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교회에서의 여성 1991년 8월호 (제 151호)

혁신인가 혁명인가

황봉철 (마산교구 거창천주교회 신부 · 성서신학)

I. 방향 설정

교회 안에서 여성 문제를 - 여성의 지위와 여성의 역할 등을 - 다루고자 할 때 우리는 흔히들 “그러면 예수님은 당시 상황에서 여성들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그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모색하려면, 먼저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관습과 인습 그리고 풍습 등을 감안하여, 예수님의 여성들과 접촉(대화, 가르침,추종 등등)을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즉 여성의 지위나 그들의 역할에 대해서 어떤 향상이나 발전이 있었는가하는 것에 관심을가져본다면,시대의변천을 겪어온 오늘날의 교회가 여성을 어떻게 보고,어떤 방향으로 여성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작은 해결책을 나름대로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안팎으로 여성 문제라 하면,여성들도 남자들과 똑같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人間)으로 생각하여, 당연히 그들도 남자들과 똑같은 품위(GlmchgueHgkek; Gkichgewicht)를 지니고 똑같은 취급(Gleichberechtigung)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나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그들이 주장하는 것들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도 만족할 만한 긍정적인 대답을 쉽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일각에서는,여성들의 지위나 역할 문제에 있어서 교회가 더 보수적이고 더 편협하다는 소리를 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아직도 ‘남존여비’ 사상 이 팽배한 우리 사회는 그렇다 하더라도,초대 교회에서의 여성들의 위치는.또한 어떠했던가?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에 보내는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여성들은 교회의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자들에게 물어 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수치가 됩니다”(1고·린 14,34 이하)고 하였고,디모테오 서간에는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먼저 아담이 창조되었고 하와는 그 다음에 창조된 것입니다··.···"(1디모2,11이하).

오늘의 교회에 있어서도 이 점에 대해서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여성의 지위나 역할이 우리보다 향상되었다는 서양도 마찬가지이다. “서쪽으로 갈수록 여성들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그런 서양에서도 연설의 서두에 "숙녀 신사 여러분(Ladies and Gentlemen; Meme Dame und Herrn) 하지만,그들의 교회 안에서는 강론 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Liebe Bruder und Schwester) 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로 되어 있고,누구 하나 그 말에 대해서 어색해 하는 사람은 없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와 그 안에 몸 담고 있는 교회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특히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바오로 사도의 위 말씀을 누가 받아들이고 살고 있는가?

그러면 교회는 이렇게 변화되었고 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입지를 ㅡ 특히 여성 문제에 있어서 성서적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먼저 예수님 당시의 여성의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지위와 역할 등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고,두번째로는 그런 배경 하에서 예수님은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글의 제목처럼 "그분은 혁명가이신가? 아니면 혁신가이신 가?”라고 독자 스스로가의문을 제기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의 마지 막에는,그러면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는 여성 문제를 어떻게 타결해 나갈 것 인가 하는 데 대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이 글와 두번째 부분을 다룰 때,주로 마르코 복음을 중심으로 하고자 한다.

I. 설정된 방향에 대한제시

1 : 예수님 당시의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

구약성서를 대충 살펴보면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똑같이 자녀들의 존경 대상이 되지만, 그 외는 거의 예외없이 여성들은 남성들과는 현격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 이것을 예비 지삭으로 하여 다음 몇 가지를 구분지어 살펴 보고자 한다.2)

1. 여자 일반 : 딸, 처녀 그리고 부인들에 관하여

1) 종교와 전례 행사

종교 생활이라면 먼저 기도를 들 수 있다. 이스라엘 옛 관습에는 남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몇 가지 의무 규정이 있다. 예를 들면,이스라엘 남자들은(여기서 는 성인 남성을 일컫는 것인데,그 나이는 12살 이상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도 이 나이에 도달하였을 때,율법에 규정된 의무를 지키기 위해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다고 루가(데 이하) 사가는 보고하고 있다,) 매일 아침 기도(Morgenschema)3)를 해야 하지만,이 기도를 이스라엘 여자들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는 식탁 기도도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여자들은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출애 20,8-11;23,12; 신명. 5,12-15 참조).4) 재미있는 것은 왜 여자들은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느냐 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그들이 안식일 법을 지키면 모든 사람들이 안식일에 밥을 굶어야 할 형편이었고,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자들이 안식일 규정에서 예외가 되는 것이었다. 성서적인 근거로 그들은 위에 언급된 성서 귀절을 해석하면서,  그 계명에 명시된 "너희들”이란 말 속에는 분명코 여자들은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또한 율법이 명시한 모든 금지된 계명은 지켜야 하지만 무엇을 하라는 긍정적인 계명은 특별히 지시된 시기를 제외하고는 지켜도 그만,안 지켜도 그만인 것이다·5)

예루살렘 성전에는 남자들이 예배하는 장소와 여자들이 예배하는 장소가 분리 되어 있었는데, 소위 말하는 "여자들의 (Fmuenhof)”이 "남성들의 집(hermhof)” 보다 다섯 계단 아래에 위치했었다.6) 그들은 또한 남자들에게는 의무 규정인 3대 의무 축일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출애 23,17; 34,23 이하;신명 16,16 이하 참조).7)

여자들은 회당에서 남자들과 분리되어 자리를 차지하였고 그 안에서 무엇을 큰소리로 읽지도 못했으며,어떤 주도적인 역할도 담당하자 않았다. 그리고 회 당에서 공적인 집회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정족수가 필요한데 그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숫자를 셀 때 여자들은 계산하지도 않았다.8)

또한 여자들이 서원하는 것은 그들의 보호자인 아버지나 남편이 허락을 했을 때에만 유효한 것으로 인정을 받았다(민수 30,2-9 참조).9)

여자들이 예언직을 수행하는 것은 구약에서 가끔 보여지고 있지만, 그것도 유배 이후부터는 그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10)

여자들이 피를 흘리는 동안(하혈이나 달거리 또는 출산으로 인해)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며, 그 부정을 벗기는 규정도 남자의 경우보다 엄격하다. 부정한 동안 물론 그들은 종교 집회에 참석도 못하게 되기에,자연적으로 여인들은 그 생리상 예배나 종교 행사에서 멀어져야만 했던 것이다(레위 12,15 참조).11)

2) 사회적인 관습과 풍습에 관하여

구약성서에 나타난 여자들의 역할이란 크게 두 가지로 열거할 수 있겠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결혼 생활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자녀 생산이고 그 다음은 집안을 돌보는 일이다. 그래서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다. 또한 양자를 입양하는 규정도 있었고,심지어는 소실을 들이는 것도 구약에서 볼 수있다(창세 14; 판관 8,3 참조)·12)

사회 생활 안에서 남자들이 공공연한 장소에서 여자들과 상종하는 것을 금하 고 있다.13) 이런 관점에서 요한 4,27의 "예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랐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일반적으로 여자들에게는 회당이나 성전에 가는 것 외의 바깥 출입은 허락되지 않고 있다.14)

집안 생활에서도 남녀의 유별은 분명했으며,우리의 옛날과 비슷하게 남녀의 방이 따로였고,여아들도 같은 나이 또래의 남아들과는 집안에서조차 같이 놀지도 못했다.15)

남자들의 공동 식사에 여자들이 같이 끼어들 수 없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여자들이 그 식탁에 봉사도 하지 않았다.16)

여인들이 법정 증인으로 나설 수 없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재미 있는 것은,왜 여인들이 법정 증인으로 나설 수 없는가 하는 이유를 성서적인 근거로 대고 있는데,그것은 창세기 18장의 이야기다. 즉,여자인 사라가 하느님 앞에서조차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여자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창세 18,1-15.17) 부언을 하자면,당시 여자들은 인간적인 권리뿐만 아니라,인격적인 대접도 받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여자들에게는 배움의 길이 막혀 있었다. 배움이란 일반적으로 율법서 공부를 말하는 것인데,여자들은 율법 공부를 할 수 없었다. 물론 여자들이 회당에서 율법을 들을 수 있었고,남자들이 공부하는 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겠지만,18) 한마디로 배움이란 남자들의 것이지,여자들의 몫이 아니었다(잠언 1,8.10.15; 2,1 참 조).19)

일반적인 경우 여자들에게는 상속권도 재산 소유권도 인정되지 않았다.20) 3) 결혼 생활 안에서남편은 자기 부인에 대하여 주인이며(창세 18,12),여자를 자기 재산의 한 부분으로 보아,남편은 부인의 소유자인 것이다(출애 21,3.22;신명 24,4;2사무11,26;호세 2,18; 요엘 1,8 참조). 부인이 남편의 소유물로 언급된 기록을 구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고(창세 20,3;신명 22,22; 이사54,1;62,4),여자들이 남자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구약은 예사롭게 이야기하고 있다(창세 3,16;24,14이하).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에게 무조건의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보여졌던 것이다.21) 이스라엘의 옛 관습에도 우리와 비슷한 ‘삼종지의’(三從之義)가 있었다.22) 그래서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가정에서도 남편은 그 구성원의 우두 머리이지만, 여자는 그렇지가 못했다.

혼전 순결이 여자들에게는 강력하게 요구되었지만,그것이 남자들에게 적용 되지는 않았다(신명 22,13-21 참조).23) 그리고 일부다처제가 허락된 적도 있었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사실상 존재하지는 않았다. 또한 이혼권은 남자의 권한이었고, 여자에게는 그런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다,24)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의 옛 관습과 풍습은 우리의 전통 유교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남존여비’ 사상을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25)

2。어머니로서의 여자의 위치와 역할

1) 가정 안에서의 어머니

가정과 자녀와의 관계를 떠나서 어머니로서의 여자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가정 안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집안의 어른이며, 집안을 돌볼 의무와 자녀들과 종들에 관해 주인 노릇을 같이 하였다(창세 14 참조).26) 특히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와 똑같은 존경의 대상이고(출에 20,12; 신명 5,1(5; 레위 19,3; 21,2)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아버지를 저주했을 때처럼 똑같은 벌을 받았다(출애 21,17;신명 20,19;21,18-21). 어머니의 중요한 임무는 자녀들에 대한어머니다 운 교육이었는데, 그것 때문에라도 어머니들이 자녀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가치 가 있다는 것이다(잠언 6,20; 집회 7,27 참조),27)

구약성서에서 어머니가 자녀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가끔 볼 수 있다(창세 29,31-34; 30,6; 35,18; 판관 13,24; 1사무 1,20; 4,21; 이사 7,14).28)

이스라엘 왕가(王家)에서 왕의 어머니는 특별한 존경을 받았으며,특별히 "여주인(Hermi)”으로 불리워졌고, 솔로몬 왕은 자신의 어머니께 대한 대단한 존경심을 요구했으며, 유다 왕조 실록에는 왕의 '이름과 함께 그 어머니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1열왕 15,13; 2,19; 14,21; 15, 1참조),29)

2)사회 안에서 어머니

히브리 말로 어머니를 나타내는 단어 "엠”은 일반적으로 존경심이나 중요한 뜻을 나타내는 말과 결합되어 있다. 여자 예언자 데보라를 "이스라엘의 어머니’’ 라고 표현하고 있고,중요한 시(市)를 "어머니 도시”라고 일컫고, 중요한 길 이 룸을 "길의 어머니’’라고 명명하고 있다. 또한 회당에서 어떤 지도자적인 역할 (예를 들어 희사금을 모으거나 회당 건립금을 모으는 것 등)을 하는 여자를 "회 당의 어머니”라고 불렀다.30)

인간 사회에서 최고의 사랑을 표현하는 말은 역시 어머니의 사랑이다(1열왕3, 26-28;창세 21,16 ). 그래서 이사 66,13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과 견주고 있다(다른 예들 : 이사 49,15; 시편 27,10).31)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말로 어머니의 품을 가리키는 말(자궁)은 "라함”인데 이 것은 또한 자비나 자비심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32) 또한 혈족 관계를 따질 때,어머니측으로 계산하고 있다(판관8, 14; 2사무3,3;시편69, 9; 50, 20; 출애 6,23). 33)

이상에서 살펴본 것들을 대략 정리를 해보면,당시 사회 안에서 딸,처녀로서 의 여자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불이익을 당하고 있지만,같은 사회 안에서 어머니로서의 여자는 대우와 존경을 아버지와 똑같이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머니로서의 여자의 임무와 역할은 딸이나 처녀로서의 역할과 임무와는 다르며,가치 기준과 존경도도 판이하다.

여자는 특히 어머니로서의 여자라고 생각할 때, 그들은 가정과 자녀와의 관계 룰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정에서 자녀들로부터 남자인 아 버지와 같은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집회 7,27 이하 참조),

I. 설정된 방향에 대한 제시 2 :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관계

이 대목에서는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서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관계를 다 다루지는 않을 것이며,복음 안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마르코 복음을 중심으로 다음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1)수난사 전에 나타난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관계; 2)수난사 속에사 나타난 그들의 관계; 3)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그 관계들

1. 수난사 전에 나타난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관계

마르코 복음을 따라 살펴보면,예수님의 수난 전에 나타난 그분과 여인들과의 접촉은 예수님께서 여인들의 병을 고쳐 주시는 기적 사화 속에 들어 있다: 그 첫 번째가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신 이야기(1,29-31)이고,두번째는 하혈하는 여인의 병을 고쳐 주신 이야기(5,25-34)이며,세번째로는 앞의 이야기와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5,21-24. 35-43)이며,마지막 으로는 시로페니키아의 여인의 딸을 마귀병에서 낫게 해주신 이야기이다(7,24-30).

위에 언급된 4개의 치유 이야기를 분석해 보면 :

1)치유의 기적을 예수님으로부터 받기 위해 직접적이든지 혹은 간접적이든지 고침을 받기 위한 청이 있다는 것이다.

시몬 장모의 열병의 경우 그 청함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 여인의 사정을 예수님께 알리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분의 능력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전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혈하는 여민을 치유한 경우에는 그 청함이 말로 표현되지 않고,그 여인의 행동으로 드러나고 있다(5,27). 세번째와 네번째의 경우는 그 청함이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 4개의 청함 모두가 그분에 대한 믿음을 그분은 치유하실 수 있다·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병고로부터의 치유를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한다면,여인들의 치유가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그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말은 율법을 모르면(배우지 않으면),구원될 수 없다는 이스라엘의 사고 방식에 따라 생각해 볼 때,그 당시 여인들은 율법을 배우지 못해 구원에서 배제된다고 할 수 있는데,이 관념을 뛰어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여인들의 치유를 통해 그들도 하느님의 구원을 입을 수 있고, 따라서 그들도 사람으로서의 인격적인 대우를 예수님으로부터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병이나 앓는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병을 앓고 있거나 죽음의 경우 그것들이 거짓이 아니라,도움을 청하는 자들의 상황 이 진지하고 절박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치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의 연령에도 제한이 없고(시몬 장모,여인,소녀 그리고 딸),또한 그들이 앓고 있는 병의 가지도 다양하다(열병, 부인병,생명을 위협하는 중병 그리고 마귀병). 이것들을 미루어볼 때, 한편으로는 도움을 청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확실히 가졌다는 것을 말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지니신 능력의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는 남자나 여자 의 구별도 나이의 제한도 없을 뿐만 아니라,어떤 병도 그분은 치유하실 수·있다 는 것인데,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부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지극히 간단하다. 손을 잡아 일으키거나,옷을 만지 거나, 말씀이나 대화를 통하여 그 치유들이 일어난다. 이것은 또한 구약의 다른 치유 사화들과 비교해 볼 때,그분은 다른 예언자들과는 구별되며,그들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을 말한다 하겠다(마르4,40-41 참조).

4)치유의 전제 조건은신앙이다. 매사건마다 믿음을 그 바탕으로 두고 있다. 시몬 장모의 열병을 치유할 때는 그 청하는 자들의 믿음이 간접적으로 암시되었 고, 하혈병을 앓는 부인의 경우는 행동으로 그녀의 믿음이 표현되었는데, 예수 깨서는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살렸다고 말씀하신다(5,34), 그리고 야이로의 딸의 소생에서도 믿음이 선행되고,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의 치유에서는 믿음이 얼 마나 강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5)치유에 대한 확인이 매번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첫번째 치유에서는 시몬 장모가 남자들의 식탁 봉사를 하는 것으로 유대 사회에서는 터부시되는 것이었 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여인들도 사회의 구성 요소에서 배제 되지 않고 있음이 예수님의 처신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겠다. 두번째 치유에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는 말씀으로 믿음에 근거를 둔 새로운 형태의 관계(여자들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이다)가 예수님과 치유된 여인 과의 사이에 형성되고 있다, 세번째 치유에서의 함구령은 잠정적인 것으로 하느 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의 신비는 궁극적으로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속에 서 이해될 때까지 유보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네번째 치유는 그 여인이 집으로 돌아와서 확인함으로써 드러난다, 특히 여기서는 구원의 상징적 표현인 치유가 이방인들에게까지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여자의 치유를 통 해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이 모든 점들을 감안하여 우리는 다음 몇 가지의 결론을 낼 수 있다.

① 예수께서 여자들에 대한 치유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매번 그들의 청에 응하셨다는 사실은, 치유가 예수님의 일반적인 구원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35) 여자들도 ㅡ 남자들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ㅡ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②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 전의 여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다만 치유 사건에서만 드러나고 있다, 그 사건들 안에서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 에서 금기로 되었던 여인의 식탁 봉사를 받으셨고,부정한 여인(피를 흘리기에 부정하다.〈레위15,19~30참조〉)과의 접촉을 통해 예수께서 부정을 타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그 접촉으로 인하여 그 여인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은s 그분은 율법 위 에 서신 분이라는 것을드러내고 있다(레위 12,1이하;15,19이하;35이하), 소녀의 방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과 이방인 여인과 대화를 하시는 것들은 모두 예수님의 여성들에 대한 치유의 열의와 용기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바로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하느님의 구원이 여인들에게도 배제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③여인들에 대한 치유 사건에서도 남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예외없이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고,그들은 그에 상응하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 다. 즉,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믿음의 관계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이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2, 수난사 속의 여인들

수난사 전에 나타난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관계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예수께서 그녀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인데 반해, 수난사 속에서 나타난 그 관계는 오히려 여인들이 그분께 대해 믿음과 신의를 지키는 것으로 드러내고 있다,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한 무명 여인이 그분의 머리에 향유를 바 른 사건(14,3-9)도 그렇고,십자가 밑에 선 여인들을 묘사할 때도 그녀들은 갈릴 래아에서부터 줄곧 그분을 따르며 봉사하였다고 서술한다(15,41). 그리고 예수님 의 매장 순간도 여인들이 지켜 보고 있는데, 이것은 그녀들이 예수님께 대해 끝까지 신의를 지키는 것으로 간주되는데,그녀들의 이 신의를 예수님의 죽음도 막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서는 이 신의가 예수님의 무덤 방문과 부 활 사건으로 이어지는데(16,1-8),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그분의 매장도 그분께 대한 여인들의 신의를 막지 못하고 있고,나아가서는 그 신의가 예수님의 시신에 도유하려는 열망까지 이어진다고 볼 때,이렇게 변함없고 끊일 줄 모르는 그녀들의 예수님께 대한 신의가 그분의 부활 소식을 처음으로 접하는 영광을 차지 하게 되는 것아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여인들의 이런 신의는 어디로부터 유래 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뭐니 뭐니 해도 평소에 예수님의 갈릴래아의 활동을 통하여 그분이 그녀들에게 베푸신 은총에 기인하는 것이고,또한 그녀들의 그분께 대한 열렬한 믿음의 소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코에 의한 예수님의 부활 사건 보고에서(16,1-8)36)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인들이 최초로 부활 사건을 접했다 하더라도,그녀들에게 위임된 부활 소식을 전하는 일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그녀들이 세상 만방에 가서 부활 소식을 전할 임무를 띤 것이 아니라,다만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그들에게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일이 그녀들이 맡은 임무라는 것이다(마르 16,7; 마태 28,8-10; 루가 24,8-12; 요한 20,17-18).

3. 예수님의 가르침 속의 여인들 ‘

이 대목에서는 특별히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드러난 그분의 여인들에 관한 입장 내지는 그분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1)마르코 7,1-23을 중심으로 하여 그분은 여인을 어떤 관점에서 보시는가 하 는 것인데,여기서는 특별히 어머니로서의 여자의 위치가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하겠다. 이 대목의 쟁점은.예수님의 절대자들인바리사이파사람들과율법학자 들이 제기하는 질문 즉,"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자 않고 부정 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7,5) 하는 시비조의 말씀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무엇이 정하고무엇이 부정한지에 대한 질문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시고,오히려 "너희는 그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교묘하게 하느님의 계명 을 어기고 있다”(7,9)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대항하고 계신다. 즉; 그들(질문을 제기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전통(관습)을 고집하다보니,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하느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들 중에서 여러 가지가 있지만, 왜 하필이면 여기서는 그 많은 계명들 중에 십계명의 네번째 계명만 언급되고 있는가? 그것으로 예수께서는 특별히 이 계명의 의미를 새롭게 부각하고,혼히 깨뜨려지는 이 계명의 준수를 바로잡음으로 해서 모든 계명에 대한 준수를 강조하시는 것일까?37) 어쨌든 네 번째 계명의 요지는 부모,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똑같이 존경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어머니의 품위도 아버지와 똑같은 품위를,똑같은 인간 됨됨이를 인정받아 야 한다는 소리다. 이렇게 볼 때,어머니로서의 여자의 인품은 아버지의 그것과 같은 선상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똑같은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보여진다(신명21,18-21 참조).38)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예수님의 입장은 어머니로서의 여자는 아버지로서의 남자와 같은 인격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결혼과 이혼의 대목(10,1-12)에서 예수께서는 이혼의 예외적인 규정을 파기하 시며(10,5),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원초적인 뜻을 새롭게 부각시키신다.39) 예수 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하여(10,5-9),그분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실행되고 있었던 이혼을 금지시키시고, 결혼의 일체성과 불가 해소성을 강조하신다. 이 가르침 안에서 우리는 다음 3가지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①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혼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같은 선상 에 있고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②결혼의 일체성에 있어서 육체적으로 결합하여 한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인데,여기서도 여자는 남자와 같은 인품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③결혼의 불가 해소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남자도 여자 도 이혼을 하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부정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법적인 문제 에 있어서도 남과 여는 똑같은 동등권 (Gleichberechtigung) 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것을 사람(φωττο?)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10,9)라는 말씀으로, 결혼의 불가 해소성의 이유를 밝히시는데,여기서 사람 이란 남자와 여자를 포괄하고 있다.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혼에 대 해 재강조되는 가르침(10,11-12)에서 우리는 분명히 여자의 품위는 남자의 품위와 똑같고 똑같이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부활에 대한 가르침(마르 12,18-27)에서 우리는 또 한번 더 남녀의 같은 품위를 엿볼 수 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파들의 질문은 복음의 한 핵심적인 질문이다. 즉,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사두가이파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은 창조 때 진을다 빼어버린 하느님으로,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인간에게 마지막 말씀까지 다 해버린 법률 제정자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인간들과는 더 이상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 지 않으신다. 이에 반해 예수님과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 서의 하느님은 생명과 사랑이 충만하신 원천이시고, 우리 인간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이 관계는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으며,그분의 능력 또한,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죽음에서 우리 인간을 살려내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부활에 대한 문제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문제이며,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어떤 하느님으로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되고 있다(마르 10,

27 참조),40)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부활 후 사람은 시집가는 일도 없고,장가 드는 일도 없이, 하늘의 천사와 같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더 이상 결혼 이란 인연이 없다는 것이다. 부활 후에는 결혼이란 인연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 그 당시 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그 당시 결혼이 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남자는 여자에 비해 많은 특권을 가졌지만,여자는 결혼이란 굴레 속에서 남자에게 예속되어 있었고,불평등하고 불리한 위치에 놓 여 있었다. 여자들에게는 이혼권도 없었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결혼의 불가 해소성과 이혼의 금지를 가르침으로 인해서 비로소 남녀의 동등권이 싹트기 시 작했다 하더라도·

이런 점들을 감안해 볼 때,그 당시 결혼 생활에서 여자들은 인간의 품위를 지니지 못했고,인격적인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저승에서는 이승의 결혼이란 인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적어도 여자들에게 있어서 는 불평등하고 불리한 상태에서 여자들이 해방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면 부활 후 사람들은 어떤 관계(인연)를 새로이 형성하게 되는 것일까?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미,25). 이 말은 이승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부 활 후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더불어 하느님과 함께 계속해서 산 다고 한다. 이 말은 이승의 모든 인연은 사라졌다 하더라도,하느님과의 인격적 인 관계는 계속 유지된다는 소리이다. 즉 인간에게로 향한 하느님 자신의 증여 (Znwendimg)는 계속되며,이것에는 인간으로서의 남녀의 구별이 없다. 부활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살아 있는 존재로,하느님의 자녀로서,남녀는 모두 같은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며,서로 똑같이 하느님께로 향하여 있게 되는 것이다.

부활 후의 여자는 더 이상 결혼이라는 인연으로 남자에게 매여 있지 않고,다 만 하느님과 계속되는 관계만을 유지하게 되며, 그 점에 있어서는 남자와 같은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하느님 앞에서의 남자의 가치와 여자의 가치는 더 이 상 차이가 없는 것이다.

4) 과부의 헌금(마르12,41-44) 이야기는 독립된 단락으로 이해될 것아 아니라 가 깝게는 앞의 이야기(율법학자들의 소행 : 12,38-40)와멀게는 마르코11-12장전 체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대목을 우리의 관심사인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는 입장에서 관찰한다면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다:

①“아멘”이라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강조하시고자 하는 것은 그 과부의 헌금 행위로 표현된 그녀의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믿음)이다.

②그 여인의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의 말씀이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를 강조하시는 것이라고 볼 때,이 칭찬의 말씀은 결국 마르코 11ㅡ12장의 예루살렘에서의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결론의 말씀으로서,특히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말씀이다(비교:11,20-25).

③이 대목이 예루살렘에서의 그분의 가르침의 마지막일 뿐만 아니라,13장의 종말론적인 대목을 제외하고라면,수난 전의 마지막 말씀이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예수께서 당신 가르침의 결론으로 다시 한번 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강조 하시는 것이라고 여겨지며,한 여인의 행동이 그 본보기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주제를 생각할 때,참으로 의미 심장한 일이다. 즉 당시 사회에서 인격적인 대 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여인 ! 그러나 그녀의 작은 행위가 특히 예수님의 제 자들(남자들)에게 신앙의 표본이 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것은 제자들에게 강한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과(11, 20-25)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며 예수님의 적대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 그리고 율법학자 들의 행동들(11,27-23;12,13-17;12,18-27)과는 잘 대조되고 있다. 행동으로 드러난 여인의 믿음이 ㅡ 하혈병을 앓던 그 여인의 믿음도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5, 27) - 예수님의 제자들 앞에 구체적인 표본으로 등장하고 있다.

④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비교해 본다면,예수님의 제자들 은 그분을 떠났고(w,SO 이하; 14,66-72), 그분의 적대자들은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했 지만(W,64; 15,12 이하), 여인들의 예수님께 대한 추종과 신뢰는 그분의 죽음도 매 장도 넘어서고 있다.

⑤또한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당시로서는 눈에 띄지도 않았던 한 여인의 작은 행위조차도 간과하지 않으시고 거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계 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관심사가 인류 구원이라는 큰 것에만 있는 것 이 아니라,소외되고 눈에 띄지 않고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도 않는 하찮은 일 에도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여자의 인격적 인 품위는 예수님(의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서 인정받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 을 것이다.

Ⅳ. 마르코 복음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관계

1. 중요한요점들

ι)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관계는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을 드러낸다. 여인 들의 치유에서 예수께서는 그녀들과 직접적인 만남을 하시고 행동이나 말씀을 통하여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신다.

예수께서 여인들의 봉사(Dienen)를 받아들이셨다(마르 1, 31; 14, 3-9;15-41)비는 것은 또한 당시 사정으로 미루어 볼때,"이것은 당시의 관습을 깨치거나 뛰어넘는 것으로ㅡ 비로소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과 여인들과의 관계가 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고,금기로 되었던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예수님을 통하여 개선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여인들을 열두 사도들처럼 직접적으로 부르시지는 않았지만, 그녀들의 추종을 적어도 묵인하고 계신다. 그 추종을 통하여 그녀들은 자연스럽게 그분의 가르침도 듣게 되는데, 이것으로 그녀들에게는 금지되었던 배움의 길이 예수님을 통하여 움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비교: 루가 10,38-42; 요한 4,1-42),
2)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이다.

수난 전의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만남은 살펴본 것처럼 치유 사건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그 사건들에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녀들한테는 예수님과 그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요구되고 있고,그녀들은 그 믿음을 응답하고 있다.

수난사 안에서는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직접적으로 믿음을 요구하신 적은 없지만, 그녀들이 예수께 봉사(14,3-9;15,41) 하고 십자가와 죽음을 넘어서까지 그분을 따른 것은 그분께 대한 그녀들의 믿음과 신뢰가 그 바탕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특히 말보다 행동으로 드러난 그녀들의 믿음은 더 한층 가치 있는 것으 로 여겨진다.(마태 7,21-27 참조).

3) 여인들도 하느님의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고통과 고뇌의 원천인 병고 치유가 하느님의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의 상징인 표현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면,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치유는 그녀들도 궁극적으 로는 그 구원에서 결코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하겠다.

4) 여인들을 치유하심,그녀들의 봉사와 추종을 수용하심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예수님의 여인들에 대한 처신은, 당시의 사회 관습이나 인습을 뛰어넘고, 당시의 사회 상징을 개선했다고 볼 수 있는데,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여성들의 인간적인 품위가 인정받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여자와 남자와의 관계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아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다.

5) 예수께로 향한 여인들의 처신,그것은 믿음과 성실한 추종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특히 열두 사도들)뿐만 아니라,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행위이다(굳건한 믿음, 헌신적인 봉사, 불굴의 추종).

6) 여인들이 먼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천사들로부터 접하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임무를 띠게 된 것은 다름아닌,그녀들이 예수님께 보였던 믿 음과봉사와추종에 대한어떤 보답이나 상급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당시 사정 으로는 결코 법적인 증인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던 여인들 ! 그 여인들의 예수님 의 부활에 대한 증언이 초대 교회의 증언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셨다(1고린 15,3)ㅡ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이것은 초대 교회 안에서도 여인들의 가치가 차츰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한 증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7) 여인들이 예수님을 통하여(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적인 가치를 인정받 게 되었고, 또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나아가서는 남자들과 같이 동등한 권리를 찾게 되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들에게는 ㅡ 적어도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직접적인 부르심도 없었고,가르침도 없었고 또한 파견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리 고 그녀들이 또한 부활 소식을 먼저 접하긴 했어도,세상에 그것을 전파할 사명 을 받은 것이 아니라,단지 제자들에게 그것을 전달할 임무만을 띠었다는 사실 이다. 여기에서 그녀들의 역할과임무가 제자들의 것은 구별이 되는데 이 말 은 그녀들이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받은 특별 임무에서 배제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녀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부르심도,제자들과 같은 상세한 가르침도 못 받았기에 그 특별 임무에서 제외된다는 것인데,이것은 비단 여자들뿐만 아니라,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님으로부터의 소명과 추종 그리고 특별한 배움이 없이는 아니 된다는 것이리라.

2. 몇 가지의 소견들

1) 자명한 것은 마르코 복음의 주요 내용이 여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처신과 입 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그분은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다(1,1).42) 그리고 마르코 복음에서 살펴본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관계가 그분과 여인들과의 관계를 모두 다 언급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2)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가 결코 친구관계나 동반자 관계로 보여질 수 없고,다만 말씀을 귀담아듣고 순종하는 관계라면43) 예수님과 여인들과의 관계도 이런 관계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와 그분과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구별이 되는 것은:

①여인들은 특별한 부르심이 없이도 말없이 그분을 따르며 봉사를 했고 그분께 신의를 지켰다는 것이다·

②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인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긍정적인 처신을 통하여 당시 사회의 여자와 남자 간의 불균형적이고 불평등한 관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③예수님을통하여 여인들의 위치와 지위의 향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면,오늘날의 교회와 사회 안에서도 또한 그녀들의 위치와 지위가 계속해서 개선되어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문제가  쉽지는 않다 하더라도,그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 제도 속에서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행한 그 처신은·또한 그 얼 마나 힘들었겠는가? 그 처신은 실로 관습을 벗어나는 것이었고,여상을 위한 어떤 의미로는 혁명적이거나 혁신적인 행동이었다고 아니 할 수 없으리라.

④왜 예수께서는 열두 사도 안에 여자는 하나도 부르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 등의 유사한 질문들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 시대의 여인들은 그들의 부족했던 능력 때문에서가 아니라,당시 통용되었던 사회적인 규범들이 오늘날과 같지 않았기에 그녀들이 공공연하게 활동할 수 없었 다는 사실 때문으로 보여진다.

⑤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문제들 중 또 하나는 여인들도 사도직(사제직)을 위임받을 수 있는가? 또는 그녀들이 오늘의 교회 안에서 어떤 역할과 임무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인데,그것은 예수께서 여자들을 열두 사도들 속에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매여 있을 문제가 아니라고 보여진다. 이런 문제들을 긍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수많은 규정들을,여성 들이 이때까지 남성들에게만 유보되어.왔던 교회의 여러 가지 직분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과 비교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직에는 예언직과 왕직과 사제직〈성사직〉이 있는데,오늘의 교회에서는 이미 상당한 직분을 여성들이 잘 수행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항상 의식해야 할 것은 예수님 자신이 당신 교회의 중심이라는 사실과 그분은 누구로부터도(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밀쳐질 수는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이고(3,35),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그분에 대한 추종은 궁극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마르8,34).


1) ThWNT I 77.
2) 여기에 대한 참고 도서들 : Beer G.,Die soziale und religioese stellung der Frau im israelitischen Altertum, Tuebingen 1919, 1?47; Billerbeck, Kommentar zum NT; Junker H., Eva, in: Lexikon fuer Theologie und Kirche H Sp. 1215; Leipoldt J., Die Frau in der antiken Welt und im Urchristentum, Leipzig 1954, 69?114; Margolius Α., Mutter und Kind im altbiblischen Schriftura, Berlin. 1936,1?11; Schuessler E.,Der vergessene Partner, Duesseldorf 1964, 12?67; Swidljer L., Jesu Begegnung mit Frauen: Jesus als Feminist, in: Menschenrechte fuer die Frau. Moltmann?Wendel E.(Hg), Muenchen 1974,130-146.
3) 유다인들의 ' 아침 기도(Morgenschema),의 내용의 일부: "하느님은찬미받으소서,나 를 이방인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심에 대하여;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나를 여자로 창 조하시지 않으심에 대하여;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나를 무식자로 창조하시지 않으 심에 대하여.......’’ (Tosephat, Ber 7,18; Talmud, PBer. 13b; b Men. 43b).
4) 참조 : Billerbeck, 상게서 I 467; Ν 157; Leipoldt, 상게서 72.
5) 참조 : Billerbeck, 상게서 I 558?562; 율법서에는 모두 613개의 계명이 있는데 그중 365개는 금지형(예 :살인하지 마라)이고 248개는 명령형(예 :부모에게 효도하라)이 다.
6 ) 참조 : Mischna, Middoth 2,5; Josephus, Antiquities, I V 418f; Jewisch war, V. 5par 198f; Billerbeck, 상게서 ffl 33?43.
7) 유다인들의 3대 의무 축일이란:무교절(나중에는.과월절과 합쳐짐), 맥추절 그리고 추수절이다(출애 23,14-17).
8) 여자들뿐만 아니라 아이들(미성년자들)과 종들£ 그 숫자에는 넣지 않았다. 참조 : Mischna, Aboth 3,6; Mischna, Ber 3,3; Nischna, Megilla 4,3; Billerbeck, 상게서 Ν 153; Leipoldt, 상게서 79; Swidler, 상게서 133.
9) 참조: Leipoldt, 상게서 71.114.
10) 참조 : Wagner G. und Wieser Use, Das Bild der Frau in der biblischen Tradition,. US 35(1980) 297; Leipoldt, 상게서 73:Nach der Fraeheren Sitte Konnte die Gattm der Propheten den Titel ihres Mannes haben.
11) 참조: Wagner und Wieser, 상게서 298f; Leipoldt, 상게서 94; Billerbeck, 상게서 1 519f.
12) 당시 여자들의 집안일이란 : 곡식을 빻고,빵을 굽고,빨래하고,음식 만들고 아기 기 르기 그리고 침대 정리 등이었다(참조 : Berr,상게서 Π; Wagner und Wieser, 상게서 296). 바빌론에서도 부인에게 아기가 없을 경우 남자는 다른 여자를 가질 수 있었다 (참조 : Berr,상게서 9?11).
13) 참조 : Mischna, Aboth I 5; Billerbeck, 상게서 I 299-301; Π 438; Ν 1073.
14) 참조 : Philo, Flaccus 89; De specialibus Legibus, ΙΠ 171; Swidler, 상게서 I 34.
15) 참조: Leipoldt, 상게서 85,89
16) 참조 : Billerbeck, 상게서 I 480,300; Leipoldt, 상게서 85.89.
17) 참조 : Mischna, Shab 4,1; Talmud, bB. Κ. 88a; Josephus, Antiquities, F 219; Billerbeck, 상게서 I 217.251.
18) 1세기경의 랍비 Eliezer가 말하기를: "율법서를 여자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불태워버리는 것이 낫다”라고 했다(Jer Sota 19a,8). "자기 딸에게 율법을 가 르치는 자에게 저주 있으라”(Mischna, Sota 3,4).
19) 참조: Beer, 상게서 27.
20) 참조 : Wagner und Wieser, 상게서 298; 그러나 민수 27,1ㅣ11에 의하면 딸도 남자 형 제가 없을 경우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21) 참조 : Berr, 상게서 11.14. 그는 말한다 : "남편은 부인을 위하여 그 부인의 아버지에 게 돈을 지불했다. 그래서 그 부인은 그 남편의 종처럼 취급되었다.” 결혼 지참금에 대해서는 창세 24,59ㅡ61; 1열왕 9,16에도 언급되고 있다.
22) 참조 : Wagner und Wieser, 상게서 298;Swidler,상게서 135:여자는 그의 후견인으로 아 버지, 남편 그리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남편의 형제를 가진다라고 밝힌다.
23) 참조 : Wagner und Wieser, 상게서 298.
24) 참조: Josephus, Antiquities II l,3;Swidler,상게서 135; Billerbeck, 상게서 I 304.315-317; Beer, 상게서 17.

25) "자녀가 남아이면 행복하고 자녀가 여아이면 불행하다”(Talmud, bKid. 82b 비교 : Talmud, bNid. 31b.; Mischna, Terum 15; Swidler, 135; Beer, 12?13.

26) 참조 : Beer, 상게서 14.29; Billerbeck, 상게서 I 574.

27) "아들아,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소홀히 말아라”(잠언 6,20; 집회 서 7,27 이하). 비교: Margolius, 상게서 17.19.

28) 참고 :Beer, 상게서 30; Margolius, 상게서 12ㅡ13.

29) 이스라엘 왕의 어머니는 터어키의 술탄의 어머니와 비교되었다(참조: Beer, 상게서 30; Margolius, 상게서 12-13.
30) 참조 : Margolius, 상게서 12?13; Beer, 상게서 40.

31) 참조 : Margolius, 상게서 14f; Beer, 상게서 33ㅡ34.

32) 참조 : 주 31.

33) 참조 : 주 31.
34) 참조 : 주 3.
35) 잠조 : Gnilka, Das Evangelium nach Markus. Evangelisch?Katholischer Kommenlar zum Neuen Testament 1. 224f; Pesch, Das Markusevangelium. Herders theologischer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1. 280f; Schulz H.,Die Stunde der Botschaft. Eine Einfuehrung in die Theologie der vier Evangelisten, Hamburg 1967,76.
 36) 원 마르코 복음의 끝은 16,8로 끝나고 있으며,16,9 이하는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37) 마르 10,19에는 네째 계명이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한번 더 언급된다(비교 : 7,10). 여 기서는 다른 계명들과 같이 이야기되지만 십계명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맨나중에 언급되는데, 이것으로 그 계명이 다른 계명들보다 더 부각되는 듯이 보인다.
38) 부모,즉 아버지와 어머니인데,구약에서의 인용 말씀을 예수님께서 언급하실 때 (10-12),"아버지나어머니”라고하신다. 이 두말의 연계사가“나,,이다, 즉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선상에서 말해지고 있다.
39) 잠조 : Schnackenburg, Das Evangelium nach Markus Geistliche Schriftlesung I, Duesseldorf 1966, 177f.
40) 참조 : 주2.
41) 잠조: K.Stock, Boten aud dem Mit-Ihm Sein, Das Verhaeltnis zwischen Jesus und den Zwoeif nach Markus. Rom 1975, 193-212.

42) 참조: W.Marxen, Der Evangelist Markus. Studdien Zur Redaktionsgeschichte des Evangeliums. FRLANT NF 49. Goettingen 21959, 87; Stock, 상게서 210.

43) 참조 : Stock, 상게서 206.
44) 잠조 :: Reae Laurentin, Jesus und die Frauen:Eine verkannte Revolution?, in: Concilium (Internationale Zeitschrift fuer theologie), 16. Jg. 1980,275-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