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삶과 죽음 1989년 2월호 (제 122호)

삶과 죽음에 대한 사목적 입장

박도식 (대구대교구 신암동천주교회 신부)

"인간이 이 세상에 왜 사느냐?” 하는 질문을 놓고 여러 가지로 답변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그 한 마디의 대답은 "죽기 위해서 산다”는 이것뿐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며 죽음올 앞둔 사람에게 사목자의 태도는 어떠하여야 되겠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 구원의 사명을 띤 우리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 "사는 게 무엇이냐? 또 죽는 게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생 무상의 진리’를 가르치고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 버린다면 한포기 사과 나무보다도 못하다는 진리를 선포하는데 그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귀한 것은 자신의 생명이다. 이 생명이 어디서 왔으며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 사목자의 설교 내용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고 어떤 모양으로 든지 산다는 것이 귀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모든 삶의 방법과 목적이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러므로 교리 교수의 모든 방법과 모든 목적은 죽음과 연결 된 영생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인간에게 '죽음과 삶'은 자신의 존재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가장 큰 관심사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 이하 몇 가지 관점에서 사목자의 방향을 제시하고 싶다.

죽음의 의미

우선 죽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의학상의 죽음은 심장 기능의 마비 또는 뇌 기능의 마비라고 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은 ‘영육의 분리’가 죽음이라고 했다. 이것은 현상학적인 고찰에서 나온 것이고,진정 그 죽음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철학적인 견해나 영성 신학적인 차원에서 밝혀져야 한다.

여기서는 차원 높온 영성 신학의 문제를 떠나서 역사적으로 사람들이,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하였는지 우선적으로 소개한다,

호라씨우스는"이 세상의 부나 권력이 끝끝내 이겨내지 못하는 한계 그것이 죽음이다"라고 했다. 죽음 앞에는 어떤 인간도 극복하지 않을 수 없는 항거 불능이라는 말이다. 인간 능력의 한계점을 지닌 것이 죽음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스스로 극복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는 말이다.

몽테뉴외「수상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디사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곳곳에서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자유를 예측하는 일이다. 죽음을 배운자는 굴종을 잊고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해방된 자이다.” 죽음은 예기하지 못한 때 온다는 것이다, 죽음은 시간이나 공간을 분간하지 않고 때가 되면 언제라도 오는 것이다. 죽음은 아무 도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인지 아는자는 모든 것에서 해방된자라는 뜻이다. 죽음은 모든 것에서 해방을 주는 것이다.

또한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무대 위에서 임종의 시간 앞에 애태우는 한 연극 배우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서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다.” 인생은 허무하고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다. 인생은 죽음으로 한 장면이 끝나 버리는 순간적인 연극이다. 이렇게 셰익스피어는 인생 무상을 말하고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자 계로가 죽음을 묻자 그는 “우리는 사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季路 最r曰쨘Ε 구曰 未知其生焉知死)라고 말하였 다. 진정 인간은 죽지만 그 죽음을 모르고 있다. 하나의 운명론적인 차원에서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죽음이다.

칼 라너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진화론적인 세계 안에서는 다 른 생명을 위해 생물학적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회학적 의미를 지닌다.”1) 죽음은 사회학적인 견해로서는 그동안 자기가 차지하고 있었던 역사의 공간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 준다는 뜻이다. 한 인간의 죽음은 자신이 차지했던 역사적인 공간을 끝내고 다음의 세대에로 넘겨주는 것이 소위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본 죽음이 란 뜻이다,

죽음에 대해서 문학적인 표현이나 인생 철학적인 견지에서 또는 의학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은 그 누구도 죽음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오로지 삶을 주신 그분,생명을 주신 그분만이 죽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서야 죽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는 생명의 의미로 돌아간다.

생명의 신비

우리가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이 사실을 생각해 보자!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이 고귀한 생명의 근원은 무엇인가? 생명의 출처는 어딘가? 생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가 죽음을 답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생명은 신비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생명은 결실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인간도 생명에 대해서는 답변을 할 수 없을 만큼 생명은 신비스러운 것이다. 생명이 신비스럽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분석될 수도 없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조립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747 보잉 비행기를 만드는 인간이지만 5백원짜리 장미꽃 한 포기 만들 수 없다는 이 신비성 앞에 우리는 다소곳이 무릎을 끓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도 귀한 생명을 받을 때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했고 그것을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니다,2)

생명은 주어진 것이다. 누가 주었는가? 생명을 만들 수 있는 그분이 ! 누가 생명을 만들 수 있는가? .신비한 생명을 만드신 그분은 더할 나위없이 신비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생명의 원천 ! 생명의 주인공 ! 그분과의 삶의 관계는 인간 최대 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생명을 주신 분과의 생명의 관계, 이것을 우리는 종교라고 한다, 생명의 원천이신그분과의관계에서귀한생명이주어졌고그분과의 관 계를 통해서 생명은 그 의미가 주어진다. 그래서 생명의 변화가 오는 죽음도 그 의미가 밝혀진다, 종교를 통해서, 다시 말해서 생명의.창조주를 통해서만이 죽음의 의미가 터득된다는 것을 우리는 정확히 밝혀야 한다.

생명을 만드신 그분만이 죽음을 말할 수 있다. "나는 부활아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3)

이 믿음만이 삶과 죽음,의 답변이 된다는 말이다. 죽음은 그 자체가 체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분석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비스러운 세계이다. 그래서 '믿음,만이 답변한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는 질문에 긍정적인 태도가 있으면 죽음의 의미가 밝혀지고 그것에 대해서 부정적이면 죽음의 수수께끼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

신앙의 입문에서 죽음과 부활에 관한 신앙 개조가 우선되어야 하고 이것을 각별히 강조해야 한다. 

포르그림러는 이렇게 말했다. "신학적 견지에서 죽음은'피안세계’에 관한 유형의 지식이나 증명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신앙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차원에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당신 주위에 모으신 모든사람들이 그분과 함께 거처하고 있는 이차원,이영역은 우리 인간의 인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그 죽음의 영역과 현세 영역과는 서로 교환될 수 도.없다’4)

이 말은 곧 신학만이 죽음을 답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모름지기 사목자돌은 교리교육에 있어 그 핵심적인 부활 신앙을 가르쳐야 한다. 크리스차니즘의 뿌리는 곧 부활 신앙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극복하여 영생으로 부활하는 그 길이 인생의 회망이요 그리스도의 가르침 전부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영원한 존재 말살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믿고 있음을 고백한다. 사목자들이 신도 대중에게 가르쳐야 할 크리스차니즘의 중심 신조인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의 구절에 대해서는 어느 설 교 때라도 강조되어야 하는 내용이다. 많은 신도들이 이런 기본 신조의 의미도 모르고 제2차적인 신앙의 의미에 전신앙을 걸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죽은자 중에서 부활한 첫번째의 사실임을 강조하면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죽음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과 축복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신조는 이렇다 하더라도 육음,그 자체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타격적이 고 두려움을 준다. 아무리 신심 깊은 신앙인이라도 더구나 성직자나 수도자들 중 에도 죽음 앞에 와서는 전율을 하고 거부한다, 그러므로 실제 죽음을 앞둔 그들에게는 사목자로서의 기본자세가 중요하다·

이제 죽음을 앞둔 임종자에게 사목자의 배려에 대해서 몇 가지를 서술하고자 한다.

마음을 준비시키는 다섯 단계

여기서는 소위 ‘호스피스’적인 사목자의 구체적인 배려를 열거하고 싶다.

이 글은 주로 엘리사벳 퀴블토스가 쓴「인간의 죽음」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내용 을 발췌 서술함을 미리 밝힌다.

첫번째 단계 :죽음에 대한 부정

이 저서에 의하면 임종 환자 2백여명과 대담한 결과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을 때 그들 대부분은 "뭐라고요? 난 아니에요. 뭔가 잘못되었을 거예요” 하면서 우선 죽음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가 정신이 있을때 ‘죽음'에 대한 결정적인 대화를 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

필자도 이에 동감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한 번쯤은 거부하면서 반항하는 단계가 필요하고 그 다음단계를 넘어가면서 사목자는임종자가 죽음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죽음을 앞둔 그들은 일단 "나는 안죽어” 하는 미련을 두는게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 단계가 지나면 이젠 죽음 앞에 분노와 저주를 느낀다. 、

두번째 단계 : 죽음에 대한 분노

두번째 단계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자세가 계속 되다가 "왜 하필 내가 죽어야 하는가" 하면서 분노외 자세를 드러낸다.

"나는 아직도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나보다 더 늙은 사람도 죽지 않았는데 내가 왜 죽어야 되는가’’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이들은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분노를 폭발한다. 가족들에게도 의사들에게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신경질을 낸다.7)

. 분노의 상황이 지나면 이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체념하면서 타협을 하려고 노력한다·

세번째 단계:죽음에 대한 타협

분노의 단계가 지나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없을까 하며 자신이 타협하고자 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부정과 분노의 상황이 지나면 임종자는 "자 ! 이젠 어쩔 수 없겠지. 그러나 주님,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나를 살려 주신 다면 좋은 일을 많이 하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주님과 타협하고자 하는 자세가 나타난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죽을 땐 죽더라도 좀더 삶을 연장해 보고 싶어 하는 심정이다. 타협의 과정은 극히 짧으며 주로 하느님과의 기도로 이루어진다. 이것 이 지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울에 빠진다.8)

네번째 단계 : 임종자의 우울증

부정과 분노를 거쳐서 타협을 했지만 몸이 쇠약하여 본인이 더 이상 살아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극도로 실망감을 갖고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지난날을 돌이키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서 모든 것이 끝이 난다는 상황에서 좌절 한다. "이 회사는 어떻게 될까?”,"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하고 사회 활동 과가정 활동에 대한 문제를 걱정하면서 “내가없으면···?”하는식으로크게 좌절한다.9)

다섯번째 단계 : 죽음의 긍정과 수용

이제는 임종자가 모든 미련을 끊고 "주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요” 하는 진지한 모습이 나타난다. 이제는 신부를 불러서 ‘병자성사'를 청한다. 그리고는 일생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진심으로 통회하고 그 옛날 잘못 한 사람에게' 죄의 용서를 청하기도 한다.

죽음을 하느님의 곁으로 가는 축복의 순간으로 생각한다. 곁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하는 겸손과 순종의 자세를 보인다. 주위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임종자의 수호 성인을 부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 이른 임종 자는 다음과 같은 타골의 시를 읊을 수 있다.

"떠나겠나이다. 안녕히 계시오소서.

형제여 .

내 온 형제들에게 절하며 작별하나이다.

여기 내 문의 열쇠를 돌려드리나이다.

또 내 집에 대한 온갖 권리도 포기하나이다.

오직 그대로부터 마지막 다정한 말씀을 간청할 뿐이외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웃이었나이다·

하지만 주기보다 받는 것이 많았나이다.

이제 날이 밝아 어두운 내 구석을 밝히던 초롱도 꺼졌나이다.

부르심이 왔나이다·

나는 여행의 준비룰 하고 있나이다."

사목자의 기본 자세

사목자들은 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임종의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한 영혼에게 영생과 영벌이 달려 있는 '죽음’은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외면될 수 없다.

사목적인 견지에서는 우선 임종자에게 일단은 위에서 서술한 대로 죽음에 대해 서 실망과 좌절을 안기고 분노와 저항의 시기를 거쳐 어떤 모양으로든지 죽음을 하느님의 뜻으로 수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어떤 사목자들은 죽음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 두려워서 끝까지 미루다가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 성사를 집행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정신이 또렷또렷할때 빨리 죽음에 대한 절 망을 안겨 주면 그만큼 더 빨리 죽음을 수용하는 시기가 빨라진다, 그때에 가서 삶과 죽음은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새기도록 해야 한다.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정확히 수용하는 자세가 가장 귀중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부활의 교훈은 너무나도 귀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인간의 나약성으로 인해서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낀다. 평소에 사목자들은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신도 대중들의 마음 속 깊이 심어 주어야 한다. 특히 한국 순교 성인들의 모범된 죽음을 소개하는 것도 대단히 좋은 일이다. 예컨대 평신도로서 영웅적으로 살았던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전기를 보자.

“1839년 9월 22일 서소문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는데 온갖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 나간 모범을 보여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여유있게 나타냈었다. 자신의 믿음을 순교로써 실증했었다…피를 쏟는 형벌에도 태연자약하였고 사형받고 형장으로 가면서도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녔다고 하니 신앙을 생활화한산 표본이라 하겠다’10) .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위대한 한국 성인들의 죽음을 나열할 수 있고 실제로 그들의 죽음을 소개할 수도 있다.

결국은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을 소유할 수 있는 주님의 자녀임을 밝혀 주어야 한다.

맺는 말

이상의 글올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끝맺고자 한다. 제2 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 죽음을 사목적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땅과 인류의 완성 시기를 알지 못한다. 우주 변혁의 방법도 모른다. 죄로 이지러진 현세의 모습은 분명 지나간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처소와 새로운 땅을 마련하실 것이며, 거기서는 정의가 지배할 것이고,그 행복은 인간들 마음 속에서 치솟는 평화의 온갖 소망을 충족시키고 넘치리라는 가르침을 우리는 받고 있다. 그때에 죽음은 패배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이며 약하고 썩을 것으로 심겨졌던 것이 썩지 않는 힘을 입을 것이다. 사랑과 사랑의 업적은 남을 것이며, 하느님이 인간을 위하여 만드신 괴조물 전체가 허영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될 것이다. 인간이 혼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경고를 우리는 듣고 있다”(39항).

(주)

1) Κ. Rahner, Schriften zur Theobgie \1 Emsiedein 1967, p.253.

2) 박도식,「삶의 리듬」, 가톨릭출판사,p. 14 참조.

3) 부활 신앙에 대한 성서 말씀, 요한 11,25.

4) Herbert Vorgrimler. Der Tod im Denken und Leben des Christen, 심상태 역, 「오늘의 그리 스도교적 죽음의 이해」, 성바오로출판사,p. 24.

5) Elisabeth Kubler - Ross. On Death and Dying 성염 역,「인간의 죽음」분도출판사, 1979년도판.

6) 상게서 p.68 이하 참조.

7) 상게서 p.82 이하 참조.

8) 상게서 p.126 이하 참조.

9) 상게서 p. 132 이하 참조.

10) 박도식,「103위 성인전」,p.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