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신자들의 기도」에 관한 고찰(考察)
1967년 5월호 (제 1호)
1. 기도의 역사와 그 의미 신자들의 기도 즉 공동기도는 새로된 것이 아니고 벌써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다....

제 2차 공의회에서 제시된 평신도 사도직
1967년 5월호 (제 1호)
서 론(序論) 평신도 사도직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취급한 문제 중에 가장 비중(比重)이 큰 문제 중...

새 교리서의 교회상(敎會像)
1967년 5월호 (제 1호)
교황 바오로 6세는 우리가 앞으로 신자들에게 교회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공의회 정신에 상응...

대인 영세의 새 의식서 (儀式書)
1967년 5월호 (제 1호)
성 토요일 부활 전야의 전례를 개정한 중요한 발기인 중 한 사람인 P. Low 는,비오 12세가 완성한 개...

공의회는 왜 있었는가
1967년 8월호 (제 2호)
I. 머 리 말 역사적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종결된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분명히 그 공...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
1967년 8월호 (제 2호)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헌장 중에서 가장 핵심이라 볼 수 있는「교회에 관한 교의헌장」(Constitutio Dogm...

결혼문제에 관한 고찰(考察)
1967년 8월호 (제 2호)
우리 교회는 소위 결혼의 불가해소성을 부르짖으며 교회에서 성사로써 이루워지는 혼배는 물론 사회적인 정...

젊은 세대
1967년 8월호 (제 2호)
인간은 날 때부터 악(惡)으로만 기울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선(善)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생물계의 진화(進化)는 확실한 것인가
1967년 8월호 (제 2호)
많은 신자들은 진화론에 대한 말을 들을 때에 불안감을 느낀다. 들리는 바에는 모든 생물들이 간소한 형태...

복음은 교회 안의 모든 신심의 기준이다
1967년 8월호 (제 2호)
I. 문제 제기 작년 여름에 「덕행의 실천」이란 책이 발간되었다. 그 책은 예수회 수련장 Rodriguez 신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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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단 1974년 9월호 (제 35호)

사랑의 도덕과 정의의 도덕

姜 聲 渭 (西江大 講師)




ㅡΝ.하르트만에게 있어서의 近人愛와 正義의 比較一



1. 미리 알아둘 일

이 글은 필자가 1973년 서독 Mainz 대학에 제출한 학위논문 「Nachstenliebe und Fernstenliebe, eine kritische Aus-einandersetzung mit Nicolai Hart-mann」(「近人愛와 遠人愛」1974년 5월 서독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Peter Lang 출판사 干) 의 제 2 부를 抄譯한 것이다. 그 제 1 부인〈價値의 혁명으로서의 近人愛〉는 이미 금년 5월 한국철학회에서 발표되었고 철학회 회지「哲學」第八輯에 실려 있다.

따라서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발표된 첫째 부분을 알고 있어야 하겠기에 우선 그 요점을 간단히 설명하려고 한다.

이에 앞서 기본개념으로서의 ‘近人愛’ 라는 말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간단히 피력하려고 한다. 독일어의 ‘Nachsten-liebe’가 우리말로는 ‘이웃 사랑' 또는 ‘隣人愛'로 번역되고 있으나, 이 우리말의 '이웃 사랑'에 해당하는 독일말로는 ‘Nachbarliebe’ (그냥 이웃 四寸이라는 뜻의 이웃에 대한 사랑)라는 말이 따로 있기에, 필자는 전자를 '近人愛' 라고 번역해 보았다.

그럼 Ν.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은 近人愛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에 앞서, 近人愛의 대상으로서의 '近人’은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해 하르트만은 우선 일반적인 뜻으로는 '내가 아닌 남(他人)', 또 전통적인 뜻으로는 ‘곤궁에 빠져 있는 자', 따라서 '도움이 필요한 자'라고 대답한다. 보다 더 일반적으로 보자면 모든 사람이 잠재적인 ‘近人'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잠재적인 近人이 어떻게 하면 현실적인 근인으로 되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F.무쓰너 (MuBner) 의 생각을 빌자면, "우리들의 행위[주고 받음]를 통해서 우리들의 근인으로 ‘만든'자가 곧 우리들의 근인”이며, 또 P.틸릿히 (Paul Tillich)에 의하면 근인으로 ‘된' 자가 우리들의 근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필자의 견해로는 '남'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그저 우리들의 近人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들의 근인으로 ‘만들어지고' ‘된’ 자가 곧 근인인 것이다.

이런 근인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근인애를 하르트만은 오해하고 있다. 쇼우펜하우어와 니이체가 근인애를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하르트만 자신도 결국은 위의 두 사람들의 오해에다 하나의 새로운 오해를 덧붙이고 있는 셈인 것이다.

즉 하트트만은 근인애를 "천국에 보화를 쌓는 것" 또는 "남의 곤궁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등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눈 앞에 있는 자에 대한 사랑”이라고 오해한 나머지 소위 미래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遠人愛’를 요청하고 있다. 이 원인애와 近人愛를 오해한 니이체가 이 近人愛와 대립시켜 주창한 것으로, 하르트만이 처음으로 윤리적인 가치들 중의 하나로서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진정한 뜻으로 이해된 그리스도교적인 근인애”는 내세에서 보상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이며, "자비심이 많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근인애가 현재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인에 대한 사랑, 즉 인류의 앞날까지도 꿰뚫어 보고 준비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원인애란 근인애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 바로 이 대목의 글이기도 하다. 즉 그리스도교의 근인애를 정의와 비교해 봄으로써, 근인애의 참뜻이 더 잘 해명되겠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우선 간단히 하르트만에게 있어서의 ‘정의’의 개념을 해명해 보고, 근인애와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2. 하르트만에게 있어서의 정의

하르트만은 근인애의 가치와 정의의 가치를 비교하고 있는데, 우린 이 비교를 논하기에 앞서 우선 하르트만이 정의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정의가 네 가지의 중요한 덕(四*德, 후세에 이렇게 불리우게 되었다) 중에서 최고의 것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정의가 그리스도교의 전통 속에서 항상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J. 피이퍼 (J. Pieper) 는 토마스가 자기의 신학대전 속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즉 "모든 덕 중에서 최고의 덕은 정의다. 샛별도 초생별(Abendstern)도 정의만큼 경탄을 받을 가치가 없다.” 이와 반대로 하르트만에게 있어서는 정의가 가장 낮은 윤리적인 가치다. "원래적인 덕들 중에서 정의가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도리어 가장 낮은 가치다.”  ‘가장 낮은' 가치(der niedersten Wert)란 하르트만에게 있어서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 (der ele-mentarste Wert)라는 뜻이다. 즉 "정의는 현실 속에서 보다 더 높은 가치를 위한 행동영역 (Spielraum) 을 이룩해 준다···· 정의는 모든 다른 가치들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동시에 다른 도덕가치들 중에서 선구자(Pionier) 다. 온당함(RechtHchkeit)이란 도덕에 있어서의 가장 적은 것(Minimum), 즉 모든 발전되어 있는 도덕의 총체 (Sitt-lichkeit)에 선행하는 최소한의 것이다. 정의의 가치는 낮다. 그러나 기본적인 가치이다. 달리 말하자면, 정의란 다른 높은 가치들이 그 위에 뿌리를 박아야 할 토대이다. J. 피이퍼도 정의를, '그 위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zwischenmensch-lich) 모든 관계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행동이 귀착된' 윤리적인 기본개념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옳음'과 정의는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우린 우선 '정의’개념의 발전사를 간단히 살펴보아야 하겠는데, 그래야만 하르트만에게 있어서의 정의와 법률의 관계가 규정지워질 수 있겠기 때문이다. 폴 틸릿히에 의하면 정의의 개념, 즉 정의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발전해 왔다. 플라톤적인 정의의 이상은 도시국가의 구체적인 조화였다. 정의에 관한 유대교적인 견해는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 경건한 복종이었고, 중세 봉건주의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모든 계급(Hierarchie) 간에, 서로 책임을 다하는 그런 형식이었다. 자유주의에 있어서는 정의가, 형식적인 특권을 철폐하고, 법률 앞에서의 평등을 이끌어들인, 그런 법률이었다. 미래의 보다 더 전체주의적인 사회에 있어서는 정의가, 그것을 통해서 전체와 모든 구성원들의 충분한 안전 (Sicherheit)이 발전하게 되고, 보장될 수 있는, 그런 법률체계로 될 것이다.

하르트만은 정의의 여러가지 단계를 제시해 주고 있다. 우선 아직도 윤리적인 가치를 나타내지 못하는, 그런 넓은 뜻의 정의가 있다. 보다 넓은 뜻으로는 정의가, 법률의 이념(Idee des Rechtes) 에 합치하는 한, 하나의 법률이요, 하나의 제도요, 또 이미 성립되어 있는 질서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뜻에 있어서의 '(정)의로움’은 인격의 윤리적인 가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전혀 인격이 가치의 담당자(Werttrager) 가 아니다. 이 가치는 -아무리 인간의 행동이 실현해 놓은 것이라 하더라도- 오직 객관적인 가치(Objektwert)요, 사실[사물] 그 가치(Sachverhalts-wert) 요, 인간을 위한 하나의 善일 뿐인 것이다. 이런 뜻으로는 모든 기존법률과 이상적인 법률이 다 가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법률'로서 근인애와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회전체에는 법률이 확고하게 짜여져 있어야 하고, 엄격한 형식과 체계가 필요하게 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정의를 위해서는 법률의 조문(틀, Gesetzesschema)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하르트만은 법률을 ‘정의의 객관적인 내용'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훨씬 넘어 윤리적인 가치로서의 정의도 있는데, 이 때에는 정의가 心情(Gesinnung)에서 생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뜻으로는 옳은 일을 행하고 지향하는(intendiert) 자, 즉 함께 있는 사람(Mitmensch)을 -심정으로건 행동으로건- 요청되는 평등의 관점에서 보고, 다루는 사람은 ‘정의롭다'. 여기서는 ‘정의'가 인격의 행동가치(Aktwert)요 윤리적인 가치다.

정의의 이러한 두 가지의 계기(Momente), 즉 事實[事物] 價値(Sachverhalts-wert) 와 心情價値 (Gesinnungswert) 와의 관계를 하르트만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심정가치로서의 정의는 법률질서의 사실가치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근거를 두고 있다는 관계 (Fundierungsverhalt-nis)가 심정의 고유한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이러므로 법률은 정의를 위한 필연적인 전제인 것이다.

(1) 정의의 대상으로서의 ‘함께 있는 사람'(Mitmensch)

하르트만에 의하면, ‘정의의 첫번째의 소박한 뜻은' 개인의 무차별한 利己 主義(Egoismus)를 피하는 경향이다. 따라서 정의에 있어서는 항상 ‘함께 있는 사람에 대한 관계'가 문제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세 사람이 정의에 속하게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두 사람이 속하게 된다. 여하튼 하트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정의에는 ‘함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에 관해 보르노브(O.F. Bollnow)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의는 오직 인간사회의 媒體(Medium) 속에서 발전하고 보존될 뿐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개인이나 또는 질이 같은 한 집단의 인간들(homogene Gruppe von Menschen)만으로는 정의가 발전하는데에 충분하지가 못하다......." ‘함께 있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은 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 위해 하나의 질서를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하르트만에게 있어서의 정의는 ‘사회의 객관적인 질서의 가치’다. 사물가치로서의 정의는 그 담당자로서의 개인에게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전체에게도 붙어 있다. 정의는 전체에게서 스스로를 실현하는 하나의 가치다.

J. 피이퍼도 정의를 ‘사람들을 함께 있게 하는 질서’ (Ordnung der Mit-menschlichkeit)라고 이해하고 있다. 다른 여러 德들 중에서 정의에게만 있는 특성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질서지우는 것이다….. .

(2) 同等으로서의 정의

그럼 정의의 질서 속에서는 인간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여기서는 평등에 관한 하르트만의 생각을 살펴 보기로 한다. 정의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애초부터 평등의 이념(Idee der Gleichheit) 이다. 개인에게와 마찬가지로, 주어져 있는 사회 전체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꼭 같은 권리와 꼭 같은 의무를 지는 것이 곧 평등의 이념이다. 이러한 평등의 원리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천해 왔다. 고대에 있어서는 이 원리가 첫째로 ‘같은 자에게 같은 것을’ (Gleiches den Gleichen), 따라서 그 반대로는, ‘같지 않은 자에게는 같지 않은 것을'(Ungleiches den Ungleichen) 뜻 했다. 겨우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이와 반대로, 정의의 요청은 파격적으로 확장되어 갔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권리를 주라”고. 이렇게 하여 모든 이가 법률 앞에서 ‘평등' 하고, 거기에는 인간들 사이에 또 계급들 사이에 차별이 없다. 이러한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곧 정의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의의 이상으로서의 평등도, 인간들이 다른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른 점을 도외시하지는 않는다. J. 피이퍼에 의하면, 정의의 상황 속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getrenn-te Andere)으로, 거의 남(Fremde)으로 맞서 있게 된다.  엄연한 뜻의 정의는 파트너 (Part-ner)가 서로 다르기를 요청한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랑하는 연인들 또는 동질적인 인간집단들 사이에는 정의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완전히 떨어져 있는 개체들이 아니며, 또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도 근본적으로는 ‘그 어떤 남'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뜻으로, 하르트만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고 있다. 즉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친구라면, 정의는 필요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제는 거꾸로 해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다 하더라도, 그들은 정의 이외에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J. 피이퍼는 이런 것을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정의로움이란,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이게 놓아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의는 나와 같지 않고, 그러나 자기의 몫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정의로운 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증거해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다른 사람의 것이 되도록 해줌으로써 정의로운 것이다“·

3. 근인애와 정의의 관계

(1) 공동적인 출발점:함께 있는 사람
새로운 도덕의 기본가치로서의 근인애와 헌 도덕의 기본가치로서의 정의가 다같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즉 이 두 가지의 윤리적인 가치는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특히 정의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능력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가치들은 출발점은 같으나 곧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J. 피이퍼에 의하면, 정의란 남을 남이게 버려 두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는 정의가 사회질서, 즉 함께 있는 사람들이 같은 사회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법률인 것이다. 정의에 있어서는 우리는 남에게 아무런 요구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정의는 ‘각자는 자기의 몫을' 물론 ‘나는 나의 몫을'이라고 하는 데 반하여, 근인애는 '나의 것을 모든 이들에게, 즉 나의 몫은 모든 사람의 몫이다'고 한다는 것이다. 곧 정의는 그 사람이 받을 권리'가 있는 것만을 주나, 사랑은 이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또 근인애에 있어서는 남을 남으로서 버려둬서는 안되고, 바로 남을 근인으로 만드는 것이 근인애인 것이다. 그래서 근인애는 권리에 따라 나눠 주는 그런 법적인 태도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나눠 줄 수 있는 마음가짐이기도 한 것이다.

(2) 均一化된 전체와 도달할 수 있는 좁은 범위

하르트만에 의하면, 정의의 본질은 바로 평등의 이념으로서 남들과 같은 권리와 의무를 뜻하고, 만인을 위한 동등한 권리가 주창된다. 물론 여기에는 예외가 없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하르트만은, 근인애는 그 타당범위가 매우 좁아 오직 도달될 수 있는 좁은 범위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하르트만의 근인애에 대한 오해들 중의 한 가지가 나타난다. 사랑에 있어서도 저절로 길이 전체에로 열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주의해야 할 것은, 아무리 사랑이 전체를 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를 무차별하게 평등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오직 신앙과 사랑의 영역 안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3) 否定的인 정의와 肯定的인 근인애

하르트만의 법률로서의 정의는 우리들이 해서는 안될 것을 금지한다는 뜻으로, ‘부정적’이나, 근인애는 우리들이 해야 할 바를 명령하고, 권장한다는 뜻으로 ‘긍정적’이다. 근인애가 아무리 긍정적이라 하더라도 동시에 해서는 안될 것들은 금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부정적인 뜻은 부차적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근인애가 총체적인 경향에 있어서 정의의 경향을 포괄하며, 내용적으로도 정의를 능가하는 것이다. 

(4) 外的인 체계에 얽매이는 것과 內的인 자발성

하나의 커다란 사회 안에서는 근인애가 정의와 대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사회는 정의 즉 확고한 법률, 엄격한 형식 등, 外的인 체계에 얽매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는 어디까지나 外的인 것이고, 따라서 우리들의 外的인 행위만을 문제삼고 규제하기 때문에 비인격적이라 할수 있다. 이와 반대로 근인애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內的인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근인애에는 법률처럼 조문이 없어 매 경우마다 새로운 법칙을 발견해야 하는데, 이것이 근인애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 새로운 법칙을 발견해 내야 하기 때문에 근인애는 창조적인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것이 근인애의 큰 장점이기도 하다. 또 이때에 결정을 하는 근거는 心情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내적인 자발성이야말로 사랑을 법률적인 규범 이상이게 해주는 것이다.

(5) 근인애와 정의의 서로 다른 深層 작용

위에서 대충 본 바와 마찬가지로, 정의는 外的, 형식적, 강제적인 데 반하여, 사랑으로서의 근인애는 內的, 내용적, 자발적인 것이다. 또 사랑은 우리 심정의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내적인 것을 내적인 것에다, 즉 마음과 마음을 연결시켜 주나, 정의는 外的인 것을 外的인 것에다 연결시켜 준다. 그래서 남을 항상 남이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떨어져 있는 자(곤궁에 빠져 있는 자)를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려는 소망 및 행위가 바로 근인애인 것이다.

(6) 눈이 먼 정의와 보는 근인애

정의는 ‘눈이 먼' 것이다. 즉 정의로운 법관은 재판을 받는 사람을(그 사람의 사정을) 보아서는 안되며, 사람을 보는 법관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법의여신 테미스 (Themis) 가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것은 私情을 두지 말고, 저울로 달아, 칼로써 벌을 준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르노브는 ‘눈이 멂’과 ‘불편부당함’이 정의의 전제조건이고, 따라서 정의는 냉혹하고, 자연스럽지 못하고, 비인간적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정의는 눈이 멀고, 객관적으로 저울질하고, 끈덕지게 재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와는 반대로 근인애는 ‘보는’ 것이다. 하르트만에 의하면 근인애는 보는 것이며, 움직이는 것이며, 따라서 재판을 하지 않는 것이 다. 이 때에 본다는 뜻은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즉 남이 어떤 곤궁에 빠져 있으며, 내가 남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물론 이 때에 근인애와 개인적[인격적]인 사랑은 정반대로 된다. 개인적인 사랑은 '눈이 멀다’는 것이다. 즉 개인적인 사랑은 자기의 눈 앞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한, 눈이 먼 것이다. 아니 오히려 눈 앞에 있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7) 정의에는 사랑이 없고, 근인애는 정의롭지 못하다

이렇게 보아 오자면 정의와 근인애는 완전히 서로 반대되는 개념들이다. 하르트만에 의하면 정의는 사랑이 전혀 없는 것이고, 또 근인애는 매우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로운 자는 개인(사정)을 보아서는 안되고 또 사랑하는 자는 본질적으로 정의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정의는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인정하고 남을 사랑의 눈초리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J. 피이퍼는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는 정의가 성립될 수 없고, 또 정의로써 얽매어진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8) 근인애의 가치의 높이

하르트만에 의하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근인애와 정의가 단순히 대립될 뿐만 아니라 그 가치의 높이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이때에 근인애는 그 가치의 성격으로 보아 정의보다 훨씬 높은 가치이다. 그럼 왜 그런가?

하르트만에 의하면 가치의 서열을 정하는 데에는 두 가지의 기준이 있는데, 한 가지는 그 높이를 재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强度를 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平行的이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보다 높은 가치들은 보다 약한 가치이고 낮은 가치일수록 강하고 기본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가치들을 犯했을 때에는 이 가치들의 높이와 강도는 뒤집혀진다. 즉 낮은 가치를 犯했을 때에는 그 죄가 무겁고 높은 가치를 犯했을 때에는 그다지 큰 죄가 되지 않는다. 즉 도둑질을 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보다 높은 가치로서의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무거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높은 가치는 약하고 낮은 가치는 강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보자면 근인애는 정의보다 훨씬 높은 가치임 이 틀림 없다.
 
(9) 윤리의 척도로서의 근인애

여태까지 우리들은 근인애와 정의가 대립되는 점에 관해서만 고찰해 왔다. 그럼 이 두 가지의 가치 사이에는 아무런 일치점이 없을까?
하르트만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근인애가 가장 큰 덕이었고 동시에 모든 덕이 그 밑에 놓여 있었다. 사랑이 곧 모든 윤리적인 행위의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즉 사랑에서 행하는 행위만이 선이었다.

J.피이퍼에 의하면, 정의가 사랑에 뿌리를 박지 않는 한, 이런 정의는 인간사회를 질서지을 수 없다. 즉  정의가 사랑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한, 정의의 명령만으로써는 인간들에게 평화와 통일을 실현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이다.


P.틸릿히도 정의는 사랑에 뿌리를 박아야 하며, 사랑이 정의에게 삶과 창조적인 힘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사회정의는 불완전하고 비인간적으로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때에 정의가 사랑에 내포된다고 해서 정의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혀진다는 것이다. 틸릿히는 "사랑이 아니라 정의를 달라"는 유태인들의 요구는 바로 사랑과 정의의 위와 같은 관계를 오해한 데서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아가페의 성서적인 개념으로서의 사랑은 그 안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정의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 틸릿히는 가끔 그리스도교의 정의를 실천하거나 정의를 위해 싸우지 않으려 하고, 그 대신 사랑을 정의에 대립시키고 사회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투쟁하는 대신에 사랑을 실천하라고만 요구하고 있는 것을 매우 큰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