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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호 (제 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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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시기
1990년 12월호 (제 143호)
대림 시기 1. 명 칭 우리말의 엄하기를 기다린다는 뜻의 대림(待臨)은 그리스어의 ‘에피파네이...

가톨릭 종합대학 안에서의 신학생 교육 - 정의채 신부의 시노드 발표 내용과 해설
1990년 12월호 (제 143호)
I. 머리말 제8차 시노드가 금년 9월 30일부터 10월 28일까지 로마에서 열렸다. 그 주제는 ‘현대 상황...

나의 고백
1990년 12월호 (제 143호)
  허 까리따스(Caritas Hopfenzitz) 수녀님은 1913년 독일에서 출생하셨으며 1937년 포교 성 베네...

생활 속의 성인
1990년 12월호 (제 143호)
신부님. 산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여느 날과는 달리 남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오후 3시쯤에 터벅터벅 혼...

사회의 성화를 위한 교회 언론의 역할
1990년 12월호 (제 143호)
대담 : 고국상 (가톨릭신문 미주지사편집국장) 이태호 (평화방송 해설위원) 최상완 (경향신문 조사연구실...

이 시대의거룩함 - 순결한 창녀인 교회
1990년 12월호 (제 143호)
  라합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창녀이다(여호 2장). 여호수아가 요르단강 건너편을 정복하기 위하여 ...

교회와 사회의 상호성
1990년 12월호 (제 143호)
I. 시작하는 말 모든 공동체의 근본적 기초는 정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 즉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

사회 성화를 위한 교회의 사명
1990년 12월호 (제 143호)
‘사회 성화(聖化)를 위한 교회의 사명’이 주어진 주제이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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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사회의 성화 1990년 12월호 (제 143호)

사회 성화를 위한 교회의 사명

심상태 (가톨릭대학교수시신부. 교의신학)

‘사회 성화(聖化)를 위한 교회의 사명’이 주어진 주제이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래 역사적 현실 사회와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사명에 관한 논의나 연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현실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역할과 관련하여 견해를 달리하는 상이한 입장들이 교회 안에서 공존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여기서는 현금 우리 민족 사회의 구원 내지 성화 필요성에 직면하여 교회가 수행해야 할 사명의 성격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천명된 교회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구명하고자 한다. 먼저 현실 세계 안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성화 사명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 교회 성성(聖性)의 실상을 구명하고 나서 성화를 필요로 하는 우리 사회의 상황을 서술하며 요인을 규명한 뒤에, 우리 사회의 성화를 위해서 수행해야 하는 교회의 과업의 내용을 간략하게 규정하고자 한다.


I. 교회의 성성과 사회적 사명


교회가 역사적 현실 세계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성화 사명(聖化 使命)의 본질을 구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먼저 교회의 성성의 실상을 파악하고, 다음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사회적 사명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한다.


1. 로마가톨릭 교회(Ecclesia Romana Catholica)는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는 자의식을 초기부터 지녀오고 있다.1) 그래서 신자들은 가톨릭교회를 두고 ‘거룩한 교회’(sancta Eccleaa),‘성교회’(聖敎會)라고 흔히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첫 신앙 고백 정식(定式)으로서의 ‘사도 신경’(使徒信經)은 “성신을 믿으며,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을 담고 있다. ‘거룩하다’라는 용어가 교회에 붙여진 가장 오래된 속성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실 교회는 보편적이고 사도 전래적(使徒 傳來的)이라고 불리어 지기 훨씬 이전부터 거룩하다고 일컬어져 왔다.


‘교회’를 지칭하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 ’라는 말은 본시 ‘호출되어 소집된 자들의 회중(會衆)’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 이 말이 ‘하느님 백성의 모임' 즉, 하느님에 의해 소집된 백성들의 회중의 의미로 사용되면서 ’교회’를 지칭하는 말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교회에 속하는 신자들은 “하나로 불려 졌고”(에페 41.4) 더욱 정확히 ‘부르심에 의해서 거룩한 자’들이라 는 자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로마1,7; 1 고린 1,2).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성도’(聖徒)들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이 명칭은 본시 예루살렘의 초기 공동체가 자신을 지칭한 말이었다(로마15,25-31; 1고란1,2; 2고린 8,4; 9,1-12). 그런데 이 명칭 이 이방인 출신의 공동체에도 수용된 것이다. 바오로에 있어서 ‘성도들’이란 교회 공동체와 동의어였다(로마I,7; 16,15; 1고린1,2; 2고린1,1; 13,12; 필립 1,1 참조). 요컨대, 성성(聖性)은 이미 성도로 불린 이들을 뜻하는 ‘교회’라는 말 자체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 교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강조되는 특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靈)으로서 교회에 보내진 성령을 통해서 거룩하게 된다. 하느님은 그의 성령을 세상에 보내 주셨고, 이 성령 안에서 거룩한 집회를 구성하고 새로 성화된 자를 구성하는 인간을 부르신 것이다. “교회는 결함 없이 거룩하다. 성부와 성신과 더불어 ‘홀로 거룩하시다’고 칭송받으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 신부(新婦)로 삼아 사랑하셨고 그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으며(에페 9,25-28),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을 삼으셨고 성신의 특은으로 가득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3) 교회의 성성(聖性)에 관해서 우리가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아래의 근본적인 진리를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 교회 내에 어떤 성성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한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 교회에 있어서 성성이란 무엇보다도 성부와 성령과 함께 홀로 거룩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를 역사 속에서 재현시키는 가운데에서 실현된다.


교회가 사회를 성화해야 하는 사명은 자신의 성성(聖性)이 무엇보다도 먼저 성덕의 선물이라는 사실에서부터 기인한다. 교회의 성성은 성령이 신자들 안에 서 결실케 해주시는 은총의 열매로 인하여 끊임없이 신자들이 사회를 감화시키는 생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4)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든 제자들이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요청하셨다.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완전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마태 9,49). 그는 신자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마르 12,30),당신이 사람들을 사랑하셨음같이 서로 사랑하도록(요한 I3,34; 15,12) 내적으로 움직여 주실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 주신 것이다.


교회의 성성의 본질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 또한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신다”(1 요한4,W).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다(로마 5,5). 그러므로 가장 필요한 첫째 은혜는 사랑이며 이 사랑으로써 우리는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사랑을 생활함으로써 선물로 받은 성성을 보존하여 완성해 나가야 하는 아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보인의 성성은 사회 현실 속에서 인간 가족 모두가 갈망하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평화로운 세계 건설의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스스로 그 전까지 속해 있던 이교적 사회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로 자신을 이해하였다.5) 즉 교회는 초기부터 자 신은 일반 사회와는 구별되는 대조 사회(對照社會)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의식은 예컨대 에페 5,8에서 발견된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구별 되고,구별 되어야 하는 두 처지가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다. ‘전’과 ‘지금’이 바로 그것이다. 전에는 신자들이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빛'이다. 어둠이란 아교 사회에서의 실존을 나타내는 비유이며, 빛은 교회 안에서의 현실존을 나타내는 비유이다. 그런데 이 말씀 중 직설법으로 이루어진 단정에 이어서 명령법이 따름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원칙적으로 그 자체로서 빛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빛을 성취해 야만 참 빛이 된다는 빛의 역할에 대한 강조 말씀이다.


여기서 뿐만 아니라 ‘전’과 ‘지금’의 실존을 구별하는 이와 비슷한 진술 구조들은 신약의 서한들에서 자주 발견된다(골로3,8-14; 디도33-5).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개인의 덕행만이 아니다. 관건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대조되는 이교적 사회와 하느님의 새 사회와의 구별인 것이다. 이 하느님의 새 사회 안에서는 그리스인과 야만인들, 유다인들과 이교인들, 노예들과 자유인들을 분리시키는 낡은 사회적 장벽들이 철저하게 철폐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례를 받은 사람에 대한 실존을 정의하기 위해서 도입된 '새로운 것' (Novum)의 범주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는 낡은 인간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인간이 대치되고 있다(에페 2,1S; 4,24 참조) 낡은 세계 안에로 새로운 것이 돌입한다는 상념은 종말론(終末論)의 주요 상념이다. 또한 낡은 인간이 새로운 인간을 통해서 대치된다는 것은 (새 창조’ (nova creation 동기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예이다. 초대 교회가 이처럼 ‘전’과 ‘지금' 사이를 지극히 예리하게 구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서 발견된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 전환을 이룩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백성을 새로 창조하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 것이 나타났습니다.”(2 고린 5,17) 그리스도는, 하느님 의 성성과 진리가 세계 안에서 궁극적으로 현존하게 된, 절대적으로 이타적이며 새로운 분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이 신봉되고 그의 진리에 기반을 둔 삶이 생활화되는 곳 어디서나, 이 세계 한가운데서 전혀 판이하고 새로운 것 즉, 진리의 거룩한 영역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지배 영역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지배 영역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서 교회 안에 속하게 되는 사람은 내면의 새로운 변화를 맛보게 되는데 이 변화는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사회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당 연한 귀결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화되고 그의 진리 안에서 생활하게 된 사람은 허위와 제 도적 불의 속에서 사는 다른 사회에 속한 사람들과는 예리하게 구별된다. 사람 들이 차츰 진리를 사랑하게 되어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께로 다가오고 자연히 제자 공동체에 가담하게 되지만 이 제자 공동체 역시 이 현실 세계 안에 설립된 것이며 이들 역시 세계 안에 머물게 되므로, 세계는 그들의 허위를 고수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허위를 폭로하는 교회에 대해 증오와 박해로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의 허위들은 개개인이 지닌 사적 허위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허위이기도 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세상은 너희를 한 집안 식구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8-19).


요한복음 역시 세계와 교회 사이에 개재하는 깊은 간격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 간격이 정식화되는 것과 관련해서 제자들의 성성 개념(聖性 槪念)이 등장하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요한 17,17-19). 바로 여기서 교회의 성성 개념은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대조 사회로서의 교회를 나타내는 중심적인 성서 개념임이 드러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서 생겨난 올바르고 정의로운 새로운 것을 기준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일반 사회의 그릇된 구조를 따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질서를 따르지 말고 새 마음을 지니고 새 사람이 되기를 촉구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 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로마12,2).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사람이 되라는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자세의 변화만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악으로 가득 찬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교회는 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지배 영역으로 부상하게 되고 바로 여기서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전환이 드러나게 됨을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새 창조는 교회의 정신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조까지 관통하게 된다. 앞에서 인용한 로마서 본문은 교회의 모습과 정신은 일반 사회의 모습과 정신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도들’이라는 초대 교회의 자기 명칭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는 매우 겸연쩍게 느껴진다. 자신들의 호칭 앞에 ‘성'(聖)자를 붙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 은 자신들을 거룩한 무리로 내세우기보다는 우리가 여기서 '대조 사회’라는 말 로 의미하려는 내용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고 하겠다. 교회는 다른 현실 세계의 사회 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질서를 가진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신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1 베드2,9).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 개개인 의 사적 성성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신자 전체의 성성이다. 곧 이 말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그들 성성의 광채를 만방에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 인용된 서간 내용은 마태 5,14-16의 내용과 거의 부합하고 있다. “여러분은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십시오”(필립 2,i5).


2.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약성서에서 교회가 일반 사회와 날카롭게 대조되는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간주되고 있음이 간과할 수 없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교회의 일반 사회와의 대조 성격이 구조의 성격 규정에서는 어떻게 반영 되는가를 보기로 한다.6)


초대 교회는,종말론적 구원 공동체로서의 새 하느님 백성을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는 인간적 지배권 위에 건설하지 않으려는 예수의 의지를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처음부터 지배권의 문제가 전혀 등장하지 않은 것 은 아니다. 그 좋은 예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청원과 관련된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다(마르 10,35-45). 앞에서 거론된 바 있는 이 본문에서 교회 직무의 기본 구조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교회 안에도 물론 권위(權威,auctoritas)와 전권은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도 하나의 조직체인 이상 당연한 일로 전 제되고 있다. 하지만 교회 직무의 권위는 일반 사회에서 행사되는 ‘지배적 권위’와는 근본적으로 그 차원이 다른 유형의 권위여야 한다.


일반 사회에서 행사되는 지배권은 지배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좌우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 안에서의 권위는 전적으로 봉사로부터 출발, 성장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권력이나 명예 등 자신의 어떠한 이해관계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오로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투신하는 헌신적인 사람들이 ‘봉사적 권위’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권위는 그것이 비록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여기서는 다만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을 증거 할 수 있을 뿐이며, 위급한 시기에 이를 위해서 목숨을 희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 끝에서 많은 사람을 위한 예수의 희생이 거론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어떤 권력 수단도 전혀 동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스라엘 안에서 전개하는 운동을 소직화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증언하고 증거 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제자들도 운동가나 혁명가가 아니라 다만 복음의 증거자들로 만들었다. 그런데도 이러한 예수의 처신은 나름대로의 고유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예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를 듣던 청중들은 그의 말들을 듣고 놀라워하였다. “군중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마태 7,28_29).


예수와 이러한 권위적 처신은 인간을 분리시키고 노예화하는 사회적 여러 세력 즉, 불의한 사회 처지에서 볼 때 그들을 거스르는 격렬한 투쟁의 모습으로 비쳤다.7) 그러나 예수는 빈자들과 병약자와 죄인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자비와 용서를 베풀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구원하고 사죄(赦罪)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행위와 동일시하였다(루가 10,16 참조), 예수를 둘러싸고 생겨난 제자 공동체는 예수에게서 발해지는 힘, 인간을 억압적 세력에서 해방시키는 그 힘에 매료된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여 이룬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는 수직적인 서열이나 일사불란한 위계질서를 지니지 않는다. 예수에게 매료되어 생활하나 평등적인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는 지위를 가지고 다투는 일들이 발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 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예수의 제자 공동체는 분명하게 제기된 이 명제에 따라 그들만의 질서를 이룩해야 한다. 모든 이가 각자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현존한다면 이곳께서는 지배나 억압이 아닌 진정한 형제애와 자유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종 위에 군림하는 주인이거나, 어리석은 자를 위한 스승도 아니며, 미숙한 어린이를 위한 아버지도 아니다. 여기서는 만인이 예외 없이 형제일 뿐이다.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마태23,8). 이 만인 형제 자매성이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의 기본 구조이다. 예수는 세계 종말 시에 인류를 어떤 위계질서를 이룬 가운데 모으려 하지 않고 만민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여 만인을 평등케 하며 만인을 구체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발적 사랑으로 모으려 한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 한계를 모르는 자신의 사랑 때문에 종교와 사회 지배층으로부터 격렬한 반발에 부딪친다. 그들은 예수를 신성 모독자로 낙인찍고 폭력으로 제거하려고 하였다. 예수는 적대자들의 폭력에 맞서서도 폭력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신성 모독자라는 오명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된다. 이것이 예수의 권위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유형과는 다른 권위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유형의 권위를 아연케 하는, 비폭력적이고도 지배를 포기하는 예수의 사랑의 처신에 근거한 예수의 고유한 권위이다. 여러 인종과 민족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 안에도 제도적 직무는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교회의 직무(職務)는 예수의 권위에 입각한 비지배적 봉사적 직무이다. 교회의 직무가 지니는 권위는 지배를 포기하는 무력(無力) 속에서 그 빛을 반한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처형된 분의 권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무력으로부터 발해지는 비지배적 직무는 단순한 내면적 처신이거나 내면적 지향만은 아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일반 사회의 세력 구조나 지배 구조를 반영해서는 안 되는 교회 직무의 구체적 형태이다.


3. 오늘날 교회의 성성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애매한 것으로 상상하거나 현실적인 교회 안에서 신비스럽게 숨겨진 것으로서 기껏해야 교황과 교계 제도 안에서 가시적인 것으로만 생각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거룩한 교회란 실질적이고 가시적인 교회, 즉 역사 안 에서 현존하는 지상의 교회를 뜻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의 기간 문헌인 ‘교회 헌장’(Lumen Gentium )은 이 현실적 교회를 ‘지상의 하느님 나라’라고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 창립자의 은혜를 받아 사랑과 겸손과 극기(克己)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 건설할 사명을 받음으로써 지상에 있어서 천국의 시작과 싹이 된 것이다.”8)


저1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가 ‘구원의 성사’(救援聖事,salutis sacramentum)라고 규정된 것은 교회 성성을 신학적으로 적절하게 파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9) 교회 헌장은 이미 서두에서 교회를 ‘성사’로 규정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사와 비슷하다. 즉 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標識)요 도구(道具)인 것이다.’’10) 교회는 하느님이 인간들과 평화를 이룩하시고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존이다. 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구원이 온 세계를 향하여 퍼져 나간다. 교회는 현대 세계 안에서 ‘장차' 올 세계를 이미 씨앗의 형태로나마 구현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교회를 하느님과 인류, 그리고 인류 상호간의 일치를 나타내는 성사로 파악하는 입장은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원성사’(原聖事)로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실재 자체로서 일치와 평화의 원천이고 교회는 이 일치와 평화의 '가시적 성사’(可視的 聖事)인 것이다. 이 성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상황으로부터 해방시키신 분임은 앞에서 이미 서술된 바 있다.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기초를 둔 자유를 주시는 분, 인간의 영혼과 마음과 양심에서 이 자유를 빼앗고 위축시키고 뿌리째 뽑아 버리는 사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는 분임을우 리는 알고 있다.”11)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행업을 나타내는 성사로서의 가톨릭교회 역시 구체적인 개별 인간과 사회 전체가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12) 그렇다. 교회는 인간을 위한, 인간성을 위한, 지구상의 인류의 미래를 위한, 개발과 진보의 전체 과정을 위한 염려가 곧 교회 사명의 본질적이고 불가분리적인 요소라고 여기고 있다. “현세의 진보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분명히 구별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인간 사회 질서를 개선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13) 교회의 사명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현실 사회에 전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사회를 하느님 나라로 변형(變形, transformatio)시키는 것임이 지난 공의회의 평신도 교령에서도 진술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 성업은 본래 사람들을 구원할 목적을 가졌지만 현세 질서를 개선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전할 뿐 아니라,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를 완성하는 그것이다.”14)


사목 헌장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현세 임무를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를 가지지 못했고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 때문에 자기의 현세 임무를 등한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왜냐하면 신앙 자체가 각자의 사명대로 지상 임무를 이행하도록 그들에게 더욱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15)


그래서 현실 사회의 오류를 시정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 교회 본연의 사명이다.16) 세계 안에서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세력에 저항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필요한 온갖 것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II. 우리 사회의 위기적 현실 상황


우리의 사회 현실은 성화(聖化) 내지 정화(淨化)를 필요로 하고 있다. 사회 각 영역에서 위기를 나타내는 징후들이 간과할 수 없이 노출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우리 사회는 현금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다. 현 노태우 대통령 스스로 우리 사회가 심각한 전반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하고 사회 불안을 야기 시키는 범죄에 대한 전쟁 선포라는 극단적인 처방까지 내어놓은 실정인 것이다. 우리는 이 총체적 위기의 실상이 우리 사회의 주요 영역,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환경 영역에서 어떠한지를 대략적으로라도 파악하고자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사도적 권고「화해와 참회」(Reconciliato et Paenitentia)에서 현대 세계를 특징짓는 불행한 특성으로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국가와 국가들을 충돌과 반목으로 이끄는 '분열’을 들고 있다.17) 그리고 그는 분열을 초래하는 불행한 현상으로 “인간의 기본권 침해, 신앙 자유의 억압, 다양한 형태의 차별 대우,폭력과 테러, 고문과 부당하고 불법적 억압수단의 사용, 경제적 빈곤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경비의 군사비 지출, 세계 자원과 문명 자산의 불공평한 분배” 등의 현상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위기로 치닫게 한 요인들도 이러한 분열적 현상의 만연이라고 볼 수 있다.


1. 우리 사회의 정치 영역에서의 위기는 모든 국민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는 진정한 민주화가 실현되지 못한 현실에서 기인한다고 본다.18)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우리 민족이 일본 식민 치하로부터 해방되었으나 곧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정치 이념을 달리 하는 두 정부가 공존하게 되었다. 북한 공산 정권 이 전체주의적 독재성을 지니며 40년 넘게 존속하고 있음은 널리 주지된 사실이다. 그런데 소위 자유세계에 속하는 남한 정치 체제가 진실로 민주적이라 할 수 없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 분단 상태가 민족 사회의 민주화를 이토록 오래도록 저해한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48년 제1차로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는 자유로운 민주적 절차를 밟아 구성된 정부였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편법과 부정 선거들 을 자행하여 1960년 4.19 학생 의거를 통해서 정권을 포기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어서 헌법 개정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구성된 내각 책임제 하에서의 장면 정권이 박정희 소장에 의해 주도된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다음 해인 1961 년에 붕괴되면서 반세기 이상 지속된 독재적 군사 정권이 지속되기에 이른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권위주의적 장기 집권을 통하여, 전두환 정권은 역시 쿠데타와 강권 정치를 통해서 민주 질서를 억압하였다.


남한에서의 비민주적 정권은 민주화를 갈망하는 여러 계층, 야당 정치인들은 물론 학생과 근로자, 그리고 종교인 및 그밖에 여러 분야의 인사들로부터 끈질긴 저항을 받았고 집권자들은 공권력에 의한 탄압으로 저항 세력을 분쇄하고자 시도하였다. 역대 정권은 반정부적 태도를 반국가적 태도로 규정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인사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나 유신 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장기 집권을 도모했던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이 핵심 측근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종말을 고하였다.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 사태를 야기 시키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 역시 강권 통치에도 불구하고 진행된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통해서 1987년 6월 29일의 국민에 의한 대통령 직접 선거를 골자로 하는 소위 ‘6.29 선언’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권력을 이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헌법 개정을 통하여 현 제6공화국의 노태우 정권은 국민의 직접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정권은 국민에 대한 공약, 즉 재임 중에 국민들로부터 신임 평가를 받겠다는 약속,5공을 정산하겠다는 약속, 광주 문제를 단순한 보상이 아닌 진실로 해결하겠다는 약속, 그리고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준수하지 않고 있어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의 ‘공안정국’이 돌출한 이래 시국사범에 대한 인신 구속, 노동 운동 탄압, 집회 시위의 원천 봉쇄, 냉전 이데올로기의 재등장, 우익 집단 에 의한 테러,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의 야당 정치인은 물론, 김수환 추기경과 윤 공회 대주교를 위시한 종교인들 및 각 계 각 층에 속하는 1300여 명의 민간인 사찰에서 드러나듯이 시민 사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통제력 강화 등의 일련의 조치들을 통해서 민간 정부를 가장한 군사 정권이라는 혐의를 강하게 받고 있는 실정이다. 현 정권이 "깨어 있는 국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들의 지지와 협조 하에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전진의 시대를 열 수도 있었으리라 보는데, 말만 그럴듯할 뿐 실제로는 역사 인식의 편협성, 보신주의, 기회주의, 지도력의 빈곤, 구태의연한 정치 문화 등으로 인해 지극히 비생산적이고 자기 분열적인 정치의 모습만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6.29 선언의 시대 돌파적인 개혁 정신이 그 주체로 알려진 노 정권의 행적 안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어 찌 됐건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19)


남한의 역대 정권이 정경 유착의 자세를 견지한 것도 위기의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갖가지 혜택을 재벌이나 대기업가들에게 베풀어 주고 그들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을 받아왔다는 것이 공지된 사실이다. 이것은 전두환 정권 때의 일해 재단 설립 경위에서 드러나며 제6공화국에 들어 와서 재벌 기업들의 기부금이 증가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국민 대다수가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토지 공개념이나 금융 실명제 법안이 철회되거나 상정된 사 실에서도 정경 유착의 정도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20)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정치적 위기가 존속하고 있는 데에는 집권층에게만 책임 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야당 정치인들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적인 야당 정치인들이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분열하여 각각 출마함으로써 여당 후보보다 전체적으로 더 많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권 교체를 이루는데 실패한 것은 역사적 과오로 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야당 정치인들 역시 현실 사회를 이끌어 갈 만한 비전과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야당의 비민주적 체질도 문제이고 당리당략적 처신으로 말미암아 역사적 전환기에 발해지는 시대적 요청을 수용하여 관철시키는 데 무력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21)


2. 우리 사회의 경제 영역에서의 불평등성은 심각하다.22) 역대 정권은 경제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60년대 이래 국가 정책은 경제 성장 위주의 성격을 지녀왔다. 그런데 결과는 부익부 빈익빈의 상황이 심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소수의 재벌들에 의한 부의 독점으로 말미암아 계층 간의 양극화 현상이 야기되고,노사 간의 갈등 내지 불화 관계가 산업 평화와 국민 경제의 공정한 발전 을 저해하는 사회의 위기 요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경제 정의는 규칙의 공정성을 뜻하는 법적 평등, 불로소득과 재벌 독과점을 규제하는 기회의 평등, 조세 와 정부지출의 재분배 기능을 의미하는 결과의 평등을 말하는데, 이러한 경제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재벌들은 자신들의 기업가적 능력이나 혁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부의 특혜와 보조 그리고 투기와 같은 비정상적 방법에 의해 기업들을 팽창시킨 것이다. 정부의 특혜는 중점 육성 대상 기업에 투자 자금을 마련해 주고 투자 에 수반하는 위험을 부담해 주는 정책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책은 정부로 하여금 기업 투자에 주요 의사 결정에 관여할 수 있게 만들었고 정부와 기업 간의 유착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부의 이러한 재벌 기업에 대한 투자 지원 정책 하에서 투자 지원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안전하고 수익성이 높기 마련이다. “정부가 지정하는 투자 우선 분야에서 대단위 투자가 부실화되면 투자 기업은 거의 확실하게 구제 금융을 받아 낼 수 있기 때문에 기업주로 보면 투자 규모가 크면 클수록 부와 수익은 커지고 투자의 안전성이 보장되어지기 때문에 부자의 수익성과 안전성은 완전히 투자 규모의 크기에 정비례하게 되었던 것이다.”23) 정부의 특혜 조치를 통해서 재벌 기업들은 자본 축적을 가속화시킬 수 있었으며 국민 경제의 모든 분야에 투자를 확대하여 자본과 시장 그리고 고급 인력을 독과점 하다시피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88년도 30대 재벌 기업 집단 둘의 매출 총액 107조 1천 944억 원은 당 해 국민 총생산액 113조 1천 17억 원의 94.8%를 차지할 정도로 비대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재벌 기업에 대한 특혜적 지원과는 대조적으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지속적으로 억압과 통제 조치를 취해 왔다고 지적된다.24) 정부의 이러한 노동자들에 대한 불공평한 정책은 노동자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불공정한 경제 정책 하에서 분배의 불공평과 불평등이 야기되게 마련이다. 출신 지역의 차별, 도시와 농촌 간의 차별, 성별 그리고 학력별 차별은 일반화되어 있는 실정이며 부자와 빈자의 차이는 극심한 상황이 되어 있다.


부유층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할 때에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 부유층들이 부동산 투기와 같은 부도덕한 방법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결과적으로 가옥과 토지 값을 폭등케 함으로써 서민 및 하류 기층민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25) 1988년도 한 해에만 토지 가격 인상을 통해서 발생한 불로소득이 국민 총생산액의 54,9%에 해당하는 67조 9천억 원에 달하여서 우리나라 피고용자 급여 총액의 135.4%에 맞먹고 있으며 제조 업 국내 총생산의 171.2%에 해당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이 액수는 우리나라 중앙 정부 총세출액의 303.1%에 해당하는 액수이기도 하다는 것이 다.26) 그래서 주택보급율이 1965년에 81.3%였으나 1989년, 말에는 53.4%로 하락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대기업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기업 확장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저소득층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사회 복지 활동에 무관심한 것도 사회 갈등과 불안이 증대된 한 가지 요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우리 사회는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함께 만연되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사회 도덕성이 상실되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다. 올바르게 살아야만 한다는 가치관이 거의 붕괴되고 수단 방법에 구애받지 않고 풍요하게 살아야한다는 철저한 현재 위주의 물질주의의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실정이다.


현세 위주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확산되면서 도덕성을 상실한 듯. 몰염치한 생활양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땅과 아파트 투기를 비롯해서 모조품 제조나 유통 구조를 악용한 폭리 취득 등 온갖 부도덕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개탄스러운 작태가 대소규모의 형태로 전국에서 발생하고 있다.27)


이러한 극도의 .물질 만능주의가 갖가지 불법, 편법, 탈법을 조장하여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붕괴시키면서 생명 경시(生命 輕視) 풍조를 조장하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오늘날 온 국민을 전율케 하는 범죄 행위들,이를테면 안신 매 매,유괴 살인, 폭력과 강도 그리고 엽기적 살인 행위들이 모두 생명 경시 풍조를 반영한다. 이와 같은 심각한 생명 경시 풍조가 역대 정권에 의한 가혹한 인권 탄압과 재벌들에 의한 근로자들의 부당한 처우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8)


물질 만능주의가 천민적 향락주의 내지 오락주의를 조장한다고 지적해야 할 것이다. 투기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단시간 내에 엄청난 부를 축적한 계층들이 극도의 낭비와 과소비를 유발하고 더 나아가 퇴폐와 향락에 젖어들게 된다.29) 그리고 급증하는 각종 폭력과 성폭행 그리고 마약사범과 같은 범죄들이 포악화되고 조직화되며, 연쇄화 되고 있는 사실은 물질주의에 기인한 향락주의와 상관한다고 볼 수 있다·


4. 우리 사회의 ‘생태계 위기’는 심각하다고 평가되고 있다.30) 인간 생활의 터전으로서의 우리의 환경이 1960년대 이래 급격하게 파괴되어 생태계 위기를 온 국민이 맞고 있는 것이다. ‘금수강산’이라고 해서 아름다움을 자랑해 온 우리의 환경이 불과 20~30년 사이에 거의 치유 불가능 할 정도로 훼손되면서 국민의 건강이 크게 위협당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우리의 환경이 이처럼 심각하게 오염된 것은 그동안 정부 당국이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을 수행하면서 세계적으로 두통거리였던 공해 산업들을 받아들이고 산업화.에 따른 환경오염의 피해에 대해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고 분석된다. 대규모 공장들로부터 공해를 유발하는 유독성 가스와 매연 그리고 분진(粉塵)이 대기 속으로 대거 유출되고 각종 산업 폐기물이 대량 방출되면서 수질과 토양이 심각한 정도로 오염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동안 점차적으로 가속화되는 사회의 산업화에 의한 대기(大氣)와 수질(水質) 그리고 토양(土壤) 오염 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환경이 극도로 황폐되어 감을 모두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도시나 공업 단지의 대기 오염도는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하천이나 호수 및 지하수 그리고 해양을 가릴 것 없이 회복이 불가능 할 정도로 심하게 오염되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토양 오염 문제도 늘어나는 산업 폐기물과 생활 쓰레기로 인하여 우려할 만한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분석 되고 있다.


‘한국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위원장 박정일 주교 명의로 1990년 9월 7일자 로 발표한 성명서 ‘오늘의 사회 현실을 우려하는 우리의 호소’에는 자연 환경의 오염을 심각히 우려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진술이 포함되어 있다. "자연 세계는 조물주 하느님께서 인류 공동체가 생을 영위하도록 마련하여 주신 공동 유산이다. 우리는 이 공동 유산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 건전한 생활을 도모하고 나아가서 후손에게 넘겨주어야 할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런데 전 세계는 물론 오늘날 우리 한국의 자연도 근년에 와서 극도로 오염이 심해져서 사람들의 건강한 생활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31)


5. 우리 사회가 현재 겪고 있는 총체적 난국의 배경에는 무신론적 성격을 띤 인간 중심적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려고 한다. 산업화된 현실 사회를 주도 하는 사상과 생활양식은 인간과 자연 세계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을 도외시 하고 인간의 지적 활동의 산물인 과학 기술의 발전에 전폭적 신뢰를 보이며 자유롭고 풍요한 세계 건설을 꾀하고 있는 한에서 무신론적 인간중심적 사고와 행동 양식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무전제적 주체(無前提的 主體), 인간에 의해 성취되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한 이상적 세계 건설을 꾀하는 입장은 ‘발전이데올로기’로도 지칭될 수 있겠다.32)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을 통한 사회 발전을 꾀하려는 입장이 선호되고 있다. 우리 사회 안에서 정책 수립과 행정 업무를 주도하는 기술 관료들이 대체적으로 이러한 과학기술주의 내지 발전이데올로기를 신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집권층은 기술 관료들의 협조를 받으며 시민적 자유를 제약하면서까지 양적 성장 위주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현상이 발견되는 것 이다·


우리는 과학 기술이 인류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공헌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이 자연 재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 했지만,자연의 수많은 위험들은 제거되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영양 섭취를 보장받고 있다. 새로운 운송과 교역 수단들이 식량자원, 원자재, 노동력, 기술 등의 교환을 용이하게 하여 인류로 하여금 가난으로부터의 자유와 더불어 품위 있는 생활을 큰 무리 없이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33)


그러나 과학 기술이 인간의 개인적이고 집단적 삶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산업 사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야기 시키는데 이용되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술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지구와 인간을 지배할 힘을 갖는다. 이 결과로서, 여태까지는 알지 못했던 형태의 불평등이 지식을 소유한 자들과 단순한 기술 이용자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기술력은 경제력에 연결되고 또 경제력의 집중에로 이어진다. 그러한 까닭으로, 한 국가 내에서 그리고 국가들 사이에 종속관계가 증대되어 왔으며, 이는 지난 20년 동안 새로운 해방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어 왔다.”34) 인류는 현대에 와서 이전 시대에 상상할 수 없었던 폭정의 형태와 전체주의 체제의 등장을 목격하고 직접 체험하고 있다.35)


우리는 현대 세계를 특징짓는 극도에 다다른 불의와 불평등의 요소들아 인간 중심적 사고와 행동 양식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 인간 중심적 발전 이데올로기의 목적 달성을 위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악화 일로에 있는 불의 상황, 환경오염과 핵무기에 의한 위협에 직면해서 우주의 총체적 재난을 해결하기에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36) 인간 중심적 사고와 생활양식이 개별 인간의 불가침적 존엄성을 무시하고 자연 환경을 무절제하게 파괴하는 한에서,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만인이 자연과의 친교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생활하게 되는 평화가 이룩된 세계 건설이라는 본래의 목표를 보지 못하는 맹목(盲目)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무전제적 절대 주체로 파악하면서도 인권을 경시하여 착취와 예속의 구조를 창출하는 여하한 형태의 인간 중심적 전체주의를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37)


III. 사회 성화를 위한 교회의 과업


교회가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 간의 일치를 나타내는 표지와 도구로 서의 성사인 한에서, 한국 교회는 민족 사회 안에서 일치를 나타내는 표지이자 도구이어야 할 것이다.38) 실제로 한국 교회는 일차적으로 한민족의 운명과 깊이 결합되어 있으며, 이 민족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 민족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가 바로 자신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민족이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구원에로 나아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성성은 ‘육화된 성성’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사회 안에서 충실하게 재현하는 만큼 구현될 것이다.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 안에서 수행해야 할 성화 사명은 막중하다. 교회는 민족 사회의 성화를 위해서 국민이 열망하는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정의, 사회적 평화 그리고 자연 보호를 구현하는 사명에 헌신적으로 투신해야 할 것이다.


1. 한국 교회는 민족 사회의 진정한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서 헌신적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민족 사회 안에서의 평화가 이룩된 일치된 사회는 진정한 민주화의 실현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누구나 신분, 직업, 학력, 출신지나 성과 무관하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기본권이 선언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중될 수 있는 풍토 조성을 위해 교회는 투신해야 할 것이다. 이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종교와 집회, 결사와 언론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도록 교회는 여건 조성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정의 구현을 위해 계속 진력해야 할 것이다. 리 사회는 지난 십 수 년간 이룩한 경제 성장에 힘입어 전체적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될 가능성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다수의 근로자와 농민 계층은 상대적 빈곤감을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하게 느끼며 생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부조리 현상이 감소되지 않고 오히려 심화되는 양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민 다수에 속하는 경제적 소외 계층이 사회 현실에 불만을 품고 사회 변혁을 위해 투신할 가능성이 증대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에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과 부를 장악한 계층들이 강경한 자세로 기득권을 그대로 계속 유지하고자 꾀한다면 우리 민족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 상태로 빠져들 것이다. 여기서 교회가 상반된 이해 집단들이 허심탄회한 자세로 대화에 임하여 분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민족의 일치를 드러내는 표지와 도구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사계의 전문가들로부터 강조되는 ‘분배의 정의’가 구현될 수 있는 여건 조성에도 교회가 기여할 수 있는 방도가 많으리라고 보고 있다.


한국 교회는 장래에도 존재할 소외 계층과 삶을 함께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분배 정의를 통한 생활수준 격차 노력이 범국민적으로 전개 된다 하더라도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소외 계층이 민족 사회 안에서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은 비현실적 기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 우리 사회에는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동포들이 도처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지금까지 보여 온 바와 같은 열성으로 민족 사회의 소외된 계층을 위한 사화 복지 활동을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의 정신에 부응하여 민족의 소외 계층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란 자신들과 운명을 함께하는 공동체임을 체험토록 하여야 할 것이다. 소외 계층과의 일치를 통해서 교회가 진실로 하느님과 민족의 일치 그리고 민족 상호간의 일치를 위한 표지로서 믿을 만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와 신자 개개인들은 사회적 도덕 기반이 해체되고 말세적 혼돈 상태가 날로 확산되는 현실 상황에 직면하여 먼저 강한 책임 의식을 느껴야 할 것이다. 개신교 신자들까지 포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래서 ‘성도’(聖徒)라고 자칭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남한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1000만 명에 이르고 있고, 좁은 땅에 미처 정확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소 규모의 교회들이 도처에 건립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도덕 부재의 파국적인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교회와 신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성화되어야 하겠다. 사실상, 하느님과 인류 그리고 인류 상호간의 일치를 나타내는 표징으로서의 그리스도 교회가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상호 대립하고 있으며, 집단 이기주의(集團利己主義)의 표본처럼 되다시피 한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진정으로 수행하였다면 이러한 참담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고 여긴다. 지금부터라도 교회 당국과 신자 개개인들이 개인적이고 집단적 이기주의를 탈피하고 진심으로 겸허한 자세로써 ‘위타존재’(爲他存在)이신 하느님 앞에서 과실을 시인하고 회개하면서 이웃과 사회를 위한 공동선 실현에 몰아적으로 적극 참여한다면, 우리 사회도 교회를 뒤따라서 참회하고 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차제에 교회의 일반신도들의 협의회인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민족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개하는 ‘신뢰 회복 운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네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술에 착안하여 ‘내 탓이오'를 표어로 내걸고 자성(自省)의 태도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신뢰 회복 운동’은 1990년 9월 24일자로 발표한 취지문을 통해 교회 안의 화해와 일치, 윤리 질서 준수(부모?어른 공경하기, 미풍양속과 약속 준수, 거짓말 안하기),공중 질서 지키기(공중도덕 지키기, 상거래 질서 확립),교통질서 지키기, 자연 보호, 공해 방지, 언어 순화(조용히 말하고 고운 말 쓰기),그리고 전례(典禮) 분위기 조성(성당에 오면 앞좌석에 앉기 등) 등의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자 다짐하고 있다.39) 이러한 교회와 신자들의 회개를 수반하면서 전개되는 신뢰 회복 운동을 통하여 사회의 도덕적 위기가 조속히 극복될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한국 교회와 신자들은 심각한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다른 종교 내지 사회 집단 그리고 정부 당국과 연대적 공동 협력을 등한히 하지 말 것이며 거기서 더 나아가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연의 소유주일 수 없다. 인간 역시 자연 세계와 함께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자연 세계가 인간의 소유물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물로서의 자연 세계가 하느님께 속하지 자신이 창조물인 인간에게 속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관리를 위탁한 것으로서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관리해야 할 실재이다. “인간은 자신과 같이 창조주이신 하느님 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물질 자연을 대하여야 하며, 자연의 ‘현명하고 기품 있는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40) 자연 세계는 더 이상 인간이 착취하고 파괴하며, 정복해야 할 세계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존 성취에 앞서 소여되어 있는 자연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물론,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류는 이 질서를 탐구 하고, 질서를 보전하는 한계 내 에서 이를 활용하도록 소명되었다. “그들(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인간들과 함께 현대 문명과 문화, 과학과 기술, 기타 인간의 사상과 활동의 여러 분야에서, 좋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면 무엇이든 이를 계발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41)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과학 기술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 현실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어떤 ‘실락원’으로 되돌아가려는 부질없는 소망을 가지려 하기보다 과학 기술의 부정적 귀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먼저 사고와 생활양식의 전환, 즉 ‘회개’를 철저히 이룩하고 극도로 파괴된 자연 세계를 회복시키는 일에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42)


교회는 창조물의 존폐와 관련된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에 입각한 기본 입장을 정립하고 구체적 대응책을 강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이 다른 집단들이 취하는 기본 입장과 제공하는 대응책들이 교회의 입장과 같은 공통성과 상위성을 정확히 식별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연 보호를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연대적 협력을 통해서만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차원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당국과 신자들은 자연 보호 운동을 전개하는데데 있어 다른 집단과의 공동 협력을 적극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와 신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일상적 삶 속에서의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구체적인 행동으로 창조 세계 보호에 헌신적으로 투신하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사회의 성화의 구현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신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환경 영역에서의 민족적 중대 문제들을 단독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민족 사회 안에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정의 구현, 사회적 정화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진실로 염원하는 많은 개인과 집단들이 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일치된 자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긴밀한 결속을 아직 이룩하지 않은 이러한 선의의 개인이나 단체가 형제적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민족의 염원을 공동으로 실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특히 개신교와 같은 갈라져 나간 형제 교파들은 물론, 불교나 유교를 위시한 다른 종교들과의 공동 노력을 통하여 이 땅에서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정화되고 성화된 사회가 건설될 수 있도록 협동하는 분위기 조성에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2. 한국 교회가 민족 사회의 일치와 화해의 실현을 위해 투신하는 성사적 표지인 한에서 스스로가 민주화되고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외부 사회에 대해서 민주화와 정의의 구현을 촉구하면서 스스로는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한 체제를 계속 고수할 때에 교회는 위선적 집단으로 보일 것이며, 지상의 하느님 나라로서의 정체성이 의문시될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유와 평등을 생활화하는 구조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외적 제도(制度)와 규범(規範) 그리고 기구(機構) 등이 앞으로도 계속 존속된다 하더라도, 내적 성격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 따라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제도적 요소들은 더 이상 하느님의 백성 위에서 군림하는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지 말고, 백성을 섬기는 봉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우선적으로 지역 교회에서 절대 통치권을 행사하는 교구장 주교 및 모든 주교들은 하느님 백성의 소리가 존중되는 (민심은 천심: Vox Populi Vox Dei) 투명한 절차를 밟아 선임되어 봉사적 자세로 직무를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IV. 맺는 말


앞에서 성화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민족의 현실 사회 속에서 지상의 하느님 나라이자 성사로서의 교회가 수행해야 할 사명에 관하여 논하였다.


교회는 우리 사회의 암울하고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민족 사회의 정치적 분열을 민주적 일치에로, 경제적 불의를 분배 정의에로, 사회적 부조리와 부도덕성을 도덕적 쇄신과 정화에로, 생태학적 파괴를 천지인(天地人)의 화합에 로 이끄는 일치와 화해 과업에 헌신적으로 투신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로서의 교회는 하느님과 자연, 그리고 인간이 각기 자유로운 가운데 상호 친교를 이룩하게 되는 공동체적 실재이다. 총체적 위기를 맞는 현실 사회 속에서 이와 대조되는 신선한 공동체의 구현만큼 강력한 대응책이란 없을 것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소외된 사회 현실을 극복하려는 어떠한 유형의 세력보다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현실사회 속에서 일차적으로 성화되어야 할 당사자는 다른 누구 아닌 교회 자체요 그리스도인들 자신이다. 오늘날의 현실적 그리스도 교회가 진실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교회 스스로가 일치를 상실하고 지리멸렬상을 드러내고 있으며, 교회와 신자 개개인들 역시 개인적이고 집단적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신자들 스스로도 의인이면서 죄인들이고,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의 집단이기에 제일 먼저 회개하고 성화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거룩하면서도 항상 정화(淨化)되어야 하겠기에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을 계속하는 것이다.”43) 교회가 진정으로 회개를 하고 정화될 때에, 사회도 비로소 교회를 따라서 참회 하고 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에 의해 완성된 형태로 실현 될 하느님 나라를 오늘 여기서 앞당겨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밤이 거의 새어 날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 13,12).


1) 교회의 성성(聖性)에 관하여 졸문, "하느님 나라로서의 교회”,「한국 교회와 신학 - 전환기의 신앙 이해」,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88, 63-141면; J. 융만, “거룩한 교회”,「輕望」10(1970.9), 27-34면; B. 헤링,"교회 내의 성덕",「展望」11(1970.12) 117?124면 ; B. Haring, Ihr seid das Salz der Erde. Gedanken uiber die Berufung der Christen zur Heiligkeit., Miinchen 1982 참조.

2) 졸문 "전환기의 신앙 이해",「그리스도와 구원-전환기의 신앙 이해」,서울 성바오로출판사,1981, 220-227면 참조.

3) 교회 헌장 39항,

4) 교회 헌장 39항 이하 참조.

5) 이하 내용에 관하여 주로 졸문, "하느님 나라로서의 교회”,108-124면 참조.

6) 이하 내용에 관하여 주로 졸문, 위의 글,124-139면 참조.

7) 이에 대하여 졸문,"Liberative Elements in Christian Salvationin :「INTER-RELIGIO」17(Summer), pp. 2-23 참조.

8) 교회 헌장 5항.

9) 교회 헌장 48항; 사목 헌장 45항; 졸문, 전환기의 교회 이해,238_252면 참조.

10) 교회 헌장1항; 그밖에 교회 헌장9,59항; 전례 헌장5,26항; 사목헌장42항; 선교 교령 1,5항 참조.

1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인간의 구원자」,성염 역,12항. ■

12) 이에 관하여 주로 졸문, "현대 세계와 가톨릭교회의 사명”,「續, 그리스도와 구원-전환기의 신앙 이해」,서울(성바오로출판사) 1984,243?248면 참조.

13) 사복 헌장 39항.

14) 평신도 교령 5항.


15) 사목 헌장 43항.


16) 평신도 교령 7항 참조.

1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화해와 참회」,이병호 역, 1985, 2항 참조.

18) 우리 사회의 정치적 상황 파악과 관련하여 한상진, "한국 민주화, 무엇이 문제인기". 이론과 전략의 과제”,「司牧」132(1990, 1), 24?42면; 김정수, "한국천주교회 복음 선교의 토착화 대책과 전망”,「司牧j 139(1990. 8), 91-95면; 이원규, “도덕성의 위기를 알리는 지표들”,「基督敎思想」383(1990. 11), 52-64, 여기서 55-58면 참조.

19) 한상진,위의 글, 34면.

20) 이원규,앞의 글,56면 참조,

21) 한상진,앞의 글, 34면 참조.

22) 이원규, 앞의 글,58-60면; 한상진,위의 글,30,35면; 박현채,"한국 경제의 현실과 전망”,「基督敎思想」344(1987. 8),33-41면 참조.

23) 박영호,"불공정한 경제 정책과 위기적 분배 구조”,「基督敎思想」372(1989. 12),76·

24:) 조승혁,"노사 공동체의 진통과 활로”,「基督敎思想j 372(1989. 12),34-50면 참조.

25) “우리나라의 부자들은 토지 투기를 하여 하루아침에 일확천금의 불로소득을 얻고, 은행을 지하 금고로 이용하기도 한다. 금융 자산과 토지의 대부분을 갖고 거기서 엄청난 소득을 올리면서도, 거기에 상응하는 세금을 물지 않는다. 조세제도의 소득재분배 기능은 거의 도외시되고 있다. 3억짜리 아파트 재산세가 중형 자동차 세금만도 못하고, 중산층 아파트 분양에서까지 차액을 거둬 가는 정부가 단번에 수십억 원의 개발 이익이 생기는 골프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있다. 1989년 30대 재벌 그룹 매출액이 GNP의 80%를 올리고 있으나 이들로부터 거둬들인 법인세는 불과 전체의 31%에 머물러 조세 정책이 지속적으로 가진 자들의 편에서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원규,앞의 글,58면 이하.

26) 박영호,앞의 글,79면 참조.

27) 이원규,앞의 글 61면 참조.

28) 이원규,앞의 글,61면 참조.

29) 오늘의 사치 향락에 관한「司牧」138(1990. 7)특집 내용: 이덕승,"과소비 향락의 현황과 문제점”, 앞의 잡지, 4·-18면; 이성섭,"호화사치 풍조는 불로소득에서 나온 다”,같은 잡지,19-34면; 이원규, 앞의 글,62면 이하 참조.

30)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편,「모든 피조물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평화(1990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담화문 해설, 환경 문제 자료집一두번째」,서울(한국 천주교 정의 평화위원회) 1990,25-34면; 김상종, “한국 환경오염의 현황과 문제점”,「司牧」 139(1990. 8) 6-17면; 황상익, "환경오염과 국민 건강”같은 잡지, 47?63면 참조.

31) 천주교 서울대교구 선교사목국 간,「서울 주보」667(1990. 9. 30), 5면

32) 교황청 신앙교리성,"그리스도인외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자유와 해방」, 강대 인 역,7항 참조.

33) 교황청 신앙교리성, 위의 훈령, 7항.

34) 같은 훈령, 12항.

35) 같은 훈령,14-17항 참조.

36) 같은 훈령,40항 참조.

.37) 같은 훈령, 40 ? 42항 참조.


38) 이 하내용에 관하여 졸문, “200 주년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續. 그리스도와 구원」, 213?230면; “2000년대의 한국 교회”,「가톨릭 신학과 사상」2(1989. 12),52-81면; "분단 공동체 교회의 종말론적 사명,「司牧」131(1989. 12),46-64면 참조.

39)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 “내 탓이오. 신뢰 회복”,1990. 9. 24.

40) 교황청 신앙교리성, 앞의 훈령, 34항;「인간의 구원자」, 15항; 사목 헌장69항 참조.

4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생명을 주시는 주님- Dominum et Vivificantem」, 이병호 역, 60항.

42)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편, 앞의 담화문 해설, 13항 참조.

43) 교회 헌장8항; 그 밖에 같은 헌장15항; 사목헌장21항; 일치 교령 4항 졸문,“선물과 과제로서의 화해와 참회”,「續. 그리스도와 구원」, 261-264면. 참조.