 제시하고 주장하는 기준에 따라 측정하고 판단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 행동단체들은 여기에서 오는 책임을 철저하게 의식하여야 한다. 실상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위임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 행동단체야 말로 일반사회에 교회를 현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각개 신도가 개인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경우도 이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신도들의 개별적인 정치참여에 있어서 교회와 마찬가지로 일반사회도 이제까지 보다도 더욱, 개개 신도들과 행동 단체들이 그리스도교적 동기에서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신도들 상호간에도 투쟁과 정쟁을 벌일 수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한다.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이나 선택은 그 대부분이 바로 그리스도교적 정치 프로그램일 수도 없고 바로 그리스도교 자체의 해결일 수도 없다. 그러기에 각개 신도나 행동단체들이 그리스도교적 동기에서 출발했을지라도 구체적 정치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정 반대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은 사회실정과 그 결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의 해결 방도에 대한 각자의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구체적 상황을 눈앞에 두고 여기에 그리스도교적 메시지를 적용하는데 있어서 각자의 해석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정치활동에 있어서 견해를 달리하는 신도 개개인이나 행동단체들은 상호간에 각자 자기의 해결책만이 곧 그리스도교적 해결책이라고 고집할 것도 아니고 상대방을 이단시할 것이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는 격렬한 대결을 통해서라도 반대되는 의견에 접근하려고 애써야 하며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해결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인들 간에나 혹은 그리스도교적 행동단체들간에 이렇게 야기되는 알력과 마찰을 회피해서도 안되 고 은폐해서도 안되며 오히려 이를 견디고 극복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한다면 이러한 상호간의 마찰과 알력은 쟁점이 되어 있는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물론 해당 공동체, 나아가서 교회 전체의 생명에 커다란 활력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5) 이렇게 분쟁과 알력을 통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교인들이란 정치적 분쟁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과연 그리스도교 특유의 묘안을 발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가 분명해질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정치 행동단체들이 교회와 사회 안에시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은 자못 크다. 만일 이들의 정치활동이 성공하고, 그 목적을 달성한다면 사회를 좀더 인간화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교회는 이 단체들의 성공적인 정치활동을 매체로 해서 다시 한번 이 사회 안에 현존할 수 있을 것이며 좀더 큰 신빙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행동단체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값진 기여를 할 수 있다. 이 단체들은 예수의 본래적 관심사가 현실직으로 정치적 결과를 가져 다 줄 수 있으며 또한 당연히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 단체들은 공동체 안에 있어서의 정치의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며 이것은 곧 공동체에의 봉사를 의미한다. 이 단체들은 무엇보다도 앞서 말한 그리스도인들의 편향성 즉 특권에서 제외된 사회계층들을 위한다는 그 편향성을 실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이 단체들은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책임감을 일깨워 줌으로써 공동체와 사회에 건전한 의미에서의 양심의 불안을 자극할 것이다.

세째 형태로서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를 마지막으로 잠깐 고찰해 보자. 사회 안에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인도적인 행위가 자행되고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이 여지없이 유린 당하고 침해된다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는 다른 선택의 길이 있을 수 없다. 즉 항의라는 형식을 통해서라도 반응을 보여주는 도리 밖에 없다. 이러한 경우에는 공동체가 공동체로서 무엇인가를 행동에 옮겨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공동체 성원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할 용의를 가지고 있는 동안은 여기에서 꽁무니를 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에 관한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와 정치적 활동 사이의 이러한 연계성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을 때 매우 까다롭게 된다. 문제의 핵심은 다음의 질문에 요약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제까지 우리가 다룬 경우들을 넘어서서 좀더 적극적으로 과연 공동체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할 수 있을까?

필자의 견해로는 이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할 만한 합당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본래적 관심사가 과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정치적 중요성과 여파를 가지고 있고 또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 그리고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때, 또한 공동체의 이른바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것도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의 커다란 정치적 중요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체의 진리는, 따라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적 진리도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할 때, 어떤 일정한 전제조건들을 갖추기만 한다면 하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구체적으로 정치에 참석할 수 있다는 가능 성을 우리는 수긍할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이러한 정치실천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는 공동체의 민주화라고 일러 마땅하다.

5. 민주화라는 전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민주화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해서 국가와 정치 분야에서 민주제도의 어떤 모델을 교회 안에 무비판적으로 옮겨오자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화란 하나의 절차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절차가 진행되는 가운데 몇 가지 근본 원칙들과 태도, 행동양식과 구조들 그리고 법체제가 형성되어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고 합리적인 권력행사를 도모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형식을 좀더 인간화시키고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인간들을 도와준다는 의미에서의 민주화이다. (6)

교회의 정치실천을 위한 전제로서 요구되는 이 민주화 중에서도 철저한 정치 의식의 형성, 여론 형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동을 위한 의사 결정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모든 절차를 합리적으로 거쳤을 때에야 비로소 공동체는 정치적인 참여에 있어서도 구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는 보수적 비타협 주의와 크게 다르다. 과거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적 보수적 비타협주의에 있어서는 주로 성직자들이 미리 결정을 내려, 신자들에게 모름지기 어떤 정치행 동에 가담하고, 어떤 정당을 지지할 것이며 어떤 국회의원 후보자에게 투표할 것인가를 지시하곤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공동체의 민주적 정치참여란 성직자들과 제휴하여 여론 형성에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어떤 새로운 정치의식을 낳게 하는 동시에 실정을 분석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해당하는 정치 문제를 충분히 토론한 끝에 마침내 어떤 결정을 공동으로 내리는 절차라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결국 공동체가 정치적 참여에 실천적으로 가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 문제를 토론할 공동체 전체 규모의 모임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 밖에도 상황분석과 정보수집에 봉사하는 연구팀들이 있어야 하며, 또한 민주적으로 선출된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러한 결정들을 준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몸소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지도할 역할과 책임을 맡고 있는 이 위원회는 권위주의적으로 전체 공동체를 제 멋대로 좌우할 것이 아니라 결정을 공동으로 내리기 위한 길을 터놓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민주적 절차를 문자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공동체는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직까지는 매우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민주적 절차가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민주화라는 기본 원칙을 이미 하나의 기정사실로 받아 들이고 있는 이 현대사회 안에서 계속 존립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자체의 민주화 여하에 따라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의 정당성과 효율도 가감될 것이다. 만약에 어느 공동체가 권위주의적으로만 지도를 받는다면 이 공동체는 하나의 정치의식을 자각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어떠한 댓가를 치루어서라도 사회의 현상 유지를 정당화시키려는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이용물로 전락할 수 있을 뿐이겠다. 그러나 비록 격렬한 의견 대립 끝에라도 합리적인 민주적 절차를 거쳐 정치적 결정을 공동으로 내렸다면 이러한 공동체는 또한 이러한 공동체만이 전체공동체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겠다.

정치적 참여 여부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공동체 내의 소수파와의 관계는 어떤가? 이 질문에 일괄적으로 해답할 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형식 논리적으로 다음 원칙을 존중하여야 한다. 즉 결정사항이 중요할수록 좀더 큰 다수결을 요구한다는 원칙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어떤 공동체가 성당의 종을 하나 새로 달아야 하느냐 혹은 일정한 액수의 돈을 근로자들을 위한 공동주택기금으로 희사하여야 하느냐 하는 따위의 결정은 간단하게 다수결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경우의 소수파는 민주적 절차의 관례에 따라 묵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동체가 공동체의 이름으로 어느 기업체를 거술러 파업에 들어간 근로자들과 연대성을 선언하고 그들을 재정적으로나 이념 적으로 지지하여야 하느냐의 여부, 혹은 어떤 중요한 정치적 쟁점에 관한 투표나 선거에 있어서 이 편 혹은 저 편에 가담하여야 하느냐의 여부는 가령 51: 49라는 다수결로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듯 중요한 정치문제에 대하여 공동체가 태도를 천명하기로 결의를 보았다면 여기에는 만장일치까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적어도 공동체 안에서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충분히 토론하여 의견일치를 도모하여야 할 것이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해당되는 정치문제에 있어서만은 참여를 포기하는 게 상책이다.

자기네 견해가 수락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이러한 소수파는 계속해서 해당 공동체의 성원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공동체가 어떠한 결경을 내리든지 간에 이러한 결정이 비록 그리스도교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 문제의 그리스도교적 해결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동체는 물론이고 일반사회의 여론도 분명하게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공동체가 구체 적 정치 행동에 가담하거나 나아가서는 이니시어티브를 장악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 공동체의 각개 성원으로서의 그리스도교인이 그 공동체와 꼭같이 행동하여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기는 어떤 공동체의 성원 한 사람이나 몇몇 성원으로 구성되는 어떤 그룹이 자기네가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 계속적으로 좌절감과 환멸을 느낀다면 다른 공동체의 성원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는 언제나 시인하여야 한다.

만일 어떤 공동체가 지역 공동체로서가 아니라 정치 이외의 다른 이유로 나아가서는 바로 정치적인 기호(嗜好)에 의하여 구성, 조직되었다면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의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로서의 정치참여 문제는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현재의 실정으로 봐서는 이른바 기본단위 공동체와 같은 비지역적 공동체가 점점 더 그 중요성을 띠고 나타나는 것 같다. 이러한 공동체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의 거주 장소라는 기정사실과 지역 원리에 의하여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기준을 근거로 하여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람들이다. 이 기준들이란 같은 직업, 개인적인 기호, 나아가서는 정치적 이해관계일 수도 있다. 따라서 정치문제에 있어서도 견해일치를 쉽게 이룰 수 있으며, 이제까지의 공동체에서 탈퇴하여 다른 공동체에 가입하는 일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6. 그리스도교적 참여의 특수성격

몇 가지 직관들과 근본적 행동양식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만 보류된 것이라는 뜻에서 그리스도교적 정치참여의 특수성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서 연역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의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하는 것으로 넉넉할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이 비 그리스도교인들과 의견을 함께 모을 수 없다면 그것은 더욱 좋다.

그리스도교인의 정치적 참여는 우선 인간에 대한 신임에서 그 생명 원리를 갖는다. 물론 이러한 신임이 때에 따라서는 본의 아니게 혹은 의식적으로 배반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교인이 자기 행동에 있어서 남을 불신임하는 태도를 취해도 좋다는 법은 있을 수 없다. 물론 지혜롭고도 조심스럽게 행동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은 그가 상대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언젠가는 올바른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으리라는 원칙적인 확신에서 출발하게 마련이다. 이 말은 그 다른 사람에게 회개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적어도 나자렛의 예수는 이런 양식으로 행동하였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시간의 여유를 주게 마련이다. 강요와 폭력 행사는 그에게 금물이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간청하는 것은 자기와 함께 그 사람도 예수의 본래적 관심사에 최대의 경의와 주의를 기울여 거기에서 정치적 결론들을 꺼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인의 정치적 실천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초대의 형식을 띠게 마련이다.

예수의 생각과 그 행동을 정치적 활동으로써 진지하게 본받으려는 그리스도교인은 자기가 상대하는 사람과 또한 쟁점이 되어 있는 그 문제에 직접으로 이해가 걸려 있는 사람을 도의시하고 행동 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의 의사를 거스를 뿐 아니라 또한 그의 동의 여부에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는 용납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의식이 그릇된 의식일 수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그 사람 아닌 내 나름대로 생각하는 이른바 행복이라는 것을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스도교인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여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인의 정치활동은 가령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정치활동과는 아주 다르다. 인간의 자유가 소중하였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하느님도 죄를 지을 자유마저 인간에게 허용하셨다면 같은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교인도 다른 사람의 소중한 자유를 존중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 사람이 자기의 자유를 남용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리스도교인은 정치에 참여하는 일에 있어서도 절대적 미래의 광신적 옹호자는 아니다. 그는 이 세상의 좀 더 나은 인간화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정력을 쏟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의식한다. 그럴지라도 그는 어떤 의미의 自若과 침착한 태도로 이 일에 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완성이란 자기자신의 힘은 물론 자기가 이웃하는 사람들의 힘을 능가하고 자기 자신보다 위대하고 그러기에 그가 신임해서 좋을 실재, 곧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서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태도를 일러 침착한 참여의식 혹은 이미 참여를 결행한 침착함, 즉 자약의 태도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인은 최후 목표달성에 이르기까지 그 첫 단계에서부터 기필코 성공을 이루려 하며 한편 이 성공이 부분적인 것에 불과 할지라도 그는 기뻐할 수 있고, 축제를 지낼 만큼 환희에 넘칠 수도 있다.

이 사회에서 소외당한 채 변두리에서 맴도는 사람들을 위한다는 편향성이란 진단적 이기주의와 나르시즘의 위험없이도 가능하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정치적 참여는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정치적 참여의 목적은 하나의 기존체제를 또 하나의 기존체제로 바꾸자는 게 아니며,기존 집권자들의 독재를 무산계급의 독재로 대치하자는 것도 아니다. 이 그리스도교인들의 정치적 참여가 염원하고 요구하는 바는 체제의 모순 때문에 불리한 여건에서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또한 특권층에서 소외된 집단들을 도와 주자는 것이다. 즉 이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인정받는 상대방으로서의 역할을 떠맡을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비인도적으로 지배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의 정치적 실천은 원칙적으로 비폭력성이라는 특징을 띠어야 한다. 이와는 다른 결론을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서 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을 無爲와 束手無策에 단죄한다는 뜻도 아니고 견딜 수 없는 탄압을 숙명적으로 그저 받아들이면서 현장을 기피하자는 뜻도 아니다. 그러나 단호한 투신 즉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 단호한 도전이야말로 무분별한 폭력행사보다는 예수의 의향에 비교도 안될 만큼 더욱 호응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한 그리스도교인이라 할지라도 최후의 수단으로서 혁명적인 폭력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극한 상황들이 아예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敎宗 바오로 6세도 그의 회칙「민족들의 발전」에서 이 마지막 가능성을 배척하거나 단죄하지 않았다: “인간의 기본권과 나라의 공동선을 크게 침해하고 저해하는 폭력지배가 틀림없고 또한 이러한 사태가 장기간 계속하는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일체의 혁명적 봉기는 새로운 不義를 낳게 된다"(n.21). 「제 3 세계를 위한 변호」라는 15명의 가톨릭 주교들의 성명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혁명들이 예외없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에 보면 몇몇 혁명들은 그 반종교적 독소들을 제외한다면 필요하기조차 하였고 또한 좋은 열매를 가져다 주었다.”(7)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이 자기네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하여 폭력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종적 수단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이 경우에 그리스도교인은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어마어마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는 사실과 또한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간적 고통이 빚어진다는 사실을 똑똑하게 의식하여야 하며 또한 엄정한 입장에서 책임소재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제기하여야 한다. 폭력 행사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 중에서 최후의 것임을 다시 한 번 다짐해 둔다.

그리스도교인은 언제나 자기의 정치적 활동을 자아비판적으로 거듭 거듭 반성하여야 한다. 그리고 설정된 목적은 정당하고 선택된 수단과 방법은 과연 사회의 현실과 예수의 본래적 관심사에 호응하는가, 또한 이러한 방법과 수단이 효율적이며 염원해 마지않던 성공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스스로에게 항상 물어야 한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의 질문 제기에 즐겨 응하여야 한다. 그는 또한 최종 목표 달성에 비해서 일시적이고 잠정적에 지나지 않는 중간 목표를 전체주의적으로 고집해서도 안되고 자기가 선택한 방법에 집착해서도 안된다. 언제나 반성을 게을리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떳떳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릇된 혹은 비능률적이라고 판명된 노선과 방법을 포기할 줄 아는, 신축성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교인의 정치적 실천은 기분과 恣意에 희생되지 않으면서도 어디까지나 ‘실험적'이라는 특징을 계속 보유할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인도 예상되는 모험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른바 원칙론을 속절없이 반추하는 동안에 그 실천을 망각해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교인은 자기의 정치적 참여에 있어서 연합전선을 펼 능력과 용의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자기 교파에 속하는 신도 개개인이나 단체들과는 물론 나아가서는 다른 교파에 속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단체들과도 함께 협력한다는 것은 異論의 여지없는 당연지사로 수락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실천의 목표설정과 그 방법 기용에 있어서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만 있다면 비그리스도교 인들과도 협력하여야 할 용의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인기독점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일체의 정치행동을 혼자서 해내려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행동양식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협력이 목표달성과 성공을 더 확실하게 기약해 주는 마당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를 어떠한 형식으로 실천에 옮기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때 그때의 실정과 또한 직접 관계되는 사람들의 이익,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호응하는가의 여부이다.

7. 공동체의 정치意識化 교육

위에 소묘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를 현실화 시키자면 장기간의, 아니 때에 따라서는 지루하기까지한 교육과정을 거쳐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체험과 직관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변조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필요 불가결하다.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생활권을벗어나 어떤 딴 세상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공동체가 직시할 수 있어야 하며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들의 교리교육을 비롯하여 성인교육과 매스콤에 이르기까지의 광의의 말씀의 선교가 수행해야 할 임무는 실로 중대하다. 이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체험을 쌓고 이를 신앙에 비추어 반성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 성원들이 가령 노인들의 고 통이 무엇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며, 환자들, 가족 수가 많은 가정, 외국인들, 석방된 전과자들, 마약 중독자들 그리고 혼자서 사는 어머니 즉 과부와 미혼모들의 어려움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보는 초보적인 체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매우 요긴하다. 어떠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도 이러한 사회 봉사에 등을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경험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조만간에 깨닫게 될 것이다: 즉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제공해야 하는 현장봉사도 없을 수 없고 어쩌면 앞으로는 더욱 필요할지 모르지만 장기적 원조와 봉사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려면 몇 가지 구조가 바뀌어야만 하고 이러한 사회악에 제도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정치적 행동으로 그 해결이 가능하다. 가령 어떤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를 도와 과외공부를 시켜서 학교수업을 제대로 따라가게 하고 직업적으로도 장차 승진의 가능성을 이렇게 마련해 준다는 것은 물론 의심없이 필요하고도 가치있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와 동 시에 어떤 구조적인 조치를 강구하여 외국인 노동자로 하여금 우리 사회 안에 제대로 적응해 들어 올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 준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와같이 이웃사람들의 간난을 체험하고 이를 도와주는 가운데 공동체의 의식화 교육은 순전히 이론적인 의견교환보다도 훨씬 더 많은 효과를 거둘 것이다. 'Learning by doing' 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물론 이론적인 의견교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그 동안에 쌓은 체험을 통해서 이론적인 의견교환을 위한 충분한 자료와 동기를 마련하여야 한다.

공동체의 의식화 교육과정에 있어서 좌절감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능력배양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해서 마땅하다. 누가 만일 순전히 유토피아적으로 부과된 임무를 수행하려 든다면 그리고 그 실현성이 전혀 내다보이지 않을만큼 환상적인 목적을 설정하고 이를 추구하려 든다면 그 사람은 머지않아 정치적 활동이라는 것을 도대체 포기하게 될 것이다. 좌절감을 견뎌낸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응하자는 뜻도 아니고 자만자족하자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좌절이란 이른바 인간조건에 으례 따르게 마련이고 이 좌절감을 제대로 조정하기만 한다면 좀 더 새롭고 좀 더 효과적인 투신을 위한 자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시한다는 것이다. 좌절감을 견뎌낸다는 것은 흔히 있게 마련인 실수와 실패에 대비하자는 뜻이며 설혹 그런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이미 실천하기 시작한 과업을 저버리지 말자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초보적 체험의 범위 안에서 정치적 행동을 벌이다 보면 이따금씩 성공감과 성취감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적어도 처음 단계에서는 너무 높이 책정하지 않을 때 더욱 증대한다. 성취감과 성공감의 체험 그리고 좌절감의 극복이라는 이 두 가지는 공동체의 정치적 의식화 교육에서 이처럼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8. 맺는 말

교회는 오늘에 있어서나 내일에 있어서나 단호한 태도로 사회의 부정과 불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일체의 기존세력에 결별을 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사람들의 좀 더 포괄적인 구원을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특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 편에 과감하게 가담할 때에만 비로소 이 세계와 사회로부터 신빙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는 필요불가결하다. 교회가 만일 이렇게만 한다면 그는 권력과 영향력이라는 收益을 위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또 사실 이러한 '불순한' 동기에서 정치활동을 벌여서는 안 될 것이다. 때에 따라서 교회는 집권자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탄압을 받고 심지어는 박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다고 해서 교회가 이 사회의 쓰레기로 전락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예수 자신도 이러한 사회의 찌꺼기와 다름없는 이른바 말단 인생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8)

교회의 이러한 정치적 참여가 가능하고 또한 필요하다는 것은 남미 페루 교회의 주교단 교서가 이를 실증하고 있다.「하나의 정의로운 세계를 위하여」라는 유명한 이 교서의 한 구절을 여기에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페루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이 나라는 지금 중대한 역사적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이 순간에 좀더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려는 단호한 결심을 다짐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를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도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저들의 여러가지 문제, 그들의 시련과 투쟁 그리고 저들의 기대를 바로 자기네의 것으로 삼으면서 저들의 편에 가담하고 투신하는 사람들이 점차로 증가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이러한 참
여가 수월해졌다: 神學에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상 어떤 신학은 신앙을 기점으로 하여 이 현실을 죄스런 상태, 따라서 하느님의 계획을 묵살하는 부당한 현실로 간주하면서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 보내는 호소一곧 역사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라는 그분의 호소에 대한 응답으로서 해방을 위해 투신할 것을 재촉하고 있다. 교회는 이제 깨닫게 되었다: 교회는 세상에 현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불가피하게 정치에 말려들게 되어 있다는 것,또한 그는 이렇듯한 탄압의 체제에서 인간을 해방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가지고 먼저 양심을 뒤흔들어 놓지 않고서는 복음을 설파할 수 없다는 것을 교회는 이제 깨닫게 된 것이다.”

〔原 註〕

(1) Ausgewahlte Werke I (Stuttgart 1957) 412; vgl. D. S6lle, Die Wahrheit ist konkret (이ten 1967).
(2)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K. Marx, Werke. Schriften. Brie-fe I (Stuttgart 1962) 497.
(3) Diakonia 3 (1972) 120-128, hier 122.
(4) P. Tillich, Gesammelte Werke V (Stuttgart 1964) 142.
(5) Vgl. I. Hermann, Konflikte und Kon-fliktlSsungen in der Kirche: Concilium 8 (1972) 206-212.
(6) Vgl. Heft 3/1971 von Concilium fiber "Demokratisierung der Kirche."
(7) Zitiert nach T. Eendtorff und H.E. Tbdt, Theologie der Revolution (Frankfurt 1968) 157-163, hier 158.
(8) Vgl. A. Holl, Jesus in schlechter Geaellschaft (Stuttgart 1971).
(9) Diakonia 3 (1972) 120-128, hier 120 und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