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輯 · 現代社會와 靑少年 1987년 7월호 (제 112호)

청소년에 대한 사목적 배려 - 희생하는 교육을 위한 시안 중심으로

최홍길 (대구 가톨릭문화원장)

I. 問題의 提起

사람이 멀리 보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근심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조급하게 이루어보려고 서두르다가 걱정만 하고,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사람들을 일깨워주는 적절한 금언이다. 이 금언은 청소년을 담당 하고 있는 사목자들이 깊이 되새겨야 할 기본자세를 잘 지적해 준 것이라 여긴다.

청소년 시기는 누구나 잠시 거쳐 지나는 과정이다. 이 과정 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이 시기에 삶의 진로를 선택해 나가는 性品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靑少年 司牧이 信仰人다운 품성을 이루게 하는 데 있기에, 그 성과가 단시일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고 쉽게 기대해서도 아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청소년 사목의 중대성을 끊임없이 부르짖고, 실제로 청소년 사목에 상당한 비중을 두는 것은, 이 시기에 신앙인다운 품성이 제대로 형성되면 평생 교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그 품성을 더 확고하게 지녀 누릴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敎育政策이 아침 저녁으로 자주 바뀌는 한국사회에서 사목적 성과를 단시일에 가늠해 보기 어려운 청소년 사목에 대해,교회가 멀리 보면서 관심과 애정을 계속 쏟아야 다음 세대에 그 결실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도 기대하기 어렵더라도,청소년 사목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한국 교회의 제 3세기가 바로 이들에게 희망을 걸어야 할 것 이니까 그런 것이다.

교회는 청소년들이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날수록 더 넓은 마음으로 청소년들을 포용해야 한다. 物質主義的이고 消費主義的인 경향이 부성애와 모성애에 깊이 젖어들어,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귀찮은 존재로 전락해 갈수록, 교회는 청소년들에게 더 깊은 배려와 사랑을 나누어주어야한다. 청소년들에게는 사랑의 시선이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이다. 청소년들은 자기가 깊이 사랑을 받고 있다고 알아야 한다. 이 사랑은 사람으로서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어 영원히 받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청소년들이 알아듣게 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 사목은 교회가 청소년들에게 이 사랑을 베풀어주는 데 있다고 하겠다. 청소년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데는 수많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을 선택하는 것에서 청소년에 대한 사목방향이 결정된다. 본고에서는 이 방법을 “儀牲하는 敎育”에서 찾으려고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해방 이래 한국 사회에서는 民主主義的인 교육이 주류를 이루고, 이 교육을 통해 自由를 지나치게 강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사람이 자유를 모든 것이라고 여기게 되면 이기주의적이고 근시안적인 견해를 벗어나기 어렵다. 얻으려고만 하고 주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교회는 제 3세기를 내다보면서 청소년들에게 희생하는 교육을 시켜나가야 한다. 利他主義的이고 遠視眼的인 견해를 지닌 신앙인이 교회 안에 풍성해지게 사목적 배려를 해야 할 것이다. 자유를 구하는 교육만으로는 한국 사회를 건실하게 성장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회생하는 교육으로 청소년의 사목방향을 전환해야 할 것 이다. 보다 높은 뜻을 품고,이 뜻을 위해 기꺼이 참을 줄 아는 품성을 길러 나가게 해야 한다. 높은 뜻에 마음을 열어놓으면 저절로 견디는 힘을 지니게 된다. 이 힘은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주려고 하고, 모든 것을 높은 뜻으로 돌리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본고에서는 이 희생하는 교육을 위한 시안을 간단히 소개하려는 것이다.

II. 이 時代 靑少年 司牧의 現場 分析

청소년들이 요사이 자기가 자기 생각을 할 시간이 거의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청소년들에게도 다 같이 24시간이 주어져 있지만,모두가 입시라는 공룡에 끌려가다 보니까 자기 자신과 대면해 볼 시간적 여 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만으로는 청소년에 대한 교육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청소년들이 자신에 대한 自我敎育을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청소년에 대한 교육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자아교육에 따라 성패가 달려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이 자아교육에 대해서는 거의 외면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물론 청소년들이 스스로 시간을 선용하여 자아교육을 위해 조력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변명할 수는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어느 시대이건 자아 교육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전적으로 책임져 온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자아교육의 중대성과 청소년 교육에 있어서의 비중을 청소년들에게 계속 일깨워주어야 하는 책임까지도 청소년들에게 떠맡겨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자아교육은 청소년들이 스스로에게 묻는 습성을 갖게 되면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복음사가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젊은이의 대화(마르 10,17-22; 마태 19,16-22; 투가 18,18-23)를 살펴보면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자아교육을 감당하고 있는 청소년들은 어느 시대이든 다음과 같이 자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읍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나의 인생이 완전한 價値와 온전한 意味를 지니게 되겠읍니까?” 이 무엇에 대한 해답을 분명히 내리지 못하고 회피하기 때문에 교육방향이 희미하다는 한국 교육의 문제가 풀리자 않는다. 문제의 해결은 접어두고라도, 청소년들이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도록 배려 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 교육의 안타까운 국면이다.

문제의 해결을 자아교육에서 모색하는 청소년들이 과격해질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문제는 社會構造的인 것이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기성세대에 있다고 보는 청소년들이 늘어날수록 한국 사회는 불안정하게 된다. 이로부터 폭력과 무질서가 만연할 여지가 많아진다.

청소년 시기에 만연하는 暴力과 無秩序가 전적으로 청소년들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책임은 자유를 구하는 교육에 돌려져야 하고,청소년들을 극단적으로 이기주의적이고 근시안적인 사람으로 社會化시키는 교육 풍토의 과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학생이 안보이고 점수만 보이는 과열경쟁에서 자문할 여유를 잃고 이끌려가는 청소년들에게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습성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 여건이 갖추어진다면 청소년 사목의 실마리가 풀리게 될 것이다.

III. 靑少年 司牧의 몇 가지 課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젊음은 成長이다. 이 성장에는 智慧와 恩寵의 성장이 포함된다. 이러한 성장이 외부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고통에 이어지고,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겪고 있는 罪惡의 모든 체험과 연관된다 하더라도, 젊음은 성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장을 멈추어버린 청소년들이 많이 눈에 들어온다. 신체적으로는 싱싱한 젊음을 누리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이미 늙어버려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대할 때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청소년 사목의 과제가 실로 지대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청소년들이 약해진 것인가. 소비 문화에 익숙해져서 쉽게 安住하려는 성향이 팽배해 있는 것일까. 지나친 보호가 스스로 서 있기를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의문이 고개를 들면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정말 걱정스럽게 여겨진다. 이 걱정은 비단 청소년 사목에 관심을 가져온 필자만의 노파심이 아닐 것이다. 사회가 경종을 울리고 교회가 우려를 표명하는 바이다. 이 약해진 청소년들을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먼저 청소년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여기게 해주어야 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實存에 끊임없이 퍼부어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단순히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실제로 그리스도가 청소년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이들에게 다가서고 이들 곁에 있다고 모두가 인정할 수 있도록 가능한 인적 및 물적 자원을 아끼지 말 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사람은 영원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超越하는 존재라고 깊이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 이 존재의 규정은 현대 고도기술 사회에서는 자주 간과되고 있는데, 실제로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받아들이느냐가 중대한 것이니만큼, 이에 대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어서 교회는 청소년들이 自問하는 습성을 길러나가게 배려해야 한다. 이 습성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자아교육을 감당하면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충실히 보완하게 해준다. 필요하다면 이 습성을 육성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개설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청소년들이 누구인가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많은 부모들이 자기 중심과 자기 욕구 만족으로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는 이 시기에, 청소년들이 사회와 교회가 이들의 헌신을 기대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에게 미래가 속해 있는 까닭에,지나온 천년대의 마지막과 새로운 천년대의 시작이 이들에게 달려 있다고 일깨워주어야 할 것이다. 보다 높은 뜻으로 마음을 열어 교회가 열망하는 바대로, 청소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묻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답변을 들을 수 있게 배려해야 한다. 이 청소년 사목의 몇 가지 과제가 ‘회생하는 교육’의 관건이 된다.

IV. 儀牲하는 敎育을 위한 試案

危機는 사람을 전적으로 판가름낸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운 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절대절명의 위기를 겪게도 된다. 이 어려운 순간과 위기를 당하게되면, 사람은 그가 이루어온 존재에 대해 정면으로 시험을 받는것이다. 아우구스띠누스는 위기시대에 살면서 역사속에서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탐구한 歷史意識을 제시한 바 있는데,이 역사의식에서 터득해야 할 지혜가 있다.

서구인이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은 기독교 사상의 영향 때문이고,이를 체계화시킨 것이 아우구스띠누스이다. 아우구스띠누스는 역사 속에 시간의 개념을 도입하고,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희생하는 교육은 인간 실존의 저변에 歷史意識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역사의식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만 청소년들이 스스로 걷고 있는 길에 대해 기억하고, 그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헤아려 가면서, 자기 자신의 個人史(personal history)를 소중하게 간직해 나가도록 배려하는 의도에서 제기한 것이라 하겠다.

이 의도를 세분화하여 질문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무엇을 記憶하고 있는가. 무엇을 理解하고 있는가. 무엇을 意志하고 있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이 희생하는 교육을 위한 시안의 기본 입장이 된다. 이 기본 입장을 앞에서 언급한 청소년 사목의 몇 가지 과제에 직접 연결시켜 도표로 나타내면 희생하는 교육을 위한 시안이 되는 것이다.

교육내용에 있는 각 명제에 대해서 교육방법에 제시된 세 가지 질문을 해 나가면서 자기 자신의 개인사를 둘러보게 하면 된다. 청소년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영역이 사회화 이론에서 나누어놓은 자신, 가족, 동로집단, 이웃, 학교, 사회, 교회, 대중매체 등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해 가면서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을 헤아려 나가게 배려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에 대해 ‘희생하는 교육’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자유를 구하는 교육만으로는 사태를 수습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청소년의 사목방향을 전환해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의지의 핵심부에는 그리스도께서 자리잡고 있어서 희생하는 교육을 위한 시안을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계신 것이다.

이 시안을 청소년 사목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對話를 이끌어나갈 적절한 지도자가 있어야겠고,청소년들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것 이다. 시안에서 예시한 교육내용에 대해서는 사정에 따라 적당한 명제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람이 위기에 처해도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 위에 굳게 서 있기 때문이다. 이 自己 肯定을 청소년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단순히 가르쳐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자기 자신의 개인사를 헤아려 깨닫게 하자는 것이다. 모두를 다 깨닫게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기는 하지만,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희생하는 교육’을 위한 시안을 통해서 신앙인다운 품성을 갖춘 청소년들을 소수라도 육성해서 청소년 세대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계속 파견해야 한다,

V. 要約 및 論議

오늘날 사람들은 더 쉽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이러한 경향은 청소년들에게 반영되어 청소년들을 나약하게 만든다. 사실 현대사회 구조는 점점 사람들이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가고 있기에,쉽게 살려고 하다보면 뜻을 이루기가 어려워진다. 이 뜻은 어느 시대이든 사람을 참고 견디는 힘을 갖게 한다. 뜻이 분명하게 서 있고 이를 이루려는 노력을 계속 하겠다는 결의가 서 있으면, 살기 어렵다고 하여도 잘 이겨나갈 수 있다.

청소년들이 뜻을 세우게 하려면 자문하는 습성을 길러나가게 해야 한다. 가르쳐준다고 해서 뜻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터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룩해 내는 새로운 업적은 대부분 자기가 세운 뜻을 한평생 살아야 가능하였다는 것으로도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희생하는 교육‘을 위한 시안에서는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마련하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기본 입장이 강조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의 구조가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더 어렵게 되고, 청소년들이 소비문화에 젖어들어 쉽게 살려고 하는 습성에 길들여져 있는 이 시기에, 치열한 입시경쟁 대열에서 숨돌릴 겨를도 없이 시간에 쫓기면서 청소년들에게 교회가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랑의 시선이 여기에 있다.

배워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 지쳐 있는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스스로 뜻을 세우고 이 뜻으로 살게 되어 참고 견디는 힘이 강해지게 해주는 것이 청소년에 대한 중대한 司牧的 配慮일 것이다.

이러한 청소년의 사목방향에서 지금까지 해오던 청소년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서서히 전환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본 시안의 기본발상이다. 이 발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학습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이 수립되고, 이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교수방법을 개발해 나가려고 한다. 다년간 청소년 사목에 관여해 온 필자로서는 이 과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청소년 사 목을 새로운 국면으로 진전시키는 하나의 길이라고 믿고, 앞으로 계속 이 시안을 바탕으로 청소년 사목의 활로를 열어가려고 한다.

청소년 사목이 단시일에 뚜렷한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교회가 사랑의 시선으로 청소년들을 바라보고,끊임없이 새로운 司牧方案을 마련해 간다면 한국 교회 제 3 세기는 밝을 것이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