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삶과 죽음 1989년 2월호 (제 122호)

삶과 죽음에 대한 신학적 고찰

최영철 (대구 가톨릭대학 교수. 신부)

끝장? 성취?
삶은 선물이고 소명이다. 인간은 생명을 선사받는 그 순간부터 삶을 구현해야 하는 과제를 받는다. 삶의 구현이란 인간이 자기 생명 안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계발하면서 성숙을 향해 전진해 가는 것을 뜻한다. 삶은 인간이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자기 스스로를 개발하고 형성해 나가면서 성숙한 사람으로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과정을 밟으면서 자기의 삶 전반에 대한 성취감을 맛보기도 전에 죽음이라는 큰 벽에 부딪히게 된다, 여기서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 죽음은 의미있는 삶을 무차별하게 무의미의 구렁 속으로 몰아 넣는 것인가? 혹은 미완결로 끝나려는 삶을 최종 성취하는 것인가? 만일 죽음이 의미 없는 것이 라면 삶 또한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삶 안에서 발견될 수 없는 어떤 것,예컨대 충만이나 성취가 죽음 안에서 발견된다면 삶은 대단히 가치있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죽음은 삶을 마감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암흑이고 도둑이며 허무이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인 죽음은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우리가 세상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리고 우리의 애인들에게서 우리를 탈취해 가며 우리가 아끼는 몸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킨다, 죽음은 한 축제의 폐막이나 한 만남의 마지막 인사처럼 슬프고도 고통스런 일이다·. 죽음은 삶의 끝장, 상실,단절, 파괴이다. 이보다 더 고통스런 일은 없다. 그런데 이 끝이 끝장이 아니라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슬품과 고통은 사뭇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학생이 연학의 각고 끝에 승리의 환성을 터뜨리는 일과도 같은 것일 수 있다. “나는 드디어 목표를 성취하였다. 나는 의학 박사가 되었다.” 또한 그것은 불 안과 희망의 엇갈림 속에서 한 자녀를 기다리는 한 여인이 산고를 겪은 연후에 갓 태어난 아기를 자기품에 안고 벅찬 감격으로 홍얼거리는 처지와도 같을 수 있다. "나는 마침내 목적을 달성하였다. 나는 어머니가 되었다.’’ 분명히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다. 그렇지만 그 마지막이 "나는 염원을 이루었다”,“목표에 이르렀다”를 뜻하는 끝이 될 수도 있는가, 마지막은 끝장을 의미할 수도,성취를 뜻할 수도 있으며, 파멸일 수도 완성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마지막에 결판난다, 삶의 끝인 죽음 역시 상반되는 두 얼굴을 가진 것인가? 어느 것이 죽음의 참 모습인가? 이에 답하려면 죽음의 여러 측면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죽음은 영혼과 육신의 분리 인가? 새로운 탄생일 수 있는가? 죽음 안에서 최종 결단을 내릴 수 있는가? 죄인으로서의 죽음 체험은 어떠한 것인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해답은 죽음의 현주소에 대한 탐색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죽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삶 안에 있는 죽음

세상 안의 모든 것이 때에 예속되어 있다.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전도 3,1-2). 모든 것이 때에 따라 생겨 나고 자라며 소멸한다. 때는 모든 생명체의 생성 과정에 필수적인 조건이지만 그것들이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벽이기도 하다. 조건은 항상 한계를 뜻하기도 한다. 창조된 모든 생명체가 제한된 생명을 누린다, 죽음은 생명있는 모든 것이 뛰어넘올 수 없는 가장 분명하며 높고 두터운 장벽이다. 인간도 여기서 제외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콧김’으로 인해 살아 있는 생명체로 지음받은 인간은 우선 ‘진흙’으로 빚어진 존재이다(창세 2,7). 행복을 위하여 살기로 창조되었으나 여전히 죽을 존재이다. 인간이 창조되자마자 에덴 동산에서 살기로 되었었지만 그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의 나무와 함께,그 열매를 절대 따먹을 수 없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창세 2,9 이하). 금단의 열매는 인간아 ‘한계 존재’임을 생생히 깨우쳐 주는 상징이다. 더우기 동산 안에는 처음 부터 인간의 행복한 삶을 시기하고 그의 죽음을 원하는 교활한 ‘뱀’이 숨어 있었다. 죽음은 인간에게 자연적 현상이다. 인생은 죽음을 전제한 삶이다. 인간은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산다”(투가 1,79).

우리는 죽음 한가운데에서 삶을 영위한다. "삶 한가운데서 우리는 죽음에 둘러 싸여 있네.”1) 현세의 삶 동안 우리는 죽음의 단편들을 체험한다. 굶주림,중노동,실패, 노쇠 따위 안에서 죽음은 조금씩 그 모습을 나타낸다. 빈곤,질병, 고 독,절망,이별 등은 죽음을 미리 드러내 보이고 알려 주는 표지나 전조(前兆)이 다. 그것들은 생명을 좀먹고 그 활력을 쇠퇴시키고 제때가 되기도 전에 생명을 끝 장내는 죽음의 실재들이다. 죽음은 이 실재들을 통하여 삶 안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은 삶 안에 움틀거리고 있다.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삶 안에 있다. 그것은 삶의 마지막에 도둑처럼 물래 침입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 안에 매순간 언제나,인간이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현존한다.2)' 인생은 죽을 생명 (Vita mortalis) 이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이다.

② 몸(육신 ) - 인간(basar, οωμα,Corpus) 은 다른 존재들과의 교류 속에 살 아가는 인격으로서의 온전한 인간을 지칭한다(로마12,1; 1고린?,4 참조). '몸’온 단순히 ‘나’로 번역될 수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다.” 여기서 몸온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1고린 13,3: 9,27). 다른 인격들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고 그것들을 위하여 사는 것은 인격의 근본 특징이다. 그러므로 몸은 사회적,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을 가리킨다. 몸 - 인간은 자기의 전존재를 포함하는 인격을 의미하기 때문에 몸이 없는 인간의 생존은 상상할 수 없으며4) 이와 마찬가지로 몸이 제외된 사후의 인간 생명도 있을 수 없다.

③ 혼(영혼) - 인간(neiesh,  Anima) 은 살아 있는 온전한 인간을 가리킨다. 성서에서 '혼’은 생명의 동의어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 (Aimna) 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사람이 자기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르8,36). 인간은 목숨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혼’ 곧 생명이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생명이 분해된 뒤에도 여전히 혼 ㅡ 인간은 다른 형태로 존속한다. 혼은 의식의 삶을 영위하는 인격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칭 대명사로 바뀔 수 있다(창세 2,7; 12,5; 46,22 ; 출애 13,8-9). 따라서 혼 - 인간과 몸 ㅡ 인간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몸(육신)과 혼(영혼)은 상반되지 않고 전인을 나타낸다. "인간은 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옳지 못하다. 인간은 살아 있는 영혼 즉 자연 생명으로 이루어진 육신이다”라고 말해야 옳다, 영혼 덕분에 인간은 사고하며 이해하고 원하며 자기 운명에 책임진다. 따라서 영혼은 살아 있는 인격,다른 인격들과 관 계 속에 있는 자아(自我)를 뜻한다.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자아를 보다 강하게 표현하는 낱말이 육신이다. 영혼 · 육신 ㅡ 인간은 타자를 향해 개방된 삶을 영위하는 인격체를 가리킨다. ④영 - 인간(mach. πνε?μα . spmtus) : 영혼 ‘ 육신 - 인간이 하느님과 타자들을 향해 개방되어 자신으로부터 이탈하여 타자들에게로 나아가는 인간을 지칭한다면,영 ㅡ 인간은 하느님과 교류하기 위하여 살ㅡ몸ㅡ혼으로서의 인간 존재의 한계들을 초월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영’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 안에 부어진 영적 요소이다. 따라서 영 -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영역에로 상승하는 인간,초자연적 목적을 위하여 즉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능력을 갖춘 인간이다. 이상의 네 개념 중 몸과 혼이 자연적 조건의 전인을 가리킨다면 살과 영은 자연적 차원을 바탕으로 하여 삶을 실현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몸(육신)이 개인에 있어서 신면모와 인간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 및 한계 속에 살가는 인간 조건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영)혼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속해 있는 모든 고유한 요소를 통틀어 인격으로서의 인간을 표현하는 것이다, 영혼 “ 육신의 단일체인 인간은 두가지 삶의 방식중에 즉 살 ? 인간으로서 또는 영 ㅡ인간으로서, 하나를 선택하면서 삶을 영위해 나간다. 살 一 인간으로서 그는 자기에게 만족하고 한계 속에 자신을 폐쇄시킨다. "자기 육체에 심는 사람은 살에게서 멸망을 거둘 것이다" (갈라6,8). 순전히 자연적 욕망과육신의 요구에 따라서만 살려는사람은 누구든지 현세 삶 안에서 안주해 살므로 구제받지 못한다. 영 ㅡ 인간으로서 그는 하느님에 게로 개방되어 그분으로부터 참 존재와 불사불멸을 부여받게 된다,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이다”(갈라6,8). 그가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자기의 영이 활력에 넘칠 정도로 개방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이와 같이 인간학적 네 개념으로써 인간의 자연적 삶을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삶의 구현 방식까지 염두에 두면서 인간 존재를 서술한다. 전통 신학은 이 성서적 개념과 의미들을 바탕으로 하여 영혼과 육신의 개념으로써 인간의 삶과 죽음을 파악하였디“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졌다''라는 전통적 표현은 영혼과 육신이라는 두 구성 요소가 있어서 이 둘이 결합하여 인간을 형성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혼은 무한을 향해 있고 충만한 실현에 대한 한없는 갈망을 지닌 전인이다. 육신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전인이 세상 안에서 세계 및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방식이다.5) 인간은 육화된 영혼(Amma incamata) 이고, 영신화된 육신 (Cx>rpus mam-matum) 이다, 그터므로 세상과의 관계를 맺는 것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 세계와의 관계는 인간에게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근본 요소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육신이고 전적오로 영혼이다, 영혼의 가장 고상한 행위들 안에 육신의 흔적이 새겨져 있고, 똑같은 방식으로 육신의 원초적 행위들 안에 영혼의 자극이 남아 있다. 인간온 진화하는 세계의 정점이며 또한 따라서 인간이 이 세계를 초월하지만 그가 그 안에 뿌리내린 지상의 실재들을 부정하지 못한다, 인간을 통하여 세계는 자기 목표에 도달하였고 의식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세계와의 관계 는 영혼一인간에게 속한 것이다. 어느날 영혼一 인간이 세계의 극히 미소한 조 각 즉 자기 육신을 떠나야 할지라도 자기 모태인 땅으로부터 결코 단절되지 않을 것이다.

온전한 인간의 죽음

인간이 영혼 * 육신의 단일체라면,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통 신학은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으로 죽음을 정의하였다. 영혼은 신령하고 불사불멸하는 실체하는 육신과 합하여 실존하는 인간이 되었다. 육신을 떠나서도 살 수 있는 실체인 영혼이 육신을 떠나먄 인간은 분해되는데,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육신이 분해되는 것이 곧 죽음이다6) 이 죽음 이해는 즉음을 단 지 생물학적 사건으로 간주한다. 인간의 생물학적 에네르기가 영점(零点)에 이르렀을때 죽음이 침투한다. 죽음이 외부로부터 생명을 덮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과 생명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서 둘 사이에는 상호 침투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전통적 정의에 의하면 죽음은 다만 생명의 끝판에 발생하는 사건에 불과하다.

우리의 인간론 즉 단일체로서의 인간 이해에 비추어 본다면 죽음은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특유한 인간적 현상이다. 그것은 육신에만 해당되지 않고 전인에 게 발생하는 사건이다. 물질 및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은 항상 육신 안에,육신은 언제나 영혼 안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도 육신도 아닐 것이다. 죽음은 영혼과 육신의 분리로 규정될 수 없다. 인간 안에 분리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육신에게 발생하는 일이고 또 육신이 영혼의 본질적 구성 요소라면, 영혼 역시 죽음의 사건 안에 깊숙히 개입된다. 죽음은 전인과 관련된 사건이다.

인간은 태아나고 자라며 발전하고 성숙되며 노쇠하고 죽는다. 그는 그 자체 안에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생명올 영위하기 시작하는데 그가 늙어갈수록 그의 삶은 소멸되어 간다. 영혼,육신의 단일체인 인간의 생명 안에는 두 생명 곡선이 있 다.7} 생물학적 생명의 곡선은 물리적 에네르기가 점차 소멸되어 가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태어난 아기는 벌써부터 죽음을 향하여 노쇠되기 시작한다. 죽음은 생물학적 생명의 마지막에 삶에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결합되어 있다. 인간은 죽음을 앞당겨 체험하면서 산다. 매순간은 생명이 소멸되어 가는 순 간이다. 죽음의 체험 속에서 생명은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모든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가진것을 모두 박탈당하고 끝내 그 활력은 소진되고 만다. 이때에 인간은 죽기를 멈추는 것이다. 이것이 외적 인간의 생물학적 곡선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삶은 이 방향을 향해서만 계속 전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도 나아가는데, 인간 안에는 또 다른 생명 곡선 즉 인격적 삶의 곡선이 있다. 인격적 생명의 곡선은 씨앗처럼 아주 미소한 것으로 시작 하여 무한히 성장해 나간다. 인간은 내면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지성을 계발 하고 의지를 강화시키며 삶의 지평들을 열고 타자들 및 세상과의 만남을 향해 자신으로부터 이탈한다. 질병에 대한 자기 방어,생존 투쟁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외적 인간의 생물학적 곡선이 이기적인 방식,자기 중심적인 집중화를 추구하는 반면에 내적 인간의 인격적인 곡선은 자아를 타자에게로 개방시키고 자신을 양도하며 선사하는 자아 초탈을 추구한다. 타자에게로 가기 위하여 자신의 껍질을 벗기고 자신을 제한시키면서 인간온 인격을 형성해 나간다. 인격의 특징은 타자를 향한 개방,자아 극복,헌신과 자아 봉헌이다.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는 인격적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참 존재이다. 존재 (existere) 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ex) 타자들과의 관계 안에 굳건히 서있는 것 (stare) 이다. 타자들 안에서 존재할수록 인간은 더욱더 자기 삶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며 보다 인격적이 되고 이 인격체 안에서 내적 인간은 자라고 성숙된다. 생물학적 생명의 곡선은 조금씩 노쇠해 가다가 종국에는 죽음 안에서 끝장난다. 인격적 생명의 곡선은 무한정 성장해 나가다가 마침내 죽음 안에서 그 성장 즉 탄생을 멈추게 된다. 이 두 유형의 생명 곡선에 대하여 사도 바오로가 단언한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 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읍니다”(2고린 4,16).

인간 안에서는 어느 정도 우주의 진화에서 발생하는 것과 같은 일아 발생한 다.8) 우주는 복잡화, 분산화,수렴화(집중화),상승의 움직임을 통하여 진화한다. 온 우주 안에는 분산되는 옆으로의 움직임과 아래로의 하강 움직임이 있는가 하면, 보다중요한 의미를 갖는 위로의 상승움직임이 있다. 이 움직임은 집중화, 생명화,내면화, 인격화의 움직임이다. 진화운동에는 반드시 물질적 에네르기의 소모가 수반된다, 물질은 거의 무한대에까지 분산 ≫ 확산한다. 그것은 자신을 소 모시키면서 확산되어 가다가 이 분산·의 움직임이 위축되는데, 위축될수록 자신 안에 집중된다. 집중될수록 그것은 내면화되고 또 다음으로 의식화된다. 이리하여 우주 안에는 우리가 생명이라 부르는 물질의 내면화가 형성되고,또 나아가 우리가 의식이라 부르는 생명의 내면화가 발생된다. 이 진화 단계가 의식을 가진 생명체 인간의 출현이다. 의식화가 심화되어 갈수록 새로운 차원들을 향하여 자신을 더욱더 개방시키는 자유에로의 움직임,즉 인격화가 이루어진다,

인간 각자 안에도 물질적 ≪ 생물학적 소모를 동반하는 상승의 움직임을 통하여 내면화, 인격화가 발생한다, L. 보토스의 표현을 빌어 표현한다면,9) 인간이 세상에 자신을 내맡길 때에 세상은 인간의 능력을 소모하기 시작한다. 생명은 위축 되기 시작한다。그런데 외적 인간의 에네르기들은 단순히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성으로 변형된다. 이 변형이 인격의 형성인 것이다. 인격은 생명의 결정체, 인간의 정수(精髓)이다. 이 인간생명의 결정체는소멸되지도 않으며 죽음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실패와 고통에도 불구하고 새로워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 위험을 느끼지만 굳건히 서있는 인간,내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가장 견디가 어려운 상황까지도 이용하는 인간 안에서 삶의 결정체가 형성된다. 쇠퇴 해가는 생물학적 생명의 곡선과는 반대로 인격적 생명의 곡선은 성장해 나가고 또한 자유, 사랑,통합을 향하여 보다 개방되어 가다가 드디어 자기의 탄생을 멈추게 된다, 두 생명의 곡선이 교차하고 절단될 때에 죽음의 순간이 닥친다, 내적 인간의 충만한 발전온 무한히 뻗어날 수 있기 위해서 외적 인간의 죽음을 필요로 하기까지 한다. 이런 까닭으로 인하여 죽음은 인격적이고 온전히 자유로운 삶의 또 다른 단계에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통과 지점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현세 삶의 과정 중에 우리의 인격체가 자유로이 행하는 모든 행위는 참 자유를 향해 우리를 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죽음은 인간이 인격화 과정의 마무리를 위하여 겪어야 하는 마지막 순간이다.

삶의 수확?

죽음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세상의 구조 속에서 인간이 진행해 오던 인격적 삶의 과정을 종결짓는다, 죽음으로써 인간은 '나그네 살이'를 종료하고 영원의 세계에로 돌입한다, 죽음은 시간과 영원 사이의 중립 상태, 그 경계이다. 그 순간에 외적 인간은 온전히 소멸되어 사라지고 내적 인간이 탄생된다.

새로운 탄생 : 죽음으로써 영혼 ㅡ 인간(내적 인간)은 자기의 육체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육체성은영혼"··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그는 세상을버리지 않는다, 세상이 인격 안에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는보다 철저하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세상 안으로 침투해 있다. 죽음은 마치 탄생과 같다。태어날때 아기는 그를 양육해 왔고 또 점차 그가 자람에 따라 그를 숨막히게 조여 왔던 모태(母胎)외 비좁은 세계를 포기한다. 9개월이 경과하면 그 생명체는 태안에서의 삶보다도 더 고통스런 위기를 통과한다. 이 위기를 겪은 후에 그는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며 이 세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모태 안에서 모든 측면으로부터의 압박을 받다가 위기를 통과한 다음에 자유의 분위기, 공간, 빛, 사랑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모태 밖으로 밀려서 세상 안으로 나온다.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그와 유사한 위기를 겪는다. 그는 쇠약해지고 공기의 부족을 느끼며 고통을 겪고 이 세상으로부터 거의 떠밀리다시피 축출당한다. 그는 방금 자기가 떠나 버린 세상보다 더 넓은 세계 안으로 돌입한다는 것과 자기가 세상과 관계를 맺어 온 능력이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채 죽음이라는 위기를 통과하게 된다. 죽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육신 ㅡ 인간의 협소한 한계들로 구성된 세상을 벗어나 우주 전체와 더 광범위한 관계를 맺게 해줌으로써 인간을 완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참다운 탄생 (Vere dies natalis) 이라 고할 수 있겠다.

죽음이 참다운 탄생이라면 인간은 죽을 때에 비로소 온전히 인격적 자세를 취 할 가능성을 지닌다. 그가 자기 삶 안에 감추어져 있던 활력와 충만 속에서 온전히 자기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죽음 안에서 부여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세상 안에서 생물학적 생명의 방식으로 존재할 때의 모든 한계를 죽음 안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방향으로 뻗쳐 있는 관계들의 매듭이 온전히 풀려지기 때문이다. 현세에서 영원으로 통과할 때, 즉 죽음 안에서 인간은 온전히 자기를 성취할 수 있다. 지상의 삶 동안에 관찰과 인식의 무한한 갈망으로 충일되어 있지만 항상 제약을 받아 왔던 인간의 지성은 온갖 장애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를 만끽한다. 이때에 지성은 사물들과 우주를 명명백백하게 보고 인식하게 된다. 현세의 삶 동안에 걷잡을 수 없는 활력으로 자극받지만 언제나 한계에 직면해 왔던 인간 의 의지는 죽음 안에서 온전히 일깨워진다. 이때에 의지는 모든 실재를 풍요롭게 해주는 사랑과 근원적인 선(善)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세상과의 관계는 더이상 불투명하게 느껴지지 않으며 육체적 몸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몸은 죽음 안에서 다른 사람들 및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장벽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전우주 및 사물들과 우리가 나누는 친교의 근본적인 표현으로 느껴진다. 내적 인간의 충만한 발전은 이제 더이상 한계를 모른다. 인격은 씨앗과도 같이 미소한 것으로 시작되었고 번창할 수 있었는데,이제는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죽음으로써 우리는 태어나기를 멈추는 것이다.”10) 그러므로 인간이 생물학적.생명을 무한히 누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다. 죽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마치 이삭이 익어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 이 될 것이다.

최종 결단 : 죽음의 순간이 인간의 인격적 성장이 충만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고 또 지성과 의지와 인식과 자유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그것들의 타고난 활력 과 조화를 이루는데서 행사될 수 있는 순간이라면,그 순간에 최초로 온전히 자유로운 결단의 가능성이 주어지게 된다.11) 인간은 하느님, 그리스도,다른 사람들 및은 우주 앞에서 최종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가 완전한 인식, 완전한 자 유, 하느님과의 결정적 상봉,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결정을 달성해야 하는 순간이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한계가 극복되는 순간이다. 인간은 지상의 시간과 공간안에서 제약받고 있을 때에 결정적 행위로써 자신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었다. 모든 결단이 진정한 것이었지만 조잡하고 변덕스러운 것이었다. 모든 결단들 중 어느 것 하나도 그 근본적인 모호성 때문에 결정적 특징을 지니고 내려진 것은 없었다.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자유롭게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최종적으로 확고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상적 인간이 외적인 모든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으로 ‘ 아가는 순간에 즉 죽음 안에서 궁극적 결단이 내려지는데 이 결단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판가름한다. 이때에 인간은 하느님,그리스도,다른사람 들과 결정적으로 또 선명하게 만나기 때문이다. 죽음은 더이상 회피할 수도 모른체 할 수도 없는,하느님과의 결정적 상봉이다. 이 만남을 신학은 '하느님의 심판,이라 부른다. 인간이 현세에서 상봉한 일이 있거나 종종 만날 수 있는 그리스도와 가장 뚜렷한 상봉을 체험한다(마태 25,3! 이하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비유 참조). 이제 인간은 그리스도를 그냥 지나쳐 버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는 마지막으로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영위해 왔던 온 삶을 걸고,자신이 형성해 왔던 전인격을 투입하여 최종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결단에 의한 영원한 운명의 선택이 천국 또는 지옥인 것이다. 선명하고 온전한 의식을 갖는 순간에 인간은 하느님, 그리스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인간의 운명이 어떠한지를, 모든 존재를 향해 자신을 열고 맺어 왔던 관계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그때에 비로소 인간은 현세 삶의 과정 중에 스스로 형성해 왔던 인격성과의 일치 속에서, 근원 또는 천국을 의미하는 전적 개방을 위한 선택 아니면 하느님, 그리스도 및 온 창조계와의 친교를 단절하는 자기 폐쇄 즉 지옥을 위한 선택 중 하나를 감행하게 된다.

이리하여 죽음이 삶을 궁극적인 생명이 되게 한다. 죽음이 비로소 삶을 완성에 로 이끈다. 죽음 이전의 삶은 언제나 잠정적 성격을 띤다. 삶은 여전히 수정될 수 있고 어떠한 내용으로든 채워질 수 있으며 형성될 수 있는 것으로 개방되어 있다. 죽음 안에서는 최종 결단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 최종 결단도 내적 인간의 삶과 절대적 연관 속에서 감행된다. 삶 전체는 죽음 안에서 궁극적인 것이 된다. 현세 삶 안에 스며 있던 죽음은 삶이 정지되는 순간에 현세 삶을 자신 안에 집약시키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 안에서 집약되어 죽음으로부터 궁극성을 받게 된다.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자기가 엮어 온 삶을 온전하고 선명하게 대면하게 된다. 이 대면은 그에게 기쁨 또는 고통을 줄 것임아 분명하다. 새로운 탄생과 최종 결단으로서의 죽음은 내적 인간의 인격적 삶에 의해 전적으로 영향받는다. 그러 므로 죄에 물든 우리의 삶과도 연관지어져 죽음이 고찰되어야 한다.

죄인의 죽음 체험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 : 현세 삶은 항상 죽을 생명이다. 진화되어 가는 세상 안에는 죽음 없는 삶이란 전혀 생각할 수 없으며., 죽음은 이 세상에 필연적으로 속해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안에 죽을 인간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식물들이 시들었고 동물들은 죽어 갔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죽음은 죄의 결과일 수 없다. 죽음이 죽을 인찬의 자연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성서와 신학은 죽음을 죄의 결과로 간주한다.12) 바오로가 이 점을 명백히 진술한다. “이 세상에 죄가들어 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였다”(로마5,I2).

전통 신학은 아우구스띠노 이래로,죽음은 인간의 생명이 점차 소멸되어 가다가 결국에는 자기의 나날들을 종식하게 되는 것이므로 자연적 현상이라는 것을 주장해 왔다. "인간은 죽을 수 없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죽을 존재이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완전히 개방된 삶과 죄없는· 원초적 상태로 말미암아 불사불멸에로 불리움유 받고 있었다. "신앙이 이 점을 가르칠 때에, 낙원의 인간이 범죄하지 아니한 사실로 인하여 지상의 삶을 무제한 연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의 현세 삶이 종식되는 것을 분명히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명백히 육체적 조건 안에서 소멸을 겪으면서 자기를 충만히 성숙시켜 나가야 했을 것이다. ???아담은 어떠한 형태로든 죽음을 겪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13) 이 진술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지상적 삶과 천상적 삶 사이에, 시간과 영원 사이에는 휴지(休止) 상태가 있었을 것이다. 죽음은 통과 지점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 현상으로서의 죽음이 확실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죽음은 삶안에 통합되어 있었을 것이다. 통합 또는 융합으로 인하여 그 죽음은 상실,폭력, 탈취로 느껴지지도 고통스럽게 체험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치 한 생명이 모태에서 이 세상으로,유년기 에서 청년기로 자연스레 옮아가듯이 시간에서 영원으로 자연스럽게 옮아가는 것으로 죽음이 체험되었을것이다. 내면적 성숙이 달성되고 또 영혼,육신의 인간이 지상 세계 안에서 지니고 있던 잠재력을 충만히 계발하였을 때 죽음은 인간을 천상 세계에로 ‘밀어 넣었을’ 것이다. 아담은 고통,고립감,공포를 겪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통과하였을 것이다.

불행히도 아담은 범죄하였고 또 모든 인간이 인간성의 유대 및 자기의 개별 죄악(본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 융합 . 통합되지 아니한 죽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즉 죽음은 생명과의 조화를 상실하였으며 인간 존재를 황폐화하는 소외,위협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공포,고통,단절,고립이다. 죄의 체험도 이와 같다. 죽 음과 죄의 체험은 일맥상통한다. 상실,파괴,단절로서의 죽음 체험은 죄의 결과로 부터 연유된 것이다. '

인간이 본시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은 삶은 개방,일치, 조화  관계이다. 에덴 동산의 인간은 하느님,동료,세상과의 조화 즉 원만한 관계의 삶을 영위하였다. 삶이란 관계 속에서 영위되는 것이다. 하느님 . 이웃 . 세상 .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반면에 죄악은 삶의 이 모든 관계의 삶을 파괴하고 단절시키 는 것이다. 그것은 단절,고립,분리,파괴,폐쇄로서 삶에 역행하는 것이다. 인 간을 고립시키는 죄악의 체험은 죽음에서 극도에 달한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은 죽음을 죄의 대가로 경험한다. 본래 의미의 삶이 하느님 . 이웃 . 세상과의 사귐이라면 죽음은 그것들로부터의 분리, 자신 안에서의 유폐,그리고 자기 삶의 파괴를 뜻한다. 죽음의 이러한 의미는 죄악의 결과와 상통한다. 죽음과 죄는 소와 (이별, 단절, 분리, 고립), 파괴(상실, 멸망), 불안과 공포 따위를 공유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인인 한,죽음에 부쳐진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예수의 죽음 : 무죄한 예수는 죄인의 죽음을 철저히 겪으셨다. 죽음 앞에서 고요하고 의연한 자세를 보이며 명예로운 죽음을 겪었던 희랍의 위인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예수는 공포와 동요 속에서 치욕적인 죽음을 겪으셨다. 그분에게 있어서 죽음은 희랍의 철인에게서처럼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 또는 해방되어 자기의 본고향 즉 자유로운 천상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에게 있어서 죽음은 하느님과 인간의 원수, 죄악의 화신,삶의 파멸, 전적 상실,고립이었다, 군중 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제자들로부터 격리되신 처지에서 그분은 "괴로와 죽을 지경의 불안"(마태 26,38)을 느끼셨고 ''고통과 싸우는 동안 핏방울과 같은 땀이 뚝뚝흘러 땅에 떨어졌고”(루가 22,44), 하느님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셨다.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 I5,34). 예수의 처절한 죽음은 그분의 삶이 죄악으로 가득찬 인간의 삶 안에 깊숙히 연루되었음을 반영해준다. 그분이 죄 많은 인간의 삶과 깊은 연대 관계를 맺어온 삶을 철두철미하게 영위해온 .결과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다. 그분의 죽음은 자기 삶에 대한 완전한 성실의 귀결이었다. 그분은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순종과 사람들을 위한 전적 봉사의 삶을 사셨다, 죽기까지" 즉 극도로 순종하고 봉사하면서 살아온 삶이었기에 그 삶은 필연적으 로 비극적 종말에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분 자신이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 투신, 자기 삶에 대한 철저한 성실의 결과가 십자가의 죽음에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그분의 죽음이 사명과 삶에 대한 온전한 투신 또는 성실의 당연한 결 과라는 점에서 그것은 그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음을 회피할 수 없는 ‘숙명적' 상황에서 예수는 온전한 자유와 자발성으로써 죽음에 직면하신다. 예루살렘 입성,성전 정화(마르 1US 이하)의 도발 행위는 다가온 죽음 앞에서 그분이 취하신 대결과 자발적 수락의 의지를 단호히 보인 것이다. 그 어느 인간도 죽음 앞에서 감행할 수 없는 일을 결정하신다, 도전적 행동으로써 그분은 자기 죽음의 때와 장소와 방식을 결정하셨다. 그분은 죽음과, 그 안에 도 사리고 있는 죄악을 향해 적극 대처하셨다. "자, 일어나 가자”(마르 14,42).

최후의 만찬은 그분이 죽음을 마지막으로 대비하는 예식으로서 자기 삶을 요약 하고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예식이었다, 만찬은 삶에서 죽음에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거행되었으므로 삶과 죽음을 잇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삶이 죽음 안에, 또한 죽음이 삶 안에 있다는 감추인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 그래서 만찬은 식사이면서 동시에 희생 제사이다. 식사 도중에 선언된 "받아 먹으라", “받아 마셔라”는 예수의 말씀들은 외형상 그 예식이 생명을 양육하는 식사임을 드러내 지만 내용상 희생 제사라는 것도 분명히 언급된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홀리는 내 피", "너회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다’’(마르14,2요 생명을 양육하는 식사와 생명 을 바치는 회생 제사가 하나의 예식 안에 통합된다. 생명의 참 양육이 생명외 봉헌족 자기 희생으로써 실현되는 데에 비해, 희생의 효과 즉 남의 생명을 기르고 풍요롭게 하거나 살리는 효력은 식사를 통하여 전달된다(그래서 온 민족의 민속 안에는 제사 다음에 으례히 음복〈飮藏> 즉 복을 먹고 마시는 식사가 따른다), 식사 는(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기꺼이 바치는) 회생의 결실이다. 식사와 제사는 귀중 한 것(생명)을 바쳐서 남의 생명을 기르고 풍요롭게 해주는 점에서 일치된다. 제사는 식사의 희생적 측면을 드러내 주고, 식사는 제사의 목적 즉 자기 생명을 바쳐 남에게 전달해 줌으로써 남의 생명을 기르는 것임을 나타내 보인다. 단적으로 말해서,생명의 예식인 식사와 죽음의 예식인 제사가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한 예식 안에 융합되었다는 사실은 생명이 죽음 안에, 죽음이 생명 안에 있는 것임을 단적으로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식사이면서 동시에 희생 제사인 최후 만찬은 예수의 죽음이 순종과 봉사로 점철된 삶의 요약이고 또한 완전한 봉헌의 지고한 표현임을 예시해 보인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생명에 의해 삼켜질 것임을 희망한 예수의 확신을 반영해 준다. ·

예수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상황에서 온전한 의식과 자유 의지로 죽음에 맞서서 그것을 수락하셨다. 자발적으로 수락된 죽음이기에 그분의 죽음은 먼저 하느 님과 인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기꺼이 봉헌하는 희생이 되는 것이다. “누가 나에 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8). 또 한 그 죽음은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순종과 사람들을 위한 온전한 봉사의 지고한 표현으로 자유로이 수락된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 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일어나 가자”(요한 14,31) ;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 예수의 죽음이 이토록 자발적이고 희생적이며,따라서 철저한 자아 봉헌의 지고한 표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삶이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봉헌한 삶이었기 때문 이다. 가족 관계,사회 인습, 종교 관습., 정치 체제 등 인간 삶의 모든 부면에서, 심지어 악과 죄악의 세력 앞에서조차 그분아누리셨던 완전한 자유가 죽음 앞에서도 충만하게 발휘되었던 것이다·

최후의 순간에 그 결정적 모습을 드러내는 죽음은 자신 안에 삶 전체를 응축시킨다. 죽음은 삶의 집중적인 반영이다. 죽음 안에서 삶은 집약되어 또렷이 나타난다. 삶이 수많은 결단으로 엮어졌다면,삶을 자신 안에 모으는 죽음은 그 결단들 의 최종 정리이다. 즉 최종 결단의 순간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들을 철저히 '위한’ 자신의 삶을 죽음 안에 집약시켜 최종적으로‘마무리하셨다. 죽음을 봉헌 된 삶의 지고한 표현으로 받아들이셨다. 죽음이 삶 안에서 감행되는 모든 결단의 죄종 마무리라면, 삶은 마지막 순간 즉 죽음을 연습하고 대비하는 견단의 순간들 이다. 삶은 매순간마다 그 자신 안에 스며 있는 죽음을 수락하기를 요구한다, 하느님 ‘ 이웃 · 세상을 향하며 우리 자신을 열고 그들에게로 가기 위하여 부단히 자신으로부터 이탈하여 자신을 제한하기를 삶은 요구한다. 탐욕, 이기심,안일,나 태,자만으로 가득찬 자신(묵은 인간)에 대하여 거듭 죽기를 즉 일상적 죽음을 요구한다. 삶의 이러한 요청은 죽음 안에 있는 삶 자체가 죽음을 극복하고 새로이 태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죽음을 극복하는 삶

죽음은 삶의 엄연한 실재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에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요소로 침투해 있기 때문에 양면성을 지닌다. 생명의 파괴아며 복구이고, 이별이며 만남이고, 단절이며 친교이고,상실이며 소유이다. “죽음 은 공허‘이자 충만이고,수동적으로 당하는 종말이자 능동적으로 성취하는 결말이고 철저한 자아상실이자 완전한 자아소유이다.이양극단이 발생하는 것,이것 이 죽음이다."⑷ 죽음의 이 양극은 삶의 선택으로 판·가름난다. 양극의 택일은 삶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죽음의 긍정적 의미는 감추어져 있다. 그 적극적 가치는 삶에 의하여 밝혀질 것이다. 죽음의 내용은 삶에 의해 결정된다。죽음이 생명 안 에 있다면 죽음 안에서 비로소 생명이 정점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생명의 주인 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은 생명은 죽음에 의해 쉽게 소멸되고 섬겨질 것이 아님이,또한 생명이 죽음 안에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빠스카 사건으로 입증되었다, 그분은 사랑과 자유로써 죽음을 받아들이셨기에 죽음의 감추인 변모와 그 적극적 가치를 밝히 드러내셨다. 그분에게 있아서 죽음은 생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헌신과 순종과 사랑으로써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통로,통과 지점이었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요한16,28). 죽음 은 되돌아감이다. 그리스도는 죄악의 결과이며 표지인 죽음을 수락하심으로써 삶에의 전적 성실과 자아 봉헌의 표지로 삼으셨다. 그분은 뿌리에서부터,중심에서 부터 삶을 철저하게 사셨으므로 비극적 죽음을 겪으셨고 생명과 죽음의 교호성(交 互性)을 뒤바꿔 놓으셨다. 그분에 의해 영위된 철저한 삶이 죽음을 삼켜 버린 것 이다. 그래서 신앙은 죽음이 생명에 의해 극복되었음을 확신한다. "죽음아,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고린 IS,55). 그분에 의하여 최초로 생명이 죽음을 극복하였고 죽음이 자기의 적극적 가치를 드러냈다.

삶과 죽음의 연관보다도 더 역설적인 것은 없다. 생명이 쇠퇴해 갈수록 죽음의 세력은 더 강대해지지만 보다 성숙되어 간다. 인간의 삶이 인격화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생명이 소멸되어 갈수록 인격적 생명이 성장한다. 인격의 길은 생물학적 생명과는 달리 자기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가 아니라 타인에게 두는 데에 있다· 그것은 자기자신 안에 폐쇄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껍질을 벗고 자 기의 한계를 뛰어넘어 타자를 향한 개방된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을 포기하는 데 서 타자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열고 타자와의 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타자와의 일치,타자 안에서의 존재가 인간을 보다 인격적이게 만든다. 이 인격적 삶으로 인하여 생명을 탈취해 가는 죽음이 자신을 바치는 봉헌이 될 수 있다. 죽음이 생물 학적 생명과 인격적 생명올 갈라놓아(전통 신학의 정의에 따르면,육신을 영혼과 분리하여) 전자를 소멸시키지만 후자에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육신'의 인간은 죽어도 !영혼!의 인간 즉 인격은 죽지 않는다. 인격은 죽음 안에서도 존속하면서 유일회적 최후 결단을 감행한다. 그 순간에 무엇을 남겨 놓느냐에 따라 영원한 인격의 존재를 결정하게 된다. "죽을 때에 남는 것은 이제 막 모든 것에서 손을 털어 버렸다고 하는 것뿐이다, 남는 것은 다만 자기 봉헌과 무아,그리고 다 바쳐 버란 마음뿐이다· 죽을 때에는 생전에 행한 자기를 버린 무아적 사랑의 행위, 그 것만이 참다운 가치로 남는다."15)

이래서 인간은 죽음을 삶 안에 통합하여 완성할 수 있다. 즉 죽음을, 전적 포기 와 사랑의 지고한 행위, 신뢰에 찬 봉헌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역사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성인들과 신비가들은 역설적으로,죽음을 더 이상 생명의 도둑이나 반 역이 아니라 우리를 해방시키고 생명과 사랑의 세계로 이끌어들이는 벗으로 간주 할 만큼 삶의 상황 안에서 죽음을 융합시킬 수 있다。그러므로 죽음이 비록 고통 에 찬 순간일지라도 그것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선사할 수 있는 순간으로 알고 이 를 충만하게 삶 안에 통합할 때에 그것은 충만한 삶에로 옮아가는 순간이 된다? 역설적으로 죽음은 사건에 그치지 않고 행위가 될 수 있다. 즉 고귀한 행위, 생명 의 절정이 되고 실제로 영원한 생명에로 태어나는 탄생인 것이다. 여기서 생명의 신비는 씨앗의 비유에 의해 밝히 드러난디ㅡ,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 온 열매를 맺는다”(요한I2,24), 한 알의 씨는 묻히고 썩으면 그 씨의 흔적은사라진 다, 그러나 거기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트며 자라서 열매가 맺어진다. 씨앗의 형태는 없어졌지만 그것이 씨앗보다 더 풍성한 생명체로 변화되었다. 그리스도는 즉음을 해산에도 비유하셨다. "여자가 해산할 즈음에는 걱정이 태산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 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게, 된다”(요한16,21; 참조로마8, ?-25)。한 생명 체가 태어나는 순간에 그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그 아기의 탄생을 지켜 보던 사람들흔 기쁨을 누린다. 한 인간이 죽을 때 그는 묵묵히 이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그의 임종올 지켜보는 사람들은 슬피 운다. 바로 그 순간에 죽는 생명체는 영원한 기쁨을 누릴지도,모른다.

즉음은 그것을 품고 있는 생명이 천차만별이듯이 여러 가지 감춘 모습을 갖고 있다. 보통 인간의 눈에는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은 끝장이고 분리이고 상실이다.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그것이 죄에 대한 처벌이다. 죄악이 겪어야 할 대가 이다. 성인의 눈에는 죽음이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온전한 자기 봉헌과 자기 소멸,두 요소로'구성된 희생이었다. 그것은 그분이 그리스도인을 위해 실행하신 최종 신앙 행위,신뢰의 지고한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그리스도 인에게 "이득이 된다’’(필립 1,29). 죽음은 피동적으로 겪게 되는 사건만이 아니라 자신을 극복하고 바치는 봉헌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그리스 도인의 처신은 죽음을 회피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대항하여 극복하려는 태도 이다. 사랑 이외에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사랑만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희망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어려 움을 감당하게 해주는 희망은 ‘죽음보다 더 강한,생명의 힘이다. 이 희망은 미래 를 향해 뻗어 있지만 현재를 지탱해 주며 값진 순간이 되게 해준다. 그것은 현재의 매순간이 죽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궁극적인 순간임을 인식시켜 준다. 희망하는 사람은 현재를 유효히 이용하면서 미래의 승리를 인내로이 기다린다. 그는 죽음에의 대비가 참으로 진실하고 충만한 삶에의 준비를 뜻하는 것임을 확신 한다. 희망은 삶에의 적극적 투신이다.

삶이 죽음 안에 있으므로 삶의 매순간이 궁극적인 때이다. 또한 따라서 매순간 마다 죽음을 극복하는 행위를 감행할 수 있다. 이것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리스도인이 삶 한가운데서 요청받은 사항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 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6,8), 세례는 그리스도 와 함께 '묵은 인간’에 대해 거듭 죽음으로써 새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죽음을 통한 새로운 탄생의 힘을 우리는 주님의 성찬 식탁에서 얻어 누린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54),

(주)

1) G. 그레사케,「종말신앙」, 성바오로출판사(신학선서 3) p. 75.

2) Μ. Heidegger, Sein und Zeit, Tubingen 1953, p. 329 : "인간은 살기 시작하는 순간에 이미 죽음을 향해 노쇠하기 시작하였다.” 이 철학자에 의하면 인간은 "죽음에로의 존 재’’ (Sem zum Tod) 이다. 오늘날 죽음외 신학올 정립한 많은 신학자들이 이 철학자의 죽음 이해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3) G. 그레사케,전게서 p. 79.

4) J.A.T. Robinson, The Body, London 1965, pp. 26-33 : Α 즐렘,「성서의 인간」,분 도출판사 1968, pp. 7-13.

5) R. Troisfontaines. Je ne meurs pas, Paris 1960. p.60; L. Boros, Mysterium 'mortis, Der Mensch in der letzten Entscheidung, 이ten - Freiburg 1962, pp. 83 ?90. 〔37면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