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 교회에서의 여성 1991년 8월호 (제 151호)

초기 한국 교회의 여성의 역할

유 토마스 (한국교회사연구소 보좌 신부)

I. 머리말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결과로 천주교가 중국에 전래되었다. 중국에 전래된 천주교는 17세기부터 조선에 정기적인 연경 사절(燕京 使節)에 의하여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가 유입됨으로써 우리 나라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국내적으로 수세기를 거쳐 내려온 주자학이 사회의 여러 폐단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자 내재적으로 실학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만큼 천주교 사상은 실학자들 사이에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남인들 사이에 천주교는 신앙으로 발전되어 그 세력을 넓힘에 따라 계층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귀의했다. 이들이 천주교에 이끌린 것은 우선 모든 인간은 한결 같이 천주의 자녀라는 평등 사상에 공명한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인이나 상민들이 천주의 자녀로서 양반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천주를 홈승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 평등 사상은 여성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유학의 영향과 그 정신적인 사상 체계가 근간을 이루는 조선 시대에 있어서 남녀 구별과 여성의 남성에 대한 예속이라는 의식 그리고 남녀 불평등정신은 하나의 윤리로서 조선 사회를 지배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여성들에게 있어서 천주교는 안식처였다.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창립되자 많은 여성들이 개종하거나 입교하였고 여기에서 정신적인 안식을 얻으려 했던 양상 속에서 그들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데 눈을 떴으며 참다운 인간 생활까지 인식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헌신하려 하였다.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이나 자녀 교육,포교 활동,특별한 공 .초기 한국 교회의 여성의 역할 동 생활, 자선 사업 덕행의 실천 및 수정(守貞) 생활, 더 나아가 순교까지 그들 의 모든 생활은 일찍이 조선사회 내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조선 후기에 새로운 여성상이 성립되었다.

우리 나라 천주교 여성사의 기원은 대체로 신유 교난(1801)을 전후로 생각해 왔다. 신유 교난 중에 나타난 조선 시대 여성 신도의 활약상이 대단했던 것을 통 해서 분명히 그 이전에도 어떤 사회적인 활약이나 문화 활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한국 천주교 창립 시기의 여성 신도의 존재 여부나,그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 생활에 어떤 형태로 참여했는지, 그들 여성 신도에 대하여,혹은 천주교 수용에 앞장섰던 남인 학자들과 연결되어 교회 발전에 어떤 식으로 협력 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본고에서는 강완숙(골롬바) 및 일반 여성 신도들을 중심 으로 교회사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에서 고찰하겠다.

I. 강완숙(골롬바)의 역할

천주교 전래 초기에 남인 학자들이 그 주류를 이루어 천주교가 전래되어 나간 것처럼 여성에 있어서도 양반층 부녀자가 먼저 신앙 생활에 귀와하게 되었고 점차 중하층 계급의 여성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상류층 부녀자들에게 천주교가 먼저 전파된 것은 중하층 계급의 여성보다는 문화 수준이 높아서 외부 사상에 대 하여 민감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그들이 지니는 생활의 여유와 함께 정신적인 가치 추구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다른 계층의 여성보다는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황사영의 백서(帛書)에 의하면 당시 여성 신도 숫자는 전체 신도 숫자의 3분의 2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여성 신도들의 신분이나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는 달레(Ch. Dallet)의「한국천주교회사」나 관변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를 들 수 있다. 이룰 살펴보면 약 70명의 여성 신도가 나타 나고 있는데,그중에 양반층 부녀자로는 강완숙(골롬바)을 비롯하여 한신애(韓 信愛),그의 딸조혜의(趙惠義),이인(李栖)의처 송씨(宋氏),그의 며느리 ·신씨 (申氏),홍필주(洪弼周)의 일가인 홍정호(洪正浩)의 어머니 이소사(李召史)와 그 의 며느리 즉 이윤하(李潤夏)의 아내이며 이순이(李順伊)의 어머니인 권소사(權 召史),정광수(鄭光受)의 누이동생 순매(順每),조섭(趙變)의 아내 이화(李喜)와 그의 딸 조도애(趙桃愛),이중복(李重龍)의 아내 신소사(申召史) 등 11명에 불과 하다. 그러므로 그 나머지 대부분은 중하층 계급의 여성들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러한 양반층 부녀자들이 천주교를 수용하게 된 것은 유교 사회와 조정에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양반 부녀자들 중에서도 황사영의 백서와 달테의「한국천주교회사」에 보면 강 완숙(골롬바5 1760ㅡ1801)이 당시 남녀 교우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 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먼저 그에 대하여 고찰해 보려고 한다.

전라도 내포 지방의 향반 가문에서 태어난 강완숙은 덕산 고을에 사는 홍지영 (洪芝榮)이라는 상처한 향반에게 시집갔다. 그 사람은 극도로 순박하고 조금도 총명한 데가 없어 강완숙은 그와 화합하여 살기가 매우 힘들었고 많은 근심을 겪게 되었다. 강완숙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고 또 그의 친절과 상냥함으로 꽤 까다로운 성격을 가진 시어머니의 사랑을 얻을수 있었다. 강완숙은 결혼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남편의 친척 바오로라는 사람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말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강완숙은 "천주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일 것이다. 이 종교의 이름은 옳다. 그렇다면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가 책을 청하여 그것을 읽는 중에 그의 마음은 복음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진리를 깨달았다. 강완숙은 그의 영혼의 모 든 능력을 기울여 천주교에 열중하였고,신자 생활의 첫걸음부터 영웅적인 덕행을 갈망하였다. 그녀는 가까운 집안부터 전교를 시작하여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 들인 홍필주(洪弼周)를 개종시켰고 친정 부모는 물론 이웃 동네까지 전교 활동 을 하였다. 후에 그녀가 홍필주와 시어머니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데에는 남편 홍지영에 대한 실망과 함께 신앙 생활을 좀더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상경했 다는 설과 천주교 박해에 놀란 홍지영이 강완숙이 권하는 천주교를 믿을 마음이 없어서 그녀를 내보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 밝혀지 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강완숙이 신앙 문제로 집을 나온 것만은 믿을 수 있다 하겠다. 강완숙이 집을 나올 때 시어머니와 전처와 아들이 따라온 것만 보아도 가출한 것은 아니었다.

강완숙이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녀와 적극적인 신앙생활은 곧 주문모 신부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성세를 받고 여회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 다. 그후 조정으로부터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그는 지방과 서울로 피신해야 했고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강완숙은 조정으로부터는 사학 죄인이요, 유교적인 사회에서는 외간 남자인 주문모 신부를 자기 집 장작 광 속에 숨겨 주었다.

이미 천주교는 조정으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박해를 받았지만 원래 양반 부녀 자는 역모의 죄만 없으면 그 책임을 묻지 않았던 조선의 여성에 대한 관대한 법례에 따라 천주교 부녀자들은 남성 신도보다는 관헌의 눈을 피해 자유로이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 역시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부녀자들을 앞세 워 전교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써 전교의 목적을 가장 크게 달성한 인물이 바로 강완숙이었다.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고 또 강완숙이 여회장 직책을 맡 고 있었으므로 강완숙의 집은 천주교 신앙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사학징의」 에 나타난 것을 보면 강완숙의 집에서는 매월 6차례 내지는 10여 차례에 걸쳐서 미사와 송경(誦經)이 있었고 미사가 있는 날에는 각처에서 남녀 교우가 모여 들 었다고 한다. 물론 주문모 신부가 초기 천주교회의 지도급 인물이었던 정약종, 황사영,김이우(金履禹),정광수(鄭光受) 등의 집에서도 미사와 교리 강습을 자 주 가졌고 수차에 걸쳐 지방 순회도 했다고는 하지만 그 자신 관헌의 눈을 피해 야했으므로 강완숙의 집이 주문모 신부에게는가장 부담이 적었을 것이다.

강완숙은 그녀 자신이 양반집 부녀자였고 또 천주교 신도들의 집회가 자주 열림으로써 그 당시 가장 활발하게 전교 활동을 했다. 여성 신도 가운데 양반 집 부녀자들은 거의 모두가강완숙의 가르침을받았고폐궁내인(廢宮內λ)인강경 복(姜景福),서경의(徐景儀),폐궁내인이었던 문영인(文榮仁)에게도 입교의 도움을 주었다. 또 불우하고 의지할 데 없는 여인들을 집에 데려와 교리를 가르쳤 다. 강완숙의 집에서 삯바느질을 하던 과부 김순아(金順伊)와 김월임(金月任), 하녀로있던소명(小明)과 정임(丁任),그리고머슴으로있던김흥년(金興年)등 은 다 이러한 인연으로 입교하였다. 이밖에도 권생원(權生員)의 비자(婢子)였던 복점(福占),선혜청(宣惠廳)의 사고직(私庫直)인 김춘경(金春景)의 아내 유덕이 (柳德伊),과부 이얼인아지(李空仁阿只)에게도 전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성 신도 20여 명이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여기에도 강완숙의 주선이 컸을 것으로 생각한다.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에 보면 강완숙이 "처녀들을 많이 모아서 단단히 교육시켰다”라고 한 사실에 비추어 처녀에게도 천주교 교리를 가르친 것 같다. 당 시 천주교는 전교의 대중을 인삭한 종교로서 교리서가 모두 한글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완숙이 교리를 가르칠 때 한글의 보급도 상당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도 강완숙의 아들이었던 홍필주의 공술(洪述)에 보면 "각처에 남녀 교우가 체결(蹄結)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습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여성 신도뿐만 아니라 남성 신도에게도 교리를 가르친 것 같다. 당시 교회의 사무 처리나 전교를 위하여 수준높은 남인 학자였던 정약용, 황사영, 권철신,오석충, 이가환 등과 서찰이나 인편으로 자주 왕래하였으니 그녀의 교양은 이러한 사대 부들과 교류하는 데 있어서도 아무런 손색이 없었던 것 같다. 그녀의 높은 지식과 설득력 있는 화술은 독실한 신앙심과 조화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어 여성은 물론 남성 신도에게도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강완숙의 전교의 적극성과 대담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사도 세자의 서제(庶弟)였던 이인의 아들 잠(堪)이 역모를 꾀했다는 죄로 사형을 당하 고 이인은 강화도로 유배를 간 뒤 폐궁에는 이인의 처 송씨와 그 며느리 신씨가 있었는데 반역을 도모한 집안이라 하여 모든 사람이 방문을 극히 삼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완숙은 수차 이들을 방문하여 천주교 신도가 되게 함은 물론 주문 모 신부의 방문까지도 주선하였다.

1801년5월강완숙은 그의 집안식구와 함께 체포되어 천주교인 중 가장 간악한 여인으로 간주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하여 포청에서도 다른 신도보다 심한 형벌을 받았으며 같이 잡혀 온 홍필주로 하여금 순교하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다고 한다, 더욱이 사형장에 가서도 관리에게 "법에는 사형을 받아야 하는 자들의 옷을 벗기라고 되어 있으나 여자를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 당치 않으니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원한다고 알리시오”라고 하여 조선의 형법 자체가 유교적인 인습을 존중하면서도 많은 사람 앞에서 여인의 옷을 벗기는 이율 배반적인 처사에 대하여 항의를 하여 다시 한번 그녀의 대담성을 보여 주었다.

황사영이나 달레는 전래 초기에‘4천여 명이었던 신자수가 이때 와서 일만여 명이 된 데 대해 그 공적을 강완숙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나「사학징의」에는 황 사영을 비롯하여 이용겸,장광수의 전교 공적도 강완숙 못지않게 컸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황사영의 백서나 달레가 강완숙의 활동을 과대 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제도적으로나 관 습적으로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유교 사회의 억압 밑에서 폐쇄적인 여성상을 깨뜨리고 활동한 강완숙의 역할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러 한 그의 눈부신 활동에는 그녀가 유교 사회에서 그 신분이 양반이었다고 하는 데 힘입은 바 크지만 그녀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종교를 위하여 남편과 헤어졌다 는 것은 유교적인 봉건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었던 가부장제라든지 삼종지도 관념에의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간 남자인 주문모 신부를 집안에 숨겨 주었다든지,집안에서 한달에 6차례 내지는 10차례의 미사와 송경을 남자와 했다는 것 그리고 남인 사 대부들과 교류를 가졌던 사실 등은 그 당시 유교사회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반봉건적 여성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강완숙은 남존여비 사상이나 남녀 칠세 부동석과 같은 당시 인습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고 그 자신뿐만 아니 라 처녀들을 모아 천주교 교리를 가르침으로 해서 반 유교주의적인 사상을 그들 에게 심어 주었다. 그리고는 때때로 가난한 사람들을 거두어 돌보아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박애 사상을 펴나갔으며 전교에 있어서도 남녀 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 음으로써 천주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것을 실천하였다. 강완숙은 그 자신 전 통 사회의 와중에 있었으면서도 종교적인 신념을 위하여 유교 사회로부터 오는 모든 억압을 거부함으로써 활동의 자유로움을 얻었던 획기적인 여성이었다.

I. 일반 여성 신자들의 역할

강완숙의 역할을 통해서 일반 여성 신자들이 천주교에 귀의했는데 그들은 한신애(韓信愛)를 비롯한 과부들과 천주께 대한 신심의 발로 중 가장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 수정(守貞)의 삶을 갈구한 동정녀들이었다. 그리고 독특한 예로써 형식적인 부부로 가장하여 수정 생활(守貞生活)을 도모했던 동정 부부도 있었다.

ι) 한신애 
 그녀는 강완숙과 같이 양반 출신으로 과부였고 강완숙 다음으로 전교에 있어 서 활약이 컸던 여성이었다. 그녀가 다른 여성 신자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 었던것은우선 양반 출신이어서 경제적인여유가있었고자녀로는조혜의라는 딸뿐이어서 가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강완숙과는 그녀로부터 종교적인 지도를 받기도 하였지만 같은 양반 계층이었고,남편과 이별했다는 의 미에서 같은 처지였으므로 아주 친숙한 사이몄던 것으로 생각된다.「사학징의」 에 보면 한신애가 강완숙 집에 수십일씩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는 필경 강완숙과, 같이 전교를 하거나 교회의 사무적인 일들을 처리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녀는 중인인 이합규(李竭逵)와 양반인 정광수로 하여금자기네 집 비복들에게 전교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그녀 자신도 강완숙과 자기네 잡을 왕래하며 심부름 을 했던 김연이(金連伊)와 참판 이중복(李重龍)의 아내였던 과부 신소사에게 전 교하여 그들을 교회로 인도한 것으로 미루어 강완숙처럼 남녀 유별이나 계급의 귀천 문제를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녀의 집과 강완숙의 집을 오가며 심부름을 하던 정복혜(鄭福惠)가 각처에서 천주교 서적과 성물들을 거두어 주자,이것들을 맡아서 감추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관헌의 감시가 비교적 양반 부녀자에게는 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2) 과부들

한신애 외에도 당시 과부들은 신앙 생활의 자유를 위하여 시가를 나와 친정에 있거나 혹은 그들끼리 함께 모여 공동 생활을 하기도하였다. 예를들어 청상과부 김회인(金喜仁)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군기사(軍器寺)라는 절 앞에 집을 마련 하고 시숙모 이흥임(李興任)과 그의 일가인 이얼인아지(李g仁阿只) 등과 같이 살았으며 손만호(孫萬戶)의 집에서도 7~8명의 과부들이 모여 살았다. 앞서 잠 깐 언급된 바 있는 김연이와 정복혜 · 복점이도 역시 과부로서 '사학의 매파’로 불리어졌다. 김연이와 정복헤는 하층 계급의 여인으로 나이가 많았고 교회를 위하여 전교나 사무를 볼 정도의 교양도 지니지 못하였기 때문에 강완숙과 남녀 교우들 집을 다니며 교회의 일을 연락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김연이는 강 완숙에게 폐궁을 소개하였고,한때 황사영을 숨겨 주기도 하였다. 복점이는 강완숙의 집과 당시 유명한 남인 사대부 집을 다니며 중요한 연락을 도맡아 처리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과부들은 시가에서 시부모들을 모시며 살아야 하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으며 개중에는 사명감을 가지고 비록 보잘것없는 신분이었지만 교회의 일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돕기도 하였다.

이상으로 대강 과부들의 활동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특기할 것은 그들 대부 분이 남편을 잃었다는 실망감과 사회로부터 주인 없이 사는 여인으로 개가도 인 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일종의 수도회와 같은 소규모의 모임(聚會)을 구성하여 같이 수절하면서 신앙 생활을 영위했었다는 사실이다.

3) 동정녀一수정 생활

동정녀의 활동을 살펴보면 우선 가장 활발한 역할을 하였던 윤점헤를 들지 않 을 수 없다. 양근 고을의 한 향반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천주교를 믿게 되면 서부터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가족들이 반대할 것을 알고는 남장으로 변복 하여 삼촌들 집으로 피신하였다. 후에 집으로 돌아오자 가족이나 친척들이 결혼 을 하라고 권고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버티다가 1795년 부친이 사망하자,어머 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 왔다가 때마침 삼촌이었던 윤유일(尹有ㅡ)이 주문모 신부를 인도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자 그녀도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마저 사망한 후에는 강완숙의 집으로 들어가 강완숙이 데려온 처녀들을 헌신적으로 교육시켜 많은 신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당시 동정을 지키던 처녀들로는 윤점혜 외에도 양반으로서 황사영과 함께 가장 존경을 받았고 전교의 공이 컸던 정광수의 누이동생 정순매(鄭順每),중인으 로서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이합규의 누이동생 이득임(李得任),열심한 과 부였던 이얼인아지의 딸 김경애(金景愛),양반으로서 독실한 신자였던 조섭(趙 變)의 딸 조도애(趙桃愛), 박성염(朴成艶) 등이었다. 이들은 거의 다 집안이 독 실한 천주교 신자여서 그들이 수정(守貞)을 하는 데 가정으로부터는 별 커다란 반대는 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그들의 동정이 비난의 대상 이 되었기 때문에 윤점헤, 정순매,김경애는 허가(許哥)의 아내라고 하였고 조도애는 오가(吳哥)의 아내라고 하였으며 박성염은 스스로 과부라고 하는 등 모두 그들의 신분을 감추었다.

동정녀는 유교 사상이 가장 뿌리 깊었던 궁의 내인 가운데에서도 그 출현을 보았다. 신궁 내인이었던 문영인(文榮仁)은 중인 계급의 양가에서 태어났다. 7 세 때 궁녀로 뽑혀 들어갔는데 가끔 출궁을 할 때마다 그의 어머니로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들었지만 궁궐의 생활이 신앙의 자유가 없고 때로는 미신 행위에 참석해야 했으므로 입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후에 병으로 출궁을 한 뒤에는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문영인 이외에도 강경복(姜景福)과 서경의(徐景儀) 도 동정을 지킨 내인들이었다.

이렇게 동정을 지킨 여성들은 사회 각 계층에 고루 퍼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 들의 신앙 생활을 이해해 줄 남성도 드물었지만 결혼함으로써 그들의 신앙 생활 이 침해받을 것이 두려워 스스로 동정을 지켰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깊은 이유 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천주에 대한 신심의 발로요,외적 표시였다. 이것은 일 찍이 이마두(利瑪寶,Matteo Rica)가 천주교 교사(敎士)들의 수정은 천신이신 예 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덕을 본받아 따르가 위함이라 했고,총유아(寵迪我,De Pantoja)는 정덕 가운데 지고의 가치를 수정에 둠으로써 다분히 성(性)의 문제를 죄악시하려는 천주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외에도 그들은 남녀 칠세 부동석과 같은 유교적인 관습에 의하여 자연스러운 이성 교제가 형성될 수 없었기 때문에 쉽게 동정의 길을 택할 수 있었다고 생각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금욕적 동정관에 입각한 수정 사상은 안정복(安鼎福)의 주장대 로 유교 사상의 주류를 형성하는 효 사상이나 후사 중시(後嗣重視) 사상을 근본 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어서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문까지 영향을 받을 정도였으며 가부장 사상에 의하여 모든 경제 생활을 남편에게 의지해야 했던 당시로서는 독신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경제적인 이유에서 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4) 동정부부ㅡ이순이(누갈다)

이 동정 부부라는 것은 유교 사회의, 수정관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기 위하여 결혼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내용면에서 실제로는 동정을 지킨 수정 사상의 특 이한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동정을 지킨 대표적 인물이 이순이(李順伊,누 갈다)이다. 그녀는「천주실의」를 최초로 우리 나라에 소개한 이수광의 자손인 이윤하를 아버지로 두고 권씨안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천주교를 믿게 된 후 동정을 지키고자 결심했으나 당시 유교적인 관념으로는 지체 높은 사대부 가문 의 처녀로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집안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사회적인 비 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순이가 동정을 지키려는 자기의 신념을 주문모 신부에게 밝히자, 주문모 신부는 마침 전라도 전주 부근의 향반인 유항검의 맏 아들 유중철(柳重哲)이 역시 동정을 지키려는 청년임을 알고 그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유중철은 향반 계급에 지나지 않아 서울에도 지체 높은 사대부 가문이 었던 이순이와의 결혼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주문모 신부의 주선에 대해 과부였던 이순이의 어머니 권씨는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곧 동의했으나 친척 들은 유중철의 집안의 격이 너무 낮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권씨는 자기 처지 가 어렵기 때문에 부잣집 사위를 얻는 것이 이롭다는 구실을 내세워 친척들을 설득시켰다. 1797년 이들의 혼배가 거행됐고 주문모 신부는 혼배라는 외관 속에 이 두 남녀를 결합시켜 그들이 남매로 지낼 것을 허락하였다.

18이년 신유 박해의 파문은 전라도 지방까지 파급되어 이순이의 남편 유중철 과 그녀의 시아버지인 유항검이 봄에 체포되었고 이어
9월에는 이순이를 위시하여 나머지 집안 식구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이순이는 자신의 체포 소식을 적어 친정 식구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그 가운데 동정을 지키는 어려움에 대해서 "남편과 9시에 함께 있게 되었는데 10시에는 우리들이 동정을 지킬 것을 맹세하 고 우리는 4년 동안 남매처럼 지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10번 가량 유혹을 좀 받아 하마터면 모든 것을 잃을 뻔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간구한 보혈의 공으로 마귀의 계략을 피했습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들은 처음에 신부 앞 에서 서약한 대로 육정적인 것을 배제하고 종교적인 신념에 의하여 공동의 목표인 동정의 보존을 위해서 노력한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서는 양가가모두 독실한신도로서 그들의 생활에 대해적극적인이해내지는 협조가 있기는 했지만 유교 사회에서 볼 때 양가의 가족과 그들이 맏아들 맏며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효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시되는 후사 사상과 당시 계급 적 내혼제(內婚制)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부부 생활에 있어서도 종교적인 목표 를 위하여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였다. 이는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하는 가부장적인 유교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글에서 이순이의 숙원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제 생각과 애정은 같은 도시에 다른 옥에 있는 제 남편에게 끊임없이 향했습니다 "··· 저희들이 집과 재산을 관리할 날이 오면 그것을 셋이나 네 몫으로 나누어 한 몫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아주 더 큰 한 몫은 동생들에게 주어 부모님을 모실 수 있도록 하고 또 세월이 더 좋게 되면 저희들은 서로 갈라져 그 나머지 재산을 가지고 각기 따로 살기로 약속했습니다”라고 하여 천주교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나타냈으며,그들이 비록 후사 사상은 부정했어도 부모에 대한 효만은 중요시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또 동정이 허락되는 시기가 오면 헤어져 살기로 약속함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아가페적인 사랑을 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이들보다 앞서 동정을 지킨 여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이순이와 유중철의 결혼은 수백년 내려온 유교적인 사회 속에서 천주교가 그 교리를 펴나가는 데 있어서 기존 사회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외적으로 유교적인 예식을 허락한 예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들의 결혼은 천주교가 수정에 대하여 타협적인 방법을 모색한 한 실례였다.

이상 초기 천주교회의 역할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유한당(柳閑堂) 권씨의 활 동은 제외시켰는데 그것은 그녀의 글이라는 언행실록(言行實錄)이 서지학적(書 誌學的)으로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미공개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천주교는 신앙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유교 사회의 축처 제도(蓄 妻制度)룰 부정함으로써 일부일처제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여성 들과는 달리 보통 일반 여신자들은 천주교를 믿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믿었다든지,병이 낫는다고 하여 믿었다고 함으로써 아직까지 그 신앙의 차원이 현 세 구복적인 경향에서 탈피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남녀 혼거(混居)에 있어서 도「사학징의」나 달레의「한국천주교희사」에 보면 여신자만의 교리회나 기도회가 있었고 특히「사학징의」에는 남성 신자는 방 안에서 여성 신자는 창 밖에서 미사를 드렸다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유교 사회의 인습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한편 전교에 있어서 강완숙,황사영, 이재창,정약용 등은 상당 히 개방적인 전교를 한 것 같지만,실제에 있어서는 전교를 받은 사람들 거의가 친척 관계이거나 한집의 가속인 경우가 많아 아직도 유교 사회의 잔재를 무너뜨리기에 천주교의 영향력은 미약한 것이었다.

또 맺음말. 

천주교가우리 나라에 전래될 당시인 조선 후기에 있어서 중심 사상이며 철학인 주자학(朱子學)은 형식과 아론에 치우쳐 철학적으로도 번쇄한 공리론(空理 論)으로,도리어 사변의 후퇴를 초래하였다. 이에 염증을 느낀 학자들은 사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동경해 마지 않았다.

종교와 도덕면에서 볼 때, 비록 주자학도 실천적인 인생 철학에 중점을 두고 있었을지라도 지성인에게 있어서 종교를 대신할 수 있을 만큼 종교적 인식의 대변자 구실은 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새로 전래된 천주교는 종교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종교관을 명백히 제시하였으니,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격적인 유일신의 존재와 상선벌악의 내세 사상(來世思想)이었다ㅡ 천주교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 진리가 지니는 힘에 있었다. 인간 정신을 늘 고민케 하는, 예컨대 신의 존재,영혼의 불멸, 상선벌악,인생의 목적,정의 등 커다란 질문에 만족할 만한 해답이 주어질수록 그와 같은 진리의 힘은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남인 학자들은 이렇게 윤리적으로 유용한 철학을 천주교에서 발견했던 것이 다.

더욱이 천당이라는 후세 영복에 대한 천주교의 가르침은 심각한 현실고로 인하여 또는 정권에서 격리된 까닭에 쉽게 염세적이 되고 현실 도피적이 되어버린 서민이나 남인 학자들에게 큰 위안이며 미래의 희망을 주는 행복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천주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주장 또한 당시 사회적 으로나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분명히 천주교를 수용케 하는 중 대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유교를 양반 계급의 독점물로 삼고 있던 당시의 위정 자들에게 만인의 평등을 내세워 계급 차별이 부당하다는 천주교의 외침은 봉건 주의적 계급주의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고 동사에 그것이 피압박 계급에게는 해방을 부르젖을 수 있는 구실과 계기가 되었을 것이디-.

한편 조선 후기의 심각한 사회악과 사회적 모순의 확대와 정신적 공허 속에서 서학서가 기호 지방의 남인계 학자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일으키게 된 것은 그들 이 한편으로는 종래의 주자학적인 사회 규범에 대하여 크게 회의를 품게 되어 어떤 제도적인 개편을 통해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해야 하리라 생각했고,더 나아가서 그대신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어떠한 새로운 생활 이념을 희구하게 된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 때부터 천주교는 남인 학자들 사이에 하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여 비교적 하층 계급의 여성보다는 외래문화 접촉에 유리했던 상층 계급의 여성들로부터 천주교 신자가 생기기 시작하여 점차 여러 계 층의 여성들에게도 전파되게 되었다· 당시 남녀 신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강완숙은 그의 신분이 양반 부녀자임에도 불구하고 남녀 노소, 상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교 활동을 벌였으며,집안에서의 남녀 천주교 신자 들의 잦은 집회,남인 사대부와의 왕래 등 종교를 위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강 완숙은 제도적으로나 관습적으로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억압 밑에서도 폐쇄적인 여성상을 깨뜨리고 여필종부,남녀 칠세 부동석,가부장 사상 등 유교 사회의 제사상을 부정하면서 그 활동에 자유로움을 얻었던 획기적인 여성이었 다.

강완숙 외에 일련의 과부들도 자유로운 종교 생활을 위해서 친정으로 가거나 혹은 그들끼리 모여 수도 생활을 함으로써 시가에서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전통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과부에게 있어서 가장 큰 미덕은 수절 (守節)이었고 또 재가(再嫁)가 인정되지 않음으로 해서 종교 생활에 더욱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독실한 가정에서는 동정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수정 을 하는 데 있어서 가정으로부터의 박해는 별로 받지 않았지만 처녀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았던 유교 사회에서 그들 자신은 물론 가문에까지 영향을 받을 것이 두려워 허가,오가의 아내 또는 과부라고 그들의 신분을 감추었다. 그들이 사회 적인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쉽게 동정의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성장 과정 에서 이성에 대해 폐쇄적인 생활을 했고 정덕 가운데 지고의 가치를 동정에 두 는 천주교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동정은 유교 사상에 주류를 형성하는 효 사상이나 후사 중시 사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어서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다음은 사대부 가문의 딸로서 외부로부터의 비난 때문에 결혼이란 외관(外觀) 속에 부부 함께 동정을 지킨 아순이의 예는 그것이 천주교에 있어서 지도자였던 주문모 신부에 의하여 허락된 것이기 때문에 초기 천주교가 그 사상을 펴나가는 데 있어서 유교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타협적인 방법을 모색한 실례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결혼은 그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가문의 종속 즉 후 사 사상의 거부는 물론 서울 사대부 가문의 딸이 향반 가문의 아들과 결혼함으로써 당시 계급적 내혼제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더욱이 부부 서로 종교적인 목 표를 위하여 인격적으로 대함으로써 여필종부,삼종지도와 같은 관념으로부터 탈피하였다·

특히 천주교는 결혼에 근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한 뒤 제 7대 조선교구장 백(Blanc) 주교에 의하여 프랑스에 본부를 둔 성 바오로 수녀회 가 1888년 7월 소치되어 조선 처녀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동정녀에 대해서도 제도 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는 당시 교리서가 모두 한글로 되어 있어서 한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축첩 제도를 부정함으로써 일부일처 제도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 여성들의 역할은 수백년 내려온 유교 사회의 관습을 완전히 탈피하기에는 너무 미약한 움직임이었으며,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해나가 면서도 여전히 당시의 유교적인 분위기와 그 윤리,도덕적인 사고를 천주교 신 앙 생활에 적용시키고 있었다.

〔참고문헌〕

1) 최석우,한국천주교회의 역사,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출판부,1982. 7ㅣ105면.

2) 김옥희,한국천주교여성사(I),마산:한국인문과학원, 1983. 9ㅡ253면.

3) Dallet. Ch., 한국천주교회사(上), 최석우·안응렬(역주) 왜관:분도출판사, 1874.

4) 최석우, "사학징의를통해서 본초기 천주교회”,「교회사연구」제2집. 서울:서광사, 3-48.

5) 조광, "신유박해의 분석적 고찰”「교회사연구」제1집. 서울 : 대한공론사,1977. 41?74 면.

6) 안화숙,"조선후기의 천주교 여성활동과 여성관의 발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1979.

7) 오지은,"천주교 교우촌 공동체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